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대한민국뿐인가. 일본에서도 위태로운 조짐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히키코모리’,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며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은둔형 외톨이가 100만명에 육박한다. 자유롭게 산다는 ‘프리터’는 비정규적으로 일을 하며 넷카페에서 잠을 자고, 캣카페에서 커피 한 잔 값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외로움을 달랜다. “삼각김밥이 먹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미라가 되어 발견된 사건이 몇 해 전만 해도 충격이었다면, 이제 고독사는 도쿄에서만 하루에 10여건 발생한다.
고독사는 그나마 얌전하다. 직장에서 해고된 실직자가 트럭을 몰아 행인에게 돌진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사건에 이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심지어 아들이 엄마를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들고 가라오케에 간다. 남편은 망치로 아내와 자식들을 하나씩 쳐 죽인다. 이미 가정은 해체되었다. 직장뿐만 아니라 이웃과 가족도 해체되고 모든 사회관계가 액체와 같이 ‘유동화’되어 아무런 관계도, 인연도 남지 않는 ‘무연 사회’가 되었다.
하여 모든 것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자기책임’ 시대의 서바이벌북>이 관심을 모은다. 심지어 자살 방법도 자기 책임하에 두루 평가해서 잘 선택할 수 있도록 <완전 자살 매뉴얼>이 출판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인류학자 앤 앨리슨은 이런 사회병리 현상에서 ‘위태로운 일본’을 본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미국 볼링장의 변화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징후를 읽었다. 과거에 볼링은 직장 동료들이나 친구, 친지들과 어울려서 하던 집단의 게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볼링장에서 그런 모습은 찾기 어렵다. 대신 볼링은 스트레스를 날리기 위해 혼자서 공을 던지는 ‘나홀로 볼링’이 되었다. 이미 미국에서도 사회 공동체가 소멸되어 인간은 외톨이가 된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마저 ‘사회적 자본’이라는 명칭을 붙인 퍼트넘은 지극히 천박하다. ‘자본’이 사회에서 소멸되고 있다고 우려하는 그의 시각은 협소하다. 모든 인간관계를 끊은 ‘외로운 늑대’들이 도처에 박혀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감시를 받고, 직장에서 해고된 직원이 총기를 들고 전 상사와 동료들에게 난사하고, 왕따당한 학생이 학교에서 총기를 휘두르는 일이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우연일까.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독방에서 미라나 부패한 시체가 되어 발견되고, 엄마가 어린 자식을 학대해 살해하고, 아들이 흉기를 휘둘러 아빠를 죽이는가 하면, 직장에서 해고된 실직자가 절망의 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들은 21세기의 카나리아다. 한국도 이미 ‘위태로운 사회’이다.
이번 총선 결과를 두고 의견이 갈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한국 사회가, 전세계가 이미 위태롭다는 것을. 모두가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한 발 삐끗하는 순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모두는 알고 있다.
하여 절망의 끝, 벼랑 끝에서 다시 시작하자. 이 위태로움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그리하여 인간이 인간답게, 안전하게 살 수 있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희망의 근거가 있지 않은가. 이미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자식을 잃은 고통을 부둥켜안으며 안전한 사회를, 인간다운 삶을 다 같이 만들어보자고 손을 내밀고 있지 않은가.
함께하자고 건네는 그들의 손길이 고맙지 않은가.
곧 4월16일이다.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