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고교 시절에 이 시를 외울 때 내 마음에 천둥이 치고 울음이 복받쳤다. ‘지금’, ‘홀로’, ‘여기’, ‘노래의 씨’ 같은 순한 말들이 번개처럼 번쩍거렸다.
번개는 나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를 살아낸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두루 때렸을 터이다. 그 감동은 먹먹한 덩어리로 남아 있었는데, 며칠 전에 황현산 교수의 새 책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의 맨 앞에 실린 ‘이육사의 광야를 읽는다’를 읽고나서 이 시의 높이와 깊이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황 교수의 글을 읽고나니 육사의 고향에 가보고 싶어져서 나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마을에 다녀왔다. 도산서원을 지나면 퇴계 종택과 퇴계 묘소가 가깝고 퇴계 묘소에서 3㎞쯤 더 가면 원촌마을이다. 육사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유골로 돌아와서 묻혔다. 상류의 낙동강은 산자락들을 이리저리 굽이치며 유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마을은 진성 이씨의 세거지로 육사 재세 시에 100호 정도의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1976년 안동댐 건설공사로 마을은 흩어졌다. 육사의 생가도 그때 헐렸고, 지금은 그 자리에 ‘청포도’ 시비가 세워졌다. 길 건너편이 이육사문학관인데, 지금은 확장공사 중이어서 관람할 수 없다.
이 마을에는 육사의 따님 이옥비 여사(74)가 계신다. 이 여사를 모시고 문학관 사무국장 이위발 시인과 함께 몽실식당에서 배추전과 고추장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딱 한가지다. 4살 때 북경으로 압송되는 아버지를 청량리역 승강장에서 마지막으로 뵈었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는 수갑을 차고 용수를 쓰고 오랏줄에 묶여서 끌려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딸을 향해 뭐라고 말했는데, 삼촌들이 들은 바에 따르면 ‘다녀오마’였다고 한다. 북경 감옥에서 주검을 모실 때 그 머리에 피가 엉겨 있었다고, 이옥비 여사는 일을 치르신 분들의 말을 전했다. 돌담 위로 집안을 감시하던 일본 순사들의 모자를 이 여사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 고통스런 시대를 개울물 흐르듯이 말했다.
‘광야’를 새긴 시비는 안동시내 낙동강 월영교 옆에 세워졌다.(1968년) 김충현이 글씨를 쓰고 조지훈이 비문을 지었다. 돌에 새겨진 ‘광야’를 읽으면서, 이 시가 금석(金石)에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 문체의 삼엄함은 돌을 쪼아서 글을 쓰는 듯하다. 돌 속에서 ‘지금’, ‘여기’ 같은 한국어 단어 몇개가 고난에 찬 역사의 눈보라를 돌파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육사는 퇴계의 14대 손이다. 후인들이 쓴 행장을 보니까 퇴계의 학문의 길은 일상 속으로 뻗어 있었다. 육사에게 시와 혁명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 선조와 후손이 400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여기 두 분의 묘소가 마을 동산에 가까이 있으니 이 원촌 마을의 복됨을 알 것이다.
황현산 교수의 문장을 옮겨서 적는다.
-‘광야’는 민족서정시라고 불러 마땅하다. (…) 기개와 이상을 드러내는 말의 질서는 빈틈이 없고 그림은 선연하며 음악은 비장하여 그 아름다움이 숭고함에 이른다.
김훈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