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장
사이비-서술 입장들로 돌아가서
36.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토론으로의 회귀.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우리의 토론의 출발로부터, 간단한 개요는 지금까지 우리의 분석 과정을 환기시키는 데 틀림없이 도움이 된다.
사이비-서술 입장들은 자연법칙들에게서, 진리 가치들이 할당될 수 있는 진정한 명제들의 특징을 부인한다. 이 입장이 수용된다면, 귀납의 문제나 혹은 자연법칙들이 지닌 유효성의 문제는 사라질 터이다. 그 문제는 진정한 문제가 아니라, 그 오해에 의하여 자연법칙들이 진정한 서술들로서 간주되는 오해에 의하여 야기되는 사이비-문제일 따름일 터이다.
이 개념은 – 우리가 비트겐슈타인이나 슐릭(Schlick)에게 빚지고 있는데 – 새로운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문제를 야기한다: 자연법칙들이 진정한 명제들이 아니라면 자연법칙들은 무엇인가?
자연법칙들은 “서술들의 변화에 관한 규칙들”이라는 답변은 여기서 잠정적으로 수용되었지만. 만족스럽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이유인즉 그런 규칙들은 아마도 또한 진정한 명제들일 터이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한 새로운 표현에게, 자연법칙들은 그렇게 정의(定義)되어야 해서 사이비-서술들로서의 자연법칙들의 특징이 의심의 여지없이 표현된다는 요건이 추가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분석의 도달점은 일관적인 실용주의의 공식화였다: 그 분석은 원칙적으로 단지 잠정적인 평가일 수 있기 때문에, 자연법칙들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인) 진리 가치들의 할당일 리가 없는데 그 진리 가치는 진정한 명제들에게만 귀속될 수 있다.
여전히 고도로 불확실하고 바뀌는 문제 상황에 대한 더 구체적인 규정을 탐구함에서, 분석은 “순전히 실용적 구축물들”이라는 그리고 “도구와 도식”이라는 그리고 이어서 서술들이 지닌 정보에 대한 논리적 도식들이라는, 다시 말해서, 서술 함수들의 집합이라는 개념들에 도달했다.
자연법칙들은 명제적 함수들인가? (첫 번째 사이비-서술 입장, 23절.) 그렇게 표현된 문제의 함의들에 대한 개관을 얻기 위하여,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토론이 잠정적으로 배척되었다. 당시 착수된 확대된 여담은 두 가지 상당히 긴 부분들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부분은 (24-30절들) 자연법칙들이 명제적 함수들인지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규약주의에 의하여 제기된 문제들을 다루었다. 두 번째 부분은 (31-35절), 귀납의 문제에 관하여 근본적인 구분인 엄격한 전칭 명제들과 단칭 명제들 사이의 구분을 확보하기 위하여, 첫 번째 부분에서 토론된 함의와 일반적인 함의라는 기호논리학적 개념들로부터 시작하였다.
분석이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분석은 우리가 중단했던 지점으로, 다시 말해서, 첫 번째 사이비-서술 입장으로 그리고 다음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연법칙들은 명제적 함수들인가?
규약주의에 대한 토론이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낳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토론은 몇 가지 다소 현저한 결과들을 낳았다.
그 토론은, 명제적 함수들로서의 자연법칙들이라는 구상이 지식에 관한 규약주의적 이론에 가깝고 따라서 경험론자에게는 수용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이 사이비-서술 입장은, 겉으로 보이는 자체의 모든 논리적 정밀성에 대하여, 자연법칙들의 사이비- 서술 특징을 확립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이론의 공리들(axioms)이 아니라 공리들(axioms)로부터 도출된 정리들(theorems)인 저 자연법칙들은 사이비-서술들이 아니다 (그러나 28절의, 여하한 규약주의적 자연법칙들처럼, 분석판단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조정적 정의(定義)들과 결합하여 고려되는 명제적 함수들은 진정한 경험서술들로서 간주되어야 해서, 명제적 함수의 유용성을 설정함으로 인하여 사실상 명제적 함수에 논증들의 특정 영역이 할당되지 않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적절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이 단지 표면적으로만 명제적 함수이라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실제로 명제적 함수는 진정한 서술이다 (29절 참조).
요컨대 우리는, 규약주의가 지닌 문제들에 대한 분석이 자연법칙들이 지닌 사이비-서술 특징에 관한 우리의 회의론을 강화시켰을 따름이라고 말해야 한다. 심지어 명제적 함수들과 같은 그런 정확한 논리적 (기호논리학적) 구축물도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불안한 토대들을 강화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 중 어느 것도 비판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이 의심들은, 의심들이 겨냥하는 입장들만큼 거의 모호하고 비구체적이다. 그리하여 이 의심들은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여하한 근본적인 비판으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그런 근본적인 비판은 완전히 다른 장소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근본적인 비판의 공격들이 집중해야 할 요점을 다음 절에서만 도달될 것이다. 여기서는 비판이 궁극적으로 여하한 형태의 사이비-서술 입장들을 겨냥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비판을 가능한 한 일반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의 고찰들이 지금까지 의문시했던 사이비-서술 입장들은 수용될 수 있는 입장들로서 (물론 일시적으로: 그 입장들이 근본적인 비판에 의하여 오류로 판정될 때까지만) 명시적으로 인정될 것이다.
나는 특히 다음 사이비-서술 입장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 입장들은 (내가 믿는 바대로) 사실상 옹호를 받았다.
1. 자연법칙들은 명제적 함수들이다 (아마도 카르납[Carnap]에 의하여 옹호되는 견해; 23절 참조). 이 입장은 반대가 불가능한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 입장은 단지 한 가지 것을 전제한다 (게다가 이 입장은 그것을 전제해야 한다): 자연과학에 의한 이 명제적 함수들에 대한 평가는 그 함수들에게 여하한 확정적인 진리 가치들을 할당할 수 없다는 것.
2. 자연법칙들은 명제적 함수들의 적용에 관한 실용적 규칙들과 연계하여 고려된 명제적 함수들이다. 이 견해는 경험론에 더 근접할 터이다; 왜냐하면 이 실용적 규칙들은 규약주의적 해석을 배제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 규칙들인 아마도 조정적 정의(定義)들과 동일할 터이라는 (그리하여 명제적 함수들은 진정한 서술들과 동일할 터이라는) 명백한 반대의견은 고려되지 않을 것이다. 이 견해가 부인될 수 없는 사이비-서술 입장을 야기한다는 것은 잠정적으로 전제될 것이다. 명제적 함수들이 (도식들로서) 도구들과 일치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명제적 함수들의 적용에 대한 실용적 규칙들은 우리가 도구들을 사용하여 얻는 실제적 지시사항들과 일치한다. 그런 지시사항들은 실제적으로 유용하거나 실제적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지칭될 가능성이 높지만, 확정적으로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이 입장을 이용하여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슐릭[Schlick]이 아마도 “서술들의 변형에 관한 규칙들”로써 의미했을 것을 해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3. 그러나 자연법칙들은 혹시 명제적 함수들과 관련이 없는가? 비판이 가능한 한 일반적이 되기 위하여, 인정되는 바와 같이 다소 모호한 반면 다른 것들 모두를 포함하는 사이비-서술 입장을 비판은 겨냥할 것이다. 이것은, 그 관점에 따라서 자연법칙들이 원칙적으로 잠정적인 방식으로만 평가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심지어 더 많은 정확한 정의(定義)를 받을 수 없지만 여하한 경우에도 진정한 서술인 “구축물들”인 관점이다.
비판이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를 오류로 판정한다면, 비판은 모든 다른 입장들도 또한 오류로 판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비판이 오직 이 가장 일반적인 표현에 집중하는 것은 충분할 것이다.
검토될 구축물들의 사이비-서술 특징에 관한 우리의 의심들은, 그리하여, 당분간 방치될 것이다. 근본적인 비판이 결정될 다음에만, 이 의심들이 정당화되었는지 아닌지가 명백해질 것이다.
37. 자연법칙들의 평가에 대칭인가 비대칭인가?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비판은 내재적 비판일 것이다. 이 절에서 연역주의적-경험론적 입장을 이용하는 목적은 그 입장의 장점들 대(對) 사이비-서술 입장들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의도는,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출발해야 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뿐이다. 이유인즉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관점이 옳다면, 그 관점을 모든 다른 관점들에 대한 비판의 실마리로 사용하는 것이 또한 틀림없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적이고 명료한 방식으로 옳지 않은 관점들이 올바른 관점으로부터 이탈하는 지점은, 옳지 않은 관점들의 내재적 모순들을 밝히려고 노력하는 비판에 대한 최고의 출발점이다 (9절 또한 참조).
그런 실마리 혹은 그런 지침은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비판의 경우에 거의 필수불가결하다. 우리가 평범한-서술 입장들로부터 계속 움직였기 때문에, 난제들은 부단히 증가했다. 확률 입장들은, 사이비-서술 입장들은 훨씬 더 많이 그랬는데, 비판이 그 구축물들에게 다소 더 명료한 윤곽을 부여하려고 노력함으로써 틀림없이 시작하는 불완전하고 구체적이지 못하고, 내가 말하고
싶은 바, 확실한 형태가 없는 구축물들로 판명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논증들의 일관적인 추구가 야기하는 흔히 완전하게 복잡한 문제들을 제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터이다. 이 지점까지의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분석은, 다른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한 가지 것을 밝혔다: 실마리나 발견 학습적 원리로 인하여 우리가, 반대자가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요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 실제적 요건; 우리가 반대자를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할 바로 그 때 반대자가 사라지는 대신에 굳건하게 서있는 곳 – 페르귄트의 “야윈 사나이”처럼.
이 시점에서, 나는 나의 설명 방식을 다소 더 주관적으로 만들어,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나의 비판으로 나를 이끌었던 고찰들을 보고할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슐릭(Schlick)의 사이비-서술들에 – 그의 “서술들의 변형에 관한 규칙들” - 대하여 들었을 때, 이것은 단지 의미론에 관한 논쟁이 될 수 있을 터이라는 것이 나에게 즉각적으로 분명했다; 우리가 자연법칙들을 “서술들”로 부르거나 혹은 “사이비-서술들”로 부르는지는 실제적 문제들에 대하여 큰 차이점이 없다.
슐릭(Schlick)의 접근방식에 관하여 내가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발견한 것은, 그가 연역주의에게 다소 중요한 양보들을 했다는 것이었다. “서술들의 변형에 관한 규칙들”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자연법칙들의 목표와 중요성은 주로 예측들의 표현에서, 다시 말해서, 단칭 경험서술들을 연역하는 가능성에서 보인다. 그러나 나는 자연법칙들의 사이비-서술 특징에 대한 강조가, 귀납주의적 편견이 아직 배척되지 않았다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사이비-서술”이라는 용어는, 슐릭(Schlick)이 엄격한 전칭 서술들은 없고 다만 단칭 경험서술들만 있다는 엄격한 실증주의에 여전히 동의했다는 것만을 의미할 수 있을 터이다. 그 자신이, 엄격한 실증주의적 입장은 과학의 실제 과정들과 일치하지 않아서 자연법칙들의 실제 역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서술들의 변형에 관한 규칙들”을 만들어내야 했다.
자연법칙들을 “서술들”로 지칭하는 것에 관한 의미론적 논쟁은 내가 보기에 다소 매력이 없다. 사이비-서술 입장이 자체의 부분적으로 연역주의적 접근방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본적으로 귀납주의적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입장 안에서 연역주의적 관점과의 실제적 갈등을 발견하는 것이 틀림없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다면 사이비-서술 입장은, 귀납주의를 괴롭히는 근본적인 모순에서, 다시 말해서,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에서 틀림없이 침몰한다.
첫눈에 보기에, 그런 갈등을 밝히는 희망이 없는 듯이 보였다. 사이비-서술 입장들은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를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창조된 인상을 준다.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는, 경험이 실제로 뒷받침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에 대한 토대로 경험을 사용하는 시도가 실행될 때마다 항상 일어난다. 사이비-서술 입장들은 물론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 사이비-서술 입장들은 항상 자연법칙들의 잠정적 유용성만을 주장하며, 사이비-서술 입장들은 엄격한 보편적 서술들에 대한 최종적 정당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연역주의적 입장과 완전히 일치한다.
정말로 슐릭(Schlick)은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모든 난제들을 극복했다고 또한 믿는다:
“왜냐하면 귀납의 문제는 실제에 관한 전칭명제들에 대한 논리적 정당화의 문제에 놓여있기 때문인데, 전칭명제들은 항상 개별적 관찰들로부터의 확대적용들이다. 우리는, 흄(Hume)이 그러한 바와 같이, 전칭명제들에 대한 논리적 정당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전칭명제들은 실제적 명제들이 아니기 때문에 전칭명제들에 대한 한 가지 논리적 정당화도 있을 리가 없다.”
슐릭(Schlick)의 입장은, 결국, 실용적 표현 방식으로 변경된 연역주의적 입장일 수 있을 터인가?
나는 두 가지 입장들을 그 입장들의 특별한 표현들은 고려하지 않고 검토하지만 다만 그 입장들의 실제적 차이점들에 관하여 고려하여 검토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이렇게 했을 때 나는 다음 것을 주목했다: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견해는, 전칭명제들에 대한 평가에서 확연한 비대칭에 의하여 구분된다.
왜냐하면 단칭 경험서술들은 원칙적으로 확정적으로 검증되거나 오류 판정될 수 있는 반면, 이것이 보편적 경험서술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로 보편적 경험서술들은 (연역의 추정들로서; 31절 참조) 확정적으로 오류 판정되거나 최종적인 부정적 진리 가치가 할당될 수 있지만 [우리는 틀림없이] 긍정적인 진리 가치를 [보편적 경험서술들에게 귀속시켜서는] 결코
안 된다: 긍정적 가치는 원칙적으로 부정적 가치와는 다른 종류이다; 긍정적 가치는, 말하자면, 아마도 “입증 가치(corroboration value)”로 (단어들은 여기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칭될 실용적 가치이다. 여하한 경우에도, 그런 가치는 원칙적으로 잠정적으로만 자연법칙에 귀속될 수 있다.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사이의 이 비대칭과 대조적으로, 모든 귀납주의적 견해들은 대칭을 보인다. 평범한-서술 입장들은, 자연법칙들이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반면 확률 입장들은 자연법칙들이 개연적이거나 비개연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입장 모두는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에 의하여 (혹은 선험론에 의하여) 패퇴한다.
“사이비-서술 입장”도 또한 이 대칭을 보인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찾고 있던 연역주의적-경험론적 입장으로부터의 실제적인 이탈이다. 이것이 옳다면, 그 대칭은 틀림없이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경우에서 또한 내부적 모순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이 모순을 찾아내는 것은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결정적인 시험이 된다.
그러나 혹시 우리는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비판적 요점을 보다 정확하게 명시할 수 있을까? 이 목적에 관하여, 우리에게는 이 대칭이 의미하는 차이점을 보다 가깝게 바라볼 필요만 있다.
평범한-서술 입장들은 (그리고 확률 입장들) 자연법칙들에게 확정적인 부정적 가치들이 할당될 수 있다는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견해에 동의한다. 그리나 평범한-서술 입장들은 자연법칙들에게 확정적인 긍정적인 가치들을 귀속시키려고 또한 노력한다. 이 지점에서 평범한-서술 입장들은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견해로부터 갈라지고, 이 지점에서 평범한-서술 입장들은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에 의하여 생성된 모순들에게 즉각적으로 종속된다.
사이비-서술 입장들은 긍정적 평가와 관련하여 연역주의와 일치한다. 두 가지 입장들 모두에게는 긍정적인 평가가, 원리의 문제로서, 잠정적인 평가이다. 평가의 긍정적인 면에 관한 한, 사이비-서술 입장들에서 우리는 사실상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나 다른 내부적 모순의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부정적 평가와 관련하여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견해로부터의 일탈이 있다: 사이비-서술 입장들은 자연법칙들에 대하여 여하한 확정적인 부정적 가치들을 수용하지 않는다 – 보편적 경험서술들에 대하여 확정적인 경험적 오류판명 가능성이라는* 가능성을 주장하는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견해와 대조적으로.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견해가 옳다면, 귀납의 문제에 특징적인 모든 저 내부적 모순들이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경우에도 또한 틀림없이 나타나는 것은 이 요점에서, 다시 말해서, 자연법칙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문제에서이다. 그리고 이 난제들을 형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틀림없이 가능하다. “진리 가치”나 “실용적 가치”라는 용어는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부정적인 평가가 항상 잠정적일 따름인 긍정적 평가와 동일한 무게를 지니는지 (“평가의 대칭”) 혹은 부정적인 평가가 긍정적인 평가보다 더 많은 무게를 지닐 수 있는지 혹은 부정적인 평가가 긍정적인 평가에 대하여 특별히 특권을 지닐 것인지의 (“평가의 비대칭”) 문제이다.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함으로 – 평가들의 대칭인가 아니면 비대칭인가? - 인하여 비판은 현재로서, 자연법칙들은 “서술들”로서 해석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사이비-서술들”로서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으로부터 독립적이 된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인하여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 가능해진다.
38. 보편적 서술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 사이비-서술들에 관한 엄격하게 대칭적인 해석에 대한 비판. 슐릭(Schlick)에 의하여 옹호되는 사이비-서술 입장은, 자연법칙들에 대한 긍정적 및 부정적 평가와 관련하여 대칭적 관점을 명백하게 채택한다. 긍정적 및 부정적 평가들은, 예외 없이, 잠정적으로만 이루어진다.
첫눈에 보기에, 사이비-서술들에 대한 이 가장 단순한 해석은 – 나는 그 해석을 “엄격하게 대칭적인” 해석이라고 부를 것이다 –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으로 틀림없이 보인다. 이유인즉 비대칭이 수용된다면, 자연법칙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원칙적으로 긍정적인 평가와 종류에서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자연법칙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잠정적일 리가 없고 최종적일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 그렇다면 아마도 법칙들에게 진리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다시 말해서, 법칙들은 진정한 서술들이라는 것이 또한 틀림없이 인정된다 (이 문장 앞에서 두 개의 절이 “다시 말해서”라는 표현 없이 두 개의 문장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하이픈은 쉼표로 대체함을 옳을 듯하다: 한글번역자). 그러나 이 인상(印象: impression)은 너무 제한적일 것이다. 그리하여 사이비-서술들에 관한 엄격하게 대칭적 해석에 대한 반박은 사이비-서술 입장들을 완벽하게 패퇴시킬 수 없다고 추정될 것이다. 그 입장들은 필요하다면 비
대칭적 해석과 양립할 수 있을 정도로 틀림없이 충분히 신축적이다 (혹은 모호하다). 정말로 심지어 슐릭(Schlick)의 발표에서도 우리는, 이런 방향들을 가리킬 암시들을 발견한다: 원칙적으로 잠정적으로만 평가되어야 하는 규칙들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말해서, “엄격하게 대칭적인 규칙들” 혹은 “일관적인 실용주의”의 의미에서 해석되는 규칙들의 도움을 받아서), 어떤 비대칭이 또한 표현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더 큰 무게 혹은 특별한 “특권을 지닌 자격”이 몇 가지 부정적인 평가들에게 할당되어야 한다고 요구함에 의하여 이룩될 것이다.)
사이비-서술들에 대한 이 “비대칭적” 해석들은 다음 절들에서 검토될 것이다. 그 해석들에 대한 비판으로 인하여, “평가의 대칭이나 비대칭”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사이비-서술 입장들은 사실상 더 이상 귀납의 전형적인 모순들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엄격하게 대칭적인 사이비-서술 입장은 엄격한 실증주의의 입장과 동일하다는 것이 – 이 절에서 여전히 알기 어려운 것 – 또한 밝혀질 것이다 (41절에서); 특별한 표현들과 해석들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물론 형식적으로만 동일한.
우선, 비판은 – 이 절에서 그리고 후속되는 두 가지 절들에서 – 순전히 형식적인 비판일 것이다. 그 비판은 내재적이다 (그리고 그 비판은 독립적으로 모든 특별한 표현들에 관한 문제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비판이 “진리 가치들”에 관하여 말할 때마다, 선호된다면 우리는 항상 “확정적 혹은 특별히 특권을 지닌 유용성 가치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칭 명제들” 대신에 “사이비-서술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터이다. 이것은 논증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터이다. 그리고 이 대체가 대부분 발표에서 실행되지 않을 것은 간단함과 명료성을 위해서이다.
이 절에서는 다만 사이비-서술들에 대한 엄격하게 대칭적인 해석만 비판될 것이다.
자연법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견해와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대립을 야기하지 않는다. 자연법칙들과, 일반적으로, 엄격한 전칭 경험서술들은 – 진정한 명제들로서 간주되든 아니면 사이비-서술들로 간주되든 – 원칙적으로 결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없다. “후속적 관찰들은 결국 항상 전제된 법칙을 오류로 판정할 수 있다...” (슐릭[Schlick]).
그러나 부정적인 평가는 어떠한가?
조용한 숙고하면, 우리는 아마도 비대칭이 (부정적인 평가에 부여된 특별한 자격) 진지하게 논의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논증에 의하여 확정적인 긍정적 평가가 논의되는 논증 자체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후속 관찰들”이 “전제된 법칙을 오류로 판정”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경험이 조금이라도 법칙을 반증할 수 있다면, 경험은 또한 법칙을 확정적으로 반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어떤 경험과 분명하게 불일치하는 자연법칙을 결코 채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상 연역주의의 견해이기도 하다.
함의의 개념에 대한 토론은 (31절), 연역의 전제들이 그 전제들로부터 연역된 결과들에 (예측들) 대한 검증에 의하여 회고적으로 결코 검증될 수 없는 반면 그 전제들은 결론들에 대한 오류판정에 의하여 소급적으로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기호논리학적 표현 방식으로: 함의가 주어지면, 그리고 함유절이 거짓이면 조건절의 거짓이 뒤따른다.)
자연과학은 이 절차를 (부정 논법[modus tollens]) 폭넓게 이용한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연역적 논리가 정당화되어 (진정한) 전칭 명제들로서 자연법칙들에게 적용될 것임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은 그리하여 이미 비대칭 주장을 열정적으로 수용한다. 자연과학은, 긍정적인 평가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자격이 부여된 부정적 평가의 형태를 도입한다. 부정적인 평가는 경험서술에서 나온 엄격한 논리적 연역에 의하여 필수적이 된다; 부정적인 평가는, 연역적 추론들이 소위 “귀납적 추론들”로부터 구분되는 것과 동일한 정도로 긍정적인 평가로부터 구분된다. (그래서 연역의 정당화가 의문시되지 않을지라도, “귀납적 추론들”의 수용불가능성은 연역적 견해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토대가 된다.)
경험들로 인하여 결코 자연법칙들이 분명하게 부정될 수 없다는 반대의견은 여기서 (이런 형태로) 토론될 수 없다. 그 반대의견은 규약주의를, 다시 말해서, 자연법칙들은 선험적으로 참이라는 견해를 직접적으로 낳는다 (정확하게경험들로 인하여 자연법칙이 부정될 수 없기 때문에); 경험론적 관점에서, 그 반대의견은 전혀 내용이 없는 자연법칙들을 낳는데, 그 자연법칙들을 우리는 사이비-서술들로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혹시 제기될 유사한 반대의견은 더 상세하게 토론되어야 한다.
우리는, 추론들의 전체 범위가 통상적으로 예측들의 연역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추론들은 일반적으로 개체적인 “자연법칙”으로부터가 아니라 서술들의 체계 즉, “이론”으로부터 연역된다. 예측들에 대한 회고적 오류판정은, 전체로서 고려되는 연역의 전제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오류판정은 추정들의 “결합”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것은, 개체적 추정이 오류로 판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추정들 가운데 적어도 한 가지 거짓 서술이 있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논리적 과점에서, 연역된 예측들이 오류로 판정되면 우리는 연역의 전제들에 포함된 추정들 중 어느 추정이 거짓인지 확신을 하지 못한다.
이런 종류의 고찰들로부터, 자연법칙들에 대한 실제적인 오류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이 내려졌다 (예를 들어, 뒤앙[Duhem]에 의하여). 단지 전체로서 고려되는 이론만 배척될 수 있는데, 이것은 이론의 모든 주장들이 배척되었다는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개별적인 명제들이나 오류로 판정된 이론의 부분들이 나중에 (또는 다른 맥락에서) 다시 나타날 것에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들은, 다시 말해서, 확정적으로 오류판정된 것으로서 간주될 수 없다.
우리의 분석의 결과들은 (다시 말해서, 자연법칙들은 검증될 수 없다는 실증) 뒤앙(Duhem)의 논증이 지닌 힘을 훨씬 더 강력하게 만드는 듯하다. 자연법칙들에 대한 검증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원칙적으로 이론의 추론에 대하여 그 추론이 참인지를 알 수 있을 터이다. 이론이 자체의 예측들에 대한 오류판정에 의하여 전체적으로 오류로 판정된다면, 우리가 한 가지 추정을 제외하고 모든 추정들이 참이라는 것을 아는 한 가지 경우가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문장의 원문은 If a theory is falsified as a whole by the falsification of its predictions, then there might be a case where we know that all assumptions but one are true인데 종속적인 조건절에서 is falsified라는 직설법을 사용하고 주절에서 might be라는 가정법을 사용하여 어법에 어긋나는 문장이 되었다. 종속적인 조건절 동사를 were falsified로 바꾸거나 주절 동사를 may be로 바꾸어 전체적으로 가정법으로 표현하거나 직설법으로 표현함이 옳다. 그렇게 원문을 교정한다면 한글 번역 내용도 다소 달라진다: 한글번역자); 그렇다면 이 추정은 오류로 판정될 터이다. 그러나 우리는 추정들 중 한 가지 추정도 최종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 지식은 어
떤 추정도 확정적으로 오류로 판정될 수 없다는 견해를 확인하는 듯하다.
상황이 이와 같다면, 대칭적 견해는 비대칭적 견해보다 우월할 터이고, 사
이비-서술 입장은 그리하여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견해보다 우월할 터이다. 그러나 상황은 다르다.
지금으로서는 자연과학에서 실제적 이론의 형식을 고려하지 말자. 우리가 문제를 일반화하여 일반적인 전칭 경험서술들의 오류판정 가능성을 조사한다면, 경험을 토대로 적어도 몇 가지 간단한 전칭 경험서술들에 대하여 확정적인 부정적 평가를 하는 데 우리가 정당화된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있을 리가 없다.
“모든 책들은 붉은 가죽으로 제본된다”라는 서술은 의심할 나위 없이 전칭 경험서술이다, 그리고 그 서술은 의심의 여지없이 거짓이다. 오류판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오류판정은 간단하다. 이 서술은 “이것은 책이다”라는 추가적 추정과 결합하여, “이 책은 붉은 가죽으로 제본된다”는 예측의 연역에 대하여 전제들을 제공한다. 이 예측은, 내가 오류판정을 할 수 있는 예측이다. 그리하여 추정들 중 한 가지 추정은 틀림없이 거짓이다. 두 번째 추정은, 확정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단칭 경험서술이었다. 그리하여 다른 추정은 확정적으로 오류 판정된다.
이 사소한 고찰들에 반대하여 반대의견들이 제기될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하한 반대의견도 틀림없이 단칭 경험서술들의 최종적 검증가능성을 겨냥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런 의심들은 귀납의 문제에 관한 범위를 벗어나서, 9절에서 이미 설명된 바와 같이, 진지하게 고려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보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그 보기는, 먼저, 전칭 경험서술들을 오류로 판정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모든 인간은 검은 머리털을 지닌다”, “모든 전자들은 나안으로 볼 수 있다”, “직책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 직책과 관련된 지능을 지닌다”와 같은 서술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경험에 의하여 부인된다. 보기가 우리에게 두 번째로 알려주는 바, 예측들을 연역하기 위하여 우리가 확정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단칭 경험서술들을 추가적 추정들로서 도입해야 한다면 전칭 경험서술은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결과를 다음 방식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 다른 추정들의 진실성이 어떤 방식으로 확보될 수 있다면, 단 하나의 전칭 경험서술은 그 전칭 경험서술로부터 연역된 예측들에 의하여 회고적으로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추정들이 단칭 경험서술들이 아닌 반면 분석판단들이라면 이것은 또한 사실일 것이다; 예를 들어, 정의[定義]들.)
많은 사례들이, 이런 종류의 과학적 서술들이 또한 있다는 것과 개별적 “자연법칙들”은 확정적으로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인용될 수 있을 터이다. 가장 잘 알려진 사례들 중 한 가지 사례는 갈비니(Galvini)의 이론이다 (볼타[Volta]에 의하여 반증된). 갈비니(Galvini) 이론이 지닌 활력론적-형이상학적(vitalistic-metaphysical) 요소들을 우리가 무시한다면, 우리는 다음 내용을 지닌 자연법칙을 경험한다: 문제의 (전기적) 과정들은 살아있는 동물들로부터 (또는 식물들) 도출된 물질들에서 비롯된다. 볼타(Volta)는 문제의 실험적 물질들을 무기 유체(無機 流體: inorganic fluids)들로써 (그는 무기 유체들을 사용하는 저 특징적인 과정들 다시 만들어냈다) 대체함으로써 이 법칙을 반증했다.
이론의 어느 전제들을 반증이 언급하는지를 우리가 결코 알 수 있기 때문에 자연법칙들은 결코 최종적으로 반박될 없다는 반대의견은, 수용될 수 없다. 그 반대의견은 일반적으로 중요하지도 않고 크게 중요하지도 않다.
이 (뒤앙적[Duhemian]) 반대의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찮지 않다. 그 반대의견은, “자연법칙”에 대한 보다 정확한 개념들을 그리고 “(과학적) 연역의 전제들”을 특정 방향으로 표현하는 것을 고취한다.
그 반대의견이 적용될 터인 많은 이론들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인정된다. (고전적 사례는 뉴튼의 빛 방사 이론이다. 푸코[Foucault]에 의한 그 이론의 오류판정에도 불구하고, 호이겐스[Huygens] 이론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뉴튼적 견해들이 빛에 관한 몇 가지 현대의 양자-역학적인 이론들에 다시 나타났다.) 이 “자연법칙들”의 위상으로서 그런 이론의 문맥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위상은 무엇인가?
개별적으로 고려되어, 이 추정들은 물론 확정적으로 오류로 판정될 수 있지 않다 (우리가 이론으로부터 적어도 자체가 지닌 더 의심스러운 전제들을 분리하고 [그리고 그 전제들을 격리하여 시험할] 수 없다면). 그러나 모든 추정들의 “결합”인 전체 이론은 여하한 경우에도 확정적으로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반대의견에 대한 토론은 다음 결과를 낳는다. 특정 조건들 하에서, 복잡한 이론 체계들은 단지 전체들로서만 (혹은 커다란, 일관적인 부분들로서만) 확정적으로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류판정은, 이 형태로의 이 이론은 틀림없이 확정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배척된다는 것만을 의미할 수 있다. 몇 가지 요소들은, 물론, 다시 나타날지도 (다른 맥락에서) 모른다.
연역주의적 관점에서, 이 결과는 자명하다. 이 결과는 자연법칙들을 연역과
관련된 전제들로서, 예측들이 연역될 수 있는 엄격한 전칭 명제들로서 간주하는데 그것들은 반대로 경험에 의하여 시험될 수 있다. 다른 추정들을 이용하지 않고는 어떤 예측들도 연역될 수 없는 (의존적) 추정은 (그 추정만으로는 너무 모호하기 때문에) 이 다른 추정들이 있어야만 전제로서 (또는 자연법칙으로서) 취급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전칭 명제는 이 추정들의 결합이다. 전칭 명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비대칭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칭 명제는 확정적으로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
현대 물리 이론들의 발전은, 확정적인 예측들에 대한 오류판정이 전체 이론 체계들의 붕괴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발전은 또한 순전히 논리적인 고찰들에 의하여 물리학자가 이론적 체계로부터 오류로 판정된 전제들 분리하려고 노력할 수 있음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을 생각하라) 보여준다. 모든 이 고찰들은 후건부정식(modus tollens)의 방향으로, 다시 말해서, 비대칭적으로 나아간다.
과학적 발전의 두드러진 특징인 진보적인 근사치들로서의 자연법칙들의 특징은, 평가에서 이 비대칭이 없다면, 상상 불가능할 터이다. 긍정적인 평가들이 내재적으로 잠정적이라는 것은 과학이 침체되지 않는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특권을 지닌 부정적 평가의 보충적 원칙만 이 과정 속으로 질서의 요소를 도입할 수 있다. 그 원칙이 없다면, 철학에서만큼 자연과학의 체계들 가운데 논란이 있을 터이고 혼란이 있을 터이다. 이유인즉 질서는 가설들의 긍정적 구축에서 만장일치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논란이 주요 특징이 되어, 완전한 혼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전체적인 과학은 경험을 비판하는 것을 수용한다. 특권을 지닌 부정적 평가로 인하여 쓸모없는 이론들의 배척과 제거에서 균일성이 가능해진다. 특권을 지닌 부정적 평가로 인하여 선택이 가능해지고, 점점 더 우수한 적응 다시 말해서 진보적인 근사치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소유하지 못할지라도, 진리는 적어도 진리가 발견될 수 없는 저 장소들을 발견한 중요한 것이다”라고 마르탱 뒤 가르[Martin du Gard]의 장 바루아[Jean Barois]는 말한다.)
자연과학은 자연법칙을 결코 최종적으로 검증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자연과학은 자연법칙을 패퇴시키는 새로운 경험을 결코 무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논증들은, 순전히 논리적 방식으로, 엄격하게 대칭적인 사이비-서술 입장을 반증하는 것을 전혀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 입장에 대한 순전히 논리적인 반증은 엄격한 실증주의에 대한 논리적 반증만큼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나는 내부적 모순을 밝히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단지 이 입장이 과학의 실제적 절차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판이 “초월적인” 비판인 까닭이다.) 그리고 엄격한 실증주의의 경우에서처럼, 엄격하게 대칭적인 사이비-서술 입장이 인정되는 바와 같이 모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공허한 철학적 이념처럼 보인다. 긍정적인 평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특별한 특권을 지닌 위상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과학에 대한 구상과는 다른 자연법칙에 대한 구상을 지닌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대칭적인 사이비-서술 입장을 구축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법칙들에 대하여 특권을 지닌 부정적 평가들을 합당하게 다루고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실제적 절차들을 합당하게 다루는 입장.
39. 사이비-서술들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내부적 모순들은 사실상 귀납의 문제가 지닌 모순들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이비-서술 입장들을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사이의 비대칭과 관련하여 해석하려고 노력한다면 매우 분명하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앞 절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사이비-서술 입장들이 자연과학의 실제적 방법들을 합당하게 다루려면 그런 해석이 틀림없이 시도된다.
그리하여 그런 시도가 필수적임을 밝히고, 그렇게 하면서 사이비-서술 입장들이 평범한-서술 입장들과 똑 같은 형식적인 난제들에 직면한다는 증명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앞 절의 중심적인 임무였다.
엄격하게 대칭적인 해석이 어떤 면들에서 엄격한 실증주의의 평범한-서술 입장과 유사한 반면, 두 가지 비대칭적 해석들은 두 가지 다른 평범한-서술 입장들에 대하여 훨씬 더 명시적인 유사점들을 보여준다. 현재의 절에서 시도된 해석은 (사이비-서술들에 대한 “소박한” 해석) 순진한 귀납론과 (베이컨) 일치한다: 이 시도는 또한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에 의하여 패퇴한다. 그리고 이 회귀를 회피하려는 시도는 (다음 절에서) 선험론적 해결책을 낳는다.
이 토론의 가치는 사이비-서술 입장과 평범한-서술 입장 사이의 유사점에 놓여있다: 토론은 모든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비판을 낳으며, 동시에 그 입장들의 해석에 대한 실마리들을 제공한다.
사이비-서술들에 대한 “소박한” 해석이 먼저 토론될 것이다. 비판은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에 대한 증명에 놓여있는데 내재적인 것으로서 다시 기술될 수 있다. (“소박한”) 입장은 그런 사이비-서술 입장을 넘어가지 않고도 구축된다. 그 입장은, 사이비-서술 입장들에게 이용 가능한 수단들을 써서, 자연법칙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 사이의 비대칭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것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저런 형태로 특별하게 특권을 지닌 것으로서 부정적인 평가들을 골라내려는 시도로부터 나온.
나는 사이비-서술 입장들을 기술하는 데 슐릭(Schlick)에 의하여 사용되는 특별한 표현들을 일관적으로 채택할 것이지만 다만 나의 비판이 내재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인용문들의 이용으로 인하여, 슐릭(Schlick) 자신이 그런 비대칭적 해석을 개진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인용문들의 이용에는 제시되는 입장이 슐릭(Schlick)의 접근방식으로부터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의도만 있다 – 다시 말해서, 비대칭에 대한 (초월적) 요구가 추가된다면.
슐릭(Schlick)에 따르면, 자연법칙들은 “엄격한 분석이 밝히는 바와 같이, 심지어 서술의 특징도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서술들[의] 변형에 관한 ‘규칙들’을 오히려 대변한다”.
자연법칙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항상 잠정적일 따름인데, “후속적 관찰들이 항상 그 규칙이 부적절하다고 증명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법칙의 유용성은 결코 순전히 그리고 단지 절대적인 방식으로 밝혀질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하여 표현된다.
이 사이비-서술 입장과 관련하여, 자연법칙들은 실용적인 규칙들로서 해석될 수 있거나, 선호된다면, 강행법규들(imperatives)이나 공준(公準: postulates)들로서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물론 이 표현들을 철학의 합리주의적 체계에서 사용되는 것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공준(公準: postulate)은, 이 개념이 이전 철학들에서 발생하는 의미에서... 어떤 상황 하에서도 고수되어야 하는 규칙을 의미한다 (슐릭[Schlick]). 자연법칙들은 물론, 자연법칙들에 대한 평가가 조건적인, 잠정적인 평가이기 때문에, 그런 공준(公準: postulates)들일 리가 없다.
이 사이비-서술 입장 안에서, 비대칭을 창조하기 위해서 혹은 부정적 평가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기 위하여 그 입장 자체에게 이용 가능한 수단을 이용하여 한 가지 시도가 이제 실행될 것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Within this pseudo-statement position, an attempt will now be made, using the means available to the position itself, to create the asymmetry or to confer privilege on negative evaluations인데 분사구문 using the means available to the position itself의 주어가 an attempt가 될 수 없으므로 분사구문의 주어를 적시하여 while I using ~으로 표현하거나 종속절로 만들어 while I use ~로 표현하여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한글번역자). 이 목표에 대하여, 부정적인 실용적 평가를 함에서 우리는 이 입장이 따르는 절차에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규칙이나 공준(公準: postulate)의 비-유용성에 대한 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자연법칙들 자체가 유용성의 한계들을 결정한다: 이것은 상황의 새로운 요소를 구성한다. 공준(公準: postulates)들은, 고전적 철학의 의미에서,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모든 공준(公準: postulate)은 경험으로부터 습득된 반대-규칙에 의하여 제한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공준(公準: postulate)은 부적절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어서 이런 방식으로 제거될 수 있다” (슐릭[Schlick]).
자연법칙이, 평범한-서술 입장들 중 한 가지 입장들에 의하여 의도되는 바의 의미에서, 오류판정된 것으로서 간주되려면 사이비-서술 입장의 틀 안에서 명백하게 이것은 자연법칙이 “경험으로부터 습득된 반대-규칙에 의하여 제한된 것을; 다시 말해서, 이것은 부적절한 것으로서 인정될 수 있어서 이런 방식으로 제거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은 부정적인 평가일 터이다 – 그러나 그것은 전형적으로 잠정적일 (다시 말해서, 또한 전형적으로 대칭적일) 터이다. 명백하게, 비대칭은“제거”라는 특별히 특권을 지닌 형태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그런 것은 어떻게 “사이비-서술 입장” 안에 수용될 수 있을 터인가? 분명히 규칙으로써, 다시 말해서, “자연과학이라고 지칭되는 저 종류의 활동에 대한 지침”으로써 만이다 (슐릭[Schlick]).
이 규칙 혹은 “지침”은, 특정 경우들에서 (즉, 평범한-서술 입장이 확정적인 오류판정에 대하여 언급할 터인 경우들) 경험으로부터 습득된 반대-규칙들에게는 자연법칙들에 대하여 특별한 무게 혹은 특권이 주어진다고 지시해야 할 터이다; 다시 말해서, 그 지침은 그런 반대-규칙들 자체는 제한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을 따름이라고 요구해야 할 터이다.
그런 지침 자체는 물론 단지 실용적 및 잠정적 특성을 지닐 터이다. 그런 지침은 경험으로부터 습득될 터이지만, 전적으로 자연법칙들이 경험으로부터 습득되는 의미에서는 아니다. 그런 지침은 자연법칙들과 동시에 경험들로부터 습득될 터이다. 그런 지침은, 자연법칙처럼, “과학자가 참인 서술들을 발견하여 특정 사건들을 기대하기 위하여 실제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행동적 규칙”은 아닐 터이다 (슐릭[Schlick]). 대신에 그런 지침은 과학자가 사용하여 자연법칙들이 세상에서 (다시 말해서, 행동적 규칙들의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고 자연법칙의 비-유용성을 기대할 수 있을 터인 행동적 규칙일 터이다. 요컨대 이 지침은 자연법칙들보다 더 높은 유형일 터이다.
“대칭인가 비대칭인가?”라는 문제는 여기서 더 이상 토론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비대칭적 해석만이 토론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례를 통하여 그런 지침이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예시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지침이 없는 곳에서는 우리가 반대-규칙을 폐기하고 이전 규칙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나는 예시하고 싶다.
어떤 사람이 2층 창문 밖으로 뛰어나가지 않고 층계를 걸어 내려가는 실제적인 규칙인 강행규칙을 채택했다. 층계도 삼킨 화제 동안에, 그는 이 규칙이 반대-규칙에 의하여 대체되었거나 무효화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한다. 그는 창문 밖으로 뛴다. 반대-규칙은 큰 유용성으로 판명된다 (이유인즉 그가 생명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지금부터 계속해서 이 매우 유용한 반대-규칙을 특권을 지닌 규칙으로서 유지할 생각을 할 것 같지 않고 (다음 화재까지) 자신의 옛 규칙으로 되돌아가서 층계를 이용할 것이다.
반대-사례가 특권을 지닌 위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과, 어느 경우들에서 자연법칙에 대하여 경험적으로 획득된 반대-규칙이 특별한 특권을 지닌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지침이 우리에게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전혀 자명하지 않다는 것을 그 예시는 보여준다.
우리는 이 요점을 평범한-서술 입장들의 언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것이다: 확정적으로 오류판정된 자연법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으로 판명된 경우들에서 – 그리고 그런 경우들은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 오류로 판정하는 증거는, 그런 지침 없으면, 새로운 경험에 의하여 대체되는 것으로서 간주될 터이다; 왜냐하면 후자(後者)는 법칙의 유용성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런 지침의 필연성이 인정된다면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우리는 이것을 여기서 전혀 문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의 한 가운데 있는 것이다. 문제의 “지침”은 자연법칙보다 더 높은 유형이다. 그 지침 자체가 어느 때고 “제한되”거나 “제거될” 리가 없다는 조건만으로, 다시 말해서 지침 자체가 특권을 지닌 것으로서 취급된다면, “반대-규칙들”이 (오류판정들) 그 지침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특권을 지닌 것으로서 취급됨을 그 지침은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선험적으로 특권을 지닌] “공준(公準: postulates)들”은 “고전적 철학의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으로 지칭되는 저 종류의 활동”에 대하여 그렇게 결정적인 “지침”은, 자체의 특권적 위상을 보장하는 더 높은 유형의 실제적 규칙에 의하여 틀림없이 보호된다, 기타 등등 – 무한정으로.
40. 선험론적 사이비-서술 입장. 앞 절이 – 사이비-서술들에 대한 “소박한” 비대칭적 해석의 제시 – 사이비-서술과 평범한-서술 입장들 사이의 유사점들을 지적하는 기본적 목표를 지녔던 곳에서, 동일한 것이 “선험론적” 해석의 제시인 현재의 절에도 더 한층 강력한 이유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사이비-서술 입장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이 길을 선택할 터이라고 나는 잠시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확률 이론가들이 많이 비방을 받는 선험론적 해석에 이르는 길에서 끝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이 선험론을 간략하게 토론하는 것이 더 안전한데, 이 선험론은 여하한 경우에도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로부터 탈출이 가능한 듯이 보인다.
상황은 충분히 간단하다:
과학의 실제적 방법들이 적절하게 기술되어야 한다는 초월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더 높은 유형의 지침들 중 한 가지 지침이 – 혹은 단지 그 지침들 중 첫 번째 지침 (다시 말해서, 자연법칙들의 수준 바로 위 수준에 있는 지침) - 특권을 지니도록 선험적으로 결정된다. 이런 방식으로, 물론, 이 규칙, 이 공준(公準: postulate), 이 강행법규(imperative)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규칙 혹은 “고전적 철학의 의미에서 공준(公準: postulate)”이 (일종의 정언적 강행법규[categorical imperative]) 된다.
그런 입장을 채택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미 선험론자인 사람은 물론 평범한-서술 입장과 유사한 공준(公準: postulate)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지식을 지닐 수 있다는 보증, 참인 자연법칙들의 가능성에 대한 보증; 그러나 쓸모없는 규칙들은 더 이상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강행법규(imperative), - 말하자면 – 거짓인 사이비-서술들의 가능성을 보증하는 강행법규(imperative)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터이다.
41. 이 지점까지의 비판에 대한 해석; 이론과 실제의 통일성에 관한 언급들. 지난 세 가지 절들의 비판적 논증들은, 사이비-서술 입장들이 꼭 평범한-서술 입장들만큼 귀납을 괴롭히는 위험들에 노출된 것을 밝혔다. 엄격한 실증주의처럼, 단지 엄격하게 대칭적인 사이비-서술 입장만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와 선험적 상황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을 피한다. 그러나 엄격한 실증주의처럼, 사이비-서술들에 대한 엄격하게 대칭적인 해석은 자연과학이 틀림없이 여하한 지식론에게 부과하는 (초월적) 요건들을 적절하게 다룰 리가 없다.
이 결과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언급된 모든 것 이후에, 그 결과는 틀림없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의심들이 이미 19절에서 슐릭(Schlick)의 “규칙들”이 지닌 사이비-서술 특징에 관하여 나타났고, 그 의심들을 불식하려는 모든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히 성공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명제적 함수들도 표면적으로는 순수한 논리학의 구조물들인데 진정한 명제들이라는 조건으로만 유용한 것으로서 평가될 수 있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이비-서술들을 완벽하게 이해
할 수 없었고, 사이비-서술들과 진정한 명제들의 일치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확립하기는 어려웠다. 우리에게는 결정적인 맹공격이 아마도 모면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던 적이 없었다. 그 입장들은 심지어 우리가 그 입장들에 대하여 결정적인 공격을 시작할 수 있기에도 너무 모호했다. 연역주의적-경험론적 해결책과의 비교만이 (37절), “사이비-서술”이나 “명제”에 관한, “유용한”과 “참인”에 관한 언어적 논쟁의 모든 유혹들을 추방하는 자원들을, 그리고 언어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특성에 관한 것으로 보증될 수 있었던 차이점들인 이 입장들 사이의 형식적 차이점들을 추적해내는 자원들을 제공했다.
앞 절들에서의 이 차이점들에 대한 분석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가 지닌 모든 의심들에 대한 확인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결과를 낳았다. 칸트가 잘 알고 있었던 바와 같이, 모든 진정한 과학적 서술, 더욱 특히 모든 자연법칙은 규칙으로서 또는 강행법규(imperative)로서 표현될 수 있고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의 현재 목표들에 대하여) 그 역순도 성립한다.
슐릭(Schlick)이 믿는 바와 같이 자연법칙들은 “평범한 서술들로 가장하고 문법적으로” 나타나는 규칙들이 아니라, 반대로 슐릭(Schlick)의 규칙들은 규칙들로 실용적으로 가장하고 나타나는 진정한 서술들이다.
그 결과들이 그다지 고무적이지 않은 “언어적 비판”에서 당분간 떠나자. 오히려 실제적인 사안들을 토론하자.
슐릭(Schlick)의 자연법칙들은 잠정적으로 외에는 결코 평가될 수 없다. 이 시점에서 사이비-서술들을 진정한 명제들로서 해석하면 (실용적으로 가장하여) 형식적이고 실제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사이비-서술들이 진정한 명제들과 형식적으로 일치될 수 있다면, 그 서술들에게 절대적이고 확정적인 진리 가치들을 할당하는 것이 틀림없이 가능하다.
사이비-서술들이 단칭 명제들에 대한 – 또는 기껏해야 요약 보고서들에 대한 - 실용적 번역들로서 틀림없이 해석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자마자 모순은 사라진다. 모든 요약 보고서에는 정말로 확정적인 진리 가치가 할당될 수 있지만, 보고서 자체는 다만 잠정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증거의 결과로서 대체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확하게 동일한 것이 사이비-서술들에도 적용되고 사이비-서술들에 대한 실용적인 평가에도 적용된다. 사이비-서술이 지금까지 입증되었다면, 이 사실은 결코 바뀔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증거는 물론 사이비-서술이 낡았음을 (잠정적으로) 밝힐 수 있다.
사이비-서술들을 단칭 경험서술들로서 이렇게 해석한 것에 비추어, 사이비-서술 입장은 엄격한 실증주의의 입장과 형식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이 해석이 옳다면 그 해석을 자연법칙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 적용하는 것도 틀림없이 가능한데 그 평가는 (연역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잠정적이다. 그리고 그런 적용은 사실상 가능하다 (정말로, 실제로 필수적이다). 자연법칙에 대한 실용적이고 잠정적인 입증의 정도는 반대론이 불가능한 정도로 잠정적인 보고서로서, 연역된 예측들에 대한 이전 검증들에 관한 보고서로서 해석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미 16절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그 입증의 정도는 자연법칙이 지닌 기본적인 비개연성을 (다른 관련된 요인들뿐만 아니라) 참작하는 평가 보고서로서 해석될 수 있다.
슐릭(Schlick)이 주장하는 “사이비-서술들”은 (그 서술들에 대한 “대칭적” 해석에서) 단지 잠정적인 가치들을 수용하고 그리하여 그 서술들은 단지 요약 보고서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대칭적 견해는 엄격한 실증주의의 견해와 유사한 것으로 뿐만 아니라 엄격한 실증주의의 견해와 사실상 형식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대칭적 견해는 엄격한 실증주의가 이탈하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지점에서 연역주의적 견해로부터 이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슐릭(Schlick) 자신은, 예측들이 요약 보고서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는 논증을 사용하여 엄격한 실증주의에 반대한다 (8절 참조). 이것은 엄격한 실증주의와 슐릭(Schlick)의 사이비-서술 견해 사이의 중요한 실제적 차이점에 해당되지 않는가? 슐릭(Schlick)이 주장하는 “서술들의 변형에 관한 규칙들”은 결국 예측들에 형성에 대한 규칙들로서 상상되었다 (19절 참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은 명제들로부터 명제들을 연역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 전제들이 참인 것으로 추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연역주의적 입장은 이것을 참작한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슐릭(Schlick)은 자신이 주장하는 사이비-서술들로부터 예측들을 연역하는 방법을 밝히지 않았는데, 그 방법은 원칙적으로 틀림없이 유용할 따름이다. 게다가 “서술들의 변형에 관한 규칙들”이라는 표현으로 인하여 우리가 어떻게 그런 변형이 수행될 수 있는지를 산출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격한 실증주의의 경우에서와 동일한 실제적인 난제에 봉착한다. 우리는 예측들이 자연법칙들로부터 어떻게 연역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우리는 어떻게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와 선험론적 입장을 해석할 수 있는가? 분명히 내부적 모순들이 틀림없이 전칭 명제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을 요약 보고서들로서 해석하려는 시도로부터 나타나는 그런 방식으로 (이 문장의 원문은 In such a way, evidently, that internal contradictions must arise from any attempt to construe as summary reports the negative evaluations of universal propositions인데 전체적으로 부사구이어서 완전한 문장을 이루지 못한다. 앞 문장이 의문부호로 끝났기 때문에 이 문장은 완전한 문장으로 서술되어야 할 것이다. 한글 번역자).
이 요점이 완벽하게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이 요점이 귀납의 문제를 다소 다르게 설명하기 때문에 나는 이 요점을 심층적으로 토론하고 싶다.
(통상적인) 귀납의 회귀(回歸: regression)는 (긍정적인 평가의 경우에 발생하는) 경험에게 경험이 적절하게 정당화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정당화하라고 요구함으로부터 나타난다. 부정적인 평가의 경우에 발생하는 새로운 회귀(回歸: regression)는 동일한 방식으로 발생할 리가 없다. 내가 붉은 가죽으로 제본되지 않은 한 권의 책을 보았다면, “모든 책들은 붉은 가죽으로 제본된다”는 서술이 거짓임을 나는 경험으로부터 안다. 여기서 내부적 모순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모순은, 과학적 탐구와 관련된 자연법칙에 대한 혹은 규칙에 대한 모든 평가는 틀림없이 잠정적이라는 사이비-서술 입장의 추정으로부터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이 견해는 여하한 보편적 서술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권의 책이 붉은 가죽으로 제본되지 않는다는 경험은 단지 저 한 가지 보편적 서술만을 오류판정한다. “나의 친구 N이 관찰한 모든 책들은 붉은 가죽으로 제본된다”와 같은 관련된 단칭 서술들은 나의 관찰에 의하여 오류로 판정되지 않는다. 내가 내 자신의 이 경험에 배타적으로 의존하여, 아마도 나의 친구도 붉은 가죽으로 제본되지 않은 책들을 또한 보았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이것은 전형적인 (수용 불가능한) 귀납적 추론이고 그리하여 즉각적으로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에 굴복한다. 그러므로 단칭 서술들에 대하여 특권을 지닌 부정적인 평가를 하려는 – 다시 말해서, 오류판정에 더 일반적인 중요성을 투입하려는 – 어떤 시도도 귀납적 추론이 조우하는 난제들을 야기할 것임은 불가피하다.
(우리는 아마도, 오류판정의 특별한 성질과 더 큰 무게와 확정적인 특성이 틀림없이 어떤 정도로 요약 보고서들에 또한 드러난다고 주장함에 의하여 이 논증에 반대하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로 한 가지 오류판정을 하는 관찰은, 지금까지 관찰된 모든 책들에 관하여 상응하는 주장을 하는 어떤 요약 보고서도 오류판정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반대의견은 보편적 서술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반대의견은 모든 요약 보고서에 대하여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 반대의견이, 그때까지 관찰된 모든 책들을 포함하는 모든 가능한 요약 보고서들의 내용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 반대의견은 전칭 경험서술이다. 이 반대의견은, 모든 책들이 붉은 가죽으로 제본된다는 것이 영원히 거짓일 것이라는 주장을 의역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전칭 경험서술들을 인정하지 않는 지식론은 심지어 이 개념을 표현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서, 그 지식론은 이런 종류의 모든 요약 보고서들이 오류로 판정되었다는 것을 주장할 리가 없다. 그런 지식론에 따르면, 그리하여 오류로 판정되지 않은 보고서들이 여전히 아마도 있을지도 모른다; “보편적인 것이라는 매체(medium of the universal)”는 논리적 결정을 도출하는 데 이용될 수 없다.)
귀납의 문제는, 우리가 단칭 명제들로부터 전칭 명제를 추론하려고 노력한다면 발생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단칭 명제들로부터 단칭 명제들을 추론하려고 노력할 때에도 역시 발생한다; 이것은 또한 단칭 명제들이 예측들의 연역에 관하여 합당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일한 것이 슐릭(Schlick)이 주장하는 사이비-서술들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자연법칙들은 무엇보다도 연역들에 대한 추론들이다. 자연법칙들은, 연역들에 대한 추론들로서 작동하기 위하여 자체들이 틀림없이 지닌 저 그리고 단지 저 속성들인, 직접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라 단지 자체들의 결과들을 통하여서만 경험적으로 시험될 수 있는 추정들을 지닌다. 진리 가치들의 비대칭은 이 속성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이 비대칭적 양식으로부터의 여하한 이탈은 귀납의 문제에 의하여 제기되는 모든 난제들로 곧장 빠진다. 그리하여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결정적인 요점을 우리가 확인함은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관점의 확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아마도 표현의 이론적 양식과 실용적 양식의 상호변경 가능성은 몇 가지 추가적 언급들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도구가 유용하다면, 참인 서술이 항상 있는데 즉, 도구의 유용성을 주장하는 서술이다. 도구가 특별한 경우에 관하여 유용하다면, 그 서술은 단칭 서술이다. 우리가 “전형적인” 경우들에 대한, 다시 말해서 경우들의 일반적인 집합에 대한 그 도구의 일반적인 유용성을 추측한다면 그 추측은 보편적인 서술로 표현될 수 있다. 우리는 그 도구가 정말로 모든 경우들에서 자체의 유용성을 증명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서술은 원칙적으로 결코 [논증에 의하여] 참이 아니다; 게다가 그 도구는 훨씬 더 나은 도구에 의하여 대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도구가 한 번만이라도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증명된다면, 그 도구의 일반적인 유용성은 더 이상 주장될 리가 없다.
이 보기는, 실용적인 구축물과 이론적인 구축물에 대하여 화해 불가능한 대립을 설정하는 것은 완전히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슐릭(Schlick) 자신이 많은 글귀들에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서술할 때 분명히 이론적인 모든 것의 실용적인 면을 지적한다고 인정될 것이다: “우리는, 관찰들과 실험들이 행위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연법칙들은 진정한 명제들이 아니라 실용적인 구축물들이라고 (규칙들, 기타 등등) 주장함에 의하여 귀납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그가 믿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결국 진정한 서술들과 규칙들의 대립 혹은 이론적 구축물과 실용적 구축물 사이의 대립이 있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 이런 특성에서, 그는 “참인 명제와 유용한 규칙 사이의 차이점”, 기타 등등을 강조한다.
우리가 슐릭(Schlick)의 사이비-서술 입장에 관하여 지닐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염려들 중 한 가지 염려는, 내가 생각하기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론”과 “실제” 사이의 균열을 그 입장이 야기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실용주의적 관점에서, 경험과학이나 이론은 통로 다시 말해서 실제로 향하는 간접적인 통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경험과학이나 이론은 “방법”이지만 (“간접적 통로”에 의하여 의미되는 것인) 경제적인 방법인 “우회생산[roundabout production]”이다+1 (뵘-바베르크[Böhm-Bawerk]의 용어인데 이 적용에서는 슐릭[Schlick]의 사상의 경제에 관한 논리적 원리를 마흐[Mach], 스펜서[Spencer] 등의 생물학적 원리와 조화시키는 데 적절한 듯하다.) 이 견해는 인식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들에서도 (지식의 심리학, 생물학, 사회학) 자체가 귀중함을 증명해야 한다.
사이비-서술 입장들이 – 엄격한 대칭 해석,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 그리고 선험론적 관점 – 여기에서 제시된 의미로 해석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믿기에 다소 확신을 주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다만 비판의 한 가지 해석일 뿐이다.
사이비-서술들이 이런 의미로 틀림없이 해석된다는 엄격한 증거는 제시될 리도 없고 심지어 요구될 리도 없다. 특별한 표현들의 (실용주의적 특별한 표현들이나 일상적인 특별한 표현들) 적용에 관한 논쟁에서, 이 특수한 전문 표현들을 사용하는 필연성은 증명될 수 있는 적이 없고 다만 적용의 일관성만 증명될 수 있다. 이 말들의 전투에서, 우리가 여전히 밝힐 수 있을 터인 유일한 것은 한 가지 특별한 표현들의 적절성과 나머지 한 가지 특별한 표현의 부적절성일 터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다음 문제가 제기된다: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특별한 표현들은 무슨 목표들에 도움이 되는가? 그 표현들의 목표들은 다만 귀납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가? 아니면 혹시 이 관점 뒤에는 다른 중요한 문제들이 있어서 이 관점은 그렇게 견고하게 자연법칙들을 진정한 명제들로서 인정하는 것에 반대하는가? 비판이 내재적인 정도까지, 비판은 지금까지 문제의 형식적인 면만을 다룰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이비-서술 표현들이 만들어진 이유들에 충분히 해명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심지어 특별한 표현들에 관한 문제도 그 문제를 도입하는 데 대한 객관적인 이유들에 관한 얼마간의 지식이 없다면 만족스럽게 답변될 수 없다.
실용주의적인 특별한 표현들에 대한 궁극적 이유들에 관한 이 문제를 다른 문제들로부터 소외시켜 검토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 통로를 택할 수 있다.
표현에 관한 실용주의적 그리고 이론적 양식들의 상호변경 가능성은 지금까지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비판에서 발견 학습적 원리로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상호변경 가능성은 다른 방향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연역주의적-경험론적 입장을 실용주의적 표현 방식으로 변경하는 것이 틀림없이 또한 가능하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내재적-형식적 비판에 의하여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사이비-서술 입장에 다다를 터이다. 단지 한 가지 반대의견만 남을 터이다: 분명히 우리가 실용주의적 언어로의 변경을 다루고 있다는 것. 그러나 이 반대의견은 (내재적이 아니고 이 절에서 제시된 해석들과 동일한 수준에 있는) 배제될 것이다.
그런 사이비-서술 입장에 대한 토론은 특별한 표현들의 영역에서 틀림없이 발생할 터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왜냐하면 형식적 차이점들이 최소한으로 감소되었기 때문이다. 그 토론은 분명히 두 가지 특별한 표현들의 이점들과 불이익들을 틀림없이 끌어내고, 일관적으로 완수된다면, 사이비-서술들의 특별한 표현들 뒤에 있는 궁극적 이유들을 틀림없이 밝혀낸다.
다음 절에서, 우리는 이 “궁극적 사이비-서술 입장”을 구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42.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마지막 기회. 연역주의적-경험론적 입장이 실용주의적 언어로 바뀔 수 있다면, 사이비-서술 입장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직 패배를 모면할 수 있다.
자체의 형식적 면을 배타적으로 겨냥하는 이 “궁극적 사이비-서술 입장”에 대한 비판은 틀림없이 불가피하게 실패한다. 남아있는 유일한 방향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자연법칙들을 “사이비-서술들”로 지칭하는 것을 선호하는 어떤 이유들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문제에 대한 이 표현도, 다시 말해서, 특별한 표현들에 대한 정당화의 문제도 유익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궁극적 사이비-서술 입장은, 사이비-서술들로서 일지라도 자연법칙들을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견해와 정확하게 형식적으로 유사하게 해석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몇 가지 문제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 입장은 틀림없이 평가들에서 비대칭을 낳는다; 그러나 그 입장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로 인하여, 우리가 유용성에 대한 대칭적 가치들로부터 출발한다면 그런 비대칭은 결코 이룩될 수 없음이 밝혀졌다. 이것이, 새로운 입장은 처음부터 유용성의 비대칭적 가치들을 전제해야 하는 이유이다; 새로운 입장은 긍정적인 평가들보다 더 많이 특권을 지닌 (본질적으로 잠정적인) 부정적인 평가들을 선험적으로 내려야 한다.
그러나 그리하여 선험론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새로운 입장은 (방법론적인) 규칙의 형태로 부정적인 평가들의 특권을 지닌 위상을 – 지침이나 지침과 같은 어떤 것 - 주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선험적인 종합규칙에 해당할 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로운 입장은 정의(定義)에 의하여 평가의 특권을 지닌 형태로서 “무용성(inutility)”을 도입해야 한다. 이것은, 자연법칙들을 연역들의 전제들로서 정의(定義)하여 다른 모든 것들을 이 정의(定義)로부터 도출하는 연역주의적 절차와 일치할 (가능한 한 멀리) 터이다. 그러나 연역주의적 접근방식은 간단하고 투명한 반면,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상응하는 정의(定義)에 관해서는 동일하게 언급될 수 없다. “무용성(inutility)”을
특권을 지닌 평가로서 (본질적으로 잠정적인) “유용성(utility)”과 대비시키는 정의(定義)는 자의적으로 채택될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잠정적인 것으로서의 실용적 평가의 본질적인 특성을 위협하고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일관적인 실용주의는 폐기된다. 사실적이고 그렇게 정의(定義)되는 “유용성(utility)”과, 참인 명제들에게만 할당될 진정한 진리 가치로서의 “허위성(falsity)” 사이의 특별한 표현들의 차이점뿐만이 아닌 것은 더 이상 주장될 수 없다.
형식적인 관점에서, 연역주의적 관점에 대한 이 궁극적인 사이비-서술 입장의 불리한 점들은 다음 방식으로 발생한다.
연역주의적 관점에서는, 진리 가치들의 비대칭이, 직접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연역적 추론의 (논리적)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생긴다. 연역적 추론의 (논리적) 개념과 (조건절) 달리, “서술들의 변경에 관한 규칙”이라는 개념은 구체적인 내용을 지니지 않고 자의적으로 도입되는 용어이다. 그리하여 그 개념의 속성들은 자의적인 정의(定義)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부정적인 평가들에게 특권을 지닌 위상을 부여하는 정의(定義)에 의하여.
그러나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실제적으로 반대할 수 없는 사이비-서술 입장을 – 적어도 연역주의적-경험론적 관점에서 더 이상 형식적인 반대론에 노출되지 않고 다만 특별한 표현적 반대론에 노출될 따름인 실제적으로 반대할 수 없는 사이비-서술 입장 – 마침내 발견했다. 분석을 특별한 표현들의 영역에 집중하여 사이비-서술 표현들을 선호하는 데 대하여 어떤 이유들이 혹시 있을지를 질문하는 것은 이제 가능하다.
사이비-서술 표현들을 선택하면, 연역주의적 관점과 비교될 때 이 궁극적 사이비-서술 입장이 지닌 상당한 불이익들을 보상할 터인 어떤 이점들이 혹시 제시될 터인가?
내 견해로, 이 특별한 표현적 문제는 사실상 의미의 개념이라는 문제의 원인인데 다음 절들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헌신적인 지지자는 이런 형태로 문제를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지지자는, 그 입장에 따라서 특별한 표현적 이점들과 불이익들이 심지어 토론에 들지도 않는 일장을 채택할 터이다: 두 가지 표현 양식들 사이에서의 선택은 그의 견해로 완벽하게 분명할 터이다. 자연법칙들을 진정한 서술들로서 간주하기는 (연역주의의 의미에서) 완전히 불가능할 터인데 이유인즉 이 견해는 명백하게 거짓이기 때문이다. 의미의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특별한 표현들의 갈등은 사이비-서술 용어들을 선호하여 확정적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결정될 것이다.
모든 진정한 서술에는 틀림없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서술의 의미는 (바이즈만[Waismann]은 기술한다) 자체의 검증 방법이다. 정말로 서술을 발설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상황 하에서 그가 서술을 참이나 거짓으로 지칭할 것인지를 틀림없이 알고 있다; 그가 이것을 규정할 수 없다면, 그는 심지어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확정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서술은 전혀 검증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설은 어떤 의미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적 (단지 특별한 표현적이라기보다는) 결정에 해당할 터이어서 자연법칙들에 관한 최종적 판단은 내려졌을 터이다. 자연법칙들은 사이비-서술들로서 선언되어야 할 터인데 이유인즉 자연법칙들은 원칙적으로 [확정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는 것에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물론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이비-서술 견해는 궁극적으로 의미의 개념에 근거한다. 의미의 개념은 단순히 특별한 표현적 문제보다 더 많은 것을 숨기는가?
의미의 개념 도입은 실제로 특별한 표현적 갈등을 실제적인 갈등으로 변화시키는가, 아니면 그 도입은 특별한 표현적 문제를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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