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을 폐쇄해야 하는 이유

“원전 안전 담보 못하는 에너지는 포기 바람직”/이정윤/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3. 11. 10:57

사회

환경

“원전 안전 담보 못하는 에너지는 포기 바람직”

등록 : 2015.03.10 20:21 수정 : 2015.03.10 20:21

이정윤 ‘원자력 안전과 미래’ 대표

국내 탈핵운동 진영이 국외 탈핵운동을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가 원전 전문가들의 지원이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원전 전문가 가운데 탈핵 쪽에 선 이들이 드물지 않다. 하지만 국내 탈핵단체들은 원전 기술과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은 늘 일본을 비롯한 국외 전문가들을 통해 들어야 했다. 국내에 원자력공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없지 않지만, 대부분 친원전 쪽이거나 현장을 잘 몰라 구체적인 문제에는 약했기 때문이다.

지난 7일 대전에서 만난 원전 기술 전문가 단체 ‘원자력 안전과 미래’의 이정윤(55·기술사) 대표는 탈핵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탈핵운동 진영에 어느 전문가보다 큰 우군이 되고 있다. 그는 30년 가까이 원자로 정비·설계·안전성 검증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온 전문가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처장은 “우리 쪽엔 공학 전문가가 없었어요. 교수님들이 많아도 대부분 정책 쪽이지 공학 쪽 전문가는 아니었거든요. 원전 기술 전문가가 이렇게 ‘커밍아웃’을 한 것은 이 대표가 사실상 처음으로, 우리한테 큰 힘이 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탈핵운동의 우군이 된 만큼 그는 친정 격인 원전산업계에서는 경계 대상 1호가 됐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지난 1월 월성 1호기 수명 연장과 관련해 장하나 국회의원실(새정치민주연합)에서 자료 열람을 요청했을 때 절대 함께 오면 안 되는 ‘특정인’으로 지목한 이가 그다.

원전 정비·설계 등 30년 경력 바탕
월성 1호기 논쟁서 문제 제기 주도
전문가 아쉬운 탈핵운동에 큰 힘
원전 산업계서 경계대상 1순위
“탈핵 아니어도 원전 안전은 현실
원전감시 국민 알리기 계속할 터”

원전 기술자로서 그의 첫출발은 부산 고리원전에서 증기발생기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꼭 원전 분야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선 길은 아니었다. 1986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한국전력 자회사와 자동차 회사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하다 에너지 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다 사내 대학원 과정에 마음이 끌렸다. 5년 뒤 그는 한국원자력연구원 소속으로 캐나다원자력공사에 파견돼 월성 2·3·4호기 설계에 참여했고, 2001년엔 원전 설비의 건전성 평가 전문 업체를 창업해 11년간 공동대표로 일했다. 2013년 8월부터는 전남 영광 한빛원전 지역 주민들이 주도하는 안전성검증단의 전문가팀장을 맡고 있다.

“주민 대표에게 ‘발전사업자 쪽에 서지 않겠지만 주민 쪽에도 서지 않을 거다. 다만 안전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끝까지 갈 거다. 사업자 쪽은 물론 주민 쪽으로부터의 압력도 막아달라’고 했더니, 주민들이 원하는 게 그것이라고 하더군요.” 주민들과 1년 반 활동해오며 전문가로서 보람도 컸다. “변화한 것 한가지는 원전과 관련한 주민들의 시위가 없어졌다는 겁니다. 믿을 수 있는 전문가들이 저건 잘된 거고 이건 잘못된 거라고 분명히 얘기해주니까, 주민들이 언제든 합리적으로 자기주장을 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된 때문인 것 같습니다.”

4년 전 일본 후쿠시마에서 터진 원전 사고는 원전 설계일을 했던 그에게는 특별히 충격이었다. “그 전까지는 원전 사고는 먼 나라 얘기로 봤어요. 하지만 후쿠시마에서 원전 지붕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이게 아니구나 했지요.” 그 뒤 정부가 내놓은 대책에 그는 크게 실망했다. 형식적인 조처일 뿐 아니라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이런 문제를 짚어주는 전문가 그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주변의 가까운 원전 기술 전문가들에게 했더니 공감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이는 4개월 뒤 전·현직 원전 기술 전문가 30여명이 중심이 된 ‘원자력 안전과 미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 대표가 이끄는 이 모임에는 현재 전문가 이외에도 100여명이 일반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탈핵운동 진영의 월성 1호기 수명 연장 반대 활동은 그가 힘을 보태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단순히 추상적 표현과 주장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기술적 문제점까지 따지고 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R-7’에 대한 문제 제기다. 월성 1호기 수명 연장 심사 과정 막바지에서 적용 여부를 놓고 가장 쟁점이 된 R-7은 월성 1호기와 같은 캔두형(캐나다형 가압중수로)에 대해 캐나다가 1991년부터 강화한 격납용기 안전기준이다. 이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른 데는 1990년대 초 월성 2·3·4호기 설계에 참여한 이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이 대표는 지난해 10월2일 원자력안전위원회가 공개한 월성 1호기 계속운전을 위한 심사보고서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R-7 기준 보강 부분이 다 빠져 있던 것이다. 한수원과 원자력안전기술원 등에 알아봤지만 제대로 된 답변이 없었다. 보강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저는 1호기의 설계 개념에 문제가 있어서 개선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하는데, 저쪽에서는 30년 전에 적용됐던 설계 개념을 적용해 보완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하고 있으니 납득할 수 있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결국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길을 선택했다. 지난달 5일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월성 1호기 계속운전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 기자회견 등에 이 대표가 빠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자신의 경험과 전문지식을 총동원해 최신 기준을 적용한 보완 없이 월성 1호기 수명 연장이 이뤄지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불합리한 일인지 역설했다. 하지만 월성 1호기의 수명 연장을 끝내 막지는 못했다.

월성 1호기 논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원전에 대한 그의 불신은 더욱 커진 듯하다. “R-7 기준 하나만 봐도 저런 식으로 가는데, 다른 안전계통에 대해서는 제대로 검토했겠느냐는 의심이 간다. 전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계속운전도 이런 식으로 가고 있는데 가동중인 원전들의 안전은 제대로 되고 있을지 생각하면 심각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은 찬핵론자도 탈핵론자도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월성 1호기에 대해서는 주민의 동의를 받고 안전성 개선을 할 수 없다면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가 원전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한다고 하지만 외국에서도 우리 원전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원전 진흥 중심의 폐쇄적인 원전 안전 관리를 보면 우리에게 원자력은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입니다. 안전을 담보할 수 있으면 계속해야겠지만, 안전을 담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는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한국 원전의 실상을 잘 아는 그의 최대 관심은 탈핵보다 안전이다. 그는 “탈핵은 장기적으로 실현 가능한 이상이지만 안전은 당장 발등의 불”이라며 “앞으로도 주어진 한계 안에서 미약하지만 원자력 안전규제 관련 사항을 감시하고 국민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대전/글·사진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