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도쿄 번화가인 이케부쿠로역 근처 도시마공회당에서 일본 극우단체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가 혐한시위를 벌이고 있다. 옆에서는 시민들이 ‘인종주의자는 떠나라’ 등의 피켓을 들고 반대 시위에 나섰다. 도쿄/연합뉴스
[수교 50돌 새 한-일관계 탐색] (3) 멀고도 가까운 이웃
도쿄 신오쿠보에 가보니
도쿄 신오쿠보에 가보니
“예전엔 무시했지, 지금처럼 멸시하진 않았죠.”
지난달 19일 도쿄의 ‘코리아 타운’이라 불리는 신주쿠구 신오쿠보에서 얼굴을 마주한 오영석(63) 신주쿠한인상인연합회장은 긴 한숨을 내쉰 뒤 얘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오 회장은 1983년 일본에 건너와 1990년대 초부터 김치 등 한국 음식을 일본에 소개한 대표적인 재일동포 기업가로 꼽힌다. 그처럼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한 동포들을 해방 전부터 이곳에 살던 동포들과 구분해 ‘뉴 커머’라 부른다.
지금의 신오쿠보는 쇼콴도리(쇼콴거리), 오쿠보도리, 그리고 이 둘을 잇는 이케멘도리를 중심으로 500여개의 한식당과 한류 상품점이 밀집해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한류 거리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오 회장이 처음 일본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곳의 한국 상점은 신주쿠상회, 무교동식당 등 4~5곳에 불과했다. 그러더니 인근 가부키초의 술집 등에서 일하던 한국 여성, 웨이터 등의 숙소가 하나 둘씩 늘어나면서, 이들을 위한 한국 상점들도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2001년 1월 고 이수현(사망 당시 26)씨가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다 숨진 곳도 신오쿠보의 관문인 제이아르(JR) 신오쿠보역이었다.
1990년대를 지나며 조금씩 진행되던 신오쿠보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오 회장은 “1980년대 초까지 평범한 일본인이 한국을 이해하는 수준은 ‘한국’과 ‘조선’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2002년 월드컵을 통해 ‘나와 별 관계가 없던 한국’이 친근한 한국, 뭔가 매력적인 한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는 오 회장과 같은 재일동포들은 2003년 티브이(TV) 드라마 <겨울연가> 열풍이 시작될 때만 해도 한류의 지속성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스스로를 ‘1차 한국 붐 세대’라 부르는 하야시바라 게이고(39)에게도 2000년 초반에 불어 닥친 한류는 ‘뜬금없는 것’이었다. 돗토리현 출신인 햐야시바라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중학생이던 1988년 서울 올림픽이었다. 그는 이후 1994년 도쿄외국어대학 조선어과(이후 한국어과로 개칭)에 입학했고, 그동안 200편이 넘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일본어 자막을 입혀 왔다.
그는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엄청난 한류 팬이 형성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류에 대한 하야시바라의 평가는 냉정한 편이다. 이유는 간명하면서도 날카롭다. 한류가 “한-일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역사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뛰어넘은 채 상업적인 판단 아래 진행된 현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3·1절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기본적인 한국사에 대한 이해 없이, 한류 스타의 생일만 기억하는 한류를 통해 진정한 양국간 우호 관계를 쌓아가는 게 가능할까라는 게 그의 문제 의식이다.
한-일 월드컵 계기 한류 본격화
500여개 한식당·상품점 등 번성 MB 독도 방문이 변곡점 작용
열풍 식으며 혐한 시위 극성
서점가도 ‘혐한’ 서적들이 장악 폐업 70~80곳…앞으로 더 늘 전망
문닫은 곳엔 중국 관광객 면세점
한인회장 “한류 매장 못지켜 유감
오래 살수록 일본이 두려워져”
한류 업계의 일원이기도 한 그가 일본에서의 한류 확산에 큰 구실을 했다고 꼽는 것은 2000년대 위성방송 도입으로 인한 ‘다채널화 현상’이다. 채널이 늘어나자 이를 메울 콘텐츠가 필요했고, ‘비용 대비 효과’면에서 뛰어난 한류 드라마가 그 틈을 메웠다는 것이다. 하야시바라는 “그 때문에 (우익 신문인) <산케이신문>의 계열사인 <후지테레비>가 가장 많은 한류 드라마를 방영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재일동포 역사학자인 강덕상 시가현립대학 명예교수도 지난해 <한겨레>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일본에서 진행된 한류는 ‘한국의 영화를 보고,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꽤 좋았다’는 시청각적인 자극에 불과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고 나면 한류에 열광했던 일본이 왜 느닷없이 ‘혐한’ 흐름에 그토록 쉽게 휩쓸렸는지 알 수 있다.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양국 관계가 차갑게 식어버리자, 일본 사회에 잠자고 있는 혐한 정서가 본격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도쿄의 신오쿠보, 오사카의 쓰루하시 등에선 하루가 멀다하고 혐한 집회가 이어졌다.
일본 경찰청이 발표한 <치안의 회고와 전망>을 보면 재특회 등이 주도한 행진을 동반한 혐한 집회는 지난해 120여건이 열린 것으로 파악된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서점가의 혐한 열풍이었다. 지난해 가장 인기를 모은 혐한 서적 <매한론(어리석은 한국론)>(2013년 12월 출간)은 2014년 실용서적 부문 3위(30여만부 판매), <한국인에 의한 치한론(부끄러운 한국론)>은 새책 부문 9위(20여만부)를 차지했다. 나가사키 출신으로 중학생 시절 라디오에 잡히던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한국에 관심을 가졌다는 후쿠다 게이스케 <동양경제> 기자는 “한류에서 혐한으로 변해가는 일본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보면, 한민족에 대한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적인 요소가 작용한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이들은 일본에 거주하는 60만여명의 재일동포들이다. 혐한 열풍이 이어지는 동안 신오쿠보에선 대사관, 오작교 등 이름난 한식당들이 잇따라 문을 닫았다. 현재 폐업한 업체가 70~80곳에 이르며, 그 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오 회장이 운영하는 음식점 체인 ‘처가방’만 해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전체 매출이 30%나 줄었다. 오 사장은 그 적자를 메우려고 한국과 일본에 있는 건물 4채를 매각했고, 45곳이던 점포 가운데 6곳을 줄였다. 그래도 매달 1000만엔 정도의 적자가 쌓이는 중이다. 이렇게 2~3년 장사가 어려우니 최근 건물주가 재계약을 거부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오 회장은 “‘뉴 커머’는 해방 전부터 일본에 거주하던 동포들께서 말하는 일본의 ‘이지메’나 업신여김을 별로 겪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절감한다. 일본에 오래 살수록 이곳이 두려워진다”고 말했다. 오 사장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쇼콴도리의 대표적인 한류 매장인 ‘케이-플러스’(K-PLUS)의 1~2층에 입점해 있던 한국 식품점과 화장품 매장이 지난해 문을 닫은 것이다. 이제 그 자리에는 중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면세점이 들어섰다. “저곳이 신오쿠보의 얼굴과 같은 곳이예요. 저곳을 지켰어야 했는데…. 본국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사정을 알고는 있나요?” 오 회장이 씁쓸하게 말했다.
도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500여개 한식당·상품점 등 번성 MB 독도 방문이 변곡점 작용
열풍 식으며 혐한 시위 극성
서점가도 ‘혐한’ 서적들이 장악 폐업 70~80곳…앞으로 더 늘 전망
문닫은 곳엔 중국 관광객 면세점
한인회장 “한류 매장 못지켜 유감
오래 살수록 일본이 두려워져”
도쿄의 한류거리인 신오쿠보의 관문인 제이아르(JR) 신오쿠보역에서 나와 왼쪽을 향하면 이 지역의 대표적인 한류 상품 매장인 한류백화점이 나온다. 한류백화점은 지난해 5월 경영 악화로 법정관리 신청을 냈다. 한류백화점뿐 아니라 신오쿠보의 많은 한류 매장과 한국 식당들이 방문객 급감으로 경영난을 겪고 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