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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 VI장 및 VII장

이윤진이카루스 2015. 9. 6. 19:22

VI

 

확률 입장들

 

 

12. 확률 입장들 확률에 대한 주관적인 신뢰. 평범한-서술 입장들은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순진한 귀납주의는 논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 순진한 귀납주의는 흄(Hume)의 논증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부정된다.

엄격한 실증주의는 논리적으로 일관적이지만 인식론적으로 (초월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다. 엄격한 실증주의는 자연법칙들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아서 이론적 자연과학에 대한 합당한 해석을 제공할 수 없다. 엄격한 실증주의는 제공하는 게 너무 없다.

다른 한편으로 선험론은, 너무 많이 제공한다. 선험론은 특정 경험서술들에 대한 절대적인 선험적 유효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경험과학은, 반드시 유효하여 경험에 의하여 원칙적으로 부정될 수 없는 경험서술들이 있다는 견해를 수용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이곳은 확률 입장들이 입장하는 곳인데, 그 입장들은 이 난제들 모두를 극복하는 듯이 보인다. 그 입장들은, 보편적 경험서술들이 궁극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는 실증주의와 (그리고 경험과학) 의견일치를 이룬다; 선험론처럼 (그리고 다시 경험과학처럼) 그 입장들은, 자연법칙들이 엄격하게 보편적인 경험서술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확률 서술 입장들은, 모든 평범한-서술 입장들이 공유하는 전제인 확률 입장들에 따라서 귀납에 관한 문제의 모든 난제들을 일으키는 전제를 포기함으로써 이 겉으로 보기에 화해될 수 없는 반목들을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것은 서술들이 거짓이라는 가치들만 지닐 수 있다는 (증명되지 않은) 전제이다.

확률 입장들에 따르면, 귀납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이 전제가 포기된다는 조건만으로 이다.

(이 관계들의 도식적 재현은 부록, III에서 발견될 수 있다.)

확률 입장들귀납적으로 획득된 서술들은 확실성의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그 서술들은 자체가 지닌 가설적 특징을 탈피할수 없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술들은 어느 정도의 유효성을 지닌다: 그 서술들은 개연적이다. 이 견해는 폭넓게 주장되어 슐릭(Schlick)3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의 철학과 과학은 경험적 지식에 대하여 확률만을 주장하는 데 오랫동안 익숙해졌다.”

이 입장을 더 가까이서 분석하면 문제들이 밝혀지지 않는다. 슐릭(Schlick)은 자신의 저서 인식론(Erkenntnislehre)에서 이 입장을 옹호할 것인데 (그 후 그는 이 입장을 포기했다), 이미 어쩔 수 없이 경험적 세상에 대한 자체의 적용에서의 확률 개념은 여전히 심오한 수수께끼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정한다4.

그러나 지식론에서의 그런 수수께끼들은 흔히 근본적인 오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여기서 이 입장에 대한 나의 분석의 한 결과를 제시하고 싶어 하는 이유이다: 나는, 경험서술이 이나 거짓외에 유효성의 객관적인 정도를 지닐 수 있다는 견해를 단호히 거부하겠다.

내 견해로, “거짓사이에서 유효성의 객관적인 정도를 통하여 서술의 확률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옹호될 수 없다. (나는 이것에 관하여 바이즈만[Waismann]확률의 개념에 대한 논리적 분석5에 완전히 동의한다.) 물론 나는 객관적인 확률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에 (사건의 확률이라는 의미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오해들의 결과로서, 확률 문제는 크게 혼동된 듯이 보여서 상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귀납의 문제를 즉각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부차적인 문제들에 대한 어떤 토론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다시 한 번, 확률에 대한 신뢰의 중요성을 지적한 사람은 흄(Hume)이었다. 귀납 문제를 연구하는 데 대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객관적인 유효성과 유효성의 토대들에 대하여 더욱 특히 객관적 확률서술들에 대하여 언급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확률에 대한 주관적 신뢰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친구가 나에게 사건에 대하여 말할 때, 혹은 산으로 산책을 떠나기 전에

내가 일기예보를 조사할 때, 많은 것들이 나의 견해나 믿음이 형성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내 친구를 좋아하는 것과 신뢰하는 것, 용기와 비겁은 정확하게 다양한 대안들에 대한 진지한 평가만큼 역할을 할 것 같다. 객관적인 유효성의 토대들로부터 이 영향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나는 이 영향들을 신뢰의 동기들이라고 지칭한다.

유효성의 동기들과 토대들은 쉽게 혼동될 수 있는데 이유인즉 유효성의 토대들이 동기들로서 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말로 내가 나의 신뢰에 대한 동기들을 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다면, 나는 틀림없이 주로 객관적인 고찰들을 이용하여 나의 신뢰를 뒷받침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어떤 일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나는 그 일을 신뢰할 것이다 매우 흔히 신뢰는 매우 다른 동기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역순이 될 수 없다. 나의 신뢰는 객관적인 유효성의 토대를 제공할 수 없다.

주관적인 신뢰를 (예를 들어, 자기-증거라는 악명 높은 범주) 유효성의 토대로서 간주하는 것은 [고전적] 합리주의의 근본적인 오류이다.

우리가 과학의 가설들을 신뢰한다는, 혹은 우리가 어떤 가설의 진실성을 완벽하게 확신한다는 사실은 유효성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실제 생활에 대한 이 신뢰의 중요성은 흔히 충분히 강조되었다. 그 중요성은 지식이론에 대한 관심의 대상이거나 설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중요성에 대한 언급으로 인하여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유효성의 문제들로서 생각했던 특정 문제들을 심리학적 문제들로서 (사실에 관한 문제들)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신뢰만으로는 유효성의 토대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신뢰만으로는 유효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없다.

그리하여 주관적인 확률은, 우리의 주제와 단지 간접적으로만 관련된다.* 그러나 슐릭(Schlick)인식론(Erkenntnislehre)6 서술된 바와 같이, “의심할 바 없이 확률서술들은 자체의 주관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객관적인 중요성을 주장한다”.

이 중요성은, 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확률은 혹시 어디에 놓여있을까?

 

13. 사건들의 객관적인 확률에 관한 서술들. 객관적인 확률에 관하여, 바이즈만(Waismann)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확률이라는 용어에는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사건의 확률에 관하여 말할 것이다. 그 용어는 확률계산의 이 의미에서 사용된다. 또는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가설의 혹은 자연법칙의 확률에 관하여 언급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의미들은 공통적인 것이 전혀 없다.” 이제 나의 주제는 가설들의 확률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사건들의 확률과 얼마나 관련이 없는지를 밝힐 수 있기 위하여, 나는 먼저 이 절에서 간단하게 사건들의 확률이라는 문제를 토론해야 할 것이다.

사건의 확률에 관한 서술의 한 가지 사소한 사례는 다음과 같을 터이다: “주사위 게임에서 다음 던지기에서 “2”를 던질 확률은 1/6이다.”

이 서술은 다음 던지기에 관해서, 미래에 관해서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분명히 과학적 예측(과학에서의 그 핵심적 중요성은 이미 언급되었다)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이상한 예측인가! 그 예측은 조금도 말을 하지 않는다. 정말로 그것은, 이 던지기에 관하여 우리가 예측을 할 수 없을 따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던지기를 통하여 나는 여하한 숫자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 나는, 예측이 참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를 분명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확률서술은 화급히 설명될 필요가 있다. 그런 설명은 제시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다고 나는 믿는다.

먼저 예측을 하는 데 관한 몇 마디 말.

예측은 통상적으로 몇 가지 가설들로부터 (전칭 경험서술들) 그 가설들에게 특별한 추론들과 조건들을 보충함으로써 연역을 통하여 얻어진다. 연역의 토대를 형성하는 전칭 가설들과 (자연법칙들) 단칭 예측들 사이에는 다양한 중간 수준들이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특정 추가적 추론들의 도움을 받아서 연역의 토대로부터 도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칭서술들인 서술들이나 가설들. 한 가지 사례는, 중력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된 모든 탄도들의 (거의) 포물선 형태가 될 터이다. 그렇게 도출된 가설들은, 물론, 그 가설들이 연역되는 가설들보다 보편성의 더 낮은 수준에 있고 추론들에 의하여 구획 설정된 보다 제한된 범위에 대해서만 유효하다; 그러나 이 범위 안에서, 그 가설들은 여전히 엄격하게 보편적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확률서술들로 선회한다.

내 견해로, 모든 확률서술들은 이 도출된 보편적 가설들이나 (자연법칙들과 다른 추론들로부터 도출된) 도출된 가설들로부터 연역된 예측들에 속한다 - 왜냐하면 단칭 확률서술들 또한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도출된 가설들로부터 확률서술들을 구분하는 특징은 아직 다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확률서술들을 사건들의 연속들(sequence of events)에 관하여 도출된 가설들로서 (또는 예측들) 규정한다.* (확률서술들은 개별적 사건들의 속성들에 관하여 법칙들이나 예측들을 확립하지 않지만, 오히려 사건들의 연속의 속성들에 대한 법칙들이나 예측들을 확립한다.) 이것은 그 서술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을 구성한다.

확률서술들이 지닌 특별한 특질이 틀림없이 또한 추론들의 특질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는 이 서술들이 도출된 가설들임을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가 확률서술들의 추론들을 규정하는 것을 이해할 때, 확률서술들에 관하여 어느 것이 중요한지를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추론들의 전형적인 특징들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1) 우리에게 알려진 추론들이 (자연법칙들과 특별한 조건들[“초기 조건들”]) 사건들의 연속에서 개별적 요소에 관한 예측의 연역에 대하여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에 의하여; (2) 우리는 실종된 조건들에 대하여 법칙을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하여;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이 무작위로 변하는 조건들이 서로 부분적으로 보상한다는 명제를 추론한다 (말하자면, 많은 사건들이 그것들에게 그렇게 할 기회를 제공한다면); 그리하여 사건들의 연속의 개별적인 요소들이라기보다는 사건들의 연속이, “우리가 상세한 지식을 지니지 못한 조건들과부분적으로 독립적이라고 추정될 수 있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바이즈만[Waismann] 의하여 주장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 관점으로부터, 이 단칭 확률서술들의 목표는 그리하여 주사위의 다음 던지기에 관한 예측이 아니라 오히려 던지기들의 연속의 평균 결과에 관한 (다소 불확실한) 예측일 터이다. 따라서 전칭 확률서술들은 사건들의 연속들의 (다소 부정확한) 법칙들에 관한 서술들일 터이다.

이 견해는, 확률서술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실제적 절차와 잘 일치한다. 열 번 던져서 내가 “1”을 여섯 번 얻는다면 나는 확률 예측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추측할 것이다; 가령, 바로 다음에 다섯 번 던져서 내가 “1”을 두세 번 다시 얻는다면 나는 (이 경우에 대한 ) 예측 및 그 예측과 함께 특별한 추정들이 오류로 판정되었다고 확신할 것이다: 나는 추정들을 바꾸려고 노력할 것이다. 처음에 나는 자연법칙을 바꾸지 않을 것이지만 특정 다른 추정들이 거짓이었다고 추정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주사위에 무게가 실리지않았는지를 (이 주사위의 중력 중심이 자체의 기하학적 중심에 있는지, 기타 등등) 조사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전개되는 것과 확률의 견해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난제들을 무해한 것으로서 간주한다. 그 난제들은 통상적으로 법칙의 개념에 대하여 지나치게 좁은 견해로부터 생긴다. 우리는 법칙들을 탐색함으로써 지식을 얻는다; 그리고 그 법칙들이 특정 형태의 개별적인 사건들에서 발견될 수 없다면, 우리는 단지 사건들의 연속들 속에서 그 법칙들을 찾는다 (또는 사건들의 연속들 동안에 그 법칙들 연역하여 그런 사건들의 연속들을 통하여 그 법칙들을 검증한다).

이 문제들 가운데는 확률서술들의 부정확성들이나 그 서술들의 정확성 결여가 있다. 이것 또한 내가 보기에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또 다른 편견인데, 즉 모든 법칙은 틀림없이 정확한 서술이라는 편견이다 (그 편견은 고전 물리학에서 유래하지만 훨씬 더 깊은 뿌리들을 지니고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많은 설명이 있다). 예를 들어 의학적 예측은 확률서술들보다 통상적으로 훨씬 더 부정확하다. 결정적인 것은 예측들이 조금이라도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충분하다. 게다가 부정확성 자체는 추정들로부터 연역적으로 귀결된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주사위를 여섯 번 던질 때마다 모든 면들이 균등한 비율로 항상 나타난다면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추정들이 거짓이라고 정말로 결론을 내릴 터이다).

이 문제들에 관한 몇 가지 보충적 언급들이 나중 절에서 (15) 뒤따를 것이다; 추가적으로, 나는 위에 인용된 바이즈만(Waismann)의 논문에 독자들을 주목시키고 싶고, 나는 그의 견해들에 (특정 세부사항들을 제외하고) 대체로 동의한다.

이 절에서의 토론을 요약하여, 나는 확률서술들이 사건들의 연속들에 관하여 (도출된) 가설들이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아무튼, 확률의 객관적인 개념을 확립한다. 그런 가설들의 유효성에 관한 한, 당분간 한 가지 것만 확실하다: 그런 가설들의 유효성은 다른 가설들의 유효성과, 자연법칙들이나 확률서술들이 연역되는 다른 추론들의 유효성과 다른 종류가 아니다. 그리고 가설들의 유효성에 관한 이 질문으로써, 우리는 다시 한 번 귀납의 문제로 회귀했다.

 

14. 전칭 경험서술들이 지닌 유효성의 객관적 정도로서의 확률. 한 가지 사건의 확률은 다음과 같이 정의(定義)될 것이다: 확률서술은 일련의 사건들에 관한 [혹은 더 낫게: 사건들의 연속*] 서술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실제로 한 가지 서술에 대한 확률을 생각해야 하는가?

한 가지 사건에 대한 확률은 한 가지 서술의 내용이다. 한 가지 서술에 대한 확률은 (특히 한 가지 가설에 대한 확률) 틀림없이 한 가지 서술의 객관적인 유효성을 언급한다. 한 가지 서술이 지닌 유효성의 정도와 그 서술의 내용은 (그 서술에 의하여 진술되는 것) 물론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이다.

한 가지 가설에 대한 확률에 의하여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보다 정확하게 명시하는 것이 가능한가?

한 가지 가설에 대한 확률을 한 가지 사건에 대한 확률로 환원하는 것이 혹시 가능한가?

한 가지 서술의 객관적 확률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이 어떤 형태를 띨지라도,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한 가지 서술이 아마도 유효하다는 것은 저 서술에 관한 한 가지 서술에 의하여 (“판단에 대한 판단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서술이나 가설은, 어떤 것이 사실이라고 혹은 어떤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만 진술하기 때문이다. 서술은 물론 또한 어떤 것이 아마도 사실이라고 (사건에 대한 확률) 진술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서술들 중에서 한 가지 서술은 솔직하게 유효하지 않지만 다만 아마도 유효하다고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서술에 관한 서술에 의하여 수행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기억되어야 한다.

이것을 넘어서는, 서술의 유효성의 정도로서 객관적인 확률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혹은 가설의 확률에 의하여 실제로 의미되는 것을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는 것은 다소 어렵다. 나는 내가,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사건의 확률과 서술의 객관적인 확률 사이에서 옹호될 수 있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 없다고 고백해야겠다.

사건의 확률은 사건들의 연속에 관한 서술이다. 그러나 유사한 방식으로 한 가지 가설의 확률을 가설들의 연속에 관한 서술로서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확실히 가설의 확률은, 사건들이 (다시 말해서, 우리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 문제의 가설과 일치할 것인지 일치하지 않을 것인지의 문제에 관한 확률서술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한 사건의 확률에 대한 유사성이 발견될 수 없다. 확률론적 예측의 특유한 특징은 (13), 그 예측이 주사위의 (개별적인) 다음 던지기에 관하여 어떤 것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유인즉 그 예측은 모든 가능한 경우들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이 자연법칙에 따를 것인지 따르지 않을 것인지의 문제의 확률에 관하여 말할 때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왜냐하면 사건이, 엄격하게 보편적인 용어들로 표현된 서술인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연법칙은 거짓이고 그 자연법칙의 확률은 돌연히 그리고 확정적으로 0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사위의] 다음 던지기로써 “2”를 던지지 않을 상당히 높은 확률은 (그 확률은 5/6이다), 내가 방금 “2”를 던졌다는 사실의 결과로서 증가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대조적으로 가설들에 대한 확률이라는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사건이 가설과 일치하면 혹은 사건이 가설에 대한 검증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면 확률이 증가할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러나 아무도 내가 방금 “1”을 던졌다면 “1”을 던지는 확률이 증가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간단한 유사점을 발견하기를 기대할 수 없어서, 가설들의 확률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다소 모호하게 보인다.

내가 보기에 서술들이라는 가설들에 대한 확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라이헨바흐(Reichenbach)처럼1, 이 개념이 사건들에 대한 확률이라는 개념과 동일하다면 완전히 틀렸다.

라이헨바흐(Reichenbach)2 이 견해를 지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확률 1/6이 던져지는 여하한 한 면에 할당하는 것을 사건에 대한 확률의 경우로서 간주했다; 우리는 또한, ‘던져지는 확률 “1”이라는 서술이 1/6’이라고 말함으로써 이것을 표현할 수 있을 터이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 입장이 옹호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주사위의 면 ‘1’1/6의 확률로 나타날 것이라는 서술은, 그 면이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거나 확인되지도 않고 오류로 판명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서술은 사건들의 연속에 관한 예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사위의 면 ‘1’이 나타날 것이라는 서술은 던진 후에 참이나 거짓으로 판명될 것이다. 그 서술은 이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진짜 예측이고 확정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 그 서술의 확률1/6으로 남을 리가 없고, 검증 이후에는 틀림없이 1 또는 0이 된다. 그리하여 두 가지 경우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구분은 전혀 단순히 용어사용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반대의견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은, 확률이론이 고전적 논리학의 틀 안에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지만 우리가 특별한 확률 논리학의 가능성을 수용한다면 상황은 완전히 변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문제의 결정적인 요점은, 서술이 참과 거짓 사이에서 유효성의 정도를 지닐 수 있는지 이다. 그러나 논리학에 따르면, 배중률(排中律: the law of excluded middle)이 적용된다: 서술은 참과 거짓 외에 유효성의 정도를 지닐 수 없다. 가설의 객관적인 확률을 자세히 설명하는 유일한 일관적인 방식은, 그리하여, 고전적 논리학을 버리거나 적어도 고전적 논리학을 확률 논리학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히 급격한 조치이다.

그리하여 난제들은 (그리고 그 난제들과 동시에 잘못된 길에 들어선 확률) 부단히 증가하고, 문제는 항상 더 모호하고 불가사의하게 보인다. 결과적으로 나는 다음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 배타적으로 의존하겠다.

가설들의 객관적인 확률과 같은 것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이것은 확실히 가설에 관한 확률 서술로만, 아마도 다음과 같은 서술로 표현될 수 있다: “이 가설에는 유효함에 대한 더 높거나 더 낮은 확률이 있다.”

 

15. 가설에 대한 확률이라는 개념을 보다 가깝게 정의(定義)하는 한 가지 방법 (가설들의 기본적인 그리고 부차적인 확률). 단순성이라는 개념. 우리가 이 시점까지 가설들의 확률에 관하여 도달한 다소 부정적인 결론들은 전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가 다양한 정도들의 확률을 지닌 가설들을 신뢰한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거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가설들은 다른 가설들보다 더 개연적이라고 믿으며 이것은 객관성의 한 가지 요소가 부인될 수 없는 이유들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된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가설들에게 할당하는 주관적 확률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객관적인 이유들을 적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터인가? 그런 적시는 상황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매우 유리할 터인데. 사건들의 확률과의 관계가 확립될 수 있다면, 간접적인 관계이기만 하면, 그런 적시는 특별히 만족스러울 터인데.

나는 가설의 범위라는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이 주제에 관하여 위에 인용된 바이즈만[Waismann]의 연구 또한 참조.1)

예를 들어 다음 두 가지 가설들을 비교하라: (1) 모든 탄도들은 포물선들이다. (2) 모든 탄도들은 원뿔곡선들이다.

모든 포물선들은 원뿔곡선들이고 포물선들을 외에도 원뿔곡선들이 있기 때문에, 두 번째 가설은 첫 번째 가설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들을 허용한다. 두 번째 가설의 범위는 더 넓다. 우리가 예를 든 경우에서, 두 번째 가설의 범위는 첫 번째 가설의 범위를 완전히 망라한다.

이 관계는 순전히 논리적 관계이다. 첫 번째 가설이 (더 좁은 범위를 지닌) 참이라면, 그 범위가 첫 번째 가설의 범위를 포함하는 두 번째 가설도 또한 틀림없이 참이다. 그러나 두 번째 가설은 첫 번째 가설 또한 참이지 않고도 참일 수 있을 터이다; 예를 들어 쌍곡선 탄도들이 있다면. (첫 번째 가설은 두 번째 가설을 [논리적으로] 수반하지만, 역순은 그렇지 않다.)

이 관계는, 순전히 논리적 이유들로 인한 (다시 말해서, 선험적) 다른 가설보다 더 넓은 범위를 지닌 가설을 더 개연적으로 만든다. 이것은 물론 그 가설들이 지닌 실제 유효성의 정도에 관하여 전혀 판단을 암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 가설들은 아마도 (경험적으로) 두 가지 모두 참이거나 두 가지 모두 거짓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음을 암시할 따름이다: 첫 번째 가설은, 두 번째 가설이 또한 참이 아니면 참일 리가 없다.

두 번째 가설이 더 개연적이라고 지칭되면, 그 가설은 첫 번째 가설과의 관계에서만 더 개연적이라는 것이 다시 말해서 이 확률 개념은 단지 상대적이라는 것이 틀림없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가지 가설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확률을 가설들에 대한 기본적 확률이라고 (“선험적이라는 용어를 피하기 위하여) 부른다.

여하한 두 가지 가설들을 그 가설들의 범위를 통하여 비교함으로써, 가설들에 대한 기본적 확률들의 전체 규모가 구축될 수 있다 (“규모 구축[scaling]”).

다음은 증가하는 가설들에 대한 기본적 확률을 지닌 그런 규모의 사례가 될 터이다:

(1) 모든 탄도들은 포물선들이다. (2) 모든 탄도들은 원뿔곡선들이다. (3) 모든 탄도들은 연속 곡선들이다. (4) 모든 탄도들은 연속 혹은 비연속, 꺾이지 않거나 꺾인 선들이다.

마지막 가설 (4)는 여하한 경우에도 선험적으로 참이다. 이것이 그 가설의 기본적 확률이 1인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 가설에 완전히 의미가 없는 이유이다.

가설의 정밀성이 클수록, 그 가설의 기본적 확률은 낮아진다. 가설의 의미가 공허하고 그 가설의 정밀성이 낮을수록 그 가설의 기본적 확률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이 고찰은, 가설들에 대한 기본적 확률과 법칙의 개념 (그리하여 일반적인 지식의 개념)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4)번 형태의 전칭 서술들은, 다시 말해서, 기본적 확률 1로써는 실제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없다: 가설들은 어떤 법칙도 전혀 표현하지 않으며 경험적 지식을 전하지 않는다; 이 가설들로부터 예측들을 도출하는 것도 역시 쓸모가 없을 터이다. 이 가설들은 경험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지칭될 수 있다. 기본적 확률이 감소함에 따라서, 서술의 정밀성은 증가한다: 서술은 자체의 법칙-같은 특성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키고 예측들은 그 특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서술은 경험적 지식을 전달한다. 서술의 범위가 좁을수록, 다시 말해서, 서술의 기본적 확률이 낮을수록, 서술은 더 많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아마도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서술의 범위가 좁을수록, 서술의 기본적 확률은 낮아진다 (혹은 서술의 기본적 비개연성을 더 높아진다), 그리고 서술이 정밀해질수록, 우리는 그 서술로부터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서술이 경험과 가지런할 수 있다면.) 이것은, 일종의 상대적 규모를 지식의 개념에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술의 인식적 가치는 그 서술의 기본적 확률과 역비례한다; 서술의 인식적 가치는 자체의 비개연성과 정비례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법이라는 개념은 수량적으로 규모가 잡힌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어서 우리는 법칙-같음의 정도들에 대하여 그리고 더 높거나 더 낮은 특수성에 대하여 언급할 수 있다. 법칙은 정밀할수록, 혹은 법칙의 기본적 비개연성이 높을수록 더 법칙과 같다. (분명히 이것은 다시 일종의 지식이라는 개념의 분석이다; 10절 참조.)

우리의 지식 추구에서 우리가 항상 우리의 서술들을 더 정밀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이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된 정밀하지 못한 법칙들에 반대하는 편견의 합법적인 핵심을 구성한다 [이 문장의 원문은 It constitutes the legitimate core of the prejudice against imprecise laws mentioned earlier인데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음. , It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는데 저자의 글에는 대명사 it으로 정확하게 지칭하는 바를 알기 힘든 경우가 많고 이 저서의 원본이 독일어로 저술되어 영어로 번역되었다할지라도 - 이 문장에서 편견이 어떻게 합법적이거나 합당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움. 한글번역자].) 우리가 보다 정밀한 가설을 경험과 가지런하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덜 정밀한 가설을 낡은 것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이유인즉 덜 정밀한 가설은 새로운 가설에 의하여 함축되기 때문이다 31절 참조 덜 정밀한 가설은 새로운 가설에 의하여 함축적으로 주장된다. [이 문장의 원문도 since it is implied by the new one cf. Section 31 it is implicitly asserted by it인데 대명사 it의 쓰임이 명확하지 못한 경우이다. 또한 이 문장에서 it is implicitly asserted by it은 앞 문장에 대한 부연설명인데 접속사가 없다. 한글번역자]) 정밀 서술들을 향한 이 지향이 만족스럽게 이행된다면, 우리는 정확한(exact)” 과학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좁은 범위의 중요성은 또한 경험적 지식에서 (예를 들어 물리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밝힌다. 자의적으로 좁은 범위를 지닌 정밀한 서술들과 정밀한 예측들의 도출을 허용하는 (측정 정확성의 한계들 안에서) 것은 논리적 방법이다. (수학이 없다면 우리는 예를 들어 포물선이 아니라 기껏해야 곡선에 관하여 언급할 수 있을 터이다.)

게다가 고도로 논란의 소지가 많은 법칙의 단순성이라는 개념과 지식의 개념에 대한 그 개념의 관계는 그리하여 완벽하게 투명해진다 귀납주의적 논증들에서 매우 상당한 역할을 하는 이 개념이 조금이라도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정도까지.

귀납주의는, 개별적 관찰행위들로부터 일반화를 통하여 우리가 자연법칙들에 도달한다고 추정한다. 이제 우리가 개별적 관찰행위들을 좌표계에서 계획된 위치들로서 생각한다면 (각 관찰의 측정된 결과들은 자체의 좌표들이다), 법칙의 그래프 재현은 이 위치들을 통과하는 곡선(함수) 터이다. 그러나 유한한 숫자의 위치들을 통하여 무한한 숫자의 곡선들을 그리는 일은 항상 가능하다 (법칙은 관찰행위들에 의하여 독특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중요한 문제가 떠오른다: 이 곡선들 중 어느 곡선을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가?

통상적인 답변은 다음과 같다: 가장 간단한 곡선, 가장 간단한 함수를 선택하라.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귀납의 절차는, 우리의 경험과 화합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법칙을 참으로서 수용하는 데 놓여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성취된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 우리는 가장 간단한 함수를 수용하는가? 이 간단함은 무엇에 놓여있는가?

귀납주의는 이 두 가지 질문들에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공하지 않았다. 간단함의 개념은 상당한 문제들로서 귀납주의와 맞선다.

그리하여 슐릭(Schlick) 간단함과 법칙-같음 사이의 연결을 확립하지만 간단함에 의하여 실제도 의미되는 것을 지적할 수 없이... 간단함의 개념은... 부분적으로 실용적이고, 부분적으로 심미적 개념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한다:

우리가 간단함의 개념을 틀림없이 항상 자의적인 규약에 의해서만 정의(定義)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에게는 최초 정도의 함수를 두 번째 정도의 함수보다 더 간단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경향이 있을 것인 반면, 후자(後者)는 관찰된 자료들을 높은 수준의 정확성으로써 기술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완벽한 법칙을 재현할 것이다; 거리의 제곱을 포함하는 뉴튼의 중력공식은, 통상적으로 간단한 자연법칙의 모형으로 간주된다. 게다가 우리는, 예를 들어, 위치들의 주어진 숫자에 충분히 가까운 모든 연속 곡선들 중에서 가장 간단한 것으로서 간주될 연속 곡선은 평균적으로 가장 큰 곡률 반경을 지닌 것이라고 동의할 수 있다 (이것에 관하여 아직 발간되지 않은 마르셀 나트킨[Marcel Natkin: 폴란드인으로서 정확한 이름의 발음을 알 수 없음. 한글번역자]의 저서 참조); 그러나 그런 장치들은 교묘하게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나는, 간단함에 무엇에 놓여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확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왜 항상 가장 간단한 법칙인지를 지적하는 것은 매우 쉽다고 믿는다. (여기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이 인식론적 토론에서 의미되는 [의도되는] 간단함이라는 개념뿐이다; 이 개념이 공통적인 언어적 용법과 일치하는 정도는 토론되지 않을 것이다.*1) 여기서는 다음 견해가 옹호될 것이다:

법칙의 간단함이라는 의미에서 간단함기본적 비개연성에 대한 또 다른 용어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미 안 바와 같이), 그것은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에 대한 순전히 논리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해석이 올바르다면, 지식의 개념은 우리가 항상 가장 간단한 법칙을 확립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하게 가장 간단한 법칙이 더 많은 것을 말하여 더 큰 인식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물론 귀납주의자들에 의하여 사용되는 간단함에 대한 분산된 실용적-미학적 개념이 논리적 범위에 대한 정밀한 개념과 동일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논리적 증거는 제시될 수 없다. 그러나 간단함의 개념에 대한 나의 정의(定義), 정확하게 귀납주의가 이 개념으로부터 요구하는 것을 전달한다는 것은 밝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의 정의(定義)는 기본적 비개연성과 동일하기 때문에, 간단함에 대한 이 개념은 가설의 법칙-같음의 정도에 대한 지표이다; 그리하여 그 개념은 파이글(Feigl) 간단함을 통한 법칙-같음의 정도를 정의(定義)하기에 대한 개념에 관하여 언급할 때 정확하게 파이글(Feigl)이 강조하는 것을 전달한다.

여기서 제시된 간단함에 대한 정의(定義)의 도움을 받아서 직선이 (일차함수, 슐릭[Schlick]으로부터의 인용문 참조) 예를 들어 원뿔곡선보다 (두 번째 체계의 곡선들) 더 간단한 이유가 유사하게 밝혀질 수 있다: 직선에는 더 좁은 범위가 (더 높은 기본적 비개연성) 있는데 왜냐하면 직선은 원뿔곡선의 특별한 경우로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선의 범위는 원뿔곡선들의 범위에 의하여 포함된다.) 동일한 이유들 때문에 원과 포물선은, 가령, 타원과 쌍곡선보다 더 간단한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 높은 체계 곡선들은 (함수들) 더 낮은 체계의 곡선들보다 덜 간단하다. 후자(後者)는 항상 더 높은 체계의 곡선들에 대한 제한하는 경우들로서 이해될 수 있지만 역순은 성립하지 않는다. (더 낮은 체계의 곡선들의 범위는 더 높은 체계의 곡선들의 범위에 의하여 포함된다.) 그 곡선들의 범위는 더 작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용어사용법에 따라서) 그 곡선들이 더 정밀하고, 더 높은 기본적 비개연성을 지니고 있고, 그리고 더 간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간단함에 대하여 제시된 개념은 모든 면들에서 인용된 저술가들의 개념과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그 개념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슐릭(Schlick), 평균적으로 가장 큰 곡률반경을 (가장 작은 평균 곡률) 지닌 곡선은 더 간단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나트킨(Natkin) 정의(定義)를 언급한다. “평균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제기되는 난제들과 별도로, 예를 들어 3차포물선은 그렇다면 정2차포물선보다 더 간단할 터이다. (자체의 곡률은 2차포물선의 곡률보다 굴절의 위치로부터 거리에 비례하여 더 빠르게 감소할 뿐만 아니다; 자체의 굴절 위치에서 곡률은 실제로 0이다.) 이 정의(定義)에 따르면, 타원은 원보다 더 간단할 수 있을 터이고*2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성궤도들을 원으로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처음에 실행되었다!), (점근) 쌍곡선은 훨씬 더 간단할 터이다. 이 견해는, 그리하여, 매우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파이글(Feigl) 다소 다른 정의(定義)를 언급한다: 직선으로부터 곡선의 편차는 틀림없이 가능한 한 작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직선 주변의 긴 파동들 안에서 약간만 진동하는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그것에 점근적[漸近的]으로 접근하는) 고도로 복잡한 함수는, 예를 들어, 규칙적인 포물선보다 훨씬 더 간단할 터이다.

아니다, 우리는 그런 장치들(슐릭[Schlick] 그것들을 지칭하는 바와 같이) 다루고 있지 않은데 그런 장치들에 대한 우리의 선호는 틀림없이 항상 수수께끼로 남는다. 우리는 훨씬 더 간단한 간단함을 다루고 있다: 그 정의(定義)가 자체의 적용에 대한 이유만큼 꼭 모호한 개념을 다루고 있지 않고 그 적용이 지식의 개념으로부터 분석적으로 발생하는 순전히 논리적인 개념을 다루고 있다. 법칙의 간단함은 법칙의 기본적 비개연성에 대한 또 다른 용어일 따름이다.

(이 요점에 관한 보충적 언급들은 30절 말미에 발견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식은 주어진 재료를 가능한 한 잘 체계화하는 데 놓여있다; 다시 말해서, 가능한 한 높은 기본적 비개연성을 지닌 가설들을 통하여, 가능한 한 간단한 법칙들을 통하여 그리고 가능한 한 정밀한 전칭 서술들을 통하여 그 주어진 재료를 기술하여 가능한 한 정밀한 예측들을 연역할 수 있고 그 예측들을 직접적으로 실제에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데 놓여있다. (이것들은 모두 분석적 서술들로 항진명제들[恒眞命題: tautologies]이다.)

이제 가설들의 부차적 확률로 선회하자.

가설들의 기본적 확률이 서술들 사이의 논리적인, 선험적 관계들에게만 관련되는 반면 가설들의 부차적 확률은 경험에 대한 이 가설들의 (그 가설들의 기본적 확률은 다소 높은 것으로서 간주될 것이다) 관계와 관련된다. (“경험적이라는 용어를 회피하기 위하여 나는 그것들은 부차적이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개념은 단지 예비적 형태로만 도입되고 다음 절에서 보다 근접하여 분석될 것이다.)

결과는 이렇다: 가설의 기본적 확률이 낮을수록, 그 가설의 부차적 확률은 자체의 예측들에 대한 검증의 결과로서 높아진다 그리고 역순도 성립한다: 자체의 기본적 확률이 높을수록, 자체의 부차적 확률은 심지어 많은 숫자의

확인들이 이루어진 경우들에서도 낮아진다.

이것은 단지 표면적으로는 모순적이다.

극도로 높은 기본적 비개연성을 지닌 가설이 (매우 좁은 범위를 지닌 가설) 형성되도록 하라. 예를 들어 다음 가설을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도출된) 생각하라.

우리가 밤에 찍힌 여하한 별자리의 사진을 태양이 별자리의 중심에 있을 때인 낮 시간에 찍힌 동일한 별자리의 사진과 (그런 사진은 개기일식 동안에 찍힐 것이다) 신중하게 비교하면, 측정이 충분히 정확하다면 다음 결과가 항상 존재할 것이다: 태양의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별들 사이의 거리가 증가하고 그 별들은 분당 그러나 정확한 양에 (1.7/3600)에 의하여 떨어져 움직인다.”

이제 실험을 하자. 처음에 우리가 검증을 하려는 한 가지 시도만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기본적] 비개연성에도 불구하고 성공한다. 최초의 검증 이후에 이미, 우리는 그렇게 높은 기본적 비개연성과의 일치가 우연한 사건이 될 수 없다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우연한 사건은 너무 비개연적일 터이기 때문이다.* 가설의 높은 기본적 비개연성은 검증을 하려는 단 한 가지 시도 후에 자체에게 상당한 부차적 확률을 부여한다. 이 가설이 자연법칙을 표현한다고 우리는 기꺼이 믿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기초를 이루는 법칙-같은 규칙성이 있다고 추정할 것이다 (검증의 결과들이 명백하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단지 작은 숫자의 경우들에서 높은 기본적 비개연성을 지닌 서술을 검증하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이 검증에 가장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몇 가지 경우들이 순전히 우연에 의하여 정밀한 서술의 매우 좁은 범위 안에 떨어질 터임을 고도로 비개연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연-같지 않은법칙-같은과 동의어이다 (“어떤 법칙-같은 규칙성이 그것의 기저에 있다”).* 우연-같은법칙-같지 않은”, 예측될 수 없는, 알려질 수 없는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아무도 우연의 게임에서의 숫자들의 연속에서 질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질서가 발견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우연의 게임이 아닐 터이다.)

경험과 검증은, (간단하고 정밀한) 서술의 그리고 기본적 비개연성을 지닌 예측들의 경우에서 매우 중요하다 기본적 확률을 지닌 가설들에게 그것은 유사하게 무의미하다.

우리는, 모든 탄도가 틀림없이 굽었다는 가설을 (높은 기본적 확률을 지닌) 기꺼이 수용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가지 관찰행위들 후에). 이것은 직선들에 대한 선호 때문이 아니라 조사된 탄도들을 굽힌 것은 아마도 우연일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솜씨 좋게 던진다면 특정 거리를 직선을 따라서 어떤 것을 던진다는 것은 결국 가능하다. 탄도가 포물선이라는 높은 기본적 비개연성을 지닌 더 정밀한 가설은 몇 가지 신중한 실험들 후에 잘 입증된 것으로서 이미 간주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탄도가 직선이라는 가설에 대하여 실험적 증거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훨씬 더 작은 숫자의 실험들이 우리를 확신시키기에 충분할 터이다 (자유낙하의 [] 사례를 참조).

그러나 반대로 서술이 선험적으로 참이고 1인 기본적 확률을 지닌다면 그리고 그 서술에는 그리하여 경험적 지식에 대하여 중요성이 없다면, 경험은 그 서술에 대하여 동등하게 무의미하다. 서술이 선험적으로 참일지라도 혹은 참이기 때문에 경험은 그 서술을 신뢰받을 수 있게 만들 수 없다. 아무리 많은 경험이 그 서술을 확인할지라도, 그 서술은 가설로서 수용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서술에 0이라는 부차적 확률가치를 할당한다.

이 결과들로 인하여 우리는 또한 가설들의 확률과 우리가 찾고 있던 사건들의 확률이라는 개념 사이의 연관성들을 밝힐 수 있다.

우리가 이 연관성들을 확립할 수 있는 있는 것은 법칙-같음우연이라는 개념들을 통해서이다.

가설들의 기본적 확률에 대한 분석은, 법칙-같음의 정도가 기본적 비개연성에 의하여 결정됨을 밝혔다.

사건들의 확률에 대한 분석이 밝힌 바와 같이, 사건들의 연속이 기대된 평균 가치를 낳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사건들의 연속이 비개연적 분포를 낳는다면 우리는 유사하게 법칙-같은 규칙성의 존재를 추론한다.

그리하여 사건들의 연속들이 개연적이거나 우연-같은” (규칙들에 의하여 지배를 받지 않는) 분포로부터 벗어난다면, 우리는 항상 법칙들의 존재를 추론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설들의 확률과 사건들의 확률에 동등하게 적용된다. 법칙-같은 규칙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추론을 반증된 것으로 우리는 간주하거나 (사건들의 확률) 법칙이 존재한다는 추론을 확인된 것으로서 우리는 간주한다 (가설들의 확률).

 

16. 가설의 입증이라는 개념 입증의 개념에 대한 실증주의적, 실용주의적 및 확률론적 해석들. 가설들의 유효성에 관한 문제의 토론에서 우리는 어떤 지점에 도달했는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기본적이거나 부차적인 확률, 혹시, 전칭 경험서술들이 지닌 유효성의 객관적인 정도인가?

가설들의 기본적 확률은 순전히 논리적 개념이다. 그 확률은 논리적 범위들 사이의 관계들에 의하여 (선험적으로) 결정된다. 경험은 그들에게 어떤 관계도 없다. 논리적 개념으로서, 그 확률은 객관적이지만 그러나 경험서술들이 지닌 유효성의 정도로서 그 확률은 고려되지 않는데 이유인즉 경험서술들은 선험적인 유효성의 정도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경험만이 그 서술들의 유효성을 결정한다.

가설들의 부차적 확률이 혹시 객관적인 유효성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되는지는 첫눈에 보기에 결정될 수 없다. 이유인즉 가설들의 부차적 확률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방식들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개념을 의도적으로 처음에 다소 산만하고 불명확한 방식으로 도입했다.)

나는 여기서 옹호되는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시작하겠다.

나는 가설들의 부차적 확률이라는 개념에 대한 두 가지 해석들이 수용될 수 있다고 (다시 말해서, 동시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앞 문장은 뒤에 두 가지 해석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에 원문처럼 종지부로 끝낼 것이 아니라 콜론으로 끝내고 뒤에 이어지는 나열하는 부분을 앞 문장과 직접 연결해야 할 것이다. 한글번역자)

우리의 경험의 주어진 상태에 따라서 가설에게 귀속되는, 입증이라는 개념의 채택을 낳는 객관적인 해석; 그리고 가설들의 부차적인 확률에서 가설들의 (객관적인) 입증들을 통하여 우리의 주관적인 믿음의 정도와 그 정도의 동기를 보는 주관적인 해석.*

입증의 개념이 먼저 토론될 것이다. 그 개념이 최고로 중요하다.

가설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입증의 정도가 할당되기 위해서는, (1) 그 가설로부터 연역된 예측들이 검증되어야 하고 (2) 우리의 모든 경험들은 가설과 일치해야 한다. 이 조건들 중 한 가지도 충족되지 않는다면, 가설에게는 어떤 긍정적인 입증의 정도도 귀속될 수 없다.

추가적으로 입증의 가치는 가설의 기본적 비개연성과 비례하여 그리고 검증들의 숫자에 비례하여 (앞 절에서 가설들의 부차적 확률과 관련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증가한다.

이 입증의 개념은 틀림없이 객관적이다. 그 개념은 경험에 의하여 주어진 검증과 가설의 기본적 확률 사이의 특정 관계를 표현한다.

이 개념에 관하여 많은 것이 추가될 수 있을 터이다. 오직 가장 중요한 요점들만 여기서 지적될 것이다.

가설에 조금이라도 입증의 여하한 긍정적 정도가 있다면, 입증의 가치에 대한 그 가설의 비개연성의 효과는 검증 사례들의 숫자의 효과보다 더 큰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매우 작은 숫자의 검증 사례들이 높은 기본적 비개연성을 지닌 가설을 입증하는 반면, 심지어 매우 큰 숫자의 검증 사례들도 높은 기본적 확률을 지닌 가설을 입증하지 못한다.

가설들의 기본적 확률이나 비개연성의 규모가, 가설에게 특정 정도의 입증이 할당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검증 사례들이 필요할지를 결정한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이것은 왜 매우 간단한 공식으로써 관찰들의 연속을 재현하는 데 성공한 과학자가... 즉각적으로 자신이 법칙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지를 설명한다 (슐릭[Schlick]). 왜냐하면 그는 간단한 법칙의 상대적으로 높은 비개연성과 그 법칙에 상응하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입증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진정한 오류판정은 (가설과 불일치하는 사건에 대한 관찰*) 가설의 입증을 파괴한다.

입증의 정도를 측정하는 가능한 방법들에 관한 추가 언급들은 이 연구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것은 방법에 관한 이론의 임무일 터이다.2

그렇게 개괄된 입증에 대한 (실증주의적) 개념은 유효성의 정도로서 가설들의 객관적 확률과 관계가 없다. 그 개념은, 가설이 계속해서 입증될 것이라는 결론을 과거의 입증이 정당화한다는 결과를 포함하지 않는다. 입증은 지금까지 관찰된 검증 사례들에 관한 특정 종류의 요약 보고서일 따름이다; 물론 평가 보고서이다. 가설의 기본적 확률을 참고함으로써, 그 보고서는 이 검증 사례들에게 조금이라도 중요성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 검증 사례들이 중요한지) 고찰한다.

이제 나는 주관적 해석으로 선회한다.

확률에 대한 주관적인 신뢰는 가설에 대한 입증에 의하여 뒷받침될 수 있지만 이 신뢰는 입증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한다. 이 신뢰는 입증된 가설이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입증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행동할 수 없을 터이고 그리하여 살아갈 수 없을 터임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이 신뢰에 관하여 실제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그 신뢰의 객관적인 동기들은, 그 신뢰가 추가적인 인식론적 문제들을 야기하지 않도록 입증의 개념에 의하여 충분히 설명된다.

가설들의 부차적 확률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 분석은 실증주의적 관점을 대변한다: “엄격한 실중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이 분석은 객관적인 입증을 매우 특정적인 경험들에 관한 특별한 평가 보고서로서일지라도 경험들에 관한 보고서로서 항상 단지 예비적인 생각하는데 그 보고서를 통하여 가설로부터 연역적으로 획득된 예측들이 검증된다.

입증이라는 개념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그러나, 또한 생각될 수 있다: 입증을 전칭 경험서술들의 객관적인 유효성의 정도로 만들려는 의도를 지닌 견해들.

검토될 첫 번째 견해는 실용주의의 견해이다. 실용주의는, 서술의 진실성은 오직 그 서술의 입증에만 놓여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 입장은 진실성을 입증과 동일시한다. 이것은 예측의 개념과 검증의 개념에 대한 인정과 관련되는데 그런 상태로서의 그 인정은 완전히 정당화된다. 예측이 (단칭서술) 경험에 의하여 입증된다면, 그 예측이 경험에 의하여 검증되었다면, 그 예측은 또한 확정적으로 검증된다. 그 예측은 이다.

이 진실성은 영구적이다. “나폴레옹은 칼을 찼다라는 서술은 18세기말에 참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참이고 항상 참일 것이다 (혹은 그것은 항상 거짓이었다): 유효성은 영구적이다.

단칭 서술들에 관하여, 입증이라는 개념은 [그리하여] 모순들을 야기하지 않고 진리의 개념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우리가 엄격한 전칭 경험서술들에 왔을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가설은 오랫동안 입증되었을지도 모르고 그 가설은 오늘 여전히 입증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시 그 가설은 내일 더 이상 입증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가설이 오늘 정말로 참이지만 내일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엄격한 보편성과 유효성의 개념에 대한 오해를 의미할 터이다. 그리하는 나는 슐릭(Schlick)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진리와 확인은... 동일하지 않다.” 실용주의적 해석은 내가 보기에 수용될 수 없다.

이 토론의 핵심에 실제로 있는 입장은 확률 논리의 입장이다. 그러나 실용주의와 달리 그 입장은 단순히 입증을 진리와 동일시하지 않고 대신에 서술들의 입증 정도에 따라서, 서술들에게 참과 거짓 사이의 확률 가치를 할당한다.

입증의 개념은, 유효성의 정도로서의 가설들의 객관적 확률에 대하여 토대를 제공하는 것에 극도로 잘 들어맞는 듯하다. 물론 14절의 논증은 여전히 옳다: 사건들의 확률에 대하여 참된 유사점을 찾는다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두 가지 개념들 사이의 관계들은 다소 거리가 멀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증의 개념은, 보다 명확한 용어들로, 가설의 객관적 확률에 의하여, 참과 거짓 사이의 중간인 가설의 유효성의 정도에 의하여 실제로 의미되는 것을 기술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입증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나는 그리하여 확률 논리의 입장에 큰 영향을 미칠 양보들을 했다. 입증의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가설들의 객관적 확률이라는 개념은 이제 일관된 방식으로 정의(定義)될 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 확률 논리의 입장은 귀납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에 의하여 패퇴한다.

 

17. 확률서술들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 가설들의 객관적 확률이라는 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칭 경험서술들이 참일 리가 없고 단지 개연적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 견해는 논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분-가치 논리(two-valued logic)”의 관점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확률 논리의 관점으로부터 또한.

전칭 경험서술에 경험적으로 어떤 확률이 유효성의 정도로서 귀속될 수 있다는 견해를 우리가 표현하고 싶어 한다면, 이것은 이 서술에 관한 서술에 의해서만 객관적으로 확립될 수 있다.

이 서술은 가설보다 더 높은 유형이다. 그러나 그 서술 자체는 그리하여 유효성의 정도로서 확률 가치만을 지닐 수 있는 전칭 경험서술이다; 이것은, 가설에 대한 오류판정이 그 가설에게 긍정적인 확률 가치를 할당하는 서술을 또한 오류로 판정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밝혀진다: 그것의 유효성은 경험의 의존하여 그것은 확정적으로 참인 서술일 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개연적이라면 이것은 반대로 더 높은 유형의, 기타 등등 무한한 서술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확률서술들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를 붕괴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더 높은 유형의 확률들이 “1을 향하여 모일것이라고, 혹은 두 번째 체계의 확률은 통상적으로 1에 완전히 가까울 것이라고 서술하는 견해들과 다른 유사한 논증들은 이런 면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이 다른 방식으로 옳다할지라도, 그것들은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에 관하여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이 문장의 원문은 Even if they were otherwise correct, they could not change anything about the infinite regression인데 종속절의 동사가 were로 쓰였으나 의미 상 현재를 의미하는 듯하고 even if 다음에는 동사가 가정법으로 쓰이는 경우가 없으므로 원문의 동사 wereare, couldcan으로 쓰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한글번역자). (그것들은 전칭 경험서술들의 진실성을 뒷문을 통하여 확률 논리 속으로 도입하려는 미흡한 합리주의적 시도들을 구성할 터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본질적으로 옹호될 수 없는데 이유인즉 더 높은-체계의 가설들이 지닌 확률들은 더 낮은 체계의 가설들보다 더 확실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설이 경험에 의하여 반증된다면, 모든 체계들의 확률들은 0일 것이다.

확률서술들의 이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는 흄(Hume)의 논증보다도 귀납주의에게 아마도 훨씬 더 당혹스럽다. (Hume)의 논증은 귀납의 원리를 독단적으로 채택하는 것을 탈출구로서 여전히 남겨두었다; 우리가, 경험서술들은 (그리하여 여하한 귀납의 원리) 유효성의 개연적 정도을 지닐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면, 귀납의 [선험론적] 원리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개연적 유효성은 더 높은 유형의 전칭 경험서술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데, 그 서술은 반대로 물론 특정 확률로써만 틀림없이 유효하다; 그곳에 확률 입장의 불가피한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가 놓여있다; 그러나 확률 논리를 형이상학으로 만들려는 모든 독단적-합리주의적 시도들은 또한 이런 방식으로 붕괴한다. 이런 종류 가운데는, 예를 들어, 귀납의 원리가 없는 확률 논리는 무의미할 터이기 때문에 (정말로 심지어 일반적으로도

우리가 이미 귀납의 원리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확률 서술들은 의미가 없기때문에) 귀납의 원리가 수용될 수 있다고 선언하려는 라이헨바흐[Reichenbach] 시도가 무의미할 터이다) (앞 문장에서 닫힌 괄호표시는 원문에 없다. 의미상 앞 문장의 끝에 그 표시를 넣어야 할 듯하다: 한글번역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은 일반적인 자연에 관한 모든 지식에 대한 개념적 틀로서의 확률 논리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초월적) 동기는 자체의 목적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확률 논리는 심지어 귀납의 원리가 출현해도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마도 확률 서술들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납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와 다소 다른 종류라고 생각할 것이다; 확률 입장들은 흄(Hume)의 논증을 피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 입장들이 예기치 않게 새로운 난제들과, 새로운 회귀(回歸: regression)와 조우한다고. 왜냐하면 확률서술들의 회귀(回歸: regression)가 서술의 개연적 유효성은 저 서술 자체에 의하여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만 발생하는 듯이 보이는 반면, 귀납의 회귀(回歸: regression)는 귀납의 원리들의 회귀(回歸: regression)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오류일 터이다. 이것은 또한 귀납의 회귀(回歸: regression)의 경우이다. 이 사례에서의 차이점은 나의 다소 형식주의적인 재현에만 놓여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또 다른, 덜 형식주의적인 확률서술들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의 재현을 개괄하겠다.

우리가 가설에 관찰들에 근거한 객관적인 확률 가치를 할당한다면, (함축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개괄적으로 표현될 추정을 한다:

가설의 입증 정도는 또한, 얼마나 잘 이 가설이 미래에 입증될 것에 대한 어떤 표시를 제시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입증 정도는 틀림없이 우리의 신뢰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의 객관적인 행태에 대한 어떤 표시를 제공한다.)

이 서술은 첫 번째 체계의 확률론적 귀납의 원리일 터이다. 그 서술이 지금까지 입증되었다할지라도, 우리가 상응하는 두 번째-체계 원리, 기타 등등을 상정한다면 이것은 그 서술의 객관적인 확률 가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확률서술들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는 귀납의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와 동일하다. (형식주의적 재현에서, 회귀[回歸: regression], 더 높은 체계의 서술들 중 어떤 서술도 참으로만 간주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무한한 회귀[回歸: regression]가 된다.)

서술이 참이라는 것을 내가 참이라고 추정하는지, 혹은 서술이 개연적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개연적이라고 추정하는지는 귀납의 문제와 관련이 없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이 회귀(回歸: regression)는 다음의 명백한 결과를 우리에게 밝힌다:

자연법칙들이 [지금까지 입증된] 내일도 여전히 유효할 것인지를 아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없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한 한). 이 믿음을 객관화하는 것은 [독단적] 합리주의이다.

 

 

 

 

 

 

 

 

 

 

 

 

 

 

 

 

 

 

 

 

 

 

 

VII

 

사이비-서술

입장들

 

18. 사이비-서술 입장들: 문제에 대한 새로운 표현. 앞의 고찰들로 인하여 우리는 문제 상황에 관하여 결정적인 일반화를 할 수 있다.

서술이 유효한 것으로서 간주되지 않으려면 이것은 저 서술에 관한 서술에 의하여 표현되어야 한다; 저 서술이 거짓으로 혹은 개연적으로 지칭될 수 있는지, 혹은 우리가 그 서술에 어떤 다른 여하한 진리 가치(“이라는 가치를 제외하고) 할당하고 싶어 하는지와 관계없이.

이 두 번째 서술이나 어떤 다른 더 높은-체계의 서술이 무조건적으로 참일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회귀(回歸: regression)는 멈출 것이다. 그러나 이 서술들 중 어떤 서술도 무조건적으로 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ion)는 불가피할 것이다. 이 서술들 모두를 종합하여, 우리는 사실상 말한 게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이분-가치 논리(two-valued logic)”에 또 다른 진리 가치를 추가할 어떤 이유도 더 이상 없다. (원칙적으로 단칭 경험서술들은 틀림없이 항상 확정적으로 검증될 수 있거나 오류로 판명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단계는 전칭 경험서술들에게 이익이 될 수 없다.)

전칭 경험서술들은 (과학에 대하여) (증명가능하게) 참일 리가 없다 이것은 평범한-서술 입장들에 대한 비판의 결과였다.

그 서술들에는 [증명가능하게] (긍정적인) 진리 가치가 있을 리가 없다 이것은 확률 입장들에 대한 비판의 본질적인 결과이다.

이제 이 사건들의 상태로부터 사이비-서술 입장들, 자연법칙들인 전칭 경험서술들심지어 진정한 서술들도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그 입장들은 서술들이라고 가장하는 반면, 흔히 언어는 부정확하여 자주 오해와 사이비-문제들을 야기한다. 일반적으로 현대적 논리로부터 서술의 외부적 형태가 우리에게 자체의 실제적인 논리적 형태를 추론할 귀중한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동일한 것이 여기서 유효하다.

자연법칙들의 서술 형태는 단지 그 법칙들의 문법적 가리개이다. 자연법칙들은 원칙적으로 최종적으로 검증 가능하지 않은데 그것은, 논리적 의미에서, 자연법칙들이 서술들도 아니고 명제들도 아니라는 확실한 표시이다. 자연법칙들은 사이비-서술들이다.

그리하여 이 견해는 평범한-서술 입장들과 진정한 서술이... 원칙적으로 확정적으로 검증 가능하거나 오류판명 가능하게 [되는 것]은 본질적이라는 근본적인 추정을 (위에서 슐릭[Schlick]의 말로 제시된) 공유한다.

자연법칙들은 사이비-서술들이다 귀납주의가 이 입장으로 강제로 들어온다. 그러나 자연법칙들이 서술들이 아니라면 자연법칙들은 무엇인가?

자연법칙들이 서술들일 리가 없다고 주장하기만은, 혹은 자연법칙들을 사이비-서술들로 지칭하기는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자연법칙들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이 언급될 수 없다면, 지식론은 아마도 포기될 것이다. 귀납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사이비-서술 입장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언급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다음 질문에 대하여 알맞게 만족스러운 답변이 필요하다: “자연법칙들이 서술들이 아니라면 자연법칙들은 무엇인가?”

이것이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문제 상황이다.

지금까지 이용 가능한 유일한 답변은, 내가 아는 한, 슐릭(Schlick)에 의하여 자신의 논문 현대 물리학에서의 인과성(Causality in contemporary physics)”에서 제공되었다. 이 논문은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주로 자연 철학에서의 문제를 다루고, 이 문맥에서만 그 논문은 인식론적 문제들 다룬다. 자연법칙들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그리고 그와 함께, 귀납의 문제에) 최종적 답변을 제공하는 것은 슐릭(Schlick)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견해에 대하여 짧은 개론을 정말로 제공하는 반면, 그는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바와 같이 “... 여기서... 겉으로 보이는 모순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이그렇게 한다.

비록 내가 해답을 위한 이 시도를 귀납주의에 대한 마지막 의존으로서 볼지라도, 동시에 나는 그 시도를 자체의 강력한 입장들 중 한 가지 입장으로서 간주한다.

이 입장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비판하기 위하여, 나는 슐릭(Schlick)에 의하여 개괄된 논증들을 그 논증들의 마지막 함축적 의미들까지 추적하여 그 의미들의 연관성들을 찾아서 독립적으로 그 의미들을 끝까지 생각해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것은 나의 격렬한 논쟁의 부분들이 예상되는 반대자들을 겨냥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19.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지시들로서의 자연법칙들. 자연법칙들이 서술들이 아니라면. 자연법칙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슐릭(Schlick)에 의하여 제시되는 답변은 자연법칙은... ‘서술의 논리적 특징을 지니지 않지만, ‘서술의 형성에 대한 지시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는 부언한다: “나는 이 개념과 이 구절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에게 빚지고 있다.” (내가 알기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자신은 아직까지 이 개념을 발표하지 않았다.)

자연법칙들은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지시들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입장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들에게 자연법칙들이 실제 생활에서 도움이 된다면 목표들을 상기시킬 필요만 우리에게 있다; 이것은 또한 자연에 관하여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자연법칙들의 역할을 설명할 것이다.

자연법칙들의 목표는, 자연에 대한 기술들만을 자연법칙들이 제공함으로써 분명히 소진되지는 않는다 (만약 저것이 자연법칙들이 실제로 하는 것이라면). 아무튼 자연법칙들은 자연적인 사건들에 관한 보고서들은 아니다. 자연법칙들의 목표는 또한 자연을 기술하는 데서 우리를 돕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에게 자연법칙 자체는 필요한 적이 없다; 우리는 단칭 서술들로부터 (특정 사건들) 다른 단칭 서술들을 추론하기 위하여 자연법칙을 이용할 따름인데, 다른 단칭 서술들의 도움으로써 우리는 다른 특정 사건들을 이해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예측들을 도출하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자연법칙들을 궁극적으로 사용한다. 단칭 서술들로서 이 예측들은 확정적으로 검증될 수 있고, 그리하여 그 예측들은 의문의 여지없이 진정한 서술들이다.

자연법칙들로 인하여 우리가 단칭 서술들을, 그리고 특히 예측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또한 믿는 바와 같이) 실제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또한 자연법칙들의 가장 중요한 기능들이다. 자연법칙들은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지시들로서 규정될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과 슐릭(Schlick)의 견해는 그리하여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법칙들이 서술들이 아니라면 자연법칙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변을 제공하기에 충분한가?

나는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믿는다 (이 문장의 원문은 I believe that it is not enough인데 영어 표현으로는 I don’t believe that it is enough가 옳다. 한글번역자). 단칭 명제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진정한 서술들인데 자연법칙들이 그렇게 해석될 것과 꼭 그렇게 많이 명제들을 형성에 대한 지시들로서 해석될 것이다.

이 용어사용법에 강조할 의도가 있는 단칭 서술들의 형성에 대하여 자연법칙들이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통상적으로 예측들은 자연법칙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거나 연역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표현된다. 그러나 자연법칙들은, 우리가 다른 단칭 서술들을 또한 연역할 수 있는 많은 단칭 서술들과 이 특징을 공유한다.

모든 탄도들은 대략적으로 포물선이라는 보편적 법칙은 (우리의 이전 사례들로 한 번 더 돌아가서) 단칭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지식들로서 이해될 (혹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과 슐릭[Schlick]에 따라서 이해되어야 한다) 것이다. 포병이 특정 발사체의 탄도를 계측하고, 다시 말해서, 예측하고 싶어 한다면 그 포병은 지시에 따라서 나아가서 예측을 표현할 것이다: “이 발사체의 탄도는 개략적으로 포물선의 형태를 (보다 정확하게, 탄도 곡선) 지닐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 확정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단칭 서술인 이 예측도 반대로 그 포병이 추가적 예측을 도출하는 것을 돕는 지시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발사체는 이 장소에 명중할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서술들은 또한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지시들로써 간주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법칙들이 이런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연법칙들이 진정한 [서술적] 서술들이라는 주장을 부정한다기보다는 뒷받침하는 듯이 보일 터이다.

슐릭(Schlick) 다음과 같이 올바르게 언급한다: “관찰들과 실험들은 그것들을 통하여 우리가 자연과 직접적인 접촉을 시작하는 행동들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와 우리 자신들 사이의 관계는, 명제적 표현들의 문법적 형태를 지닌 서술들에서 밝혀지는데 그 표현들의 실제적 의미는 그러나 그 표현들이 가능한 행동들에 대한 지시들임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자연법칙들에 대해서와 꼭 그 만큼 단칭이고 틀림없이 진정한 그리고 경험적인 서술들에 대해서도 또한 주장될 수 있을 터이다. 내가 나의 집에 처음 온 손님에게 전등 스위치는 구석의 왼쪽에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확정적으로 검증될 수 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없이 진정한 서술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의 실제적 의미행동에 대한 지식임에 놓여있다고, 그것은 규칙이나 명령을 포함한다고 (정말로 조건적이거나 가설적 명령, 목표적인 행동에 대한 규칙),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틀림없이 다음과 같다고 우리는 말할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조명을 원한다면, 왼쪽 구석에 있는 스위치를 켜시오!”

(칸트는 모든 이 가설적 명령들”, 모든 지시들, “일반상식의 규칙들”, 기타 등등이 숨겨진 경험서술들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말해서, 자연법칙들이거나 단칭 예측들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서술들은 명령들로 변화시키는, 혹은 서술들은 실용적방식으로 변용하는 (그리고 반대의 경우) 이 가능성의 또 다른 사례는 내가 보기에 언급할 가치가 있다. “지식 획득은 법칙-같은 규칙성들의 발견이다라는 서술은 정의(定義)인 분석적 판단이다. 그 서술은 쉽게 (가설적) 명령으로 변환될 수 있다: “당신이 지식을 획득하고 싶어 한다면 법칙들을 찾아라!” 그리하여 나는 인과성의 원리법칙들을 통하여 사건들을 기술하기 위한, 규칙성들을 찾자는 초대나 규칙 대변하다는 슐릭(Schlick)의 견해를 다만 지식에 대하여 베일에 가려진 정의(定義)로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양자물리학이 표면적으로 충분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자의적으로 정밀하게 전자의 위치 동시에 속도를 알 수 없다, 우리의 지식은 다시 말해서 우리의 법칙들 찾기가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불확정 관계들때문에 특정 한계들에 직면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렇다면 물론 우리는 또한 이것을 명령적이거나 실용적 방식으로 바꿀 수 있을 있다. 슐릭(Schlick) 법칙들을 통하여 사건들을 기술하자는... 초대저 경계들 안에서... 소용없거나 무의미하거나, 성취될 수 없다고 서술할 때 바로 그런 실용적 형태로의 뒤바뀜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불확정 관계들이 확립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 다시 말해서 법칙들의 발견이 원칙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이것 자체가 지식이다: 불완전의 범위는 법칙에 의하여 구획이 설정된다.

(이 법칙은, 인과성의 원리가 거짓이라는 주장을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완전한 법칙-같은 규칙성에 대한 주장을 인과성의 원리라는 용어와 (3절 및 5) 연결하고 싶어 한다면. 그리고 선험론에 대한 비판을 돌아가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합리적 과학의 전능에 대한 자랑스러운 주장(그 표현은 카르납[Carnap]의 것이다) 칸트의 인과성 원리와 완전히 대등한 것으로 판명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주장인 문제가 조금이라도 표현될 수 있다면, 그 문제에 답변하는 것 또한 가능하,”는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관계들의 관점에서 거짓인데 왜냐하면 전자의 움직임의 정확한 상태에 관한 문제는 답변될 수 없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과성의 원리처럼,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주장은 우리가*1 그것을 시험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러나 그리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으로서 간주한다면 구원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법칙들이 서술들이 아니라면 자연법칙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든 자의적인 답변이 사이비-서술 입장에 대한 만족스러운 정당화로서 충분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연법칙들로 규명될 수 있는 구조물들이 정말로 진정한 서술들이 아니라는 증명을 요구해야 한다; 자연법칙들이 단순히, 참이나 거짓일 수 있는 진정한 서술들을 감추는 표면적인 사이비-서술들이라는 증명.

이 요건은 다음 것에서 극도로 중요한 것으로서 판명될 것이다. 아무튼 자연법칙들이 지닌 의심의 여지없이 실용적인 기능들을 가리키는 것만은, 자연법칙들의 실용적이거나 명령적이거나 지식적 특징을 가리키는 것만은 자연법칙들의 사이비-서술 특징을 확립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지적이 귀중하다고 정말로 생각한다. 이 지적은 혹시 해결책의 탐색될 곳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다.

자연법칙들과 단칭 경험서술들은 이것이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논리적 구조물들의 (서술들의는 말할 것도 없고) 두 가지 다른

등급들이다.

구조물들의 이 두 가지 등급들이 공유하는 것은 정확하게 그것들이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지시들로서 혹은 실제적 규칙들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다면 자연법칙들에 대하여 더 밀접한 정의(定義)를 향하여 길을 가리킬 터이다. 자연법칙들은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저 지시들일 터이고 그것들은 (자체가 서술들인 지시들과 대조적으로) 여전히 추가적으로 결정될 필요가 있는 구체적인 속성들을 지닌다.

이 속성들은 무엇인가?

 

20. “거짓인가 혹은 유용한 무익한인가? 일관된 실용주의.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따르면, “진정한서술들의 구체적인 속성들은 그 서술들이 확정적으로 검증될 수 있거나 오류 판명될 수 있음에 놓여있다. 우리는 분명히 이와 동등한 수준에서 자연법칙들의 구체적인 속성들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슐릭(Schlick) 자연법칙들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런 지시는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지만 좋거나 나쁘거나, 유용하거나 무익하다.”

이것은 내가 믿는 바,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기본적 개념을 요약한다. 자연법칙들에 여하한 진리 가치를 조금이라도 (심지어 자연법칙들의 오류판정의 경우에 부정적인 것도) 할당하는 것은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실용적 가치를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아무튼 자연법칙들에 할당되는 특정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가치들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이 유지되는 (적어도 얼마의 시간 동안) 과학은 법칙들을 버리기 때문이다. 법칙들의 부적당함을 증명하기와 그 법칙들을 더 나은 법칙들로 대체하기, 이것이 과학의 진보가 놓여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과학은 자체의 결정에 도달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과학은 자체의 평가들을 정당화하는가?

예측들이 도출된 자연법칙들에 대한 평가를 결정하는 것은 예측들의 운명이다. 오직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예측들의 형성을 자연법칙들의 근본적인 기능으로서 간주하는 데서 옳을 터이다.

자연법칙들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건들에 관한 서술들을 도출한다; 다시 말해서, 예언들, 예보들, 예측들. 예언이 사실이 되면, 예측이 검증되면, 우리는 자연법칙에 긍정적인 가치를 또한 할당할 것이다. 예측이 오류로 판정되면 우리는 이것을 자연법칙의 실패로 간주할 것이다.

자연법칙에 대한 평가는, 참인 예측들의 도출과 관련하여 자체의 적합성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것은, 자연법칙들에 대한 평가가 순전히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일이라는 견해에 대한 토대이다. 자연법칙은 예측이 이라면 예측들의 도출에 대하여 유용하다; 자연법칙은 거짓으로 판명되면 무익하다.

그렇다면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지시들로서 자연법칙들을 해석함은 정말로 중요한 실마리를 포함한다 (비록 독자적으로는 그것이 너무 비결정적일지라도). 자연법칙들은, 그런 상태로 직접적인 진리 가치를 지니지 않는, 정말로 심지어 어떤 인식적 가치도 지니지 않지만 예측들의 도출에 대하여 정말로 실제적 가치를 지닌 지시들의 등급으로서 정의(定義)된다. 인식 과정에서 자연법칙들의 역할과 지식에 대한 자연법칙들의 가치는 순전히 실용적이다.

이 견해는 실증주의와 실용주의의 일관된 통합이다.

엄격한 실증주의의 경우에서처럼, 이 견해는 경험될 수 있는 것에 관한 서술들만 인정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과학이 이 서술들만으로써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참작한다. 그리하여 이 견해는 이 진정한서술들에 자연법칙들이라는 사이비-서술들을 덧붙이는데 그 사이비-서술들을 이 견해는 순전히 실용적 구조물로서 간주한다.

그러나 실용주의가 유용성을 진리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지닌 (정말로 실용주의는 진리를 유용성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16절 참고) 반면, “사이비-서술 입장은 모든 것을 유용성과 진리 사이의, 실용적 가치와 진리 가치 사이의 화해될 수 없는 대립의 존재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유효성은 영원하다 (이미 16절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서술이 참이라면 그 서술은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이다. 대조적으로 실용적 가치나 유용성은 항상 구체적인 목표에 의존하여 경우에 따라서 변화할지도 모른다.

이 결론들은 자연법칙들에 매우 잘 적용되는 듯이 보이는데 이유인즉 자연법칙들에 대한 평가는 각각의 경우에 예측들의 검증에 의존할지라도, 확정적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이비-서술 입장이 진정한서술들에 관하여 실증주의적인 반면, 그 입장은 자연법칙들에 (귀납의 문제에 관하여 물론 가장 관련이 있는) 관하여 특히 급진적인 형태의 실용주의를 대변한다. 이 분석에서 (귀납의 문제만 고려되는) 나는 이 입장을, 그 입장에 따라서 모든 것은 진리 가치와 실용적 가치 사의 대립에 의존하는데, “일관적인 실용주의로 지칭하겠다.

이 입장은 실제로 옹호될 수 있는가? 대립은 실제로 화해 불가능한가?

 

21. 일관적인 실용주의의 난제들. 다양한 사례들이 실용적 가치와 진리 가치 사이의 갈등에 관하여 주어질 수 있을 터이다.

특별히 두드러진 사례는 거짓말에 관한 사례이다. 거짓말이 자체의 목적을 성취하면 거짓 서술은 유용하다고 판명된다; [자체의] 목적에 대하여 그 거짓 서술은 최소한으로 말해서 (알려진) 참인 서술보다도 더 유용하다.

인식 과정에서 허구(파이잉거[Vahinger] 의미에서) 의하여 수행되는 역할은 유사할 터인데, 다시 말해서, “발견 학습적 원리로서 지식에 대하여 귀중한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거짓 추정일 터이다. 사실상 과학은 실수에 의하여 혹은 거짓 서술에 의하여 매우 유익한 방식으로 자극을 받을 수 있다.

그리하여 거짓 서술은 심지어 지식의 목적들에 대해서도 유용할 것이다 틀림없이 진리 가치와 실용적 가치의 독립성에 대하여 확신을 주는 논증인데 그 독립성에 일관적인 실용주의가 의존한다.

이 사례들과 다른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토론될 필요가 있는 일관적인-실용주의적 입장에 대하여 문제들이 남는다. 나의 견해로 이 난제들이 극복된다는 조건으로만 일관적인 실용주의가 귀납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진지하게 고찰될 수 있다.

슐릭(Schlick)참인 서술과 유용한 규칙 사이에의, 그리고 거짓 서술과 무익한 규칙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깊은 숙고를 요구한다고 서술할 때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러나 (슐릭[Schlick]과 달리) 나는 이 문제들의 근원을, 지시들은... 문법적으로 정상적인 서술들로 가장하고 [나타난다]”라는 사실에서 보지 않는다; 이것은 (소위 일반적인 언어 비판처럼) 매우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을 터이다.

실제적 문제는 대신에, 진정한 서술들은 항상 실용적 변용에서 지시들로서 나타날 수 있을 터이라는 관찰과 관련된다 (19절 참조).

이 경우들에서, “유용한무익한이란 실용적 가치들은 (지시들에 귀속될 수 있는) 통상적으로 단지 거짓이라는 진리 가치들의 변용들로 판명된다. 그곳에 문제가 놓여있다.

인정되는 바, 그런 변용가능성은, 개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규제하는 저 규칙들(다시 말해서, 법률적 의미에서의 법칙들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에 몰두하는 행동들...”에 관한 저 (특정) 규칙들에 적용된다. 오직 저 규칙들만 여기서 관련되고 그 규칙들은 통상적으로 기꺼이 변용될 수 있다.

이것은 19절의 사례들에 의하여 예시될 것이다. “당신이 조명을 원하면, 왼쪽 구석에 있는 스위치를 켜라!”는 지시는, 나의 손님이 스위치를 발견하여 조명을 켠다면 유용한 것으로 판명된다. 물론 우리는, 이 행동을 통하여 나의 손님은 진정한 서술 즉, 예측을 (“왼쪽 구석의 스위치가 켜지면, 조명이 들어올 것이다”) 검증했다고 동등하게 잘 말할 수 있을 터인데, 그 예측은 자체의 실용적 변용에서 지시일 터이다.

다른 사례를 들어, 발사체가 명중할 장소를 미리 계산하고 싶어 하는 포병이 이 발사체는 정확한 포물선의 탄도를 (중포[重砲]의 경우에 포물선으로부터 상당히 이탈하는 탄도 곡선 대신에) 따를 것이라는 (특정) 지시를 사용한다고 상상하라; 그 포병이 그렇게 한다면, 그는 충격 지점의 예측에 대한 이 지시가 무익함을 발견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이것은 정확하게, “이 발사체의 탄도가 정확하게 포물선의 형태를 지닐 것이다라는 상응하는 (진정한) 서술이 거짓으로 판명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용적 가치들과 진리 가치들이 정말, 특정 조건 하에서, 서로 독립적임이 전적으로 옳은 반면 이 사례들은 다른 경우들에서 실용적 가치들과 진리 가치들이 [서로 의존적이고 정말로] 실제로 동일할 것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참인 서술은 특정 목적들에 대하여 항상 실제적으로 유용하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인식적 목적들에 대하여 즉 자기 자신의 검증에 대한 지시로서. 거짓 서술은 실제적 의미에서 (동일한 목적들에 대하여) 동일하게 항상*1 무익하다. (물론 특정 참인 서술이 완전히 무익한, 기타 등등인 다른 목적들이 항상 있다.) 특히 시험이나 검증이 요구될 때, 실용적 가치는 항상 진리 가치에 의존한다.

동일한 것이 자연법칙들의 평가에도 적용된다. 자연법칙들은, 도출된 예측들이 참이면 긍정적으로나 유용한 것으로서 평가될 것이고 예측들이 거짓이면 부정적으로나 무익한 것으로서 평가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분석에서 자연법칙에 진리 가치인 이 할당되어서는 안 됨을 확립했는데 이유인즉 자연법칙의 진실성은 원칙적으로 최종적으로 결정된 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이 유용한 것으로서 판명된다면 긍정적인 실용적 가치가 그 자연법칙에 할당될 가능성이 높은데 왜냐하면 실용적 가치들은 잠정적으로 채택될 수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 수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제로 보여주는 것은 오직 실용적 가치들이 얼마나 신축적이고 부정확한지이다. 진리 가치들에게 실용적 가치가 할당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 구조물의 사이비-서술 특징에 대한 충분한 증거로서 전혀 고려될 수 없다 (이 문장의 원문은 It can by no means be considered a sufficient proof of the “pseudo-statement character” of a logical construct that the latter can be assigned a pragmatic value인데 the latter[후자: 後者]truth values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글 번역했으나 확실하지 않다: 한글번역자). 표현의 실용적 방식은, 일반적으로,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사실상 변장한 진리 가치들이 분명히 아닌 오직 저 실용적 가치들 혹은 거짓인 가치들의 [] 실용적 표현 방식으로의 변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 실용적 가치들의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지시들(과학에서 사용되는 바로서의 자연법칙들) 할당되는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이비-서술 입장들을 신중하게 조사해야 할 것이다 (이 문장의 원문은 We shall have to examine the pseudo-statement positions very carefully to ascertain whether in fact only those pragmatic values that are definitely not truth values in disguise, or mere translations of the values “true” and “false” into [the] pragmatic mode of expression, are assigned to the former’s “instructions for the formation of statements” (natural laws as they are used in science)인데 the former[전자: 前者]를 실용적 가치들로 해석했으나 확실치 않다: 한글번역자). “일관적인 실용주의에 관한 이 문제들은 실용주의적 용어사용법의 신뢰불가능성과 관련되는데 그 신뢰불가능성은 일관성의 성취에 합당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이 문제들로 인하여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이 입장에 따라서 자연법칙들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적시함이 혹시 가능하지 않을지의 문제로 돌아간다.

우리는 보다 정확한 정의(定義)을 향하여 어떤 통로를 따라야 하는가?

다음 절에서 나는, 처음에 상당히 합당하게 보이는 통로를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에 의한 다양한 언급들이 그 통로를 언급한다는 이유만을 조건으로 그 통로를 조사해야 할 것이다. 그 통로는, 자연법칙들은 소위 명제적 기능들이라는 (혹은 아마도 또한 명제적 기능들의 이용에 대한

지시들) 견해이다.

그러나 이 통로는 통상적으로 다소 장기화된 우회로로 판명될 것이다. 이 통로는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하여 (몇 가지 긍정적인 부차적 결과들을 낳은 후에)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이미 표현된 의혹들을 현저하게 넘어서지 못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이미 도달한 다소 흔들리는 실용주의의 입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오직 36절에서만 우리는 다시 귀납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조사라는 곧은길에 들어설 것이다.

불행하게도 불가피한 논쟁으로 인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23절과 35절 사이의 절들에서 다소 난해한 용어사용법을 (“기호논리학이라는 용어사용법*) 도입하여 아마도 합당하게 좋지 못한 것으로 느껴질 구체적인 논리적 문제들을 상세하게 토론한다. 그것은 특정 기호논리학적 세부사항들에 관한 불가피한 비판일 것이고, 그 세부사항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나는 때때로 심지어 주제로부터 벗어나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사용법적 및 논리적 언급들 가운데서 오직 31절의 함의* 관한 토론만 귀납의 문제에 대한 연역주의적-경험주의적 견해에 관하여 중요성을 띤다.

 

22. 순전히 실용적 구조물로서의 도구와 도식. 자연법칙들은 실제로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이비-서술 입장이 그리고 일관적인 실용주의의 형태가 의도하는 의미에서 - 대하여 만족스러운 답변을 발견하기 위하여 어떤 통로를 우리가 따를 수 있을 터인가?

우리는, 원칙적으로 실용적으로만 평가될 수 있는 특징적이고 전형적인 구조물들을, 다시 말해서, 그 구조물들의 실제적 가치들이 단지 변장한 진리 가치들이라는 문제가 있을 리가 없는 곳을 찾아야 한다.

그런 구조물들의 정체가 밝혀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구조물들이 정당하게 자연법칙들과 나란히 놓일 수 있다면 아마도 자연법칙들에의 고유한 특징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의(定義)를 향한 그리하여 또한 일관적인 실용주의의 다소 불확실한 입장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을 향한 조치가 취해졌다.

나는 도구들을 그런 순전히 실용적 구조물들로 여긴다. 도구는 특정 경우들에서 순전히 실제적인 역할들을 제공하기 위해서존재한다. 망치나 펜치는 절대적 진리 가치와 같은 것을 결코 지닐 수 없다. 특정 도구의 가치는 그 도구가 우연히 놓이는 특정 목적에 대한 그 도구의 적합성에 항상 의존한다. 그리하여 도구의 적합성은 경우에 따라서 다를지도 모른다. 게다가 기구, 측정 장치들과 기기들과 같이 특정적으로 인식적 목적들에 부합하는 도구들이 또한 있는데 그 도구들은 진정한 경험 서술들에 형성에 대하여 큰 실제적 가치를 지닌다. 게다가 그런 기기들의 가치는 자연법칙들의 가치와 꼭 같이 그 기기들의 도움을 받아서 도출되는 서술들의 진실성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이 기기들 자체에게 결과적으로 진리 가치가 할당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다.

유사점, 다시 말해서, 기기들이나 도구들이 지닌 실용적 특징의 혜택은 이런 면에서 일관적인 실용주의의 목적들에게 전적으로 적당한 듯이 보인다.

이제 자연법칙들과 같은 지성적 [혹은] 논리적 구조물들이 도구들과 또는 재료적 연구 기기들과 비교될 수 있는지는 아마도 여전히 의문시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유보사항들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재료적 도구들과 비교될 가능성이 높은 지성적, 논리적 도구들, 즉 논리적 도식들이 또한 있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가 연속적인 실험적 관찰행위들의 평가하고 싶어 한다면 그는 통상적으로 다양한 도식들을 이용한다. 그는, 도식적으로 결정되는 특정 절차에 따라서 채워지는 빈 표들, 빈 도식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시작한다. 도식들 안에 삽입되는 자료들은, 또한 도식적으로 결정되는 특정 절차를 따르는 관찰행위들을 통하여 획득된다.

그런 도식은 실제적이거나 비실제적인 방식으로 설치될 것이고, 그런 도식은 유용하거나 무익할 것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런 도식은 지식이 결코 아니고, 서술이 결코 아니다. 그런 도식은 진정한 서술들을 올려놓은 일종의 선반인 기기이다; 본질적으로 그런 도식은 비어있고, 그런 도식은 진리 가치를 지닐 리가 없다.

우리는 가장 다양한 분야들에서 그런 도식들을 지성적 장치들, 논리적 도구들 사용한다. 과학 논문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나 개요를 논문의 내용처럼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지만 합당하고 분명하고 적용 가능하며 유용한 도식 이용할 것이다.

그런 도식들은 또한 과학적 개념들의 형성에서, 특히 모든 체계적 분류행위들에서 -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체계적인 식물학과 체계적인 동물학은, 참이나 거짓으로 지칭될 수는 없지만 유익하거나 무익하고 통합되거나 일관성이 없는 (그리고 덧붙여, 자연적인 친척관계를 지적하는 목적과 같은 특정 목적들을 이룩하거나 이룩하지 못할) 분류성 도식들로서 간주된 수 있다.

자연법칙들이 이런 의미에서 도식들로서 또한 간주될 것이 증명될 수 있을 터라면, 참인 서술들과 유용한 규칙들의 상호적 변용가능성에 의하여 일관적인 실용주의에 대하여 제기되는 문제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해결될 터이다.

 

23. 명제적 기능들로서의 자연법칙들. 자연법칙들이 논리적 도식들일 가능성은 보다 면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사실상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도식들로서 (슐릭[Schlick]의 의미에서 규칙들로서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해될 가능성이 높은 전형적인 논리적 도식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것들은 소위 명제적 기능들인데 새로운 논리학에서 (“기호논리학”)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명제적 기능은 무엇인가?

나폴레옹은 칼을 찼다라는 문장과 같은 (단순) 문장은 전체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만 참이거나 거짓이다. 이 서술의 단편그것이 무엇이든 자체가 서술은 아니어서 그 단편은 더 이상 참이나 거짓으로 지칭될 수 없다. 이제 우리가 이 서술을 어떤 다른, 유사하게 구축된 서술들과 (“나폴레옹은 모자를 썼다모차르트는 칼을 찼다와 같은) 비교한다면, 서술에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서 즉 독립적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으로서 간주될 수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명제적 기능은 이제, 하나 이상의 독립적으로 교환 가능한 요소들이 서술로부터 삭제될 때 남아있는 서술의 단편으로서 보다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 “빈칸들” (“논증 공간들”), 다시 말해서, 요소가 삭제된 장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표시되어야 (“...”x에 의하여) 하는데 예를 들어, “... 칼을 찼다x는 칼을 찼다이다.

다시 말해서, 서술 단편들 x는 칼을 찼다xy를 찼다명제적 기능들로 지칭된다.

그런 명제적 기능들이 참이나 거짓일 리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기능들은, 적당한 논증 가치들을 (고유한 이름들이나 보편적 개념들) 빈칸들에 삽입함으로써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도식으로서 사용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방식으로, 명제적 기능은 다시, 참이거나 거짓일 서술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xy를 입고 있다는 명제적 기능에서 우리는 x 대신에 시저, y 대신에 토가를 대입할 수 있을 터이다. 이것은, (아마도) 참인 서술을 낳는다. 그러나 예를 들어 우리가 x에 대하여 시저를 그리고 y에 대하여 꼬리들을 대입한다면 우리는 꼭 같이 쉽게 거짓 서술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모든 (진정한) 서술들과 위에 제시된 모든 사례들은 유사하게 구축된. 그 서술들은 동일한 명제적 기능에 근거한다.

자체가 어떤 진리 가치도 지닐 리가 없는 서술들의 형성에 대한 도식으로서, 명제적 기능은 (“서술-기능”) 서술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명제적 기능들은 서술들의 단편들이다. 그 기능들에는 빈칸들이나 논증 공간들이 있다. 빈칸들을 표시하는 부호들은 전적으로 자의적이다. 글자들 대신에, 우리는 점들이나 십자들이나 원들을 사용할 수 있을 터이다. 이 부호들은 흔히, 이 공간들에 다양한 논증들이 대입될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변수들로서 언급된다. 빈칸들에 대입되는 논증들은 흔히 변수가 추정하는 가치들로서 언급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표현의 은유적 형태들일 따름이다. 우리는, “xy와 같은 변수들이 대상을 언급하는 부호들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자리-지킴들이고, 그것들은 홀로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명제적 기능에, 예를 들어 xx를 입었다처럼, 하나 이상의 빈칸이 있다면 단 한 가지 논증에 (예를 들어 시저”) 대하여 그 논증이 명제적 기능을 충족하는(다시 말해서 그 논증을 대체하면 명제적 기능이 참인 서술로 변형되는지 혹은 명제적 기능을 충족하지 못하는지 (다시 말해서 그 논증이 명제적 기능을 거짓 서술로 변형시키는지) 말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한 쌍의 가치들이 주어진다는 (예를 들어, “시저토가”) 조건으로만 우리는 그 기능이 충족되는지 혹은 아닌지를 말할 수 있다. 동일한 것이 세 가지 이상의 논증 공간들을 지닌 명제적 기능들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유효한데 예를 들어, 명제적 기능 “...도와 ...도 사이의 온도들에서, 화합물...() ... 색깔을 띤다로 아마도 관찰에 대한 도식으로서 작동할 명제적 기능이다. 우리는 빈번히, 몇 가지 논증들의 대체를 통하여 참이나 거짓 서술들을 낳는 (예를 들어, “x씨는 y시의 z거리, w번지에 산다”) 유사한 도식들을 사용한다.

이 모든 것은 완전히 간단하다. 그러나 어떻게 이 명제적 기능들이 자연법칙들과 관련될 것인지는 아직 완전하게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연법칙들과 명제적 기능들 사이에 완전히 긴밀한 관계들이 확립될 수 있음을 밝히려고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사례의 도움을 받아서) 노력할 것이다.

몇 개의 돌을 던짐으로서 실험을 실시하자. 개별적인 던짐에는 숫자가 붙는다. (숫자들은 던짐들의 고유명사들로서 간주될 것이다.) 각 던짐의 발사체는

측정들에 의하여 (예를 들어, 느린 동작으로 재생되는 필름의 도움을 받아서) 정확하게 결정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돌 하나를 (1번 던짐) 던지고 그 탄도가 개략적으로 포물선의 형태를 지닌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단칭) 서술을 표현한다: “1번 던짐에서 돌이 방금 추적한 탄도는 개략적으로 포물선의 형태를 지닌다”, 또는 보다 간단하게: “1번 던짐의 탄도는 포물선이다.”

2번 던짐과 3번 던짐 및 상응하는 측정들 다음에, 나는 이 던짐들에 관하여 유사한 서술들을 도출할 수 있다. 이제 나는 이 서술들이 동일한 도식에 근거함을, 그리고 던짐들의 숫자들이 (돌들과 시간과 위치에 관한 정보뿐만 아니라) 독립적으로 교환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지금 (허용 불가능한) 일반화나 귀납을 만드는 대신에, 서술들이 근거한 명제적 기능을 격리시킨다: “x번 던짐의 탄도는 포물선이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명제적 기능은 논증 “1”. “2” 그리고 “3”에 의하여 충족된: 다시 말해서 논증들의 대입을 통하여 명제적 기능은 참인 서술들을 낳는다. 나는 “4”, “5”, 기타 등등과 같은 다른 논증 가치들이 또한 나의 명제적 기능을 충족시킬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명제적 기능을 도식으로서 지금 사용할 수 있는데 이 논증들의 대입에 의하여 진정한 서술들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더욱 특히 나는 이 진정한 서술들이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예측들을 표현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나는 이 예측들을 검증하거나 오류 판정할 수 있다.

자연법칙들은 혹시 명제적 기능들과 (가령, “x번 던짐의 탄도는 포물선이다와 같은 형태의) 동일시 되어야할까?

자연법칙들을 명제적 기능들로서 접근하는 것은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하여 매우 매력적인 해답이다. 사실상 그 입장에 따라서 자연법칙들이 명제적 기능들로서 간주되어야 한다고 카르납(Carnap)이 언급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카르납(Carnap)의 구절이 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사건들의 상태가 명제적 기능에 의하여 혹은 서술에 의하여 언급되는가? 여기서 구별이 필요하다: 사건들의 개별적 상태들은 서술들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고, 사건들의 보편적 상태들은 명제적 기능들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다. 언어적 표현들은 이 두 가지 형태들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그 다음에 카르납(Carnap), 자신의 연구의 이 지점에서 자신이 사건들의 보편적 상태들을 다루고 있다고 서술하면서 (괄호에 넣어)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동일한

것이 자연법칙들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의 상태들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그에 따라서 자연법칙들이 명제적 기능들이라는 입장을 카르납(Carnap)이 옹호하고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 (나는 슐릭[Schlick]과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이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연법칙들이 명제적 기능들이라는 견해는, 슐릭[Schlick]이 명시적으로 그리고 내 견해로 올바르게 거부하는 인식론적 입장과 가깝다: 소위 규약주의[conventionalism].)

여기서 우리는, 아무튼, 자연법칙들은 단지 명제적 기능들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견해를 한 가지 가능한 사이비-서술 입장으로서 유지할 수 있다. 과학들을 통한 자연법칙들에 대한 평가는 그렇다면 순전히 실용적 문제일 터이다. “x번 던짐의 탄도는 포물선이다예측들을 하는 데 대하여 유용한 도식일 터인 반면, 예를 들어 x번 던짐의 탄도는 쌍곡선이다라는 명제적 기능은 쓸모없는 도식일 터이다.

이 사이비-서술 입장은, 다시 말해서, 자연법칙들은 명제적 기능들이라는 견해는 후속되는 것에서 [] 첫 번째 사이비-서술 입장으로서 간략하게 언급될 것이다 전적으로 간단하고 타당하게 보인다. 처음 보기에 이 견해가 특수한 인식론적 문제들을 야기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규약주의로 언급되는 것에 관한 인식론적 토론을 알고 있고 규약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의 논쟁을 추적했던 사람들은, 규약주의에 대한 경험주의적 비판에 의하여 제기된 모든 반대의견들이 또한 명제적 기능들로서의 자연법칙들의 구성에 반대하여, [다시 말해서] 첫 번째 사이비-서술 입장에 반대하여 제기될 수 있음을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규약주의와 규약주의에 대한 경험주의적 비판가들 대부분은 (예를 들어 파이글[Feigl]을 포함하여) 사이비-서술 입장들의 기본적 추론들을 공유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법칙들을 진정한 서술들로 본다.

자연법칙들을 명제적 기능들로서 간주하는 사이비-서술 입장의 문제들을 뚜렷이 부각시켜 표현하기 위하여, 나는 이제 사이비-서술 입장들에 대한 분석에서 떠나겠다. 나는 규약주의에 대한 설명과, 규약주의적 견해와 경험주의적 견해의 비교로 옮겨갈 것이다. 나의 분석의 나중에, 나는 이 견해들을 첫 번째 사이비-서술 입장과 대조할 것인데, 첫 번째 사이비-서술 입장은 자연법칙들을 명제적 기능들로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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