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이태백 콤플렉스 드디어 사라졌어” | |
‘노벨문학상’ 회자 뒤 최초의 언론 나들이, 고은 시인과 나눈 인생-문학-술-상 이야기 | |
고경태 기자 강재훈 기자 | |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제21화 ‘소년 고은’의 절창 안성시 공도읍. ‘직설’이 그의 집으로 갔다/ 차를 내온다고 일어섰다. 차 대신 ‘한라산’ 소주가 왔다./ 뼈를 찌르는 듯한 언어. 강렬하다. 날씬하다./ 술이 들어갈수록 말들이 활활 타올랐다. ‘소년 고은’을 만났다/ 노벨문학상이 회자된 뒤 언론과는 처음이다. 노벨의 ‘노’ 자도 꺼내지 않았다.
진행·정리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서해성(이하 서) 원래 미면 출신이시죠? 옥구 미면(지금 군산시 미룡동). 쌀 미(米)의 미면. 군산항에서 실어가던 쌀. 고은(이하 고) 대신 우리는 만주의 썩은 옥수수만 배급받아 죽 끓여 먹었지. 한홍구(이하 한) 서울에선 콩깻묵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고 썩은 옥수수도 먹고 콩깻묵도 먹고 밀기울도 먹고, 그게 내 운명의 물질적 토대지. 서 국민학교 때 ‘장래 희망이 천황’이라고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으신데. 고 교장한테 혼났어.(웃음) 군대에서 준위로 제대한 자였어. 서 시대와 첫 불화…그리고. 고 해방 뒤 친일파 교장 배척운동을 하는데, 나를 앞장세웠어. 동맹휴학, 스트라이크는 어릴 때부터 익숙한 언어지. 내가 사범학교 합격했는데도 품행이 교사에 안 맞는다고 떨어냈어. 군산중 입학시험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일등을 해보았지.(웃음)
죽음이 몸에 묻어 있던 그 시절
서 미면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고 지주들…우리 증조부도 천석꾼이었어. 서해안 일대 지주 핏줄들 중에 좌파가 많았어. 식민지 시대에 무산계급이론을 형성한 게 대개 지주 자식들이야. 황해도에서 전라도까지. 한 왜 지주 집안에서 빨갱이가 많이 나왔을까요? 고 지주 아들이 소작인 딸에게 연심을 품은 경우가 많아. 연민 같은 거지. 지주 아들이 공부를 했으니까. 자기 집이 모순의 본거지라는 걸 알게 되는 거지. 목사 아들이 목사 안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 미 21항만사령부 운수과 검수원도 하셨는데…자기학대 형태의 소동도 거듭되었고. 고 전쟁통에 살아남아 내가 외상이 깊었어. 자꾸 뛰쳐나가니까 붙잡아서 거기 취직을 시켰어요. 그땐 총기가 좀 있었거든. 캡틴하고 늘 대화하는 반통역이었어. 거기서 죽을 생각만 계속했지. 자살소동 벌이고. 전쟁 때 또래들 절반 가까이가 없어졌어. 그 죄의식…죽음이 이렇게 몸에 묻어 있어. 살아있는 동안 벗을 수 없는 짐이지. 내 실재는 다른 사람들의 부재에 의해 유지되고 있어. 한 강연 갈 적에 선생님의 시 <오일장 장터>를 자주 인용합니다. ‘미안하다 나 같은 게 살아서 오일장 장터에서 국밥을 다 먹는다’ 이걸 쓰시던 그 순간을 듣고 싶습니다. 고 그런 시가 있었나?(웃음) 오일장이란 게 농경사회 축제지. 삶의 원형들이 만나 해후하는 거예요. 그 잔치 속에 나도 스며들어가 있는데, 그들과 일치가 되지 않는 거여. 나는 없어야 될 것만 같은 자기부정이지. 유령의 파편처럼 떠돌면서 살았어. 그게 내 이슬이고 내 빗방울이고 그랬던 거 같아. 밥 한 그릇처럼 종교적인 게 어딨을까. 어휴, 좋거든. 이걸 나 같은 게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서 선생님은 예전에도 쓰신 시를 잘 잊어버리곤 했어요. 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고나 할까. 고 문학에 관해선 어제가 없어. 가장 좋은 시는 오늘 쓴 거예요.(웃음) 한 워낙 많이 쓰셔서 문학평론가들도 다 읽지 못했을 텐데요. <만인보>도 30권이고. 젊은이들에게 ‘이놈들아 이거 하나 읽어봐라’ 권하신다면.
서 이문구 소설가가 긴급조치 9호 때 고은 선생님이 한해 마신 소주를 셈해보니 1000병이라고 한 적이 있어요. 고 이문구가 엄격해서 마이너스를 좀 했어. 아마 더 될 거야.(웃음) 이문구랑 늘 같이 먹었지. 서 독재시대를 통음으로 견디셨는데 ‘고은에게 술은 무엇’ 한 말씀…. 고 술은 비겁자에게 용기도 주지. 당시는 신체가 오그라드는 긴장의 환경이었거든. 그걸 풀 때는 술이 참 좋지. (소주를 잔에 따르며) 국가원수끼리 만날 때 주스나 콜라 마시지는 않잖아요. 첫날밤에도 합환주 한 잔 마시고, 이건 성스러운 거지. 서 어디 강연 가거나 하면 소주 한 잔 들고 시작하시잖아요. 고 그 땅에 대한 예의로 그곳 술을 마시지. 토신에게 절하는 거야. 외국 강연 가면 대개 물을 주죠. 물에게도 미안하고 나에게도 미안하고.(웃음) 그래서 색깔 있는 거 좀 가져와라 하면 주최 쪽에서 와인을 사러 나가. 청중이 낯선 코쟁이들이라 입이 잘 안 떨어져. 조금 뒤 와인이 오면 그때 입이 쫙 찢어져.(웃음) 이제야 아주 나 이상의 언어가 나오지. 내 친구가 해주는 언어. 서 지금은 안성에 살지만…길에서 태어난 분 같아요. 선생님 시의 첫 스승 격인 <한하운 시초>조차 길에서 주웠잖습니까.
이육사, 한하운, 숄로호프, 그리고 김수영
고 최초로 만난 시는 중1 때 교과서에 실린 이육사(1904~1944)의 <광야>야. 난 운명이란 말을 좋아해. 지금도 ‘운명’ 하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뼈들이 뛰는 거 같거든. <광야>를 만난 게 운명이야. 세월이 흐를수록 그 먼 기억이 더 강력하게 내 몸에 원근법을 파괴하고 오는 거 같아. ‘광야’는 거대한 공간이잖아. 천고, 거대한 시간. 닭 우는 소리도 없던 우주생성시대, 태초. 인간도 그냥 초인이 아니라 백마 타고 오는(웃음). 이걸 처음 만난 거야. 낭만적 사회주의자였던 외삼촌 영향으로 책상 앞에 ‘반 고흐 아니면 無’라고 붙여놨어.(웃음) 근데 화가 꿈이 바뀌고 말았지. 1948년인가 미술부 활동 마치고 캄캄한 십리 길을 걸어 집으로 오는데 무언가 빛이 어려 있는 거야. 길가에 책이 있어. 날 위해서 책이 기다리고 있었어. 장물취득도 아니고, 그냥 내 거야.(웃음) 그게 <한하운 시초>야. 한 시집을 주워서 시인이 된 분은 동서고금에 처음이 아닐까요? 고 새 책인데 오렌지빛 표지도 기억나. ‘하룻밤 자면 눈썹이 빠지고, 또 하룻밤 자면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크하, 정말로 비극적인! 새벽까지 그걸 읽고 결심을 했어. 첫째, 문둥병에 걸릴 것!(웃음) 눈썹도 빠지고 발가락 하나씩 떨어져나갈 것. 둘째, 집에 안 있고 떠돌 것! 나도 이런 시를 써야겠다고 맹세를 한 거지. 서 그리고 곧 전쟁이 났죠. 고 3개월 동안 죽음의 시간이었어. 하도 시신을 많이 건져내다 보니 빨랫비누로 씻어도 보름 동안 송장 냄새가 안 가셔. 그러곤 가출이 시작되더라고. 아무리 술을 마셔도 잠이 안 오고. 나중엔 이 약국 저 약국 다니면서 얻은 수면제를 쌓아놓았다가 털어먹었지. 서 숱한 교류가 있었는데 소싯적 김수영 시인과 인연을 소개한다면? 고 출가해서 동국사 중이 됐을 때 목련 송기원을 통해 알게 되었어. 송기원이 김수영과 만주에서 연극을 같이 했어. 나중에 형제처럼 친해져서 명동에서 술을 먹는데 김수영이 인민항쟁가를 불렀어요. 내가 입을 콱 틀어막고는 이탈리아 말을 마구 해가지고 분위기를 바꿨지.(웃음) 밀라노 사투리, 베네치아 사투리로 하니까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면서 금방 수습이 되었지. 그땐 잡혀가서 맞아죽을 일이었어. <돈강은 고요히 흐른다> 있지? 러시아 작가 숄로호프가 쓴 거. 그걸 일본책으로 들여와 하숙집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읽을 때야. 서 숄로호프 읽고 좌절하셨다고. 고 내 원고를 다 태워버렸어. 어디 구멍가게 장사를 하든 점원 노릇이나 하려고 했어. 서 선생님은 마음이 일면 일순 말끔하게 정리해버리곤 하시는데, ‘맑은 허무’라고 할까. 고 난 썰물이 좋아.(웃음) 과거는 쏵 가는 거지. 빈 갯바닥만 남겨두고. 요만한 조개껍질도 용납 않지. 위대한 백지.
이명박·조갑제가 있든 없든…통일은 ‘점’이 아니다
한 전태일의 40주기인데 선생님한테 전태일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고 무교동에서 술 먹을 때야. 하숙 자취를 하니 통금 끊기면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야. 주모한테 푼돈도 주고 사정도 하고 해서 술집 탁자에서 자거든. 자다가 떨어져.(웃음) 시멘트 바닥인데, 어느 날 깨어보니 신문지 쪼가리가 있는데 노동자가 분신했다는 거야. 죽음엔 내가 민감하잖아. 그렇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야. 그때까진 걍 예술지상주의였거든. 전태일의 죽음으로 인해 작품 세계가 확 바뀌게 되었지. 서 세속에서 최초의 ‘공직’이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간사인데, 현직으로 맡고 있는 게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회 남쪽대표세요. 일주일 전에 선생님이 두루 보낸 간곡한 전자우편을 받았습니다. 고 정말 이거 하나 남겨놓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어요. 겨레말큰사전. 내 꿈이거든. 북한은 물론이고 연해주, 연변, 중앙아시아, 일본, 미국으로 흩어진 분열되고 산재한 우리말들을 귀신 모아서 제사 지내듯 하자는 거야. 언어로 산 자로서 사명이랄까. 현재 일이 6할 남짓 진행됐고 사전집필 단계에 들어갔는데. 연간 비용 32억을 16억으로…이건 하루에 세끼 먹던 걸 한끼로 줄이라는 거잖아. 참 참을 수가 없어서 강하게 낼까 하다가 우선 호소문을 보낸 거지. 한 겨레말큰사전 편찬 계기가 10년 전 6·15 공동선언이었죠. 그 현장에서 시도 낭송하셨잖아요. 10년이면 짧지 않은 세월인데, 선생님한텐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서 ‘내가 죽고 나서…내 무덤을 파헤쳐 본다면 내 뼈 대신 내가 그 무덤의 어둠 속에서 쓴 시로 꽉 차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우주의 사투리’다운 말들인데, 선생님한테 시는 무엇인지요? 고 참 어리석은 시만 가득할 거야.(웃음) 난 일체의 시론을 인정하지 않아. 시를 정의할 수 없다는 거지…관타나모(쿠바의 미 해군기지, 이라크전쟁 관련자들 수용) 감옥에서 뭘 합니까. 거기서 대하소설을? 단편을 쓸 수 있어? 김남주가 감옥에서 시만 썼어요. 불가능한 데서 유일하게 가능한 게 시야. 서 선생님 시 한 줄…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학생들이 고은의 시가 뭐냐고 물어오면 ‘발견하지 못한 걸 발견케 하는 치열한 비약’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고 이런 것도 있어.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큰 세상을 바라보았다.’ 흐.(웃음) 거룻배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리면 사고무친이여. 문득 둘러봐. 거기 더 큰 세상이 있지. 그거 괜찮아. 서 ‘달빛이 삼천리에 비치지 아니한 곳이 없다’는 말로 우리 겨레를 말씀해오곤 했는데, 아, <만인보>를 ‘만인군상 일필삼천리’라는 말로 간명히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한 자루 붓으로 삼천리를 내달려 조선 백성을 담아냈으니 실로 시심의 달빛 비치지 아니한 산천, 먹물 닿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된 셈이죠. 고 이백의 경지네. 난 이백과는 피를 나눈 거 같아. 한족이 아니잖아. 우랄알타이 계보. 어찌어찌 꼽사리 껴갖고 현종 앞에서 술을 먹은 자야. 괜찮지. 서 <만인보>로 운문과 산문, 인물과 지리지의 경계 따위가 무심해졌죠. 고 옷도, 생긴 것도 제도잖아. 이빨이 대칭으로 있는, 이런 것도 다 제도야. 제도 지겨워.(웃음) 서 후배들은 무얼 하라고 다 써버리셨는지.(웃음) 고 다 못 썼어. 괴테는 편지만으로도 전집이야. 빅토르 위고는 만년필도 거부하고 깃털펜으로 거대한 기록을 남겼어. 현대문학 100년인데, 시 30편 담은 시집 내고 죽은 이도 교과서에 나오잖아. 일찍들 죽었어. 임화는 45, 김소월은 32, 윤동주는 28. 윤동주는 소년시야. 오늘날 살아있다면 지적될 게 많아요. 워낙 우리에게 절박성이 있는 걸 썼지. 시가 이쁘지. 순결성도 있고. 이런 누적된 문학사 속에서 나한테 요구하는 건 이들의 결핍을 메우라는 거야. 현대문학 100년에서 내가 50년 동안 계속 썼잖아. 술도 그때 먹다 만 걸 내가 더 먹고.(웃음)
젊은 세대여, 느그들이 알아서 하시오
한 <만인보> 같은 큰 시를 어떻게 기획하게 되셨는지? 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 잡혀 들어가 문익환, 이문영하고 육군교도소에 있었어. ‘니들은 오래 못 살아’ 소리 듣던 때야. 마지막 죽을 때 어떻게 할까 몸짓 구상을 했어. ‘조국통일 만세, 민주주의 만세’ 부르고 죽을까, 껄껄 웃을까.(웃음) 한 줄 시나 써가지고 읊고 죽을까. 한 이걸 ‘사형 세리머니’라고 해야 합니까?(웃음) 고 나중에 다 의미가 없더라고. ‘그냥 쏴라!’(웃음) 다른 건 도식적이거나 누가 해먹은 모델이더라고. 감옥이 철창신세라는데 거기 특별사동은 철창도 없어. 김재규가 있던 7방인데 똥간 하나 있고 책도 없고 뭐…그때 막 도스토옙스키가 생각나더라고. 죽을 상황에 놓이니 몇 분 만에 과거가 정리돼서 파노라마처럼 왔다는. 그러면서 나도 과거가 오더군. 현재가 없으니까 과거가 와서 현재를 담당하더라고. 한 <만인보>가 처음 나올 때 민중이라는 익명의 총체에서 구체적인 사람들이 하나하나 튀어오르는 것을 보고 ‘득도하셨나 보다’ 싶었습니다. 고 과거는 후회의 대상이 되더군. 막 빌고 싶고 그래. 삶 자체가 나를 고개 숙이게 만들더라고. 여기서 살아 나가면 이런 거 노래하면 어떨까 했지. 그게 <만인보>야. 동네 사람 하나하나가 개별화되더라고. 한 어떤 시에선가 젊은 시인들에게 ‘네 시를 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고 시단이 잘못된 게 교사가 있고 제자가 있고 이런 구속물이 만들어졌어. 참 바보 같아. 누구나 자신이 최초의 시인이야. 시란 어떤 전범, 교훈, 모범이 있을 수가 없어. 한 선생님은 스스로를 ‘폐허의 자식’이라고도 하셨어요. 고 맞아. 그게 진짜 내 언어야. 한 어쩌면 폐허세대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살 때는 힘들었지만 제약을 안 받고 많은 걸 누릴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게 예술가에게 혜택이었죠. 폐허세대가 아닌 모든 게 꽉 차게 들어선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네 시를 써라’라고 했을 땐 그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고 지들이 알아서 하시오! 난 누구의 교사가 되기 싫어. 난 이태백을 내 친구로 알죠. 교사로 여기지 않아. 콤플렉스가 있었어. 이백이는 술 먹고 명작을 썼는데, 난 술 먹고 졸작을 써요. 요새 와서야 졸작은 면해요. 그거 말고는 없어요. 서 마지막 질문인데 지금까지 큰 상만 해도 열댓번은 받았는데, 해마다 이맘때면 선생님과 관련해서 무슨 상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굉장히 궁금해합니다. 상이란 무엇입니까? 고 상이 없을 때 이태백이 있었어. 크~.(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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