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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업적/ 유재원 한국외국어대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2. 15. 21:56

국제국제일반

귀족 특권 깬 ‘참주정’…그리스 경제 민주화 이끌다

등록 :2016-02-14 20:04수정 :2016-02-15 11:01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④ 엘레우시스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데에 세심한 신경을 썼다. 엘레우시스의 비교의식이 이루어지던 회당도 그렇게 지어졌다. 사진은 평지에서 본 회당 터.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데에 세심한 신경을 썼다. 엘레우시스의 비교의식이 이루어지던 회당도 그렇게 지어졌다. 사진은 평지에서 본 회당 터.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1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엘레우시스가 있다. 아테네에서 멀지 않아 시내버스가 다니는 곳이라 접근성도 좋다. 엘레우시스 앞바다에는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격전지 살라미스 섬이 있어 경치가 좋다. 우리나라로 치면 진도 울돌목 정도의 역사적 명소라고나 할까?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곳에서는 가장 황홀하고도 신비스럽다고 알려진 데메테르와 그의 딸을 숭배하는 ‘엘레우시스 비교’가 행해졌던 곳이다. 철저하게 신분 사회였던 고대 그리스에서 신분과 성별,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나 받아들였던 가장 평등한 종교였다. 여기에는 비교가 행해지던 회당 건물터가 아직도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 회당 건물을 지은 이가 바로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였다. 고대 그리스의 독재를 상징하는 인물이 가장 평등한 종교를 위해 회당을 지었다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권 장악 뒤 정치보복 대신
귀족토지 몰수 농민에게 분배
농사자금 빌려줘 귀농 장려
재화 골고루 분배 양극화 해소

솔론 법 이어 준법정신 확립
민중 업은 독재로 강력한 개혁
일자리 창출 공공사업 중
가장 인기사업은 상수도시설
귀족 독점 샘물 안 길어도 돼

궁전에 최초의 도서관 세우고
호메로스 일리아스 ‘정본’ 정립
디오니소스 축제 비극경연은
민중 예술 향유의 정점이었다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33년 동안 두 번 추방을 당하고 세 번 집권하면서 19년을 다스렸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기이하고도 파렴치한 정략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는 교양과 지성이 넘치는 매력적인 인간이었다. 그의 통치는 활기찼고 공정했다. 정적들과 무자비하게 싸우면서도 이기면 즉시 그들을 포용하는 아량을 보여 주었고, 민중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통치의 목표를 분명히 유지했고, 결단의 순간에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지식인 특유의 우유부단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통치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나쁘지 않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참주라기보다는 정치가처럼 온건하게 통치했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권을 잡기 위해서 필요 이상의 희생을 피했다. 그가 세 번째 정권을 잡기 위해 전쟁을 벌였을 때 지주 귀족과 부자 상인들로 구성된 반대파 군대는 기강이 흐트러져 점심 식사 후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이를 안 페이시스트라토스 군대가 기습을 하자 혼비백산한 적군은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때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적군이 다시 전열을 다듬어 반격하지 않고 그냥 흩어지도록 묘책을 생각해 냈다. 그는 아들들에게 말을 타고 적군들을 쫓아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명령이라며 아무런 정치적 보복은 없을 테니 겁내지 말고 각자 집으로 가서 생업에 종사하라고 말하게 했다. 이런 방법으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내전에서 생길 수 있는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다. 피를 많이 흘리고 얻는 권력은 유지도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정적들에 대한 정치적 보복은 하지 않았다. 다만 융화할 수 없는 반대자들은 추방했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해 자신의 지지자들인 가난한 농부들에게 나눠 주어 자신의 지지 기반을 굳건히 했다. 군대를 개선하고 함대를 증강해서 외국의 공격에 대비해 아테네를 전쟁의 위협에서부터 벗어나게 했고, 계층간의 적대감을 완화시켜 혼란스럽던 폴리스에 질서와 평화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많은 시민들이 다시 황금의 시대가 회복되었다고 그의 통치를 칭찬했다.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선정(善政)을 펼쳤다

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이 만든 법을 세부 사항까지 바꾸지 않고 그대로 지켜서 정적들까지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양보와 제도로 절대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유지하는 줄 아는 의식 있는 정치가였다. 예전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아르콘이 선출되었고, 민회와 시민 법정, 400인 평의회, 아레이오파고스 원로원이 모두 아무런 변화 없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민회에서는 절대 권력자인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의견이 항상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 그의 측근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이 목표로 한 일에 대해 집착이 강한 의지의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기질이 아테네의 무질서한 삶을 질서와 법이 잘 지켜지는 건실한 모양으로 변화시켰다. 이렇게 굳어진 준법정신과 질서는 한 세대 뒤 참주정이 무너진 후에도 아테네의 정치 유산으로 남았다. 법의 파괴자로 정권을 잡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솔론이 만든 법의 완성자가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또 자신이 직접 법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국가를 위해 싸우다 부상을 입은 상이군인의 생계는 정부가 보장하는 법을 만들었고 시민들이 게으르게 지내는 것을 금지하는 ‘나태 금지법’을 제정했다.

그는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독재를 했기에 솔론보다 더 강력하게 개혁을 할 수 있었다. 우선 정적인 귀족들의 땅을 빼앗아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농사지을 자금을 빌려주었다. 그 결과 공연히 도심지에서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시골로 귀향하게 되어 인구 분산과 지역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또 이렇게 일거리를 찾게 된 시민들은 자신의 농장을 경영하는 데 몰두하게 되어 공적인 일에 관심을 가질 마음이나 여가가 없게 되어 폴리스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다. 게다가 경작지가 늘어나자 세수 또한 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의 정책을 이어받아 올리브 재배를 장려하고 무역에 힘을 기울여 흑해와 이탈리아, 키프로스까지 교역 지역의 폭을 넓혔고 도자기 산업도 육성하여 이오니아와 키프로스, 시리아에까지 수출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또한 사법제도도 개선했다. 그는 각 시골 데모스 단위로 재판관을 보내 농민들이 재판을 받기 위해 도심지로 올 필요가 없게 하였다. 그 자신도 때때로 몸소 시골로 가서 재판을 주관했다. 이 제도는 가난한 농부에게 돈을 빌려준 정책과 함께 지방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모든 참주들과 마찬가지로 큰 공공사업을 일으켜 자신의 지지 기반인 가난한 민중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데에 세심한 신경을 썼다. 그는 아크로폴리스 남쪽에 대규모의 올림피오스 제우스 신전을 짓기 시작했는가 하면, 민중들에게 인기 있는 엘레우시스 비교 제전을 위한 회당 건설도 시작했다. 그는 항구로 향하는 도로 건설에도 힘을 쏟아 아테네의 기반시설을 확장했다. 그러나 그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사업은 상수도 시설의 개선이었다. 그는 공동 취수장을 곳곳에 만들었고 상수도를 주택가 광장까지 끌어들여 물을 쉽게 길어갈 수 있게 했다. 또 라우리온의 은광을 개발하여 그 은으로 독자적인 새 화폐를 주조했다. 당시 화폐 주조는 상당히 이익이 남는 사업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런 모든 사업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세법 개혁도 단행하여 일이 있을 때마다 필요 경비를 부담하는 그리스 시민사회의 전통에 맞서 수입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둬들였다. 대신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또 관혼상제를 치를 때 과도한 사치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엄격하게 규제했다.

해외 무역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흑해로 가는 길목인 다르다넬스 해협에 전략적인 식민지를 세우고, 많은 다른 폴리스들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그의 통치 아래 교역이 번창하여 재화의 분배가 일부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골고루 이루어져 양극화 현상이 완화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테네에 경제적 민주주의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교양 있는 통치자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개혁은 정치와 경제 부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공공사업과 개인의 자선 행위를 통해 자기 궁전에 조각가와 건축가를 초청했다. 그는 또 기원전 594년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폴리스들이 페르시아의 수중에 떨어지자 이를 피해 망명 온 많은 지식인들과 시모니데스나 아나크레온 같은 시인들을 자기 궁전에 불러들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 자신이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여 그의 궁전에 그리스 최초의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가 얻은 별명 가운데 하나가 ‘책을 사랑하는 자’(bibliophilos)이다. 그는 또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관장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정본을 만들었다. 이에 힘입어 아테네는 그리스의 서사시 경연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의 모든 시민이 참가하는 큰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제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범그리스적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아테네의 위상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 축제를 통해 시민의식을 고양시켰다. 판아테나이아 축제는 운동 경기와 음악 경연, 서사시 낭독 경연을 포함한 종합 축제였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그가 주도권을 가지고 추진한 문화 행사 가운데 후세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비극 경연 대회다. 그리스의 귀족들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올림포스 천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농부가 대부분이었던 일반 서민들은 농사와 관련이 있는 지신(地神) 데메테르나 디오니소스 신을 숭배했다. 다른 귀족들을 누르기 위해 민중의 지지가 절실했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민중들의 데메테르 신앙의 중심인 엘레우시스 비교를 장려하는 의미로 그곳에 회당을 증축했고, 포도의 풍작을 빌기 위해 매해 봄에 벌어지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확장했다. 디오니소스 축제의 가장 중요한 행사가 바로 비극 경연 대회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연극을 디오니소스 축제에 통합함으로써 이 새로운 예술 형식에 처음으로 공적인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이전까지 극소수 상류층의 특권이었던 예술의 향유를 다수의 민중들에게 제공하려는 목표를 세웠고 또 이루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