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히토는 신권군주이자 전쟁 지도자” | |
히로히토 평전-근대 일본의 형성 허버트 빅스 지음·오현숙 옮김/삼인·3만5000원 | |
허미경 기자 | |
도쿄 전범재판 법정에 ‘일본 천황’ 히로히토(1901~1989)는 서지 않았다.
조선을 병합한 일본은 1931년에 만주사변을, 1937년과 41년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연달아 일으켰다. 1946년 5월부터 31개월에 걸쳐 2차대전 전범 처벌을 하겠다고 열린 도쿄재판을 <히로히토 평전>의 지은이는 ‘미국과 일본의 합작 정치재판’이라고 규정한다. 연합국 가운데 소련이 일본 왕 히로히토의 전범 처벌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인 2천만명과 일본인 310만명(전후 일본 공식 추계)의 목숨을 앗아간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은 극소수 각료가 일부 졌을 뿐이다. 도쿄 전범재판의 결과 ‘천황’ 히로히토는 상징적 입헌군주로 일본제국주의 군부의 꼭두각시였을 뿐이라는 견해가 미국과 일본 사회의 정설이 되었다. 그는 ‘전쟁을 종결시킨’ 평화주의자의 옷을 입었다. 1989년 그가 여든여덟 천수를 누리고 숨졌을 때 일본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는 공식 애도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돌아가신 천황께서는 … 격동의 62년간 세계 평화와 국민의 행복을 기원하고 몸소 실천하셨다. 폐하의 뜻과 달리 발발한 지난 대전(大戰)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차마 볼 수 없어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전쟁을 종결하는 영단을 내려주셨다.”
<히로히토 평전>은 2000년 9월 미국에서 출간되어 미국과 일본 역사학계에 히로히토의 전쟁책임론을 정면으로 제기한 책이다. 200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 책은 미·일 양국에 형성된, 어쩌면 해방 후 한국 내 일각에서도 횡행했던 ‘천황 히로히토’에 대한 통념, 곧 꼭두각시 입헌군주론을 조목조목 사실관계를 드러냄으로써 반박한다. 태평양전쟁 이전부터 일본 보수파가, 전후엔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 지도자들이 북돋워온 ‘만들어진 천황상’을 뒤집는다. 미국과 일본에서 30년 동안 일본사를 가르쳐온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72·미국 빙엄턴대 교수)가 두 나라의 방대한 사료들을 통섭하여 “인간 히로히토와 군주 히로히토를 형성한 사건과 이데올로기를 여러 층위에서” 드러내는 동시에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이 봉인돼 가는 과정을” 기술한 역작이다. <히로히토 평전>은 히로히토가 군부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기동성 있는” 군주였으며, 입헌군주가 아니라 헌법 위에 존재하는 독재적 ‘신권’군주로 군림·통치했음을 촘촘히 논증한다. 히로히토는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주도면밀하게 전제군주로 길러졌다. 아버지 요시히토(다이쇼)의 뒤를 이어 1926년 제위에 올라 45년 패전 뒤에도 살아남았다. 사망할 때까지 그가 통치한 기간은 미군 점령기를 거쳐 ‘상징 천황’으로 군림한 냉전하의 번영기까지 62년에 달한다. <히로히토 평전>이 말하는바 1931~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요컨대 일왕 히로히토가 자신의 이름으로 치른 전쟁이다. 군부의 반발을 무마하고 일본의 항복을 이끌었다는 그가 사실은 스스로가 강경 확전론자였음을 이 책은 드러낸다. 또한 이 책은 그 침략전쟁에 일본 육군이 책임이 있다는 정설에 대해서도, 해군 상층부와 히로히토의 역할을 드러내어 반박한다. 이 책에서 비로소 히로히토는 일본제국주의 팽창정책을 주도하고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을 몰고 간 장본인으로 ‘복권’된다. 말수 적은 그는 침략행위와 정책에 대한 재가와 인정, 용인 등을 통해 자신의 의중을 구현했다. 내각 각료와 군부의 이견이 발생하면 그는 늘 강경파 군부의 손을 들어줬다. 1931년 일본 육군(관동군)이 상부 명령을 무시하고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도 처벌론을 외면하고 육군의 강경 도발을 용인했다.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에서는 대본영에서 직접 전쟁을 지휘했다. 패색이 짙어지던 42년께부터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이 건의한 항복을 거부한 것도 헌법상 일본군 통수권자인 그였다. 미국이 주도한 도쿄재판의 재판부는 이른바 ‘공동 모의’론을 내세워 히로히토를 전범에서 제외했다. 도쿄재판은 1928년부터 45년까지 17년여 동안 일본 침략전쟁의 ‘공동 모의’가 이뤄진 것으로 본다. 이 책은 맥아더와 트루먼 대통령의 정책에 따라 그 재판이 그 17년을 통틀어 권력을 쥐고 있었던 단 한 사람, 히로히토를 제외했기 때문에 일제 침략전쟁의 의사결정 과정이 흐릿해지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히로히토는 전쟁 책임을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지은이는 일본인들이 전쟁범죄를 빨리 망각하게 된 주원인은 “스스로를 속인” 히로히토에게 있다고 말한다. “천황이 심판받고 조사받지 않은 이상,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의 정당성, 곧 다른 아시아태평양 국가를 해방시키려고 침공했다는 믿음은 완전히 불식될 수가 없었다. 결국 다수 일본인은 천황과 공생관계에 있다. 천황이 책임을 지지 않았으므로 국민 전체가 스스로 책임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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