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말
나는 이 기회를 통하여 나의 동료 존 W. N. 와트킨스(John W. N. Watkins)에게 감사하고 싶은데 그의 부단한 관심은 나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다. 그는 본 저서를 원고와 교정쇄로 읽고 수정을 위하여 가장 도움이 되는 제안들을 내놓았다. 내가 이 후기(Postscript)를, 당초 계획되었던 바와 같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부록들로서가 아니라 독립된 책으로서 발간하기를 결심했던 것은 그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들보다 저서의 완성을 위하여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저서의 아이디어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나는 또한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공동 번역자인 줄리우스 프리드(Julius Freed) 및 란 프리드(Lan Freed) 박사에 감사하고 싶은데 그들은 교정쇄본 대부분을 읽고 문체의 개선을 위하여 수많은 제안을 내놓았다. [두 사람 모두 저서가 출간되기 여러 해 전에 사망했다. 편집자.]
조지프 아가시(Joseph Agassi)는 이 책이 저술되는 기간 동안 먼저 나의 연구 제자였고 나중에 연구 조수가 되었다. 나는 거의 모든 부분을 상세하게 그와 토론했는데 자주 그의 충고를 받고 한두 가지 서술을 확대하여 새로운 부분으로 - 또는 한 가지 경우에 전체적으로 새로운 부로 - 만들었다. [그것은 이 책의 II부가 되었다: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 그의 협조는 가장 귀중했다.
나는 또한 런던정경대학(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에게 감사하고 싶은데 그 대학은 내가 애거시 박사의 도움을 받도록 조처했으며,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 대학 고등 행동과학 연구소(the Center for Advanced Science in the Behavioral Sciences) (포드 재단[Ford Foundation])에게도 감사하고 싶은데 그 연구소는 이 책의 교정쇄에 관하여 1956년 10월부터 1957년 7월까지 지속적으로 저술활동을 할 기회를 제공했고 애거시 박사가 그 기간 동안 나를 돕도록 조처했다.
버킹엄셔, 펜 (Penn, BUCKINGHAMSHIRE), 1959년.
W. W. 바틀리(Bartley) III세는 나의 제자였고 그 후 1958-63에는 런던정경대학에서 동료 교수였으며 이 책에 관하여 1960-62동안 나와 긴밀하게 작업을 했다. 1978년 그는 후기의 편집자로서 일할 것에 동의했다. 그의 도움과 이 힘든 업무를 맡은 것에 대하여 그에게 감사한다. 나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 사이에 이 후기에 관하여 나와 작업을 했던 몇몇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는데 특히 알랜(Alan) E. 머스그레이브(Musgrave),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 아르네(Arne) F. 피터슨(Petersen), 톰 세틀(Tom Settle), 제레미 셔머(Jeremy Shearmur), 그리고 티렐 버제스(Tyrrell Burgess)이다. 이 분들 가운데서 데이비드 밀러와 아르네 피터슨은 두 분 모두 1970년 이전 다양한 시기에 완수한 엄청난 양의 작업 때문에 특별히 언급되어야 한다. 밀러는 1980년과 1981년에 추가로 귀중한 수정작업을 수행해서 제안을 내놓았다.
런던정경 대학은 이 기간 동안 연구조수를 지정함으로써 나를 지속적으로 도왔다. 1969년 내가 은퇴한 이래 13년 동안 너필드 재단(Nuffield Foundation)에서 제공하는 기부금을 받아서 런던정경 대학은 나를 도왔는데 그 재단에게 나는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런 조치에 대하여 중책을 맡았던 사람은 나의 친구이자 후계자인 존 와트킨스 교수(Professor John Watkins)였다; 런던정경 대학의 총장이었던 고 월터 애덤스 경(Sir Walter Adams); 그리고 현 총장 랠프 다렌도르프 교수(Professor Ralf Dahrendorf)는 뜨거운 우정과 나의 저서에 대한 커다란 관심으로 인하여 내가 깊은 감사한다.
1950년대에 후기가 발행되었더라면 나는 버트런드 러셀에게 그 책을 헌정했을 것이다: 바틀리 교수는 맥매스터 대학(MaMaster University)의 기록보관소에 그럴만한 내용의 편지가 존재한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후기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번역과 함께) 내가 보기에 1954년에 거의 준비되었다고 언급할 것이다. 내가 1934년의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발간을 언급하며 그 책의 원래 제목인 ‘후기: 20년 후(Postscript: After Twenty Years)’를 결정한 것은 당시였다.
버킹엄셔, 펜 (Penn, BUCKINGHAMSHIRE), 1981년.
서문, 1982년
후기의 초간본의 이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이 쓰인 이래 30년 동안 내가 여기서 제시한 관점들에 대하여 제기된 몇 가진 문제를 매우 간단하게 토론하고 싶다.
I
첫 번째 문제는 ‘반증 가능한(falsifiable)’과 (‘경험적으로 논박 가능한[empirically refutable]’)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 (‘경험적 논박가능성[empirical refutablility]’)이라는 전문적 용어와 관련된다. 나는 먼저 (본서의 2장, 1부에서 상세하게 토론된) 구획설정(demarcation)의 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1933년 인식(Erkenntnis) 3호와 1934년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 이것들을 소개했다. 구획설정의 문제는 경험적 과학 (이론들, 가설들)에 속하는 서술들과 다른 서술들, 특히 사이비-과학적, 과학이전의, 그리고 형이상학적 서술들을 우리가 구분하게 하는 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서술들. 구획설정의 문제는 훨씬 더 중요한 진리의 문제와 구별되어야 한다: 거짓으로 밝혀진 이론들은 - 보기를 들면 레일리-진즈와 윈의 방사선 공식(the radiation formulae of Rayleigh-Jeans and of Wien)이나 1913년 보아의 원자 모형 -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과학적 가설의 특징을 지닐 수 있다.
타스키(Tarski)를 좇아서 내가 진리의 기준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할지라도 나는 구획설정의 기준을 - 반증가능성의 기준 - 제시했다. 나의 제시는 서술은 (이론, 추측) 반증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경험적 과학에 속하는 위상을 지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술은 언제 반증될 수 있는가?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이라는 의미에서 반증가능성은 순전히 논리적 문제라는 것을 주목하는 일은 현재의 토론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서술의 그리고 서술 종류의 논리적 구조와만 관련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가능한 실험적 결과들이 반증으로서 수용될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서술이나 이론은, 나의 기준에 따르면, 적어도 한 가지 잠재적 반증자가 - 적어도 그 서술이나 이론과 논리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한 가지 가능한 기본적 서술 - 존재한다는 조건으로만 반증될 수 있다. 문제의 기본적 서술이 진리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적 서술의 종류는 한 가지 기본적 서술이 관찰될 것임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사건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이 문제를 덜 추상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여기서 네 가지 보기를 내놓겠다: 두 가지 반증 가능한 서술과 두 가지 반증 불가능한 서술.
(1) ‘모든 백조는 희다’. 예를 들어 이 이론은 (우연히도, 거짓인) 다음 기본적 서술과 모순이 되기 때문에 반증 가능하다: ‘1934년 5월 16일에 검은 백조가 오전 10시와 11시 사이에 비엔나의 폭스가르텐(Volksgarten)에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 동상 앞에 서 있었다.’
(2) 아인슈타인의 관성적이고 (수동적으로) 무거운 질량의 비례의 원칙 (principle of proportionality of inert and [passively] heavy mass). 이 등가 원칙은 많은 잠재적 반증자와 갈등을 일으킨다: 관찰이 논리적으로 가능한 사건들. 그러나 그런 반증을 실험적으로 실현하려는 모든 시도에도 (최근 디키[Dicke]에 의하여 더욱 개량된 외트뵈스[Eötvös]의 실험들) 불구하고 그 실험들은 지금까지 등가의 원칙을 입증했다.
(3) ‘모든 인간 행동은 자기 이익으로 동기가 부여되어 이기주의적이다.’ 이 이론은 널리 수용된다: 이 이론은 행동주의, 정신분석, 개인심리학, 공리주의, 세속적 마르크스주의, 종교, 그리고 지식의 사회학에서 변종을 낳았다. 분명히 이 이론은, 변종들과 함께, 반증 불가능하다: 이타적 행동에 관한 어떤 사례도 그 이면에 숨겨진 이기주의적 동기가 있었다는 견해를 반증할 수 없다.
(4) 순전히 존재론적인 서술들은 -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의 유명한 사례에서처럼 - 논박이 가능하지 않다: ‘쳐다보는 사람들 내부에서 공포를 조장하는 색깔이(‘Trumpet-red’) 있다.’ 또 다른 사례는: ‘정확하게 실행하면 악마를 나타나게 하는 의식이 있다.’ 그런 서술들은 반증될 수 없다. (원칙적으로 그런 서술들은 검증될 수 있다: 실행하면 뿔과 발굽을 지닌 인간과 같은 형태의 모습을 낳는 의식을 발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그 의식을 반복해도 동일한 결과가 이룩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증일 것인데 왜냐하면 아마도 올바른 의식에 대한 간과되었지만 필수적인 면이 빠졌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구획설정 기준의 의미에서 반증가능성은 반증이 실제로 실행될 수 있다거나, 반증이 실행된다면, 반증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구획설정 기준이라는 의미에서 반증가능성은 문제의 이론과 기초서술 집합 즉, 기초서술에 의하여 기술된 사건의 집합 사이의 논리적 관계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잠재적 반증자. 그리하여 반증가능성은 이 두 집합과 관련된다: 이 집합 중 한 가지가 주어진다면 반증가능성은 순전히 논리의 문제이다 - 문제의 이론이 지닌 논리적 특성.
잠재적 반증자 집합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닌 최초의 보기에 - ‘모든 백조는 희다’ - 의하여 가장 잘 증명될 수 있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서술은 반증될 수 있다. 그러나 희지 않은 백조가 그에게 보이면 백조는 희다는 것인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백조일 리가 없다는 견해를 유지하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하자.
그러한 견해는 희지 않은 백조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로서 (그리하여 또한 관찰될 수 없는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 견해는 희지 않은 백조들을 잠재적 반증자들의 집합에서 제외한다.
잠재적 반증자들의 이 변경된 집합과 관련하여 ‘모든 백조는 희다’는 서술은 물론 반증될 수 없다. 그런 움직임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론의 경험-과학적 특징을 옹호하는 사람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자신이 그 특징이 반증된 것으로서 간주할 준비가 될 것인지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요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적어도 몇 가지 잠재적 반증자들을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중대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내가 주장하는 순전히 논리적인 구획설정 기준으로부터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두 번째 의미의 ‘반증 가능한’이나 ‘반증가능성’에 왔다.
우리는 실제적인 반증이 매우 강렬해서 우리가 문제의 이론을 반증된 것으로서 (그리하여 거짓으로서) 간주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문제의 이론을 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출구가 있지 않은가?
나는 항상, 심지어 과학적 발견의 논리 초판본에서와 (1934년) 또한 초기이지만 겨우 최근에야 발간된 인식론의 두 가지 기초적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rkenntnistheorie) (1979년, 1930-33년에 쓰임)에서 경험적 과학이론이 거짓임을 결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런 이론들은 반증될 수 없다. ‘모든 이론 체계는 경험적 반증으로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보호될 수 있다.’ (기초적 문제, 353쪽). ‘반증을 피하는 어떤 방식을 발견하는 것은, 예를 들어 임시적인 부수적 가설을 도입함으로써 항상 가능하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42쪽, 반증가능성이 도입되는 부분에서). ‘이론에 대한 결정적인 반증은 만들어질 수 없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 50쪽).
그리하여 반복하지만 우리는 ‘반증 가능한(falsifiable)’과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라는 표현의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
(1) 반증가능성에 관한 구획설정 기준이라는 의미에서 논리-전문적 용어로서의 ‘반증 가능한(falsifiable)’. 이 순전히 논리적인 개념은 - 아마도 우리는 원칙적으로 반증 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 문제의 이론과 기초적 서술의 집합 (혹은 그 서술에 의하여 기술되는 잠재적 반증자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근거한다.
(2) 문제의 이론이 분명하거나 결정적이거나 명시적으로 반증될 수 (‘명시적으로 반증 가능한’) 있다는 의미에서 ‘반증 가능한(falsifiable)’. 심지어 첫 번째 의미에서 명백하게 반증될 수 있는 이론도 두 번째 의미에서는 반증될 수 없다고 나는 항상 강조하였다. (이런 이유로 나는 ‘반증 가능한’이라는 표현을 첫 번째 전문적 의미에서만 통상적으로 사용하였다. 두 번째 의미에서 나는 통상적으로 ‘반증가능성’이 아니라 오히려 ‘반증(falsification)’과 반증의 문제점들에 관하여 말했다.)
접미사 ‘~될 수 있는(able)’과 ‘가능성(ability)’은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다소 다르게 사용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첫 번째 의미가 원칙적으로 반증에 관한 논리적 가능성을 언급한다할지라도 두 번째 의미는 오류성에 대한 결정적인 실제적 실험성 증거를 언급한다. 그러나 경험적 문제를 결정할 결정적 증거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헌은 이 구분을 주목하지 못했다. 경험적 과학 이론들은 확정적으로 반증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이 적용될 수 없다고 흔히 언급된다. 덜 중요하게는 두 번째 의미에서 과학적 이론들의 반증불가능성 발견은, 내 자신이 이것을 반복적으로 지적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론과 상치되는 업적이라고 흔히 언급된다 (아래 IV절 참조). (두 가지 의미를 - 어떤 이론들이 몇 가지 잠재적 반증자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이론들이 원칙적으로 반증될 수 있다는 가능성인 ‘반증가능성1’, 그리고 이론은 최종적 경험적 증거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론은 거짓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항상 문제가 있는 가능성인 ‘반증가능성2’ - ‘포퍼0’, ‘포퍼1’, 그리고 ‘포퍼2’, 기타 등등의 반어적 구분이 실행되었다 (다시 말해서 심하게 서로 상치되어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다양한 단계의 ‘포퍼’의 반어적 구분).그리고 많은 경우에 불가능성인 결정적인 실제적 반증의 난제들은 제안된 구획설정 기준의 난제나 심지어 불가능성으로서 제시된다.
이것 모두는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이론에서 이성주의를 버리고 비이성주의에 빠져들도록 유도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이 이성적이고 비판적으로 진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성적 결정들이 다른 곳에서 실행될 것이라고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가? 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해된 논리-전문적 용어에 대한 경솔한 공격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재앙적인 철학적이자 심지어 정치적인 결론에 다다랐다.
모든 경험적 반증의 불확실성이 (내 자신이 반복적으로 지적한) 너무 진지하게 수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내가 또한 지적한 바와 같이) 강조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이 지닌 오류가능성이 허용하는 바와 같은 ‘확정적인(definitive)’ 몇 가지 중요한 반증이 있다. 게다가 모든 반증은 반대로 검증을 다시 받아야 한다. 반증의 한 가지 사례는 - 톰슨(Thomson)의 원자 모형에 대한 반증으로 어네스트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가 핵 모형으로 제시하게 되었다 - 반증이 지닐 힘의 예시하기 위하여 여기서 언급되어야 한다. 톰슨의 원자모형에서는 양전하(陽電荷: positive charge)가 원자가 차지하고 있는 전체 영역에서 걸쳐서 분포했다. 러더포드는 이 모형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 후 그의 제자인 가이거(Geiger)와 마스덴(Marsden)이 유명한 실험을 했다. 그들은 매우 얇은 금엽(金葉: gold leaf) 조각에 투사된 알파입자들이 방향을 바꿀 따름인 대신 금엽으로부터 때때로 반사됨을 발견했다. 반사된 입자들은 희귀했지만 - 약 2만 개 중에서 하나 - 통계적으로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러더포드는 경악했다. 그는 4반세기가 지난 후에 이것에 대하여 글을 발표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생애에서 나에게 발생했던 가장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그것은 당신이 티슈종이 조각에 15인치 포탄을 쏘고 그 포탄이 돌아와서 당신을 맞추는 것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러더포드의 설명은 탁월하다. 티슈종이 조각에 발사된 거대한 대포알이 그 티슈종이 조각에 의하여 반사된다는 것은 심지어 2만분의 1이라는 규칙적인 통계확률을 지닌다고 할지라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 틀림없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그리하여 톰슨의 이론은 (그 이론에 따르면 원자들이 티슈종이와 같은 벽을 형성한다) 확정적으로 반증되지 않는다. 그러나 러더포드와 몇 명의 다른 물리학자들은, 그들 가운데 한 명은 닐스 보어(Niels Bohr)인데, 또 다른 이론이 필요하다는 데 만족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톰슨의 이론이 반증되어 러더포드의 핵 모형에 의하여 대체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것은 자체의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약 20년 후에 반대로 양자역학에 의하여 대체된 보어의 탁월한 원자 모형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흔히 반증이 수용되기까지는 긴 기간이 걸린다. 반증은 반증된 이론이 새롭고도 개선된 이론에 대한 제안에 의하여 대체될 때까지 통상적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막스 플랑크(Max Planck)가 지적한 바와 같이, 새로운 세대의 과학자들이 성장할 때까지 우리는 흔히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러더포드의 새로운 원자모형에 (1912년) 관해서도 필수적이지 않았고 J. J. 톰슨(Thomson)의 전자(electron)와 같은 원자 이하의 입자를 인정하는 데도 필수적이지 않았는데 톰슨의 원자 이하의 입자론은 분해 불가능한 원자론이 반증되었음을 의미했다. (원자는 약 기원전 460년 전부터 정의[定義]에 의하여 분해가 불가능한 것으로서 간주되었다.) 또한 그것은 단지 두 가지 기초 입자만 - 양성자와 전자 - 있다는 강력한 이론을 칼 앤더슨(Carl Anderson)이 반증한 것과 물질의 전자기이론을 히데키 유카와(Hideki Yukawa)가 거부한 것에도 필수적이지 않았다.
이것들은 성공적인 반증을 통하여 도입된 많은 과학적 혁명의 사례 중 네 가지 사례일 뿐이다.
첫 번째 의미인 구획설정의 기준의 의미에서 오해되는 반증가능성의 논리-전문적 의미는 두 가지 역사적 전설을 낳았다. 첫 번째이자 중요하지 않은 전설은 이론의 반증가능성이 지닌 비결정성을 - 이론은 두 번째 의미에서 결정적으로 반증될 수는 없다는 사실 - 내가 간과한 것이다. 반면 사실상 나는 이것을 1932년 이래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두 번째 전설은 (훨씬 더 중요한 전설이다) 반증이 과학사에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반증은 자체의 비확정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미 주어진 사례들은 이것에 대하여 얼마간의 증거를 제공하지만 나는 다음 부분에서 다소 심층적 사례들을 제시할 것이다.
II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 심지어 나의 과거 제자들 몇 명에 의하여 - 나의 과학론이 과학사의 사실들에 의하여 반증된다고 주장되었다. 이것은 오류다: 이것은 과학사의 사실들에 대해서도 오류이고 또한 나의 방법론이 주장하는 것에 관해서도 오류이다.
1934년에 내가 명백히 하려고 노력했던 바와 같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 37쪽; 그리고 10 및 11 절) 나는 방법론을 아마도 과학사의 사실들에 의하여 시험될 경험적 원칙으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방법론은 오히려 철학적 - 형이상학적 - 원칙인데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규범적 제안(normative proposal)이다. 방법론은 주로 형이상학적 사실주의와 상황논리에 근거한다: 현상 배후에 있는 미지의 실제를 탐구하여 실수로부터 배우기를 갈망하는 과학자들의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론이 - 새로운 문제의 출현이 뒤따르고 반대로 새롭고 아마도 혁명적인 이론이 뒤따르는 반증의 - 과학역사가에게는 가장 큰 흥밋거리였는데 왜냐하면 나의 이론이 역사가들이 역사를 바라보아야 하는 방식에 대한 수정을 유발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항상 생각했다; 특히 당시 (1934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과학의 귀납법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대부분 이것을 포기했다 - 심지어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나의 이론이, 그 이론이 정확한 정도까지, 틀림없이 과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흥미를 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나는 그들 대부분이라고 믿는다 - 세상에 대한 나의 사실주의적 관점을 공유하고 또한 내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과학의 목표들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점점 개선된 설명을 성취하는 것.
몇몇 사례들이 유용할 것이다.
목록이 여기에 제시되는데 반증이 혁명적인 이론 재구축을 낳았던 흥미로운 사례들이다. 이 목록은 주로 1930년대와 나의 뉴질런드 시절도 돌아가는데 뉴질런드 시절에 나는 물리학사로부터 사례를 들어 나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뉴질런드 왕립협회의 크라이스트처취 분회(the Christchurch branch of the Royal Society of New Zealand)에서 일련의 강의를 했다. 나는 다양한 장소에서 이 사례들 중 몇 가지에 관하여 글을 썼다; 그리고 나는 이 목록이 나의 다양한 글에서 내가 언급했던 반증의 모든 사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항상 주로 나의 기억에 의존했다: 나는 내 자신이 과학역사가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급한 작업의 압력 때문에 나는 더 많은 사례들을 찾아서 물리학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나는 수 백 가지 사례가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제시된 목록이 - 반증의 사례들로서 이해될 수만 있는 몇 가지 두드러진 사례의 목록 - 충분히 인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역사적으로 과학은 경험적 반증을 수용했을 때 과학이 된다고 제시하고 싶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이것을 진지한 가설로서 제안하지 않는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사례가 반대 사례가 될 것이다: 경험적 반증에 의하여 착수되지 않은 위대한 과학이론.)
거의 무작위로 선택된 사례 목록
(1) 파메니데스-레우키푸스(Parmenides-Leucippus): 레우키푸스는
운동의 존재(the existence of motion)를 세상의 가득 차 있고
움직임이 없다는 파메니데스의 이론에 대한 부분적 반증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원자와 공동(atoms and void)’의 이론을 낳는다.
이것은 원자론의 토대이다.
(2)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반증한다: 이로 인하여
가속이론의 토대가 생겨나고 나중에는 뉴튼의 힘 이론이 생겨난다. 또한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들과 금성의 상(相: phases)을 프톨레미 (Ptolemy)에 대한 반증으로서그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반대 이론에 대한 경험적 증거로서 간주한다.
(3) 토리첼리(Torricelli) (그리고 그의 선배들): ‘자연은 공동을 혐오한다 (nature abhors a vacuum)’에 대한 반증. 이것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준비한다.
(4) 당시까지 주장된 (심지어 티코[Tycho]와 갈릴레오에 의하여) 원운동 (circular motion) 가설에 대한 케플러의 반증은 케플러의 법칙과
그리하여 뉴튼의 이론을 낳았다.
(5) 라부와지에(Lavoisier)의 플로지스토론(phlogiston theory) 반증은
현대 화학을 낳았다.
(6) 뉴튼의 빛 이론 반증 (영[Young]의 이중 슬릿 실험[two-slit experiment]). 이로 인하여 영-프레넬(Young-Fresnel)이 빛
이론이 탄생했다. 움직이는 물속에서 빛의 속도는 또 다른
반증이다. 그것은 특수 상대성을 준비했다.
(7) 에르스테드(Oersted)의 실험은 파라데이(Faraday)에 의하여 뉴튼의 중심력이라는 보편적 이론에 대한 반증으로 해석되어 파라데이-
맥스웰(Faraday-Maxwell)의 장이론(field theory)을 낳는다.
(8) 원자론: 원자의 원자성은 톰슨 전자에 의하여 반증된다. 이로 인하여 물질의 전자기 이론이 탄생하며 조만간 전자론이 발흥한다.
아인슈타인과 바일(Weyl)이 중력과 전자기학의 일원론적
(‘통합된’) 이론을 시도한 것을 참조하라.
(9) 마이켈슨(Michelson)의 실험은 (1881-1887-1902, 기타 등등)
로렌츠(Lorentz)의 움직이는 물체에서 전기적 및 시각적 현상론 실험 (Versuch einer Theorie der elektrischen und optischen Erscheinungen in bewegten Körpern)을 (1895년: §89 참조)
낳는다. 로렌츠의 저서는 아인슈타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1905년 상대성 논문의 §9에서 두 번이나 그
저서를 언급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마이켈슨의 실험을 매우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a)
로렌츠가 세운 형식주의(formalism)의 발전이며 (b) 그 형식주의의
다른 - 다시 말해서 상대주의적 - 해석이다. 로렌츠와 아인슈타인의 해석 사이에서 지금까지 선택할 결정적인 실험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떨어져서 행동을 채택해야 한다면 (비-인근성[non-locality]:
후기의 III권 양자론과 물리학에서의 분열(Quantum Theory and the Schism in Physics), 1982년 서문 참조하면 우리는 로렌츠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마이켈슨의 실험이 지닌 중요성에 관하여 어떤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수년이 걸렸다: 나는 반증이 통상적으로 즉각 수용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앞의 절을 참조) - 심지어 반증이
잠재적 반증으로서 즉각 인정도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10) 뢴트겐(Roentgen)과 베크렐(Becquerel)의 우연한 발견이 어떤
(무의식적으로 지닌) 기대를 반증했다; 특히 베크렐의 기대. 그 발견은 물론 혁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11) 빌헬름 빈(Wilhelm Wien)의 (부분적으로) 성공적인 흑체복사론(theory
of black body radiation)은 (부분적으로) 또한 매우 성공적인 제임스 진즈 경(Sir James Jeans)과 레일리 경(Lord Layleigh)의 이론과
상충했다. (앞 절을 참조.) 레일리와 진즈의 복사 공식을
루머(Lummer)와 프링스하임(Pringsheim)이 반증함으로써 빈(Wien)의
저술과 함께 플랑크(Planck)의 양자론이 탄생했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
108쪽 참조.). 여기서 플랑크는 자신의 이론인 엔트로피 법칙의
절대주의적 해석이 볼츠만(Boltzman)의 해석과 유사한 확률적 해석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반증한다.
(12) 필리프 레나르트(Philipp Lenard)의 광전자 효과에 관한 실험은,
레나르트 자신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맥스웰의 이론으로부터 기대될
수 있던 것과 상충되었다. 그 실험은 아인슈타인의 양광자론
(theory of light-quanta 혹은 photons)을 (물론 또한 맥스웰과
상충되었다) 낳았고 훨씬 뒤에 입자-파동이라는 이원론을 낳았다.
(13) 마흐-오스발트의 물질의 반-원자론적이고 현상주의적 이론(the Mach-
Oswald anti-atomistic and phenomenalistic theory of matter)에
대한 반증: 1905년의 브라운운동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논문은
브라운운동이 이 이론에 대한 반증으로서 해석될 것임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이 논문은 분자와 원자의 실체를 확립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14) 원자의 보텍스 모델(the vortex model of the atom)에 대한
러더포드의 반증.이것은 곧바로 보어(Bohr)의 1913년 수소원자론을
낳았고 그리하여 종국적으로 양자역학을 낳았다.
(15) 화학적 원소는 인위적으로 변할 수 없다는 (비록 그 원소들이
자발적으로 분해할지라도) 이론에 대한 러더포드의 반증 (1919년).
(16) 보어, 크래머스 그리고 슬레이터(Bohr, Kramers and Slater)의 이론
(과학적 발견의 논리, 250, 243쪽 참조.): 이 이론은 콤튼(Compton)과
사이몬(Simon)에 의하여 반증되었다. 그 반증은 거의 즉각적으로
하이젠베르크-보른-요르단(Heisenberg-Born-Jordan)의 양자역학을
낳았다.
(17) 자신의 (그리고 드 브로글리[de Broglie]의) 이론에 대한 슈뢰딩어 (Schrödinger)의 해석은 물질파동의 통계적 해석에 의하여 반증된다 (예를 들어 데이비슨[Davisson]과 거머[Germer]의 실험 및 조지
톰슨[George Thomson]의 실험에 의하여).
(18) 앤더슨(Anderson)이 양전자(陽電子: positron)를 발견하여 (1932년)
많은 것이 반증된다: 두 가지 기초입자의 - 양성자와 전자 - 이론이 반증된다; 입자의 보존이 반증된다; 그리고 디락(Dirac)이 예측한
양전하 입자에 (그는 양전하 입자들이 양성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대한 자신의 독창적인 해석이 반증된다. 1930-31년경의 이론적 업적이
그리하여 입증된다. (세부사항에 관하여 노우드 러셀 핸슨[Norwood
Russell Hanson]: 양전자 개념[The Concept of the Positron],
1963년을 참조; 탁월한 책이다.)
(19) 아인슈타인과 바일(Weyl)에 의하여 상술되고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자신의 생애 마지막까지 함축적으로 주장된 - 아무튼 추구된 - (그가
통합장 이론을 두 가지 장인 중력과 전자기 이론으로서 해석했기
때문에) 물질의 전기 이론(the electrical theory of matter)은
중성자(neutron)와 유카와(Yukawa)의 핵력(nuclear forces) 이론에
의하여 반증된다: 유카와 중간자(the Yukawa Meson). 그리하여 핵
이론이 탄생한다.
(20) 홀짝성 보존(parity conservation)의 반증. (앨런 프랭클린[Allan Franklin], 과학사와 과학철학 연구[Stud. Hist. Philos. Sci.], 10,
1979년, 201쪽 참조.)
III
물론 이 반증들이 반대로 상상력이 풍부하며 비판적인 사고를 자극했던 새로운 문제 상황을 만들어냈을 뿐이라는 것은 이해된다. 전개된 새로운 이론들은 그리하여 반증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었다: 새로운 이론들은 창조적 사고의, 사고하는 사람들의 업적이었다.
또 다른 분명한 언급은, 몇 가지 이 경우에서, 반증이 그런 상태로서 수용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반증이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기보다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 의하여 반증으로서 - 당연한 문제로서 - 수용되기까지는 흔히 승산 없는 싸움들이, 때때로 장기적인 싸움들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그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12)의 경우에도 그렇지 않았고 (레나르트의 결과들은 상당히 신속하게 수용되었다), (13)에서 (17) 그리고 비록 마지막 (18)의 경우의 반증된 이론은 길게도 살아남았다 할지라도 심지어 (18)의 경우에도 그렇지 않았다.
물론 재구축이 뒤따른 반증과 관련하여 이 분석에는 예외적인 경우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예외적인 경우는 코페르니쿠스로 생각되는데 그의 목표는 프톨레미(Ptolemy)에 의하여 설명된 경험적 사실들에 대하여 대안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었다.이것이 실제로 예외적 경우임을 확신하기 위하여 우리는 더 자세히 경우를, 특히 과학자들에 의한 이론의 수용을 연구해야 할 것인데 그 수용은 (2)에서 언급된 갈릴레오의 새로운 경험적 발견까지 연기되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 새로운 경험적 발견은 프톨레미에 대한 반증으로 주장될 수 있다.
내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나의 과학이론에는 역사적 이론이 되거나 역사적이거나 다른 경험적 사실들에 의하여 증명된 이론이 되려는 의도가 없었다. 그러나 과학사를 혁명적이면서도 보수적인 재구축이 뒤따르는 반증의 이론으로서 많이 조명할 수 있는 과학이론이 존재하는지 나는 의심한다.
IV
여기는 토마스 S. 쿤(Thomas S. Kuhn)이 과학역사가의 신분으로서 과학에 관한 나의 견해들이 (때로는, 그러나 나에 의해서가 아닌, ‘반증주의[falsificationism]’라고 지칭되는) 사실에 의하여 반증될 수 있음을 밝힌 사람이라는 전설을 언급하여 반증할 장소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의 역사에 의하여 과학에 관한 나의 견해들이 반증될 수 있음을.
나는 쿤이 이것을 증명하려고 심지어 시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과학사에 대한 반증의 중요성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쿤과 나의 견해는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것은 과학에 관한 쿤과 나의 견해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들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진리에 관한 고대의 이론을 지지하며 (제노파네스[Xenophanes]와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와 플라톤에게서 [대화<Cratylus>] 거의 명시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전적으로 명시적인) 그 이론에 따르면 진리는 주장되는 것에 관한 사실들과의 일치이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관한 쿤의 견해들은 내가 보기에 상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더 정확하게는 어떤 형태의 주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예를 들어 폴라니(Polanyi)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어떤 형태의 엘리트주의(elitism)의 영향을 받았다. 쿤은 내가 보기에 폴라니의 신앙주의(fideism)의 영향을 또한 받았다: 과학자는 자신이 제시하는 이론에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이론 (반면 과학자들은 - 1916년의 아인슈타인 혹은 1913년의 보어[Bohr]처럼 - 조만간 대체될 추측을 제시하고 있음을 흔히 깨닫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차이점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객관적인 이성적 비판에 대한 나의 강조이다: 나는 이론들이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의 관점으로부터, 이론들을 향한 비판적 접근을 고대와 현대 과학의 특징으로 간주한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내가 보기에 쿤이 이념적 혁명과 연결되지 않은 많은 순전히 과학적인 혁명들의 중요성을 보지 못하는 듯하다는 점이다. 사실상 그는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반증가능성이나 반증의 결정적 증거 불가능성과 그것들이 과학사와 과학적 혁명의 역사에서 행한 부분에 관하여 쿤과 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전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쿤은 그 자신이 그의 관점과 나의 관점 사이에서 많은 유사점들을 또한 강조한다 할지라도 여기서 우리들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들을 보는 듯하다. 이 유사점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1950년 내가 하버드에서 행한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강좌에 참석했다고 언급한다. 그는 또한 동시에 나의 세미나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두 시간짜리 8개 강좌와 두 시간짜리 8개 세미나이다) 가장 활발하고 가장 비판적인 참석자였다고 나는 부언하겠다. 그러나 이 회합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는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한 듯하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코페르니쿠스의 혁명(The Copernican Revolution)을 (1957년; 보급판, 1959년) 썼을 때쯤 그는 분명히 나의 견해에 대하여 매우 도식적인(schematic) 기억을 지니고 있어서 나를 ‘순진한 반증주의자’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쿤은 과학의 진보가 지닌 혁명적 특징에 관한 나의 사실적 견해를 실제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단지 내가 위에서 ‘신앙주의(fideism)’로 묘사했던 것을 지지하는 데서만 나의 견해로부터 이탈했다; 이유인즉 그가 ‘과학자는 자신의 과학체계를 미지의 것에 대한 생산적인 탐구의 길잡이로서 신뢰하기 전에 자신의 과학체계를 신뢰해야한다’고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함] 주장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쿤은 계속해서 ‘그러나 과학자는 자신의 업보에 대하여
대가를 치른다... 자신의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관찰도 자신이 줄곧 그릇된 이론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줄 것이다<may demonstrate>]그렇다면 그의 개념적 도식은 포기되어 대체되어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반증주의(falsificationism)’이다; 사실상 그 후 자신의 저서인 과학적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1962년, 77쪽) 쿤이 나를 언급한 것을 인용하면, ‘반증의 방법론적 고정관념’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앞선 코페르니쿠스에 관한 저서에서 쿤은 계속한다: ‘개괄적으로 그것은 과학적 혁명의 논리적 구조이다. 개념적 도식은... 마침내 관찰과 양립할 수 없는 결과들을 낳는다... 이론과 관찰의 양립불가능성은 과학에서의 모든 혁명의 궁극적 근원이기 때문에 그것은 유용한 개요이다.’
과학적 혁명의 논리에 관한 이 ‘유용한 개요’는 반증주의적만은 아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나의 글에서, 나의 강연에서, 혹은 나의 세미나에서 언급한 어떤 말보다 훨씬 더 지나치게 단순화한 반증주의의 고정관념이다; 사실상 나는 쿤이 부언한 다음과 같은 보다 비판적 언급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혁명의 과정은 논리적 개요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렇게 단순한 적도 없고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그런 적이 드물다’] 도저히 그렇게 단순할 수도 없다 [?러더포드! 위를 참조]. 우리가 이미 발견하기 시작한 바와 같이, 관찰은 [이론]과 절대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적은 없다.’
물론 나는 이 요점을 1934년에 이미 강조하고 있었다 (경험적으로 과학적인 이론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반증’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내가 또한 지적한 바와 꼭 마찬가지로 나는 항상 ‘관찰은 잉태된 이론임’을 지적했다. 위 I 절을 참조.) 그러므로 내가 쿤의 두 번째 저서인 과학적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77쪽) 다음 구절을 읽을 때 나는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지 과학적 발전에 대한 역사적 연구에 의하여 밝혀진 어떤 과정도 자연과 직접 비교한 반증의 방법론적 고정관념을 전혀 닮지 않았다’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함].
이것으로 쿤을 무엇을 의미했던가? 역사적 과정은 반증의 과정을 전혀 닮지 않는다는 것이거나 역사적 과정이 쿤이 ‘자연과의 직접적인 비교’로서 규정하는 그 ‘고정관념’을 닮지 않는다는 것인데 ‘자연과의 직접적인 비교’를 그는 다른 곳에서 ‘순진한 반증주의(naive falsificationism)’이라고 지칭하고 나는 한 반증주의자로서 항상 거부하였던 것?
이제 쿤이 반증의 ‘고정관념’에 관하여 언급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내 자신의 이론임이 밝혀진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 (P. A. 쉴프[Schilpp] 편집, 칼 포퍼의 철학[The Philosophy of Karl Popper], 808쪽) 그는 이렇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칼 경은 물론 순진한 반증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방금 언급된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의 생애 초반부부터 그것을 강조했다.... 그가 순진한 반증주의자가 아니라할지라도, 칼 경은 순진한 반증주의자로서 합당하게 취급될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함.]
이 구절을 실제로 놀랍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정확히 같다: ‘포퍼는 살인자가 아니라할지라도 살인자로서 합당하게 취급될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이 놀라운 판결에 이르는 실제적 논증은 쿤의 논문에 없다; 그가 ‘순진한 반증주의’라고 지칭하는 것에 반대하는 내 자신의 논증이 ‘[나의 기본적 위치가 지닌 진정성’을 위협한다고 그가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러나 그가 나의 ‘기본적 위치’라고 잘못 믿는 것은 전설이나 패러다임일 뿐인데 그에 따르면 포퍼는 순진한 반증주의자이다. 그 논증은 (만약 누가 그것을 논증이라고 부른다면) 순환적이다.
쿤은 자신이 서술한 것을 실제로 믿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어떻게 쿤은 그럴 수 있는가? 나는 몇 가지 설명적 이론들을 시험했다. 그 이론들 중 오직 한 이론만 나에게 합당하게 보인다. 포퍼에 대한 자신의 패러다임이 된 것은 쿤이 자신의 생애 초기에서 나의 견해에 관한 이론을 형성한 것이다: 포퍼는 검증주의(verificationism)를 (‘순진한’) 반증주의로 대체한 사람이었다. 쿤은 이 패러다임을 나의 글을 읽기 전에 (자기 자신의 지적에 따라서) 형성했다. 마침내 그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를 읽었을 때 그는 이 패러다임에 비추어 읽었다. 이 저서의 많은 구절은 (반증의 개념을 내가 소개한 직후의 쪽에 있는 구절) 내가 그의 패러다임과 맞아 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가 쿤으로부터 배운 바와 같이 패러다임은 그렇게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제 이렇다. 나는 실제로 순진한 반증주의를 나의 사고의 핵심으로 지녔던 사람인가? 쿤의 패러다임은 진실인가? 쿤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를 읽은 후 1934에도 내가 순진한 반증주의자가 아님을 인정했을지라도 나는 ‘순진한 반증주의자로서 합당하게 취급될’ 것인가?
인간 지식에 관한 나의 생각의 실제적 핵심은 오류가능성(fallibilism)과 비판적 접근이다; 그리고 심지어 1934년 이전에 (나의 저서 인식론의 두 가지 핵심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rkenntnistheorie] 참조) 나는 인간의 지식이 동물의 지식 중에서 매우 특별한 경우임을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다. 동물의 지식 (인간의 지식을 포함하여) 분야에서 나의 핵심적 생각은 동물의 지식이 유전된 지식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동물의 지식은 무의식적인 기대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동물의 지식은 항상 이전 지식을 수정한 결과로 발전한다. 수정은 돌연변이이다 (혹은 돌연변이와 같다): 수정은 내부로부터 온다, 수정은 시안(試案: trial balloon)의 성질을 지닌다, 수정은 직감적이거나 대담하게 창의적이다. 수정은 그리하여 추측적 특징을 지닌다: 기대는 좌절을 맛볼지도 모른다, 풍선이나 물방울은 구멍이 뚫릴지도 모른다: 외부로부터 받은 모든 정보는 제거될 수 있고, 선택적이다.
인간의 지식에 관하여 특별한 것은 그 지식이 언어로, 명제로 설명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지식이 의식적이 되어 논증과 시험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비판될 수 있음이 가능해진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과학에 다다른다. 시험은 시도되는 반증이다. 모든 지식은 오류가능성을 지니고 추측성이다. 물론 반증의 최종적 정당화를 포함하여 정당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증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오류 제거에 의하여, 피드백(feedback)에 의하여 배운다.이 설명에서 ‘순진한 반증주의’에 대한
여지는 없다.
V
나의 지식론에 대한 또 다른 반대론은, 비록 나의 이론에 미친 그 반대론의 충격은 미미하다할지라도, 더 잘 구축되었다. 그것은 내가 1963년에 제안한 정의(定義: definition)에 대하여 인정된 실패작이다.
나는 먼저 나의 지식론에서 (혹은 다른 사람의 지식론에서) 나올 것 같은 유일한 종류의 진리유사성이라는 개념인 (1)과 (2)의 두 가지 보기를 들어 설명하겠다.
(1) 지구가 정지되어 있고 별들로 구성된 천체들이 지구 주위를 선회한다는 서술은, 지구가 자전한다는 서술보다 진리로부터 멀다; 정지해있는 것은 태양이라는 서술보다; 그리고 지구와 다른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서술보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제안한 바와 같이). 행성들은 원형으로 선회하지 않고 태양을 공동의 중심으로 (태양은 정지해있거나 태양 자체를 축으로 회전하면서) (그다지 길쭉하지 않은) 타원형으로 선회한다는 케플러의 서술은 진리에 더 가깝다. 정지해있는 공간이 있지만 선회와 별도로 그 공간의 위치는 별들을 관찰하거나 기계적 효과를 관찰함으로써 발견될 수 없다는 (뉴튼의) 서술은 진리를 향하여 더 나아간 단계이다.
(2) 유전에 대한 그레고르 멘델(Gregor Mendel)의 생각은 찰스 다윈의 견해보다 진리에 더 가까운 듯하다. 나중에 일어난 초파리 기르기 실험은 유전이론의 진리근사성을 한층 더 향상시켰다. 집단(종[種: species])의 유전자풀(gene pool)이라는 개념은 한 걸음 진보한 단계이다. 그러나 단연코 가장 위대한 단계는 유전자 암호를 발견한 데서 정점을 이루었다.
(1)과 (2)의 사례들은 진리근사성에 대한 공식적 정의(定義: definition)가 진리근사성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말하기 위하여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아래 261-278쪽 또한 참조.)
그렇다면 왜 나는 공식적인 정의를 내놓으려고 노력했는가?
나는 정의의 필요성에 반대하여 자주 논증했다. 정의란 실제로 필요하지 않고, 다음 상황에서를 제외하고, 별로 소용도 없다: 훌륭한 이론에 대하여 기본적 추론이 더욱 적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론이 정의 없이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음을 우리는 정의를 도입함으로써 밝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정의는 그 정의가 이론을 강화한다는 조건으로만 흥미를 유발한다. 나는 나의 과학의 목표론과 관련하여 이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학은 진리를 목표로 함과 동시에 설명하는 문제를 해결을, 다시 말해서 더 큰 설명력, 더 훌륭한 내용, 그리고 더 큰 시험가능성을 지닌 이론들을 목표로 한다는 이론. 진리 및 내용에 관한 진리근사성을 정의함으로써 이 과학의 목표론을 한층 더 강화하려는 희망은 불행하게도 터무니없다. 이 정의를 폐기하는 것이 나의 이론을 약화시킨다는 폭넓게 지지를 받는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다. 나의 정의에 대한 비판이 제시되고 수 분만에 왜 내가 전에 실수를 보지 못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그 비판을 수용했다고 나는 부언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적어도 1933년에 전개했고 그 후 건강하게 자랐으며 연구하는 과학자들에 의하여 많이 이용된 나의 지식론이 불행하게도 오해를 받는 정의에 의하여 조금이라도 흔들렸으며, 혹은 (내 이론의 본질적 부분이 아닌) 진리근사성이라는 개념이 나의 이론 내부에서 정의되지 않은 개념으로 한층 더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아무도 밝히지 않았다.
나의 권위가 이 사건으로 손상당했다는 주장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소망한 적이 없다. 나의 이론이 손상을 입었다는 주장은 근거를 대려는 시도도 없이 전개되어서 내가 보기에 힘이 없는 듯하다.
VI
나의 이론은 넬슨 굿맨의 역설(Nelson Goodman' paradox)에 답할 수 없다고 반대의 표적이 또한 때때로 된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2000년 1월 1일 이전에 관찰된 모든 에메랄드는 초록색이다’라는 증거서술(evidence statement) e는 ‘적어도 2000년 2월까지 모든 에메랄드는 초록색이다’라는 가설 h1을 ‘초록색인 2000년 이전에 관찰된 에메랄드를 제외하고 모든 에메랄드는 푸른색이다’라는 가설보다 더 개연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단순한 계산에 의하여 증명하는 다음 고찰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이것은 언어적 조사에 의하여 설명되어 해체될 역설이 아니라 증명될 수 있는 확률계산의 정리(定理)이다. 그 정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확률계산은 확률이 확장적이라는 (그리하여 귀납적이라는) 추측과 양립할 수 없다.
확률이 확장적이라는 생각은 널리 수용된다. 그 생각은 증거 e가 - 가령 오스트리아의 모든 백조는 흰색이다 - ‘오스트리아와 근접한 지역의 모든 (혹은 대부분의) 백조는 흰색이다’라는 h2와 같은 e를 초월하는 서술의 확률을 어떤 방식으로든 확대시킬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그 생각은 증거는 증거가 실제로 주장하는 것을 초월한 물체들을 적어도 다소 더 개연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예를 들어 카르납[Carnap)에 의하여 강력하게 옹호되었다.)
확률이 확정적이라는 견해는 특히 다음 정리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h = 가설; e = 경험적 증거; b = 배경지식):
p(h,b) ≠ 0이라고 하자. 나아가 e를 호의적인 증거로 하자 (다시 말해서 b의 출현에서 e가 h로부터 도출되어 p(e,b) ≠ 1 그리고 p(e,hb) = 1) 그렇다면 p(h, eb) > p(h,b)이다. 다시 말해서 호의적인 증거는, h가 e보다 더 많을 것을 말할지라도, h를 더 개연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새로운 e1, e2에,... 대해서도 적용되는데 그것들은 유사한 조건을 충족시킨다.
그러므로 증가하는 호의적인 증거는 지속적으로 h를 지지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 지지는 확장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에서 밝혀질 수 있는 바와 같이 환상이다:
h1과 h2를 b의 출현에서 e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 두 가지 가설로 하면
p(e,b) ≠ 1 그리고 p(e,h1b) = p(e,h2b) = 1이다;
R1,2 (이전) = p(h1,b)/p(h2,b)를 증거 e 이전의 h1 및 h2의 확률비율로 하자; 그리고
R1,2 (이후) = p(h1,eb)/p(h2eb)를
증거 e 이후의 두 가지 확률비율로 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여하한 h1에 대하여, 여하한 h2에 대하여, 그리고 여하한 e에 대하여 다음을 갖는다:
R1,2 (이전) = R1,2 (이후).
이것은 다음으로부터 거의 즉각적으로 도출되는데
p(a,bc) = p(ab,c)/p(b,c),
다시 말해서 베이즈 정리(Bayes's theorem)로부터이다.
R1,2 (이후) = R1,2 (이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두 가지 가설 모두가 증거 e를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이전 확률을 계산을 했던지 혹은 자유롭게 상정을 했던지 관계없이, 증거는 이전 확률비율을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h1 = 오스트리아보다 큰 어떤 지역의 모든 백조는 흰색이다;
h2 = 세상의 모든 백조는 흰색인 오스트리아의 백조를 제외하고 보라색이다;
e = 오스트리아의 모든 백조는 희다고 한다면,
당신이 좋아하는 h1 및 h2에 대한 이전 확률을 상정하여: 그것들의 비율 R1,2 (이전)는 증거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 백조에 관해서도 에메랄드에 관해서도 확장적 확률은 없다. 그리고 이것은 터무니없지 않고 동어반복적이고 (그래서 번역에 의하여 철저히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사용된 언어가 통상적인 (‘고정된[entrenched]’) 언어인지 아니면 특수한 언어인지의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칼포퍼 원전+번역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 1부 비판적 접근, 1장 귀납법 (2017년 12월 2일 수정본) (0) | 2011.12.18 |
---|---|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 - 서문, 1956년 - (0) | 2011.08.02 |
사실주의와 과학의 목표(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 편집자 서문 - (0) | 2011.06.26 |
파메니데스의 세계 논문 3 달이 달빛을 파메니데스의 두 가지 길에 비추는 (0) | 2010.08.02 |
파메니데스의 세계 논문 2 알려지지 않은 제노파네스 (0) | 2010.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