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전세계의 유명 인사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에 참여했다/ 이희호 평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 31. 22:20

정치정치일반

80년 옥중편지 “홍걸아~아버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등록 :2016-01-31 20:24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8회 구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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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9월에 이어 11월 항소심에서도 김대중에게 사형 선고가 나오자 나라 안팎에서 구명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으로 건너가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 인수팀에게 ‘김대중을 살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사진은 80년 9월1일 11대 대통령 취임 축하연에서 전두환과 악수를 하고 있는 글라이스틴.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9월에 이어 11월 항소심에서도 김대중에게 사형 선고가 나오자 나라 안팎에서 구명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으로 건너가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 인수팀에게 ‘김대중을 살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사진은 80년 9월1일 11대 대통령 취임 축하연에서 전두환과 악수를 하고 있는 글라이스틴.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9월 1심 군사재판부가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항의 성명이 쏟아졌다. 미국 국무부는 김대중의 혐의는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희호는 있는 힘을 다해 남편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그즈음에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남편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편지였지요. 미국에서 선교사로 온 박대인 목사가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본명이 에드워드 포이트러스인 박대인은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로 있었다. “내가 쓴 편지를 그분이 영어로 번역해주고 편지도 부쳐주셨지요.”

1980년 9월 1심 김대중 사형선고
카터 미국 대통령에 구명편지
“남편 목숨 구해달라고 썼지요”
박대인~그레그~브레진스키 전달

80년 11월3일 항소심도 ‘사형’
이튿날 미국 대선 카터 낙선
절망한 김대중은 소리내 울었다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단 말인가”
11월21일 육군교도소 첫 편지 허용
“평탄치 않기에 당신을 더 사랑”

국내외 ‘김대중살리기’ 구명운동
글라이스틴 미대사 레이건 설득
브란트·미테랑·크라이스키도 가세
강원용 ‘변절 오명’ 무릅쓴 채 나서
전두환 독대해 “사형은 안된다”

 앞서 80년 9월17일 1심 사형 선고 직후 이희호는 신군부의 감시망을 피해 카터 미 대통령에게 남편을 위한 구명 편지를 보냈다. 감리교 선교사 박대인이 번역해준 영문 편지에 이희호의 ‘미세스 김대중’ 친필 서명이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한겨레> 자료사진
앞서 80년 9월17일 1심 사형 선고 직후 이희호는 신군부의 감시망을 피해 카터 미 대통령에게 남편을 위한 구명 편지를 보냈다. 감리교 선교사 박대인이 번역해준 영문 편지에 이희호의 ‘미세스 김대중’ 친필 서명이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한겨레> 자료사진
경찰이 철통같이 집을 에워싸고 있어 구명 편지를 밖으로 내보내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쓴 편지는 우리 집 도우미가 퇴근할 때 몸속에 숨기고 나갔어요.” 집을 빠져나간 편지는 창천교회 전도사 윤문자에게 전달됐고 다시 박대인의 손에 들어갔다. 박대인이 영문으로 번역해 부친 편지는 미국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도널드 그레그,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를 거쳐 카터에게 전달됐다.

육군고등군법회의의 항소심 첫 공판은 10월24일에 열렸다. 항소심은 더 엉터리였다. 증인을 몇 사람이나 요청했지만, 다들 무서워 피하고 이태영만 홀로 증인석에 섰다. “이태영 선생님이 용감하게 증언을 해주셨어요. 법정에서 김대중은 한민통 의장이 아니라고 증언하고 재판부에 호통을 치시면서 변론을 해주셨지요.” 이태영은 법정에서 바로 구속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하고 추위에 대비해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재판정에 나갔다.

김대중이 2심 재판을 받고 있던 10월31일은 이희호의 친정아버지 추도일이었다. “그 얼마 전 큰오빠가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경찰이 막아서 가보지 못했어요. 정부에 청을 넣어서 결국 친정 방문을 허락받았지요. 홍일이 면회를 하면서 며느리에게 3·1사건 구속자 가족 중 김석중·박영숙·이종옥 세 분에게 연락해 큰오빠 집에 오시도록 했지요. 친정아버지 추도일에 그이들을 만났어요. 나를 보더니 세상이 너무 살벌해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희호의 멘토’ 강원용 목사는 ‘변절자’라는 오명까지 감수하며 전두환을 독대해 “새 정부를 사형으로 시작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사진은 80년 11월25일치 일간지 1면에 일제히 실린 ‘강원용 국정자문위원 위촉’ 장면.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의 멘토’ 강원용 목사는 ‘변절자’라는 오명까지 감수하며 전두환을 독대해 “새 정부를 사형으로 시작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사진은 80년 11월25일치 일간지 1면에 일제히 실린 ‘강원용 국정자문위원 위촉’ 장면.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한겨레> 자료사진
고등법원 재판이 엉망으로 진행되자 피고인들은 재판을 거부했다. 피고인들 모두 최후진술을 하지 않기로 했으나, 2심에서도 사형을 구형받은 김대중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어 유언을 남겨야 했다. 김대중은 최후진술에서 다시 한 번 정치보복에 반대하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여기 앉아 계신 피고인들에게 부탁드린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다. 어제 한완상 박사가 예언자적인 사명과 제사장적인 사명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이것을 사회구원과 개인구원으로 부르고 싶다. 나는 기독교 신자로서 민주회복을 통한 사회구원, 개인구원을 생각했다.” 김대중의 최후진술이 끝나자 23명의 피고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합창하고 “민주주의여 영원하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모조리 끌려 나갔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울부짖으면서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고 남편을 위해 기도했지요.”

11월3일 육군대법정의 항소심 재판부는 김대중에게 다시 사형을 선고했다. 하루 뒤인 11월4일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지미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고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됐다. 이희호와 김대중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한 번 더 빠뜨리는 소식이었다. 카터는 인권을 앞세운 정치인이었지만 레이건은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김대중은 이때 느낀 절망감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무 슬펐다. 발을 뻗고 소리 내어 울었다. ‘정녕 사형이란 말인가. 하느님이 나를 버리셨단 말인가.’”

1980년 11월3일 항소심 사형선고에 이어 카터 미국 대통령의 낙선 소식에 절망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11월21일부터 겨우 허용된 ‘옥중편지’로 서로의 신앙을 다지며 버텼다. 이희호가 보낸 주소 ‘제7102부대 교도대 김대중 귀하’가 눈에 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0년 11월3일 항소심 사형선고에 이어 카터 미국 대통령의 낙선 소식에 절망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11월21일부터 겨우 허용된 ‘옥중편지’로 서로의 신앙을 다지며 버텼다. 이희호가 보낸 주소 ‘제7102부대 교도대 김대중 귀하’가 눈에 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신군부는 “이제 김대중을 죽일 수 있게 됐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던 (신군부) 인사들 중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처형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그가 처형되지 않으면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해 자신들의 ‘구국’ 노력은 허사가 될 것이라며 공공연히 그의 처형을 주장했다.” 전두환은 김대중 문제로 한국을 방문한 미국 국방장관 해럴드 브라운에게 이렇게 말했다. “법원의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 대법원이 사형선고를 확정하면 그대로 집행돼야 한다.”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고 육군교도소에 갇혀 있는 동안 전두환과 신군부는 권력을 굳히는 작업에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9월29일 전두환은 대통령 간선제와 7년 단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공고했고 10월22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했다. 5일 뒤 공포된 개정헌법에 따라 국회가 해산됐고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설치돼 그 기능을 대신했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 전원을 전두환이 임명했다. 입법회의는 신군부의 충직한 하수인이었다.

1980년 11월3일 항소심 사형선고에 이어 카터 미국 대통령의 낙선 소식에 절망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11월21일부터 겨우 허용된 ‘옥중편지’로 서로의 신앙을 다지며 버텼다. 이희호가 보낸 주소 ‘제7102부대 교도대 김대중 귀하’가 눈에 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0년 11월3일 항소심 사형선고에 이어 카터 미국 대통령의 낙선 소식에 절망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11월21일부터 겨우 허용된 ‘옥중편지’로 서로의 신앙을 다지며 버텼다. 이희호가 보낸 주소 ‘제7102부대 교도대 김대중 귀하’가 눈에 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그 무렵 신군부는 불량배를 소탕한다며 4만여명을 잡아들여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경찰서마다 일률적으로 검거 인원을 할당한 탓에 무고한 시민들이 영문도 모르고 잡혀 들어갔다.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사람들은 극악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 중 받은 고문과 구타의 후유증으로 수백명이 사망했다. 신군부는 10월27일에는 무장 계엄군을 전국 사찰에 투입해 승려 수백명을 연행하고 폭행했다. 사회를 정화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사찰을 짓밟은 ‘법난’이었다. 신군부는 11월에는 언론사 발행인과 경영자들을 협박해 포기각서를 받아낸 뒤 언론통폐합을 강행했다. 신문·방송·통신사들이 폐합돼 사라졌다. <기독교방송>은 보도기능을 박탈당했다.

신군부는 항소심에서도 김대중에게 사형을 내린 뒤 11월 하순에야 편지 왕래를 허용했다. 사형수에게 베푼 선심이었다. 11월21일 이희호는 원통한 마음을 억누르며 김대중에게 첫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신의 선한 성품과 진실하게 살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을 존경했는데 ‘하느님은 왜?’ 하고 물어봅니다. 차라리 당신이 정말 폭력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도 지니고 있고 또 그다지도 안타깝게 민주주의를 갈구하지 않는다면, 이처럼 뼈와 살이 깎여 나가는 아픔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 무렵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고 신에 대한 의심이 엄습하는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김대중은 육군교도소 안에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아우구스티누스·안셀무스·데카르트·칸트 같은 철인들의 책을 읽으며 신앙의 위기를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런 위기를 겪으며 얻은 답을 11월21일치 편지에 써 보냈다. 이희호가 첫 편지를 쓴 날과 같은 날이었다.

“지난 5월17일 이래 우리 집안이 겪어온 엄청난 시련은 우리가 일생을 두고 겪은 모든 것을 합친다 해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이 어느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내다보는 한계상황 속에서의 자기 실존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믿음 속의 그것인가 하는 것을 매일같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 나는 수많은 갈등과 방황 속에서 ‘믿음이란 느낌이나 지식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단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의지의 결단은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오직 눈을 우리 주님께 고정시키고 흔들리지 않도록 성신께서 도와주시도록 기구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예수의 부활’이라는 종교적 믿음에 기대어 정신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이희호는 12월6일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의 생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욱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 당신은 언제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바르게 살기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유난히 강했습니다. 그래서 받은 것이 고난의 상입니다.” 이희호는 죽음의 불길 앞에서 겪는 시련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려고 마음속으로 분투했다.

이희호에게는 일생에 가장 견디기 힘든 날들이 계속됐다. 카터와 레이건의 정권 인수인계 기간에 김대중을 사형시킨다는 말이 끊임없이 돌았다. 이희호는 남편이 잡혀간 뒤로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져 가발을 써야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불안과 초조로 혀가 타들어가는 날들이었다. 신군부는 공무원을 동원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레이건에게 김대중을 비방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훗날 <한겨레21> 독자투고란(1994년 12월8일치)에 실린 독자의 글이 그런 정황을 보여주었다. “신군부가 권력을 쥐었을 때 (…) 공무원들에게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자 레이건에게 김대중씨를 모략하는 애걸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나 역시 윗전의 강압에 따라 김대중씨를 음해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을 이 자리를 빌려 그에게 사과한다.” 김대중은 12월7일 막내아들에게 편지를 써 유언하듯 ‘용서’를 이야기했다. “홍걸아! 아버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원수조차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하느님 앞에 가장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으며, 용서는 평화와 화해의 길이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한다.”

국내에서 김대중 사형 공작이 벌어지는 동안 미국 쪽에선 구명 움직임이 커졌다.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김대중이 2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자 11월 말 워싱턴으로 날아가 레이건 당선자 정권 인수팀의 국가안보보좌관 리처드 앨런을 면담하고 “김대중씨를 살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카터도 레이건에게 김대중 구명을 요구했다. 일본과 유럽에서도 구명운동이 일었다. 서독의 전 총리 빌리 브란트, 오스트리아 총리 브루노 크라이스키, 스웨덴 전 총리 올로프 팔메, 프랑스 사회당 당수 프랑수아 미테랑이 김대중의 목숨을 구하려고 뛰었다. 크라이스키는 1981년 12월 옥중의 김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딴 인권상을 주었다.

국내외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 구명에 마음을 모았다. 와병중인 정일형도 김대중의 생사를 자기 일처럼 생각했다. 강원용은 회고록에서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중병에 걸려 몸도 잘 못 움직이고 누워 있는 정일형 박사를 문병하러 그의 집에 들렀다. 그런데 그는 나를 보더니 내 손목을 꽉 잡고 내 손등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간절한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대중이를 살려줘. 대중이를 살려줘.’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구할 방법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보이지 않으니 가슴만 아플 뿐이었다.”

그 무렵 강원용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국정자문위원을 맡아 달라는 회유를 받고 있었다. 강원용은 “국정자문위원이 되면 국제사회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여지없이 실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지만 “내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해도 김대중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고심 끝에 11월25일 국정자문위원 위촉장을 받았다. 위촉장을 받은 날 강원용은 전두환과 독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미 우리나라는 광주사태로 전 세계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데, 이제 김대중까지 죽인다면 그 들끓는 여론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럽니까? 새 정부의 첫출발을 사형으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전두환은 강원용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대답했다. 강원용은 정일형에게 가 전두환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정일형은 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게 됐다며 흥분해서 엉엉 울기까지 했다.

강원용이 국정자문위원 위촉장을 받은 날 석간신문 1면에 사진과 함께 그 사실이 실렸다. 비난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내가 국정자문위원으로 있는 동안 한때 세간에는 ‘이 시대의 변절자 윤·천·지·강’이라는 말이 돌았는데 ‘윤·천·지·강’이란 윤보선·천관우·지학순·강원용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강원용은 오물을 뒤집어쓰는 수모를 감수하고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반면에 유신독재에 맞섰던 윤보선은 전두환 신군부를 지지하는 쪽으로 행보를 바꿨다. ‘김대중 내란음모 관련자’ 부인들은 남편들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고문을 받던 때에 한 가닥 소식이라도 얻을까 하여 안국동 윤보선의 집에 들렀다가 놀라운 일을 겪었다. 텔레비전 저녁 뉴스에 전두환의 얼굴이 나오자 윤보선이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 악하게는 안 생겼죠?” 부인들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기록했다. “말할 수 없는 당혹감과 절망감, 그리고 그 처참한 기분을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날 우리는 모두 저녁상에는 손도 대지 않고 나와 버렸다.” 윤보선은 박정희에 대한 원한 때문에 강경투쟁을 벌이다 박정희가 죽자 반독재 싸움에서 이탈해버렸다.

국제사회가 김대중 구명에 공동으로 나서자 동교동 집으로 이희호를 격려하는 전화가 수시로 걸려왔다. 11월20일 밤에는 미국교회여성연합회 총무 도로시 와그너가 국제전화를 했다. “당신은 외롭지 않다. 미국 교회의 많은 여성들이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느님이 당신들을 반드시 지켜주실 것이다.” 와그너의 전화를 받고 이희호는 감사기도를 드렸다. 12월 어느 날에는 미국에 있던 문동환의 전화를 받았다. 새로 당선된 레이건도 인권 문제를 소홀히 다루지 않을 것이고, 김대중을 사형에 처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런 전화들이 위안을 주었지만 이희호를 감싼 불안의 짙은 그림자는 가시지 않았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