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이 일본의 안보법안 통과에 대해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어조를 보이는 것과는 달리, 독일 언론은 “일본, 평화와 결별하다”(슈피겔), “평화주의로부터의 일탈인가”(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일본 의회 군부의 역할 강화하다”(디 차이트) 등의 제목에서 보듯이 대체로 우려하는 분위기다.
독일 언론의 이런 기조는 같은 과거를 가졌으나 다른 길을 걸어온 독일과 일본의 현대사에 기인한다. 독일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었지만, 종전 후 독일이 철저한 과거청산을 통해 나치즘의 과거를 극복한 반면, 일본은 과거와의 진지한 대면을 회피함으로써 군국주의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안보법안 통과는 군국주의 망령의 부활을 알리는 전조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일본과 달리 독일의 경우는 성공적인 과거청산이 국가 발전의 토대이자 원동력이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7년간의 독일 유학 기간 동안 독일의 철저한 과거청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내겐 그들의 과거청산이 ‘과잉청산’으로 보였고, 그들의 역사관이 ‘자학사관’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독일의 수천년 역사에서 히틀러의 집권 기간은 12년에 불과하지만, 독일의 학교에서는 이 기간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교육목표 또한 ‘제3제국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 놓여 있다. 반권위주의 교육, 저항권 교육, 선동가 판별 교육 등 일련의 ‘정치 교육’을 중시하는 것도 나치 청산의 일환이다. “독일인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나치 과거와 대결한다는 것”(클레멘스 알브레히트)이라는 말이 학교에서 실천되고 있다. 독일 학교는 마치 나치 과거와 싸우는 전쟁터와 같다.
나치의 최대 피해자인 유대인에 대한 태도에서도 독일 과거청산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베를린 훔볼트대학 앞 광장 한가운데에는 “책을 불태운 자는 언젠가 인간을 불태울 것”이라는 ‘유대인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경고가 새겨져 있고, 훔볼트대학 본관엔 ‘유대인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가 한복판에 붙어 있다. 독일 문화의 상징인 괴테의 동상은 시민공원 한 모퉁이에 서 있는 반면, 베를린의 중심 브란덴부르크 문 가장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는 건 대규모의 유대인 추모공원이다. 베를린은 상징물의 공간적 구조를 보면 ‘유대인의 도시’를 방불케 하며, 도시 전체가 나치 과거에 대한 ‘거대한 반성문’이다.
일본은 독일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지금까지도 식민지배의 과거에 대해 진정한 반성도 사과도 없으며, 역사를 왜곡하고, 전범을 추모하는 상식 이하의 행태를 멈추지 않고 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일본의 현재와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매일매일 돌아오고 있다. 영화 <암살>의 놀라운 흥행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과거가 여전히 청산되지 않았음을 확인해준다.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 아베 신조 총리의 과거가 ‘안보법안’으로 돌아오듯이, 선대가 친일 전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의 과거는 ‘역사교육의 축소와 왜곡’으로 돌아오고 있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 독문학
김누리 중앙대 교수, 독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