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사람 마음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하는 것이어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독립적이어서, 조금도 다른 사람의 제어를 받지 않고, 조금도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지 않아, 세상에 당연히 존재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 일본에 있어서는 곧 그렇지 않다. 원래 우리나라의 종교적 교설은 신도(神道)와 불교의 양쪽 길이라고 하는 자가 있어도, 신도(神道)는 아직 종교적 교설의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설령 오랜 옛날에 그 주장이 있어도, 이미 불법(仏法) 안에 농락되어. 수 백 년 간 본색을 드러낼 수 없다. 혹은 요즘에 이르러 조금 신도(神道)라는 이름을 듣는 것 같아도, 정부의 변혁을 맞아 겨우 왕실의 음덕에 의지하여 미미한 운동을 하려고 할뿐이어서, 다만 한 때의 우연한 일이기에, 나의 소견에서는 이것을 정해진 종교적 교설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아무튼 옛날부터 일본에서 유포되어 문명의 한 국면을 맡은 종교적 교설은, 다만 하나의 불법(仏法)이 있을 따름. 그런데 이 불법(仏法)도 처음 생긴 때부터 다스리는 자의 무리에 들어가 그 힘에 의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옛날부터 유명한 스님과 고명한 스님이라고 칭하는 사람, 혹은 당나라에 들어가서 법(法)을 구하고, 혹은 자국에서 있으면서 새로운 종파를 열어, 사람들을 교화하고 절을 세운 것도 많다할지라도, 대개 모두 천황과 쇼군(將軍) 등의 보살핌이라는 요행을 맞이하여, 그 음덕을 빌려서 법(法)을 보급하려 할 따름. 심지어는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고 명예라고 하는 데 이르렀다. 승려가 승정(僧正: 승려의 고위직)과 승도(僧都: 승려의 고위직)의 지위에 보해진다는 사례는 매우 오래되어, 엔키시키(延喜式: 헤이안 시대 율령의 시행세칙)에 승도(僧都: 승려의 고위직) 이상은 3품에 준한다 하고,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의 겐무(建武) 2년의 칙명에는, 대승정(大僧正: 승려의 최고위직)으로써 2품 대납언(大納言), 승정(僧正: 승려의 고위직)으로써 2품 중납언(中納言), 권승정(権僧正: 승정의 다음 직위)으로써 3품 참의(参議)에 준한다고 되어 있다 (석가관반기[釈家官班記]). 이 내용을 보면, 당시 유명한 스님과 고명한 스님도 조정의 관직을 몸을 지니고, 그 지위로써 조정의 많은 신하들과 상하의 반열을 다투어 한 자리 내외로써 영예와 수치로 삼았던 것이리라. 이것 때문에 일본의 종교적 교설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교는 있어도 자립적인 종교 행정인 것이 있음을 듣지 못한다. 더욱이 그 실제적 증거를 얻고자하면, 오늘날에도 나라 안의 유명한 절에 가서 그 기록된 유래를 불 수 있다. 쇼무(聖武) 천황의 텐표(天平) 연중에 일본의 제후국마다 고쿠분지(国分寺: 국분사)를 세우고, 간무(桓武) 천황 엔랴쿠(延暦) 7년에는 전교대사(伝教大師: 最澄: 최징)가 히에이잔(比叡山)을 열어 고본츄도(根本中堂: 근본중당)을 세워 왕성(王城)의 기몬(鬼門: 귀문: 음양설에서 여러 귀신이 출몰하는 곳)을 진압하고, 사가(嵯峨) 천황 고닌(弘仁) 7년에는, 고보다이시(弘法大師: 홍법대사: 空海: 공해)가 고야산(高野山)을 열어 천황으로부터 윤허를 받아 그 대가람(大伽籃)을 건립했다. 기타 남부의 여러 산, 교토의 여러 절, 헤이안 시대에는 가마쿠라(鎌倉)의 5산, 근세에는 우에노(上野)의 도에이야마(東叡山), 시바(芝)의 조죠지(増上寺) 등 어느 것도 모두 정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은 것이 없다. 기타 역대 천황 스스로 불교에 귀의하여, 혹은 친왕(親王: 적출 황손)으로 중이 된 자도 매우 많다. 시라카와(白河) 천황에게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6명은 중이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종교에서 권력을 얻은 한 가지 원인이다. 오직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자립에 가까운 것이라 해도 여전히 그런 폐단을 면할 수 없다. 아시카가(足利) 말기, 다이에이(大永) 원년 지츠뇨 상인(実如上人) 시대에 천황의 즉위 자금을 기부하여, 그 보답으로써 영원히 몬제키(門跡: 황족이 출가하여 법통을 전하는 절)에 준한다 하여 호신노(法親王: 법친왕: 황자가 출가하여 친왕까지 봉해지는 경우)에 준하는 지위를 하사받은 일이 있다. 왕실이 쇠미하고 빈곤함을 불쌍히 생각하여 여유 돈을 대주는 것은 승려의 신분으로서 훌륭한 일일지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아서, 니시산조(西三条)는 불교에 입문하는 중개인을 통하여 관직의 등급을 산 일이 있다. 이것을 비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일본 가운데 대사원이라 칭하는 것은, 천황과 칙명으로 기원하는 바가 아니면 쇼군(将軍)이 집권하여 건립했다. 생각건대 이것을 어용사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절의 유래를 들으면, 쇼군(将軍)의 도장이 찍힌 문서는 몇 백 석, 주지의 자격은 어떠어떠하다고 하여, 그 상황도 높은 무사족이 자신의 가문을 말함에 다르지 않다. 한 번 들어서 혐오감이 생길 것이다. 절의 문 앞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표찰을 걸고, 문에서 나가면 추종세력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치워서 길을 피하게 하여, 그 위력은 봉건시대의 다이묘(大名)보다도 기세등등한 것이다. 그런데 그 위력의 근원을 찾으면, 종교의 위력이 아니고, 다만 정부의 위력을 차용한 것이어서, 결국 속세 권력 중의 한 부분이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가 번성했다할지라도, 그 종교는 모두 정권의 한 가운데 포함되어, 사방 온 누리에 보편적으로 비추는 것은, 불교의 밝은 빛이 아니고, 정권의 위력인 것 같다. 사원에서 독립적인 종교가 없는 것도 역시 괴이할 것이 없고, 그 종교에 귀의하는 무리에 종교를 믿는 본심이 없는 것도 역시 놀랄 것이 못된다. 그 한 가지 증거를 들면, 옛날부터 일본에서는 종교적 교설만을 위한 전쟁에 이르는 것이 극히 드문 것을 보아도, 역시 신앙인의 나약함을 살펴 알 수 있다. 이 종교에 있어서 신앙심이 귀의하는 외양에 드러나는 바는, 무지하고 배우지 못한 촌농부와 촌노파가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경우가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상황을 보면, 불법(仏法)은 다만 이 문맹세계의 한 가지 도구이어서, 매우 어리석고 매우 누추한 사람의 마음을 완화하는 수단일 뿐, 기타에서는 하등의 효용도 없고, 또 하등의 세력도 있을 일이 없다. 그 세력이 매우 없음은,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파계승이라 하여, 세속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종파 위의 계율을 어긴 자이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직접 그를 체포하여, 시중에 끌고 다니고 귀양을 보내는 사례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곧 승려가 정부의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요즘에 이르러서는 정부로부터 전국의 승려에게 육식과 대처(妻帯)를 허락하는 명령이 내렸다. 그 명령의 의하면, 종래의 승려가 고기를 먹지 않고 부녀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은 그 종교의 취지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어서, 정부의 허락이 없기 때문에 노력하여 스스로 금지한 것이리라. 이런 것들의 내용을 보면, 승려는 비단 정부의 노예뿐만 아니라, 일본 안에 이미 종교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종교 권리가 없다)
종교는 여전히 또 그러하다. 하물며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야. 우리나라에 유교서적이 전해진 것은 이미 오래다. 왕조시대에 박사를 두고, 천황이 스스로 중국서적을 읽고, 사가(嵯峨) 천황의 시대에 대납언(大納言) 후유츠구(冬嗣)가, 간가쿠인(勧学院: 권학원)을 세워 일족의 자제를 가르치고, 우다(宇多) 천황 시절에는 중납언(中納言) 유키하라(行平)가, 쇼가쿠인(奨学院: 장학원)을 건설하는 등, 한학도 점차 열리고, 특히 와카(和歌: 일본의 시) 교육은 옛날부터 성행한 일이 있어도, 모두 이 시대의 학문은 다만 재위 천황의 자제에게 미칠 뿐이어서, 저서라 할지라도 모두 관청의 손에 이루어진 것이다. 본래 인쇄술도 아직 발명되지 않아서, 민간에서 교육에 다다를 수 있는 수단이 있을 수 없다.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 미요시 야스노부(三善康信) 등, 유학으로써 등용되었다 해도, 이것 역시 정부에 속한 자들이어서, 백성들 사이에 학자가 있음을 듣지 못한다. 죠큐(承久) 3년 호조 야스토키(北条泰)가, 우지세타(宇治勢多)에 침입했을 때, 고토바(後鳥羽) 상황(上皇)으로부터 어명이 와서, 병졸 5000여명 안에서부터 이 어명을 읽을 수 있는 자를 찾는 데, 무사시노(武蔵) 국의 주민 후지타 사부로(藤田三郎)라는 자 한 사람을 얻었다고 한다. 세상이 문맹인 것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아시카가(足利) 말기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온전히 승려의 몫이 되어, 글자를 배우고자하는 자는 반드시 절에 의지하지 않으면 그 수단을 얻지 못한다. 후세 글자를 배우는 학생을 칭하여 데라코(寺子: 절 아이)라고 하는 것도 그 이유가 있다. 혹자의 주장에, 일본에 목판본이 생긴 것은 가마쿠라(鎌倉)의 5산(五山)을 시작으로 한다고 했다. 과연 믿을 것인가? 도쿠가와(徳川) 초기에 그 시조 이에야스(家康), 우두머리로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를 중용하고, 다음에 하야시 도슌(林道春)을 등용하고, 평화가 지속됨에 따라 대유학자를 배출, 그로써 근세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학문의 성쇠는 세상의 치세와 난세라는 행보를 함께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일이 없고, 수 십 백년 전쟁과 소란의 사이, 완전히 이것을 승려의 손에 맡긴 것은, 학문의 불명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한 가지 사건을 보고도 유교는 불교에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할지라도 전쟁에 즈음하여 학문이 쇠미함은 유독 일본뿐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국가가 그렇지 않음이 없다. 유럽에 있어서도 중세 암흑시대부터 봉건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문자에 관한 권한, 전적으로 승려에게 귀속되어, 세간에서 점차 학문이 피어난 것은 실제로 1600년대 이후의 일이다. 또 동양과 서양의 학풍이 그 내용을 달리하여, 서양 여러 나라는 실험에 대한 주장을 주로 하고, 우리 일본은 공자와 맹자의 이론을 좋아하여, 허실의 차이, 동시에 말할 수 있음이 아니라도, 역시 일률적으로 그것을 나무랄 수 없다. 아무튼 우리 국민을 야만의 단계에서 구하여 오늘날의 문명에 이르도록 한 것은, 불교와 유교의 덕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근세에 유교가 번성함에 이르러, 세속에 유행하는 신불(神佛)을 믿는 부류의 거짓말과 망설을 배척하여 사람 마음의 현혹을 불식시킴과 같은 것은, 그 공로가 매우 적지 않다. 이 한편에서 보면 유교도 역시 유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동양과 서양 학풍의 득실을 잠깐 제쳐두고, 다만 그 학문이 유행한 사정에 관하여, 두드러진 두 가지 양상의 차이를 내걸어 여기서 제시할 따름. 생각건대 그 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난세가 지나고, 학문이 일어남을 맞아, 이 학문이라는 것, 서양 여러 나라에 있어서는 국민 모두 사이에서 일어나고, 우리 일본에서는 정부 안에서 일어나는 한 가지 사건이다. 서양 여러 나라의 학문은 학자가 하는 일이어서, 그 실행하는 것이야 관민의 구별이 없고, 다만 학자의 세계에 있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소위 다스리는 자의 세계에 속하는 학문이어서, 흡사 정부의 한 부분임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적으로 보자, 도쿠가와(徳川)의 치세 250년간, 국내에서 학교라고 칭하는 것은, 처음 정부의 설립이 아니면 여러 번(藩)의 것이다. 혹은 유명한 학자가 없지 않고, 혹은 많은 저술이 없지 않아도, 그 학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하인이고 그 저서는 반드시 관청의 발간이다. 혹은 떠돌이 낭인(浪人)에서 학자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장판(蔵版: 소장본)도 있으리라고 할지라도, 그 낭인(浪人)은 하인이 되는 것을 바라서 이루지 못한 것이고, 그 개인적인 장판(蔵版: 소장본)도 관청 판본이기를 바라서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국내 학자의 결사가 있음을 듣지 못하고, 논문과 신문 등의 출판이 있음을 듣지 못하고, 기예를 가르치는 교습소를 보지 못하고, 여러 사람이 회의를 여는 곳을 보지 못하고, 전체 학문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사사로이 기획하는 것이 없다. 간혹 석학과 대유학자가, 사숙(私塾)을 열어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있으면, 그 학생은 반드시 무사에 한하여, 세습봉록을 먹고 군주를 섬기는 여가 시간에 글자를 배우는 자일 뿐. 그 배움의 흐름도 역시 다스리는 자의 명분에 어긋나지 않아서, 오로지 사람을 다스리는 길을 구하여, 수 천 백 권의 책을 독파함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혹은 드물게 은둔군자라고 칭하는 선생이 있어도, 사실은 마음에 만족하여 숨은 것이 아니고, 몰래 불우함을 탄식하여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잊고 방심한 자이다. 그 내용을 표현하여 말하면, 일본의 학자는 정부라고 칭하는 새장 속에 갇혀, 이 새장으로써 자기가 하늘과 땅으로 삼고, 이 작은 하늘과 땅 속에서 번민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세상 한 가운데 중국의 유교 교육이 멀리 퍼지지 않아서 배우는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축하할 가치가 있고, 만약 선생의 생각대로 무수한 학생을 낳는 일이 생기면, 좁은 새장 속에 혼잡하여, 몸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도 없어서, 원망은 더욱 많고, 번민은 더욱 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불쌍하기가 짝이 없는 상황이 아닌가? 이와 같이 제한된 새장 안에 한없는 학생을 낳아, 새장 바깥에 인간세상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이기에, 자신의 지위를 만드는 방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로지 그 시대의 권력자에게 의지하여, 어떤 경멸을 받아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른다.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학자의 뜻을 얻은 자는 정부와 여러 번(藩)의 유교로 등용된 관리(儒官: 유관)이다. 이름은 유관(儒官)이라고 부른다할지라도, 사실은 긴 소매 옷을 입은 신분(長袖の身分)이라 하여, 그들을 존경하지 않고, 다만 일종의 수단과 같이 다루어, 또 본인이 좋아하는 것인 정치적인 사무에서도 참가하게 하지 않고, 겨우 다섯 말의 쌀을 주어 소년들에게 독서교육을 하게 할뿐. 글을 아는 자가 드문 세상이기에, 다만 그 부자유를 보충하기 위하여 이용하기까지 하는 일이어서, 이것을 비유하면 가죽세공에 한하여 에타(穢多: 쇠백정)에게 지시하는 것과 같다. 비굴과 비천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무리를 향해 또 무엇을 바랄 것이며, 또 무엇을 비난하리? 그 패거리 안에 독립적인 결사가 없는 것은 수상한 일이 아니고, 일정한 논의가 없는 것도 역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의 전제가 충분히 사람을 속박한다고 하여, 조금 기개가 있는 유학자는 자칫하면 그것을 향해 불평을 품는 자가 없지 않다. 그렇다할지라도 잘 그 근본을 찾으면, 그 사람 스스로 씨앗을 뿌려 그것을 배양하여, 그 묘목이 무성하기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정부의 전제, 이것을 가르치는 자가 누구인가? 설령 정부 본래의 특성에 전제라는 요소가 있어도, 그 요소의 발생을 도와서 그것을 윤색하는 자는 중국에 관한 유교학자 무리의 학문이 아닌가? 옛날부터 일본의 유교학자에게서 매우 재주가 있어 매우 잘 일을 처리하는 인물이라고 칭하는 자는, 매우 전제를 잘하여 매우 잘 정부에 등용된 자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유교는 스승이고 정부는 제자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불쌍하게도, 지금 일본 국민, 누가 사람의 자손이 아니랴? 현재 세상에 있어 전제를 행하고, 또 그 전제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오로지 이것을 현대인의 죄로 돌릴 수 없고, 멀리 그 선조에게 받은 유전적인 독소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병적인 독소의 득세를 도운 자가 누구인가, 중국 유교의 선생도 역시 책임이 있고 크게 힘을 쓴 것이다. (학문에 권리가 없고 오히려 세상의 전제를 돕다)
-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 중에서 -
宗教は人心の内部に働くものにて、最も自由最も独立して、毫も他の制御を受けず、毫も他の力に依頼せずして、世に存す可き筈なるに、我日本に於ては則ち然らず。元来我国の宗旨は神仏両道なりと云ふ者あれども、神道は未だ宗旨の体を成さず。仮令ひ往古に其説あるも、既に仏法の中に籠絡せられて、数百年の間本色を顕はすを得ず。或は近日に至て少しく神道の名を聞くが如くなれども、政府の変革に際し僅に王室の余光に藉て微々たる運動を為さんとするのみにて、唯一時偶然の事なれば、余輩の所見にては之を定りたる宗旨と認む可らず。兎に角に古来日本に行はれて文明の一局を働きたる宗旨は、唯一の仏法あるのみ。然るに此仏法も初生の時より治者の党に入て其力に依頼せざる者なし。古来名僧智識と称する者、或は入唐して法を求め、或は自国に在て新教を開き、人を教化し寺を建るもの多しと雖ども、大概皆天子将軍等の眷顧を徼倖(げうかう)し、其余光を仮りて法を弘めんとするのみ。甚しきは政府より爵位を受けて栄とするに至れり。僧侶が僧正僧都等の位に補せらるゝの例は最も古く、延喜式に僧都以上は三位に准ずと云ひ、後醍醐天皇建武二年の宣旨には、大僧正を以て二位大納言、僧正を以て二位中納言、権僧正を以て三位参議に准ずとあり(釈家官班記)。此趣を見れば、当時の名僧智識も天朝の官位を身に附け、其位を以て朝廷の群臣と上下の班を争ひ、一席の内外を以て栄辱と為したることならん。之がため日本の宗旨には、古今其宗教はあれども自立の宗政なるものあるを聞かず。尚其実証を得んと欲せば、今日にても国中有名の寺院に行て其由来記を見る可し。聖武天皇の天平年中日本の毎国に国分寺を立て、桓武天皇延暦七年には伝教大師比叡山を開き根本中堂を建てゝ王城の鬼門を鎮し、嵯峨天皇弘仁七年には弘法大師高野山を開き帝より印符を賜はりて其大伽籃を建立したり。其他南都の諸山、京都の諸寺、中古には鎌倉の五山、近世には上野の東叡山、芝の増上寺等、何れも皆政府の力に依らざるものなし。其他歴代の天子自から仏に帰し、或は親王の僧たる者も甚だ多し。白河天皇に八男ありて、六人は僧たりしと云ふ。是亦宗教に権を得たる一の源因なり。独り一向宗は自立に近きものなれども尚この弊を免かれず。足利の末、大永元年実如上人の時に天子即位の資を献じ、其賞として永世准門跡とて法親王に准ずるの位を賜はりたることあり。王室の衰微貧困を気の毒に思ふて有余の金を給するは僧侶の身分として尤のことなれども、其実は然らず、西三条入道の媒酌に由り銭を以て官位を買たるものなり。之を鄙劣と云ふ可し。故に古来日本国中の大寺院と称するものは、天子皇后の勅願所に非ざれば将軍執権の建立なり。概して之を御用の寺と云はざるを得ず。其寺の由来を聞けば、御朱印は何百石、住職の格式は何々とて、其状恰も歴々の士族が自分の家柄を語るに異ならず。一聞以て厭悪(えんを)の心を生ず可し。寺の門前には下馬札を建て、門を出れば儻勢を召連れ、人を払ひ道を避けしめ、其威力は封建の大名よりも盛なるものあり。然り而して其威力の源を尋れば、宗教の威力に非ず、唯政府の威力を借用したるものにして、結局俗権中の一部分たるに過ぎず。仏教盛なりと雖ども、其教は悉皆政権の中に摂取せられて、十方世界に遍く照らすものは、仏教の光明に非ずして、政権の威光なるが如し。寺院に自立の宗政なきも亦怪むに足らず、其教に帰依する輩に信教の本心なきも亦驚くに足らず。其一証を挙れば、古来日本にて宗旨のみの為に戦争に及びしことの極て稀なるをみても、亦以て信教者の懦弱を窺ひ知る可し。其教に於て信心帰依の表に現はれたる所は、無智無学の田夫野嫗が涙を垂れて泣くものあるに過ぎず。此有様を見れば、仏法は唯是れ文盲世界の一器械にして、最愚最陋の人心を緩和するの方便たるのみ。其他には何等の功用もなく、又何等の勢力もあることなし。其勢力なきの甚しきは、徳川の時代に、破戒の僧とて、世俗の罪を犯すに非ず、唯宗門上の戒を破る者あれば、政府より直に之を捕へ、市中に晒して流刑に処するの例あり。斯の如きは則ち僧侶は政府の奴隷と云ふも可なり。近日に至ては政府より全国の僧侶に肉食妻帯を許すの令あり。此令に拠れば、従来僧侶が肉を食はず婦人を近づけざりしは、其宗教の旨を守るがためには非ずして、政府の免許なきがために勉めて自から禁じたることならん。是等の趣を見れば、僧侶は啻に政府の奴隷のみならず、日本国中既に宗教なしと云ふも可なり。(宗教権なし)
宗教尚且然り。況や儒道学問に於てをや。我国に儒書を伝へたるは日既に久し。王代に博士を置て、天子自から漢書を読み、嵯峨天皇の時に大納言冬嗣、勧学院を建てゝ宗族子弟を教へ、宇多天皇の時には中納言行平、奨学院を設る等、漢学も次第に開け、殊に和歌の教は古より盛なりしことなれども、都て此時代の学問は唯在位の子弟に及ぶのみにて、著述の書と雖ども悉皆官の手に成りしものなり。固より印書の術も未だ発明あらざれば、民間に教育の達す可き方便ある可らず。鎌倉の時に大江広元、三善康信等、儒を以て登用せられたれども、此亦政府に属したるものにて、人民の間に学者あるを聞かず。承久三年北条泰時、宇治勢多に攻入たるとき、後鳥羽上皇より宣旨来り、従兵五千余人の内より此宣旨読む可き者をと尋ねしに、武蔵国の住人藤田三郎なる者一人を得たりと云ふ。世間の不文なること以て知る可し。これより足利の末に至るまで、文学は全く僧侶の事と為り、字を学ばんとする者は必ず寺に依らざれば其方便を得ず。後世習字の生徒を呼て寺子と云ふも其因縁なり。或人の説に、日本に版本の出来たるは鎌倉の五山を始とすと云へり。果して信ならん。徳川の初に其始祖家康、首として藤原惺窩を召し、次で林道春を用ひ、太平の持続するに従て碩儒輩出、以て近世に及びしことなり。斯の如く学問の盛衰は世の治乱と歩を共にして、独立の地位を占ることなく、数十百年干戈騒乱の間、全く之を僧侶の手に任したるは、学問の不面目と云はざるを得ず。此一事を見ても儒は仏に及ばざること以て知る可し。然りと雖ども、兵乱の際に学問の衰微するは独り我日本のみに非ず、世界万国皆然らざるはなし。欧羅巴に於ても中古暗黒の時より封建の代に至るまでは、文字の権、全く僧侶に帰して、世間に漸く学問の開けたるは実に千六百年代以降のことなり。又東西の学風其趣を異にして、西洋諸国は実験の説を主とし、我日本は孔孟の理論を悦び、虚実の相違、固より日を同ふして語る可きに非ざれども、亦一概に之を咎む可らず。兎に角に我人民を野蛮の域に救て今日の文明に至らしめたるものは、之を仏法と儒学との賜と云はざるを得ず。殊に近世儒学の盛なるに及て、俗間に行はるゝ神仏者流の虚誕妄説を排して人心の蠱惑を払たるが如きは、其功最も少なからず。此一方より見れば儒学も亦有力のものと云ふ可し。故に今東西学風の得失は姑く擱き、唯其学問の行はれたる次第に就き、著しき両様の異別を掲げて爰に之を示すのみ。蓋し其異別とは何ぞや。乱世の後、学問の起るに当て、此学問なるもの、西洋諸国に於ては人民一般の間に起り、我日本にては政府の内に起たるの一事なり。西洋諸国の学問は学者の事業にて、其行はるゝや官私の別なく、唯学者の世界に在り。我国の学問は所謂治者の世界の学問にして、恰も政府の一部分たるに過ぎず。試に見よ、徳川の治世二百五十年の間、国内に学校と称するものは、本政府の設立に非ざれば諸藩のものなり。或は有名の学者なきに非ず、或は大部の著述なきに非ざれども、其学者は必ず人の家来なり、其著書は必ず官の発兌なり。或は浪人に学者もあらん、私の蔵版もあらんと雖ども、其浪人は人の家来たらんことを願て得ざりし者なり、其私の蔵版も官版たらんことを希ふて叶はざりし者なり。国内に学者の社中あるを聞かず、議論新聞等の出版あるを聞かず、技芸の教場を見ず、衆議の会席を見ず、都て学問の事に就ては毫も私の企あることなし。遇ま碩学大儒、家塾を開て人を教る者あれば、其生徒は必ず士族に限り、世禄を食て君に仕るの余業に字を学ぶ者のみ。其学流も亦治者の名義に背かずして、専ら人を治るの道を求め、数千百巻の書を読み了するも、官途に就かざれば用を為さゞるが如し。或は稀に隠君子と称する先生あるも、其実は心に甘んじて隠するに非ず、窃に不遇の歎を為して他を怨望する者歟、然らざれば世を忘れて放心したる者なり。其趣を形容して云へば、日本の学者は政府と名る篭の中に閉込められ、此篭を以て己が乾坤と為し、此小乾坤の中に煩悶するものと云ふ可し。幸にして世の中に漢儒の教育洽ねからずして学者の多からざりしこそ目出たけれ、若し先生の思通りに無数の学者を生ずることあらば、狭き篭の中に混雑し、身を容る可き席もなくして、怨望益多く、煩悶益甚しからざるを得ず。気の毒千万なる有様に非ずや。斯の如く限ある篭の中に限なき学者を生じ、篭の外に人間世界のあるを知らざる者なれば、自分の地位を作るの方便を得ず。只管其時代の有権者に依頼して、何等の軽蔑を受るも嘗て之を恥るを知らず。徳川の時代に学者の志を得たる者は政府諸藩の儒官なり。名は儒官と云ふと雖ども、其実は長袖の身分とて、之を貴ぶに非ず、唯一種の器械の如くに御して、兼て当人の好物なる政治上の事務にも参らしめず、僅に五斗米を与へて少年に読書の教を授けしむるのみ。字を知る者の稀なる世の中なれば、唯其不自由を補ふがために用ひたるまでのことにて、之を譬へば革細工に限りて穢多に命ずるが如し。卑屈賎劣の極と云ふ可し。此輩に向て又何をか求めん、又何をか責めん。其党与の内に独立の社中なきも怪むに足らず、一定の議論なきも亦驚くに足らざるなり。加之、政府専制よく人を束縛すと云ひ、少しく気力ある儒者は動もすれば之に向て不平を抱く者なきに非ず。然りと雖どもよく其本を尋れば、夫子自から種を蒔て之を培養し、其苗の蔓延するがために却て自から窘めらるゝものなり。政府の専制、これを教る者は誰ぞや。仮令ひ政府本来の性質に専制の元素あるも、其元素の発生を助けて之を潤色するものは漢儒者流の学問に非ずや。古来日本の儒者にて最も才力を有して最もよく事を為したる人物と称する者は、最も専制に巧にして最もよく政府に用ひられたる者なり。此一段に至ては漢儒は師にして政府は門人と云ふも可なり。憐む可し、今の日本の人民、誰か人の子孫に非ざらん。今の世に在て専制を行ひ、又其専制に窘めらるゝものは、独り之を今人の罪に帰す可らず、遠く其祖先に受けたる遺伝毒の然らしむるものと云はざるを得ず。而して此病毒の勢を助けたる者は誰ぞや、漢儒先生も亦預て大に力あるものなり。(学問に権なくして却て世の専制を助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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