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B본)
I. 순수지식과 경험지식의 구분에 관하여
우리의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 시작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각을 휘젓는 대상들이 부분적으로 재현을 낳아서 부분적으로 이 재현들을 비교하기 위하여 우리의 이해 활동을 촉진시켜서 그 재현들을 결합하거나 분리함으로써 감각적 인상의 원료를 작업하여 경험이라고 불리는 대상에 관한 지식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닌 지식의 기능이 어떻게 행동으로 일깨워질 수 있는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적 순서에서 우리에게는 경험에 앞서는 지식이 없고, 경험으로써 우리의 모든 지식이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써 시작된다할지라도 그 지식 모두가 경험으로부터 나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닌 경험적 지식조차도 우리가 인상을 통하여 받는 것과 우리 자신의 지식기능이 (오직 상황으로서 역할을 하는 감각적 인상을 통하여) 자체로부터 공급하는 것으로 구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지식기능이 그런 추가사항을 만든다면, 오래 주목하는 관행을 통하여 그런 추가사항을 분리하는 데 우리가 익숙할 때까지 우리는 그 추가사항을 원래 자료로부터 구분하지 못한다.
이것은 또한 적어도 더 세밀한 분석을 요구하여 다음과 같은 즉각적인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문제이다: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이면서 심지어 감각적 인상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식이 있는지. 그러한 지식은 선험적(a priori)으로 불리고 경험적 지식으로부터 구분되는데 경험적 지식은 그 근원을 후천적인 것, 다시 말해서 경험에 둔다.
그러나 선험적이라는 용어는 우리 질문의 전체 의미를 충분히 정확하게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적 출처로부터 도출되는 많은 지식에 관하여 우리는 그 지식을 이미 지니고 있거나 그 지식을 선험적으로 지닐 수 있다고 말하여 우리는 그 지식을 경험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도출하지 않고 보편적 법칙으로부터 - 그 자체로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빌린 법칙 - 도출함을 의미하는 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집의 기초를 약화시킨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 집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다시 말해서 그 집이 실제로 무너지는 것에 대한 경험을 그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그는 아마도 선험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완벽하게 선험적으로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경험을 통하여 몸체들이 무겁고 그리하여 몸체들의 기둥이 철거되면 무너진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에서 우리는 선험적 지식을 통하여 이런저런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식이 아니라 모든 경험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지식을 이해할 것이다. 그 지식과 반대되는 것은 경험적 지식인데 경험적 지식은 단지 후천적으로만, 다시 말해서,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지식이다. 선험적 지식은 경험적인 것이 첨부되지 않을 때 순수하다고 일컬어진다. 그리하여 변화는 오직 경험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에 선험적 명제는 순수한 명제가 아닌 반면, 예를 들어 ‘모든 변화에는 이유가 있다’는 명제가 생긴다.
II. 우리는 특정 선험적 지식을 지니고 있고 그리하여 심지어 공동의 이해조차도 그 지식이 없는 경우는 없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순수 지식과 경험적 지식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다. 경험은 사물이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만 그 사물이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첫째로 생각되면서 필수적으로 생각되는 명제가 있다면 그 명제는 선험적 판단이며, 게다가 그 명제가 필수적인 판단의 유효성을 또한 지닌 명제를 제외한 명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면 절대적으로 선험적인 판단이다. 둘째로: 경험은 (귀납을 통하여) 진실하거나 엄밀한 보편성이 아니라 상정(想定)되어 비교적인 보편성만을 자체의 판단에 부여하여 다만 다음과 같이 언급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관찰한 한 이런저런 규칙에 대한 예외는 없다. 그리하여 판단이 엄격한 보편성 속에서 고찰된다면, 다시 말해서, 어떤 예외도 가능한 것으로 허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 판단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험적으로 유효하다. 경험적 보편성은 대부분의 경우에 모든 것에서 유효한 것에 부착되는 유효성의 자의적 확대일 따름인데 예를 들어 ‘모든 몸체는 무겁다’와 같은 명제에서 이다; 다른 한편으로 엄밀한 보편성이 판단에 필수적일 때, 이것은 특별한 지식의 근원 즉, 선험적 지식의 능력을 가리킨다. 그래서 필연성과 엄밀한 보편성은 선험적 지식의 확고한 기준이고 서로 불가분하다. 그러나 이 기준들을 사용하면서 판단의 자의성이 기준들의 경험적 한계보다 때때로 더 쉽게 증명되기 때문에 혹은, 또한 때때로 우리가 판단을 부여하는 그 기준들의 무제한적 보편성이 그 기준들의 필연성보다 더 명백하게 증명되기 때문에, 고찰되는 두 가지 기준들을 분리하여 각각의 기준 자체를 오류가 없는 것으로 사용하는 일이 권유될만하다.
이제 인간의 지식 안에는 필연적이고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보편적이어서 결과적으로 선험적으로 순수한 판단인 판단들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증명하기 쉽다. 우리가 과학으로부터 사례를 원한다면 우리는 수학적 표현을 보기만 하면 되고, 우리가 이해력의 가장 평범한 이용에서 사례를 구한다면 모든 변화에는 틀림없이 원인이 있다는 언명이 우리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다; 정말로 후자(後者)의 경우에 원인의 개념이 매우 분명하게 결과와 연결하고 엄밀한 규칙의 보편성과 연결하는 필연성의 개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흄(Hume)이 그랬던 바와 같이 우리가 발생하는 것으로 선행하는 것과 반복적으로 결합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이 반복적인 결합에서 시작되는 (그리하여 단지 주관적인 필연성인) 관습인 재현을 연결하는 관습으로부터 개념을 도출하려고 우리가 시도한다면 그 개념은 완전히 실종될 텐데. 그런 사례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우리는 순수한 선험적 원칙들이 경험의 가능성에 대하여 필수불가결함을 설명하여 그 원칙들의 존재를 선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험이 붙좇아서 나아가는 모든 법칙이 때때로 경험적이어서 우연적이라면, 어디로부터 경험이 자체의 확실성을 도출할 수 있는 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법칙들이 최초의 법칙들로 간주되도록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지닌 지식의 기능이 순수하게 이용된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그런 이용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우리는 만족할 것이다. 그런 선험적 근원은 판단에서뿐만 아니라 개념들에서도 드러난다. 몸체에 대한 우리의 경험적 개념으로부터 그 개념 안에 있는 경험적인 모든 특징을 제거하자: 색깔과 견고함과 부드러움, 심지어 비관통성인데, 그리하여 몸체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차지했던 공간이 남고 이것은 제거되지 않는다. 또한 물리적이든 아니든 대상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경험적 개념으로부터 경험이 우리에게 가르친 모든 속성을 제거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상이 본질이나 본질 속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생각되는 속성을 제거할 수 없다 (비록 본질에 대한 이 개념이 일반적인 대상에 대한 개념보다 더 많은 결정을 포함하고 있다할지라도). 그러므로 이 본질에 관한 개념이 자체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필연성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지닌 선험적 지식의 능력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III. 철학은 모든 선험적 지식의 가능성과 원칙과 규모를 규정할 과학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앞의 것들 모두보다 훨씬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지식은 모든 가능한 경험의 분야를 떠나서 모든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여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규모를 확대하는 모습을 지니는데 그것도 경험 속에서 상응하는 대상이 주어질 수 없는 개념을 통해서이다.
우리의 이성이, 그 탐구활동의 중요성에 따라서 이해력이 현상의 분야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탁월하고 훨씬 더 고귀하다고 우리가 간주하는 저 탐구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감각의 세상을 초월하는 분야에서 후자(後者) 지식을 통해서인데 그 세상에서 경험은 안내를 유발할 수도 없고 수정을 유발할 수도 없다. 실제로, 화급한 지식탐구가 지니는 불안한 특징 때문에 그런 화급한 지식탐구나 경멸이나 무관심으로 인하여 포기하기보다는 우리는 실수를 저지를 모든 위험을 무릅쓰기를 선호한다. 순수이성의 이 피할 수 없는 문제는 신(神), 자유 그리고 불멸성이다. 그러나 자체의 최종 목적에서 자체의 모든 준비사항과 함께 실제로 그것들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과학이라고 불리며, 그 과정은 처음에 독단적인데 다시 말해서 이성의 능력이나 무능에 대한 사전 시험 없이 그렇게 위대한 과업을 위하여 그 수행을 자신만만하게 떠맡는다.
경험의 토대를 떠나자마자 인간은 신중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이 건설하려는 건축물의 기초에 관하여 확신하지만 먼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않고는 인간이 지닌 지식을 이용하지 않으며 원칙들의 근원을 알지 않고는 원칙들을 신뢰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이제 정말로 자연스러워 보인다. 다시 말해서 이해력이 어떻게 이 지식에 선험적으로 다다르는지, 그리고 어떤 규모와 효능과 가치를 이해력이 지니는지의 의문이 먼저 고찰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자연스럽다는 용어로 우리가 합당하고 이성적으로 발생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정말로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스럽다는 말로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다른 한 편으로 이 연구가 그렇게 오랫동안 간과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자연스럽고 더 이해 가능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 지식의 한 부분인 수학적인 지식은 오랫동안 신뢰를 받아서 다른 부분에 관하여 호의적인 기대를 주는데 그 다른 부분은 완전히 다른 특성일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경험의 원 밖에 있다면 우리는 경험에 의하여 반박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의 지식을 확대하려는 유혹은 매우 커서 우리가 조우하는 명백한 모순을 통해서만 우리는 진보에서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내는 허구를 우리가 신중하게만 만든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허구는 허구로 남겠지만, 그것은 회피될 수 있다. 수학은,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우리가 선험적 지식에서 얼마나 멀리 진보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탁월한 사례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오직 대상들이 직감에서 묘사되기를 허용하는 한, 수학은 정말로 대상들과 지식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쉽게 간과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고찰된 직감 자체가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적나라하고 순수한 개념으로부터 구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이성의 힘에 관한 증거에 의하여 오도되어, 지식을 확대하려는 욕망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가벼운 비둘기는 자유롭게 나르면서 공기를 가르고 공기의 저항을 느끼면서 자신의 비행이 빈 공간에서는 훨씬 더 쉬울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의미의 세계를 버렸는데 왜냐하면 너무 좁은 한계를 이해력에 두어 이데아의 날개를 타고 이해력을 초월하여 순수 이해력이라는 텅 빈 공간으로 모험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어떤 진전도 이룩하지 못했음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이유인즉 자신이 이해력을 작동시키면서 말하자면 자신을 지탱하고 자신의 힘을 적용할 수 있는 버팀목인 저항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체의 구조를 가능한 한 빨리 완성한 후에만 토대가 신뢰할만한지를 조사하는 것이 사념 속의 인간 이성이 지닌 공통적 운명이다. 그렇다면 모든 종류의 완화책이 요구될 것인데 우리들에게 그 토대의 효율성에 대하여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나 혹은 그런 뒤늦고 위험한 시험을 오히려 진실로 거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구조 건설 중에 우리를 모든 근심과 의심으로부터 지켜주고 완벽한 듯 우리를 칭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이성이 하는 일 중에서 커다란, 아마도 가장 큰 부분은 우리가 대상에 대하여 이미 지니고 있는 개념들의 분석에 존재한다. 이 분석은 우리에게 지식 집합을 제공하는데 그 집합은, 우리의 개념에서 (비록 혼란스러운 방식으로라 할지라도) 이미 사고된 것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에 지나지 않는다할지라도, 적어도 그 형태에 관해서는 새로운 통찰로서 평가된다. 그러나 재료나 내용에 관한 한 우리가 이전에 소유하고 있던 개념에 대한 확대는 없었고 그 개념들에 대한 설명만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이제 참된 지식을 선험적으로 제공하는데 그 지식은 안전하고 유용하게 진보하기 때문에 이성은,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전혀 다른 종류의 주장들을 비밀스럽게 소개하는 것으로서 지금까지 오해되었는데 그 주장들 속에서 이성은 주어진 개념들에게 완전히 낯선 다른 것들을 부착하며 게다가 그 다른 것들을 선험적으로 부착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성이 이런 일을 하는 위치에 놓일 수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질문은 심지어 생각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이 두 가지 종류의 지식 사이의 차이점을 다루겠다.
IV. 분석적 판단과 종합적 판단의 구분에 관하여
주어의 술부에 대한 관계가 생각되는 모든 판단에서 (부정적 판단에 대한 후속 적용이 쉽게 이루지기 때문에 나는 긍정적 판단만을 고찰한다), 이 관계는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가능하다. 술부 B가 이 개념 A에 (은밀하게) 포함된 것으로서 속하거나; 혹은 B가 개념 A와 정말로 연결되어 있다할지라도 B가 완전히 개념 A의 밖에 놓인다. 전자(前者)의 경우에 나는 분석적 판단이라고 명명하고 후자(後者)의 경우에 나는 종합적 판단이라고 명명한다. 분석적 판단은 (긍정적) 그러므로 술부의 주어 연결이 일치를 통하여 생각되는 판단이다; 이 연결이 일치 없이 생각되는 판단은 종합적이라고 명명되어야 한다. 전자(前者)는 술부를 통하여 주어 개념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어 개념을 분해하여 줄곧 주어 개념 안에서 사고되었던 저 구성적 개념들을 만들기 때문에 (비록 혼란스럽게라 할지라도) 또한 설명적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후자(後者)는 어떤 정도로도 주어 개념 속에서 사고되었던, 그리고 어떤 분석도 도저히 주어 개념으로부터 도출할 수 없었던 술부를 주어 개념에 덧붙인다; 그래서 종합적 판단들은 확장적이라고 지칭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모든 몸체들은 확장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분석적 판단이다. 왜냐하면 나는 개념과 결합된 외연을 발견하기 위하여 내가 ‘몸체’와 연결하는 개념을 초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술부와 조우하기 위하여 나는 개념을 분석하기만 하면 되는데 다시 말해서 내가 항상 그 개념 속에서 생각하는 복합체를 내 자신에게 인식하게 되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그 판단은 분석적이다. 다른 한 편으로 내가 ‘모든 몸체들은 무겁다’라고 말한다면 술부는 내가 일반적인 몸체의 개념에서만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술부의 첨가는 종합적 판단을 제공한다.
경험의 판단은, 그런 상태로서, 대체적으로 종합적이다. 왜냐하면 분석적 판단을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기 때문인데 이유인즉 나는 판단을 형성하기 위하여 나의 개념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고 그리하여 판단을 뒷받침하며 경험이 증언하는 것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몸체가 확대된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적용되며 경험적인 판단은 아닌 명제이다. 왜냐하면 경험의 도움을 받기 전에 나는 이미 몸체에 대한 개념 속에 나의 판단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모순된 문장에 의하여 그 개념으로부터 나는 술부를 도출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서 동시에 나는 판단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그것은 경험이 나에게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록 내가 일반적인 몸체에 대한 개념에 무게라는 술어를 포함시키지 않는다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은 경험의 대상을 그 대상의 부분들 중 한 부분을 통하여 나타내며, 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서 나는 그 부분에 동일한 경험의 다른 부분들을 덧붙일 수 있다. 나는 처음부터 확대, 비투과성, 형태, 기타 등등의 특징들을 통하여 몸체에 대한 개념을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 특징들 모두는 개념 속에서 사고된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가 몸체에 대한 이 개념을 도출했던 경험을 돌아보면서 그리고 무게가 항상 위의 특징들과 결합됨을 발견하면서 나는 무게를 개념에 술부로서 덧붙이고 그렇게 하면서 나는 무게를 종합적으로 덧붙이며 그리하여 나는 나의 지식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하여 무게라는 술어와 몸체에 대한 개념의 통합가능성은 경험에 근거하는데 왜냐하면 한 가지 개념이 다른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반면, 두 가지 개념 모두는, 단지 우연적이라 할지라도, 전체의 다시 말해서 자체가 직감들의 종합적 결합이 경험인 부분들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험적인 종합적 판단에는 이 수단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내가 개념 A를 초월해야 한다면, 또 다른 개념 B가 개념 A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기위하여 나는 무엇에 의존하며 무엇을 통하여 통합은 가능해지는가? 여기서 나에게는 경험의 분야에서 추구하는 이점이 없다. ‘발생하는 것은 원인 있다’는 명제를 고찰하자. ‘발생하는 것’에 대한 개념 속에서 나는 정말로 시간, 기타 등등에 의하여 선행되는 존재를 생각하고 이 개념으로부터 분석적 판단이 획득될 것이다. 그러나 원인에 대한 개념은 전적으로 다른 개념 밖에 놓여 있고, 발생하는 것과 다른 것을 의미하며 그리하여 이 후자(後者) 재현에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발생한 것들 전반에서 그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말하기에 이르며, 그리고 저 개념 안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속한 것으로서 원인의 개념을 인식하기에 이르는가? 이해력이 스스로 개념 A의 외부에서 이 개념에 낯선 술어 B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이해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개념이 스스로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미지수 = X라는 것은 여기서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일 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언급된 원리가 두 번째 재현을 첫 번째 재현에 연결했는데 더 큰 보편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필연성의 표현을 또한 지녀서 완벽하게 선험적이고 순전히 개념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합적, 다시 말해서 확산적 원리에 우리의 모든 선험적인 사변적 지식은 궁극적으로 근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분석적 판단들은 매우 중요하고 매우 필요하지만 단지 모든 이전 지식에 진정으로 새로운 첨가를 야기할 것으로서 그렇게 확실하고 넓은 종합에 필요한 개념 속의 명백함을 얻을 목적이기 때문이다.
V. 모든 이성적 이론과학에는 종합적인 선험적 판단이 원리로서 포함된다.
1. 수학적 판단은 예외 없이 종합적이다. 이 명제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확실하고 그 결과에서 매우 중요할지라도, 인간의 이성을 분석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지금까지 피했고 정말로 그들의 모든 추측에 직접적으로 반대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수학적 추론들이 (모든 명백한 확실성의 본성이 요구하는) 역설의 원리에 따라서 나아가기 때문에, 과학의 근본적인 명제들 자체가 그 원리를 통하여 참으로 알려질 수 있다고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틀린 견해이다; 왜냐하면 종합적 명제가 역설의 원리에 따라서 정말로 이해될 수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종합적 명제가 예상된다는 조건과 그 명제가 그렇다면 이 다른 명제로부터 귀결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조건이 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인데 그 명제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홀로 그렇게 이해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실제로 수학적인 명제들은 항상 선험적 판단들인데 이유인즉 그 명제들은 필연성을 지니는데 그 필연성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서술을 순수 수학에 국한시킬 예정이고 그 수학의 개념은 경험적이 아니라 단지 순수한 선험적 지식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마도 처음에 정말로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7 + 5 = 12라는 명제는 단지 분석적 명제이고 역설의 원리에 따라서 7과 5의 합계라는 개념으로부터 귀결된다는 것.
그러나 우리가 보다 세밀하게 관찰한다면 우리는 7과 5의 합계라는 개념이 두 숫자를 한 숫자로 결합한 것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포함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며, 이것에는 두 숫자를 결합하는 저 하나의 숫자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생각되지 않는다. 12라는 개념은 단지 7과 5의 결합을 생각하는 데서 이미 전혀 생각되지 않고, 나는 원한다면 그런 가능한 합계에 대한 나의 개념을 분석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합계 안에서 12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개념들을 초월해야 하고 그 개념들 중 한 가지에 상응하는 직감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다섯 손가락들 예를 들어 (세그너「Segner」가 자신의 산술에서 한 바와 같이) 5점이라고 불러서 7이라는 개념에 직감에서 주어진 5를 단위에 따라서 첨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7이라는 숫자로 시작하고 5의 개념을 위하여 내 손의 손가락의 도움을 직감으로서 불러들여 나는 이제 숫자 5를 형성하기 위하여 이전에 조합했던 단위들을 하나하나 숫자 7에 덧붙이고, 그 숫자의 도움을 받아서 12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5가 7에 덧보태어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정말로 합계 = 7 + 5라는 개념 속에서 생각했지만 이 합계가 숫자 12와 대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산술적 명제들은 그러므로 항상 종합적이다; 우리가 더 큰 숫자들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훨씬 더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아무리 우리가 우리의 개념을 돌리고 왜곡시킨다할지라도 우리는 그 개념들을 분석만해서는, 그리고 직감의 도움 없이는 합계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석적 순수 기하학의 여하한 근본적 명제도 그 만큼 적다. 두 점 사이의 직선이 가장 짧다는 것은 종합적 명제이다. 왜냐하면 직선에 대한 나의 개념은 크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지만 다만 특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가장 짧은 것에 대한 개념은 전적으로 첨가이고, 분석의 과정을 통하여 직선의 개념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그리하여 직감이 여기서 소환되어야 하는데 직감의 도움을 통해서만 종합이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명백한 판단들의 술부가 이미 우리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판단은 분석적이라고 믿도록 만드는 것은 사용된 용어의 모호성일 따름이다. 우리는 특정 술부를 주어진 개념에 상상하여 덧붙여야 하며 이 필연성은 이미 개념들 자체에 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우리가 주어진 개념에 상상하여 덧붙여야 하는가가 아니라, 단지 모호하게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개념 속에서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는 지이다; 그리하여 술부가 정말로 반드시 개념에 첨부되는 반면 그 술부는 개념에 틀림없이 첨부되는 직감을 통해서이지 개념 자체 안에서 생각되는 바로서가 아니다.
몇 가지 근본적인 명제들이 기하학자에 의하여 전제되어 정말로 분석적이며 역설의 원리에 근거한다. 그러나 동일한 명제들로서 그 명제들은 방법의 고리에서 원리들로서가 아니라 연결로서만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a = a; 전체는 자체와 대등하다; 혹은 (a + b) > a로 다시 말해서 전체는 전체의 부분보다 크다. 그리고 심지어 이 명제들도 순수한 개념들에 따라서 유효하다 할지라도 직감에서 묘사될 수 있기 때문에 수학에서 인정될 따름이다.
2. 자연과학은(물리학) 선험적인 종합적 판단을 원칙으로서 포함한다. 나는 몇 가지 명제만을 언급하고 싶다: 물리적 세상의 모든 변화 속에서 물질의 수량은 변화가 없다는 것, 혹은 움직임의 모든 기록에서 작용과 반작용은 틀림없이 서로 항상 동일하다는 것. 두 가지 명제 모두는 필연적이어서 그 명제들의 근원이 선험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종합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물질의 개념 속에서 나는 물질의 지속성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물질이 차지하는 공간 속에서 물질의 존재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로 물질의 개념을 초월하는데, 내가 그 개념 속에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여 그 개념에 선험적으로 추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명제는 분석적이 아니라 종합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으로 생각되고 자연과학의 순수한 부분에 대한 다른 명제들도 동일하다.
3. 형이상학에서 우리가 형이상학을 자체의 모든 노력에서 지금까지 실패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성이 지닌 본성 때문에 형이상학이 매우 필수 불가결한 과학이기에 틀림없이 선험적인 종합적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이 하는 일이 우리가 스스로 사물들에 대하여 선험적으로 만드는 개념들을 분석하여 그 개념들을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닌 선험적 지식을 확대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주어진 개념에 그 개념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보태는 원칙들을 사용해야 하고, 선험적인 종합적 판단을 통하여 그렇게 멀리 초월하여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명제에서 경험이 우리를 따라올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세상에는 틀림없이 최초의 시작과 기타 등등이 있어서 형이상학은 적어도 의도에서 선험적인 종합적 명제들로 전적으로 구성된다.
VI. 순수이성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
우리가 많은 연구를 단 한 가지 문제의 공식 하에 둘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얻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임무를 정확하게 결정함으로써 우리는 그 임무를 경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 임무를 더 쉽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의 계획을 수행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우리가 얻은 결과들을 시험할 것이다. 이제 순수이성에 대한 합당한 문제는 다음 질문에 포함된다: 선험적인 종합적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형이상학이 지금까지 불확실과 모순이라는 그렇게 흔들리는 상태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이 문제와 아마도 심지어 분석적 및 종합적 판단 사이의 구분이 이전에 고려되지 않았다는 이유에 전적으로 기인한다. 이 문제의 해결에, 혹은 이 문제가 설명했기를 갈망하는 가능성이 실제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분한 증거에 형이상학의 성공이나 실패가 달려있다.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 가장 근접했지만 충분히 정확하고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결과를 원인과 결합시키는 것에 관한 종합적 명제에 (인과율[principium causalitatis]) 예외적으로 몰두해서 그런 선험적 명제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스스로 믿었다. 우리가 그의 결론을 수용한다면 우리가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단지 망상으로서 그 망상에 의하여 실제로 경험으로부터 빌려온 것을 우리 자신이 이성적으로 통찰한다고 생각하며, 관습의 영향을 받아 우리 자신이 필연성과 같은 것을 지녔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우리의 문제를 그 문제의 모든 보편성에서 생각했더라면 그는 모든 순수철학에 그렇게 파멸적인 이 서술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왜냐하면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논증에 따라서 순수수학이 틀림없이 선험적인 종합적 명제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 수학이 또한 가능하지 않을 것임을 인정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훌륭한 지성이 그런 주장으로부터 그를 구했을 텐데.
위에 언급된 문제의 해결책에서 우리는 동시에, 대상들에 대하여 이론적인 선험적 지식을 포함하고 있어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변해야 하는 모든 과학의 토대와 업적에서 순수이성의 사용 가능성에 대하여 결정을 하고 있다:
어떻게 순수 수학은 가능한가?
어떻게 순수 자연과학은 가능한가?
이 과학들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전적으로 합당하다: 어떻게 그것들이 가능한가?; 왜냐하면 그것들이 틀림없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증명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형이상학에서 이룩된 초라한 진척과, 이미 제기된 체계가 형이상학의 본질적 목적을 고려하여 실제로 존재한다고 언급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의심할 이유를 지닌다.
그러나 확실한 의미에서 이런 종류의 지식은 주어진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고 형이상학은 과학으로서가 아니라할지라도 자연적 성향으로서 (metaphysica naturalis) 실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은 박식에 대한 허영으로만 움직이지 않고 자체의 필요로 충동되어 이성을 경험적으로 사용해서도 혹은 그 사용으로부터 도출되는 원리에 의해서도 답변될 수 없는 질문으로 불가항력적으로 나가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서 사람들의 이성이 사고하는 데까지 확대되자마자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이 항상 존재했고 항상 지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질문이 생긴다:
자연적 성향으로서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다시 말해서 순수이성이 스스로 제기하고, 그 순수이성이 자체의 필요에 의하여 최대한으로 잘 답변하도록 강요당하는 저 질문들은 보편적 인간 이성의 본성으로부터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러나 이 자연적인 질문들에 - 예를 들어, 세상에는 시작이 있는지 혹은 세상은 영원으로부터 나왔는지 - 답변하도록 지금까지 이룩된 모든 시도들이 불가피한 모순들과 조우했기 때문에 우리는 형이상학을 향한 자연스러운 성향만으로, 다시 말해서 이성 자체의 순수한 기능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데 그 기능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형이상학이 (그 형이상학이 무엇이든 간에) 항상 출현한다. 그러나 우리가 형이상학의 대상들을 아는지 혹은 알지 못하는지 이성이 확신에 이르러서,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의 탐구 대상에 관해서인지 혹은 그 대상들에게 판단을 내리는 이성의 능력이나 무능력에 관해서 결정에 다다라서 우리가 확실하게 우리의 순수이성을 확대하거나 그 이성에 확실하고도 결정된 한계를 부과하는 것을 틀림없이 가능하다. 이 마지막 질문은 앞에 언급된 보편적일 문제로부터 출현하는데 합당하게 다음이 될 것이다: 과학으로서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하여 이성비판은 결국 필연적으로 과학을 낳는다; 반면에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하여 비판 없이 이성을 독단적으로 사용하면 우리는 항상 반대에 봉착할 수 있는, 동등하게 허울만 좋은 다른 주장들에 - 다시 말해서 회의론에 - 도달한다.
이 과학이 엄청난 지루함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는데 이유인즉 그 과학은 그 다양성이 무한한 이성의 대상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체를 다루고 전적으로 자체 내부로부터 출현하고 자체와 구별되는 사물들의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체의 본성에 의하여 자체에 부과되는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성이 경험으로 자체에게 제시될 수 있는 대상들과 관련하여 이전에 자체의 능력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면, 이성은 틀림없이 쉽게, 자체를 시도하여 사용하려는 규모와 한계를 모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완벽하고도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실행된 형이상학을 독단적으로 확립하려는 모든 시도들을 실패한 것으로서 간주할 것이고 그렇게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시도된 체계 속의 분석적 부분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성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개념들에 대한 분석에 지나지 않는 것은 합당한 형이상학 목표가 전혀 아니고 그 형이상학에 대한 준비, 즉 형이상학의 선험적인 종합적 지식의 확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을 위한 개념 분석을 무익한데 이유인즉 그 분석이, 어떻게 우리가 그 개념들에 선험적으로 도달하는지가 아니라 이 개념들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보여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모든 지식의 대상들과 관련하여 그런 개념들을 유효하게 사용하는 것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게 이 후자(後者)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또한 부인할 수 없고 이성의 독단적 과정에서 불가피한 이성의 자체에 대한 모순들이 그 후 오랫동안 제시된 모든 형이상학적 체계의 권위를 약화시킨 것을 볼 때 이 주장들을 포기하는 데는 단지 적은 자기-부인만 필요하다. 우리가 내재적 난제들과 외적 반대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지금까지 시용된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을 적용하여 마침내 인간의 이성에 필수적인 과학을 번창하고 결실이 있는 과학으로 - 자체의 모든 가지가 잘라지더라도 뿌리는 파괴되지 않을 과학 - 가져오기 위하여서는 더 큰 단호함이 필요할 것이다.
* [원주]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순수 자연과학을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합당하게 그렇게 지칭되는 것들로서, 예를 들어 물질의 수량에서의 지속성과 관성과 작용 및 반작용의 동일성, 기타 등등과 관련된 (경험적) 물리학의 초기에 발견될 수 있는 다양한 명제들을 고찰하여 그것들이 순수한 (혹은 합당한[rationalem]) 물리학(physicam puram)을 구성하는 것을 곧 확신하기만 하면 되는데 순수한 물리학은 독립적인 과학으로서 좁든 넓든 자체의 전체 규모에서 별도로 취급될 자격이 충분하다.
VII.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이름 하의 특별한 과학의 이념과 분류
이 모든 것으로부터 순수이성비판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특별한 과학이 출현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선험적 지식의 원리를 제공하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이성은 우리가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이성의 도구는 그 원리들의 구체화일 것인데 그 원리들에 따라서 모든 양태의 순수한 선험적 지식이 습득될 수 있고 실제로 성취될 수 있다. 그런 도구의 포괄적 적용은 순수이성의 체계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많을 것을 요구하는 것일 테고 우리의 지식 확대가 여기서 가능할지 그리고 어떤 경우에 가능할지는 여전히 의심스럽기 때문에 순수이성의 검토에 지나지 않는 과학과 순수이성의 근원과 한계를 순수이성 체계에 대한 소개서로서 간주할 수 있다. 그런 상태로서 우리는 그 과학을 순수이성의 교설이 아니라 비판이라고 지칭되어야 하며, 그 효용은 사유(思惟)에 관하여 틀림없이 합당하게 단지 부정적이며 우리의 이성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화하여 그 이성을 오류가 없도록 유지하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매우 큰 소득이다. 대상들이라기보다는 대상들에 대한 우리 지식의 종류에 몰두하는 모든 지식을 그 지식의 종류가 선험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한 나는 초월적이라고 부른다. 그런 개념들의 체계가 초월적-철학이라고 지칭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이 단계에서 너무 큰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과학은 분석적 지식 및 종합적 지식 모두를 틀림없이 완벽하게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목표에 관한 한 너무 포괄적이다. 자체의 전체 규모로 선험적 종합의 원칙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 분석을 필수불가결하게 필요한 만큼만 수행해야 하는데 그 선험적 종합의 원칙들을 다루도록 우리는 요청을 받는다. 우리가 지금 몰두하는 것은 이 연구인데 그 연구는 교설이 아니라 단지 초월적 비판으로 지칭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연구의 목표는 지식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수정하는 것일 따름이며 모든 선험적 지식의 가치나 무가치에 대하여 시금석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비판은 가능한 한 도구를 위한 준비이고 적어도 규칙을 위하여 이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 규칙에 따라서 훗날 순수이성 철학의 전체 체계가 - 그 체계가 자체의 지식을 확대하든 아니면 단지 제한하든 - 종합적으로 뿐만 아니라 분석적으로도 실행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체계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정말로 그런 체계가 그런 체계를 완전히 완성하는 것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우리를 단절할 큰 규모일 것이라는 것은, 여기서 우리의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 소진될 수 없는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사물의 본성에 판단을 내리는 이해력이라는 사실로부터 이미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이 이해력은, 다시, 자체의 선험적 지식과 관련된다. 이 이해력의 선험적 소유는, 그 소유가 외부로부터 추구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숨겨진 상태로 남을 수가 없고 매우 개연적으로 규모에서 충분히 작아서 우리는 그 소유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 소유의 가치나 무가치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어서 올바르게 그 소유를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저서에 대한 비판과 순수이성의 체계를 훨씬 덜 기대하지만 순수이성의 기능 자체를 우리는 기대한다. 단지 우리가 이 토대 위에 건설하는 한, 우리는 이 분야에서 낡고 새로운 작품들이 지닌 철학적 내용을 평가하는 안전한 시금석을 지닌다; 그렇지 않으면 무자격 역사가나 비판가가 자신의 근거 없는 주장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근거 없는 주장들에 판단을 내리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도 동등하게 근거가 없다.
초월적 철학은 단지 과학의 개념인데 그 개념에 대하여 순수이성비판은 완벽한 건축적 계획을 구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순수이성비판은, 원리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서, 구조물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에서 구조물의 완벽함과 안전함을 보장해야 한다. 초월적 철학은 순수이성의 모든 원리를 지닌 체계이다. 그리고 이 비판 자체가 초월적 철학으로 지칭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완벽한 체계가 되기 위하여 그 철학은 선험적 인간 지식 전체에 대한 포괄적 분석을 포함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비판은 그런 순수한 지식을 구성하러 가는 모든 근본적 개념들을 완벽히 열거하여 정말로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비판은 이 개념들에 대하여 철저한 분석을 제공하도록 요구를 받지도 않고 그 개념들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완벽한 검토도 제공하도록 요구를 받지도 않는다. 그런 요구는 불합리할 것인데 부분적으로 왜냐하면 우리가 종합의 경우에서 조우하는 것처럼 분석과 관련하여 그런 불확실성이 없는 한 이 분석이 우리의 주요 목표에 합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인데 그 종합만을 위하여 우리의 전체 비판이 수행된다; 또한 부분적으로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를 고려하여 그렇게 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그런 분석과 추론의 완벽성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은 우리의 계획의 통합성에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우리가 열거해야 할 이 선험적 개념들에 대한 분석과 그 개념들로부터 다른 개념들을 도출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완수될 수 있는데 그 개념들이 종합의 원리들을 규명하는 것으로서 확립되자마자 일 때이고 이 본질적인 면에서 그 개념들에게 결여된 것이 없다는 조건에서이다.
그러므로 순수이성비판은 초월적-철학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포함할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초월적-철학의 완벽한 개념이지만 저 후자(後者) 과학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순수이성비판은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지식에 대한 완벽한 평가를 위하여 필요한 만큼만 분석에서 멀리 가기 때문이다.
그런 과학의 분류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개념도 경험적인 것을 자체에 포함하는 것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선험적 지식은 전적으로 순수하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성의 최고 원리들과 근본적인 개념들은 선험적인 지식이라 할지라도 초월적-철학에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자체의 행동수칙 토대에 그 모두가 경험적 근원을 지닌 쾌락과 고통의 개념들 그리고 탐욕과 취향 기타 등등의 개념들을 두지 않는다할지라도 순수한 도덕성의 체계를 작성하면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혹은 동기로 변환되어서는 안 되는 유혹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이 경험적 개념들은 반드시 의무의 개념 속으로 도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월적-철학은 순수하면서도 사변적일 따름인 철학이다. 왜냐하면 실용적인 모든 것은 동기를 포함하는 한 감정들과 관련되고 이 감정들은 지식의 경험적 근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서술에 몰두하고 있는 과학의 체계적 분류를 우리가 수행하려면 그 분류는 첫 번째로 요소-교설을, 두 번째로 방법-교설을 지녀야 한다. 이 주 부문의 각각은 자체의 하위 부문을 지닐 것이지만 우리는 아직 그 주 항목의 근거를 설명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서론이나 서문을 통하여 인간 지식의 두 가지 줄기 즉, 감성과 오성이 있다고 우리는 말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들은 아마도 공통적이지만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뿌리로부터 나타난다. 전자(前者)를 통하여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지만 후자(後者)를 통하여 대상들은 사고된다. 감성이, 그 아래서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조건을 구성하는 선험적 재현을 포함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한, 감성은 초월적-철학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 지식의 대상들이 주어지는 유일한 조건들이 그 대상들이 사고되는 조건들에 틀림없이 선행하기 때문에 감성에 관한 초월적 교설이 요소들에 관한 과학의 첫 번째 부분을 구성할 것이다.
Einleitung
I. Von dem Unterschiede der reinen und empirischen Erkenntnis
Daß alle unsere Erkenntnis mit der Erfahrung anfange, daran ist gar kein Zweifel; denn wodurch sollte das Erkenntnisvermögen sonst zur Ausübung erweckt werden, geschähe es nicht durch Gegenstände, die unsere Sinne rühren und teils von selbst Vorstellungen bewirken, teils unsere Verstandestätigkeit in Bewegung bringen, diese zu vergleichen, sie zu verknüpfen oder zu trennen, und so den rohen Stoff sinnlicher Eindrücke zu einer Erkenntnis der Gegenstände zu verarbeiten, die Erfahrung heißt? Der Zeit nach geht also keine Erkenntnis in uns vor der Erfahrung vorher, und mit dieser fängt alle an.
Wenn aber gleich alle unsere Erkenntnis mit der Erfahrung anhebt, so entspringt sie darum doch nicht eben alle aus der Erfahrung. Denn es könnte wohl sein, daß selbst unsere Erfahrungserkenntnis ein Zusammengesetztes aus dem sei, was wir durch Eindrücke empfangen, und dem, was unser eigenes Erkenntnisvermögen (durch sinnliche Eindrücke bloß veranlaßt) aus sich selbst hergibt, welchen Zusatz wir von jenem Grundstoffe nicht eher unterscheiden, als bis lange Übung uns darauf aufmerksam und zur Absonderung desselben geschickt gemacht hat.
Es ist also wenigstens eine der näheren Untersuchung noch benötigte und nicht auf den ersten Anschein sogleich abzufertigende Frage: ob es ein dergleichen von der Erfahrung und selbst von allen Eindrücken der Sinne unabhängiges Erkenntnis gebe. Man nennt solche Erkenntnisse a priori, und unterscheidet sie von den empirischen, die ihre Quellen a posteriori nämlich in der Erfahrung, haben.
Jener Ausdruck ist indessen noch nicht bestimmt genug, um den ganzen Sinn, der vorgelegten Frage angemessen, zu bezeichnen. Denn man pflegt wohl von mancher aus Erfahrungsquellen abgeleiteten Erkenntnis zu sagen, daß wir ihrer a priori fähig oder teilhaftig sind, weil wir sie nicht unmittelbar aus der Erfahrung, sondern aus einer allgemeinen Regel, die wir gleichwohl selbst doch aus der Erfahrung entlehnt haben, ableiten. So sagt man von jemand, der das Fundament seines Hauses untergrub: er konnte es a priori wissen, daß es einfallen würde, d. i. er durfte nicht auf die Erfahrung, daß es wirklich einfiele, warten. Allein gänzlich a priori konnte er dieses doch auch nicht wissen. Denn daß die Körper schwer sind, und daher, wenn ihnen die Stütze entzogen wird, fallen, mußte ihm doch zuvor durch Erfahrung bekannt werden.
Wir werden also im Verfolg unter Erkenntnissen a priori nicht solche verstehen, die von dieser oder jener, sondern die schlechterdings von aller Erfahrung unabhängig stattfinden. Ihnen sind empirische Erkenntnisse, oder solche, die nur a posteriori, d. i. durch Erfahrung, möglich sind, entgegengesetzt. Von den Erkenntnissen a priori heißen aber die jenigen rein, denen gar nichts Empirisches beigemischt ist. So ist z. B. der Satz: eine jede Veränderung hat ihre Ursache, ein Satz a priori, allein nicht rein, weil Veränderung ein Begriff ist, der nur aus der Erfahrung gezogen werden kann.
II Wir sind im Besitze gewisser Erkenntnisse a priori, und selbst der gemeine Verstand ist niemals ohne solche
Es kommt hier auf ein Merkmal an, woran wir sicher ein reines Erkenntnis vom empirischen unterscheiden können. Erfahrung lehrt uns zwar, daß etwas so oder so beschaffen sei, aber nicht, daß es nicht anders sein könne. Findet sich also erstlich ein Satz, der zugleich mit seiner Notwendigkeit gedacht wird, so ist er ein Urteil a priori, ist er überdem auch von keinem abgeleitet, als der selbst wiederum als ein notwendiger Satz gültig ist, so ist er schlechterdings a priori. Zweitens: Erfahrung gibt niemals ihren Urteilen wahre oder strenge, sondern nur angenommene und komparative Allgemeinheit (durch Induktion), so daß es eigentlich heißen muß: soviel wir bisher wahrgenommen haben, findet sich von dieser oder jener Regel keine Ausnahme. Wird also ein Urteil in strengen Allgemeinheit gedacht, d. i. so, daß gar keine Ausnahme als möglich verstattet wird, so ist es nicht von der Erfahrung abgeleitet, sondern schlechterdings a priori gültig. Die empirische Allgemeinheit ist also nur eine willkürliche Steigerung der Gültigkeit, von der, welche in den meisten Fällen, zu der, die in allen gilt, wie z. B. in dem Satze: alle Körper sind schwer; wo dagegen strenge Allgemeinheit zu einem Urteile wesentlich gehört, da zeigt diese auf einen besonderen Erkenntnisquell desselben, nämlich ein Vermögen des Erkenntnisses a priori. Notwendigkeit und strenge Allgemeinheit sind also sichere Kennzeichen einer Erkenntnis a priori, und gehören auch unzertrennlich zueinander. Weil es aber im Gebrauche derselben bisweilen leichter ist, die empirische Beschränktheit derselben, als die Zufälligkeit in den Urteilen, oder es auch manchmal einleuchtender ist, die unbeschränkte Allgemeinheit, die wir einem Urteile beilegen, als die Notwendigkeit desselben zu zeigen, so ist es ratsam, sich gedachter beider Kriterien, deren jedes für sich unfehlbar ist, abgesondert zu bedienen.
Daß es nun dergleichen notwendige und im strengsten Sinne allgemeine, mithin reine Urteile a priori, im menschlichen Erkenntnis wirklich gebe, ist leicht zu zeigen. Will man ein Beispiel aus Wissenschaften, so darf man nur auf alle Sätze der Mathematik hinaussehen, will man ein solches aus dem gemeinsten Verstandesgebrauche, so kann der Satz, daß alle Veränderung eine Ursache haben müsse, dazu dienen; ja in dem letzteren enthält selbst der Begriff einer Ursache so offenbar den Begriff einer Notwendigkeit der Verknüpfung mit einer Wirkung und einer strengen Allgemeinheit der Regel, daß er gänzlich verlorengehen würde, wenn man ihn, wie Hume tat, von einer öftern Beigesellung dessen, was geschieht, mit dem, was vorhergeht, und einer daraus entspringenden Gewohnheit, (mithin bloß subjektiven Notwendigkeit,) Vorstellungen zu verknüpfen, ableiten wollte. Auch könnte man, ohne dergleichen Beispiele zum Beweise der Wirklichkeit reiner Grundsätze a priori in unserem Erkenntnisse zu bedürfen, dieser ihre Unentbehrlichkeit zur Möglichkeit der Erfahrung selbst, mithin a priori dartun. Denn wo wollte selbst Erfahrung ihre Gewißheit hernehmen, wenn alle Regeln, nach denen sie fortgeht, immer wieder empirisch, mithin zufällig wären; daher man diese schwerlich für erste Grundsätze gelten lassen kann. Allein hier können wir uns damit begnügen, den reinen Gebrauch unseres Erkenntnisvermögens als Tatsache samt den Kennzeichen desselben dargelegt zu haben. Aber nicht bloß in Urteilen, sondern selbst in Begriffen zeigt sich ein Ursprung einiger derselben a priori. Lasset von eurem Erfahrungsbegriffe eines Körpers alles, was daran empirisch ist, nach und nach weg: die Farbe, die Härte oder Weiche, die Schwere, selbst die Undurchdringlichkeit, so bleibt doch der Raum übrig, den er (welcher nun ganz verschwunden ist) einnahm, und den könnt ihr nicht weglassen. Ebenso, wenn ihr von eurem empirischen Begriffe eines jeden, körperlichen oder nicht körperlichen, Objekts alle Eigenschaften weglaßt, die euch die Erfahrung lehrt; so könnt ihr ihm doch nicht diejenige nehmen, dadurch ihr es als Substanz oder einer Substanz anhängend denkt, (obgleich dieser Begriff mehr Bestimmung enthält, als der eines Objekts überhaupt). Ihr müßt also, überführt durch die Notwendigkeit, womit sich dieser Begriff euch aufdringt, gestehen, daß er in eurem Erkenntnisvermögen a priori seinen Sitz habe.
III. Die Philosophie bedarf einer Wissenschaft, welche die Möglichkeit, die Prinzipien und den Umfang aller Erkenntnisse a priori bestimme
Was noch weit mehr sagen will als alles vorige, ist dieses, daß gewisse Erkenntnisse sogar das Feld aller möglichen Erfahrungen verlassen, und durch Begriffe, denen überall kein entsprechender Gegenstand in der Erfahrung gegeben werden kann, den Umfang unserer Urteile über alle Grenzen derselben zu erweitern den Anschein haben.
Und gerade in diesen letzteren Erkenntnissen, welche über die Sinnenwelt hinausgehen, wo Erfahrung gar keinen Leitfaden, noch Berichtigung geben kann, liegen die Nachforschungen unserer Vernunft, die wir, der Wichtigkeit nach, für weit vorzüglicher, und ihre Endabsicht für viel erhabener halten, als alles, was der Verstand im Felde der Erscheinungen lernen kann, wobei wir, sogar auf die Gefahr zu irren, eher alles wagen, als daß wir so angelegene Untersuchungen aus irgendeinem Grunde der Bedenklichkeit, oder aus Geringschätzung und Gleichgültigkeit aufgeben sollten. Diese unvermeidlichen Aufgaben der reinen Vernunft selbst sind Gott, Freiheit und Unsterblichkeit. Die Wissenschaft aber, deren Endabsicht mit allen ihren Zurüstungen eigentlich nur auf die Auflösung derselben gerichtet ist, heißt Metaphysik, deren Verfahren im Anfange dogmatisch ist, d. i. ohne vorhergehende Prüfung des Vermögens oder Unvermögens der Vernunft zu einer so großen Unternehmung zuversichtlich die Ausführung übernimmt.
Nun scheint es zwar natürlich, daß, sobald man den Boden der Erfahrung verlassen hat, man doch nicht mit Erkenntnissen, die man besitzt, ohne zu wissen woher, und auf den Kredit der Grundsätze, deren Ursprung man nicht kennt, sofort ein Gebäude errichten werde, ohne der Grundlegung desselben durch sorgfältige Untersuchungen vorher versichert zu sein, daß man also vielmehr die Frage vorlängst werde aufgeworfen haben, wie denn der Verstand zu allen diesen Erkenntnissen a priori kommen könne, und welchen Umfang, Gültigkeit und Wert sie haben mögen. In der Tat ist auch nichts natürlicher, wenn man unter dem Worte natürlich das versteht, was billiger- und vernünftigerweise geschehen sollte; versteht man aber darunter das, was gewöhnlichermaßen geschieht, so ist hinwiederum nichts natürlicher und begreiflicher, als daß diese Untersuchung lange unterbleiben mußte. Denn ein Teil dieser Erkenntnisse, als die mathematischen, ist im alten Besitze der Zuverlässigkeit, und gibt dadurch eine günstige Erwartung auch für andere, ob diese gleich von ganz verschiedener Natur sein mögen. Überdem, wenn man über den Kreis der Erfahrung hinaus ist, so ist man sicher, durch Erfahrung nicht widerlegt zu werden. Der Reiz, seine Erkenntnisse zu erweitern, ist so groß, daß man nur durch einen klaren Widerspruch, auf den man stößt, in seinem Fortschritte aufgehalten werden kann. Dieser aber kann vermieden werden, wenn man seine Erdichtungen nur behutsam macht, ohne daß sie deswegen weniger Erdichtungen bleiben. Die Mathematik gibt uns ein glänzendes Beispiel, wie weit wir es, unabhängig von der Erfahrung, in der Erkenntnis a priori bringen können. Nun beschäftigt sie sich zwar mit Gegenständen und Erkenntnissen bloß so weit, als sich solche in der Anschauung darstellen lassen. Aber dieser Umstand wird leicht übersehen, weil gedachte Anschauung selbst a priori gegeben werden kann, mithin von einem bloßen reinen Begriff kaum unterschieden wird. Durch einen solchen Beweis von der Macht der Vernunft eingenommen, sieht der Trieb zur Erweiterung keine Grenzen. Die leichte Taube, indem sie im freien Fluge die Luft teilt, deren Widerstand sie fühlt, könnte die Vorstellung fassen, daß es ihr im luftleeren Raum noch viel l besser gelingen werde. Ebenso verließ Plato die Sinnenwelt, weil sie dem Verstande so enge Schranken setzt, und wagte sich jenseit derselben, auf den Flügeln der Ideen, in den leeren Raum des reinen Verstandes. Er bemerkte nicht, daß er durch seine Bemühungen keinen Weg gewönne, denn er hatte keinen Widerhalt, gleichsam zur Unterlage, worauf er sich steifen, und woran er seine Kräfte anwenden konnte, um den Verstand von der Stelle zu bringen. Es ist aber ein gewöhnliches Schicksal der menschlichen Vernunft in der Spekulation, ihr Gebäude so früh, wie möglich, fertigzumachen, und hintennach allererst zu untersuchen, ob auch der Grund dazu gut gelegt sei. Alsdann aber werden allerlei Beschönigungen herbeigesucht, um uns wegen dessen Tüchtigkeit zu trösten, oder auch eine solche späte und gefährliche Prüfung lieber gar abzuweisen. Was uns aber während dem Bauen von aller Besorgnis und Verdacht frei hält, und mit scheinbarer Gründlichkeit schmeichelt, ist dieses. Ein großer Teil, und vielleicht der größte, von dem Geschäfte unserer Vernunft, besteht in Zergliederungen der Begriffe, die wir schon von Gegenständen haben. Dieses liefert uns eine Menge von Erkenntnissen, die, ob sie gleich nichts weiter als Aufklärungen oder Erläuterungen desjenigen sind, was in unsern Begriffen (wiewohl noch auf verworrene Art) schon gedacht worden, doch wenigstens der Form nach neuen Einsichten gleich geschätzt werden, wiewohl sie der Materie, oder dem Inhalte nach die Begriffe, die wir haben, nicht erweitern, sondern nur auseinander setzen.
Da dieses Verfahren nun eine wirkliche Erkenntnis a priori gibt, die einen sichern und nützlichen Fortgang hat, so erschleicht die Vernunft, ohne es selbst zu merken, unter dieser Vorspiegelung Behauptungen von ganz anderer Art, wo die Vernunft zu gegebenen Begriffen ganz fremde und zwar a priori hinzutut, ohne daß man weiß, wie sie dazu gelangen und ohne sich eine solche Frage auch nur in die Gedanken kommen zu lassen. Ich will daher gleich anfangs von dem Unterschiede dieser zweifachen Erkenntnisart handeln.
IV. Von dem Unterschiede analytischer und synthetischer Urteile
In allen Urteilen, worinnen das Verhältnis eines Subjekts zum Prädikat gedacht wird, (wenn ich nur die bejahenden erwäge, denn auf die verneinenden ist nachher die Anwendung leicht,) ist dieses Verhältnis auf zweierlei Art möglich. Entweder das Prädikat B gehört zum Subjekt A als etwas, was in diesem Begriffe A (versteckterweise) enthalten ist; oder B liegt ganz außer dem Begriff A, ob es zwar mit demselben in Verknüpfung steht. Im ersten Fall nenne ich das Urteil analytisch, in dem andern synthetisch. Analytische Urteile (die bejahenden) sind also diejenigen, in welchen die Verknüpfung des Prädikats mit dem Subjekt durch Identität, diejenigen aber, in denen diese Verknüpfung ohne Identität gedacht wird, sollen synthetische Urteile heißen. Die ersteren könnte man auch Erläuterungs-, die andern Erweiterungs-Urteile heißen, weil jene durch das Prädikat nichts zum Begriff des Subjekts hinzutun, sondern diesen nur durch Zergliederung in seine Teilbegriffe zerfällen, die in selbigen schon (obgleich verworren) gedacht waren: dahingegen die letzteren zu dem Begriffe des Subjekts ein Prädikat hinzutun, welches in jenem gar nicht gedacht war, und durch keine Zergliederung desselben hätte können herausgezogen werden. Z. B. wenn ich sage: alle Körper sind ausgedehnt, so ist dies ein analytisch Urteil. Denn ich darf nicht über den Begriff, den ich mit dem Körper verbinde, hinausgehen, um die Ausdehnung, als mit demselben verknüpft, zu finden, sondern jenen Begriff nur zergliedern, d. i. des Mannigfaltigen, welches ich jederzeit in ihm denke, mir nur bewußt werden, um dieses Prädikat darin anzutreffen; es ist also ein analytisches Urteil. Dagegen, wenn ich sage: alle Körper sind schwer, so ist das Prädikat etwas ganz anderes, als das, was ich in dem bloßen Begriff eines Körpers überhaupt denke. Die Hinzufügung eines solchen Prädikats gibt also ein synthetisch Urteil.
Erfahrungsurteile, als solche, sind insgesamt synthetisch. Denn es wäre ungereimt, ein analytisches Urteil auf Erfahrung zu gründen, weil ich aus meinem Begriffe gar nicht hinausgehen darf, um das Urteil abzufassen, und also kein Zeugnis der Erfahrung dazu nötig habe. Daß ein Körper ausgedehnt sei, ist ein Satz, der a priori feststeht, und kein Erfahrungsurteil. Denn, ehe ich zur Erfahrung gehe, habe ich alle Bedingungen zu meinem Urteile schon in dem Begriffe, aus welchem ich das Prädikat nach dem Satze des Widerspruchs nur herausziehen, und dadurch zugleich der Notwendigkeit des Urteils bewußt werden kann, welche mir Erfahrung nicht einmal lehren würde. Dagegen, ob ich schon in dem Begriff eines Körpers überhaupt das Prädikat der Schwere gar nicht einschließe, so bezeichnet jener doch einen Gegenstand der Erfahrung durch einen Teil derselben, zu welchem ich also noch andere Teile eben derselben Erfahrung, als zu dem ersteren gehörten, hinzufügen kann. Ich kann den Begriff des Körpers vorher analytisch durch die Merkmale der Ausdehnung, der Undurchdringlichkeit, der Gestalt usw., die alle in diesem Begriffe gedacht werden, erkennen. Nun erweitere ich aber meine Erkenntnis, und, indem ich auf die Erfahrung zurücksehe, von welcher ich diesen Begriff des Körpers abgezogen hatte, so finde ich mit obigen Merkmalen auch die Schwere jederzeit verknüpft, und füge also diese als Prädikat zu jenem Begriffe synthetisch hinzu. Es ist also die Erfahrung, worauf sich die Möglichkeit der Synthesis des Prädikats der Schwere mit dem Begriffe des Körpers gründet, weil beide Begriffe, ob zwar einer nicht in dem anderen enthalten ist, dennoch als Teile eines Ganzen, nämlich der Erfahrung, die selbst eine synthetische Verbindung der Anschauungen ist, zueinander, wiewohl nur zufälligerweise, gehören.
Aber bei synthetischen Urteilen a priori fehlt dieses Hilfsmittel ganz und gar. Wenn ich über den Begriff A hinausgehen soll, um einen andern B als damit verbunden zu erkennen, was ist das, worauf ich mich stütze, und wodurch die Synthesis möglich wird? da ich hier den Vorteil nicht habe, mich im Felde der Erfahrung danach umzusehen. Man nehme den Satz: Alles, was geschieht, hat seine Ursache. In dem Begriff von etwas, das geschieht, denke ich zwar ein Dasein, vor welchem eine Zeit vorhergeht usw. und daraus lassen sich analytische Urteile ziehen. Aber der Begriff einer Ursache liegt ganz außer jenem Begriffe, und zeigt etwas von dem, was geschieht, Verschiedenes an, ist also in dieser letzteren Vorstellung gar nicht mit enthalten. Wie komme ich denn dazu, von dem, was überhaupt geschieht, etwas davon ganz Verschiedenes zu sagen, und den Begriff der Ursache, obzwar in jenem nicht enthalten, dennoch, als dazu und sogar notwendig gehörig, zu erkennen.
Was ist hier das Unbekannte = X, worauf sich der Verstand stützt, wenn er außer dem Begriff von A ein demselben fremdes Prädikat B aufzufinden glaubt, welches er gleichwohl damit verknüpft zu sein erachtet? Erfahrung kann es nicht sein, weil der angeführte Grundsatz nicht allein mit größerer Allgemeinheit, sondern auch mit dem Ausdruck der Notwendigkeit, mithin gänzlich a priori und aus bloßen Begriffen, diese zweite Vorstellungen zu der ersteren hinzugefügt. Nun beruht auf solchen synthetischen d. i. Erweiterungs-Grundsätzen die ganze Endabsicht unserer spekulativen Erkenntnis a priori; denn die analytischen sind zwar höchst wichtig und nötig, aber nur um zu derjenigen Deutlichkeit der Begriffe zu gelangen, die zu einer sicheren und ausgebreiteten Synthesis, als zu einem wirklich neuen Erwerb, erforderlich ist.*
V In allen theoretischen Wissenschaften der Vernunft sind synthetische Urteile a priori als Prinzipien enthalten
1. Mathematische Urteile sind insgesamt synthetisch. Dieser Satz scheint den Bemerkungen der Zergliederer der menschlichen Vernunft bisher entgangen, ja allen ihren Vermutungen gerade entgegengesetzt zu sein, ob er gleich unwidersprechlich gewiß und in der Folge sehr wichtig ist. Denn weil man fand, daß die Schlüsse der Mathematiker alle nach dem Satze des Widerspruchs fortgehen, (welches die Natur einer jeden apodiktischen Gewißheit erfordert,) so überredet man sich, daß auch die Grundsätze aus dem Satze des Widerspruchs erkannt würden; worin sie sich irrten; denn ein synthetischer Satz kann allerdings nach dem Satze des Widerspruchs eingesehen werden, aber nur so, daß ein anderer synthetischen Satz vorausgesetzt wird, aus dem er gefolgert werden kann, niemals aber an sich selbst.
Zuvörderst muß bemerkt werden: daß eigentliche mathematische Sätze jederzeit Urteile a priori und nicht empirisch sind, weil sie Notwendigkeit bei sich führen, welche aus Erfahrung nicht abgenommen werden kann. Will man aber dieses nicht einräumen, wohlan, so schränke ich meinen Satz auf die reine Mathematik ein, deren Begriff es schon mit sich bringt, daß sie nicht empirische, sondern bloß reine Erkenntnis a priori enthalte.
Man sollte anfänglich zwar denken: daß der Satz 7 + 5 = 12 ein bloß analytischer Satz sei, der aus dem Begriffe einer Summe von Sieben und Fünf nach dem Satze des Widerspruches erfolge. Allein, wenn man es näher betrachtet, so findet man, daß der Begriff der Summe von 7 und 5 nichts weiter enthalte, als die Vereinigung beider Zahlen in eine einzige, wodurch ganz und gar nicht gedacht wird, welches diese einzige Zahl sei, die beide zusammenfaßt. Der Begriff von Zwölf ist keineswegs dadurch schon gedacht, daß ich mir bloß jene Vereinigung von Sieben und Fünf denke, und, ich mag meinen Begriff von einer solchen möglichen Summe noch solange zergliedern, so werde ich doch darin die Zwölf nicht antreffen. Man muß über diese Begriffe hinausgehen, indem man die Anschauung zu Hilfe nimmt, die einem von beiden korrespondiert, etwa seine fünf Finger, oder (wie Segner in seiner Arithmetik) fünf Punkte, und so nach und nach die Einheiten der in der Anschauung gegebenen Fünf zu dem Begriffe der Sieben hinzutut. Denn ich nehme zuerst die Zahl 7, und, indem ich für den Begriff der 5 die Finger meiner Hand als Anschauung zu Hilfe nehme, so tue ich die Einheiten, die ich vorher zusammennahm, um die Zahl 5 auszumachen, nun an jenem meinem Bilde nach und nach zur Zahl 7, und sehe so die Zahl 12 entspringen. Daß 7 zu 5 hinzugetan werden sollten, habe ich zwar in dem Begriffe einer Summe = 7 + 5 gedacht, aber nicht, daß diese Summe der Zahl 12 gleich sei. Der arithmetische Satz ist also jederzeit synthetisch; welches man desto deutlicher inne wird, wenn man etwas größere Zahlen nimmt, da es dann klar einleuchtet, daß, wir möchten unsere Begriffe drehen und wenden, wie wir wollen, wir, ohne die Anschauung zu Hilfe zu nehmen, vermittels der bloßen Zergliederung unserer Begriffe die Summe niemals finden könnten.
Ebensowenig ist irgendein Grundsatz der reinen Geometrie analytisch. Daß die gerade Linie zwischen zwei Punkten die kürzeste sei, ist ein synthetischen Satz. Denn mein Begriff vom Geraden enthält nichts von Größe, sondern nur eine Qualität. Der Begriff des Kürzesten kommt also gänzlich hinzu, und kann durch keine Zergliederung aus dem Begriffe der geraden Linie gezogen werden. Anschauung muß also hier zu Hilfe genommen werden, vermittels deren allein die Synthesis möglich ist.
Einige wenige Grundsätze, welche die Geometer voraussetzen, sind zwar wirklich analytisch und beruhen auf dem Satze des Widerspruchs, sie dienen aber auch nur, wie identische Sätze, zur Kette der Methode und nicht als Prinzipien, z. B. a = a, das Ganze ist sich selber gleich, oder (a + b) > a, d. i. das Ganze ist größer als sein Teil. Und doch auch diese selbst, ob sie gleich nach bloßen Begriffen gelten, werden in der Mathematik nur darum zugelassen, weil sie in der Anschauung können dargestellt werden. Was uns hier gemeiniglich glauben macht, als läge das Prädikat solcher apodiktischen Urteile schon in unserm Begriffe, und das Urteil sei also analytisch, ist bloß die Zweideutigkeit des Ausdrucks. Wir sollen nämlich zu einem gegebenen Begriffe ein gewisses Prädikat hinzudenken, und diese Notwendigkeit haftet schon an den Begriffen. Aber die Frage ist nicht, was wir zu dem gegebenen Begriffe hinzudenken sollen, sondern was wir wirklich in ihm, obzwar nur dunkel, denken, und da zeigt sich, daß das Prädikat jenen Begriffen zwar notwendig, aber nicht als im Begriffe selbst gedacht, sondern vermittels einer Anschauung, die zu dem Begriffe hinzukommen muß, anhänge.
2. Naturwissenschaft (Physica) enthält synthetische Urteile a priori als Prinzipien in sich. Ich will nur ein paar Sätze zum Beispiel anführen, als den Satz: daß in allen Veränderungen der körperlichen Welt die Quantität der Materie unverändert bleibe, oder daß, in aller Mitteilung der Bewegung, Wirkung und Gegenwirkung jederzeit einander gleich sein müssen. An beiden ist nicht allein die Notwendigkeit, mithin ihr Ursprung a priori, sondern auch, daß sie synthetische Sätze sind, klar. Denn in dem Begriffe der Materie denke ich mir nicht die Beharrlichkeit, sondern bloß ihre Gegenwart im Raume durch die Erfüllung desselben. Also gehe ich wirklich über den Begriff von der- Materie hinaus, um etwas a priori zu ihm hinzuzudenken, was ich in ihm nicht dachte. Der Satz ist also nicht analytisch, sondern synthetisch und dennoch a priori gedacht, und so in den übrigen Sätzen des reinen Teils der Naturwissenschaft.
3. In der Metaphysik, wenn man sie auch nur für eine bisher bloß versuchte, dennoch aber durch die Natur der menschlichen Vernunft unentbehrliche Wissenschaft ansieht, sollen synthetische Erkenntnisse a priori enthalten sein, und es ist ihr gar nicht darum zu tun, Begriffe, die wir uns a priori von Dingen machen, bloß zu zergliedern und dadurch analytisch zu erläutern, sondern wir wollen unsere Erkenntnis a priori erweitern, wozu wir uns solcher Grundsätze bedienen müssen, die über den gegebenen Begriff etwas hinzutun, was in ihm nicht enthalten war, und durch synthetische Urteile a priori wohl gar so weit hinausgehen, daß uns die Erfahrung selbst nicht so weit folgen kann, z. B. in dem Satze: die Welt muß einen ersten Anfang haben, u. a. m. und so besteht Metaphysik wenigstens ihrem Zwecke nach aus lauter synthetischen Sätzen a priori.
VI. Allgemeine Aufgabe der reinen Vernunft
Man gewinnt dadurch schon sehr viel, wenn man eine Menge von Untersuchungen unter die Formel einer einzigen Aufgabe bringen kann. Denn dadurch erleichtert man sich nicht allein selbst sein eigenes Geschält, indem man es sich genau bestimmt, sondern auch jedem anderen, der es prüfen will, das Urteil, ob wir unserem Vorhaben ein Genüge getan haben oder nicht. Die eigentliche Aufgabe der reinen Vernunft ist nun in der Frage enthalten: Wie sind synthetische Urteile a priori möglich?
Daß die Metaphysik bisher in einem so schwankenden Zustande der Ungewißheit und Widersprüche geblieben ist, ist lediglich der Ursache zuzuschreiben, daß man sich diese Aufgabe und vielleicht sogar den Unterschied der analytischen und synthetischen Urteile nicht früher in Gedanken kommen ließ. Auf der Auflösung dieser Aufgabe, oder einem genugtuenden Beweise, daß die Möglichkeit, die sie erklärt zu wissen verlangt, in der Tat gar nicht stattfinde, beruht nun das Stehen und Fallen der Metaphysik. David Hume, der dieser Aufgabe unter allen Philosophen noch am nächsten trat, sie aber sich bei weitem nicht bestimmt genug und in ihrer Allgemeinheit dachte, sondern bloß bei dem synthetischen Satze der Verknüpfung der Wirkung mit ihren Ursachen (Principium causalitatis) stehen blieb, glaubte herauszubringen, daß ein solcher Satz a priori gänzlich unmöglich sei, und nach seinen Schlüssen würde alles, was wir Metaphysik nennen, auf einen bloßen Wahn von vermeinter Vernunfteinsicht dessen hinauslaufen, was in der Tat bloß aus der Erfahrung erborgt und durch Gewohnheit den Schein der Notwendigkeit überkommen hat; auf welche, alle reine Philosophie zerstörende, Behauptung er niemals gefallen wäre, wenn er unsere Aufgabe in ihrer Allgemeinheit vor Augen gehabt hätte, da er dann eingesehen haben würde, daß, nach seinem Argumente, es auch keine reine Mathematik geben könnte, weil diese gewiß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enthält, vor welcher Behauptung ihn alsdann sein guter Verstand wohl würde bewahrt haben.
In der Auflösung obiger Aufgabe ist zugleich die Möglichkeit des reinen Vernunftgebrauches in Gründung und Ausführung aller Wissenschaften, die eine theoretische Erkenntnis a priori von Gegenständen enthalten, mit begriffen, d. i. die Beantwortung der Fragen:
Wie ist reine Mathematik möglich?Wie ist reine Naturwissenschaft möglich?
Von diesen Wissenschaften, da sie wirklich gegeben sind, läßt sich nun wohl geziemend fragen: wie sie möglich sind; denn daß sie möglich sein müssen, wird durch ihre Wirklichkeit bewiesen*. Was aber Metaphysik betrifft, so muß ihr bisheriger schlechter Fortgang, und weil man von keiner einzigen bisher vorgetragenen, was ihren wesentlichen Zweck angeht, sagen kann, sie sei wirklich vorhanden, einen jeden mit Grund an ihrer Möglichkeit zweifeln lassen.
Nun ist aber diese Art von Erkenntnis in gewissem Sinne doch auch als gegeben anzusehen, und Metaphysik ist, wenngleich nicht als Wissenschaft, doch als Naturanlage (metaphysica naturalis) wirklich. Denn die menschliche Vernunft geht unaufhaltsam, ohne daß bloße Eitelkeit des Vielwissens sie dazu bewegt, durch eigenes Bedürfnis getrieben bis zu solchen Fragen fort, die durch keinen Erfahrungsgebrauch der Vernunft und daher entlehnte Prinzipien beantwortet werden können, und so ist wirklich in allen Menschen, sobald Vernunft sich in ihnen bis zur Spekulation erweitert, irgendeine Metaphysik zu aller Zeit gewesen, und wird auch immer darin bleiben. Und nun ist auch von dieser die Frage:
Wie ist Metaphysik als Naturanlage möglich?
d. i. wie entspringen die Fragen, welche reine Vernunft sich aufwirft, und die sie, so gut als sie kann, zu beantworten durch ihr eigenes Bedürfnis getrieben wird, aus der Natur der allgemeinen Menschenvernunft?
Da sich aber bei allen bisherigen Versuchen, diese natürlichen Fragen, z. B. ob die Welt einen Anfang habe, oder von Ewigkeit her sei, usw. zu beantworten, jederzeit unvermeidliche Widersprüche gefunden haben, so kann man es nicht bei der bloßen Naturanlage zur Metaphysik, d. i. dem reinen Vernunftvermögen selbst, woraus zwar immer irgendeine Metaphysik (es sei welche es wolle) erwächst, bewenden lassen, sondern es muß möglich sein, mit ihr es zur Gewißheit zu bringen, entweder im Wissen oder Nicht-Wissen der Gegenstände, d. i. entweder der Entscheidung über die Gegenstände ihrer Fragen, oder über das Vermögen und Unvermögen der Vernunft in Ansehung ihrer etwas zu urteilen, also entweder unsere reine Vernunft mit Zuverlässigkeit zu erweitern, oder ihr bestimmte und sichere Schranken zu setzen. Diese letzte Frage, die aus der obigen allgemeinen Aufgabe fließt, würde mit Recht diese sein: Wie ist Metaphysik als Wissenschaft möglich?
Die Kritik der Vernunft führt also zuletzt notwendig zur Wissenschaft; der dogmatische Gebrauch derselben ohne Kritik dagegen auf grundlose Behauptungen, denen man ebenso scheinbare entgegensetzen kann, mithin zum Skeptizismus.
Auch kann diese Wissenschaft nicht von großer abschreckender Weitläufigkeit sein, weil sie es nicht mit Objekten der Vernunft, deren Mannigfaltigkeit unendlich ist, sondern es bloß mit sich selbst, mit Aufgaben, die ganz aus ihrem Schoße entspringen, und ihr nicht durch die Natur der Dinge, die von ihr unterschieden sind, sondern durch ihre eigene vorgelegt sind, zu tun hat; da es denn, wenn sie zuvor ihr eigen Vermögen in Ansehung der Gegenstände, die ihr in der Erfahrung vorkommen mögen, vollständig hat kennenlernen, leicht werden muß, den Umfang und die Grenzen ihres über alle Erfahrungsgrenzen versuchten Gebrauchs vollständig und sicher zu bestimmen. Man kann also und muß alle bisher gemachten Versuche, eine Metaphysik dogmatisch zustande zu bringen, als ungeschehen ansehen; denn was in der einen oder der anderen Analytisches, nämlich bloße Zergliederung der Begriffe ist, die unserer Vernunft a priori beiwohnen, ist noch gar nicht der Zweck, sondern nur eine Veranstaltung zu der eigentlichen Metaphysik, nämlich seine Erkenntnis a priori synthetisch zu erweitern, und ist zu diesem untauglich, weil sie bloß zeigt, was in diesen Begriffen enthalten ist, nicht aber, wie wir a priori zu solchen Begriffen gelangen, um danach auch ihren gültigen Gebrauch in Ansehung der Gegenstände aller Erkenntnis überhaupt bestimmen zu können. Es gehört auch nur wenig Selbstverleugnung dazu, alle diese Ansprüche aufzugeben, da die nicht abzuleugnenden und im dogmatischen Verfahren auch unvermeidlichen Widersprüche der Vernunft mit sich selbst jede bisherige Metaphysik schon längst um ihr Ansehen gebracht haben. Mehr Standhaftigkeit wird dazu nötig sein, sich durch die Schwierigkeit innerlich und den Widerstand äußerlich nicht abhalten zu lassen, eine der menschlichen Vernunft unentbehrliche Wissenschaft, von der man wohl jeden hervorgeschossenen Stamm abhauen, die Wurzel aber nicht ausrotten kann, durch eine andere, der bisherigen ganz entgegengesetzte, Behandlung endlich einmal zu einem gedeihlichen und fruchtbaren Wuchse zu befördern.
* Von der reinen Naturwissenschaft könnte mancher dieses letztere noch bezweifeln. Allein man darf nur die verschiedenen Sätze, die im Anfange der eigentlichen (empirischen) Physik vorkommen, nachsehen, als den von der Beharrlichkeit derselben Quantität Materie, von der Trägheit, der Gleichheit der Wirkung und Gegenwirkung usw., so wird man bald überzeugt werden, daß sie eine physicam puram (oder rationalem) ausmachen, die es wohl verdient, als eigene Wissenschaft, in ihrem engen oder weiten, aber doch ganzen Umfange, abgesondert aufgestellt zu werden.
VII. Idee und Einteilung einer besonderen Wissenschaft, unter dem Namen der Kritik der reinen Vernunft
Aus diesem allein ergibt sich nun die Idee einer besonderen Wissenschaft, die Kritik der reinen Vernunft heißen kann. Denn ist Vernunft das Vermögen, welches die Prinzipien der Erkenntnis a priori an die Hand gibt. Daher ist reine Vernunft diejenige, welche die Prinzipien, etwas schlechthin a priori zu erkennen, enthält. Ein Organon der reinen Vernunft würde ein Inbegriff derjenigen Prinzipien sein, nach denen alle reinen Erkenntnisse a priori können erworben und wirklich zustande gebracht werden. Die ausführliche Anwendung eines solchen Organon würde ein System der reinen Vernunft verschaffen. Da dieses aber sehr viel verlangt ist, und es noch dahin steht, ob auch hier überhaupt eine Erweiterung unserer Erkenntnis, und in welchen Fällen sie möglich sei; so können wir eine Wissenschaft der bloßen Beurteilung der reinen Vernunft, ihrer Quellen und Grenzen, als die Propädeutik zum System der reinen Vernunft ansehen. Eine solche würde nicht eine Doktrin, sondern nur Kritik der reinen Vernunft heißen müssen, und ihr Nutzen würde in Ansehung der Spekulation wirklich nur negativ sein, nicht zur Erweiterung, sondern nur zur Läuterung unserer Vernunft dienen, und sie von Irrtümern frei halten, welches schon sehr viel gewonnen ist. Ich nenne alle Erkenntnis transzendental, die sich nicht sowohl mit Gegenständen, sondern mit unserer Erkenntnisart von Gegenständen, insofern diese a priori möglich sein soll, überhaupt beschäftigt. Ein System solcher Begriffe würde Transzendental-Philosophie heißen. Diese ist aber wiederum für den Anfang noch zu viel. Denn, weil eine solche Wissenschaft sowohl die analytische Erkenntnis, als die synthetische a priori vollständig enthalten müßte, so ist sie, soweit es unsere Absicht betrifft, von zu weitem Umfange, indem wir die Analysis nur so weit treiben dürfen, als sie unentbehrlich notwendig ist, um die Prinzipien der Synthesis a priori, als warum es uns nur zu tun ist, in ihrem ganzen Umfange einzusehen. Diese Untersuchung, die wir eigentlich nicht Doktrin, sondern nur transzendentale Kritik nennen können, weil sie nicht die Erweiterung der Erkenntnisse selbst, sondern nur die Berichtigung derselben zur Absicht hat, und den Probierstein des Werts oder Unwerts aller Erkenntnisse a priori abgeben soll, ist das, womit wir uns jetzt beschäftigen. Eine solche Kritik ist demnach eine Vorbereitung, wo möglich, zu einem Organon, und wenn dieses nicht gelingen sollte, wenigstens zu einem Kanon derselben, nach welchem allenfalls dereinst das vollständige System der Philosophie der reinen Vernunft, es mag nun in Erweiterung oder bloßer Begrenzung ihrer Erkenntnis bestehen, sowohl analytisch als synthetisch dargestellt werden könnte. Denn daß dieses möglich sei, ja daß ein solches System von nicht gar großem Umfange sein könne, um zu hoffen, es ganz zu vollenden, läßt sich schon zum voraus daraus ermessen, daß hier nicht die Natur der Dinge, welche unerschöpflich ist, sondern der Verstand, der über die Natur der Dinge urteilt, und auch dieser wiederum nur in Ansehung seiner Erkenntnis a priori, den Gegenstand ausmacht, dessen Vorrat, weil wir ihn doch nicht auswärtig suchen dürfen, uns nicht verborgen bleiben kann, und allem Vermuten nach klein genug ist, um vollständig aufgenommen, nach seinem Werte oder Unwerte beurteilt und unter richtige Schätzung gebracht zu werden. Noch weniger darf man hier eine Kritik der Bücher und Systeme der reinen Vernunft erwarten, sondern die des reinen Vernunftvermögens selbst. Nur allein, wenn diese zum Grunde liegt, hat man einen sicheren Probierstein, den philosophischen Gehalt alter und neuer Werke in diesem Fache zu schätzen; widrigenfalls beurteilt der unbefugte Geschichtsschreiber und Richter grundlose Behauptungen anderer, durch seine eigenen, die ebenso grundlos sind.
Die Transzendental-Philosophie ist die Idee einer Wissenschaft, wozu die Kritik der reinen Vernunft den ganzen Plan architektonisch, d. i. aus Prinzipien, entwerfen soll, mit völliger Gewährleistung der Vollständigkeit und Sicherheit aller Stücke, die dieses Gebäude ausmachen. Sie ist das System aller Prinzipien der reinen Vernunft. Daß diese Kritik nicht schon selbst Transzendental-Philosophie heißt, beruht lediglich darauf, daß sie, um ein vollständiges System zu sein, auch eine ausführliche Analysis der ganzen menschlichen Erkenntnis a priori enthalten müßte. Nun muß zwar unsere Kritik allerdings auch eine vollständige Herzählung aller Stammbegriffe, welche die gedachte reine Erkenntnis ausmachen, vor Augen legen. Allein der ausführlichen Analysis dieser Begriffe selbst, wie auch der vollständigen Rezension der daraus abgeleiteten, enthält sie sich billig, teils weil diese Zergliederung nicht zweckmäßig wäre, indem sie die Bedenklichkeit nicht hat, welche bei der Synthesis angetroffen wird, um deren willen eigentlich die ganze Kritik da ist, teils, weil es der Einheit des Planes zuwider wäre, sich mit der Verantwortung der Vollständigkeit einer solchen Analysis und Ableitung zu befassen, deren man in Ansehung seiner Absicht doch überhoben sein konnte. Diese Vollständigkeit der Zergliederung sowohl, als der Ableitung aus den künftig zu liefernden Begriffen a priori, ist indessen leicht zu ergänzen, wenn sie nur allererst als ausführliche Prinzipien der Synthesis da sind, und in Ansehung dieser wesentlichen Absicht nichts ermangelt.
Zur Kritik der reinen Vernunft gehört demnach alles, was die Transzendental-Philosophie ausmacht, und sie ist die vollständige Idee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aber diese Wissenschaft noch nicht selbst; weil sie in der Analysis nur so weit geht, als es zur vollständigen Beurteilung der synthetischen Erkenntnis a priori erforderlich ist.
Das vornehmste Augenmerk bei der Einteilung einer solchen Wissenschaft ist: daß gar keine Begriffe hineinkommen müssen, die irgend etwas Empirisches in sich enthalten; oder daß die Erkenntnis a priori völlig rein sei. Daher, obzwar die obersten Grundsätze der Moralität und die Grundbegriffe derselben, Erkenntnisse a priori sind, so gehören sie doch nicht in die Transzendental-Philosophie, weil sie die Begriffe der Lust und Unlust, der Begierden und Neigungen usw., die insgesamt empirischen Ursprungs sind, zwar selbst nicht zum Grunde ihrer Vorschriften legen, aber doch im Begriffe der Pflicht, als Hindernis, das überwunden, oder als Anreiz, der nicht zum Bewegungsgrunde gemacht werden soll, notwendig in die Abfassung des Systems der reinen Sittlichkeit mit hineinziehen müssen. Daher ist die Transzendental-Philosophie eine Weltweisheit der reinen bloß spekulativen Vernunft. Denn alles Praktische, sofern es Triebfedern enthält, bezieht sich auf Gefühle, welche zu empirischen Erkenntnisquellen gehören.
Wenn man nun die Einteilung dieser Wissenschaft aus dem allgemeinen Gesichtspunkte eines Systems überhaupt anstellen will, so muß die, welche wir jetzt vortragen, erstlich eine Elementar-Lehre, zweitens eine Methoden-Lehre der reinen Vernunft enthalten. Jeder dieser Hauptteile würde seine Unterabteilung haben, deren Gründe sich gleichwohl hier noch nicht vortragen lassen. Nur so viel scheint zur Einleitung, oder Vorerinnerung, nötig zu sein, daß es zwei Stämme der menschlichen Erkenntnis gebe, die vielleicht aus einer gemeinschaftlichen, aber uns unbekannten Wurzel entspringen, nämlich Sinnlichkeit und Verstand, durch deren ersteren uns Gegenstände gegeben, durch den zweiten aber gedacht werden. Sofern nun die Sinnlichkeit Vorstellungen a priori enthalten sollte, welche die Bedingung ausmachen, unter der uns Gegenstände gegeben werden, so würde sie zur Transzendental-Philosophie gehören. Die transzendentale Sinnenlehre würde zum ersten Teile der Elementarwissenschaft gehören müssen, weil die Bedingungen, worunter allein die Gegenstände der menschlichen Erkenntnis gegeben werden, denjenigen vorgehen, unter welchen selbige gedacht we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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