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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참주정치의 종말/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14. 22:23

국제국제일반

‘결정적 패착’ 참주 일족이 포로로…독재는 무너졌다

등록 :2016-03-13 20:00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⑥ 참주정이 끝난 곳, 아크로폴리스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모습. 기원전 510년 아테네 시민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농성을 하던 참주 히피아스를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몰아냈다.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모습. 기원전 510년 아테네 시민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농성을 하던 참주 히피아스를 스파르타의 도움을 받아 몰아냈다.
“아테네는 안 봐도 아크로폴리스는 보고 간다”는 말이 있듯이,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에 온 사람은 누구나 꼭 들러보는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라는 말은 ‘폴리스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정상의, 끝의’라는 뜻의 ‘아크로’(akro-)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polis)가 합쳐져 만들어진 낱말이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북서쪽 기슭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솟는 ‘클렙시드라’(klepsydra)라는 샘이 있어, 이미 ‘후기 신석기 시대(기원전 2800~2500년)’ 때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 이곳은 적의 침입에 대한 최후의 보루로서 요새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신화적 왕들이 활동하던 시기인 ‘미케네 시대(기원전 1580~1100년)’ 때부터 궁전이 들어섰고, 왕정 체제가 무너진 초기 철기 시대 때인 ‘기하학적 문양의 시대(기원전 1100~750년)’에는 궁전 자리에 신전들이 대신 들어섰다. 또 이때 아크로폴리스의 성역화가 시작되어 일반 주민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쫓겨났다.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현관 건물 ‘프로필라이아’(Propylaia)를 처음 지은 것도 이때였다. 기원전 6세기 말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미케네 시대의 성문과 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현관 건물과 아테나-니케 여신의 제단을 세우는 한편, 방어를 위해 성벽을 튼튼하게 쌓았다.

기원전 510년, 바로 그 성벽 아래에서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와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의 지원을 받은 아테네 민주 시민들 사이에 아테네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의 끝은 허망했다. 아주 조그만 잘못 하나로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던 참주의 무소불위의 권력이 속절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아크로폴리스 성벽을 비추는 석양빛처럼 권력도 덧없는 것이었다.

부당 징세에 불만은 쌓여갔고
망명해 있던 귀족들도 합세
참주정 전복을 시도했지만 실패
그러나 반정부운동은 더 강해졌다

치명적 타격은 스파르타에서 왔다
패권 유지하려 군대를 파견했고
히피아스는 아크로폴리스로 피신
포위전은 장기화될듯 보였지만
탈출시키려던 일족 불잡혀 협상
36년 참주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엔 귀족 중심 ‘과두정’
민주파 시민 쪽은 묘안을 짰다
전통적 부족단위를 재편하자는 것
법안은 민중 지지 속 민회 통과
민주개혁은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 참주정 전복을 위한 첫 번째 시도

참주정을 피해 망명해 있던 아테네의 귀족들은 히피아스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올려 민중들의 불만을 사게 된 것을 보고 즉시 행동을 취했다. 이번에도 귀족들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알크마이온 집안이 앞장을 섰다. 이들은 무장을 하고 아테네 북쪽의 파르네토스 산 아래에 있는 ‘레입시드리온’(Leipsydrion) 언덕을 점령하고 요새화했다. 아테네 시내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시민들이 이곳으로 달려와 참주의 독재정을 몰아내기 위한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히피아스가 고용한 외국인 용병들이 이들을 공격하자 반정부군은 많은 인명 손실을 입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아테네 시중에는 이 사건을 주제로 한 다음과 같은 노래가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아, 배반자 레입시드리온 언덕이여, 여기서 얼마나 많은 고귀한 핏줄의 용사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조상의 후예인가를 보여 주었다.”

이렇게 참주를 몰아내려는 군사적 시도는 실패했지만 아테네 안의 반정부 운동은 날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히피아스는 기원전 512년, 지금 피레우스(피레에프스) 항구 가까이에 있는 ‘무니키아’(Mounichia) 언덕에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 스파르타가 아테네 참주정 전복에 개입한 까닭

아테네 참주정에 대한 치명적 타격은 스파르타에서부터 왔다. 스파르타는 항상 다른 폴리스의 참주정을 싫어하여 기원전 6세기 때부터 여러 폴리스에서 참주정을 몰아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집안과는 좋은 관계를 맺어 왔기에 처음에는 아테네 내정에 개입하여 히피아스를 축출하려는 의도는 갖고 있지 않았다. 히피아스에 대한 스파르타인들의 태도가 강경한 쪽으로 바뀌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유는 히피아스를 축출해야 한다는 델포이 신탁이었다. 델포이는 전통적으로 참주정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히피아스를 축출하라고 신탁을 내린 데에는 더 중대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영원한 정적이었던 알크마이온 집안에 대한 편애 때문이었다. 당시 알크마이온 집안은 마침 기원전 548년 화재로 소실된 아폴론 신전을 새로 짓는 공사를 맡고 있었다. 경제력에 여유가 많았던 알크마이온 집안은 이 공사에서 이익을 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사재를 털어서 신전 외벽을 원래 계약대로 석회석 대신 훨씬 고급 자재인 파로스 섬의 최고급 대리석으로 장식하여 신전을 아주 아름답게 꾸며 델포이 신전 신관들의 호의를 얻어냈다.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은 이 호의를 바탕으로 신관들을 매수하여 스파르타인들이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신탁을 물으러 올 때마다 아테네를 참주정에서 해방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이 반드시 이루어내야 할 의무라고 신탁을 내리도록 부추겼다.

두 번째 이유는 히피아스가 스파르타의 오래된 숙적인 아르고스 시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아르고스는 펠로폰네소스에서 스파르타의 패권에 대항하는 유일한 폴리스여서 스파르타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뿐 아니라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참주가 다스리고 있었기에 스파르타엔 두 도시의 우호적인 관계가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 아테네 참주정의 끝

스파르타는 계속되는 델포이 신탁을 무시하기 어려웠고, 또 언젠가는 아르고스를 길들이지 않으면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아테네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앙키몰로스를 대장으로 한 스파르타 원정군은 배로 아테네의 주항인 팔레론에 상륙했다. 그러나 이런 정보를 미리 입수한 히피아스는 테살리아 용병 천 명을 사서 이에 대비했다. 그는 스파르타 군이 오기 전에 팔레론 항구 앞의 벌판의 모든 관목 숲을 잘랐다. 테살리아의 주력 부대인 기병이 움직이기 좋게 한 조치였다. 이 작전은 크게 성공하여 기병에 대한 대책 없이 상륙한 스파르타 군은 속절없이 궤멸당하고 말았다. 대장 앙키몰로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스파르타 군은 전사했고 살아남은 패잔병들도 겨우 배까지 도망가는 게 고작이었다.

여지없이 체면을 구긴 스파르타는 이번에는 클레오메네스 왕이 직접 지휘하는 더 많은 수의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제는 아테네 내정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에는 감히 스파르타 군과 맞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아테네가 자신들의 군대를 패배시킨 사건은 스파르타의 패권마저 위협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파르타 군은 지난번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바닷길이 아니라 육로를 통해 아테네로 진격했다. 테살리아 군은 첫 번째 전투에서 40기의 기병을 잃자 더 이상 싸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자신들의 나라로 후퇴했다. 반참주정 세력의 도움을 받은 스파르타 군이 아테네로 들어오자 히피아스와 그의 용병들은 아크로폴리스로 피신하여 농성을 시작했다.

히피아스는 이런 위기에 대비하여 아크로폴리스에 미리 충분한 식량과 불을 비축해 두었기에 포위전은 장기화될 듯했다. 오랫동안 해외에 머물기 어려웠던 클레오메네스도 포위를 풀고 스파르타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히피아스 쪽에서 큰 실수를 했다. 히피아스가 일족의 아이들의 안위를 걱정하여 그들을 몰래 국외로 탈출시키려다가 포위군에게 잡혔다. 아이들의 문제를 풀기 위해 양쪽은 협상에 들어갔다. 히피아스 일당은 아이들을 돌려받는 대신 아테네에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닷새 안에 아티카 반도를 떠나라는 아테네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유혈 사태나 궁지에 몰린 상대방을 막다른 골목으로 모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꺼리는 아테네인들다운 해결 방법이었다. 아테네를 떠난 히피아스는 자기 이복동생이 다스리는 에올리아 지방의 시게이온으로 갔다. 트로이와 멀지 않은 곳이다. 이렇게 하여 기원전 510년, 36년 동안 계속되었던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아들 히피아스의 아테네 참주정은 막을 내렸다.

■ 참주정 몰락 직후의 아테네

참주를 몰아낸 민주파 아테네인들은 복수심에 빠지거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참주정의 뒤처리를 해나갔다. 당시 법은 참주 본인이나 그 가족들뿐 아니라 참주정에 참가했거나 동조한 사람들과 그의 일가족에게까지 유죄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새로이 권력을 잡은 민주파 지도자들은 궐석 재판에서 히피아스와 그의 아들들에 한해서만 시민권 박탈과 함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시민 명부를 일일이 대조하여 각 시민의 자격을 민회에서 투표를 통해 심사하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히피아스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불법적으로 시민권을 주었던 무자격 시민들을 가려내어 시민권을 몰수했다. 끝으로 이들은 민회에 ‘고문 방지법’을 안건으로 올려 어떤 경우에도 정부 기관이 시민을 고문할 수 없도록 했다. 독재를 하던 참주들은 자신들의 반대파를 누르는 수단으로 잔혹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었기에 이런 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참주정이 끝났을 무렵 아테네에는 소수 귀족을 중심으로 정부를 꾸려야 한다는 ‘과두파’와 민중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정을 해야 한다는 ‘민주파’, 두 개의 정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과두파의 지도자는 명문가 출신의 이사고라스였고, 민주파의 우두머리는 알크마이온 집안의 클레이스테네스였다.

기원전 508년에 있었던 선거에서 과두정을 원하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이사고라스가 승리하여 대표 아르콘으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에서 상당수의 하류 계층 시민들 역시 이사고라스를 지지했는데, 그 까닭은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히피아스의 참주정 시절 많은 혜택을 누렸던 농부들과 가난한 시민들은 델포이의 여사제 피티아를 매수하여 참주정을 몰아내는 데에 앞장을 섰던 클레이스테네스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부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 자기 밑에 있는 일반 시민들한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이렇게 하여 애써 되찾은 권력은 또다시 소수 귀족의 손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클레이스테네스와 민주파 시민들은 민중의 지지를 얻어낼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개인 시민 자격으로 아테네 사회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혁신적인 법안을 민회에 직접 제출했다. 아테네의 전통적 네 부족을 해체하고, 도심 지역과 해안 지역, 내륙 지역을 각기 10개의 단위로 나눠 모두 30개의 행정 단위를 만든 뒤, 제비뽑기로 도심 지역에서 한 단위, 해안 지역에서 한 단위, 내륙 지역에서 한 단위씩을 뽑아 10개의 새로운 부족을 만드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민회에서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통과되었다. 이 개혁으로 이오니아 족의 선조 이온의 네 아들 이름에서 따왔다는 겔레온, 아이기코레스, 아르가데스, 호플레스라는 전통 네 부족의 우두머리 귀족들은 그때까지 누리던 권위와 막강한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민주개혁은 이렇게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