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 다시 끄집어내고 싶지 않다.”
<한겨레>가 2015년을 ‘민주주의 퇴행’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기획시리즈를 준비하면서 ‘그 일’에 대해 말해달라는 인터뷰 요청에, 그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왜 안 그렇겠나. 한명 한명이 헌법기관이라는 국회의원들의 손으로 집권여당 원내대표에 선출됐으나,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는 대통령의 한 마디에 의원들의 ‘집단 린치’ 끝에 쫓겨난 사건. 그 일로 그는 ‘보수 혁신’의 대표 주자로 부상했지만,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우선 넘어야 할 내년 4월 총선으로 가는 겨울은 더욱 혹독해졌다. 지독한 역설이다. 그래도 ‘그 일’은 그의 말대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끄집어내야 했다.
2015년 7월8일, 유승민(57·3선·대구 동을) 의원은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기자회견을 끝으로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지난 2월2일 친박근혜계의 지원을 업은 이주영 의원(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19표 차(84표 대 65표)로 여유있게 누르고 당선된 지 불과 5개월여 만이다.
회상을 돕기 위해 그 사건의 개요를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5월29일, 유승민 원내대표는 야당과 공무원연금 개편을 협상하면서, 행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의 견제(수정 요청) 기능을 강화한 국회법 개정안도 함께 합의했다. 세월호 시행령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한 새정치민주연합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청와대는 “강제성 여부를 명확히 하라”며 위헌성을 문제 삼았고, 당내 친박근혜계도 “유승민이 책임지라”고 압박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국회법 중재안을 마련해 정부에 보냈으나, 박근혜 대통령은 6월25일 국무회의에서 끝내 거부권을 행사했다. 동시에,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며 유 원내대표에 대해서도 ‘거부’를 선언했다. 그날 오후 열린 의원총회에서 의원들 다수는 유 원내대표 유임을 택했다. 그러나 친박계는 유 원내대표 사퇴 공세를 강화했고, 김무성 대표도 “여당 원내대표가 대통령을 이길 수는 없다”고 그 편에 섰다. ‘6·25 발언’ 이후 13일 만인 7월8일, 새누리당은 의원총회에서 ‘유 원내대표 사퇴 권고’를 결의했고, 유 원내대표는 이를 받아들여 원내대표직을 사퇴했다. 의원들의 뜻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갖췄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에 의한 축출이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시계는 대통령이 당의 총재로 군림하며 원내총무를 ‘임명’하던 ‘제왕적 총재’ 시절로 되돌아갔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청의 권력관계에서 헤게모니를 확실히 틀어쥐었지만 삼권분립은 짓밟히고, 의회 민주주의는 질식해버렸다. 여당은 제 목소리를 잃었고 야당은 무기력에 빠졌으며 의회는 냉소받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는 의회가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인지 생각하게 한, 참으로 가슴 아픈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유승민 의원이 지난 7월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사퇴 기자회견을 한 뒤 국회 정론관에서 나오고 있다. 그는 자진 사퇴를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법과 원칙, 정의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인터뷰를 피하는 그를 어렵게 설득해, 지난 21일 ‘그 일’에 대해 들어봤다. 친박근혜계의 ‘유승민 고사 작전’이 펼쳐지고 있는 대구 지역구 행사장을 이동하는 중간에 전화로 이뤄진 인터뷰다.
-원내대표직 사퇴회견에서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언급한 게 어떤 의미였나?
“개인적으로 자리에 연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2011년에도 ‘당이 이대로 가선 안 된다’ 싶어 최고위원직을 던졌다.(이로 인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 출범의 계기가 됐다.) 하지만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그냥 쫓겨나듯 물러나면 대통령을 위해서도, 입법부를 위해서도 안 좋고, 의회 민주주의에 이런 전통이 생겨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삼권분립 위배다. (박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고 국무회의에서 말한 6월25일 이후) 13일을 버틴 것은 이 문제가 민주주의의 문제이기에 의원총회에서 결론이 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에게 끝까지 ‘의총에서 결정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6월25일 첫 의총 뒤 7월8일 의총에선 의원들 뜻이 (유승민 사퇴 권고 결의로) 달라진 것이니 그 뜻을 따른 것이다.”
-‘민주공화국’을 언제부터 가슴에 깊이 품었나
“나는 운동권 출신도, 민주투사도 아니고 경제학자 출신이다.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에도 행정부의 정책자문을 하는 등 입법 사법 행정부를 지켜봐 왔다. 사퇴하면서 ‘법과 정의, 원칙’을 얘기했었는데 그런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것은 정치권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다. (그는 2000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에 임명되며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양극화, 저성장, 저출산 등 경제사회적 시대 과제를 풀어나가야 하지만, 동시에 성숙한 민주주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유승민 사건’의 본질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대통령의 입장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 입장에서는 공무원연금이라는 중요한 개혁의 성과를 내기 위해 야당이 요구하는 것 중에 최소한(국회법 개정안)은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백점짜리는 아니지만 앞으로 국가 재정에 큰 도움이 되는 공무원연금 개혁을 해냈고 그건 박근혜 정부의 성과로 남을 거다. 그 당시 (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의 수정 요구권을 강화한) 국회법 개정안이 위헌이라는 지적이 있지만, 그게 위헌이 아니라는 소신에 변함없다. 훗날 헌법학자들이 제대로 규명을 해줘야 할 부분이다.”
-당시 친박계는 ‘집권여당 원내대표는 대통령과 생각이 맞아야 한다’며 흔들었는데.
“나는 원내대표에 출마할 때부터 ‘여당이 대통령을 도와줄 건 도와주고 견제할 건 견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국회의 위상을 높이고 당이 국정의 중심에 서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행정부가 하는 일에 100% 거수기 역할을 하는 여당 원내대표를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의원들에게 이런 뜻을 분명히 밝혔고, 의원들도 그걸 알고 나를 원내대표로 뽑았다. 그렇게 원내대표가 됐기에 내가 말했던 변화와 혁신 약속을 지키려 한 것일 뿐이고, 그럼에도 친박들은 나를 계속 공격했다.”
-그 사건 이후 새누리당에서는 자율적 목소리가 사라지고 청와대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모습인데.
“지금의 당·청 관계가 그렇게 건강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는 총선 공천을 앞둔 일시적인 현상이지, 당·청 관계가 계속 이렇게 가진 않을 거라고 본다.”
권력 측면에서 볼 때 박근혜 대통령에게 ‘유승민 사건’은 여권 내부 헤게모니 싸움에서의 ‘대역전’과 같다. 박 대통령이 2013년 2월 취임한 뒤, 친박계는 당내에서 비박계와의 경선에서 연전연패했다.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친박계가 민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비박계 정몽준 전 대표에게 패했고, 국회의장 후보 경선에서도 친박 황우여 의원을 비박 정의화 의원이 눌렀다. 전당대회에서 친박 좌장 서청원 의원을 누르고 김무성 대표가 당선된 데 이어, 원내대표마저 유승민에게 내줬다. 당내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에서 계속 밀려온 흐름을, ‘찍어내기’라는 완력으로 전복시킨 것이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권력을 위한 것이었다면 박 대통령은 유승민 사건으로 성공했다”고 말했다.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던 ‘보수 혁신’도 좌절됐는데.
“우리 당의 정책을 그쪽으로 끌고 가고 싶었지만 (중도 사퇴로)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내년 총선 공약에 당의 노선과 정책을 크게 변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싶었는데 그걸 못 하게 됐다. 그게 가장 아쉽다.”
유 의원은 원내대표 교섭단체 연설 등을 통해 양극화 해소, 복지 확대, 증세 필요성을 강조하며 당의 기존 노선을 대대적으로 수정할 뜻을 밝혔었다. 공무원연금 개편을 마친 뒤 이를 법안과 총선 공약 등으로 본격적으로 정비할 구상이었으나, 중도 사퇴로 물거품이 됐다.
-그런 면에서 보수진영 전체에도 악영향을 준 사건 같다. 정두언 의원에게 유승민 사건의 의미를 물어보니, “대한민국에 보수가 아닌 극우가 발호하도록 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라고 규정하더라.
“노코멘트하겠다. 다만 새누리당 안에 보수 혁신을 추구하는 힘이 사라진 데 대해 국민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유 의원은 최근 지인의 예비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 축사에서 “저 요즘 외롭다. 대구에서 고생 좀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사건으로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있지 않느냐”고 묻자 전화기 너머로 허허로운 웃음소리만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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