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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이후의 일본/ 서경석/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9. 11. 11:00

사설.칼럼칼럼

[특별기고] 포스트 콜로니얼(식민지 이후)의 표상 / 서경식

등록 :2015-09-10 18:58

 

2차 대전에서 패한 파시즘 국가 중 전쟁 전과 다름없는 군주의 가계를 계속 받들어 모시고, 같은 국가, 국기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쇼니바레의 작품이 일본에선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일본 자신의 입장으로 바꿔놓고 성찰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게 분명하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 8월14일 이른바 ‘전후 70년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 대한 내 인상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식민지지배 인식의 부인’ ‘역사수정주의’라는 것이다.

담화의 서두에, 서양에 의한 식민지지배 파도가 아시아에 밀려왔으나 “러일전쟁은 식민지지배 아래 있던 많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인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지만 러일전쟁은 중국 동북지방(만주)을 비롯한 동아시아 패권을 다툰 제국주의전쟁이었다. 그 때문에 조선반도(한반도)는 일본에 군사점령을 당했고, 대한제국은 ‘보호국’이 돼 의병을 비롯한 민중의 저항은 무참하게 탄압당했다. 그것은 나중에 ‘병합’(식민지지배)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공공연한 부인에서부터 아베 담화는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전세계가 휘말린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민족자결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그때까지의 식민지화에 제동이 걸리게 됐습니다”라고 아베 담화는 얘기한다. 주어가 없는 이 문장을 통해 당시 일본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은폐하고 있다. 일본은 대전 중에 중국에 대해 ‘21개 조’ 요구를 들이대 전쟁 뒤 옛 독일령이었던 중국의 산둥반도와 남태평양을 빼앗았다. 일본은 ‘민족자결’ 편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탄압하는 쪽에 가담했다. 그것은 3·1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의 (잔혹했던) 대처만 봐도 명백하다. 일본에 아시아 민족들과 함께 손을 잡고 구미 열강에 저항함으로써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던 3·1독립선언의 정신을 짓밟았던 게 바로 일본이었다. 여기서 더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겠으나, 이토록 명백한 거짓말을 태연자약하게 늘어놓은 것이 아베 담화였다.

그 이상으로(새삼 놀랄 것도 없지만) 인상 깊었던 것은, 이런 담화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소리가 일본 사회에서 언론이나 지식계까지 포함해서 너무나 미약했다는 점이다. 어느 신문 조사에 따르면, 아베 총리 지지율이 이 담화 뒤에 5%포인트 정도 올라간 모양이다. 역사수정주의는 아베를 비롯한 일부 우파 인사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 저변은 넓고 일본 국민 다수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계속되는 식민지주의’를 어떻게 도려낼 수 있을까? 이것은 우리에게 던져진 심각한 질문이다.

올해 3월의 어느 날, 나는 영국 런던의 스튜디오로 아티스트 잉카 쇼니바레를 만나러 갔다. 휠체어를 탄 그는 1시간 반 정도 이어진 대화에서 명석한 언어로 얘기하면서 농담도 잘 했고 웃기도 잘 했다.

“아프리카가 세계의 아트 담론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1980년대부터입니다. 그 당시 많은 아티스트들이 그때까지의 서구적 규범에 도전했습니다. ‘아티스트는 희지(white) 않다’는 미술사상 최초의 표명이었습니다. 그것이 내 출발점이었고, 거기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잉카 쇼니바레는 나이지리아인 부부의 아들로 1962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내가 아트 칼리지에 다닐 무렵, 교수가 내게 ‘왜 아프리카에 대한 걸 하지 않니? 정통적인 아프리카 아트를…’ 하고 말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잘 몰랐습니다. 나는 서구 근대의 가치관 속에서 길러지고 성장했기 때문에 ‘정통적인 아프리카의 것’이 무엇을 얘기하는 건지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나는 런던 시장에 가서 아프리카 포(布, 옷감)를 취급하는 매장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아프리카산이라고 생각했던 포가 실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영국 제품이라는 걸 알았지요. 말하자면 아프리카의 아이덴티티(정체성)가 식민지주의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겁니다.”

다채로운 색깔의 ‘아프리카적’인 포를 이용한 쇼니바레의 아트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우리들 중 다수가 ‘아프리카적’이라고 믿었던 포는, 인도네시아 기원의 납결염색(백랍과 수지를 섞은 것으로 천에 무늬를 그려 염료에 담근 뒤 그 납을 제거하여 그 부분만 백색으로 남기는 염색 방식) 기술이 식민 종주국 네덜란드에 의해 유럽에 도입된 뒤 영국 맨체스터에서 디자인되고 대량생산된 제품이 아프리카에 수출된 것이었다. 원재료인 면(綿)도 영국 식민지인 인도 또는 동아프리카산이다.

즉 우리가 ‘아프리카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포의 색깔이나 재료는 실은 근대 식민지지배 과정에서 종주국이 식민지에 강요해서 조성된 결과인 것이다.

쇼니바레는 교수가 요구한 대로 ‘아프리카적’인 것을 제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적’인 것을 거부하고 ‘영국적’인 것에 동화(동일화)되지도 않았다. 대신 ‘아프리카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아이덴티티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작품화한 것이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영국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2002년의 ‘도쿠멘타 11’ 전시회에서 나는 쇼니바레의 아프리카 포 아트의 대표작인 <정사와 성교>(원제는 Gallantry and Criminal Conversation)를 볼 수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단체여행이 이 작품의 모티프였다. 등장하는 남녀가 입고 있는 옷 디자인은 전형적인 빅토리아조 스타일이지만 옷감은 화려한 모양의 아프리카 포다. 빅토리아 시대의 대영제국은 세계 제패를 부르짖으며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해 거대한 부를 쌓아올렸고, 그 부를 토대로 영국 상류층 시민들의 단체여행이 보급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쇼니바레는 그것을 그 자신 특유의 우아한 방식으로 관객들이 알아채도록 만든 것이다.

1998년 10월, 쇼니바레의 작품 <다이어리 오브 빅토리안 댄디>(Diary of a Victorian Dandy) 시리즈가 런던 지하철역 100군데에 전시됐다.

빅토리아조식 저택의 서재에서 19세기에 전형적이었던 높다란 책장과 견고하게 짠 참나무 탁자, 인도산 카펫 등도 보인다. 중앙에는 백인 남성 그룹에 둘러싸인 채 책을 손에 든 젊은 아프리카인 멋쟁이(댄디)가 있다. 문에는 여자 하인들이 소란스런 분위기 속에 그 멋쟁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빅토리아조식 저택의 서재에서 19세기에 전형적이었던 높다란 책장과 견고하게 짠 참나무 탁자, 인도산 카펫 등도 보인다. 중앙에는 백인 남성 그룹에 둘러싸인 채 책을 손에 든 젊은 아프리카인 멋쟁이(댄디)가 있다. 문에는 여자 하인들이 소란스런 분위기 속에 그 멋쟁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그 그림에서는 빅토리아조식 저택의 서재에서 19세기에 전형적이었던 높다란 책장과 견고하게 짠 참나무 탁자, 인도산 카펫 등도 보인다. 중앙에는 백인 남성 그룹에 둘러싸인 채 책을 손에 든 젊은 아프리카인 멋쟁이(댄디)가 있다. 문에는 여자 하인들이 소란스런 분위기 속에 그 멋쟁이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사진)

이 작품에 묘사돼 있는 것은 ‘있을 수 없었던 세계’다. 19세기의 영국에서 댄디라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아프리카인 남성이 차지한다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매일 이 표상을 마주했던 주류 영국인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어떤 이는 불쾌하게 여기고 또 어떤 이는 공감했겠지만, 적어도 자국이 자행한 식민지지배의 사실, 그 상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죄책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설사 기분이 나쁠지라도 마음속 깊이 파헤치고 들어가 탈식민지화 작업을 벌여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질문 던지기가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파시즘 국가들 중에서 전쟁 전과 다름없는 군주의 가계를 계속 받들어 모시고, 같은 국가와 국기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영국과 같은 전승국조차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전후 옛 식민지 민족들과의 ‘다문화 공생’을 표방해 왔다. 바로 그 덕에 쇼니바레와 같은 아티스트가 활동할 공간이 생겼다. 그것을 생각하면, 일본은 매우 특수한 나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 전반까지 인류 사회가 심대한 희생을 대가로 손에 넣은 평화, 인권, 평등, 반차별 등의 지적·사상적 달성에 대해 완고하게 등을 돌리고 국민 다수도 그 협량한 자기애(自己愛)에 안주하고 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잉카 쇼니바레의 작품이 일본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기껏해야 ‘포스트 콜로니얼 아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지적으로 소비될 뿐 그것을 일본 자신의 입장으로 바꿔놓고 성찰하는 이는 별로 없을 게 분명하다. 지금 ‘잉카 쇼니바레 MBE: 찬란한 정원으로’ 전시회가 대구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10월18일까지) 한국의 관객들은 그의 작품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