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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갓 스물인 남자를 ‘악마’로 만들었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2. 19. 15:35

사회사회일반

무엇이 갓 스물인 남자를 ‘악마’로 만들었나

등록 :2015-12-18 21:23수정 :2015-12-19 10:44

 

그림 김보통 만화가
그림 김보통 만화가
[토요판] 커버스토리

현실의 거울에 비춘 만화
‘탈영, 그 유혹의 순간’ 속으로
탈영병이 발생하면 우리 사회는 ‘군의 기강 해이’를 지적해왔다. 헌병은 이들을 쫓고, 붙잡으면 기소하고, 군법원은 처벌한다. 군의 기강 해이를 바로잡으려는 국가의 노력은 이것으로 끝이다. 국방이 국민의 의무라면, 국가의 의무는 무엇일까. 탈영병의 목소리를 왜 우리 사회는 진지하게 들어보려 하지 않는 걸까. 2011~2015년 매일 평균 1.6명의 탈영병이 발생했다. 군 막사 안에 가려진 폭력을 목격한 많은 군 전역자들은 왜 침묵으로 일관하는 걸까. <한겨레> 토요판은 지난해 11월15일부터 김보통 작가의 만화 <디피>(D.P)를 매주 연재해왔다. 김 작가는 탈영병을 쫓는 헌병 군탈체포조(D.P)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20대 청춘들을 옥죄는 한국 사회의 해묵은 숙제로서 탈영병 문제를 드러내주었다. <한겨레>는 만화 연재 종료를 맞아 ‘탈영, 그 유혹의 순간’ 독자공모 논픽션 작품을 선보인다. 많은 독자들이 그 시절의 어두웠던 이야기를 보내왔다. 그중 4편을 선정해 소개한다. <디피>의 주인공인 헌병 사복체포조 안준호가 물끄러미 우리를 보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당신들도 군 가혹행위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목격한 목격자다.” 목격자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탈영, 유혹의 순간’ 논픽션 우수작 악마가 된 해양전투경찰

입대

2005년 7월10일, 21살이 되던 여름에 웃는 모습이 화분 같은 아이를 만났다. 처음엔 리시안셔스, 그러다 장미, 다시 돌아온 여름과 함께 꽃 진 난이 돼버린 그녀. 1년차의 연애란 가끔 흠뻑 물을 주면 되는 줄 알았던 22살의 여름, 2006년 7월10일에 나는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평생 한 번의 허세를 위해 그녀에게 따라나서지 못하게 했다. 멋지게 전화기를 붙잡고 울고 싶어서였을까? 그래서인지 우리의 일주년이었던 나의 입대날에는 얄밉게도 훈련소 앞에서 먹었던 돼지갈비만 생각난다. 그 기억의 잔가지엔 경상도 소주가 시원하다는 눈물 섞인 아버지의 언어유희와, 혹시나 물이 안 맞을까봐 보리차를 끓여 온 늙은 모정과, 남자다운 척은 다 하다 갈빗집 변기 위에서 흘린 어린아이의 눈물이 매달려 있다.

20도에서 28도의 여름 - 감정의 온도

기억의 명도는 봄 날씨처럼 변덕스럽지만 그것에 실린 감정의 온도는 정확하다. 훈련소에서 흘렸던 눈물의 기억은, 방금 멎은 딸국질의 횟수만큼 막연하지만, 온도는 문신처럼 남아 있다. 나는 해군훈련소에서 울보였다.

울 준비. 취침점호가 끝나고 침상에 개인용 모기장을 설치한다. 관물대에서 부모님과 여자친구의 사진을 꺼내 베개 밑에 넣는다. 취침 소등과 동시에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리고 내 눈물은 시작된다. 군용담요의 칠흑 속에서 시곗불을 비춰가며 부모님의 사진을 매만지고 여자친구의 미소에 키스했다. 그렇게 매일 울면서 잠들었다.

7주간의 해군 훈련소 생활은 나를 포함한 훈련병들을 군인으로 만들었다. 누가 보고 있지 않아도 3보 이상의 거리는 뛰었고, 거울을 보며 경례의 손날을 바로잡았다. ‘2006년 월드컵’을 보고 온 청춘들의 주적은 토고, 스위스였지만, 7주간 지속된 정훈교육 결과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 되었다. 도대체 북한은 왜 우리에게 화전양면책을 취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입대 전엔 반미친북이었던 내가 7주 후엔 친미반북주의자가 되었다. 누가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에게 7주의 시간을 달라. 원하는 사람으로 바꿔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행복했다. 동기들과 함께 땀 흘리고, 악마같이 굴던 교관을 흉내 내면서 웃을 수 있었다. 여자친구에게 눈물 어린 편지를 쓰고, 종교활동에 가서는 빵도 얻어먹었다. 고된 훈련도 함께하는 동기의 뒤통수만 보면 이겨낼 수 있었다. 피가 나고 이가 갈렸지만, 순간의 고통이었을 뿐, 조금만 있으면 100일 휴가가 다가온다는 기대를 하며 행복했다. 이렇게 7주의 훈련소와 3주의 후반기교육. 총 10주의 시간은 살기 좋은 20도에서 28도 정도였다.

7주간의 해군훈련소 생활은
훈련은 고됐지만 행복했다
그러나 자대 배치 후 첫 한 달,
정말로 지옥이 그러하다면
난 종교를 가질 것이다

그날, “씨발”과 “좆”밖에 없는
‘김독’이 내 여자친구의 편지를
소리내 읽을 때, 난 인형이 됐다
가슴 절절한 문구가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읽히는지 몰랐다

만화 갈무리.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30도에서 40도까지의 가을 - 지옥의 체온

나는 여수해양경찰서 산하에서 일하는 전투경찰이었다. 해군에 입대해서 해양경찰 산하 전투경찰로 신분이 전환되었다. 육군에 가서 의경 또는 전경 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육군 전·의경만큼 홍보가 되어 있지 않아서, 사회에 나온 지금은 간단하게 해군 전역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자들 사이에 군 시절 이야기가 주제로 떠오르면, 대체로 이야기를 듣는 축이다. 그들의 군생활은 작업과 훈련, 축구와 갈굼으로 점철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해군 전경의 생활은 조금 다르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훈련소 입소 기간은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그런데 처음 자대에 배치되어 생활한 첫 한 달은 시간대별로 기록할 수 있다. 무릇 천국은 막연하지만, 지옥은 몸서리치게 상상되는 법이다. 내 탈영 이야기, 실제론 탈영하지 않았지만 탈영 이야기라 이름 지어 마땅한 이야기. 나라는 인간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연민했던 지옥 같은 시간들, 31살이 되도록 하루에도 몇 번이고 떠오르는 스물둘의 초가을이다. 자대 배치 후 첫 한 달, 정말로 지옥이 그러하다면 난 종교를 가지겠다.

입대하기 전의 나는 가슴이 뜨거운 대학생이었다. 전태일과 체 게바라 평전을 밤새워 읽고, 마르크스, 푸코, 촘스키 등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사범대에 다니며 참교육을 꿈꿨고, ‘관용은 불관용을 관용한다’ 따위의 문장을 외고 다녔다. 그러나 군대는 아주 간단하게 나를 죽였다.

30도. 여수해양경찰서에 발령받았다. 그리고 고흥의 p정(30톤가량의 소형 함정)에 배치되었다. 전경 수가 적어 흔히 말하는 ‘꿀 보직’이었다. 그러나 군생활은 바로 윗선임에 의해 결정 나는 법이었다.

배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로 윗선임을 보고 “충성!”이라고 악을 질렀다. 일경(전경의 계급은 이경, 일경, 상경, 수경이다) 계급장을 단 그는, 속삭이듯 작은 소리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입술만 달싹거리며 내게 처음 듣는 화법의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야 이 시발새끼야! 누가 그따위로 경례하래? 미쳤냐? 완전 미친 새끼가 왔네? 와! 이 새끼 냄새 나는 거 봐. 꼭 좆같이 생겨 가지고, 야 이 시발아 네 고추 냄새가 여기까지 난다. 빨리 씻어!” 대충 이랬다. 나는 눈동자를 어디 둬야 할지 몰랐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으며, 합리성의 유무 따위를 따질 세포가 없었다. 왼 다리 발차기 한 대, 뺨 두 대, 주먹으로 복부 한 대 정도 맞고 샤워실로 뛰어갔었다. 요즘 군대는 구타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31도. 해경 전경은 처음 함정에 배치되면 ‘짬밥’ ‘짬뽕’ 정도로 불린다. 그리고 ‘오장’ 혹은 ‘짱오’라고 불리는 바로 윗선임에게 함정생활을 교육받으면서 군생활을 시작한다. 여기서의 군생활은 ‘오장’을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내 오장은 고작 일경인데도, 이미 여수 전경 사이에서 소문난 ‘독쟁이’였다. (당시 해경에서는 무서운 선임을 ‘독쟁이’ 혹은 ‘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오장과 짬밥의 일은 다른 고참이 관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해경 전경 사이에는 ‘독쟁이는 독쟁이가 만든다’는 격언이 있다. 악마같이 구는 독쟁이도 독쟁이를 만나 그러하다는 이야기였다. 내 오장을 교육한 오장은 이름 대신 ‘독’으로 불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 독쟁이가 만들어낸 게 내 오장이었다. 나는 그에게 맞을 때마다 그도 이렇게 맞았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나를 때리며 체온을 내렸고, 나는 그에게 맞으며 1도 올랐다.

32도. 함정 ‘짬밥’의 임무는 단순하다. 새벽 4시30분에 기상해서 밤 10시에 취침하기까지, 밥, 청소, 빨래와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 된다. 즉, 노예다. 열심히 하면 쉴 수 있다고 하는데, 열심히 할수록 일감이 늘어났다. 틈날 때마다 ‘그’는 주먹을 쥐고 입술만 달싹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시간을 귀신같이 알았다. 어느 배나 그렇듯이 수경(병장)급 고참들은 잘 모른다. 나와 ‘그’의 관계를 수경들은 몰랐다. 직원들(해양경찰)은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높은 사람은 아랫사람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밥을 낼 때는 큰 반찬 하나, 작은 반찬 두 개, 그리고 국을 무조건 내야 해. 일주일 동안 메뉴가 겹쳐도 안 되고, 빨간 국에 빨간 반찬, 점심에 돼지고기 내고 저녁에도 돼지고기 내는 따위의 미친 짓거리도 안 돼. 그리고 일주일에 한 개씩 새로운 메뉴를 개발해야 해. 정장, 부장님의 밥은 잡곡밥이어야 하고, 우리는 쌀밥을 좋아해. 반찬 각 맞춰서 썰어야 하고 그릇도 오와 열을 맞춰서 내. 밥 먹고 나면 정장님은 블랙, 부장님은 둘둘셋, 김경장은 녹차, 박순경은……. 와~ 이 시발새끼 표정 좆같아진다? 왜? 너는 사범대 다니다 왔는데, 씨발 기술 배우다 온 새끼한테 처맞으니까 좆같냐? 너보다 어린데 좆같이 구니까 좆같지? 이 씹새끼야. 너 여자친구 있다며? 이렇게 좆같이 생긴 새끼도 여자친구가 있구나. 니미 좆도 시바 좆같아서 살겠냐?”

34도. 2주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녹동 바지(경비정이 정박하는 부두를 이른다)에서 ‘인형’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표정이 없다는 뜻이다. 다른 배 고참들은 날 볼 때마다 “김독(오장의 성이 김씨였다) 밑에서 좆같겠다. 나 같으면 자살한다. 저 새끼가 내 고참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다. 좆뺑이쳐라. 시간은 간다”라고 했다. 난 “아닙니다. 좋습니다. 잘해 줍니다” 등의 대답을 했다. 그랬다. 윗사람들은 내 처지를 다 알고 있었다. 높은 사람은 아랫사람의 고통을 모른척한다.

전경소대장이 경비정에 방문했다. 배치받은 지 얼마 안 된 전경의 복무 관리차 들른 것이다. 전경들에게 허물없이 형처럼 대해주던 젊은 경찰이었다. 하지만 내 처지는 몰랐다. 설문조사할 때 ‘김독’이 처음으로 내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난 “아닙니다. 좋습니다. 잘해 줍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전태일? 체 게바라? 난 아무 생각도 없었다. 내 모든 세포는 ‘김독’을 향해 있었다. 머릿속으로 옆에 있는 ‘김독’의 초상을 그릴 수 있었다. 표정, 숨소리, 손과 발의 모양까지.

36도. 9월26일, 내 생일이었다. 여자친구가 생일에 맞춰 과자를 보내왔다. 난 과자에는 관심이 없었다. 함께 왔을 편지가 간절했다. 언제나 여자친구의 편지는 건빵주머니에 담겨 수십 번씩 꺼내졌다. 화장실에서, 새벽에 혼자 일어나서, 부식창고에서, 언제든 아무도 없다 싶으면 꺼내서 봤다. 누구나 그렇다. 어떤 글도 이보다 더 온몸을 울리진 않는다.

과자는 선임들의 사물함에 들어가고 내 몫은 없었다. 아무렇지 않았다. 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내 몫은 없었다. 난 편지를 생명수로 먹고 사는 짐승이었다. 그날 밤, 나오는 말이라곤 “씨발”과 “좆”밖에 없는 ‘김독’이 다가왔다. “씨발년(언젠가부터 이렇게 불렀다)이 편지 보냈네? 줘봐. 너 내 욕 한 거 아냐?” 난 인형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김독’은 내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고, 난 인형처럼 있었다. 남의 편지를 읽고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웃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청춘의 웃음이 저렇게 잔인하게 보일 때도 없을 것이다. 나에게 보내는 가슴 절절한 문구가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읽히는지 몰랐다. 천사보다 순결한, 사슴보다 무구한 내 여자친구가 ‘걸레’로 불릴 줄도 몰랐다. 난 살기 위해 표정관리를 했다. 그날 밤, 고흥 하늘에 쏟아지던 별들도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39도. 추석이 돌아왔다. 이른 추석이었다. 뱃사람들은 미신이 많아 제사를 잘 지낸다. 해양경찰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파도에 운명을 맡긴 인생은 그렇다. 추석연휴에 우리 배는 출동 중이었고, ‘짬밥’인 나는 차례를 준비해야 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많아진 반찬 가짓수에 바빴다.

나는 김치를 썰고 있었다. 그날따라 파도가 많이 쳐서 중심을 잡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뱃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짬통에 토하면서, 취사장 벽에 머리를 대고 중심을 잡으며 김치를 썰었다. 밥시간은 다가왔으나, 준비가 다 되지 않았다. 어김없이 ‘김독’이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이 미친 새끼가 짬통에 토했네? 돌았냐? 이 씨발놈아? 군기가 들어 있으면 멀미를 안 해! 넌 미친 거야.” 이 후의 욕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이 조금 혼미했던 것 같다. 순간 손가락이 베였다. ‘김독’은 그걸 모른 채 내 귀에다 대고 가족 욕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멀미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면, 칼질하다 자기 손가락을 썰어 버린 ‘짬밥’은 죽어야 한다. 나는 김치 속에 손가락을 담갔다.

김치와 피는 동색이다. 걸리지 않았다. 두려워서 손가락이 아리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여자친구가 걸레가 되었을 때, ‘김독’은 떠났다. 그 후 박수경이 취사장에 잠깐 들러서 멀미약을 줬다. “네 오장 안 볼 때 먹어라.” 나와 동갑인 말년 고참 앞에서 엉엉 울었다.

40도. 경비정에 배치받은 후 한 달, 대학 시절 패기만만하고 어디서나 인정받던 나는 죽었다. 웃을 줄도(이빨이 보이면 입을 맞았다) 울 줄도, 말할 줄도 몰랐다. ‘짬밥’은 다섯 가지 말만 할 수 있다. “네, 그렇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난 이상하게 “감사합니다”를 많이 했다. 이 닦으러 갈 때도 허락받으면서 “감사합니다”, 잘 때도 “감사합니다”, 화장실 갈 때도 “감사합니다”, 매사가 감사했다. 다음은 구타와 함께 “알아보겠습니다”였다. 난 이 공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쳇바퀴를 도는 것 같았다. ‘물에 들어갈까? 혹시나 살고 싶어서 헤엄치면 어쩌지? 불쌍한 우리 엄마는? 내 여자친구는? 난 신문에 실리지도 않겠지. 실려도 차가운 댓글들이 날 규정하겠지. 그걸 못 버텼냐는 자칭 사나이들의 비아냥, 죽을 놈이라서 죽었다는 철학적인 의견들.’ 그 시절 나는 죽음만 생각했다.

100일 휴가 전날이었다. ‘100일 위로휴가’ 얼마나 적절한 시기와 명목인가? 생사를 밖에서 선택하라는 국가의 배려. 왜 군인들이 휴가 중에 자살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죽음만큼은 밖에서 맞이하고 싶었다. 그날 밤, 다른 배의 ‘짬밥’이 끓는 카레에 손을 넣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쳇바퀴를 부수려는 다람쥐의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혹시나 내 100일 휴가가 취소될까 두려웠다. 그런데 운 좋게 허가가 났다.

휴가 날 아침, ‘김독’한테 맞았다. 내가 휴가를 간 동안 자기가 밥을 해야 해서 그랬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사람한테 이런 건 고통이 아니었다. 휴가 나가기 전 구타 흔적이 있는지 본다며 부장님이 옷을 모두 벗게 했다. 나는 많은 사람 앞에서 혼자 나체가 되었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김독’은 구타기술자였다. 부장님은 내게 살이 많이 빠졌다고 했다. 한 달 동안 14㎏이 빠졌으니 당연한 소리였다. 어쨌든 휴가를 떠나게 됐다.

박수경의 말년 휴가와 내 100일 휴가가 겹쳤다. 무표정이지만 내게 호의를 보였던 박수경, 모든 ‘짬밥’들에게 ‘천사 고참’이라고 불렸던 그가 버스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힘든 줄 안다. 그런다고 혹시나 엉뚱한 생각 하지 마라. 이제 친구니까 반말하고, 야! 씨발 좀 웃어라 이 씨발놈아. 어어? 좆같냐? 말년이라고 내가 좆으로 보여?” 정말 웃겼다. 평소에 욕도 못하던 순둥이 고참이 일부러 ‘김독’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덕분에 집으로 가는 3시간 동안 100일만큼 웃었다. 웃음이 살아가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동갑이던 박수경이 존경스러웠다. 나는 휴가를 간 동안 가족과 여자친구, 친구들을 보며 힘을 냈고 거짓말처럼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후론 이때의 기억을 붙잡고 버텼다.

내 오장은 고작 일경인데도,
이미 소문난 ‘독쟁이’였다
그도 이렇게 맞았을 것이다
그는 때리며 체온을 내렸고,
나는 그에게 맞으며 1도 올랐다

100일 휴가가 취소될까 두려웠다
아, 그래서 휴가중 자살하는구나
여기서 영원히 벗어나려면
그 수밖에 없을 거 같았다
물에 들어갈까? 불쌍한 울엄마는?

40도의 가을을 지나 - 이후의 삶

‘김독’이 몇 달 뒤 다른 부서로 배치되면서 내 지옥 같은 ‘짬밥’생활은 끝이 났다.(해경 전경은 6개월이나 1년마다 근무지를 바꾼다.) 다시 1년이 지나 나와 ‘김독’은 고참이 되어 같은 함정에 배치되었다. 놀랍게도 말년이 된 ‘김독’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천사 고참이 되어 있었다.(해경에서는 이런 것을 ‘독이 빠졌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군생활 말년을 함께했다. ‘김독’은 전역하는 날, 나에게 ‘형’이라고 불렀다.

애초에 무른 성격이었던 나는 ‘독쟁이’가 되지 못했다. 내 대에서 ‘독쟁이’의 계보가 끊긴 것이다. 대신에 일만 하는 고참이 되어, 덩달아 쉬지 못한 후임들에게 원성을 샀다. 지금도 예전의 후임들은 “일로 독 부리는 인간이 제일 질 나쁜 인간이다. 차라리 때리고 갈구지 그랬느냐”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김독’ 때문에 ‘일독’이 올랐던 것 같다고 대꾸한다. 신기하게도 군대 이야기는 매번 같은 이야기를 같은 인간들과 반복하면서도 질리지 않는다. 일종의 병리적 현상이라 생각한다.

전역 후 500톤 함정 출신 전경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날 ‘김독’은 술을 진탕 마시더니 눈물로 내게 사과했다. 자기도 그렇게 지옥 같은 넉 달을 보냈다며, 자신이 철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용서하고 연민했다. 몇 달만 내게 ‘악마’였을 뿐, 이후의 ‘그’는 여리고 정 많은 ‘청춘’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20살 청춘이 가진 ‘악’이 온전히 개인으로부터 비롯되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궁금하다. 무엇이 갓 스물이 된 남자를 악마로 만드는 것일까? 스스로를 죽여야만 사라질 것 같은 이 지독한 ‘독’의 근원은 어디인가?

이성인/전남 광양시

논픽션 우수작 수상소감: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상처

저에게 글쓰기는 치유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군생활은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상처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접한 공모 소식은 어떤 모임의 초대장 같았습니다. 떨리는 속을 다스리며 며칠을 생각했습니다. 고민 끝에 우리나라 모든 남성의 아픔에 기대 글을 보냈습니다. 삶의 과정엔 어디에나 군생활과 비슷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모든 이가 천국을 바랄진대, 정작 천국의 도래는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군대이야기는 가족, 학교, 직장 등 위치만 바뀐 채 계속되는 모든 사람의 상처에 대한 고민입니다. 제게 외침의 기회를 마련해 준 <한겨레> 편집진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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