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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6개 역사학단체 '위안부 문제 왜곡' 경고/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5. 26. 08:22

국제일본

아베 ‘역사가에 맡겨야’ 입버릇…“이제 역사학자들 얘길 들어야”

등록 :2015-05-25 21:05수정 :2015-05-25 23:05

 

일본 16개 역사학단체 공동 성명
‘아베의 핑계’에 정답 낸 역사가들…‘위안부 문제 왜곡’ 경고
“강제 연행엔 ‘자기 뜻 반한 것’ 포함”…‘성노예’ 3차례 언급
아베 ‘인신매매’ 표현 맞서 ‘식민지 차별’ 구조적 문제 주목

아베 신조 일본 총리. 한겨레 그래픽.
아베 신조 일본 총리. 한겨레 그래픽.
“(일본 정부가) 역사학자들에게 맡긴다고 했으면, 역사학자들의 얘길 들어야 한다.”

25일 오후 도쿄 지요다구 중의원 제2회관에서 진행된 일본 역사학 관련 단체들의 기자회견에 참여한 구보 도루 역사학연구회 위원장은 이번 성명을 발표한 의의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날 16개 역사학 관련 단체가 함께 반년간의 준비를 거쳐 내놓은 성명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주도하고 있는 일본 사회의 역사 수정주의적 흐름을 단숨에 바꿀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한-일 간의 핵심적인 외교 현안이 되어 있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여론에 상당한 파장을 던질 것으로 보인다. 아베 총리는 평소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는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는데, 일본을 대표하는 주요 역사 관련 학술단체들이 힘을 합쳐 이에 대한 답을 내놨기 때문이다. 이번 성명은 지난 6일 세계 역사학자 187명이 “역사학자들은 일본군이 여성들의 이송이나 위안소 관리에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자료를 발굴해왔다”는 성명을 낸 데 이어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려는 아베 정부의 시도에 강력한 경고가 될 전망이다.

일본 역사학자들이 이번에 내놓은 견해는 현재 일본 정부가 취하고 있는 입장과 큰 차이가 있다.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강제연행이 있었는지 △위안부를 성노예로 볼 수 있는지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이 있는지 등이다. 이번 성명을 낸 역사학자들은 강제연행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동원된 것까지 포함해 강제동원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가 거부하고 있는 ‘성노예’란 표현에 대해서도 “위안부가 된 여성들이 성노예로서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폭력을 받았다”고 언급하는 등 ‘성노예’라는 표현을 3번이나 사용했다.

구보 도루 역사학연구회 위원장(오른쪽 둘째)을 비롯한 일본 역사학자들이 25일 오후 도쿄 지요다구 중의원 제2의원회관에서 일본역사학협회 등 일본 16개 역사학 관련 단체 명의로 위안부 여성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동원됐다면 이를 ‘강제연행’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담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구보 도루 역사학연구회 위원장(오른쪽 둘째)을 비롯한 일본 역사학자들이 25일 오후 도쿄 지요다구 중의원 제2의원회관에서 일본역사학협회 등 일본 16개 역사학 관련 단체 명의로 위안부 여성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동원됐다면 이를 ‘강제연행’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담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이와 함께 성명은 아베 총리가 ‘인신매매’라는 표현으로, 위안부 제도는 국가와 관계없이 민간에서 벌어진 문제로 몰아가려는 대목에도 쐐기를 박았다. 역사학자들은 “최근의 역사 연구에서는 위안부 제도와 (국가가 직접 개입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일상적인 식민지 지배·차별구조와의 관련성도 지적되고 있다”며 ‘식민성’이라는 구조적인 문제에도 주목했다.

위안부 동원 과정의 식민성에 주목하는 것은 위안부 제도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 학자들이 발표한 여러 연구 성과를 보면, 1938년 2월 일본 내무성은 위안부 여성의 해외 도항과 관련해 일본인 여성에겐 ‘21살 미만은 안 되고, 매춘부(성매매)를 했던 전력이 없어도 안 된다’는 등의 제한을 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이나 대만엔 이런 내용이 전달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는 “(결과적으로) 위안부의 다수는 비일본인 여성들이고 조선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번 공동성명에 표현된 일본 역사학자들의 인식은 이달 초 세계 역사학자들이 발표한 성명의 핵심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미국 등 각국 역사학자들은 당시 성명에서 “많은 여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붙잡혀 무서운 폭력을 당했다는 것은 많은 자료와 증언에 의해 분명해졌다. 특정 용어(예 강제연행)에 초점을 맞춰 좁은 법률적 논의를 거듭하는 것은 피해자들이 받은 잔인한 행위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한 바 있다.

이번 성명에 참여한 이시이 히토나리 역사학연구회 사무국장은 “위안부에 대한 연구 성과를 충분히 평가하지 않고 정치인들과 일부 언론이 ‘(강제동원을 증명하는) 문서가 없다, 일본군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다. 정치가들은 일본 역사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보고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