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사회불안을 방치 또는 유도하면서 함정을 파는 신군부/ 이희호 평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2. 14. 21:42

정치정치일반

“80년 5월15일 ‘성명’ 초안대로 나갔으면 남편은 아마도…”

등록 :2015-12-13 20:19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1회 서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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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새해를 맞아 마침 1월6일 56회 생일을 맞은 김대중은 민주인사들과 축하파티를 하며 ‘민주화의 희망’을 나눴다. 왼쪽부터 김종완·한완상·문동환·김대중·이희호·한승헌·김용복·예춘호·이해동.
1980년 새해를 맞아 마침 1월6일 56회 생일을 맞은 김대중은 민주인사들과 축하파티를 하며 ‘민주화의 희망’을 나눴다. 왼쪽부터 김종완·한완상·문동환·김대중·이희호·한승헌·김용복·예춘호·이해동.
1980년 새해가 왔다. 정국은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오리무중의 연속이었다. 최규하는 1월18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직접 개헌안을 발의해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했지만 그 뒤로도 말이 엇갈렸다. 대통령의 속내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안개 정국’이었다. “그때 남편은 복권이 안 된 처지여서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국민연합(‘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재야인사들을 주로 만났지요.”

1월 말쯤 보안사령관 전두환 쪽에서 김대중을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남편은 이용희 의원과 함께 보안사 안가로 쓰던 안국동 뒤쪽 내자호텔로 갔어요.” 김대중을 기다린 사람은 전두환이 아니라 대령 계급장을 단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이었다. 이학봉은 김대중에게 위압적인 태도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국외로 나가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중하며 정부에 협조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면 복권을 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내 공민권을 제한하는 것 자체가 부당한 일인데 왜 각서를 써야 하는가? 그런 일이라면 복권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김대중은 그 자리에서 종이를 물리쳤다.

1980년 1월말께 전두환쪽 만나자 ‘요청’
보안사 이학봉·권정달 ‘협조 각서’ 요구


김대중 “공민권 제한 자체가 부당” 거부
“남편은 군인들 나대는 걸 걱정했어요”

2월29일 사면…‘재야 유력인사’ 벗어나
“나도 덩달아 언론 조명” 서울의 봄 실감

4월중순 전두환 ‘중정부장서리’ 실세로
김대중 “군에 빌미 주면 안된다” 경계
5월12일 미대사 “학생들 자제시켜달라”
사흘뒤 민주인사들 성명서에 ‘깜짝’

마침내 2월29일 ‘재야 민주인사 687명 사면·복권 조처’에 따라 족쇄가 풀린 김대중은 3월26일 서울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수많은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중 강연을 했다.1972년 총선 유세 이래 8년 만이자 ‘서울의 봄’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마침내 2월29일 ‘재야 민주인사 687명 사면·복권 조처’에 따라 족쇄가 풀린 김대중은 3월26일 서울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수많은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대중 강연을 했다.1972년 총선 유세 이래 8년 만이자 ‘서울의 봄’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남편이 돌아와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복권 조처는 대통령이 내려야 하는 것인데 군인들이 나대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했어요. 군인들의 경거망동을 막으려면 계엄령을 해제해야 한다고 했지요.” 김대중은 신민당에 국회를 열어 계엄령 해제를 촉구할 것을 주문했다. 신민당은 김대중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자신에게 정치적 기회가 오리라고 확신하고 신민당 시도지부와 지구당 조직 재정비에 힘을 쏟았다. 1월31일 서울시지부 결성대회에서 김영삼은 “신민당이 집권하는 것이 역사의 순리”라고 주장했다. 신민당 총재인 자신이 집권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김영삼이 제약 없이 활동하는 데 반해 김대중을 옥죄는 사슬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문은 남편 이름을 쓰지 못했어요. 남편이 불구자가 됐다느니 정신 이상이라느니 하는 소문까지 퍼졌어요. 방송에 얼굴 한번만 비쳐도 그런 말이 사라졌을 텐데 방송도 침묵했지요.” 2월25일 <동아일보> 회장 김상만이 서울 계동의 인촌기념관에서 만찬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김대중, 신민당 총재 김영삼, 10·26 뒤 공화당 총재가 된 김종필이 초청받았다.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을 포함한 외교사절들도 대거 참석했다. 계엄령 아래 정국이 다소 유화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만찬이었다.

만찬장 면면을 상세히 보도한 <동아일보>는 김영삼·김종필 이름은 자유롭게 쓰면서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직접 말하지 못하고 ‘재야유력인사’ 따위로 표현했다. 2월26일치 <동아일보> 기사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김종필 총재가 한 참석자에게 ‘몸이 상당히 불은 것 같은데 이제는 운동을 하셔야죠?’라고 하자 옆에 있던 이태영 박사가 ‘복권이 되어야 운동을 하죠’라고 거들어 한 차례 폭소가 터졌다.” 여기서 ‘한 참석자’는 김대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1980년 2월25일 김대중은 동아일보사 주최 행사에 참석해 ‘대선 후보 3김 첫 회동’으로 주목받았으나 계엄사령부의 통제로 ‘재야 유력인사’ ‘한 참석자’ 등 익명으로만 보도됐다. 김대중(왼쪽부터)·김상만·김영삼·김종필이 함께한 이때 사진도 94년 4월1일치 '동아일보'에 공개됐다.
1980년 2월25일 김대중은 동아일보사 주최 행사에 참석해 ‘대선 후보 3김 첫 회동’으로 주목받았으나 계엄사령부의 통제로 ‘재야 유력인사’ ‘한 참석자’ 등 익명으로만 보도됐다. 김대중(왼쪽부터)·김상만·김영삼·김종필이 함께한 이때 사진도 94년 4월1일치 '동아일보'에 공개됐다.
2월29일 ‘서울의 봄’을 알리는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정부는 이날 민주인사 687명의 사면·복권을 발표했다. 정치인 김대중·윤보선·정일형, 종교인 함석헌·지학순·문익환·문동환·함세웅, 대학교수 백낙청·리영희·김동길이 사면·복권 대상자에 포함됐다. 유신이 선포된 뒤로 7년 5개월 만에 김대중은 국민 앞에 설 자유를 얻었다. 김대중은 이날 성명을 발표해 명분 없는 비상계엄이 계속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대통령 최규하와 만나 국정 전반을 놓고 솔직한 의견교환을 하고 싶다는 뜻을 다시 밝혔다. 최규하는 묵묵부답이었다.

김대중이 정부의 사면·복권 조처로 망명·납치·투옥·연금의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강연 요청이 밀려들고 인터뷰 요청도 빗발쳤다. “나도 덩달아 언론들과 인터뷰하고 조명을 받았지요. 우리 집을 에워쌌던 경찰이 철수하고 문이 열리니까 방문객들이 하루에 수백 명씩 찾아왔어요.” 3월26일 김대중은 서울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민족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강연은 8년 만에 처음이었다. 청중의 열기가 뜨거웠다. 서울에 봄이 온 것이 확실해 보였다. 민주화 훈풍이 이는 듯했다.

4월3일 김대중은 복권 뒤 처음으로 김영삼을 만났다.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의 신민당 입당 문제가 대화의 주요 의제였다. “그때 김영삼 총재는 신민당을 중심에 두고 있었고, 남편은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으로서 신민당과 재야의 대등한 관계를 마음에 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김영삼 총재 쪽에서 재야인사들을 영입하기 전에 심사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어요. 남편은 거기에 반대했어요. 독재정치에 맞서 민주화 투쟁을 벌이다가 감옥에 간 사람들을 뒷짐 지고 있던 사람들이 심사하겠다는 것이냐고요.”

1980년 3월 말 계엄사령관 전두환(오른쪽)은 스스로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통고하고 4월14일 ‘중정부장 서리’에 취임해 사실상 실권을 장악했다. 사진은 3월1일 청와대에서 최규하 대통령(왼쪽)에게 중장 진급 신고를 하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3월 말 계엄사령관 전두환(오른쪽)은 스스로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통고하고 4월14일 ‘중정부장 서리’에 취임해 사실상 실권을 장악했다. 사진은 3월1일 청와대에서 최규하 대통령(왼쪽)에게 중장 진급 신고를 하는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은 4월7일 김영삼이 재야인사들을 받아들일 뜻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문영·박형규·서남동·문익환·이우정·계훈제·고은·김윤식·김종완·김승훈·함세웅·예춘호가 곧바로 모여 김대중의 입당 포기 선언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당시 재야인사들 대다수는 남편이 신민당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두 세력의 협상 결렬로 봄 하늘에 구름 한 자락이 깔렸다.

신군부는 ‘서울의 봄’의 장막 뒤에서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보안사는 3월 초부터 언론대책반을 만들어 가동하고 있었다. 언론을 장악해야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 신군부의 계산이었다. 신군부는 영향력 있는 언론인들을 포섭하고 강도 높은 검열로 언론의 논조를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정치권의 지도자인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을 싸잡아 낡은 정치인으로 몰고 신군부를 안정구축세력으로 포장하는 여론조작을 계속했다.

4월 중순 막후에 있던 전두환이 장막을 걷고 얼굴을 내밀었다. 3월1일 중장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3월 말 국무총리 신현확을 찾아가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해야겠다고 통고했다. 전두환은 4월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했다. 현역 군인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할 수 없다는 중앙정보부법을 피해 가려고 서리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대통령 최규하는 무기력하게 전두환에게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허락했다.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예산 800억원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됐고,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격으로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대통령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가 됐다.

김영삼 진영은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보아 넘겼다. 4월15일 김영삼은 “민주화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며 전두환의 정보부장 서리 취임이 혼란을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대중은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남편은 전두환 장군이 중앙정보부장까지 차지한 것을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강연할 때마다 민주주의 앞날이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 군부의 움직임에 경각심을 심어주자는 것이었어요.”

1980년 5월12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왼쪽)는 동교동을 직접 방문해 김대중(오른쪽)에게 대학생들의 거리시위 움직임을 자제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김대중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군부 쿠데타 빌미를 주면 안 된다’고 호소했으나 신군부의 언론통제로 보도되지 않았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0년 5월12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왼쪽)는 동교동을 직접 방문해 김대중(오른쪽)에게 대학생들의 거리시위 움직임을 자제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김대중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군부 쿠데타 빌미를 주면 안 된다’고 호소했으나 신군부의 언론통제로 보도되지 않았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은 4월16일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열린 시국강연에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은 국민의 판단이나 기대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며, 국민들 사이에 상당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유신세력은 10·26 사태로 독재의 장벽에 조그맣게 열린 돌파구를 다시 막으려고 온갖 계략을 꾸미고 있다. 유신세력들의 흉계를 국민의 힘으로 단호히 분쇄해야 한다.” 김대중은 4월18일 동국대 강당에서 열린 강연에서도 군부의 엄정중립을 요구했다. “군은 반드시 중립을 지켜야 한다.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계엄령을 더 연장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서 김대중은 군부에 빌미를 주는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우리가 성급하게 혼란을 일으키는 일에 말려들어 가면, 그런 일을 노리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절호의 구실을 주게 된다.” 김대중의 강연장은 밀려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청중은 오랜만에 등장한 김대중에게 뜨거운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한국신학대학 강연과 동국대 강연에 나도 함께 갔지요. 사람들의 열기가 대단했고 남편의 주장에 다들 호응했어요.”

시국이 살얼음판 같았다. 3월에 총학생회를 다시 꾸린 대학생들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5월2일 서울대에서는 개교 이래 최대 인원인 1만여명이 모여 비상학생총회를 열었다. 서울대 학생들은 격렬한 토론을 거쳐 ‘계엄 해제’, ‘유신잔당 퇴진’을 내걸고 정치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학생들은 그날 전두환과 신현확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화형식을 치르기도 했다. 5월9일에는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전국 23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날 학생들은 신군부에 쿠데타 빌미를 주지 말자며 당분간 교내시위만 계속하기로 합의했다.

그 뒤 며칠 사이 총학생회장단 분위기가 바뀌었다. 13일이 되자 학생들이 교문을 열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온건 투쟁으로는 군부 쿠데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지도부의 바뀐 생각이었다. 이날 연세대를 비롯한 서울시내 대학 6곳의 학생 2500여명이 광화문 일대에서 밤중까지 시위를 벌였고, 이어 대학 7곳에서 밤샘농성에 들어갔다. 다시 14일에는 정오부터 서울·대구·광주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학생들이 대학 교문을 열고 나와 ‘전두환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서울의 학생 수만명이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의 거리 진출은 신군부가 바라던 것이었다. 대학 교문을 지키던 전투경찰이 사라졌다. 군부가 도심 시위를 유도하는 것이 분명했다. 상황을 심각하게 여긴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12일 오전 김대중을 만났다. “그날 글라이스틴 대사가 우리 집을 찾아왔어요.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남편이 나서서 학생들을 자제시켜 달라고 했어요. 군부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요.” 신군부는 학생들의 시위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말을 유포하고 ‘북한 남침 위협’ 소문까지 퍼뜨렸다. 김대중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어 “만약 여기서 소동이 일어나면 민주주의를 저해하려는 세력에게 절호의 기회를 주게 된다”며 학생들의 침착한 대응을 호소했다. 13일 김대중은 다시 기자회견을 열어 최규하·김대중·김영삼·김종필·전두환을 포함한 5인 회담을 제의했다. 이 제의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13일 <동아일보> 기자가 동교동을 찾아와 학생들을 설득하는 글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상황을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1면 머리기사로 싣겠다고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좋은 일이었다. 군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데 내 글을 통과시켜 줄 것 같지 않았다. 정말 실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 기자는 호기롭게 말했다. ‘질서를 지키고 시위를 그만두라는 기사가 왜 안 실리겠습니까?’ 나는 원고지 8장 분량의 원고를 써서 보냈다. 하지만 내 글은 실리지 않았다.” 계엄사는 김대중의 글을 통째로 삭제했다.

당시 언론은 신군부에 완전히 장악돼 있었다. 신문 대장이 나오면 인쇄하기에 앞서 서울시청의 계엄사 언론검열단에 들고 가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서울시청 3층 검열단 방에서 그날그날의 검열지침이 정해졌다. 검열단은 혼란을 방치하거나 조장하는 쪽으로 보도를 몰고 갔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 김재홍은 이렇게 기록했다. “1980년 5월16일, 이날 검열지침은 이렇게 정해졌다. 학생들의 행위를 미화 또는 지지하는 식의 보도 불가, 시위 학생이 청소·교통정리를 했다는 보도 불가, 학생 구호 중 ‘김일성은 오판 말라’ ‘반공정신 이상 없다’ 등은 불가.” 이런 상황이니 김대중의 학생 자제 호소문이 실릴 턱이 없었다.

15일 오후에는 김대중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날 오후 2시쯤 문익환 목사, 이문영 교수, 예춘호 의원, 이해동 목사가 우리 집을 찾아왔어요. 문익환 목사님이 시국 성명서를 작성해 우리 서명을 받으러 온 것이었어요. 그분들은 학생들의 도심 진출에 몹시 흥분해 있었어요. 윤보선 대통령은 벌써 서명을 했다고 하면서 남편에게 서명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그 내용을 보고 깜짝 놀라서, 이대로 나가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요.” 김대중이 보기에 재야인사들이 마련한 성명서 초안에는 신군부의 덫에 걸릴 수도 있는 위험한 주장이 많았다. “모든 군인들은 무기를 놓고 병영을 나와라. 모든 노동자는 공장을 떠나라. 모든 상인들은 문을 닫고 철시하라. 모든 국민들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장충단 공원으로 모여라.”

놀란 김대중은 “사회가 혼란해지면 군부가 뛰쳐나오려고 노리고 있는데, 이것은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처박는 꼴”이라고 강경하게 반대했다. 결국 성명서는 ‘계엄령 즉시 해제’, ‘전두환·신현확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다시 작성됐다. “그분들은 남편이 너무 소심하고 염려가 많다고 생각했지요. 많은 사람들이 남편이 과격하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남편은 지나칠 만큼 신중한 사람이에요. 그런 신중함이 없었다면 군사독재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뒤에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수사관한테 그런 말을 들었대요. 성명서가 원안대로 나갔다면 목숨이 몇 개여도 부족했을 거라고요. 정보를 쥐고 있던 그 사람들은 성명서가 그대로 나가기를 바랐다고 해요. 원안대로 나가지 않아 상부에서 매우 아쉬워했다는 거예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