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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오디세이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들... 품을까 보낼까

이윤진이카루스 2010. 10. 9. 07:44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들…품을까 보낼까
고전 오디세이
열망, 자유, 유혹, 몸부림에 대하여
한겨레 고명섭 기자 메일보내기
가지 않을 것 같았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대지도, 사람도 뜨거웠던 여름이었다. 지난여름이 남기고 간 불덩어리 하나 정도는 아직 가슴에 남아 있으리라. 사람들이 열망이라 부르는 그런 것 말이다. 그것을 어떤 이는 자유라고, 어떤 이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시인 기형도의 <빈집>이다. 가을에 들을 만한 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우선, 시인과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 넓은 양해를 구한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라는 목소리가 듣는 이의 귀를 아련하게 만든다.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을 차지하려 몸부림쳤고, 그래서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시인의 “내 사랑”이 또한 가엾을 것이다.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을 구하러 나갔지만 구하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에, 하지만 돌아온 그곳이 쓸쓸함만 감도는 ‘빈집’이라면, 그곳으로 정말 돌아오기 싫었으리라. 시인의 쓸쓸한 ‘빈집’은 과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내 사랑”이 갇힌 곳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곳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몸이리라. 그렇다면, 이런 ‘빈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이와 관련해서 여기, 두 노래를 소개한다. 한번 듣고 생각해보길. 먼저, 헬레니즘 시대에 활동한 칼리마코스(기원전 300~240년)의 노래다.

영혼이 도망쳐버렸네. 어느 소년에게, 누구한테 가버렸을까?/ 어이, 소년아, 도망친 영혼을 몰래 숨겨 두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가? (…)/ 또한 영혼아, 지금은 어느 사랑에 눈멀어, 어느 하늘 아래에서/ 지금 헤매고 있는가? (단편, 41번)

물론, 칼리마코스도 영혼이 집을 떠나 마냥 밖에서 나도는 것을 권하는 시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눅눅한 ‘빈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소위 진지함, 일관성, 건전함, 성실, 정직 등의 윤리교과서가 가르치는 이념에 짓눌려 영혼이 ‘빈집’에 갇혀 있도록 만드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시인의 일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옳은 말인 줄 알지만, 무겁고 억압적으로 느껴지는 이념들이 실은 영혼의 ‘빈집’을 더욱 쓸쓸하고 황량하게 만든다는 점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해서 그는 진지함, 경건함, 엄숙함 대신에 천진난만, 순수, 유희를 찬양한다. 또한 그는 세계의 이중성, 위선, 부자연스러운 세계와 그것의 사악함을 폭로하는 시인도 아니었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노래하고 즐기는 시인이었다.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시인은 예컨대 사랑 문제와 관련해서도 자유로운 태도를 취했다.

위에서 인용한 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예전에 사랑했던 애인에게 모든 것을 걸지도 않았고, 그녀에게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그는 영혼이 눈 가는 대로 돌아다니게 놔두고, 실은 이를 즐겼다. 어느 곳이든 정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사랑하지만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자유이고, 이런 자유를 누리려는 욕망이 본래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 방랑, 유희가 그의 인생을 구성하는 열쇳말인 셈이다. 그런데 칼리마코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사랑하지만,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 때에, 사람은 자유의 의미를 체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한 낚시꾼에게 중요한 것은 잡은 물고기가 아니라 낚시 자체이듯이, 또한 진정한 사냥꾼의 관심사는 사냥에서 획득한 결과가 아니라, 사냥 자체이듯이, 사랑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세상천지를 방랑하고 돌아다니었음에도, 어쨌든 칼리마코스는 나름 안전장치 하나 정도는 마련하고 다닌 셈이다.

다음은, 이렇게 자유와 방랑을 즐겼던 칼리마코스와는 반대로, 어떻게든 방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던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다. 집으로 가는 노정에서 그가 처했던 숱한 고난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경우는 아마도 세이렌 자매의 유혹일 것이다.

그대는 먼저 세이렌 자매에게 다가가게 될 것이오./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인간을 유혹하지요./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가서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어느 누구도 아내와 자식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지요./ 그녀들이 풀밭에서 부르는 감미로운 노래에 홀린 남자들은/ 주변이 온통 썩어 들어가는 남자들의 뼈들로 덮여 있고/ 뼈를 감싸는 살갗들이 말라서 오그라드는지도 모르지요./ 그 옆을 얼른 지나가되, 그대는 달콤한 꿀밀랍을/ 전우들의 귀에 바르게 하세요.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도록 말이지요./ 그러나 원한다면, 그대는 듣도록 하세요. (중략)/ 돛대에 밧줄을 단단하게 걸게 하세요. 그리고 세이렌 자매의 노래를 들으세요./ 그대가 풀어 달라고 전우들에게 애원하거나 명령하면 할수록/ 더 단단하게 그대를 묶게 하세요. (<오디세이아> 제12권 39~54행)

호메로스는 우리의 영혼을 밖으로 불러내는 유혹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지, 그러나 영혼이 자신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 데리고 나가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호메로스도 영혼이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게 하고 몸은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명령하지만, 자신의 귀는 열어놓고 몸은 돛대에 꽁꽁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유혹에 귀를 열고 영혼을 내주는 일은 가능하지만, 몸까지 내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파멸을 뜻하고, 몸까지 내주다 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몸부림이 생겨난다 하겠다. 몸부림이란 몸이 영혼을 따라나서는 것은 위험하니 집에 남아 있으라고 떼어놓을 때에 몸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의 육체와 영혼의 구분에 대한 자각이 이 대목에서 비롯되었다 하겠다. 하지만 우리 삶의 실제 모습은 ‘빈집’을 떠났다 돌아왔다 반복하는 과정이라는 자각도 이 대목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어쩌면 기형도의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는 울림이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기형도는 칼리마코스가 아니라 호메로스의 길을 간 시인으로 보인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렇다. 저 열망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오디세우스가 몸부림쳤다면, 기형도는 가엾은 눈길을 보낸다는 것이 차이일 것이다.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만약 당신 가슴에 지난여름 못 채운 열망이 아직 남아 있다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열망의 불씨가 아직도 살아 있다면,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그것에게 작별을 고하겠는가? 아마도 칼리마코스의 유혹에 귀가 솔깃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 하려면 나름 내공이 쌓여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호메로스의 경고도 그리 쉽게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오디세우스의 작별 방식은 가혹할 정도로 너무 단호해 보인다. 기형도의 방식도 나름 괜찮아 보이지만, 빈집에 마냥 가두어 놓기에는 열망이 너무 불쌍해 보인다. 그렇다면 열망을 채우기 위해 나가는 대신에, ‘빈집’에 쓸쓸하게 남은 열망에게 기형도의 노래나, 좀 여유가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어떨는지. ‘빈집’에 남은 열망이 조금은 덜 외로워할 테니까 말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