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희랍어 자료

참주 살해(Tyrannicide)/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2. 29.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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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국제일반

징세가 지핀 ‘민중 봉기’ 불씨…지도자의 출현만 남았다

등록 :2016-02-28 20:03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⑤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에서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그리스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나폴리는 반드시 가 봐야 할 곳이다. 원래 나폴리는 로도스 섬에서 온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다. 나폴리라는 말도 ‘새 폴리스’를 뜻하는 그리스어 Neapolis에서 온 것이다. 로마 시대까지도 이 도시 사람들은 그리스어를 썼다.

나폴리는 고대 남부 이탈리아의 무역항으로서 번성했고, 로마가 카르타고와 지중해 주도권을 두고 벌인 포에니 전쟁 때에는 로마 편에 서서 한니발의 침공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또 사도 바올로와 베드로가 동방으로부터 이곳에 도착하여 로마로 갔다고 전해진다.

독재자 아버지가 죽은 뒤
권력을 물려받은 히피아스는
처음엔 민주적 통치를 했으나
귀족과 밀월은 오래가지 않았다

참주정의 몰락은 엉뚱하게도
동생의 치정사건에서 비롯됐다
연적에 의해 동생이 암살당하자
불안해진 히피아스는
더 혹독하게 독재를 휘두르고
세금을 올려 재정을 충당했다

발코니세, 사망세, 출산세…
전통을 벗어난 황당한 세금은
시민들에게 비민주적 압제였다
권력 붕괴 조건이 무르익어갔다

그리스 아테네 서쪽 입구인 케라미코스 지역의 모습. 케라미코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인 히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에게 암살당한 곳이다.
그리스 아테네 서쪽 입구인 케라미코스 지역의 모습. 케라미코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인 히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에게 암살당한 곳이다.
나폴리는 로마 귀족들이 그리스에서부터 약탈해 온 예술품들이 도착하던 항구였기에 나폴리 박물관에는 수많은 고대 그리스 명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참주 살해자’(Tyrannicides)라는 대리석 조각은 그리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봐야 할 작품이다.

기원전 514년,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이라는 두 젊은이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둘째 아들 히파르코스를 살해하고 현장에서 잡혀 혹독한 고문 끝에 죽었다. 기원전 510년에 참주들을 내쫓은 민주주의파 아테네 시민들은 독재자를 살해한 이 두 청년을 기리기 위해 당시 최고의 조각가였던 안테노르에게 청동상을 만들게 하여 아고라 광장 한가운데 세워 놓았다. 기원전 480년 아테네를 점령한 페르시아인들은 이 청동상을 그들의 수도인 수사로 가져갔다. (150년 뒤,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들이 아테네로 돌려주었다.)

기원전 476년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인들은 다시 이 청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여 크리토스라는 조각가에게 새 청동상을 제작하게 하였다. 그 후 그리스 폴리스 곳곳에 민주주의를 기념하는 ‘참주 살해자’의 복제품들이 만들어져 전시되었다. 나폴리 국립박물관의 ‘참주 살해자’도 그런 복제품 가운데 하나다. 비록 기원후 2세기 때 만들어졌지만 엄숙한 표정과 군살 하나 없는 정제된 몸과 근육의 표현은 오히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예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수염도 나지 않은 하르모디오스가 칼을 잡은 오른팔을 높이 들고 있고 그 옆에서 아리스토게이톤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방패를 든 왼쪽 팔을 쭉 내밀고 있는 모습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강한 우정이 느껴진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인류의 의지와 꿈을 보여주는 장면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작품은 보기 힘들 것이다. 저절로 숙연해지는 명작이다.

■ 페이시스트라토스 죽음 직후의 아테네

기원전 527년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독재자로서는 드물게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그는 정실부인에게서 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 테살로스라는 세 명의 아들을 얻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었을 때 막내 테살로스는 아직 어려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고(못했기 때문에) 두 형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히파르코스는 치기가 많고 예술 애호가를 자처하는가 하면 공공연하게 애정 행각을 벌이곤 했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미소년과 유명한 시인들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 과시욕이 있어 길거리 곳곳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항상 올바른 생각으로 걸어라” “나쁜 생각을 하지 말아라”와 같은 경구를 새긴 헤르메스 기둥을 세워 놓았다. 이런 방법으로 일반 국민을 가르치고 자신의 현명함을 자랑하고 싶어했다. 반면, 히피아스는 천성적으로 정치를 좋아했고 논리적이었다. 실제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은 뒤 아테네를 통치한 것은 히피아스였다.

이탈리아 나폴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참주 살해자들’이라는 이름의 조각. 왼쪽이 아리스토게이톤이고 오른쪽이 하르모디오스다.
이탈리아 나폴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참주 살해자들’이라는 이름의 조각. 왼쪽이 아리스토게이톤이고 오른쪽이 하르모디오스다.
처음에 히피아스는 민주적인 형식을 통한 지배를 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반참주 세력인 귀족들이 반발하려는 낌새가 보였기 때문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이런 정치적 제스처가 필요하기도 했다. 히피아스는 기원전 526년에 선거를 통해 대표 아르콘으로 선출되자 귀족들에게도 정권 참여의 길을 열어주었다. 기원전 525년에 아테네의 마지막 왕의 후손인 알크마이온 집안의 클레이스테네스가 아르콘으로 뽑혔고, 이듬해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최대 정적으로 참주정에 항의하여 스스로 망명을 떠난 밀티아데스의 조카가 아르콘이 되었다. 그러나 히피아스와 구귀족 사이의 밀월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그해에 밀티아데스의 아버지가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히피아스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 밀티아데스는 히피아스와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 그러자 알크마이온 집안과의 관계도 차갑게 변했고 그 집안 사람들은 다시 아테네를 떠났다. 기원전 516년 밀티아데스 역시 아테네를 떠나자 새로운 참주와 귀족의 협력 관계는 파탄이 나고 말았다.

기원전 524년, 히피아스는 아버지가 하던 방식대로 정부 요직을 모두 자신의 친인척과 측근 부하로 채웠다. 또 지지자들인 서민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아버지가 생전에 하던 대규모 토목과 건축 공사도 계속했다. 소득세도 10%에서 5%로 낮춰 민중의 지지를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버지가 갖고 있던 중요한 미덕 가운데 하나인 검소함이 없었다. 저녁이면 대규모 향연을 즐겼고, 비싼 명마들을 수집하는 등 씀씀이가 매우 컸다.

■ 히파르코스의 암살

히피아스의 참주 독재의 몰락은 그의 동생 히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에게 암살당한 기원전 514년부터 시작됐다. 이 암살 사건의 동기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치정적인 것이었다. 기원전 5세기 때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이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준다.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대담한 행동은 연애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르모디오스는 한창나이의 아름다운 젊은이였고, 그의 애인 아리스토게이톤은 중산층 시민이었다. 히파르코스는 하르모디오스의 미모에 반해 그를 애인으로 삼으려 했지만 늠름하고 믿음직한 애인이 있었던 하르모디오스는 이를 보기 좋게 거절해 망신을 주었다. 권력자 연적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인 아리스토게이톤은 걷잡을 수 없는 질투에 사로잡혀 참주정치를 끝내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히피아스와 히파르코스 형제는 권력을 신중하게 사용하여 민중을 억압하지 않았기에 미움을 사지는 않았다. 또 세금으로 거둔 돈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데 쓰지 않고 도시 미화와 전쟁 비용에 쓰고,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데에 써서 민중들의 인기도 높았다. 정치적으로도 자신들 기운데 한 사람이 반드시 최고직을 차지하는 조치를 취한 것 이외에는 대부분 법에 따라 관리를 뽑았기에 큰 불평이 있지도 않았다.

한편, 또 한 번 하르모디오스를 유혹하려다 실패한 히파르코스는 야비한 방법으로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하르모디오스에게는 처녀 누이가 한 명 있었는데, 히파르코스는 그녀를 판아테나이아 축제 때 꽃바구니를 들러 오라고 초청해 놓고는 정작 그녀가 오자 자격이 없다고 모욕하며 쫓아냈다. 권력을 이용한 치졸한 복수였다. 이에 하르모디오스는 크게 분개하여 복수를 결심했다. 애인 아리스토게이톤 역시 더 흥분하여 복수를 외쳤다. 그들은 동지들을 모으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축제가 시작되는 날을 기다렸다. 판아테나이아 축제 행렬에는 참가 시민들이 무장을 할 수 있었기에 거사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두 사람이 먼저 행동을 시작하면 다른 동지들이 즉시 참주의 경호대에 맞서 봉기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 음모에 참가한 사람 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거사를 시작하면 다른 시민들도 합세하여 자유를 되찾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기대했다.

판아테나이아 축제 행렬은 아테네의 서쪽 입구인 케라미코스 지역에서 출발했다. 축제의 주관자인 히피아스는 케라미코스의 ‘신성한 문’(히에라 필레·Hiera Pyle)에 가서 축제 준비를 감시하고 있었고, 그의 동생 히파르코스는 질서를 잡기 위해 성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때 마침 음모에 가담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히피아스에게 친근하게 속삭였다. 이를 본 하르모디오스와 아리스토게이톤은 자신들이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성문 안으로 돌진하여 히파르코스를 찔러 죽였다. 하르모디오스는 경호대의 손에 그 자리에서 죽었지만 아리스토게이톤은 몰려드는 군중 사이로 도망쳤다가 나중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히파르코스의 암살을 보고받은 히피아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참가자들을 정해준 장소에 무기를 소지하지 말고 모이라고 명령했다. 참가자들이 모이자 히피아스는 경호대에게 음모에 가담한 혐의가 있는 사람들과 단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행렬에는 방패와 창만 허락되었기에 단검을 가진 자들은 음모자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히파르코스가 살해된 뒤 아테네인들은 4년 동안 전보다 더 혹독한 참주의 독재에 시달렸다. 히피아스는 자신도 음모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국인 용병 수를 대폭 늘리고, 수많은 무고한 시민을 처형하고 추방하는 등 강압적인 독재 정치를 하는 한편 혁명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외국에 망명지를 물색했다.

히파르코스가 암살당한 기원전 514년에 페르시아는 히피아스의 이복동생이 다스리던 터키 반도 북서부의 아테네 식민지 시게이온을 정복했다. 이듬해 페르시아는 히피아스의 금광이 있는 마케도니아에까지 세력을 넓혔다. 히피아스는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돈이 가장 필요한 시기에 시게이온과 팡가이온 산 금광의 수입을 잃게 되어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 방법으로 히피아스가 취한 조치는 국가 지출을 줄이는 것과 세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는 우선 지출을 줄이기 위해 연극제나 판아테나이아와 같은 종교 축제, 부족 축제 행사에 일정액 이상의 기부금을 내지 못하는 시민들의 참가를 제한했다. 또 새로운 세금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황당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 집의 발코니 크기에 따른 ‘발코니세’, ‘건물 외부 계단세’, 집안의 내정(內庭) 크기에 따른 ‘내정세’, 그리고 심지어 ‘사망세’와 ‘출산세’까지 신설했다. 이런 세금은 히피아스가 아니라 아테네에 있는 신전의 수입이었지만, 폴리스에 큰일이 있으면 큰 부자들이 모든 지출을 감당하고 그 일을 맡아 처리하는 아테네 전통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세금을 걷는 것 자체가 아테네 시민들에게는 비민주적인 압제로 보였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이제 참주정치의 생명은 거의 다 되어 민중이 봉기하기만 하면 무너질 정도가 되어 있었다. 오직 필요한 것은 이런 민중 봉기를 지도할 지도층의 출현이었다. 그리고 당시 아테네에는 그런 지도자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