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를 까발리고 칸트를 기리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는 라틴어 속담에
실수를 피하려고 히말라야 산속에 칩거하며 명상에 잠긴
수많은 석가모니의 모습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명상이라면 아인슈타인처럼
자신의 이론을 항상 의심했던
진실한 구도자의 길을 보는가?
죽음에 굴복한 거짓 예언자가 되어
인간을 지배하며 살겠다고 외치는
그들을 꿰뚫어 지식인의 배반이라고
성철 스님의 열반송처럼:
生平欺誑男女群 한평생을 살아오며 모든 사람 속이더니
彌天罪業過須彌 너무나도 많은 죄가 저 하늘에 가득하여
活陷阿鼻恨萬端 무간 지옥 떨어지니 만 갈래로 찢긴 가슴
一輪吐紅掛碧山 떠오르는 붉은 태양 푸른 산에 걸렸도다.
귀납론자의 주장이 허망한 까닭은
끝없는 무한회귀(infinite regression) 때문인데
왜, 왜, 왜 하다보면 살아갈 틈도 없네.
그럼 연역론자가 되어 한 가지 사례에서
보편적 규칙을 추출해서 살아가는데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라고 하고,
우주에 종말이 있다고 해서
밤하늘에 가득한 별이 사라지는 걸
볼 수도 없어 기다릴 수도 없지.
푸앵카레가 예수나 석가모니보다 위대한 까닭은
자신이 예언자일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지금도 히말라야 산맥에서 수행하는 자들은
아마도 자연과 대결하는 과학자가 없기에
가난으로부터 도피한 사이비 도사들일 테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극락을 본 자라면
왜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는데?
사랑으로 구원하고 자비로 구제한다고?
그럼 나폴레옹과 스탈린이 세계를 지배했고
나폴레옹과 알렉산더는 좀도둑이 되었겠지.
이제 알 수 없는 미래를, 변화무쌍할 미래를
어떻게 맞이할지 칸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성철 스님을 능가하는 혜거 스님을 기대하면...
후기:
칸트에 대한 나의 전념을 강조하기 위하여, 칸트에 선험론에 대한 전념이 아니라면 나는 순수이성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으로부터 (“순수이성 개념의 규제적 이용”) 몇 문단들을 전체적으로 인용하고 싶다. 이 구절은 아마도 나의 저술에 대한 지침으로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이 구절을 이 시점에서 논쟁에 인용하는 것은 합당하고 이 논쟁은 변증법적 입증과 그리하여 역사적인 정당화를 다루는데 왜냐하면 이 구절은 칸트의 개념들 중 한 가지 개념을 밝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것이 의문스러운 것으로서만 인정된다면... 특정한 것은 확실하지만 특정한 것의 규칙이 지닌 보편성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것의 결과이다. 몇 가지 특정 사례들은 모두 확실한데, 규칙으로부터 귀결되는지를 알기 위하여 규칙을 고려하여 분석된다. 인용되는 모든 특정 사례들이 규칙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이 그 후에 나타나면, 우리는 그 규칙의 보편성에 따라서 논증하고 이것으로부터 다시 모든 특정 사례들에 따라서 논증하는데 심지어 자체가 주어지지 않은 특정 사례들에 따라서 논증한다. 이것을 나는 이성의 가설적 이용이라고 지칭할 것이다. (이 문장의 원문에는 닫힌 따옴표가 누락되어있다: 한글번역자)
“이성의 가설적 이용은... 합당하게 말하여, 구성 요소적이 아닌데, 다시 말해서 그 이용은 매우 엄격하게 판단하여 우리가 그 이용을, 우리가 가설로서
채택한 보편적인 규칙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간주할 수 있는 그런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이유인즉 우리는 어떻게, 채택된 원리로부터 실제로 귀결되는 것으로서 그 이용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모든 가능한 결론들을 중명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이성의 가설적 이용은 규제적일 뿐이다; 그 이용의 유일한 목표는, 가능한 한, 우리가 지닌 상세한 지식의 덩어리에 통일성을 가져와 그리하여 보편성에 규칙을 근접시키는 것이다. (이 문장의 원문에는 닫힌 따옴표가 누락되어있다: 한글번역자)
“그리하여 이성의 가설적 이용은 오성(悟性: 이해력)의 지식에 관한 체계적 통일성을 자체의 목적으로 하고, 이 통일성이 그 이용의 규칙들이 지닌 진실성에 대한 시금석이다. 그러나 체계적인 통일성은 (개념만으로서) 계획된 통일성일 따름으로 본질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의문스러운 것으로만 간주될 수 있다. 이 통일성은, 그 통일성이 주목하는 바가 주어지지 않은 경우들을 겨냥하면서 그리하여 그 통일성을 더욱 일관적으로 만들면서, 오성(悟性: 이해력)의 다층적이고 특별한 이용 방식들에서 오성(悟性: 이해력)에 관한 원리를 우리가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혹시 그 구절이 완벽하게 진가를 인정받는 수 있는 것이 이 시점에서뿐이기 때문에 내가 이 구절을 지금까지 인용한 것은 아니다. 이 구절은, 인식론적 논쟁의 연결고리가 칸트 이후 형이상학이 끊어놓은 지점에 다시 이어져야 한다는 나의 견해를 뒷받침한다: 칸트를 이용하여.
(헤겔과 동시에 시작되는 변증법적 방법의 주제에 관하여 – 비록 그 주제가 여기서 헤겔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고 간주된다할지라도 – 나는, 칸트 이후의 형이상학자들과 특히 헤겔이 지식론의 발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나의 소신을 분명하게 서술해야겠다. 틀림없이 그들은, 그런 희망적인 출발 이후에 칸트의 저술에 관한 인식론적 논쟁이 그렇게 빨리 흐지부지 끝났다는 - [Fries] 하에서를 제외하고 – 사실에 대하여 비난을 받아야 한다.)
- 칼 포퍼,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 2009년, 352~353쪽 -
In order to emphasise my commitment to Kant, if not to Kant’s apriorism, I should like to quote in full several paragraphs from the Critique of Pure Reason (“The Regulative Employment of the Ideas of Pure Reason”). This passage might well serve ass a motto for my work. In any event, it is appropriate to quote it at this point in the argument, which deals with dialectical corroboration and therefore with historical justification, for it sheds light on one of Kant’s ideas:
“If, however, the universal is admitted as problematic only... the particular is certain but the universality of the rule of which it is a consequence is still a problem. Several particular instances, which are one and all certain, are scrutinised in view of the rule, to see whether they follow from it. If it then appears that all particular instances that can be cited follow from the rule, we argue to its universality, and from this again to all particular instances, even to those which are not themselves given. This I shall entitle the hypothetical employment of reason.
“The hypothetical employment of reason... is not, properly speaking, constitutive, that is, not of such a character that, judging in all strictness, we can regard it as proving the truth of the universal rule that we have adopted as hypothesis. For how are we to know all the possible consequences which, as actually following from the adopted principle, prove its universality? The hypothetical employment of reason is regulative only; its sole aim is, so far as may be possible, to bring unity into the body of our detailed knowledge, and thereby to approximate the rule to universality.
“The hypothetical employment of reason has, therefore, as its aim the systematic unity of the knowledged of understanding, and this unity is the criterion of truth of its rules. The systematic unity (as a mere idea) is, however, only a projected unity, to be regarded not as given in itself, but as a problem only. This unity aids us in discovering a principle for the understanding in its manifold and special modes of employment, directing its attention to cases which are not given, and thus rendering it more coherent.”
I have not quoted this passage until now because it is, perhaps, only at this point that it can be fully appreciated. It supports my view that the thread of the epistemological debate has to be rejoined at the point where post-Kantian metaphysics had torn it: with Kant.
(On the subject of the dialectical method that originates with Hegel – although it is used and viewed here in a way different from that of Hegel – I should clearly state my conviction that post-Kantian metaphysicians, and especially Hegel, have had a very negative influence on the development of the theory of knowledge. Without a doubt, they are to blame for the fact that after such a promising start, the epistemological debate about Kant’s work fizzled out so quickly – except under Fries.)
- Karl Popper, “Two Fundamental Problems of the Theory of Knowledge”, 2009, pp 352~353 -
한국명상지도자협회 이사장 혜거 스님
“그때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지옥이었어.”
솔직하다. 남들은 그를 ‘큰스님’으로 존경한다. 그런 스님이 자신의 젊은 시절 수행 과정이 ‘지옥’이었다고 말한다. “하루종일 참선하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야. 마음고생이 심했어. 남들에겐 정좌해서 참선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소설’을 쓰고 있었어. 온갖 망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던 거야. 그리고 남들에게 안 들키고 자느냐가 고민거리였어. 쏟아지는 잠을 피해가기는 어려웠거든.”
혜거 스님(72)은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학승이다. 또 명상의 최고 지도자로 꼽힌다. 스님에게 명상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줄을 잇는다. 16일 스님을 만나 젊은 시절 힘들었던 수행 경험과 명상법에 대해 들어봤다. 외국의 명상법과는 확연하게 다른 우리의 전통적인 명상법이다.
15살때 탄허스님 찾아 출가
영은사서 3년간 행자 생활
금강선원서 28년째 참선지도
거쳐간 제자 30만명 넘어
지난해 2월 발족한 협회
3월9일부터 명상 대강좌
“10년간 지옥 같은 수행을 하고 나니 자기조절이 가능해졌어. 수행을 하지 않고 공부만 한 스님과는 탁월하게 기운이 달라졌어. 눈과 마음이 열린 거지.”
스님은 우리의 전통적인 명상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적인 명상법은 오관,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열고 자신의 마음과 몸을 살피고 관찰해. 하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명상법은 이 오관을 닫아야 해. 오관을 닫으면 일시적으로 죽어야 해. 일시적으로 죽는 공부가 명상이야. 그러니 설명이 어렵지. 또 화두를 하나만 잡아. 오늘 터진 화두가 내일 또 달라. 매일매일 다른 화두가 아니라 한 가지 화두를 잡고 오랫동안 참선하는 거야.”
스님은 참선하기 위해 가부좌를 틀면 누구나 경험하는, 다리가 저리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비법도 설명한다. “누구나 가부좌를 틀면 다리가 저려. 그럴 땐 저린 다리를 생각하지 말고 ‘난 지금부터 죽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심장이 스스로 피를 강하게 내뿜어. 다리를 못쓰게 될까봐 피를 많이 보내게 돼. 그러면 온몸에 땀이 나. 다리가 저린 것도 사라지고 건강해지는 거야. 그리고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 단계에 들어가지.”
스님은 15살 때 탄허 스님을 찾아가 출가했다. 당시 불교계의 최고 석학인 탄허 스님은 삼척 영은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고 있었다. 지인이 써준 소개장을 들고 탄허 스님을 찾아간 소년은 절에서 가장 큰 방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몇 시간 만에 한 스님이 방에서 나왔다. 소년은 스님에게 “출가하고 싶어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방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젯밤 제대로 꿈을 꾼 모양이야. 꿈에 젊은 총각이 출가하겠다고 왔는데, 지금 마당에 출가하러 온 사람이 있네. 하하하.” 탄허 스님이었다. 영은사에서 3년간 행자 생활을 하며 탄허 스님에게서 배운 스님은 당시 탄허 스님이 아침에 아침 공양과 점심 공양을 한꺼번에 준비하라고 시킨 것을 고맙게 여긴다고 했다. “공부하는데 점심을 준비하는 시간을 아끼라고 한 지시였어. 그래서 탄허 스님께서는 3년간 점심에 찬밥을 드셨지.”
강원도 동해 대원사와 서울 대원암, 전남 순천 선암사 주지를 지낸 스님은 서울 개포동에 ‘금강선원’을 열고 28년째 도시인들에게 참선과 명상을 지도하고 있다. 거쳐간 제자만 3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명상은 무엇인가요?” 스님은 답한다. “고통을 소멸시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 명상이지. 어둠 속에서 빛을 외부로 향하면 자기 자신을 비추지 못하나 자신 쪽으로 비추면 스스로를 볼 수 있다는 ‘회광반조’(回光反照)의 노력이 바로 명상”이라고 설명한다.
스님은 명상에 빠지면 ‘삼매’(三昧)를 체험한다고 했다. 삼매는 집중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로 불교 수행의 이상적인 경지다. 스님은 삼매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순간삼매이다. ‘이게 뭘까’ 하고 의문을 가질 때 순식간에 의문이 풀리며 느끼는 짧은 순간의 몰입이다. 또 하나는 ‘이게 뭘까’라는 의문을 잠깐 품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긴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삼매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환희와 기쁨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스님은 지난해 2월 발족한 한국명상지도자협회의 이사장을 맡았다. 국내 명상 관련 21개 단체가 모인 이 협회는 3월9일부터 명상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명상아카데미 대강좌를 시작한다. ‘동사섭’(同事攝)이란 마음치유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용타 스님, 상담과 심리치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인경 스님, 불교계의 ‘힐링 멘토’로 꼽히는 마가 스님, 세계를 돌며 명상을 공부한 각산 스님 등이 강사로 나서 전통적 화두명상법과 위파사나 수행법, 호흡 명상, 자비 명상 등을 가르친다.
혜거 스님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한국 불교는 고유한 수행 노하우가 있다. 명상은 전문적 지식 없이 그냥 앉아만 있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라며 “각종 명상 기법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통에 부합하는 명상을 소개하겠다”고 강조했다. 특히 스님은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최고인 데는 종교인들 책임이 크다”며 “명상을 배우면 정신 집중력이 놀랍도록 향상돼 청소년들의 학업성취도도 크게 오른다”고 말했다. 대강좌는 5월21일까지 매주 수요일(행불선원)과 토요일(금강선원) 오후 2시~5시30분에 열린다. 문의 (02)953-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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