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초판본)
인간의 이성에는 인간의 인식 한 종류에서의 특별한 운명이 있는데, 거부할 없는 질문으로써 괴로움을 당하는 운명이다; 이유인즉 그 운명이 답변할 수 없는 이성의 본성에 의하여 그 운명은 스스로 제한되기 때문이며 그 운명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 운명은 자신의 잘못 없이 당황한다. 그 운명은, 경험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어 경험을 통하여 필수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충분히 증명되는, 원리들로부터 시작한다. 그 원리들로 인하여 그 운명은 항상 더 높은 곳으로 솟구쳐 (그 본성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한층 먼 상황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 운명은, 의문이 끝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그 운명이 하는 일이 항상 미완성으로 틀림없이 남아있을 것임을 의식한다. 그래서 그 영혼은, 모든 가능한 경험 사용을 능가하고 동시에 매우 의심스럽지 않게 보이는 원리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어, 천박한 인간 이성조차도 그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리하여 인간 이성은 암흑과 모순으로 치닫고, 암흑과 모순으로부터 인간 이성이 발견할 수 없는 숨겨진 실수가 틀림없이 어딘가에 기초를 이루고 있음을 인정하는데, 그 까닭은 인간 이성이 이용하는 원리들이 모든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경험상의 기준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끝없는 논쟁의 전쟁터가 이제 형이상학(Metaphysik)이라 불린다.
형이상학이 모든 과학의 여왕으로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행위 대신에 의지를 취한다면, 형이상학의 대상들이 지니는 탁월한 중요성 때문에, 정말로 이 명예로운 호칭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제 시대의 변한 양식으로 인하여 형이상학은 모든 경멸을 당하고 헤큐바(Hecuba)처럼 추방당하고 버림을 받고 신음한다: 명예의 첨탑에 늦게까지 앉아서 많은 아들을 거느리고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다 이제는 추방당하여 무일푼이네 (modo maxima rerum, tot generis natisque potens - nunc trahor exul, inops; [역주] But late on the pinnacle of fame, strong in my many sons. now exiled, penniless, 영문번역 J. M. D. Meiklejohn) -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처음에 형이상학의 운용은, 독단론자의 지배 하에서, 독단적이었다. 그러나 입법에는 옛날 야만성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만큼, 형이상학의 제국은 내부의 전쟁을 통하여 점차 완전한 무질서로 발전했으며 땅에 정착해서 사는 모든 삶을 혐오하는 유목민의 일종인 회의론자들이 때때로 시민 사회를 분열시켰다. 그들은 다행히도 소수였기 때문에, 일관적인 계획에 근거해서는 아닐지라도, 시민 사회가 다시 성장하려고 애쓰는 것을 항상 새롭게 막을 수는 없었다. 더 최근에는 인간 이해력의 어떤 생리학을 (유명한 로크[Locke]로부터) 통하여, 이 모든 논쟁이 끝나서 형이상학이 주장하는 바의 합당성은 완전히 확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소위 이 여왕의 출처가 민중의 공통 경험으로부터 유래해서 여왕이 주장하는 바가 당연히 의심스럽다할지라도, 실제로 이 계보가 틀리게 조작되어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유지해왔다. 그리하여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이 낡고 좀이 쓴 독단과 경멸 속에서 황폐화 되자 과학자들이 그로부터 끌어내기를 원했다. 이제 모든 방법이 (믿어지는 바와 같이) 시도되어 무효로 밝혀진 다음에, 팽배한 분위기는 권태와 철저한 무과심주의의 분위기였는데, 모든 과학에서 혼란과 암흑의 어머니지만 이 경우에는 다행히도 과학의 다가오는 개혁과 계몽의 근원이거나 적어도 전주곡이다. 그 까닭은 그런 분위기가 과학을 그렇게 암울하고 당혹스럽고 이용할 수 없게 만들었던 잘못 적용된 근면을 적어도 끝장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연구 목표가 인간의 본성에 무관심할 수 없는 그런 연구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소위 이 무관심한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들이 학파의 언어를 대중적인 목소리로 바꾸어 자신들을 숨기려고 노력한다할지라도, 그들이 어디에서라도 생각을 한다면, 자신들이 그렇게 많이 경멸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형이상학적 주장에 빠진다. 그런데 이 무관심은, 과학의 꽃 속에 나타나고 바로 그 과학을 발견하는데 그와 같은 것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과학에 관한 지식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을 것인데, 주목받고 관조될 만한 현상이다. 사이비 지식으로써 더 이상 지체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분명히 시대의 경박(輕薄)함이 주는 효과가 아니라 성숙한 판단력이 [각주] 우리는 종종 우리 시대가 지닌 사고방식의 경박함과 건전한 과학의 퇴보에 관한 한탄을 듣는다. 그러나 수학이나 물리학이나 기타 등등과 같이 토대가 건전한 과학들이 이런 비난을 조금이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런 과학들은 건전함과 관련한 옛 명성을 받을 자격이 있고 후자(後者)인 물리학의 경우에는 심지어 그 명성을 능가한다. 심지어 동일한 정신이, 다른 종류의 지식의 교정을 위하여 먼저 제공되기만 했다면, 그 지식에서도 활발했으리라. 그것이 없다면 무관심과 의심과 마지막으로 엄격한 비판이 실제로 완벽한 사고방식의 증거이다. 우리의 시대는 실제로 비판의 시대로 모든 것이 복종해야 하는 시대이다. 종교는 자체의 성스러움을 통하여, 그리고 입법은 자체의 존엄성을 통하여 일반적으로 비판을 피하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러나 종교와 입법은 합당한 의심을 불러 일으켜, 자유롭고 공개적인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에만 이성이 허용하는 진정한 존경을 주장할 수 없다. 주는 효과이다. 그 임무 중에서 가장 무거운 임무, 즉 자신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행하는 것과, 합당하고 안전한 주장에 의해서지만 모든 근거 없는 주장을 없애고 언명(言明)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법칙을 향하여 종교와 입법을 보낼 수 있는 재판정을 도입하는 것은 이성으로의 초대이다. 그리고 이 재판정은 다름 아닌 순수이성비판 자체이다.
나는 그러나 아래서 서적이나 철학체제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과 별도로 그 비판이 향할 모든 지식과 관련하여 일반적인 이성의 역할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비판은 일반적인 형이상학에 관한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결정하며, 또한 그 근원과 목적 및 범위와 한계를 결정하는데 모두 원칙에 따라서이다.
나는 남겨진 유일한 이 길을 추구해왔고, 그 길의 비경험적 사용에서 지금까지 그 길과 상반되는 모든 오류를 피하는 방법을 발견했다고 그 길을 추구하면서 나는 자위(自慰)한다. 나는 인간의 이성이 지닌 무능을 호소함으로써 그 길이 지닌 의문점을 회피하지 않았고, 반대로 나는 원칙에 따라 이 의문점들을 세분화하였고 오해로 인하여 이성이 자체와 충돌을 일으키는 지점을 발견한 후에 그 의문점들을 이성이 완벽하게 만족하도록 해결했다. 정말로 이 의문점들에 대한 답변은, 독단적이고 열광적인 지적 호기심이 내가 익숙지 않은 마술을 통해서만 만족될 수 있는 것을 기대하도록 만들 것처럼, 그렇게 완전히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문점에 대한 그런 답변 방식은 우리 이성이 지닌 자연법칙의 목적이 또한 정말로 아니다; 그리고 여하한 칭찬을 받아서 인기있는 망상이 그로 인해 부인된다 할지라도, 철학의 의무는 오해로부터 유래하는 기만을 없애는 것이었다. 이 일에서 나는 세밀함을 나의 주요 목표로 삼았고, 감히 말하지만 여기서 해결되지 않았거나 해결을 위하여 적어도 열쇠가 주어지지 않은 형이상학적 문제는 하나도 없다. 정말로 순수이성이란 매우 완벽한 통합체여서 이성이 이성 자체의 본질을 통하여 제기하는 모든 문제 중 하나에게라도 이성이 지닌 원칙이 불충분하다면, 다른 문제들을 더 철저히 신뢰하며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원칙을 버릴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그렇게 건방지고 무례한 주장들에 대한 불쾌감이 섞인 경멸을, 모든 모습으로, 독자들의 얼굴에서 감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주장들은 가장 평범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영혼의 단순한 특성이나 세상의 최초 시작에 관한 필연성을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저술가의 주장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겸손하다. 이유인즉 그 저술가들이 가능한 경험의 모든 한계를 넘어 인간의 인식을 확대하겠다고 자청하지만 내가 겸손하게 고백 하는 바 이것은 나의 능력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이성 자체와 이성적 순수 사고를 전적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그것들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나는 멀리 갈 필요가 없는 이유는 내 자신에게서 나는 그것들을 조우하고, 이성이 지닌 모든 단순한 행동을 완벽하고 체계적으로 나열하는 보기를 평범한 논리가 제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경험적 재료와 도움을 박탈당했을 때, 얼마만큼 내가 이성으로써 겨냥하기를 바랄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각 문제를 결정하는 데 완벽성과, 더 자의적인 의도가 아니라 우리가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주제로서 지식의 본성 자체가 우리에게 던진 모든 목적을 결정하는 데 세부사항에 관해서는 이만큼만 하자.
그러나 확실성과 명료성은 우리의 탐구와 관련된 두 가지 부분인데, 중요한 요건이 기대하는 바와 같이, 저술가가 매우 암시적인 일을 감히 떠맡아 당연히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확실성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나는 말했다: 이런 종류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전혀 허용될 수 없으며, 최저 가격도 받지 못할 가설을 닮은 모든 것은 금지품이 되어 발견되자마자 감추어질 것이다. 이유인즉 선험적으로 유효하다고 주장할 모든 지식은 스스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간주될 것을 선언하고, 실제로 선험적인 모든 순수 지식의 목적은 척도이며, 결과적으로 스스로 모든 필연적인 (철학적인) 확실성의 본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부분에서 내가 떠맡은 것을 내가 완성했는지는 온전히 독자의 판단에 달려있는데 이유인즉, 판단할 판단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아도 근거를 대는 것이 저자에게 적합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부당하게 자신의 논증을 약화하는 원인이 되지 않도록, 부차적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어떤 불신을 초래할 수 있는 어떤 구절에 주목하는 일이 허용될 것이다. 그런 절호의 간섭은 이 사소한 문제들에 관한 정의(定義)되지 않는 의심이 주제와 관련하여 독자의 자세에 미칠 영향을 상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내가 형이상학적 분석 2장에서 순수 이해개념의 연역이라는 제목으로 사용한 연구보다, 우리가 이해력이라고 부르는 능력을 탐구하는 데와 동시에 그 이해력을 사용하는 규칙과 한계를 결정하는 데서 더 중요한 연구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연구에 나는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내가 바라던 바와 같이,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 이 연구는 다소 깊은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두 가지 면을 지니고 있다. 한 가지 면은 순수 이해력의 대상과 관련되어, 그 선험적 개념을 기술(記述)하여 이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의 목적에 필수적이다. 다른 한 가지 면은 순수 이해력 자체, 그 이해력의 가능성과 그 이해력이 근거하는 인지능력을 탐구하려고 노력하여, 결국 주관적 관점에서 탐구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의 주목적과 관련하여 이 토론이 중요하다할지라도, 주목적에 필수적이지는 않다; 이유인즉 주요 문제는 이해력과 이성이, 모든 경험과 별도로, 무엇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이지, 사고력은 어떻게 가능한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후자(後者)는 주어진 결과의 원인을 탐색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특성상 다소 가설과 같은 것이다 (내가 다른 곳에서 지적할 바와 같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할지라도); 그리고 나는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독자들에게는 다르게 의견을 말하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나의 주관적인 추론이 내가 기대하는 완벽한 믿음을 유발하는 데 실패한다할지라도, 내가 여기서 주로 관심을 갖는 객관적 추론이 완벽한 힘을 갖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나는 독자의 비판을 막아야겠다. 이 문제에 관하여 92-93쪽에 언급된 것이 어떤 경우에서도 그 자체로 충분할 수 있다.
명료성에 관해서 독자에게는 무엇보다도 개념을 통하여 추론적 (논리적) 명료성을, 그 다음에는 직감을 통하여 다시 말해서 사례와 다른 구체적인 설명을 통하여 직감적 (미학적) 명료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전자(前者)에 대해서 나는 충분히 다루었다. 그것은 나의 계획과 관련되어 있지만, 시급하지는 않다할지라도 상당히 합당한 후자(後者) 요건을 내가 공평하게 취급할 위치에 있지 않은 우연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 문제에서 어떻게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나는 거의 항상 망설였다. 사례와 설명은 항상 나에게 필수적으로 보였고 나의 첫 번째 계획에서 필수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나는 다루어야 할 나의 문제의 규모와 복합성을 즉각 알아보았다; 그리고 무미건조하여 순전히 학문적 말로 다루어 작업이 이미 충분히 확대될 것임을 내가 인식하여, 사례와 설명을 통하여 그 작업을 훨씬 더 확대하는 일이 권고할만하지 않음을 나는 알았다. 이것들은 단지 대중적인 목적에서 필요하고, 특히 이 작업은 절대로 대중적인 이용에 적당하도록 확대될 수 없어서, 비록 항상 유쾌한 것일지라도, 그런 위안은 진정한 과학도에게 필요하지 않고 이 경우에 그 효과가 스스로 파멸적일 것이다. 수도원장이었던 테라슨(Terrasson)은 진실로 이렇게 말했다: 책의 크기가 쪽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의하여 측정된다면, 많은 저술에 대하여 이렇게 다음과 같이 언급될 수 있다: 많은 책이 그다지 짧지 않다면, 그 책은 훨씬 더 짧을 텐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드넓다할지라도 원리의 통일성으로부터 도출되는 일관성을 지닌 사변적 인식 전체에 대한 이해가능성을 계획한다면, 우리는 심지어 똑같이 올바르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책이 그렇게 분명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분명했을 텐데. 이유인즉 명징성에 대한 보조자료들은, 세부사항에서 정말로 도음이 되지만, 우리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을 흔히 방해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충분히 빠르게 전체에 대한 개관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예시적 자료의 찬란한 색깔들이 개입하여 철학체계의 설명과 짜임새를 은폐하고 은닉하는데, 그 철학체계는 우리가 그 체계의 통일성과 효율성을 판단할 수 있다면, 가장 우리와 관련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저술가가 제시된 계획에 따라 크고 중요한 저술을 완벽하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완료하려는 전망을 지니고 있다면, 독자에게는 자신의 노력을 저술가의 노력과 연결하는 것이 조금도 작은 유혹이 아닐 수 있다. 이제 형이상학은,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개념에 따라서, 정말로 짧은 시간 안에 우리 후손들의 의도에 따라서 교훈적 방식으로 그 유일한 과학을 수정하는 임무 외에는 우리 후손에게 임무를 남기지 않을 그런 완성을 작지만 연결된 노력을 통하여 그 유일한 과학이 성취할 것이라고 약속할 모든 과학 중에서 유일한 한 가지 과학이다; 그 수정하는 임무에서 그 유일한 과학의 내용에 여하한 것도 후손들은 덧붙일 수 없다. 이유인즉 순수 이성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배열되는 것은 모든 우리 소유물의 재고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무 것도 우리를 피해갈 수 없는데 이유인즉, 이성이 전적으로 자신으로부터 생산해내는 것은 은닉될 수 없고 공동의 원리가 발견되자마자 이성을 통하여 스스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지식이 지니는 완벽한 통일성과, 그 통일성이 경험이나 특별한 직감에 의하여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개념으로부터만 도출된다는 사실은, 이 절대적인 완벽성을 합당하게 만들 뿐 아니라 필요하게 만드는데 특별한 직감은 자체를 확대하고 증가시킬 확고한 경험을 낳을 것이다. Tecum habita et noris, quam sit tibi curta supellex [각주] “당신 자신의 집을 돌아보라, 그러면 가구가 얼마나 초라한지 당신은 인식할 것이다”.. 페르시우스(Persius).
그런 순수 (관념적) 이성의 철학체계를 나는 내 자신이 자연 형이상학이라는 제목 하에 제시하고 싶다. 그 철학체계는 규모에서 여기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풍요로운 내용을 지닐 것인데, 완전히 황폐한 토대를 청소하고 평단하게 하면서 여기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은 우선적으로 그런 비판의 가능성에 대한 근원과 조건을 설명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독자에게서 재판관의 인내와 공정성을 기대하지만, 다른 곳에서 나는 협조자의 순종과 도움을 기대한다; 그 까닭은 철학체계의 모든 원리가 아무리 완벽하게 순수이성비판에서 진술된다할지라도 철학체계의 정밀성 자체는 동일하게 도출된 개념들이 하나도 부족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개념들은 선험적 측정으로 열거될 수 없지만 틀림없이 점진적으로 발견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순수이성비판에서 개념들의 완벽한 통합이 철저히 규명되었던 반면, 그 개념들에 대한 분석을 유사하게 완벽하게 만드는 추가 작업이 여전이 남을 것인데 그 작업은 모두 쉽고 노동이라기보다는 즐거움이다.
Vorrede
Die menschliche Vernunft hat das besondere Schicksal in einer Gattung ihrer Erkenntnisse: daß sie durch Fragen belästigt wird, die sie nicht abweisen kann; denn sie sind ihr durch die Natur der Vernunft selbst aufgegeben, die sie aber auch nicht beantworten kann; denn sie übersteigen alles Vermögen der menschlichen Vernunft.
In diese Verlegenheit gerät sie ohne ihre Schuld. Sie fängt von Grundsätzen an, deren Gebrauch im Laufe der Erfahrung unvermeidlich und zugleich durch diese hinreichend bewährt ist. Mit diesem steigt sie (wie es auch ihre Natur mit sich bringt) immer höher, zu entfernteren Bedingungen. Da sie aber gewahr wird, daß auf diese Art ihr Geschäft jederzeit unvollendet bleiben müsse, weil die Fragen niemals aufhören, so sieht sie sich genötigt, zu Grundsätzen ihre Zuflucht zu nehmen, die allen möglichen Erfahrungsgebrauch überschreiten und gleichwohl so unverdächtig scheinen, daß auch die gemeine Menschenvernunft damit im Einverständnisse steht. Dadurch aber stürzt sie sich in Dunkelheit und Widersprüche, aus welchen sie zwar abnehmen kann, daß irgendwo verborgene Irrtümer zum Grunde liegen müssen, die sie aber nicht entdecken kann, weil die Grundsätze, deren die sich bedient, da sie über die Grenze aller Erfahrung hinausgehen, keinen Probierstein der Erfahrung mehr anerkennen. Der Kampfplatz dieser endlosen Streitigkeiten heißt nun Metaphysik.
Es war eine Zeit, in welcher sie die Königin aller Wissenschaften genannt wurde, und wenn man den Willen für die Tat nimmt, so verdiente sie, wegen der vorzüglichen Wichtigkeit ihres Gegenstandes, allerdings diesen Ehrennamen. Jetzt bringt es der Modeton des Zeitalters so mit sich, ihre alle Verachtung zu beweisen und die Matrone klagt, verstoßen und verlassen, wie Hecuba: modo maxima rerum, tot generis natisque potens - nunc trahor exul, inops - Ovid. Metam.
Anfänglich war ihre Herrschaft unter der Verwaltung der Dogmatiker, despotisch. Allein, weil die Gesetzgebung noch die Spur der alten Barbarei an sich hatte, so artete sie durch innere Kriege nach und nach in völlige Anarchie aus und die Skeptiker, eine Art Nomaden, die allen beständigen Anbau des Bodens verabscheuen, zertrennten von Zeit zu Zeit die bürgerliche Vereinigung. Da ihrer aber zum Glück nur wenige waren, so konnten sie nicht hindern, daß jene sie nicht immer aufs neue, obgleich nach keinem unter sich einstimmigen Plane, wieder anzubauen versuchten. In neueren Zeiten schien es zwar einmal, als sollte allen diesen Streitigkeiten durch eine gewisse Physiologie des menschlichen Verstandes (von dem berühmten Locke) ein Ende gemacht und die Rechtmäßigkeit jener Ansprüche völlig entschieden werden; es fand sich aber, daß, obgleich die Geburt jener vorgegebenen Königin aus dem Pöbel der gemeinen Erfahrung abgeleitet wurde und dadurch ihre Anmaßung mit Recht hätte verdächtig werden müssen, dennoch, weil diese Genealogie ihr in der Tat fälschlich angedichtet war, sie ihre Ansprüche noch immer behauptete, wodurch alles wiederum in den veralteten wurmstichigen Dogmatismus und daraus in die Geringschätzung verfiel, daraus man die Wissenschaft hatte ziehen wollen. Jetzt, nachdem alle Wege (wie man sich überredet) vergeblich versucht sind, herrscht Überdruß und gänzlicher Indifferentismus, die Mutter des Chaos und der Nacht, in Wissenschaften, aber doch zugleich der Ursprung, wenigstens das Vorspiel einer nahen Umschaffung und Aufklärung derselben, wenn sie durch übel angebrachten Fleiß dunkel, verwirrt und unbrauchbar geworden.
Es ist nämlich umsonst, Gleichgültigkeit in Ansehung solcher Nachforschungen erkünsteln zu wollen, deren Gegenstand der menschlichen Natur nicht gleichgültig sein kann. Auch fallen jene vorgeblichen Indifferentisten, so sehr sie sich auch durch die Veränderung der Schulsprache in einem populären Tone unkenntlich zu machen gedenken, wofern sie nur überall etwas denken, in metaphysische Behauptungen unvermeidlich zurück, gegen die sie doch so viel Verachtung vorgaben. Indessen ist diese Gleichgültigkeit, die sich mitten in dem Flor aller Wissenschaften ereignet und gerade diejenigen trifft, auf deren Kenntnisse, wenn dergleichen zu haben wären, man unter allen am wenigsten Verzicht tun würde, doch ein Phänomen, das Aufmerksamkeit und Nachsinnen verdient. Sie ist offenbar die Wirkung nicht des Leichtsinns, sondern der gereiften Urteilskraft[Fußnote] Man hört hin und wieder Klagen über Seichtigkeit der Denkungsart unserer Zeit und den Verfall gründlicher Wissenschaft. Allein ich sehe nicht, daß die, deren Grund gut gelegt ist, als Mathematik, Naturlehre usw. diesen Vorwurf im mindesten verdienen, sondern vielmehr den alten Ruhm der Gründlichkeit behaupten, in der letzteren aber sogar übertreffen. Eben derselbe Geist würde sich nun auch in anderen Arten von Erkenntnis wirksam beweisen, wäre nur allererst für die Berichtigung ihrer Prinzipien gesorgt worden. In Ermanglung derselben sind Gleichgültigkeit und Zweifel und endlich, strenge Kritik, vielmehr Beweise einer gründlichen Denkungsart. Unser Zeitalter ist das eigentliche Zeitalter der Kritik, der sich alles unterwerfen muß. Religion, durch ihre Heiligkeit, und Gesetzgebung durch ihre Majestät, wollen sich gemeiniglich derselben entziehen. Aber alsdann erregen sie gerechten Verdacht wider sich und können auf unverstellte Achtung nicht Anspruch machen, die die Vernunft nur demjenigen bewilligt, was ihre freie und öffentliche Prüfung hat aushalten können. des Zeitalters, welches sich nicht länger durch Scheinwissen hinhalten läßt und eine Aufforderung an die Vernunft, das beschwerlichste aller ihrer Geschäfte, nämlich das der Selbsterkenntnis aufs neue zu übernehmen und einen Gerichtshof einzusetzen, der sie bei ihren gerechten Ansprüchen sichere, dagegen aber alle grundlosen Anmaßungen, nicht durch Machtsprüche, sondern nach ihren ewigen und unwandelbaren Gesetzen, abfertigen könne, und dieser ist kein anderer als die Kritik der reinen Vernunft selbst.
Ich verstehe aber hierunter nicht eine Kritik der Bücher und Systeme, sondern die des Vernunftvermögens überhaupt, in Ansehung aller Erkenntnisse, zu denen sie,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streben mag, mithin die Entscheidung der Möglichkeit oder Unmöglichkeit einer Metaphysik überhaupt und die Bestimmung sowohl der Quellen, als des Umfanges und der Grenzen derselben, alles aber aus Prinzipien.
Diesen Weg, den einzigen, der übrig gelassen war, bin ich nun eingeschlagen und schmeichle mir, auf demselben die Abstellung aller Irrungen angetroffen zu haben, die bisher die Vernunft im erfahrungsfreien Gebrauche mit sich selbst entzweit hatten. Ich bin ihren Fragen nicht dadurch etwa ausgewichen, daß ich mich mit dem Unvermögen der menschlichen Vernunft entschuldigte; sondern ich habe sie nach Prinzipien vollständig spezifiziert und, nachdem ich den Punkt des Mißverstandes der Vernunft mit ihr selbst entdeckt hatte, sie zu ihrer völligen Befriedigung aufgelöst. Zwar ist die Beantwortung jener Fragen gar nicht so ausgefallen, als dogmatisch schwärmende Wißbegierde erwarten mochte; denn die könnte nicht anders als durch Zauberkräfte, darauf ich mich nicht verstehe, befriedigt werden. Allein, das war auch wohl nicht die Absicht der Naturbestimmung unserer Vernunft; und die Pflicht der Philosophie war: das Blendwerk, das aus Mißdeutung entsprang, aufzuheben, sollte auch noch soviel gepriesener und beliebter Wahn dabei zu nichte gehen. In dieser Beschäftigung habe ich Ausführlichkeit mein großes Augenmerk sein lassen und ich erkühne mich zu sagen, daß nicht eine einzige metaphysische Aufgabe sein müsse, die hier nicht aufgelöst, oder zu deren Auflösung nicht wenigstens der Schlüssel dargereicht worden. In der Tat ist auch reine Vernunft eine so vollkommene Einheit: daß, wenn das Prinzip derselben auch nur zu einer einzigen aller der Fragen, die ihr durch ihre eigene Natur aufgegeben sind, unzureichend wäre, man dieses immerhin nur wegwerfen könnte, weil es alsdann auch keiner der übrigen mit völliger Zuverlässigkeit gewachsen sein würde.
Ich glaube, indem ich dieses sage, in dem Gesichte des Lesers einen mit Verachtung gemischten Unwillen über, dem Anscheine nach, so ruhmredige und unbescheidene Ansprüche wahrzunehmen, und gleichwohl sind sie ohne Vergleichung gemäßigter, als die, eines jeden Verfassers des gemeinsten Programms, der darin etwa die einfache Natur der Seele, oder die Notwendigkeit eines ersten Weltanfanges zu beweisen vorgibt. Denn dieser macht sich anheischig, die menschliche Erkenntnis über alle Grenzen möglicher Erfahrung hinaus zu erweitern, wovon ich demütig gestehe: daß dieses mein Vermögen gänzlich übersteige, an dessen Statt ich es lediglich mit der Vernunft selbst und ihrem reinen Denken zu tun habe, nach deren ausführlicher Kenntnis ich nicht weit um mich suchen darf, weil ich sie in mir selbst antreffe und wovon mir auch schon die gemeine Logik ein Beispiel gibt, daß sich alle ihre einfachen Handlungen völlig und systematisch aufzählen lassen; nur daß hier die Frage aufgeworfen wird, wieviel ich mit derselben, wenn mir aller Stoff und Beistand der Erfahrung genommen wird, etwa auszurichten hoffen dürfe.
So viel von der Vollständigkeit in Erreichung eines jeden, und der Ausführlichkeit in Erreichung aller Zwecke zusammen, die nicht ein beliebiger Vorsatz, sondern die Natur der Erkenntnis selbst uns aufgibt, als der Materie unserer kritischen Untersuchung.
Noch sind Gewißheit und Deutlichkeit zwei Stücke, die die Form derselben betreffen, als wesentliche Forderungen anzusehen, die man an den Verfasser, der sich an eine so schlüpfrige Unternehmung wagt, mit Recht tun kann.
Was nun die Gewißheit betrifft, so habe ich mir selbst das Urteil gesprochen: daß es in dieser Art von Betrachtungen auf keine Weise erlaubt sei, zu meinen und daß alles, was darin einer Hypothese nur ähnlich sieht, verbotene Ware sei, die auch nicht für den geringsten Preis feil stehen darf, sondern sobald sie entdeckt wird, beschlagen werden muß. Denn das kündigt eine jede Erkenntnis, die a priori feststehen soll, selbst an, daß sie für schlechthin notwendig gehalten werden will, und eine Bestimmung aller reinen Erkenntnisse a priori noch vielmehr, die das Richtmaß, mithin selbst das Beispiel aller apodiktischen (philosophischen) Gewißheit sein soll. Ob ich nun das, wozu ich mich anheischig mache in diesem Stücke geleistet habe, das bleibt gänzlich dem Urteile des Lesers anheimgestellt, weil es dem Verfasser nur geziemt, Gründe vorzulegen, nicht aber über die Wirkung derselben bei seinen Richtern zu urteilen. Damit aber nicht etwas unschuldigerweise an der Schwächung derselben Ursache sei, so mag es ihm wohl erlaubt sein, diejenigen Stellen, die zu einigem Mißtrauen Anlaß geben könnten, ob sie gleich nur den Nebenzweck angehen, selbst anzumerken, um den Einfluß, den auch nur die mindeste Bedenklichkeit des Lesers in diesem Punkte auf sein Urteil, in Ansehung des Hauptzwecks, haben möchte, beizeiten abzuhalten.
Ich kenne keine Untersuchungen, die zur Ergründung des Vermögens, welches wir Verstand nennen, und zugleich zur Bestimmung der Regeln und Grenzen seines Gebrauchs, wichtiger wären, als die, welche ich in dem zweiten Hauptstücke der transszendentalen Analytik, unter dem Titel d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angestellt habe; auch haben sie mir die meiste, aber, wie ich hoffe, nicht unvergoltene Mühe, gekostet. Diese Betrachtung, die etwas tief angelegt ist, hat aber zwei Seiten. Die eine bezieht sich auf die Gegenstände des reinen Verstandes, und soll die objektive Gültigkeit seiner Begriffe a priori dartun und begreiflich machen; eben darum ist sie auch wesentlich zu meinen Zwecken gehörig. Die andere geht darauf aus, den reinen Verstand selbst, nach seiner Möglichkeit und den Erkenntniskräften, auf denen er selbst beruht, mithin ihn in subjektiver Beziehung zu betrachten und, obgleich diese Erörterung in Ansehung meiner Hauptzwecks von großer Wichtigkeit ist, so gehört sie doch nicht wesentlich zu demselben; weil die Hauptfrage immer bleibt, was und wie viel kann Verstand und Vernunft, frei von aller Erfahrung, erkennen und nicht, wie ist das Vermögen zu denken selbst möglich? Da das letztere gleichsam eine Aufsuchung der Ursache zu einer gegebenen Wirkung ist, und insofern etwas einer Hypothese Ähnliches an sich hat, (ob es gleich, wie ich bei anderer Gelegenheit zeigen werde, sich in der Tat nicht so verhält), so scheint es, als sei hier der Fall, da ich mir die Erlaubnis nehme, zu meinen, und dem Leser also auch freistehen müsse, anders zu meinen. In Betracht dessen muß ich dem Leser mit der Erinnerung zuvorkommen; daß, im Fall meine subjektive Deduktion nicht die ganze Überzeugung, die ich erwarte, bei ihm gewirkt hätte, doch die objektive, um die es mir hier vornehmlich zu tun ist, ihre ganze Stärke bekomme, wozu allenfalls dasjenige, was Seite 92 bis 93 gesagt wird, allein hinreichend, sein kann.
Was endlich die Deutlichkeit betrifft, so hat der Leser ein Recht, zuerst die diskursive (logische) Deutlichkeit, durch Begriffe, dann aber auch eine intuitive (ästhetische) Deutlichkeit, durch Anschauungen, d. i. Beispiele oder andere Erläuterungen in concreto zu fordern. Für die erste habe ich hinreichend gesorgt. Das betraf das Wesen meines Vorhabens, war aber auch die zufällige Ursache, daß ich der zweiten, obzwar nicht so strengen, aber doch billigen Forderung nicht habe Genüge leisten können. Ich bin fast beständig im Fortgange meiner Arbeit unschlüssig gewesen, wie ich es hiermit halten sollte. Beispiele und Erläuterungen schienen mir immer nötig und flossen daher auch wirklich im ersten Entwurfe an ihren Stellen gehörig ein. Ich sah aber die Größe meiner Aufgabe und die Menge der Gegenstände, womit ich es zu tun haben würde, gar bald ein und, da ich gewahr ward, daß diese ganz allein, im trockenen, bloß scholastischen Vortrage, das Werk schon genug ausdehnen würden, so fand ich es unratsam, es durch Beispiele und Erläuterungen, die nur in populärer Absicht notwendig sind, noch mehr anzuschwellen, zumal diese Arbeit keineswegs dem populären Gebrauche angemessen werden könnte und die eigentlichen Kenner der Wissenschaft diese Erleichterung nicht so nötig haben, ob sie zwar jederzeit angenehm ist, hier aber sogar etwas Zweckwidriges nach sich ziehen konnte. Abt Terrasson sagt zwar: wenn man die Größe eines Buchs nicht nach der Zahl der Blätter, sondern nach der Zeit mißt, die man nötig hat, es zu verstehen, so könne man von manchem Buche sagen: daß es viel kürzer sein würde, wenn es nicht so kurz wäre. Andererseits aber, wenn man auf die Faßlichkeit eines weitläufigen, dennoch aber in einem Prinzip zusammenhängenden Ganzen spekulativer Erkenntnis seine Absicht richtet, könnte man mit eben so gutem Rechte sagen: manches Buch wäre viel deutlicher geworden, wenn es nicht so gar deutlich hätte werden sollen. Denn die Hülfsmittel der Deutlichkeit fehlen zwar in Teilen, zerstreuen aber öfters im Ganzen, indem sie den Leser nicht schnell genug zur Überschauung des Ganzen gelangen lassen und durch alle ihre hellen Farben gleichwohl die Artikulation, oder den Gliederbau des Systems verkleben und unkenntlich machen, auf den es doch, um über die Einheit und Tüchtigkeit desselben urteilen zu können, am meisten ankommt.
Es kann, wie mich dünkt, dem Leser zu nicht geringer Anlockung dienen, seine Bemühung mit der des Verfassers, zu vereinigen, wenn er die Aussicht hat, ein großes und wichtiges Werk, nach dem vorgelegten Entwurfe, ganz und doch dauerhaft zu vollführen. Nun ist Metaphysik, nach den Begriffen, die wir hier davon geben werden, die einzige aller Wissenschaften, die sich eine solche Vollendung und zwar in kurzer Zeit, und mit nur weniger, aber vereinigter Bemühung, versprechen darf, so daß nichts für die Nachkommenschaft übrig bleibt, als in der didaktischen Manier alles nach ihren Absichten einzurichten, ohne darum den Inhalt im mindesten vermehren zu können. Denn es ist nichts als das Inventarium aller unserer Besitze durch reine Vernunft, systematisch geordnet. Es kann uns hier nichts entgehen, weil, was Vernunft gänzlich aus sich selbst hervorbringt, sich nicht verstecken kann, sondern selbst durch Vernunft ans Licht gebracht wird, sobald man nur das gemeinschaftliche Prinzip desselben entdeckt hat. Die vollkommene Einheit dieser Art Erkenntnisse, und zwar aus lauter reinen Begriffen, ohne daß irgend etwas von Erfahrung, oder auch nur besondere Anschauung, die zur bestimmten Erfahrung leiten sollte, auf sie einigen Einfluß haben kann, sie zu erweitern und zu vermehren, machen diese unbedingte Vollständigkeit nicht allein tunlich, sondern auch notwendig. Tecum habita et noris, quam sit tibi curta supellex [Fußnote]"Sieh dich in deiner eigenen Behausung um, und du wirst erkennen, wie einfach deine Ausstattung ist". . Persius.
Ein solches System der reinen (spekulativen) Vernunft hoffe ich unter dem Titel: Metaphysik der Natur, selbst zu liefern, welches, bei noch nicht der Hälfte der Weitläufigkeit, dennoch ungleich reicheren Inhalt haben soll, als hier die Kritik, die zuvörderst die Qellen und Bedingungen ihrer Möglichkeit darlegen mußte, und einen ganz verwachsenen Boden zu reinigen und zu ebnen nötig hatte. Hier erwarte ich an meinem Leser die Geduld und Unparteilichkeit eines Richters, dort aber die Willfähigkeit und den Beistand eines Mithelfers; denn, so vollständig auch alle Prinzipien zu dem System in der Kritik vorgetragen sind, so gehört zur Ausführlichkeit des Systems selbst doch noch, daß es auch an keinen abgeleiteten Begriffen mangle, die man a priori nicht in Überschlag bringen kann, sondern die nach und nach aufgesucht werden müssen, imgleichen, da dort die ganze Synthesis der Begriffe erschöpft wurde, so wird überdem hier gefordert, daß eben dasselbe auch in Ansehung der Analysis geschehe, welches alles leicht und mehr Unterhaltung als Arbeit 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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