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다시 법원을 생각한다/ 한승헌/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9. 11. 11:02

사설.칼럼왜냐면

[왜냐면] ‘법원의 날’에 다시 법원을 생각한다 / 한승헌

등록 :2015-09-10 18:59수정 :2015-09-10 22:19

 

법관은 법률지식이나 권위주의로 굳어진 화석이 아니라 정의와 공평의 화신이어야 한다. 권력의 하향적 지배보다 권력에 대한 상향적 견제가 민주적 법치주의의 본질이라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대법원은 9월13일을 ‘대한민국 법원의 날’로 정하고, 갖가지 행사를 한다고 발표하였다. 9월13일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미군정으로부터 사법권을 이양받아 가인 김병로 선생이 초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바로 그날이다. 국민 입장에서는, 이 새로운 기념일이 이 나라의 법원(또는 법관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사법의 소임 수행을 다짐하며,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해방 직후 ‘민족정기’가 온 겨레의 키워드였을 때, 법조계의 인물난 속에서 사법부의 정체성을 상징하기에 족한 가인 김병로 선생이 대법원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가인은 이승만 대통령의 안하무인 격인 사법부 폄하에 대하여 강하게 정면대응함으로써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낸 인물이었다.

이 대통령은 법원의 재판에 대한 불만을 수시로 공공연하게 입에 올렸다. 심지어 정기국회(1956년 2월)에 보낸 대통령 치사(致辭)에서 “요즘 사법부의 형편이 말이 아니니, 법관의 권한에 한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일도 있었다. 가인은 이에 대하여 ‘재판은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아니다. 판결에 불만이 있으면 불복 절차를 밟으면 된다’고 일축하였다. 가인의 뒤를 이은 후임 대법원장들은 집권자 내지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가인처럼 확고하고 분명한 선을 긋지는 못했다.

정부 수립 이후 역대 정권을 거치면서 우리 사법부는 바로 그 집권세력에 시달리며 진통을 겪어왔다. 그런 풍파 속에서 일부 법원 수뇌부와 일선 법관들이 자의든 타의든 집권자의 의도에 추종하거나 영합하는 언동이나 재판을 함으로써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치부였다.

그런 아픔과 수모는 다름 아닌 사법부의 전·현직 수장이나 법관들의 개탄에서도 확인되었다. 이른바 유신통치 시대를 혹독하게 겪은 이영섭 대법원장은 퇴임에 즈음하여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졌다. 소신대로 못 한 것이 많다. 당시 법원의 위상이 말이 아니었다. 각본대로 따라달라는 주문도 받았다”고 고백한 바도 있다.

유지담 대법관은 퇴임 뒤에 이렇게 말했다. “권력에 맞서 사법의 독립을 외쳤어야 할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는 침묵하면서, 정작 사법부에 대한 경청할 만한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때 이를 외면한 채 사법권 독립이라든지 재판의 권위라는 등의 명분으로 사법부의 집단이익을 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6공(노태우 정권) 출범 당시 소장 판사 85명은 대법원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성명에서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자신의 기본권을 보장하여줄 것을 위임한 사법부에 기대어 기본권을 보장받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부분을 국민들 자신의 희생과 노력으로 스스로 쟁취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국민들이 사법부를 불신하고 심지어는 매도하기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사법권의 독립은 사법부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고인들의 투쟁의 성과로 얻어졌다는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권위주의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법원이 올곧은 자세를 온전히 지키지 못해 헌법의 기본적 가치나 절차적 정의에 맞지 않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하였다.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고 새로 출발하려면, 먼저 과거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법부의 굴절된 일반적 모습과는 달리 권력의 간섭과 자신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올바른 재판을 견지하여 사법의 명맥을 지켜낸 법관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여러 정치적 사건의 재판에서 용기와 소신을 다한 법관들이 섬광처럼 빛났는가 하면, 1971년 이후 세 번에 걸친 사법파동에 분연히 나섰던 많은 법관들도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자 용기를 발휘하여 고백하고 항의하며 다짐을 했다.

법원은 국가 삼부 중에서 유일하게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그러하기에 국민주권의 원리가 사법부에도 확대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머리를 드는데, 더러는 여론 내지 세론을 사법권의 독립을 저해하는 잡음쯤으로 배격한 고위 법관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법부 독립의 참뜻을 오해한 독선에 다름 아니다.

사법부는 국민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임으로써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예컨대 이런 목소리다. 재판에서 중시하는 ‘법적 안정성’이 보수화 또는 수구화와 등식 관계로 흘러서는 안 되며, 그런 관점에서도 대법원 구성의 다변화를 주장하는 여론은 존중되어야 한다. 대법원을 비롯한 합의제 재판에서 ‘소수의견’이 없다는 것은 재판을 통하여 구현되어야 할 소수자 보호의 목소리가 사라진다는 징후인데, 이 또한 최고법원 구성의 단색화에서 오는 위험한 현상이다.

법관은 법률지식이나 권위주의로 굳어진 화석(化石)이 아니라 정의와 공평의 화신(化身)이어야 한다. 사회의 변동 발전과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보편적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권력의 하향적 지배보다 권력에 대한 상향적 견제가 민주적 법치주의의 본질이라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그리고 법원의 재판이 사법부 밖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내지 시류에 영합해서는 안 되며, 정권의 성향에 근접해 가는 듯한 변화 추세는 더구나 배제되어야 한다.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국가 삼부의 공직자 가운데 그래도 사명감이 높고 직무에 공정을 기하려는 노력이 가장 돋보이는 곳이 바로 사법부라고 믿는다. 그런데 나의 이런 ‘비교우위론’이 며칠 전에 한 현직 법관의 신문 칼럼을 읽고 흔들렸다. 그 필자는 ‘(법원이) 상대적으로 깨끗하다는 변명의 안이함’을 자책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기관과 비교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도 했다. 그분의 ‘(사법)절대평가론’이 이 나라 모든 법관의 생각으로 번져나가기를 바란다. 그래야 ‘법원의 날’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한승헌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