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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 부딪쳐 깨져! 꾸지람도 내가 끝이야"

이윤진이카루스 2010. 10. 9. 07:15

“임마 부딪쳐 깨져! 꾸지람도 내가 끝이야”

BY : 고경태 | 2010.10.08 | 덧글수(4) | 트랙백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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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재야운동의 큰 어른이자 이야기꾼

 백기완 선생과의 ‘혁명적 댓거리’ 한판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제20화 ‘청년 백기완’의 포효

혁명적 댓거리.
그의 말을 듣노라면 산 꼭대기에서 거대한 봉화가 솟는 듯하다. 팔순을 앞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피를 토하는 듯한 사자후, 판을 엎어야 한다는 전복적인 메시지. 형식과 내용 면에서 말 그대로 ‘혁명적 댓거리’다.
‘백기완(77)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직설에 참여했다’라는 소개는 적절하지 않다. 차라리 그의 한판 마당극을 보았다는 편이 낫다. 육두문자도 마다 않는 불같은 포효, 나지막한 읊조림과 슬며시 번지는 눈물, 비장하게 휘감기는 시 한편, 느닷없이 터져나오는 구성진 노래 자락과 춤사위까지. 이야기 속에서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이 바뀐다.
장장 네 시간에 걸친 직설의 풍경을 이 좁은 지면에 다 채울 수 없어 아쉽다. 1970년대 통일문제연구소 방을 얻기 위해 월부 피아노를 팔아먹어 딸과 냉전을 벌인 소동이나, 87년 대선 직전 김대중, 김영삼 후보가 단일화를 회피하던 뒷얘기 등은 싣지 못했다. 맥줏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일침을 박기도 했다. 한홍구와 서해성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때론 너무 웃겨 뒤로 나자빠졌다.
그는 60년대 중반 장준하 선생과 함께 ‘재야’란 신조어를 기자들에게 처음 제안했다고 한다. 40년이 흐른 지금 재야의 가장 큰 어른이 됐다.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어떤 고령의 명사라도 그의 입에선 격의없는(!) 호칭으로 풀려나온다. 인간문화재로 분류해도 좋을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입담이 사람들 곁에 오래 남기를 소망해본다.
진행·정리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백기완(이하 백) ‘직설’이란 말은 ‘대놓고’야. 한겨레쯤이면 우리말을 써야지. 백기완 보고 ‘구라’가 뭐야. 이런 말아먹을 놈에(웃음). 어른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면 몰라도. 구라란 부풀렸단 뜻이거든. 그냥 이야기야.
서해성(이하 성) 오래 내려오던 민중담을 우리 시대 근육으로 바꿔내 온 이야기꾼이신데, 이야기란 무엇인가요.
10살 때 학질에 걸렸어. 두꺼운 이불을 덮어도 덜덜 떨려. 자꾸 돼지비계 한 점만 먹었으면 좋겠는데 간장 탄 물을 주시는 거야. 잠이 들까 말까 한데 할머니가 이야기를 해주는 거야. 바닷속에 이심이가 살았대. 조갑지(조개)한테도 잡혀 먹히는 조그만 놈이 목숨을 걸고 싸우다 보니 쇠비늘이 생기고 결국 용궁을 때려 부수고 공주를 구출해 새날을 연다는 이야기야. 할머니가 ‘기완아, 이심이가 뭘 먹고 자랐는 줄 알아?’ 뜸을 들이더니, ‘너처럼 짠물 먹었어.’ 이러시는 거라.
한홍구(이하 한) 선생님 얘긴 슬프기만 하지 않고 세상을 짓부수는 힘을 느끼게 합니다.

진짜 이야기란 주어진 판을 깨는 것 

백 맞아. 우리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는 ‘불림’이었어. 우리 아버지가 불림을 부는데 (가락을 넣어) ‘소나무 장작은 왜장작 떵~’ 그래 ‘아바이 무슨 소리가?’ 물었어. 황해도에선 아버지를 ‘아바이’라고 하면서 평등한 말을 썼지. 눈이 펑펑 내려 꽁꽁 얼어붙잖아. 춥지. 장작만 보면 왜놈들 생각이 난다는 거야. 장작으로 꼴통을 까고 싶어서. 만날 잡혀서 매 맞았잖아. 불림은 한소리야. 주어진 판 깨고 새로운 판을 일군다는 한소리, 옛날 무지랭이들의 이야기는 불림이었어. 주어진 판을 깨는.
일제는 우리 이야기를 채집했어요. 식민지 관리를 위해.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우리 이야기가 천시되는 판이었는데.
함석헌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게. 1953년 7월 휴전하고 총소리만 멎었거든. 함 할아버지가 50대 초쯤 됐을까. 그래도 수염 길러 꼬꼬지 할아버지(맨 위 할아버지)였지. 말씀 들으러 갔어. 조그만 방에 몇 명이 앉았는데, 토머스 하디의 소설 <테스>를 본 사람 있냐고 물어. 전쟁 뒤에 퇴폐가 막 일어날 땐 순결의 상징인 <테스>를 읽어야 한대. 나도 그때 독학으로 영어를 깨쳐 다 알았다고는 하기 어렵지만 읽어는 봤지. 근데 내가 딱선이거든. 철딱서니 알지? 앞뒤 위아래가 막힌 놈을 ‘딱선이’라고 해. 기분 나쁘면 받는 거야.(웃음) 내가 열다섯살 계집애를 윤간한 양놈하고 맞붙어 쓰러뜨린 이야기를 했지. 두 손으로 도라무통(드럼통)을 짐차에 한번에 싣고 하던 덩치가 산만한 놈이야. 한방 먼저 맞고 정신 못 차리다가 옹금(낭심)을 차서 쓰러뜨렸거든. 함석헌 할아버지한테 그랬지. 하루에도 몇 천번 겁탈이 있다. <테스>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소설 쓰는 놈, 신문쟁이, 검사 형사들한테 이런 얘기 좀 하라고. 그분이 좋은 분이거든. 한숨을 푹 쉬더라고. 이야기라는 건 역사 현장의 이야기를 예술적으로 빚는 거야. 형상화라고 하지.
선생님은 우리말을 많이 되찾아내고 또 빚어냈습니다. 70년대부터 쓰고 있는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새뚝이….
민중의 말따구(말) 속에 묻힌 걸 끊임없이 끄집어내고 빚어낸 게 ‘든올’이야. 개념, ‘올이 들었다’는 뜻이야. 삼 천년 동안 한문이 우릴 지배해서 우리 낱말이 없어졌는데 거기에 대한 반격이야. 영어가 뭐야. 제국주의 침략의 피 묻은 손톱이야. 그 손톱을 빼버리자는 거야.
쉽지 않은 질문인데…선생님은 학교를 안 다니셨잖습니까. 학력이란 한국 사회에서 무엇인지요.
열세살 때 조소앙(독립운동가) 선생이 백범 김구 할아버지와 의논해 나를 중학교 보내준다고 했어. 아버지가 안 된대. ‘임마, 백범한테 가지 마. 밥은 얻어먹고 중학교 가고 미국 유학 갈지도 몰라. 그건 안 돼. 여기서 어려움 뚫고 나와야 네가 혁명을 하든지 깡패를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하지’ 그러는 거야.
그런데도 어떻게 세상과 공부를 깨우칠 수 있었는지요.
선생님은 80년대 이후 좌파진영의 큰 어른이신데, 한국전쟁 전 격정의 시대에 어떻게 좌익활동을 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자기 엉덩이가 따스면 다 따슨지 알아”

우리 어머니가 참 문학적인 분이야.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데, 내가 배고파 울면 ‘기완아, 울더라도 눈물은 흘리지 마라. 눈물은 빛그림자야’. 빛을 가리는 그림자래. 어린애나 젊은이는 빛그림자를 보이면 안 된대. 앞이 안 보이잖아. 좌우파가 아니라 눈이 열려야 한다는 거야. 난 빛그림자를 스스로 극복하는 데 30년이 걸렸어. 내 동무들이 육이오 전쟁통에 거의 다 죽었어. 열이면 여덟이 전선 나가 죽었는데, 두 놈만 얘기할게. 하나는 복덩이야. 박복덩. 원효로 들머리에 쇠 깎는 공장 많아. 복덩이가 ‘기완아, 넌 머리가 좋으니까 공부해야지. 내가 돈 받아 중학교 등록을 시켜줄께’ 그래. 3개월 치 월급을 타러 가는 그날 전쟁이 터진 거야. 피난 갔다 왔더니 인민군 나가서 죽었대. 낙동강에서 맨 앞장에 서다가. 살구라는 애가 있어. 머릿니만 나오면 기완이 것이라고 우겨. 인민군 나가면서 제 엄마한테 리기영의 <고향>하고 벽초의 소설 한권을 내 몫으로 남겨둔 거야. 내가 책이 한권도 없다는 걸 알고. 표지가 마분지로 된 건데 나중에 비를 맞아 퉁퉁 분 거야. 그걸 동무들과 함께 노래 부르던 남산기슭에 묻어주었어. 책무덤. 우리 땐 그렇게 눈물겨운 것들뿐이야. 나는 양심적이고 올바르고 인간적인 걸 쫓아다니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언젠가 말을 했어. ‘해방’이라는 두 글자를 깨치는 데 30년이 걸렸다고.
아까 소나무 장작 말씀하셨는데, 누구는 장작을 보면 왜놈 꼴통을 빠갤 생각을 하고, 누구는 맞은 기억이 나서 오금이 저립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담력이 나옵니까.
노동자들 싸움터에 가잖아. 가장 강경하게 발언하는 게 나야. 노동자들은 삶은 격렬한데, 발언은 달라. 없는 사람들은 저항감은 있지만 먹고살겠다는 애착은 남달라. 민중에게는 그런 양면성이 있지. 마키아벨리나 히틀러가 그런 심리 잘 이용해 먹었다는 이야기 나오잖아.
학교를 못 다니게 된 청년들에게 힘이 되는 말씀을.
부산 피난 시절이야. 경기고 다니던 애들하고 댓거리를 하는데, 칼 카우츠키니 슈바이처니 슈펭글러니 하는 이름을 막 대. 난 이름도 모르는데. 주워듣는 것도 한계가 있을 거 아냐. ‘아바이, 카우츠키 아나’ 물었더니, ‘레닌과 싸우던 새끼 아냐’ 그래. 어떻게 아냐니까 주워들었대. 그 고등학생들 이야기를 했더니 별것 아니라는 거야. 살다 보면 슈바이처, 카우츠키가 받았던 문제의식을 나도 받는다는 거야. 네가 부대끼면서 살아봐라, 앞에 제기된 문제의식을 올바르게 끌어안고 무시하지 말라는 거야. 요새 학교 못 가는 애들한테 그런 얘기를 해. 역사의 현장이 큰 대학이고 큰 고등학교니까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받아라.
선생님이 우리만할 때 따르던 세대들한테 한 말씀하신다면. 지금 그 사람들이 저보다도 최소한 열살은 위거든요.
김지하가 벌써 70대라니까.(웃음) 자기 엉덩이가 따스면(따뜻하면) 세상이 다 따슨 줄 알아. 질풍노도의 역사적 현장을 떠나면 안 되는 거야. 91년 소련이 망했던 날이야. 젊은 놈들이 울면서 소련이 망했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 내가 그랬지. ‘썩어서 망했어.’ 사회주의는 인류의 보편적 염원이야. 소련에서 70년 실험해봤다고 망하지 않아. 소련 사회주의자들이 썩어서 무너진 거야.
70년대엔 김지하, 80년대엔 채광석(1948~1987), 또 50, 60년대엔 신동엽(1930~1969) 시인하고 술 많이 드셨죠?
채광석 죽었을 땐 내가 장례위원장 했지. 생전에 신경림 선생은 술자리에서 점잖게 ‘광석이 술 들어’ 하는데 나는 ‘얌마, 들어, 이놈아’ 그러면 되레 기분 좋아해. 신동엽은 <진달래 산천> 썼을 때 술을 좀 뺏어 먹었지. ‘얌마, 거기 시구절 묘한 거 있어’ 하면 ‘뭔데요’ 물어. (시낭송 하듯 굵은 목소리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임마 너 죽창 들고 지리산으로 싸우러 갔단 얘기 아냐, 근사해!’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아셨어’ 그래. ‘다 알아. 술 사 임마.’(폭소) 그게 1958년도야.

이명박 정부는 알맹이 없는 찌꺼기

국가보안법 덕을 좀 보셨네요.(웃음)
그 자식은 내가 진짜배기로 좋아했지.
온갖 독재를 다 겪으면서 싸워오지 않았습니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에 한계를 지녔던 김대중, 노무현까지. 이명박은 어떻습니까. 샅바를 잡을 때 어떤 느낌이 옵니까.
서 촛불집회 때 선생님을 전경버스 앞에서 만나 들어가시라고 했다가 크게 야단맞았죠. ‘놔둬 임마. 내가 넘어뜨릴 거야.’ 선생님이 다시 거리에 나와서 앞장서는 걸 지켜봐야 하는 현실에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이명박? 분단모순의 집적이지. 첫째, 이명박은 냉전의 찌꺼기야. 찌꺼기는 알맹이가 없는 거야. 냉전논리도 없고 냉전시대도 없고. 둘째, 미국의 한반도 분할지배체제를 대변하는 한국의 미국인. 셋째, 부자들의 영구지배를 위한 분열 폭력주의자. 하지만 민중세력만 자각하고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정신만 차린다면 까짓것 뭐.
선생님 세대 연배들…30년 전후로 태어나 일제 때 교육받고 한국전쟁 거치면서 군인이 되고 반공청년이 된 세대들. 지금은 어버이연합 같은 거 하는 ‘애국 할배들…’ 왜 그분들은 끝내 깨치지 못하는 겁니까.
자본주의는 사람을 파편으로 만들고, 다시 흡수하는 능력이 있지. 쐬주병을 담벼락에 딱 때리면 박살이 나잖아. 사람을 분열증 환자로 만들지. 그리고 다 빨아먹고 그게 자본축적의 과정이고. 역사적인 시공간을 살아왔지만 주체성을 상실하면 조작대상, 파편이 되는 거지.
늘 ‘대륙성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이심이 이야기나 장산곶매를 봐도 그렇죠. 대륙성이란 무엇인가요.
‘저치’간다고 했어. 저치라는 건 땅별(지구)을 손바닥에 올려놓을 때까지 가자는 거야. 한없이 열린 땅으로 가자는 거야. 손오공이 까불어도 부처님 손바닥에서 놀았다는 것하고는 달라. 우리는 땅별을 손바닥에 올려놓을 때까지 가는 거야. 제국주의처럼 침략하러 가는 게 아냐. 우리는 저치를 가면서 진달래나무도 심고, 밤나무도 심고, 은행나무도 심어. 진달래는 사랑의 갓데(징표)야. 산불 올라타듯 하는 정열의 상징. 밤나무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람쥐도 먹는 거야. 은행나무는 산불이 나도 죽지 않아. 영원을 뜻하는 거야. (흥을 돋우며 가락을 섞어) 천년만년 살고 지고~ 천년만년 살고 지고~ 이게 내가 말하는 노나메기야.
제국주의는 신대륙 발견이라고 하면서 저치를 가는 듯 말해왔죠. ‘천국장사’도 세게 하고. 우리네는 어떠했나요.
우리 임금들은 예쁜 여자만 보면 수청 들라고 하다 대개 마흔을 못 넘었잖아. 저치를 꿈꾸지도 않았지. 중앙정보부 애들이 나보고 ‘제발 박정희 욕하면서 ‘쩨쩨하다’는 거만 빼라고 해, 못한다고 했지. ‘까나리독재’라고 했거든. 서해안에서 나오는 까나리액젓 알지?
박정희를 어떻게 평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까요?
장준하 선생과 비교하면 되지. 장 선생은 일제 때 독립군 대위, 박정희는 일본군 소위로 민족 반역을 했고, 장 선생은 8·15 뒤 백범선생의 비서, 박정희는 군대 속에 있던 공산당 조직을 폭로, 저만 살아남았으니 어쨌든 인간적으로 배신했고, 장 선생은 4·19 때 이승만과 싸웠고 박정희는 4·19 정신을 짓밟고 독재정권을 세워 민주반역을 자행했고.
장 선생은 인간적으로는?
장 선생이 암살당한뒤 내가 쓴 시가 있지요. “숱한 묏뿌리들이 다투어 하늘을 겨냥할 때 엎드려 땅을 기는 강물이다” 그랬었지.
요즈음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전두환이가 한창 까불 때야. 양주별산대놀이에 멍석말이란 게 있어. 머슴이 매 맞아 죽었거든. 썩은 멍석에 버린 거야. 들개가 와서 팔다리 뜯어가고, 말똥가리도 살점을 빼앗아가고 뼈만 남아. 날이 추워서 도토리나무가 쩡~ 하고 얼어 터져. 뼈다귀만 남은 해골바가지는 그 소리가 죽은 자기를 또 내려치는 걸로 알거든. 꿈틀하더니 일어나서 몽둥이를 뺏어 때려 부수고 자기염원의 세계를 형상화하더라 이거지. 그걸 ‘안간’이라고 해. 마지막 남은 저항심. 그게 인간의 생명이야. 계급의 질이라 이거야. 내가 수녀들한테 ‘여러분 우리 안간힘으로 일어납시다’고 했더니 몇몇 수녀들이 ‘학교 다닐 때 들었다면 수녀 공부 안 했을 거예요’ 그래. 이 이야기를 요새 젊은이들한테도 해주고 싶어. 꾸지람하는 것 같은 이런 말 자주 하는 거 나도 미안해. 근데 이런 말 하는 놈 내가 마지막인 거야.
그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손뼉 치고는 다 돌아서. 말은 좋은데, 그렇게 살 수 없다 그거지.

서울역에 비석으로 세우고픈 ‘가대기형’의 말씀

선생님 내신 책 이름이 <사람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인데, 그게 다 결국 사람이야기거든요. 살아계신 분, 돌아계신 분 다 돌이켜보았을 때, 다시 만나 일하고픈 분이 있는지.
서울역에서 한쪽 어깨에다 짐을 지고 나르는 ‘가대기 형님’이 있어. 깡패 김두한이를 번쩍 들어 꼼짝 못하게 했던 장사거든. 내가 열세살 땐데, 그 형님을 왜 존경하게 됐느냐. 아까 말한 동무 ‘살구’하고 티격태격하다가 하루는 이겼어. 누가 툭툭 쳐. 가대기 형이야. ‘형 오늘 내가 이겼지?’ 했더니, ‘없는 놈끼리 싸워봐야 코피만 터져.(웃음) 싸움은 나쁜 놈, 있는 놈하고 하는 거야 이 자식아.’ 내가 삐져서 가대기형하고 한 일년을 말을 안 했어. 그 양반 깡패 패거리들에게 붙들려가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 나 서울역 부근에 땅 세 평만 사서 가대기형이 해 준 말, 새긴돌(시비)을 세우고 싶어.
대학로에 사시는데 요즘 젊은이들 패기가 어떤지요.
사람은 누구나 긴장이 있지. 그 뿌리는 아까 말한 ‘안간’이야. 계급의식. 그게 썩어버리면 긴장이 아니라 소시민적 욕구를 먹고 살아. 지금 세계가 진보지향을 잃어버리고 있어. 구라파나 미국도 그렇고. 진보지향을 올바르게 세우는 건 노나메기야. 노나메기는 진보지향이 왜곡되고 변형되고 상실해가는 곳에 던지는 말뜸(화두)이지.
월급 타면 중학교 보내준다던 친구 이야기나, 머릿니를 놓고 다투던 친구가 책을 놓고 가고, 다시 그 친구를 위해 책무덤을 만들던 정신. 요즘 젊은이들한테도 그런 마음이 진보의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깨쳐라 이거야. 제 울타리만 만들질 말고.

 
거듭나는 노나메기 

재야의 마지막 어른. 백기완 선생을 이리 부르는 건 선생이 걸어온 길과 말과 행동, 그리고 이야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백기완은 늘 청년 백기완이다. 다들 알고 있는 백기완이 그렇고, 지금 또한 그렇다. 선생은 하루같이 청년으로 살아왔다.
무엇보다 선생은 이야기꾼이다. 근대사회는 이야기의 근대와 함께한다. 서구사회에서 그림형제, 안데르센, 캠벨들이 다 그 몫이다. 희랍로마신화란 대체 무엇이던가. 일제가 식민지배를 위해 채집, 기록한 우리네 이야기는 굴절과 훼손을 피할 길이 없었다. 혹부리영감 따위 일본 민담이 한국인 이야기 주머니 속으로 들어온 데서 보듯 이야기 식민화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제국주의 손길을 거쳐 번안되어 들어온 서구 이야기에서 민중이 새 생명을 얻기란 퍽도 어려운 일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걸쭉하고 걸출한 민중 이야기를 샘물로 길어 올려 막힌 현실을 뚫어내는 뛰는 생명력을 불어넣어왔다. 독재시대 선생의 입담이 곧 시대의 근육일 수 있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낱 옛 이야기가 아니었다. 가령 ‘장산곶매 이야기’가 황석영 소설 ‘장길산’ 머리글로, 최병수 손을 거쳐 걸개그림으로 형상화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패배를 모르는 이야기, 끝없는 장쾌한 서사는 현실에서 이탈한 환상을 직조하는 네버엔딩스토리 따위와는 뼈와 옷이 다르다.
선생이 이야기만 노나메기해온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재창조해낸 이야기 속 인물들을 닮아왔는지도 모른다. 시대를 헤쳐 나오는 이물(앞선이)로서 이 땅을 노나메기 세상으로 만들고자 가시덤불과 거친 밥, 옥방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은 게 선생이다. 무지랭이들 사이에서 땅불쑥하니 깨어난 쇠뿔이가 바로 선생 아니겠는가.
선생은 얼마 전 노나메기통일문제연구소의 집과 땅과 통장을 다 내놓았다. 너도 나도 일하고, 너도 나도 잘살되 올바로 사는 벗나래(세상)를 뜻하는 노나메기. 이는 선생 스스로가 노나메기가 되는 일이자 이 땅 진보에 새로운 살림이 일어나는 가슴 벅찬 일이다. 선생은 말한다. “우리 민중은 지난 수천년 동안 눈물을 흘려왔다. 이제는 벅찬 눈물을 흘려야 할 때다. 이것이 노나메기다.”
14일(오후 3시)에는 프레스센터 18층에서 시작을 여는 잔치가 열린다. 노나메기 재단과 집을 만들어 진보의 새 터전을 만들겠다고 버선발로 나선 이는 서울대 김세균 교수다. 처먹을수록 작아지는 쫄망쇠와 납쇠(투기꾼)들의 판을 엎고 새길, 새 판을 만드는 이 일은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다.
이렇듯 선생은 청년 백기완이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라도 우리네 현재다.서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