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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배신자인가/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4. 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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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발] 누가 배신자인가 / 박찬수

등록 :2016-04-07 19:24수정 :2016-04-07 22:10

 

1997년 12월의 대통령선거 무렵이었다.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캠프에서 호남 유세 일정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어차피 호남에선 ‘김대중 후보 몰표’가 나올 텐데 바쁜 일정을 빼서 굳이 유세를 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의견이 다수였다. 이인제 후보가 탈당해 독자 출마한 터라 한나라당 지지기반인 부산·경남도 흔들흔들하던 시점이었다. 그때 캠프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 후보의 호남 유세를 강하게 주장했던 사람이 진영 변호사였다. 진 변호사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표가 나오지 않는다고 특정 지역 유세를 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후보는 호남 순회 유세를 포기했다. 선거일 직전인 12월16일 비행기로 광주에 내려가 딱 1시간 송정리역 유세를 하고 다시 비행기로 서울로 올라온 게 전부였다.

2012년 대선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대전과 전북이었다. 박 후보는 선거운동 기간 호남을 두 차례 방문했다. 낮은 득표율을 예상하면서도 그가 호남에 힘을 쏟은 이유를 정확히 알진 못한다. 다만 당시 박 후보의 최측근이던 진영 의원이 그런 행보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진 의원은 사석에서 1997년 대선 얘기가 나오면 “선거 패배보다 뼈아픈 건 특정 지역 유세를 포기했던 일”이란 말을 하곤 했다.

최근 여론조사를 종합하면, 서울 용산의 판세는 예측불허다. 7일 공개된 <중앙일보> 조사를 보면 진영 후보와 새누리당 황춘자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0.2%포인트에 불과하다.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자’는 게 새누리당의 구호이다. 직설적이나 효과적인 선거 전략이다. 김무성 대표는 며칠 전 용산 지원유세에서 “진 의원이 더민주로 출마한 건 용산 주민과 새누리당, 국민을 배신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누리당 후보 사무실엔 ‘더민주 입당한 진영 의원, 최소한의 정치 신의도 없나’란 제목의 <조선일보> 사설 인쇄본이 수북이 쌓여 있다고 한다.

그러나 누가 진짜 배신자인가. 2012년 12월19일 박근혜 후보가 호남에서 얻은 표는 많지 않았지만, 이듬해 2월25일 청와대에 입성할 때 ‘모든 국민의 대통령’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는 있었다. 그때만 해도 지역감정에선 자유롭고 통일 문제에선 전향적인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거라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지금 우리는 그 기대의 결과를 마주하고 있다. 현 정권에서 인사는 친박이거나 친박에 줄을 댄 사람들로만 채워졌다. 5대 권력기관장을 모두 영남 출신으로 임명하고도 비판엔 눈 하나 꿈쩍하질 않았다. ‘능력’과 ‘탕평’은 사라졌다. 그 와중에 박 대통령에게 대선 공약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던 진영 의원은 밀려났고, 대통령에게서 멀어져 끝내 공천에서 탈락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은 유승민, 진영 의원 등을 가리켜 ‘국민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에게 표를 던진 수많은 국민들이다. 새누리당 후보들이 아스팔트에 무릎 꿇고 지지자들에게 잘못을 비는 건 그 방증이다. 그나마 야권 분열이란 변수가 새누리당을 참패의 늪에서 구해줄 한가닥 동아줄이 되고 있다.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그렇다. 서울 용산은 이번 총선에서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는 지표가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자’란 구호엔 중요한 한 단어가 빠져 있다. 바로 ‘국민’이다. 4월13일 밤 투표함에서 용산의 민심은 대답할 것이다. 누가 국민을 배신했는가, 박근혜인가, 진영인가.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