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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제 7장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우주론

이윤진이카루스 2010. 8. 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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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우주론

 

150년 전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프러시아의 지방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80세를 일기로, 죽었다. 여러 해 동안 그의 은퇴는 끝났고,? 그의 친구들은 조용한 장례식을 치르려했다. 그러나 이 기능공의 아들은 왕처럼 땅에 묻혔다. 그의 죽음이 마을에 알려지자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와 그를 보겠다는 요구를 했다. 장례식 날 마을의 생활은 정지되었다. 모든 교회의 종이 울리는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이 관을 따라갔다. 이런 일은 전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일어난 적이 없다고 연대기 편찬자들은 말한다.?

이 놀라운 대중의 감정 고조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 감정 고조는 위대한 철학자와 훌륭한 사람으로서 칸트의 명성에만 기인했을까? 그 감정 고조에는 칸트의 명성 이상의 것이 있었던 것으로 나에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1804년, 프레더릭 윌리엄(Frederick William)의 절대 군주제 하에서, 칸트를 위하여 울린 저 종들은 미국과 프랑스 혁명의 - 1776년과 1789년의 사상 - 메아리를 싣고 있었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의 동포들에게 칸트는 이 사상의? 화신(化身)이 되었다고 나는 제안한다. 칸트의 동포들은 인권의, 법 앞에서의 평등의, 세계 시민의, 지구상의 평화의, 그리고 아마도 매우 중요하게, 지식을 통한 해방의? 스승에게 감사를 표하러 왔다.

 

? 칸트가 죽기 6년 전, 푀르시케(Pörschke)는 칸트의 은퇴 생활 방식 때문에, 칸트는 심지어 쾨니히스베르크에서도 잊히고 있었다고 보고한다 (1790년 7월 2일자 피히테에 보낸 그의 편지 참조).

? C.E.A.Ch. 바지안스키(Wasianski), 만년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in seinen letzten Lebensjahren) (임마누엘 칸트 3권, 쾨니히스베르크, 니콜로비우스[bei Nicolovius]. 1804). ‘대중 신문과 특별 출판물이 칸트의 장례식을 세세히 알렸다.’

? 1776년과 1789년의 사상에 대한 칸트의 공감은 잘 알려져 있었는데, 그 까닭은 그가 공개적으로 그 사상들을 표현하곤 했기 때문이다. (R. B. 야흐만[Jachman], 편지 속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geschildert in Briefen] - 임마누엘 칸트, 2권, 쾨니히스베르크, 니콜로비우스, 1804; 8번째 편지; 1902년도 판본의 54쪽 이하 - 칸트가 그린[Green]을 처음 만났을 때 마더바이[Motherby]의 목격담 참조).

? 거의 빈곤에서 명성과 비교적 안락한 환경으로 칸트가 정당하게 신분 상승을 한 것이 유럽대륙에서 독학을 통한 해방이라는 개념을 낳는 데에 도움을 주었고, ‘자수성가한 사람’은 교양 없는 벼락부자를 의미하는 영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형태이기 때문에 나는 ‘매우 중요하게’라고 말한다. 교육을 받은 사람이 영국에서는 상류 계급인 반면, 유럽대륙에서는 오랫동안 중산층이었다.

칸트 사후 150주기 전야에 방송된 것이다. 1954년 청취자(The Listener), 51호에 ‘임마누엘 칸트: 계몽주의 철학자’라는 제목으로 (주석 없이) 최초로 실렸다.

 

1. 칸트와 계몽주의

이 사상의 대부분은 1733년에 발간된 볼테르(Voltaire)의 영국 민족에 관한 편지들(Letters Concerning the English Nation)을 통하여 영국으로부터 유럽대륙에 도착하였다. 이 책에서 볼테르는 영국의 입헌 정부를 유럽 대륙의 절대 군주제와 대조하였다; 영국적 종교적 관용과 로마 교회의 태도를; 그리고 뉴튼의 우주론 및 로크(Locke)의 분석적 경험론이 지닌 설명력과 데카르트(Descartes)의 독단론을. 볼테르의 저서는 불태워졌다; 그러나 그 책의 간행은 한 가지 철학 운동의 - 그 운동이 지닌 특유의 지적(知的) 공격성 분위기는 영국에서 거의 이해되지 않았는데, 영국에는 그런 운동이 일어날 원인이 없었다 - 시작을 알린다.

칸트의 사망 후 60년 이 동일한 영국적 사상이 영국인들에게 ‘천박하고 허세적인 주지주의’로서 제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계몽주의’라는 영어 단어는, 당시 볼테르에 의하여 시작된 운동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이 천박함과 허세의 의미에 의하여 아직도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적어도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계몽주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그런 의미가 없음은 내가 부언할 필요가 없다.

칸트는 계몽주의를 신뢰했다. 그는 계몽주의의 마지막 위대한 옹호자였다. 나는 이것이 일반적인 견해가 아니라고 이해한다. 내가 칸트를 계몽주의 옹호자로서 보는 반면, 칸트는 계몽주의를 파괴한 학파의 - 피히테(Fichte), 쉘링(Schelling), 그리고 헤겔의 낭만주의 학파 - 창시자로서 더 흔히 간주된다. 나는 이 두 가지 해석이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피히테는, 그리고 나중에 헤겔은, 칸트를 자신들의 학파의 창시자로서 내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칸트는 오래 살아서 자신을 칸트의 후계자요 상속인으로서 선포했던 피히테의 끈질긴 접근을 거부했다.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피히테에 대한 공식적 선언(A Public Declaration Concerning Fichte)?에서 칸트는 이렇게 썼다: ‘하느님이시어 우리의 친구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그 까닭은 호의를 말하는 반면 우리의 파멸을 꾸미는 부정하고 배신적인 소위 친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 시민인 칸트가, 낭만주의와 감상적인 열정과 광신(Schwἄrmerei)에 대한 자신의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적인 낭만파에 대한 봉사에 성공적으로 휩쓸리게 된 것은 자신이 더 이상 항의를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죽음 이후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탤릭체 몇몇은 내가 표시했다): ‘계몽... 2. 때때로 18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이나, 전통과 권위 및 기타 등등에 대한 부당한 경멸인 천박하고 허세적인 주지주의라는 함축된 비난에 그 단어가 프랑스 철학자들과 연관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다른 철학자들의 정신이나 목표를 가리키는 데에 [독일어 Aufklἅrung, Aufklἅrerei를 모방하여] 사용된다.’ ‘Aufklἅrung’이 프랑스어 ‘éclaircissement’의 번역임을, 그래서 'Aufklἅrerei' (혹은 'Aufklἅricht’)가 계몽주의의 적(敵)인 낭만주의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져서 독점적으로 사용되는 모멸적인 신조어였던 반면, ‘Aufklἅrung’이 독일어에서 이 추가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언급하지 않는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J. H. 스털링(Stirling)의 헤겔의 신비(The Secret of Hegel), 1865년, 그리고 케어드(Caird)의 칸트의 철학(The Philosophy of Kant), 1889년을 2의 의미에서 그 단어의 사용자로서 인용한다.

? 이 선언의 날짜는 1799년이다. WWC (다시 말해서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er]외 여러 사람들이 편집한 임마누엘 칸트 전집[Immanuel Kant's Werke]) 8권 515 쪽 이하와,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12장 주석 58 (4판 1962년 2권 313쪽) 참조.

 

칸트 자신은 계몽주의 사상을 어떻게 기술(記述)하는지 살펴보자:?

계몽은 스스로 부과한(self-imposed) 보호 상태... 외부의 지도 없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 상태가 지성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을 지도자의 도움 없이 사용하는 용기나 결심의 부족에 기인한다면 그런 보호 상태를 나는 ’스스로 부과한‘이라고 부른다. Sapere aude! 당신 자신의 지성을 과감하게 사용하라! 이것이 계몽의 구호이다.

칸트는 여기서 매우 개인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역사의 일부이다. 빈곤에 가까운 환경 속과, 경건주의의 - 청교도주의의 엄격한 독일식 - 좁은 관점 속에서 성장하여, 그의 삶은 지식을 통한 해방의 역사였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보호시절인 자신이 ‘유년기의 노예상태’라고 불렀던 것?을 공포로 회상하곤 했다. 사람들은 그의 전체 삶을 지배한 주제는 정신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칸트가 본 뉴튼의 우주론

이 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은 뉴튼의 이론이 수행했는데, 그 이론은 볼테르에 의하여 유럽 대륙에 알려졌다. 코페르니쿠스와 뉴튼의 우주론은 칸트의 지적(知的) 삶에 강력하고도 자극적인 영감이 되었다. 칸트의 첫 번째 주요 저서?인 천체론(The Theory of Heavens)은 흥미로운 부제를 달고 있다: 뉴튼의 원리에 따라 다루어진, 우주의 구성과 역학적 기원에 관한 논문(An Essay on the Constitution and the Mechanical Origin of the Universe, Treated According to Newtonian Principles). 그 책은 우주론과 우주 기원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공헌의 하나이다. 그 책은 지금 태양계의 기원에 대한 ‘칸트-라플라스 가설’이라고 불리는 것뿐만 아니라, 진스(Jeans)를 앞질러, (5년 앞서 토마스 라이트[Thomas Wright]가 성운계로서 해석하였던) ‘은하수’에 대한 이 가설의 적용을 또한 최초로 공식화하여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칸트가 그 성운을 다른 ‘은하수들’로서 - 우리의 은하수와 유사한 멀리 떨어진 성운계 - 확인함으로써 초월된다.

칸트를 자신의 인식론으로, 그리고 자신의 저서 순수 이성 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으로 이끌었던 것은, 자신의 편지 중 한 편지??에서 칸트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우주론적인 문제였다. 그는, 시공 모두에 관한,

 

? 계몽이란 무엇인가 (1785); WWC, 4권 169쪽.

? T. G. 폰 히펠(von Hippel)의 전기 (고타[Gotha], 1801년 78쪽 이하) 참조. 또한 (경건파 프레더릭 대학에서 칸트의 동창생 한 명인) D. 룬켄(Ruhnken)이 칸트에게 보낸 라틴어 편지에서 그들을 교육시킨 ‘광신도들의 엄격하지만 유감스럽지 않은 규율’에 대하여 룬켄이 말하는 것 참조.

? 1755년에 발간. 책의 완전한 주제는 [천체의]의 일반적인 자연사 및 천체의 이론(General Natural History [of the Heavens] and Theory of the Heavens)으로 아마도 번역될 것이다. ‘일반적인 자연사(General Natural History)’라는 말은 그 저술이 항성계의 진화에 기여함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된다.

?? 1798년 9월 21일 C. 가르베(Garve)에게 보낸 편지. ‘나의 출발점은 신(神)의 존재를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이었다: “세상에는 시작이 있는가: 세상에는 시작이 없는가”, 기타 등등에서 네 번째 이율배반까지...’ (여기서 칸트가, 명백하게, 자신의 세 번째 이율배반과 네 번째 이율배반을 혼동하는 장소가 나타난다.) ‘처음으로 나의 독단적 수면으로부터 나를 깨워서.... 외견상 보이는 이성의 자체와의 모순이라는 치욕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성 비판으로 나를 몰고 간 것은 이 [이율배반들]이었다.’

 

우주의 유한성이나 무한성이라는 (모든 우주론자들이 직면해야 하는) 난제에 관심을 가졌다. 우주에 관한 한 그 후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매혹적인 해답이 유한하고 동시에 한계가 없기도 한 세계라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이 해답은 칸트의 난제에 바로 파고들지만, 칸트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이용 가능했던 수단들보다 더 강력한 수단을 사용한다. 시간에 관한 한 칸트가 지녔던 난제들에 대하여 아이슈타인의 해답과 동등하게 유망한 해답은 지금까지 제시된 적이 없다.

 

3. 순수 이성 비판과 우주론적 문제

칸트는 우주에는 시간의 시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생각할 때 자신의 저서 순수 이성 비판의 문제들을 떠올렸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자신이 이 두 가지 가능성 모두에 대하여 유효하게 보이는 증명을 제시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당황했다. 그 두 가지 증명은?? 흥미롭다; 그 두 가지 증명을 이해하는 데는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그 증명들은 길지도 않고, 이해하기가 어렵지도 않다.

첫 번째 증명에 관해서 해(年)의 (혹은 날[日]이나 동등한 시간의 유한한 간격의) 무한한 연속이라는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시작한다. 그런 해(年)의 무한한 연속은 틀림없이 계속되어 끝나지 않는 연속이다. 그 연속은 완료될 수 없다: 해(年)의 완료되거나 경과한 무한은 관계에서 모순이다. 이제 자신의 첫 번째 증명에서 칸트는 세상에는 시간의 시작이 없다면, 이 현재 순간에, 해(年)의 무한한 숫자가 틀림없이 경과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틀림없이 시간의 시작이 있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이것으로 첫 번째 증명이 종결된다.

두 번째 증거에 대하여 완전히 빈 시간이라는 - 세상이 있기 전의 시간 -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우리는 시작한다. 그런 텅 빈 시간은, 그 시간 안에 어떤 것도 없는데, 사물과 사건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기 때문에, 사물과 사건에 관한 그 시간적 관계에 의하여 그 어떤 시간-간격도 다른 시간-간격으로부터 구분되지 않는 시간임이 틀림없다. 이제 텅 빈 시간의 마지막 간격을 - 세상이 시작되기 바로 전의 간격 - 생각하라. 분명히 이 간격은 한 사건과의 - 세상의 시작 - 밀접한 시간적 관계에 의하여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앞선 모든 간격으로부터 구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일한 간격은 텅 비어야 하는데, 그것은 관계에서 모순이다. 이제 자신의 두 번째 증명에서 칸트는, 세상에 시작이 있다면 텅 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과의 직접적인 시간적 관계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시간-간격이 - 세상에 시작되기 바로 전의 순간 -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세상에는 시간의 시작이 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증명 사이의 충돌을 경험한다. 그런 충돌을 칸트는 ‘이율배반(antinomy)’이라고 불렀다. 공간에서의 우주의 한계에 관한 이율배반들과 같은, 칸트가 자신이 속박되어있음을 발견한 다른 이율배반들로써 나는 여러분을 괴롭히지 않겠다.

 

?? 앞의 주 10 참조. 또한 클라크(Clarke)와 주고받은 라이프니츠(Leibniz)의 서신과 (키르히만[Kirchmann] 편집 철학 총서[Philos. Bibl.] 107권 134, 147, 188쪽 이하.), B. 에르트만(Erdmann)이 편집한 칸트의 비판 철학에 대한 반성(Reflexionen zur Kritischen Philosophie); 특히 4호 참고.

?? 순수 이성 비판 (2판) 454쪽 이하 참조.

 

4. 공간과 시간

이 당혹스러운 이율배반들로부터 칸트는 어떤 교훈을 도출했던가? 그는 시공에 관한 우리의 개념들은 전체로서의 우주에 적용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우리는 이 시공 개념을 평범한 물리적 물체들과 물리적 사건들에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시공 자체는 물체도 사건도 아니다: 시공은 심지어 관찰될 수도 없다: 시공은 한층 더 파악되지 않는다. 시공은 사물과 사건들에 대한 일종의 틀이다: 관찰을 위한 서류 분류함이나 서류철과 같은 것. 시공은 사물과 사건들에 관한 실재적인 경험적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지닌 도구인 우리가 지닌 정신적 장비의 한 부분이다. 시공의 합당한 활용은 관찰용 도구로서 이다: 사건을 관찰하면서 대체로 공간과 시간의 순서로 즉각적이고 직감적으로 그 사건을 우리는 밝혀낸다. 그래서 시공은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직감적으로 사용되어 경험에 합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참고용 틀로서 기술(記述)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시공을 모든 가능한 경험을 초월하는 분야에 사용함으로써 - 전체로서의 우주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두 가지 증명에서 우리가 그랬던 바와 같이 - 시공 개념을 우리가 잘못 적용한다면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이유이다.

내가 방금 개괄한 관점에 칸트는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이라는 추하고 이중으로 오해를 일으키는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그는 곧 이 결정을 후회했는데,?? 그 까닭은 그 이름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칸트가 물리적 물체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의미에서 관념론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칸트가 물리적 물체들은 관념일 뿐이라고 선언했다고. 칸트는 서둘러 자신은 시공이 경험적이고 실재적이라는 - 물리적 물체와 사건들이 경험적이고 실재적이라는 의미에서 경험적이고 실재적 - 것을 부인했을 따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항의는 허사였다. 그의 난해한 문체(文體)가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는 독일 관념론의 시조로서 존경을 받게 된다. 나는 이것을 바로잡을 때라고 제안한다. 시공 속의 물리적 물체는 실재적이라고 칸트는 항상 주장했다.?? 그리고 독일 관념론자들의 거칠고 애매모호한 형이상학적 사변(思辨: speculations)에 관하여, 칸트의 저서 순수 이성 비판(Critique)의 바로 그 제목이 모든 그런 사변적(思辨的: speculative) 추론에 대한 비판적 공격을 선언하기 위하여 선택되었다. 그 까닭은 순수 이성 비판이 비판하는 것은 순수 이성이기 때문이다; 순수 이성 비판은 감각 경험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순수한’ 세상에 관한 모든 추론을 비판하여 공격한다. 세상에 관한 순수한 추론이란 항상 틀림없이 우리를 이율배반 속으로 속박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칸트는 순수 이성을 공격했다. 흄(Hume)에 의하여 자극을 받고, 감각 경험의 한계는 세상에 관한 모든 건전한 추론의 한계라는 것을 확립하기 위하여?? 칸트는 자신의 저서 순수 이성 비판을 썼다.

 

?? 같은 책, 518쪽 이하. ‘우주론적 변증론의 해답에 대한 열쇠로서 선험적 관념론의 원리.’

??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 (1783), 부록: ‘순수 이성 비판의 조사를 기대하는 순수 이성 비판에 관한 판단의 견본.’ 또한 순수 이성 비판, 2판 (1787년; 초판은 1781년에 발간되었다), 274-9쪽, ‘관념론 논박’과, 실천 이성 비판(Critique of Practical Reason) 서문의 마지막 주석 참조.

?? 주석 14에서 언급된 구절들 참조.

?? 칸트가 최초의 순수 이성 비판이 된 것의 임시적 제목으로서 ‘감각 경험과 이성의 한계’를 내놓는 1772년 2월 21일자 M. 헤르츠(Herz)에게 보낸 칸트의 편지 참조. 또한 순수 이성 비판 (2판), 738쪽 이하의 다음 내용을 참조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함): ‘그 경험적 사용에서 이성을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 까닭은 이성의 원칙들은, 경험이라는 기준에 의하여 시험되어, 끊임없이 시험에 부쳐지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이성의 개념들이 [시공에 대한] 순수한 직감 속으로 즉시 제시되어야 하는 수학 분야 안에는 이성을 비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성이 가시적 궤도를 따르는 데에 감각-경험에 의해서도 순수한 직감에 의해서도 억제되지 않는 분야에서 - 다시 말해서 이성을 선험적으로 사용하는 분야에서... - 이성을 훈련시켜 가능한 경험의 좁은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성의 경향을 억제할 필요는 많다...

 

5.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자신의 시공 이론을 직감적인 참고의 틀로서 믿었던 칸트의 신념은, 그가 그 이론 속에서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답의 열쇠를 발견했을 때, 검증되었다. 이것은 칸트가, 모든 동시대의 물리학자들과 함께, 그 절대적이어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진실을 신뢰했던?? 뉴튼 이론의 유효성에 관한 문제였다. 이 정확한 수학적 이론이 틀림없이 축적된 관찰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은 상상 불가능하다고 그는 느꼈다. 그러나 그 이론의 기초는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칸트는 처음에 기하학의 위상을 고찰함으로써 이 문제에 접근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관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공간적 관계에 대한 우리들의 직감에 기초한다고 그는 말했다. 뉴튼의 과학도 유사한 위치에 있었다. 관찰에 의하여 검증된다 할지라도 뉴튼 과학은 이 관찰들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사고방식의, 우리들의 감각-자료들을 배열하여 이해하고 지적(知的)으로 그 자료들을 소화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우리들의 이론에 책임을 지는 것은 이 감각-자료들이 아니라, 우리 정신의 소화계 조직인 우리 자신의 지성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자연은, 그 질서 및 그 법칙들과 함께, 그리하여 주로 우리 정신이 활동들을 흡수하여 배열한 산물이다. 칸트 자신이 이 견해를 두드러지게 공식화하여,?? ‘우리의 지성은 자체의 법칙을 자연에서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의 법칙을 자연에 부과한다’고 말한다.

이 공식은 칸트 자신이 자랑스럽게 자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불렀던 생각을 요약한다. 칸트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로써는 진보가 이룩되지 않음을 발견하고, 말하자면 역습을 통하여 교착상태를 벗어났다: 그는 관찰자인 우리가 서있는 동안에 회전하는 것이 하늘이 아니라, 하늘이 서있는 동안에 관찰자인 우리가 회전한다고 가정했다. 유사한 방식으로 칸트는 과학적 지식의 문제가 - 뉴튼의 이론과 같은 그런, 정확한 과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 과학이 어떻게 발견될 수 있는지의 문제 -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연이 자체의 규칙을 우리에게 각인시키기를 기다리면서, 수동적 관찰자라는 견해를 우리는 버려야 한다. 대신에

 

?? 예를 들어 뉴튼 역학에 대한 선험적 증명을 담고 있는 칸트의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Metaphysical Foundations of Natural Science) (1786) 참조. 또한 실천 이성 비판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의 끝부분 참조. 나는 다른 곳에서 (이 책의 2장) 칸트에게서의 가장 큰 난제 몇 가지는 뉴튼의 과학이 증명 가능하게 참이라는 (그 과학이 참된 지식[epistēmē]이라는) 묵시적 가정에 기인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깨달음으로써, 순수 이성 비판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하나가 해결된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아래 8장 또한 참조 (8장은 아직 번역되지 않음. - 역자 주).

??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의 37부 마지막 부분 참조. 크루시우스(Crusius)에 대하여 언급하는 칸트의 주석은 흥미롭다: 칸트 자신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부른 것과, 윤리학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자율성의 원리 사이에 칸트가 유추를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음을 그 주석은 암시한다.

?? 여기서 나의 본문은 순수 이성 비판 2판 16쪽 이하를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다.

 

우리의 감각-자료들을 소화시키면서 우리가 능동적으로 우리의 지성이 발견하는 질서와 법칙들을 우리의 감각-자료들에 각인시킨다는 견해를 우리는 채택해야 한다. 우리의 우주는 우리의 정신이 각인한 것을 지니고 있다.

관찰자이자 조사자이며 이론가가 하는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칸트는 철학에 뿐만 아니라 물리학과 우주론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칸트적 사고 풍토가 있는데 그 풍토 없이는 아인슈타인의 이론들이나 보어(Bohr)의 이론들이 생각될 수 없다; 그리고 에딩튼(Eddington)은, 몇 가지 면에서, 칸트 자신보다도 더 칸트적으로 아마도 언급될 것이다. 심지어 내 자신처럼, 줄곧 칸트를 추종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자연을 기쁘게 할 때까지 실험자는 기다려서는 안 되고, 실험자가 자연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는 칸트의 견해를 수용할 수 있다. 실험자는 자신의 의심, 자신의 추측, 자신의 이론, 자신의 생각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영감들로 비추어 자연을 반대 신문해야 한다. 여기에 놀라운 철학적 발견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으로 인하여, 이론적이든 실험적이든, 과학을 인간의 창조물로서 간주하는 것과, 예술이나 문학의 역사와 동등한 수준으로, 과학의 역사를 아이디어의 역사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두 번째이자 훨씬 더 흥미로운 의미가 칸트가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속에 내재해 있는데 그 의미는 그 전환을 향한 칸트의 자세 속에 있는 양면성을 아마도 가리킬 것이다. 그 까닭은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코페르니쿠스 자신의 전환이 야기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으로부터 물리적 우주에서 인간이 지닌 핵심적 위치를 박탈했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이것을 부드럽게 만든다. 칸트는 물리적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가 무관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우주가 우리들 주위에서 회전한다고 언급될 것임 또한 우리에게 밝힌다: 그 까닭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우주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이다. 우리는 발견자이다: 그리고 발견은 창조적 예술이다.

 

6. 자율성의 원리

우주론자이자 지식과 과학의 철학자인 칸트로부터, 나는 이제 도덕주의자 칸트에게로 방향을 바꾼다. 칸트가 주장하는 윤리학의 근본적인 개념이, 모든 면에서 내가 기술(記述)한 전환과 비슷하여, 또 다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걸맞다는 것이 이전에 주목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까닭은 칸트가 인간을 자연에 대한 입법자로 만든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간을 도덕에 대한 입법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칸트는 인간에게 인간의 도덕적이자 인간의 물리적인 우주 양쪽에서 인간의 핵심적 위치를 돌려준다. 칸트는, 자신이 과학을 인간화했던 것처럼, 윤리학을 인간화했다.

윤리학 분야에서 칸트가 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자신이 주장하는 자율성의 원리 - 아무리 고양되었다 할지라도, 권위의 명령을 윤리학의 궁극적 기초로서 우리가 수용할 수 없다는 원리 - 속에 담겨져 있다. 그 까닭은 우리가 권위의 명령에 직면할 때마다, 이 명령이 도덕적인지 부도덕한지를

 

?? 같은 책 12쪽 이하; 특히 ‘물리학자들은..., 말하자면 자연의 앞치마 끈에 자신들이 묶여있도록 내버려두기 보다는, 자신들의 질문에 자연이 답변하도록 강요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구절 참조.

?? 도덕의 형이상학에 대한 정초(Grundlegung zur Met. d. Sitten) 2부 (WWC, 291쪽 이하, 특히 299쪽 이하) ‘도덕의 최고 원리로서의 의지의 자율성’과 3부 (WWC, 305쪽 이하) 참조.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권위에는 자체의 명령을 강제하는 힘이 있어서, 우리는 저항할 힘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는 데서 물리적으로 금지당하지 않는다면 책임은 우리의 것으로 남는다. 명령에 복종할 것인지, 권위를 수용할 것인지는 우리의 결정이다.

칸트는 과감하게 이 전환을 종교의 분야까지 가져간다. 여기에 두드러진 구절이 있다:??

내 말이 여러분을 많이 놀라게 하겠지만, 여러분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하여 나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하느님을 창조한다.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분인 하느님을 숭배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하느님을 심지어 창조해야 한다. 그 까닭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틀림없이 알려질 것이고, 하느님이 여러분에게 나타나신다 할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숭배하는 것이 [여러분의 양심에 의하여] 허용되는지를 판단해야 하는 사람은 여러분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윤리 이론은 사람의 양심이 사람의 도덕적 권위라는 서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칸트는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게 명령할 것을 우리에게 말하려고 노력한다. 도덕적 법칙인 이것에 관하여, 칸트는 몇 가지 공식을 내놓는다. 그 공식 한 가지는 이렇다:?? ‘항상 모든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서 목적으로 여기고, 사람을 당신의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서만 이용하지 말라.’ 칸트 윤리학의 정신은 이런 말로 정리될 것이다: 용감하게 자유롭게 되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하라.

이 윤리학의 기초 위에 칸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국가론??과 자신의 국제법 이론을 세웠다. 그는 국가 연맹 즉, 국가의 연방체를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지구상에서 영원한 평화를 선언하고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다.

나는 폭넓게 개괄하여 인간과 인간의 세상에 대한 칸트의 철학과, 그 철학이 지닌 두 가지 주요 영감을 - 뉴튼의 우주론과 자유에 대한 윤리학 - 기술(記述)하려고 노력했다; 칸트가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우리 내부에 있는 도덕적 법칙에 관하여 말했을 때?? 언급한 두 가지 영감.

칸트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관점을 얻기 위하여 한층 더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는 칸트를 소크라테스와 비교할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국가 종교를 왜곡했고, 젊은이들의 정신을 타락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그 혐의를 부인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사상의

 

?? 이것은 순수 이성 한계 내의 종교(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Pure Reason)의 (2판, 1794년 = WWC, 6권 318쪽; 그 구절은 1793년의 초판에는 없다. 이 책의 서론 주석 9 또한 참조) 4장 2부 § 1의 주석에 포함된 구절로부터 자유롭게 번역한 것이다 (그 자유로운 번역이 내가 믿기에 명징성에서 양립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할지라도). 그 구절은 다음 구절에 의하여 조짐이 보였다: ‘우리 자신은 도덕률에 의하여 계시를 판단한다’ (임마누엘 칸트에 의한 윤리학 강좌, L. 인필드[Infield] 번역 1930년; 그 구절 번역은 P. A. 쉴프[Schilpp]의 칸트의 비판 이전의 윤리학[Kant's Pre-Critical Ethics], 1938년, 166쪽, 주석 63에 의하여 수정된다). 방금 전에 칸트는 도덕률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이성은 도덕률을 우리에게 밝힐 수 있다’고 말한다.

?? 도덕의 형이상학에 대한 정초(Grundlegung) 2부 (WWC, 4권 287쪽) 참조. 나의 번역은, 다시, 의역이다.

?? 정의로운 국가의 원칙은 각자의 자유가 모든 사람의 자유와 공존하려면 피할 수 없는 정의로운 국가의 시민들이 지닌 자유를 저렇게 제한하는 데서 평등성을 확립하는 것이라는 결과로 칸트가 다양하게 공식화한 것들을 특히 참조 (예를 들어 순수 이성 비판 2판, 373쪽).

?? 영원한 평화에 관하여(On Peace Eternal) (1795년).

?? 실천 이성 비판의 ‘결론’에서; 특히 위 주석 17에서 언급된 끝에서 두 번째 문단의 마지막 부분 참조.

 

자유를 지지했다. 자유는 그들에게 억압의 부재(不在)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자유는 두 사람에게 삶의 방식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죽음으로부터 자유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났다: 정신이 정복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개념; 자족적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개념; 자신을 다스려서 자유롭게 법의 지배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억압의 필요가 없는 사람.

자족(self-sufficiency)이라는 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그 생각은 우리 서구 유산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데, 칸트는 지식과 도덕 양쪽 모두의 분야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에 자유인의 - 모든 인간의 - 공동체라는 생각을 덧보탰다. 그 까닭은 칸트가 모든 사람은 자유롭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유로운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로운 결정을 할 책임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포퍼 -

 

 

 

 

                       7

KANT'S CRITIQUE AND COSMOLOGY

 

ONE HUNDRED AND FIFTY years ago Immanuel Kant died, having spent the eighty years of his life in the Prussian provincial town of Königsberg. For years his retirement had been complete,? and his friends intended a quiet burial. But this son of an artisan was buried like a king. When the rumour of his death spread through the town the people flocked to his house demanding to see him. on the day of the funeral the life of the town was at a standstill. The coffin was followed by thousands, while the bells of the all the churches tolled. Nothing like this had ever before happened in Königsberg, say the chroniclers.?

It is difficult to account for this astonishing upsurge of popular feeling. Was it due solely to Kant's reputation as a great philosopher and a good man? It seems to me that there was more in it than this; and I suggest that in the year 1804, under the absolute monarchy of Frederick William, those bells tolling for Kant carried an echo of the American and French revolutions - of the ideas of 1776 and 1789. I suggest that to his countrymen Kant had become an embodiment of these ideas.? They came to show their gratitude to a teacher of the Rights of Man, of equality before the law, of world citizenship, of peace on earth, and, perhaps most important, of emancipating through knowledge.?

 

1 Six years before Kant's death, Pörschke reports (see his letter to Fichte of 2nd July 1798) that owing to Kant's retired way of life, he was being forgotten even in Königsberg.

2 C.E.A.Ch. Wasianski, Immanuel Kant in seinen letzten Lebensjahren (from Ueber Immanuel Kant. Dritter Band, Königsberg, bei Nicolovius. 1804). 'The public newspapers and a special publication have made Kant's funeral known in all its circumstances.'

? Kant's sympathies with the ideas of 1776 and 1789 were well known, for he used to express them in public. (Cf. Motherby's eye-witness report on Kant's first meeting with Green in R. B. Jachmann, Immanuel Kant geschildert in Briefen - Ueber Immanuel Kant, Zweiter Band, Königsberg bei Nicolovius, 1804; eighth letter; pp. 54 f. of the edition of 1902).

? I say 'most important' because Kant's well-deserved rise from near poverty to fame and comparatively easy circumstances helped to create on the Continent the idea of emancipation through self-education, in this form hardly known in England where the 'self-made man' was the uncultured upstart. on the continent, the educated had been for long time the middle classes, while in England they were the upper classes.

A broadcast given on the eve of the hundred and fiftieth anniversary of Kant's death. First published (without the footnotes) under the title 'Immanuel Kant: Philosopher of the Enlightenment' in The Listener, 51, 1954.

 

1. KANT AND THE ENLIGHTENMENT

Most of these ideas had reached the Continent from England through a book published in 1733, Voltaire's Letters Concerning the English Nation. In this book Voltaire contrasts English constitutional government with Continental absolute monarchy; English religious toleration with the attitude of the Roman Church; and the explanatory power of Newton's cosmology and of Locke's analytic empiricism with the dogmatism of Descartes. Voltaire's book was burnt; but its publication marks the beginning of a philosophical movement - a movement whose peculiar mood of intellectual aggressiveness was little understood in England, where there was no occasion for it.

Sixty years after Kant's death these same English ideas were being presented to the English as a 'shallow and pretentious intellectualism': and ironically enough the English word 'Enlightenment', which was then used to name the movement started by Voltaire, is still beset by these connotation of shallowness and pretentiousness; this, at least, is what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tells us.? I need hardly add that no such connotation is intended when I use the word 'Enlightenment'.

Kant believed in the Enlightenment. He was its last great defender. I realize that this is not the usual view. While I see Kant as the defender of the Enlightenment, he is more often taken as the founder of the school which destroyed it - of the Romantic School of Fichte, Schelling, and Hegel. I contend that these two interpretations are incompatible.

Fichte, and later Hegel, tried to appropriate Kant as the founder of their school. But Kant lived long enough to reject the persistent advances of Fichte, who proclaimed himself Kant's successor and heir. In A Public Declaration Concerning Fichte,? which is too little known, Kant wrote: 'May God protect us from our friends... For there are fraudulent and perfidious so-called friends who are scheming for our ruin while speaking the language of good-will.' It was only after Kant's death, when he could no longer protest, that this world-citizen was successfully pressed into the service of the nationalistic Romantic School, in spite of all his warnings against

 

? The O.E.D. says (some of the italics are mine): 'Enlightenment... 2. Sometimes used [after the German Aufklἅrung, Aufklἅrerei] to designate the spirit and the aims of the French Philosophers of the 18th century, or others whom it is intended to associate with them in the implied charge of shallow and pretentious intellectualism, unreasonable contempt of tradition and authority, etc.' The O.E.D. does not mention that 'Aufklἅrung is a translation of the French 'éclaircissement', and that it does not have these connotations in German, while 'Aufklἅrerei' (or 'Aufklἅricht’) are disparaging neologisms invented and exclusively used by the Romantics, the enemies of the Enlightenment. The O.E.D. quotes J. H. Stirling, The Secret of Hegel, 1865, and Caird, The Philosophy of Kant, 1889, as users of the word in sense 2.

? The date of this Declaration is 1799. Cf. WWC (i. e. Immanuel Kant's Werke, ed. Ernst Cassirer, et αl.), vol. VIII, pp. 515 f., and my Open Society, note 58 to ch. 12 (4th edn. 1962, vol. II, p. 313).

 

romanticism, sentimental enthusiasm, and Schwἄrmerei. But let us see how Kant himself describes the idea of the Enlightenment:?

Enlightenment is the emancipation of man from a state of self-imposed tutelage... of incapacity to use his own intelligence without external guidance. Such a state of tutelage I call 'self-imposed' if it is due, not to lack of intelligence, but to lack of courage or determination to use one's own intelligence without the help of a leader. Sapere aude! Dare to use your own intelligence! This is the battle-cry of the Enlightenment.

Kant is saying something very personal here. It is part of his own history. Brought up in near poverty, in the narrow outlook of Pietism - a severe German version of Puritanism - his own life was a story of emancipation through knowledge. In later years he used to look back with horror to what he called? 'the slavery of childhood', his period of tutelage. One might well say that the dominant theme of his whole life was the struggle for spiritual freedom.

 

2. KANT'S NEWTONIAN COSMOLOGY

A decisive role in this struggle was played by Newton's theory, which had been made known on the Continent by Voltaire. The cosmology of Copernicus and Newton became the powerful and exciting inspiration of Kant's intellectual life. His first important book,? The Theory of Heavens, has the interesting sub-title: An Essay on the Constitution and the Mechanical Origin of the Universe, Treated According to Newtonian Principles. It is one of the greatest contributions ever made to cosmology and cosmogony. It contains the first formulation not only of what is now called the 'Kant-Laplace hypothesis' of the origin of the solar system, but also, anticipating Jeans, an application of this idea to the 'Milky Way' (which Thomas Wright had interpreted as a stellar system five years earlier). But all this is excelled by Kant's identification of the nebulae as other 'Milky Ways' - distant stellar systems similar to our own.

It was the cosmological problem, as Kant explains in one of his letters,?? which led him to his theory of knowledge, and to his Critique of Pure Reason. He was concerned with the knotty problem

 

? What is Enlightenment (1785); WWC, IV, P. 169.

? See T. G. von Hippel's Biography (Gotha, 1801, pp. 78 f.). See also the letter to Kant from D. Ruhnken (one of Kant's schoolfellows in the Pietist Fredericken College), in Latin, of 10th March 1771, in which he speaks of the 'stern yet not regrettable discipline of the fanatics' who had educated them.

? Published in 1755. The full principal title might be translated: General Natural History [of the Heavens] and Theory of the Heavens. The words 'General Natural History' are used to indicate that the work is a contribution to the theory of the evolution of stellar systems.

?? To C. Garve, 21st September 1798. 'My starting point was not an investigation into the existence of God, but the antinomy of pure reason: "The world has a beginning: it has no beginning", etc. down to the fourth...' (Here comes a place where Kant, apparently, mixes up his third and fourth antinomies.) 'It was these [antinomies] which first stirred me from my dogmatic slumber and drove me to the critique of reason..., in order to resolve the scandal of the apparent contradiction of reason with itself.'

 

(which has to be faced by every cosmologist) of the finitude or infinity of the universe, with respect to both space and time. As far as space is concerned a fascinating solution has been suggested since, by Einstein, in the form of a world which is both finite and without limits. This solution cuts right through the Kantian knot, but it uses more powerful means than those available to Kant and his contemporaries. As far as time is concerned no equally promising solution of Kant's difficulties has been offered up to now.

 

3. THE CRITIQUE AND THE COSMOLOGICAL PROBLEM

Kant tells us?? that he came upon the central problem of his Critique when considering whether the universe had a beginning in time or not. He found to his dismay that he could produce seemingly valid proofs for both of these possibilities. The two proofs?? are interesting; it needs concentration to follow them, but they are not long, and not hard to understand.

For the first proof we start by analysing the idea of an infinite sequence of years (or days, or any other equal and finite intervals of time). Such an infinite sequence of years must be a sequence which goes on and on and never comes to an end. It can never be completed: a completed or an elapsed infinity of years is a contradiction in terms. Now in his first proof Kant simply argues that the world must have a beginning in time since otherwise, at this present moment, an infinite number of years must have elapsed; which is impossible. This concludes the first proof.

For the second proof we start by analysing the idea of a completely empty time - the time before there was a world. Such an empty time, in which there is nothing whatever, must be a time none of whose time-intervals is differentiated from any other by its temporal relation to things and events, since things and events simply do not exist at all. Now take the last interval of the empty time - the one immediately before the world begins. Clearly, this interval is differentiated from all earlier intervals since it is characterized by its close temporal relation to an event - the beginning of the world; yet the same interval is supposed to be empty, which is a contradiction in terms. Now in his second proof Kant simply argues that the world cannot have a beginning in time since otherwise there would be a time-interval - the moment immediately before the world began - which is empty and yet characterized by its immediate temporal relation to an event in the world; which is impossible.

We have here a clash between two proofs. Such a clash Kant called an 'antinomy'. I shall not trouble you with the other antinomies in which Kant found himself entangled, such as those concerning the limits of the universe in space.

 

?? See the foregoing note. Cf. also Leibniz's correspondence with Clarke (Philos. Bibl., edited by Kirchmann, 107, pp. 134 f., 147 f., 188 ff.), and Kant's Reflexionen zur Kritischen Philosophie, edited by B. Erdmann; esp. No. 4.

?? See Critique of Pure Reason (2nd edn.), 454 ff.

 

4. SPACE AND TIME

What lesson did Kant draw from these bewildering antinomies? He concluded?? that our ideas of space and time are inapplicable to the universe as a whole. We can, of course, apply the ideas of space and time to ordinary physical things and physical events. But space and time themselves are neither things nor events: they cannot even be observed: they are more elusive. They are a kind of framework for things and events: something like a system of pigeon-holes, or a filing system, for observations. Space and time are not part of the real empirical world of things and events, but rather part of our mental outfit, our apparatus for grasping this world. Their proper use is as instrument of observation: in observing any event we locate it, as a rule, immediately and intuitively in an order of space and time. Thus space and time may be described as a frame of reference which is not based upon experience but intuitively used in experience, and properly applicable to experience. This is why we get into trouble if we misapply the ideas of space and time by using them in a field which transcends all possible experience - as we did in our two proofs about the universe as a whole.

To the view which I have just outlined Kant chose to give the ugly and doubly misleading name 'Transcendental Idealism'. He soon regretted this choice,?? for it made people believe that he was an idealist in the sense of denying the reality of physical things: that he declared physical things to be mere ideas. Kant hastened to explain that he had only denied that space and time are empirical and real - empirical and real in the sense in which physical things and events are empirical and real. But in vain did he protest. His difficult style sealed his fate: he was to be revered as the father of German Idealism. I suggest that it is time to put this right. Kant always insisted?? that the physical things in space and time are real. And as to the wild and obscure metaphysical speculations of the German Idealists, the very title of Kant's Critique was chosen to announce a critical attack upon all such speculative reasoning. For what the Critique criticizes is pure reason; it criticizes and attacks all reasoning about the world that is 'pure' in the sense of being untainted by sense experience. Kant attacked pure reason by showing that pure reasoning about the world must always entangle us in antinomies. Stimulated by Hume, Kant wrote his Critique in order to establish?? that the limits of sense experience are the limits of all sound reasoning about the world.

 

?? Op. cit., 518 ff. 'The doctrine of Transcendental Idealism as the Key to the Solution of the Cosmological Dialectic.'

?? Prolegomena (1783), Appendix: 'Specimen of a Judgment on the Critique Anticipating its Investigation.' See also the Critique, 2nd edn. (1787; the first edition had been published in 1781), pp. 274-9, 'The Refutation of Idealism', and the last footnote to the Preface of the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 See the passages mentioned in the foregoing note.

?? See Kant's letter to M. Herz, of 21st February 1772, in which he gives, as a tentative title of what became the first Critique, 'The Limits of Sense Experience and of Reason'. See also the Critique of Pure Reason (2nd edn.), pp. 738 f. (italics mine): 'There is no need for a critique of reason in its empirical use; for its principles are continuously submitted to tests, being tested by the touchstone of experience. Similarly, there is no need for it within the field of mathematics, where its conceptions must be presented at once in pure intuition [of space and time]... But in a field in which reason is constrained neither by sense-experience nor by pure intuition to follow a visible track - namely, in the field of its transcendental use... - there is much need to discipline reason, so that its tendency to overstep the narrow limits of possible experience may be subdued...'

 

5. KANT'S COPERNICAN REVOLUTION

Kant's faith in his theory of space and time as an intuitive frame of reference was confirmed when he found in it a key to the solution of a second problem. This was the problem of the validity of Newtonian theory in whose absolute and unquestionable truth he believed,?? in common with all con-contemporary physicists (con-contemporary는 contemporary의 오기로 보인다. - 역자 주). It was inconceivable, he felt, that this exact mathematical theory should be nothing but the result of accumulated observations. But what else could be its basis? Kant approached this problem by first considering the status of geometry. Euclid's geometry is not based upon observation, he said, but upon our intuition of spatial relations. Newtonian science is in a similar position. Although confirmed by observations it is the result not of these observations but of our own ways of thinking, of our attempts to order our sense-data, to understand them, and to digest them intellectually. It is not these sense-data but our own intellect, the organization of the digestive system of our mind, which is responsible for our theories. Nature as we know it, with its order and with its laws, is thus largely a product of the assimilating and ordering activities of our mind. In Kant's own striking formulation of this view,?? 'Our intellect does not draw its laws from nature, but imposes its laws upon nature'.

This formula sums up an idea which Kant himself proudly calls his 'Copernican Revolution'. As Kant puts it, Copernicus,?? finding that no progress was being made with the theory of the revolving heavens, broke the deadlock by turning the tables, as it were: he assumed that it is not the heavens which revolve while we the observers stand still, but that we the observers revolve while the heavens stand still. In a similar way, Kant says, the problem of scientific knowledge is to be solved - the problem how an exact science, such as Newtonian theory, is possible, and how it could ever have been found. We must give up the view that we are passive

 

?? See, for example, Kant's Metaphysical Foundations of Natural Science (1786), containing the a priori demonstration of Newtonian mechanics. See also the end of the penultimate paragraph of the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I have tried to show elsewhere (chapter 2 of this volume) that some of the greatest difficulties in Kant are due to the tacit assumption that Newtonian Science is demonstrably true (that it is epistēmē), and that, with the realization that this is not so, one of the most fundamental problems of the Critique dissolves. See also ch. 8, below.

?? See Prolegomena, end of section 37. Kant's footnote referring to Crusius is interesting: it suggests that Kant had an inkling of the analogy between what he called his 'Copernican Revolution' and his principle of autonomy in ethics.

?? My text here is a free translation from the Critique of Pure Reason, 2nd edn., pp. xvi f.

 

observers, waiting for nature to impress its regularity upon us. Instead we must adopt the view that in digesting our sense-data we actively impress the order and the laws of our intellect upon them. Our cosmos bears the imprint of our minds.

By emphasizing the role played by the observer, the investigator, the theorist, Kant made an indelible impression not only upon philosophy but also upon physics and cosmology. There is a Kantian climate of thought without which Einstein's theories or Bohr's are hardly conceivable; and Eddington might be said to be more of a Kantian, in some respects, than Kant himself. Even those who, like myself, cannot follow Kant all the way can accept his view that the experimenter must not wait till it pleases nature to reveal her secrets, but that he must question her.?? He must cross-examine nature in the light of his doubts, his conjectures, his theories, his ideas, and his inspirations. Here, I believe, is a wonderful philosophical find. It makes it possible to look upon science, whether theoretical or experimental, as a human creation, and to look upon its history as part of the history of ideas, on a level with the history of art or of literature.

There is a second and even more interesting meaning inherent in Kant's version of the Copernican Revolution, a meaning which may perhaps indicate an ambivalence in his attitude towards it. For Kant's Copernican Revolution solves a human problem to which Copernicus' own revolution gave rise. Copernicus deprived man of his central position in the physical universe. Kant's Copernican Revolution takes the sting out of this. He shows us not only that our location in the physical universe is irrelevant, but also that in a sense our universe may well be said to turn about us; for it is we who produce, at least in part, the order we find in it; it is we who create our knowledge of it. We are discoverers: and discovery is a creative art.

 

6. THE DOCTRINE OF AUTONOMY

From Kant the cosmologist, the philosopher of knowledge and of science, I now turn to Kant the moralist. I do not know whether it has been noticed before that the fundamental idea of Kant's ethics amounts to another Copernican Revolution, analogous in every respect to the one I have described. For Kant makes man the lawgiver of morality just as he makes him the lawgiver of nature. And in doing so he gives back to man his central place both in his moral and in his physical universe. Kant humanized ethics, as he had humanized science.

Kant's Copernican Revolution in the field of ethics?? is contained in his doctrine of autonomy - the doctrine that we cannot accept the command of an authority, however exalted, as the ultimate basis of ethics. For whenever we are faced with a command by an authority,

 

?? Op. cit., pp. xii f.; cf. especially the passage: 'The physicists... realized that they.. had to compel Nature to reply to their questions, rather than let themselves be tied to her apron-strings, as it were.'

?? See the Grundlegung zur Met. d. Sitten, 2nd section (WWC, pp. 291 ff., especially 299 ff.): 'The Autonomy of the Will as the Highest Principle of Morality', and the 3rd section (WWC, pp. 305 ff.)

 

it is our responsibility to judge whether this command is moral or immoral. The authority may have power to enforce its commands, and we may be powerless to resist. But unless we are physically prevented from choosing the responsibility remains ours. It is our decision whether to obey a command, whether to accept authority.

Kant boldly carries this revolution into the field of religion. Here is a striking passage:??

Much as my words may startle you, you must not condemn me for saying: every man creates his God. From the moral point of view... you even have to create your God, in order to worship in Him your creator. For in whatever way... the Deity should be made known to you, and even... if He should reveal Himself to you: it is you... who must judge whether you are permitted [by your conscience] to believe in Him, and to worship Him.

Kant's ethical theory is not confined to the statement that a man's conscience is his moral authority. He also tries to tell us what our conscience may demand from us. Of this, the moral law, he gives several formulations. one of them is:?? 'Always regard every man as an end in himself, and never use him merely as a means to your ends.' The spirit of Kant's ethics may well be summed up in these words: dare to be free; and respect the freedom of others.

Upon the basis of these ethics Kant erected his most important theory of the state,?? and his theory of international law. He demanded?? a league of nations, or a federal union of states, which ultimately was to proclaim and to maintain eternal peace on earth.

I have tried to sketch in broad outline Kant's philosophy of man and his world, and its two main inspirations - Newtonian cosmology, and the ethics of freedom; the two inspirations to which Kant referred when he spoke?? of the starry heavens above us and the moral law within us.

Stepping back further to get a still more distant view of Kant's historical role, we may compare him with Socrates. Both were accused of perverting the state religion, and of corrupting the minds of the young. Both denied the charge; and both stood up for freedom

 

?? This is a free translation (although as close as is compatible with lucidity, I believe) from a passage contained in the footnote to the Fourth Chapter, Part II, § 1, of 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Pure Reason (2nd edn, 1794 = WWC, vi, p. 318; the passage is not in the 1st edn, 1793. See also the Introduction to the present volume, note 9). The passage is foreshadowed by the following: 'We ourselves judge revelation by the moral law' (Lectures on Ethics by Immanuel Kant, translated by L. Infield 1930; the translation of the passage is corrected by P. A. Schilpp, Kant's Pre-Critical Ethics, 1938, p. 166, note 63). Just before Kant says of the moral law that 'our own reason is capable of revealing it to us'.

?? See the Grundlegung, 2nd section (WWC, iv, p. 287). My translation is, again, free.

?? See, especially, Kant's various formulations to the effect that the principle of the just state is to establish equality in those limitations of the freedom of its citizens which are unavoidable if the freedom of each should coexist with the freedom of all (e.g. Critique of Pure Reason, 2nd edn., p. 373).

?? On Peace Eternal (1795).

?? At the 'Conclusion' of the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see especially the end of the penultimate paragraph, referred to in note 17 above.

 

of thought. Freedom meant more to them than absence of constraint; it was for both a way of life.

From Socrates' apology and from his death there sprang a new idea of a free man: the idea of a man whose spirit cannot be subdued; of a man who is free because he is self-sufficient; who is not in need of constraint because he is able to rule himself, and to accept freely the rule of law.

To this Socratic idea of self-sufficiency, which forms part of our western heritage, Kant has given a new meaning in the fields of both knowledge and morals. And he had added to it further the idea of a community of free men - of all men. For he has shown that every man is free; not because he is born free, but because he is born with the burden of responsibility for free decision.

 

 

 

 

-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Karl R. Popper -

7장___칸트의_순수이성비판과_우주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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