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관찰하기

한·미·일 삼각관계와 역사의 복수 / 김연철/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5. 25. 09:53

사설.칼럼칼럼

[세상 읽기] 한·미·일 삼각관계와 역사의 복수 / 김연철

등록 :2015-05-24 18:36

 

 

 

6월에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다. 일본 아베 총리의 방미 이후 미·일의 밀월과 한국의 고립을 걱정하는 미묘한 시점이다. 한-미 관계의 현안도 적지 않다. 한·미·일 삼각관계에서 한국의 위상과 역할을 검증하는 중요한 무대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주문이 쏟아진다. ‘역사’문제에 연연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크다. 한국을 방문했던 미국의 국방장관은 ‘역사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고, 미국 국무장관 역시 ‘한-일 양국의 화해’를 강조했다.

역사는 한·미·일 삼각관계의 단층선이고, 때로는 지진과 태풍의 근원이다. 역사문제로 한-일 관계가 풀리지 않으면 한·미·일 삼각관계는 선순환할 수 없다. 해방 70년의 세월 동안 미국은 언제나 일관되게 한-일의 역사화해를 재촉했다. 그래서 한-일 관계는 양자 관계가 아니라 3자 관계다. 식민 지배의 불법성을 부정하는 일본과,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는 한국 사이에서 미국은 언제나 중재자였다.

중재자는 완고한 쪽이 아니라 만만한 쪽의 양보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50년 전에도 그랬다. 1965년 한일협정이 맺어질 때 미국은 서두르고 재촉했다. 원조 축소를 압력수단으로 활용하고, 청구권 금액의 범위를 조정했다. 박정희 정권은 명분보다 이익을 중시하면서 ‘역사문제’를 후대의 몫으로 넘겼다. 이후 반공전선을 위하여, 한·미·일 삼각관계를 위하여, 경제성장을 위하여 역사는 언제나 당대가 아니라 후대의 누군가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1965년 당시 강원용 목사는 한일협정을 ‘비정상을 위한 (관계)정상화’라고 비판했다. ‘청산하지 않은 역사’의 후유증은 얼마나 큰가?

50년의 세월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한국의 경제력이나 외교적 영향력을 어떻게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과 비교하겠는가? 어떻게 군사쿠데타로 집권해서 정당성 콤플렉스를 느끼던 1960년대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역량도, 한·미·일 삼각관계의 성격도 분명히 달라졌다. 역사를 현안과 연계하라는 것도 아니다. 미완으로 남겨진 과제를 어느 누구인들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박근혜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을 만났을 때 역사문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

역사문제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당사자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에 한국을 초대하지 않았다. 미국의 결정으로 한국은 일본의 교전 상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배상을 요구할 자격을 잃었다. 1965년 한일협정에서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 청구권 형식으로 귀결된 것도 사실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문이다. 독도문제도 마찬가지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할 영토 중 독도를 슬그머니 누락시켰다. 초안에 들어 있던 독도가 일본의 로비로 사라진 후유증은 얼마나 참담한가?

한-일 양국의 역사화해를 위해 미국의 적극적 역할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미국은 독일 정부가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노동에 대해 보상기금을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 클린턴 행정부 때는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을 주도적으로 해결했다. 미국이 중재자로 개입한 중동평화 협상에서 얽히고설킨 과거는 얼마나 사활적이었는가? 미국은 현재의 평화와 미래의 공동이익을 위해 과거의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다시 한·미·일 삼각관계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50년 전처럼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문제’를 덮어두어야 할까? 기억해야 한다. 어설프게 봉합한 역사는 단층선이 부딪히듯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전혀 다른 맥락으로 복수한다. 해원, 원을 풀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대통령이 미국에 가는 길에 ‘역사인식’을 꼭 챙겨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