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을 폐쇄해야 하는 이유

후쿠시마 원전 폭발과 한국의 원전 문제, 김상태 저 "일본, 사라지거나 해방되거나" 중에서

이윤진이카루스 2015. 1. 31. 15:14

   첫째,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으로 사상 최대의 재난이다. 체르노빌에서는 원자로 한 개가 파괴되었지만 후쿠시마에서는 세 개의 원자로가 붕괴되었다. 재난의 규모를 나타내는 기준은 이게 전부다. 이것을 호도하는 모든 논리는 논리적으로 거짓말이다.

   둘째, 원전사고는 피해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나며 어떤 부분에서는 영구적이다. 또 피해의 양이 확대된다. 예를 들어보자. 2011년 프랑스에서 제작되고 2013년 한국의 KBS에서 방영된 <체르노빌의 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여기에는 체르노빌 사건 이후부터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연구한 전문가들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 체르노빌은 우크라이나 북서쪽,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국경에 인접한 지역이다.

   이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건 이후 우크라이나 인구가 700만 명이나 감소했으며, 12개 지방 293개의 주거지가 지금도 오염된 상태로 여겨지며,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건강한 아이들이 전체의 5~10퍼센트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만성질환을 앓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평균수명은 75세인데 이것이 자꾸 줄어들어 얼마 있으면 평균수명이 20년으로 단축될 것이다.”

   원전사고가 지속적이면서 확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사능은 무엇보다 사람을 공격하며 특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위험하다. 나이가 어릴수록 방사능 노출에 취약해서 그 위험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된다. 쉽게 말해 50대 이후의 사람에게 별 영향이 없는 데 반해 어린아이나 태아들에겐 비교가 안 될 만큼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가 늘어난다. 세상을 채우는 것은 엄마들과 아이들인데 새로 태어날수록 더 많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류와 개별 국가에게 심각한 위협이다. 다름 아닌 사람과 국민이 붕괴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다. 정치·경제·문화 모든 측면이 병들어 가는 사람이나 국민들과 더불어 말라가고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셋째, 원전사고의 장기적 피해는 정확히 측정되지 않는다. 위에서 우크라이나 인구가 줄었다고 했지만 크게 체르노빌 사고의 여파인지 엄밀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평균수명이 줄어들었거나 아이들이 건강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경제 사정이 나빠졌든지 심지어 일시적으로 우연히 그런 일이 생겼다고 말할 수도 있다. 원전사고의 가장 큰 후유증인 암 발병률도 그렇다. 보고와 뉴스에 따르면 후쿠시마 부근 아이들의 갑상선암 발병률이 급격하게 늘었다. 이는 예측한 그대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것을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무관하다고 말한다. 명확히 증명할 수 없으므로 그렇게 우긴다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원전사고는 그 자체로 거대한 주제인 만큼 상론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우리의 논의와 관련해서는 이 세 가지만 주목한다.

   원전사고 후유증은 아무리 모호해도 후쿠시마에는 작은 블랙홀처럼 버티고 있는 세 개의 파괴된 원자로가 상존하고 있다. 한계 거리 내부로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으며 로봇을 포함한 어떤 기계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냄새도 맛도 없는 막대한 양의 방사선을 폭사하고 있으며 이것은 수백 년간 지속된다. 그 안에서 녹아버린 핵연료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고 이것이 땅 밑을 흐르는 지하수나 토양과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도 알 수 없다.

   또 일본 전토는 후쿠시마를 중심으로 도처가 오염되어 있다. 사고 당시 폭발하여 날아간 대량의 방사능 물질이 바람과 비를 따라 흩어졌기 때문이다. 원전사고 지점에서 가까운 곳이 더 위험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멀리 있는 지점이 더 심하게 오염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소도인 도쿄가 후쿠시마와 가까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느끼지도 못하는 가운데 나라의 심장주가 후쿠시마에서 날아오는 방사능을 축적하고 있으며 폭발로 인해 오염된 지점이 도쿄 도처에 존재한다.

   이런 상황이면 원전사고 후유증이 모호하다고 말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인정을 하건 하지 않건 땅으로 강림한 실제 지옥 같은 원전사고의 구덩이들은 쉬지 않고 활동한다. 그것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공포스런 침묵 속에서 자신의 숨을 헐떡인다. 일본 국토와 국민이 소리 없이 말라가는 건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이 해야 할 일은 전 세계와 더불어 이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는 토건국가 일본의 시스템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은 이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반대로 행동한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일본은 왜 그러는 것일까?

   이러한 일본의 모습은 태평양전쟁을 전후한 시점에서 보여준 것과 똑같다, 무사정권의 전통에 기반을 둔 일본의 지배구조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히틀러가 패망한 후 독일은 히틀러와는 다른 사람들이 수습했다고 했다. 이것은 히틀러 이전에도 히틀러와 다른 사람들이 살았다는 뜻이다. 반면 군국주의하의 일본 지배층은 모두가 하나같이 작은 히틀러들이었으며, 그것도 항상 그러했다. 이래서 그들은 전쟁을 멈추지 못한다. 완전히 파산할 때까지 달려갈 뿐이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의 일본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한 토건국가의 일사불란한 시스템은 파산할 때까지 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전 군국주의 체제와 똑같다. 일본이 후쿠시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전전 군국주의가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적 민주주의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사실상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위기상황에서 질주하는 방식도 과거 군국주의와 흡사하다. 군국주의자들은 지배층을 중심에 두고 희생시킬 수 있는 국민이면 누구든 제물로 삼았다. 그 결론 중 하나가 가미카제이고 ‘1억 총 옥쇄. 국체를 지키기 위해 중심 바깥의 누구라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쿠시마는 이런 식으로 포기되고 방기된 지역이다. 또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과 하층민들이 포기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독일 공영방송 ZDF후쿠시마의 거짓말시리즈를 제작해 이 끔찍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이 시리즈는 인터넷에서 즉시 확인할 수 있다).

   원전사고 이후 사고처리와 제염작업을 맡은 노동자들은 목숨을 담보로 그곳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당연히 저임금이며 방사능 피폭으로 차후 그들이 겪게 될 고통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인터뷰에 응한 한 사람은 그곳의 노동자들은 그저 소모품을 뿐이라고 했다. 더 심각한 것은 여기에는 야쿠자까지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야쿠자들이 제염작업 인부들을 충원하기 위해 노숙자와 채무자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야쿠자들은 그들의 임금을 착취했다. 만일 이런 사실을 폭로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협박이 더해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이야기들에 비춰보면 일본의 전술이란 사실 간단명료하다.

   “원전사고의 피해자들은 침묵한 채로 고통 속에서 살거나 그냥 죽게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일본 국체와 같은 토건국가 시스템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원전사고 자체까지도 수익성이 되는 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다. 하물며 바다로 대량의 오염수를 흘려보내 전 세계의 대양과 해안을 오염시키는 것 따위가 문제일리 없다. 그건 일본 바깥의 문제에 불과하다. 한편 나머지 국민들은 만주사변 때처럼 다른 대안이 없으니 지배층의 논리에 순종할 것이며 또 그렇게 되도록 지배층은 최선을 다한다. 앞서 말했든 작고한 미소라 히바리가 2012괜찮아 일본!’ 콘서트에서 부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해서 태평양전쟁 때처럼 갈 때까지 간다. 지금이야말로 21세기의 일본의 새로운 1억 총 옥쇄가 필요한 때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유치는 이 선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태평양전쟁 후반 모든 전선에서 패퇴하는 가운데 자국의 병사들을 죽음의 도살장으로 내몰거나 거기에 방치하면서도 당시 일본 정부와 언론은 승리의 영광을 떠들어댔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영광의 선언이 이와 무엇이 다른가?

   토건국가 일본과 극단화된 우경화의 일본이 후쿠시마와 직결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쿠시만 (후쿠시마의 오기인 듯하다. 옮긴이) 원전사고는 그저 우발적이거나 부주의해서 난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 일본 체제의 근원적인 모순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필연적으로 올 것이 온 것뿐이다.

   이 대목에서 세계 원전 대국 중 하나인 한국을 돌아보자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부산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기에 여기서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거두절미하고 논란의 핵심에 있는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붕괴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고리 원자력발전소에서 후쿠시마 같은 일이 발생하면 그 피해는 일본의 수십 혹은 수백 배에 이른다. 후쿠시마처럼 원자로 세 개가 무너질 필요도 없다, 딱 하나에서만 사고가 터져도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재앙이 닥친다. 국토가 일본보다 작고 원전 가까이에 너무 많은 사람(반경 30킬로미터 안에 350만 명이 거주, 인구밀도 세계 3편집자)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가 터진 그날부터 부산항이 폐쇄될 것이며 이후 이곳에 들어오는 배는 대폭 감소할 것이다. 울산에서 생산되는 자동차들은 당분가 수출이 금지되고 창원, 구미 등의 공단은 조업이 중단되거나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며 대구에서 부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피난행령이 줄을 잇게 된다.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외국으로 떠날 것이다. 이것은 한국 경제와 사회가 마비된다는 뜻이다. 이 타격만으로도 한국 사회경제는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그뿐 아니다, 우크라이나처럼 인구와 평균수명이 줄어들고 아이들이 병들어 간다. 일본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국토에 높은 인구밀도를 감안할 때 그 속도는 훨씬 빠를 것이다. 순식간에 금수강산이라 불리는 한반도의 남한이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은 일본처럼 모아둔 돈이 많지 않다. 복구나 재건은 둘째 치고 사회경제적 공황 속에서 일정 기간 버틸 여유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물론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러나 이 땅은 이미 병자들의 나라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한 땅은 사람 아닌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전락한다.

   요즘의 논의를 보면 사고 발생 후의 사정이 이럴 것이라는 점에서는 별로 이견이 없다. 체르노빌에 이어 후쿠시마가가 (‘후쿠시마가의 오기로 보인다. 옮긴이) 원전사고의 실태를 너무도 분명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에는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든가, 원전을 중지하면 전력 손실과 경제 손실이 커서 다른 대안이 없다는 말을 한다. 물론 원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사고가 발생할 확률은 아주 높고 대체 에너지를 생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론 논의도 덮어두자. 그리고 천만 번 양보하여 사고 확률이 적고 원전을 포기하면 다른 대안이 없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한들 30년을 넘어 유효기간이 지난 (1978년 운전을 시작한 고리 1호기는 2007년 설계수명이 다하여 가동이 중단되었다가 10년 연장 가동이 결정되어 2012년부터 재가동되고 있다. 1983년에 운전을 시작한 2호기 역시 설계수명이 20134월에 만료된 노후기로 적잖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가동 중이다 _편집자) 원자력발전소를 남한 동남부 도시들의 심장부에 놓아두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우리는 세월호 사건도 견디지 못했다. 하물며 한번 터지면 나라 전체, 나아가 역사 전체가 붕괴하는 위험한 현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있단 말인가?

   한국인의 정서는 그렇지 않다. 나라가 부도나면 온 국민이 금 모으기를 하고 유조선이 침몰하여 기름이 유출되면 온 국민이 나서서 자원봉사를 하는 나라다. 그런 만큼 어쩔 수 없이 전기가 부족하다면 나라 전체가 호롱불로 밤을 지내더라도 기꺼이 견뎌내는 게 한국인의 문화다. 에어컨 대신 부채나 선풍기를 사용하면서 산업현장에 전력을 몰아주는 문화다. 따라서 한국의 원전사고 확률이 낮다든가 대안이 없다는 것은 한국에 원전이 존재하는 진짜 이유가 아니다. 그것이 존재한 진짜 이유는 국민들이 원전의 위험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이며, 국민들이 잘 모르는 이유는 어디선가 정보가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이 정보를 차단하는가?

   위에서 소개한 김익중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그는 묘한 대답을 한다. 가령 이렇다.

   “글쎄요,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왜 사태가 분명한데도 정부가 원전을 중지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김익중이 인터뷰 중에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을 때는 정말 쓴웃음이 나온다. 왜냐하면 한국의 원전마피아를 경고하는 보도가 뉴욕타임스 수준에서 이미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느 나라나 그렇듯 한국에도 토건국가 일본을 서투르게 흉내 내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공포의 원천이 유지되고 이에 대한 정보가 차단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김익중이 이걸 몰라서 그렇게 대답할 리가 만무하다. 그는 단지 정치적인 문제는 자신이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환경운동가로서 현재 상황에서는 당연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후쿠시마가 단순한 원전사고가 아닌 일본 체제의 근원과 관련된 것처럼 한국의 원전 문제도 사실은 민주주의 문제다. 국민 스스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조건과 능력, 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조건과 능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후쿠시마에는 원전사고 이후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에 이전부터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철저히 은폐한 사실이 드러났다. 바로 민주주의의 부재다. 한국은 일본과 다를 것인가? 다르다면 얼마나 다를 것인가? 왜냐하면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사고가 터지면 돌이길 수 없으므로 이것만은 촌각을 다투어야 한다. 또 그만큼이나 강력한 민주주의가 요청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몇 사람이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국가 자신의 역사와 문화 전부를 토대로 현실에 결단하고 대응하는 능력이다. 이것이야말로 일천년 이상 문치국가의 전통을 이어온 한국의 시험대다. 과연 이 나라는 어떤 운명을 선택할 것인가?

 

 

후쿠시마 원전 폭발과 한국의 원전 문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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