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날 밤 ‘김대중이 반항하면 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어요”/ 이희호 평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2. 20. 21:10

정치정치일반

“그날 밤 ‘김대중이 반항하면 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어요”

등록 :2015-12-20 19:54

 

1980년 5월15일 ‘서울의 봄’은 절정을 이룬 듯했다. 서울역 앞에 운집해 신군부 성토대회를 연 대학생 10만여명은 총학생회장단의 결정에 따라 남대문으로 향하던 행진을 멈추고 자진해산하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0년 5월15일 ‘서울의 봄’은 절정을 이룬 듯했다. 서울역 앞에 운집해 신군부 성토대회를 연 대학생 10만여명은 총학생회장단의 결정에 따라 남대문으로 향하던 행진을 멈추고 자진해산하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2회 5·17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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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5일 오후 3시 서울 시내 대학 30여곳의 대학생 10만여명이 서울역 앞에 모여 신군부와 유신잔당 성토대회를 열었다. 연사들은 임시 연단으로 마련한 버스 지붕 위에 올라가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민주화 일정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시위는 ‘서울의 봄’의 절정이었다. 부산·대구·광주·인천·목포·청주·춘천 등지에서도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서울역 앞의 총학생회장단은 저녁 8시30분 시위를 끝내고 교내로 돌아가 철야농성을 하기로 결정했다. 군부에 쿠데타 빌미를 주지 말자는 결의였다. 시위대 해산에 반대한 고려대 학생 2000여명은 9시 넘어 시청 앞까지 행진한 뒤 스스로 해산했다. ‘서울역 회군’이었다.

1980년 5월15일 대학생 10만여명
서울의 봄 절정에서 ‘서울역 회군’
5월16일 아침 김영삼 동교동 방문
김대중과 ‘시국수습책’ 6개항 제시

신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5월16일 아침 일찍 김영삼에게 연락했다. “김영삼 총재가 아침에 동교동 우리 집으로 왔어요. 남편과 한동안 이야기했지요. 4월 통합협상 이후 처음 만난 거였어요.” 사태를 낙관하던 김영삼의 태도가 바뀌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계엄해제를 포함한 6개항의 시국수습책을 발표했다. 16일 서울의 거리는 마치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대학에서도 정상수업이 이루어졌다. 이날 오후 김대중은 북악파크호텔에서 신민당 정무위원·국회의원 30여명과 만나 시국을 걱정하는 마음을 털어놓았다. “동지들! 작금의 정세가 심각한 국면에 돌입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 모양이니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겠습니다.” 오후 5시 대학생 대표 95명이 이화여대에서 모여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를 열었다. 다음날까지 계속된 철야회의 끝에 학생들은 거리시위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미 집권 시나리오를 짜놓았던 신군부는 5월17일 밤 비상국무회의와 동시에 동교동 집을 급습해 김대중을 연행했다. 사진은 그때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 지하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김대중을 신군부가 촬영해놓은 필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하지만 이미 집권 시나리오를 짜놓았던 신군부는 5월17일 밤 비상국무회의와 동시에 동교동 집을 급습해 김대중을 연행했다. 사진은 그때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 지하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김대중을 신군부가 촬영해놓은 필름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신군부는 5월17일 밤 10시를 작전 개시 시점으로 정해 놓고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였다. 5월16일 밤 대통령 최규하가 중동 순방 중에 하루 일찍 급히 귀국했다. 신군부의 귀국 종용에 따른 것이었다.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이 이날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 회의를 소집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맞춰 검거할 800여명의 예비검속자 명단을 통고했다. 이 명단에는 학생소요 배후조종자와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분류된 주요 인사 이름이 들어 있었다. 학생소요 배후조종자 명단에는 김대중과 동교동 비서들, 예춘호·문익환·고은·한승헌·이문영을 비롯한 김대중과 가까운 재야인사들, 김홍일·배기선·송기원·신계륜·이석표·설훈·심재권·이해찬을 비롯한 청년·학생운동 지도자들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신군부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김종필·이후락을 비롯한 10여명을 지목했다. 부정축재자를 끼워 넣음으로써 김대중과 재야세력 일망타진이라는 신군부의 진짜 목적을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5월17일 신군부 심야 비상국무회의
‘계엄 확대·국회 해산·휴교령’ 가결
밤 10시 무장병 40여명 동교동 급습
김대중 가슴에 착검한 총부리 위협
“하느님이 함께해주실 것입니다!”
이희호는 남편의 등을 보며 외쳤다

5월22일 계엄사 ‘김대중 사건’ 발표
“그날 밤 ‘미국의 소리’ 듣고 절망”
‘광주 참상’ ‘디제이 최고 사형’ 등등

5월17일 밤 9시42분 대통령 최규하가 참석한 비상국무회의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중앙청 국무회의장 복도와 현관에 총을 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배치됐고 중앙청 외곽에 전차와 장갑차가 진주했다. 9시5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안이 가결됐다. 찬반토론도 없이 8분 만에 이루어진 결정이었다. 계엄사는 즉시 포고령을 발표해 18일부터 정치활동과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18일 새벽 2시 무장 병력이 국회를 점령했다. 이날로 국회가 해산당했다. 이 모든 조처의 목표는 김대중과 재야세력을 핵심으로 하는 ‘정치판 싹쓸이’였다. 신군부가 김대중을 체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주한 미국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이 대통령 비서실장 최광수에게 연락해 “정국 불안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대중을 체포하는 것은 볏단에 불을 들고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다. 신군부는 글라이스틴의 경고를 무시했다.

5월17일, 운명의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동교동은 하루 종일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저녁 8시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기자가 다급하게 상황을 전했다. 계엄사 군인들이 이화여대에서 대책회의를 하던 총학생회장들을 덮쳤고, 학생들이 개머리판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조금 뒤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중앙정보부 요원이라고 신분을 밝힌 사람이 긴박하게 말했다. “지금 천지개벽이 됐습니다. 김대중 선생님이 위험합니다. 피할 수 있으면 빨리 피하십시오.” 다시 10분쯤 뒤에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국회의원 조세형의 목소리였다. “모두 끝장났습니다. 신변을 조심하십시오.” 응접실에 앉아 있던 김대중은 담배를 피웠다. 체포가 임박한 상황이었지만 김대중은 피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10시가 조금 지나 대문을 쾅쾅 치는 소리가 났다. 동교동 경호원 정승희가 문을 열자 검은 그림자들이 우르르 밀려들더니 착검한 M16 소총 개머리판으로 정승희의 머리를 내리쳤다. 머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누구요?” 경호원 이세웅이 소리 지르자 험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 새끼들, 까불면 모두 죽여 버리겠어.” 무장 헌병 40여명이 경호원을 내리치며 마당을 가로질러 응접실 쪽으로 몰려갔다. 그 뒤로 보안사 합동수사본부(합수부) 수사관 몇 명이 권총을 든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이닥친 군인들은 자리에서 막 일어서던 김대중의 가슴에 착검한 총을 겨누었다. 불빛에 칼날이 번득였다. 장교 한 명이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했다. “합수부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가셔야겠습니다.” 김대중이 되물었다. “어디요?” 장교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계엄사란 말입니다.”

김대중은 윗도리를 가져오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놀라지 마요. 날 잡으러 왔소.” 김대중은 이희호에게 말하고 옷을 입고 나갔다. 군인들이 김대중의 양팔을 잡아끌었다. 김대중은 팔을 뿌리치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내 발로 걸어갈 테니 걱정 말고 가만히들 있게.” 착검한 총부리들이 일제히 김대중을 향하는 걸 보고 이희호가 소리를 질렀다. “가자는 말 한마디면 따라나설 분인데 왜 총을 겨누느냐?” 이희호는 현관 밖으로 나가는 남편의 등 뒤에 대고 외쳤다. “하느님이 당신과 함께해주실 것입니다!” 이희호는 총과 칼이 남편을 에워싸던 그 순간을 잊지 못했다. “그날 밤 남편을 체포하러 왔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뒷날 증언을 했어요. 상부의 지휘자로부터 ‘반항하면 그대로 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어요.”

동교동 집 마당에는 김대중의 동생 김대현, 비서 김옥두, 경호실장 박성철과 경호원 몇 사람이 있었다. 총을 든 보안사 요원들이 소리쳤다. “머리에 손을 얹고 저 벽 쪽으로 가라. 딴짓하면 죽인다.” 김대중이 밖으로 끌려 나가자 맨 마지막으로 응접실에서 나온 장교가 명령했다. “그대로 앉은 채 호명하는 사람만 일어선다.” 군인들은 김대현·김옥두·박성철과 경호원을 끌고 나가 검은 승용차에 태웠다. 그날 밤 비서 한화갑, 이희호의 큰아들 김홍일도 다른 곳에서 붙잡혀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연행자들을 기다린 건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극악한 고문이었다.

군인들이 김대중과 비서들을 끌고 사라진 뒤 다시 6~7명의 사복 입은 사람들이 흙발로 응접실을 점령했다. 그중 키가 큰 사람이 이희호에게 말했다. “집을 수색해야겠습니다.” 사복들은 온 집을 샅샅이 뒤졌다. 수색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때 우리 집에는 남편의 강연을 녹음해 복사한 테이프가 많이 있었어요. 그것들까지 모두 쓸어서 가져갔어요. 밖에 트럭을 대기해놓고 실어갔어요.” 사복들이 떠나고 난 집은 폭풍우에 휩쓸린 것 같았다. 적막감이 돌았다. “나머지 식구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어요. 비서들이 쓰던 방을 보니 거기에 다들 웅크리고 있었어요. 홍걸이도 거기 있었고요.” 이희호는 안방에서 기도로 두려움을 달랬다. “새벽 4시쯤에 홍걸이가 잠이 오지 않는다며 안방으로 왔어요. 그때 홍걸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엄청난 고난을 거듭 주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하느님, 너무하십니다’라는 말이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어요. 막내와 손을 잡은 채 울면서 기도했어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요.”

1980년 2월29일 사면·복권 뒤 5월17일 체포 때까지, 동교동의 봄은 너무 짧았다. 사진은 4월18일 김대중의 동국대 강연에 동행한 이희호가 객석에서 학생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0년 2월29일 사면·복권 뒤 5월17일 체포 때까지, 동교동의 봄은 너무 짧았다. 사진은 4월18일 김대중의 동국대 강연에 동행한 이희호가 객석에서 학생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아침이 되자 아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신문기자들도 동교동 집 문을 두드렸다. “기자 한 사람이 상도동 김영삼 총재 집을 들렀다 오는 길이라며 거기는 아무 일도 없고 평온하다고 했어요.” 얼마 뒤에 김영삼이 동교동을 방문했다. “나는 김영삼 총재가 와주어서 고마운 마음으로 맞았지요.” 신군부는 같은 야당 지도자인데도 김대중과 김영삼을 분리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했다. 한 사람은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면서 다른 한 사람은 그대로 두었다. 뒤에 신군부는 김영삼을 가택연금에 처했다.

아침 9시께 정보부 요원이 다시 동교동으로 찾아왔다. 둘째아들 김홍업을 찾았다. “홍업이는 전날 친구 집에 가 있어서 잡혀가지 않았어요. 정보부 사람이 돌아간 뒤에 홍업이가 집에 왔는데, 마침 <아사히신문> 특파원이 와 있어서 그 사람 차에 태워 피신을 시켰어요. 며칠만 숨어 있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석 달이나 숨어 다녔어요. 그 뒤에 붙잡혀 두 달 동안 정보부에 감금돼 있다가 풀려났지요.”

5월19일 월요일 아침 신문들은 ‘사회혼란 및 소요 관련 배후조종 혐의자’로 김대중을 비롯해 예춘호·문익환·김동길·인명진·고은·리영희를 체포했다는 보안사 합동수사본부의 18일 발표를 1면에 보도했다. 발표된 사람들 말고도 재야인사·정치인·대학생들 여럿이 신군부에 잡혀갔다. 20일 마포경찰서에서 동교동을 찾아와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만 남고 모두 나가라고 명령했다. “집 주위를 경찰이 철통같이 에워쌌어요. 외출은 홍걸이가 학교에 오가는 것과 가사도우미가 장 보는 것만 허용했어요. 홍걸이 등하교 길에도 미행이 붙었어요. 나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지요. 분가해 사는 며느리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했어요.” 정보부는 우편물을 검열하고 전화도 도청했다. 이희호는 남편이 사라진 집에 감금당한 꼴이었다. “남편이 어디로 연행되어 갔는지, 무슨 수모를 당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어요.”

1980년 ‘5·17 쿠데타’로 이희호는 또다시 남편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고난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5월18일 보안사 합동수사본부는 김대중·김종필을 비롯한 주요 인사 26명을 ‘사회혼란 및 소요 관련 배후조종 혐의자’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사진 '경향신문' 5월18일치 호외
1980년 ‘5·17 쿠데타’로 이희호는 또다시 남편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고난의 시기를 겪어야 했다. 5월18일 보안사 합동수사본부는 김대중·김종필을 비롯한 주요 인사 26명을 ‘사회혼란 및 소요 관련 배후조종 혐의자’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사진 '경향신문' 5월18일치 호외
5월21일 신문에 광주에서 벌어진 일에 관한 소식이 처음으로 보도됐다. 이날치 <동아일보>는 ‘광주 일원 데모 사태’라는 굵은 글씨의 1면 제목 아래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고 단 한 문장으로 보도했다. 이 한 문장 뒤에 무수한 사실이 감추어져 있었다. 22일 계엄사는 김대중에 대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김대중이 ‘대중선동과 민중봉기로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학생소요를 배후조종했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사건’ 관련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37명에 이르렀다.

5월22일 밤 10시30분 이희호는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들었다. 놀라운 뉴스가 흘러나왔다. “한국 정부가 발표한 김대중에 대한 혐의가 그대로 군사법원에 회부된다면 최고 사형까지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희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견딜 수 없는 원통함과 절망감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희호는 <미국의 소리>를 통해 광주의 소식도 들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불안과 공포의 나날이었다. “중간 수사 발표 직후에 집을 수색했던 기관원 한 사람이 와서 남편의 내의와 책 몇 권을 달라고 했어요. 그러더니 나더러 함께 가자고 했어요. 나는 혹시 면회를 시켜주나 하고 순진하게 생각했지요.” 이희호를 기다린 것은 군 검찰이었다. “거기서 하루 종일 조사를 받았어요. 그런 식으로 세 번을 군 검찰에 불려갔지요.”

김대중은 5월17일 집에서 잡혀 나간 뒤 곧바로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다. 김대중은 남산에서 겪은 일을 뒤에 이렇게 밝혔다. “저들은 잠을 못 자게 했다.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했다. 대답을 거부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마지못해 대답하면 또 같은 것을 물었다. 인간인지라 대답이 똑같을 수 없었다. 그러면 그 틈을 비집고 이유를 물으며 추궁했다. 질문자도 수시로 바뀌었다. 하루에 20번, 아니 30번을 신문했다. 고문보다 잔인했다.” 중앙정보부 지하에는 취조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누군가 고문을 당하는지 옆방에서 비명소리가 끝없이 들려왔다. “듣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내 귓가에 집요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로 내 가슴은 찢어질 듯이 괴로웠다. 그때는 누가 무엇 때문에 취조당하는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었다.”

중앙정보부에 잡혀오고 20일쯤 지난 뒤에 수사관 한 사람이 김대중에게 물었다. “광주에서 큰 사건이 난 것을 아시오?” “모릅니다.”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아시오?” 김대중은 다시 “모른다”고 대답했다. 수사관은 “500만원을 주고 반정부 운동을 시키지 않았느냐?”며 자백하라고 윽박질렀다. 김대중은 정동년과 일면식도 없었다. “그런 일 없다”고 대답하자 수사관은 고문이라도 해야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고문을 하시오. 다른 사람들도 당했는데 나만 멀쩡하면 양심이 괴로우니 고문을 하시오.” 김대중은 옷을 모두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저희끼리 수군거리더니 다시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고문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지하실의 신문은 두 달 동안 계속됐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