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09 18:56 수정 : 2015.03.09 18:56
조선 문단에서 지성주의를 강조했던 영문학자 최재서는 1931년 만주사변에서 1945년 해방에 이르는 일제 말기의 혼란 속에서 그 비평적 영욕을 함께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강사로 임용되었던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였다.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데이비드 흄이라든가 <황무지>를 통해 근대문명의 황혼을 비판적으로 묘파했던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의 문명비판적 세계관이었다. 그의 비평은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같은 사회운동과 일정하게 거리를 둔 계몽적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데 바쳐졌다. <문학과 지성>(1938)이 그의 첫 평론집이다.
최재서는 일제 말기 <국민문학> 등을 통해 노골적으로 일제의 총동원체제에 협력하기 전까지는 소리 높여 ‘지성의 옹호’를 강조했다. 비록 그것이 히틀러의 등장 이후 유럽의 동향이기는 했지만, 유럽의 파시즘 징후를 봉쇄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발레리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국내에 소개한 이가 최재서였다.
그랬던 그가 <인문평론>을 폐간하고 <국민문학>을 창간해 총독부 당국의 국책을 가감 없이 반영할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지식인의 ‘문예동원’을 역설했다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학사적 연구야 여러 정밀한 검토가 이미 이루어진 바 있지만, 나는 지식인의 ‘관념의 만능성’을 문제삼고 싶다.
지식인이라는 존재는 스스로를 비판적 합리성의 소유자라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동시에 잡다한 시국적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여러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주관적 판단을 객관적 사실로 오인하고, 거기에 확신과 신념이 덧붙여지면 ‘관념의 만능’, 그러니까 외부 현실과 무관하게 머릿속에 구성된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명백한 사실로 역설하는 오류도 자주 나타난다.
평시에야 이런 오류는 타자들의 비판을 통해 수정되거나 조율될 가능성이 있지만, 만일 일제 말기의 조선에서처럼 모든 식민지 국가장치와 언론들이 정보를 독점·변용하고 일본의 국책이나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식민지 주민에 대한 선전·동원 활동을 일원화해 ‘귀축영미’라는 구호를 외친다면, 최재서와 같은 명민한 영문학자도 ‘지성적으로’ 시국을 ‘오판’하는 일이 나타날 수 있다.
최재서가 <국민문학>을 통해 적극적인 대일협력에 나서게 된 것은 1941년 12월8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직후부터였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싱가포르를 함락하고 그들이 ‘대남양’이라고 명명했던 동남아시아를 침략해 나가는데, 이때 최재서와 같은 지성주의자조차 이제 ‘동아신질서’ 또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제가 선전했던 아시아·태평양 체제의 구축은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닌가, 라는 식의 ‘지성적’ 판단을 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판’이었다.
일제 말기 조선의 지식인들 역시 국제정세를 치밀하게 분석하려 애썼다. 역설이긴 하지만, 이른바 대일협력 문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것이 1931년 만주사변 직후 1단계, 1937년 중일전쟁 직후 2단계, 1941년 미국과의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3단계로 나뉠 수 있다는 점은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3단계에 이르러 지식인들의 대일협력이 대거 나타났다. 이는 지식인들의 대일협력이 황민화정책의 결과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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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비평가 최재서를 떠올린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적 각축 속에서 오늘의 동아시아는 흡사 ‘신냉전’과 유사한 긴장감이 증폭되고 있다. 이럴 때 한국이 또다시 세계체제의 변동을 ‘오판’한다면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뱀 같은 지혜와 사자 같은 용기가 필요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