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년 일본 국왕이 수나라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다. 일본의 오만에 수양제는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 보낸 답장국서 첫마디는 “황제가 왜왕에게 묻는다”였다. 고대 중-일 관계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663년 일본은 백제 부흥세력을 돕기 위해, 신라와 손잡은 당나라와 백강에서 전쟁을 치른다. 일본은 병력 4만2000명에 전함 1000척을 동원했고, 당은 병력 1만3000명에 전함 170척을 동원했다. 7세기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어마어마한 국제전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의 명목은 백제 부흥이지만 거기에는 당의 질서에 대한 도전도 없지 않았다. 일본은 패했고 그 후 900여년 동안 동북아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질서를 누렸다.
16세기말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고 명과 맞대결을 벌인다. 이 ‘임진왜란’ 역시 중원 중심의 ‘천조예치체계’(天朝禮治體系)에 대한 도전이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큰 도전이었다. 그 여파로 일본은 도요토미 시대가 저물고 에도막부 시대가 열렸다. 중국에서는 명이 지고 청이 뜬다. 그렇지만 일본이 패하면서 동북아에는 또다시 300년 동안 상대적 평화가 깃들게 됐다.
1894년 임진왜란 300년 만에 일본은 또 중국 중심의 질서에 도전장을 던졌다. 메이지유신을 거쳐 동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천년의 숙원을 이룬다. 마침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무너뜨린 것이다. 자신감이 팽배한 일본은 러-일 전쟁을 일으키고 승기를 잡는다. 얼마 전 일본 아베 총리가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줬다”고 한 러-일 전쟁이다. 러-일 전쟁 승리로 일본은 당장 조선을 식민지로 병탄하고 아시아 식민지 쟁탈에 나선다. 일본은 전쟁을 통한 군사 점령과 식민통치로 ‘대동아공영권’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일본은 패망했다. 그렇지만 일본은 새로운 미-소 냉전질서에서 미국의 동맹국으로 둔갑하고 동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 코기러기(선두)로 부상한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설파한 ‘일본맹주론’을 실현했다고 자부했다.
그 일본이 급속히 부상하는 중국에 다시 추월당한다. 근대사 이후 누렸던 동아시아 제일의 자부심에 금이 간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강할 때면 중-일 관계는 돈독했다. 당나라 시기가 그랬다. 당이 내리막길을 걷자 일본은 당장 ‘견당사’부터 폐지한다. 청-일 전쟁도 청이 약세일 때 일으켰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맹주가 베푼 관용이라 할까. 중국이 약세이던 개혁개방 초기 일본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20년 가까운 경기침체와 중국의 기적 같은 부상으로 일본은 맹주 자리를 빼앗긴 좌절감에 휩싸였다. 아베는 이런 중-일 관계를 1차 세계대전의 독일과 영국 관계에 비교하면서 중국을 기존 질서의 도전자라고 한다. 오늘의 중국을 영국에 도전한 독일에 빗댄 것이다. 중국이 일본에 도전한다는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일본은 청-일 전쟁 전으로 돌아가 다시 중국의 지위에 도전해야 할 처지가 됐다 하겠다.
수천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본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대해 어느 나라보다 강한 이심력(離心力)을 갖고 있었다. 중국 질서와 거리를 두면서 기회만 되면 그 질서를 깨뜨리려 했다. 동아시아 수천년 역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켜 동아시아를 제패하려 했다. 지난 역사는 일본이 늘 전쟁으로 일본 주도의 질서를 세우려 했다고 적고 있다. 요즘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거듭나려는 데 대해 주변국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오늘의 중-일 갈등은 역사 갈등의 연장선에서 벌어지는 동아시아 주도권 다툼으로 비친다. 그 갈등의 끝은 어디일까. 중국이 지리멸렬하든지 아니면 일본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지든지, 아니면 다시 전쟁으로 승부를 가리든지 해야 하지 않을까. 어찌 보면 중·일이 겪어온 역사는 바로 대국들이 흥망성쇠하며 겪을 수밖에 없었던 비극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비극을 벗어나자면 이젠 지난 역사에 없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상해야 할 것 같다. 다름 아닌 ‘신흥대국관계’다.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