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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지지로 김영삼 총재가 뽑히자 나까지 연금당했죠”/ 이희호 평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1. 23. 22:01

정치정치일반

“남편의 지지로 김영삼 총재가 뽑히자 나까지 연금당했죠”

등록 :2015-11-22 19:42수정 :2015-11-23 11:02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13회 동교동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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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5년형을 받고 수감됐던 김대중은 2년10개월 만인 78년 12월27일 석방됐다. 박정희의 9대 대통령 취임 기념 ‘특사 1호’였다. 12월27일 새벽 2시 서울대병원에서 풀려난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정장으로 갈아입고 이희호와 나란히 앉아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5년형을 받고 수감됐던 김대중은 2년10개월 만인 78년 12월27일 석방됐다. 박정희의 9대 대통령 취임 기념 ‘특사 1호’였다. 12월27일 새벽 2시 서울대병원에서 풀려난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정장으로 갈아입고 이희호와 나란히 앉아 내외신 기자들과 회견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의 서울대병원 병실 감금이 계속되자 이희호는 1978년 9월1일 법무부 장관과 서울구치소 소장에게 이감신청서를 보냈다. “동일 사건의 다른 분들은 다 석방시키면서 법의 형평 원칙을 깨고 수형자를 8개월 이상이나 밀폐 상태인 병실에 수감하여 운동도, 집필도, 서신의 수발도 금함으로써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이중삼중으로 가함은 너무 심한 형벌이 아닐까요.” 병실 감금을 견딜 수 없으니 다시 감옥으로 보내 달라는, 호소문 아닌 호소문이었다. 신병 치료가 정부가 내놓은 이감의 이유였는데 김대중은 병실에서 치료다운 치료도 받지 못했다. 검진하러 오는 의사는 체온만 재고 건성으로 몸을 둘러보고는 돌아갔다.

감옥보다 더한 서울대병원 감금에
1978년 9월 이감신청 했으나 ‘묵살’
김대중은 교도소로 옮겨달라 ‘단식’
‘3·1 사건’ 피고인들 성명내자 또 구속

이희호의 호소에 정권은 더 심한 감금으로 응답했다. 9월5일 서울대병원이 신축 공사에 들어가자 정권은 낡은 방을 감옥처럼 개조한 병실로 김대중을 옮겼다. 병실로 가는 입구에 이중으로 경찰 감시구역을 설치하고 병실 부근 100미터 떨어진 곳까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 김대중은 교도소로 보내 달라는 이감신청서를 다시 보내고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그때 3·1 사건으로 출감한 분들이 가족들과 함께 우리 집으로 와서 예배를 보고 같이 단식투쟁을 했어요. 그리고 병원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지요.” 3·1 사건 피고인들은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는 성명도 발표했다. 이 일로 3·1 사건 구속자 윤반웅과 문익환이 또 잡혀 들어갔다. 단식 7일째에 김대중은 장출혈로 상태가 급속히 나빠지자 단식을 중단했다.

1978년 12월 박정희 9대 대통령 취임
김대중 ‘특사’로 2년10개월만에 석방
새벽 2시 동교동 오자마자 기자회견
이틀뒤 금요기도회 참석 ‘유신 비판’

1979년 5월30일 신민당 총재를 뽑는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당권파인 이철승의 ‘중도통합론’을 비판하고 ‘반유신 선명 노선’을 내건 비주류 김영삼을 적극 지원해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진은 전당대회 전날인 5월29일 열린 대의원 단합대회에 참석한 김대중(앞줄 왼쪽부터)과 총재 경선에 나선 김영삼·조윤형 후보가 함께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79년 5월30일 신민당 총재를 뽑는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당권파인 이철승의 ‘중도통합론’을 비판하고 ‘반유신 선명 노선’을 내건 비주류 김영삼을 적극 지원해 당선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진은 전당대회 전날인 5월29일 열린 대의원 단합대회에 참석한 김대중(앞줄 왼쪽부터)과 총재 경선에 나선 김영삼·조윤형 후보가 함께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78년 7월6일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임기 6년의 대통령으로 다시 뽑혔다. 대의원 2578명이 참석해 단독으로 입후보한 박정희에게 2577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지지율 99.9%였다. 그해 12월27일 박정희는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정부는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정하고 통행금지까지 하루 풀었으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하고 1300여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했다. 취임식은 국내용이었다. 외국 축하사절은 에이(A)급 전범이었던 전 일본 총리 기시 노부스케가 이끄는 일본인 12명뿐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다운 취임식이었다.

박정희의 취임식이 열리던 날 새벽 1시30분 김대중은 서울대병원에서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독재자가 쓴 ‘선심’이었다. 김대중은 “도둑이 아닌 다음에야 밤중에 나갈 수 없다”고 버텼으나 교도관들이 막무가내로 밀어냈다. 김대중은 1976년 3월8일 연행된 지 2년10개월 만에 동교동 집으로 돌아와 출감 성명을 발표했다. “내가 지금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김지하 시인, 리영희 교수, 윤반웅·문익환·박형규·고영근·조화순·강희남 목사들과 성직자·교수·언론인·학생·근로자·민주인사 등 모든 정치범들과 같이 나오지 못한 사실입니다. 나는 정부의 이와 같은 협량하고 반민주적인 태도에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1979년 5월30일 신민당 전당대회
가택연금 뚫고 “김영삼을 총재로”
중정, 곧바로 ‘동교동 출입 통제’
“남편은 그날부터 반년 넘게 갇혔다”

1978년 9월 김대중은 서울대병원 감금에 항의해 교도소 이감을 신청하고 단식 투쟁까지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때맞춰 이우정(앞줄 왼쪽부터)·문익환·공덕귀·김한림 등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원들은 서울대병원 본관 앞에서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때문에 문익환·윤반웅 목사 등은 또다시 구속됐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78년 9월 김대중은 서울대병원 감금에 항의해 교도소 이감을 신청하고 단식 투쟁까지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때맞춰 이우정(앞줄 왼쪽부터)·문익환·공덕귀·김한림 등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원들은 서울대병원 본관 앞에서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때문에 문익환·윤반웅 목사 등은 또다시 구속됐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은 집에 모여든 <뉴욕 타임스><아사히신문>을 비롯한 내외신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기자회견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김대중씨는 일본의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아사히신문><마이니치신문>특파원들의 질문에는 일본어로, 미국의 <에이비시(ABC) 방송><뉴욕 타임스>기자들의 질문에는 영어로 유창하게 답변했다.” 이희호도 남편의 기자회견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남편을 보니 영어로 문답하는데 발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었어요. 영어 문법책·회화책을 감옥에 넣어주었는데, 거기서 공부한 게 효과가 있었던가 봐요.” 동교동의 수난은 계속됐다. 김대중은 출감 즉시 가택연금을 당했고 경찰이 집 주위를 에워싸고 24시간 감시했다. 감옥에서 또 다른 감옥으로 옮겨간 꼴이었다.

김대중의 출감 이틀 뒤인 12월29일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매주 열리는 금요기도회가 ‘김대중 석방 환영 기도회’로 바뀌었다. “나는 남편의 출감 성명서 50여부를 복사해서 가지고 갔어요. 한화갑 비서한테 그 성명서를 앞자리에서부터 조용히 배부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다음날 한화갑 비서가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됐어요. 그 성명서는 신문에 다 보도된 것이었는데, 그걸 핑계로 삼아 또다시 구속했어요. 권노갑 비서도 연행됐다 풀려났고요.” 동대문경찰서에서는 이희호에게도 출두하라는 요청을 했다. “내가 동대문경찰서로 갈 이유가 없으니 조사할 게 있으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조사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기독교회관에 있는 기독교학생연합회 사무실로 와서 피의자 조사를 했어요.”

김대중은 작은 일만 있어도 가택연금으로 발이 묶였고 검찰청 출두 명령도 그치지 않았다. 1979년 한 해 동안 220일이 넘는 기간을 연금당해 집 안에 있어야 했다. 언론에서는 중앙정보부의 통제지침으로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했다.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원외 인사’, ‘당외 인사’, ‘동교동’이 김대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979년 2월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동대문성당에서 ‘버림받은 형제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일시 연금에서 풀린 김대중은 이날 기도회에 참석해 “민중과 더불어 민권의 시대를 개척하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2월10일 검찰이 김대중을 소환해 “긴급조치 9호를 계속 위반하면 교도소에 다시 집어넣겠다”고 협박했다. “긴급조치 조항이 있는 유신헌법 제53조는 이 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잠정적 조치라고 했는데, 한두 달이면 모르지만 어떻게 4년을 잠정이라고 할 수 있소? 긴급조치 9호는 그 시효 때문에라도 무효가 된 거요. 지금 당신들이 이 죽은 법을 가지고 산 사람을 잡고 있는데, 법을 지키려면 같이 지켜야지 당신들은 나를 42일 동안 불법으로 연금하고 있잖소?” 김대중은 그 뒤로도 두 차례나 더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사복경찰 50~100명이 동교동 집 주위를 둘러싸고 감시했다.

김대중은 석방 이틀 뒤인 1978년 12월29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구속자가족협의회의 금요기도회에 참석해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비판하며 ‘반공법·국가보안법 구속자 석방’을 촉구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은 석방 이틀 뒤인 1978년 12월29일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구속자가족협의회의 금요기도회에 참석해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비판하며 ‘반공법·국가보안법 구속자 석방’을 촉구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집 안에 갇힌 채로 김대중은 유신정권의 방해공작을 뚫고 활동을 계속했다. 1979년 3월1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결성됐다. 3년 전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한 사람들이 중심이었다. 윤보선·함석헌·김대중이 공동의장을 맡고, 문익환이 중앙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김대중과 함석헌이 가택연금으로 참여하지 못하자 윤보선이 혼자서 안국동 자택에서 ‘3·1 운동 60돌에 즈음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국민연합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평화적으로 재건하고 민족통일의 역사적 대업을 민주적으로 이루기 위한 자발적이고 초당적인 전체 국민의 조직’을 표방했다. 국민연합 산하에 한국인권운동협의회·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해직교수협의회·자유실천문인협의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인권위원회·민주청년협의회를 비롯해 13개 단체가 들어왔다.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이 하나로 뭉친 조직이었다. 김대중은 또다시 검찰에 불려갔다.

유신정권은 어디든 틈만 나면 마수를 들이밀었다. 4월16일 중앙정보부는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을 발표했다.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크리스찬아카데미 안에 불법 용공 비밀서클을 결성했다’는 것이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내용이었다. 크리스찬아카데미는 ‘화해신학’을 앞세운 온건한 성격의 운동단체였는데도 정권은 몽둥이를 난타했다. 중앙정보부는 이우재·한명숙·장상환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잡아다 놓고 25일 동안 극악한 고문을 했다. 한명숙은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맞아 걸을 수조차 없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 강원용도 중앙정보부에 잡혀가 6일 동안 혹독한 신문을 받았다. 고문은 정권의 일상이 되었다.

유신정권의 말기적 악행이 계속되던 1979년 5월30일 신민당 총재를 새로 뽑는 전당대회가 열렸다. 앞서 1978년 12월12일 열린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대약진을 했다. 지역구 77곳에서 2명씩 뽑는 중선거구제 아래서 공화당이 68명, 신민당이 61명을 당선시켰다. 민주통일당은 3석, 무소속이 22석을 차지했다. 득표율에서는 야당이 오히려 앞섰다. 공화당은 31.7%를 얻고 신민당은 32.8%를 얻었다. 통반장을 총동원하고 관권과 금권이 휩쓴 선거였는데도 공화당은 신민당에 밀렸다. 국민은 신민당의 지리멸렬과 자중지란을 미워하는 마음을 누르고 유신독재의 철권통치에 대한 거부의 뜻을 표로 보였다. 박정희는 선거 책임을 지워 비서실장 김정렴을 내보내고 김계원을 후임으로 불러들였다.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 대신 김정렴이 책임을 진 것이었다.

민심이 박정희 유신체제를 거부한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 선거결과를 보고도 이철승의 신민당 체제는 중도통합 노선을 고수하며 유신정권과 보조를 맞췄다. 이철승 지도부를 갈아치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5·30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대중은 바쁘게 움직였다. “남편은 이철승 대표를 꺾고 유신 독재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김영삼 의원밖에 없다고 보았지요. 그때 우리 집이 너무 낡아 수리를 하고 있었어요. 집 안이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웠는데, 남편은 신민당 총재 선거에 나선 후보들을 집으로 불러들였어요. 이철승 대표만 빼고 다들 왔지요.”

김대중은 박영록·조윤형·김재광에게 후보를 사퇴하고 김영삼 총재 당선에 나서라고 설득했다. 조윤형은 김영삼을 당선시키면 큰 화근이 될 것이라며 절대로 지지해서는 안 된다고 버텼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자신의 관계는 사적인 것이고 유신 종결은 국가와 민주주의의 존망에 관련된 문제이니 이해해 달라고 끈질기게 이야기했다. 조윤형이 계속 뜻을 굽히지 않자 마지막에 김대중은 “자네, 내 말을 안 들을 거면 형·동생 사이 의를 끊세”라는 말까지 했다. 조윤형은 눈물을 머금고 후보를 사퇴했다. 김영삼의 측근 김덕룡·박권흠도 동교동 집에 살다시피 했다. 김대중의 지지를 얻지 않고는 총재 경선에 승리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감돌았다.

“남편은 전당대회가 열리기 전날 저녁에 을지로 4가에 있는 중국음식점 아서원으로 갔어요. 거기서 전당대회를 앞두고 신민당 대의원 단합대회가 열렸어요. 어쩐 일인지 그날 연금을 당하지 않아 참석할 수 있었지요.” 아서원에 모인 수백명의 대의원들은 예상치 못한 김대중의 출현에 놀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지난 1971년 선거 이후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동안 우리는 유신체제 밑에서 대한민국 건국 이래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암흑 독재의 고초와 경제적·사회적 피해와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우리 국민들의 민주회복에 대한 열망이요, 고문받고 설움받고 천대받은 신민당 동지 여러분들의 집권을 향한 꿈이요, 나와 여러분의 신뢰입니다.”

김대중은 김영삼이 총재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했다. “왜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 동지가 총재가 되는 것을 한사코 방해하며 싫어합니까? 그것은 김영삼 동지가 총재가 되면 민주회복이 촉진되고 유신체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은 김영삼의 총재 시절 행보에 대한 말들이 있지만 적어도 10대 국회 이후 김영삼의 활동은 나무랄 것이 없으니 유신에 맞선 투쟁에 함께하자고 호소했다. “반독재의 선두에서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이철승의 당권파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고 있는 김영삼 동지가 이번 경선에서 당선되는 것이 신민당을 살리는 길이고 국민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에 나는 김영삼 동지를 지지합니다.”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된 웅변으로 아서원의 단합대회장은 쇳물이 끓어 넘치는 듯한 용광로로 바뀌었다.

김대중은 이철승의 중도통합론도 비판했다. “택시 합승을 하더라도 방향이 같아야 합니다. 신촌으로 가는 사람과 동대문으로 가는 사람은 합승이 불가능합니다. 독재는 북쪽이고 반독재 투쟁은 남쪽인데,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끼리 어떻게 중도통합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원칙이 다를 때, 방향이 다를 때 중도통합은 없습니다. 선과 악 사이에 중도통합은 없습니다. 사람을 놓고 하나는 살리자 하고 하나는 죽이자 하는데 어떻게 반만 죽이자는 중도통합이 있을 수 있습니까?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에는 중도통합이 없습니다.”

김대중은 내일 전당대회가 김영삼과 이철승의 개인 사이 싸움이 아니라 친유신파와 반유신파, 친민주파와 반민주파의 싸움이며 신민당이 야당으로서 소생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짓는 날이라고 호소했다. “남편은 이철승 대표를 비판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어요. 1971년 대통령 후보 2차 투표 때 이철승계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고, 남편이 진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는 우리 집에 도움도 주고 감옥에 전기스토브를 넣어주기도 했거든요. 그런 친분이 있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이튿날 신민당 전당대회가 마포 새 당사에서 열렸다. 1차 투표 결과는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였다. 누구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다. 표가 나뉘면 이철승이 유리했다. 김대중은 이기택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용단하라고 호소하는 쪽지를 보냈다. 김대중의 쪽지를 읽은 이기택은 김영삼 지지 선언을 하고 후보를 사퇴했다. 속개된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은 378표를 얻어 367표를 얻은 이철승을 11표차로 따돌리고 총재로 선출됐다. 김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룬 힘겨운 승리였다. “신민당 총재 경선 결과가 나오자 우리는 즉각 보복을 받았어요. 중앙정보부가 다음날부터 비서들의 동교동 출입을 금지했고, 나는 한동안 목요기도회 참석도 못했어요. 남편도 이날부터 연금당해 연말까지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집 밖에 나가지 못했지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