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만5천명의 신원을 추적한 역사학자 한영우 교수에 따르면 대부분의 성관에서 문과 급제자가 배출되어 과거는 개방적인 신분이동에 크게 기여한 제도였다고 한다. 세도정치 시기 조선의 슈퍼갑이었던 노론 화족조차 3대 동안 급제자가 나오지 못하면 몰락 양반이 되어 한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대의 인재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로스쿨이 사법시험이나 과거 제도에 비해 계층구조를 역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민주적 제도라는 데 적지 않은 국민들이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미국식 로스쿨 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무엇보다 폐쇄적인 고시 문화와 합격하면 벼락출세를 해서 서민 위에 군림하는 그들만의 법조권력에 대한 국민적 분노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스쿨은 출신 법조인의 전반적인 실력 저하는 접어두고라도 선발 과정의 공정성에 대한 의혹과 상류층의 신분세습 수단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 시달리고 있다.
시험이 아닌 교육을 통한 양성을 표방한 로스쿨은 기본적으로 속칭 각종 스펙이라는 정성적 요소로서 학생을 선발한다. 손 교수가 정량요소라고 주장하는 학점의 경우만 보더라도 객관적 전형요소가 아니라 개별성이 강한 정성요소이다. 대학 간 서열이 엄존하는 현실 때문이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서울대의 경우 2009~2013년 이른바 ‘스카이’와 경찰대 등 특수목적대 출신이 전체 입학자의 94%를 차지한다. 지방대 출신은 단 4명(0.5%)에 불과했다. 나아가 서울대·고려대·연세대 로스쿨의 지난 5년간 입학자 중 30살 이상이 3% 미만으로, 연령 차별까지 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양한 전공과 사회경력을 갖춘 개방적 법조인 양성’이라는 로스쿨 도입 취지는 결국 허언에 불과하다.
손 교수도 인정하다시피 로스쿨 입시는 명문대학 입학과 함께 착실하게 학점과 스펙을 준비해서 갓 졸업한 모범학생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하다. 경찰대 출신 경찰간부 수십명이 규정을 어기고 편법으로 로스쿨을 다니다가 감사원에 적발된 최근 사례를 보더라도 로스쿨은 ‘만인에게 열린 체제’가 아니라 학벌과 경력이 마련된 엄친아를 ‘골라서 키우려는 리그’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또한 손 교수는 사시가 존치될 경우 부모의 지원을 받는 명문대생의 패스트 트랙이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하지만 유복한 명문대생이라면 합격률이 60% 이상인 로스쿨과 5%도 되지 않는 사시 중 어떤 트랙을 선택할까.
합격이 보장되지는 않지만 사시는 적어도 로스쿨처럼 도전 자체가 제약되지는 않는다. 수십만 젊은이들이 문턱 높은 경쟁시험에 명운을 거는 현상은 오늘날 한국의 흙수저들이 처한 고단한 현실이 원인이다. 따라서 사시가 우수인재들의 블랙홀이 될 것이라는 우려 또한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다. 오히려 인재들이 로스쿨 입학 준비로 몰리는 현실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시와 로스쿨의 이원적 시스템이 사시와 로스쿨 제도의 약점을 상호보완하고 서민에게 실질적 기회 평등을 제공하는 법조인력 양성 정책일 것이다. 평범하지만 능력을 갖춘 사회경제적 약자가 로스쿨을 통하지 않고도 법조인이 될 수 있는 길 하나쯤은 열어줘야 하지 않을까.
손승환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왜냐면] 로스쿨 독점체제가 문제의 핵심 / 손승환
등록 :2016-04-06 19:40
손창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기고 ‘사시존치론 대안을 제시한다’(3월29일치)에 반론한다.
'민주주의를 위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의민주주의의 허구성과 내가 투표소에 가는 이유/ 김종철/ 한겨레신문 (0) | 2016.04.08 |
---|---|
누가 배신자인가/ 한겨레신문 (0) | 2016.04.08 |
인문정신 2/ 조한욱 교원대 교수/ 한겨레신문 (0) | 2016.04.07 |
우루과이 대통령 무히카의 삶/ 한겨레신문 (0) | 2016.04.07 |
문제는 사회권이야/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한겨레신문 (0) | 2016.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