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미국 의회를 무서워하는 독재정권/ 이희호 평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4. 24. 21:34

정치정치일반

“고심 담긴 ‘11·5 조건부 불출마 선언문’ 내가 옮겨썼어요”

등록 :2016-04-24 20:12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19회 4·13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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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1월5일 김대중은 고심 끝에 ‘직선제 개헌 조건부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했다. 마침 서독 방문 중이던 김영삼도 ‘대선 후보 양보’ 의사를 밝혀 화답했다. 언론은 ‘11·5 불출마 선언’을 비중있게 보도했으나 김대중의 사진은 여전히 ‘금기’였다. 사진은 민주화추진협의회 소식지 <민주통신> 11월7일치 호외에 실린 것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6년 11월5일 김대중은 고심 끝에 ‘직선제 개헌 조건부 대통령 불출마 선언’을 했다. 마침 서독 방문 중이던 김영삼도 ‘대선 후보 양보’ 의사를 밝혀 화답했다. 언론은 ‘11·5 불출마 선언’을 비중있게 보도했으나 김대중의 사진은 여전히 ‘금기’였다. 사진은 민주화추진협의회 소식지 <민주통신> 11월7일치 호외에 실린 것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전두환 정권의 친위쿠데타 소문이 돌고 건국대 농성 학생들이 대거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김대중은 1986년 11월5일 중대 결심을 발표했다. ‘조건부 대통령 불출마 선언’이었다. 앞서 10월20일 추기경 김수환은 로마에서 “1988년 전두환 대통령이 물러난 뒤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어떤 형태로든 권력에 밀착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하며, 야당 인사 김대중·김영삼씨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심을 포기해야 국가적 비극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정치권을 향해 결단을 요구하는 발언이었다.

86년 11월 김대중 ‘직선개헌하면 불출마’
“쿠데타 막으려 결단…덕분에 조용히”
서독 방문 김영삼 “김대중에 후보 양보”
87년 ‘양김’ 동시 대선 출마에 이중잣대

86년 12월 ‘이민우 구상’에 신당 착수
87년 ‘4·13 호헌’ 전두환 ‘창당’ 방해
‘깡패 용팔이’ 동원해 지구당마다 난동

4월10일부터 또다시 무기한 가택연금
5월1일 통일민주당 창당대회도 못가
당원·지지자들 신촌~동교동 시위

 1987년 들어 내각제 타협을 시사한 ‘이민우 구상’에 반대한 김대중·김영삼이 신당 창당에 나서자 전두환 정권은 4월10일부터 무기한 ‘동교동 가택연금’으로 김대중의 발을 묶었다. 사진은 그 무렵 김대중이 연금 상태에서 동교동 자택 담장 너머로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7년 들어 내각제 타협을 시사한 ‘이민우 구상’에 반대한 김대중·김영삼이 신당 창당에 나서자 전두환 정권은 4월10일부터 무기한 ‘동교동 가택연금’으로 김대중의 발을 묶었다. 사진은 그 무렵 김대중이 연금 상태에서 동교동 자택 담장 너머로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은 11월5일 선언에서 “최근 휘몰아친 한파는 온 국민을 극도의 긴장과 불안 속에 떨게 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특히 최근에 일어난 건국대학교 사태에서 오늘의 현실을 가져오는 데 아무 책임도 잘못도 없는 우리 젊은 자식들이 무더기로 희생되는 것을 볼 때, 또 앞으로 이러한 사태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나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심정이다. 이러한 미증유의 중대 국면에 처하여 나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언가 해결의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애써 모색해왔다. 지난 10월20일 로마에서 행한 김수환 추기경의 발언은 나에게 결단을 위한 귀중한 시사점을 제공해주었다.”

김대중은 “현 난국을 수습하는 길은 국민의 절대다수가 원하는 대통령 중심의 직선제로의 개헌에 의한 조속한 민주화의 실현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말을 이었다. “나는 전두환 정권이 민주세력에 대한 적대적 탄압과 파렴치한 재집권 음모를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전두환 정권은 전 국민의 엄숙한 명령인 민주화에 성의 있는 자세로 일대 전환을 단행해야 한다.” 이어 김대중은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나는 이제 여기서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전두환 정권이 수락한다면 비록 사면·복권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을 선언한다.” 김대중은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대통령 중심 직선제 개헌을 위한 전두환 정권의 결단”을 요구했다.

김대중은 선언문을 집에서 작성했고 이희호는 선언문을 직접 자필로 정서했다. “남편은 그 문제로 한동안 고심을 했어요. 결국 조건부 불출마 선언을 하기로 결심했지요. 나는 남편의 결심을 담은 선언문을 8절지 종이에 또박또박 썼어요. 그 선언을 발표한 뒤 비상조치 예정일이었던 11월8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갔어요. 남편의 선언이 위기 국면에 전환점을 만들어냈던 거라고 봅니다.”

김대중의 선언은 미처 예상치 못한 곳에서 화답을 불러왔다. 당시 서독을 방문하고 있던 김영삼이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김대중씨의 복권이 이루어지면 차기 대선 후보를 양보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김영삼의 회견 내용은 국내 신문에 상세히 실렸다. 김영삼은 “김대중씨의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김대중 의장의 난국 수습을 위한 고심과 충정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이 시점에서 현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대담하게 결정하고 김 의장 사면·복권과 구속자 석방을 단행해야 한다. 김 의장이 망명에서 돌아온 뒤 나는 김 의장에게 ‘당신이 나이도 위이고 하니 사면·복권되면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얘기했으며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다시 기자가 “평소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가?” 하고 묻자 김영삼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번과 같이 구체적인 얘기는 안 했지만 이런 일은 있었다. 지난해 나는 김대중 의장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민주화될 때까지만이 아니라 그 이후까지도 당신과 협력하겠다. 투표로 경쟁하는 등 국민에게 걱정 끼칠 일은 하지 않겠다. 80년에는 그것을 구실로 해서 5·17이 일어났는데 이제 그런 구실도 주지 않겠다’고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김대중씨가 끝내 나서지 않겠다면 김 의장이 나설 것인가?” 하는 질문에 김영삼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김 의장에게 ‘사면·복권되면 당신을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김 의장과 똑같이 민주화만 된다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김영삼은 앞서 1985년 3월7일 신문 인터뷰에서 “1983년 단식투쟁을 통해 대통령을 하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했고 그 뒤로도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1년 뒤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을 때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에 동시에 출마했다.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이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고 호헌 조처를 했기 때문에 자신이 ‘조건부 불출마 선언’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남편과 김영삼 의장이 서로 화답하듯이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뒤에 언론은 남편의 발언만 문제 삼았지요. ‘거짓말하는 정치인’이라고요. 남편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언론이 이중 잣대를 들이대서 한 사람은 감싸고 한 사람만 나무라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986년 11월5일 김대중이 발표한 ‘직선제 개헌 조건부 불출마 선언문’. 이희호가 남편의 글을 육필로 정리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6년 11월5일 김대중이 발표한 ‘직선제 개헌 조건부 불출마 선언문’. 이희호가 남편의 글을 육필로 정리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듬해 1월 김대중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 ‘인권투쟁과 평화통일 노력’이 추천 이유였다. “뜻밖에 기쁜 소식이었어요. 서울 주재 독일 통신사 기자가 1월30일 밤에 우리 집에 전화해서 알려주었어요.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와 서독 사민당 의원 73명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남편을 추천했다고요. 다음날 조간신문에 조그맣게 기사가 났는데 축하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그 뒤로 남편은 해마다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지요.”

1986년 12월24일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돌연 기자회견을 열어 ‘선 민주화 후 의원내각제 협상’을 뼈대로 하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지방자치제 실시, 언론자유 보장, 구속자 석방과 사면·복권을 비롯한 7개항을 전두환 정권이 받아들인다면 의원내각제 개헌 협상을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민정당 대표 노태우는 송년간담회에서 이민우의 발언에 화답했다. 민주화 세력은 이민우의 발언을 독재정권과 타협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김대중은 12월26일 “대통령 직선제 없이 7개항만 있으면 민주주의가 된다는 것은 어림없는 소리”라고 ‘이민우 구상’을 비판했다. 해가 바뀐 뒤로도 정국은 ‘이민우 구상’으로 연일 시끄러웠다.

1987년 1월7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함께 만나 ‘이민우 구상’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민우는 당무를 거부하고 보좌관 한 명을 데리고 온양으로 내려갔다. 1월10일에는 이철승을 비롯한 신민당 비주류 의원 9명이 민주연합을 결성하고 ‘이민우 구상’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철승은 2월19일 다시 의원내각제 개헌을 주장해 당내 파문을 일으켰다. 2월21일 김대중은 김영삼과 만나 5월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을 총재로 추대하기로 합의했다. 3월6일 미국 국무장관 조지 슐츠가 서울에 와서 ‘이민우 구상’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또 이틀 전 3월4일에는 미국 국무부 부차관보 윌리엄 클라크도 방한해 “어째서 내각제가 장기집권 음모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미국이 여야 타협을 원하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었다. ‘이민우 구상’이 되살아났다.

클라크는 방한 중에 김대중을 방문하기도 했다. “클라크 부차관보가 동교동 우리 집을 찾아왔어요. 남편과 한동안 이야기했지요.” 김대중은 클라크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내 분란이 계속되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4월6일 민추협 사무실에서 만나 신민당 탈당과 신당 창당을 결정했다. 4월8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신당 창당을 공식으로 선언했다. 신민당 의원 대다수가 탈당했다. 이민우는 정치 중심에서 한순간에 밀려났다.

앞서 1987년 새해에 들어와 전두환 정권의 잔악성을 알리는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1월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학생 박종철이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수사관들은 수배 중이던 학교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추궁했다. 박종철이 모른다고 하자 수사관들은 박종철을 물이 가득 든 욕조에 처박았다. 10시간 동안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되풀이됐다. 경찰은 고문받던 박종철이 숨을 쉬지 않자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를 급히 불렀다. 의사가 응급처치를 시도했지만 박종철은 절명한 상태였다. 박종철의 죽음은 <중앙일보>가 1월15일치 사회면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제목의 2단 기사로 실음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박종철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1과장 황적준은 사인을 심장마비로 해달라는 협박을 받았다. 경찰은 가족의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피멍 든 주검을 화장했다. 박종철의 유골은 1월16일 오전 임진강에 뿌려졌다. 아버지 박정기는 목 놓아 울었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이희호는 신문에 실린 박종철의 사진을 보고 오열했다. “숨이 멎는 것 같았어요. 얼굴이 참 곱고 사슴처럼 눈망울이 선했는데, 고문해서 죽였다니 분노가 치솟아 참을 수 없었지요. 박종철군 아버지 박정기씨는 월수입 20만원으로 아들을 가르쳤다는데, 그렇게 자식을 잃었으니 얼마나 한이 맺혔겠어요. 그분을 도와줄 길을 찾다가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기독교회관에서 만나 위로를 드렸지요. 그 후로도 그분을 여러 차례 만났어요.”

사건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1월17일 치안본부 특수대가 수사에 들어갔다. 경찰은 박종철이 조사받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시인했으나 고문 사실은 숨기고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해명했다. 경찰의 해명은 국민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경찰은 마지못해 1월19일 물고문 사실을 시인하고 경찰관 두 사람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한 뒤 사건을 서둘러 덮었다. 야당과 재야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각계 인사 9000여명으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를 꾸렸다. 3월3일에는 49재에 맞춰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을 벌였다.

신민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새 야당을 만드는 작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하자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을 따로 격리했다. 4월10일 밤 마포경찰서장이 찾아와 “오늘부터 외부인 출입을 금지한다”고 통보했다. 동교동 주변을 감시하던 경찰병력이 더 늘었다. 경찰 특수부대인 백골단 300명과 전투경찰 500명이 집 주위를 둘러쌌다. 집 앞 진입로 양편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버스 수십대로 모든 진입로를 봉쇄했다. 감시초소는 12곳으로 늘어났다. 안기부와 경찰은 이웃한 가옥 네 채에 들어앉아 24시간 집을 감시했다.

“남편은 창당 발기인 대회부터 창당 대회까지 한 곳도 참석하지 못했어요. 통일민주당 창당을 막지 못할 거면 김대중이라도 고사시킨다는 전략을 쓰는 것 같았어요. 미국에서 돌아온 뒤로 54번째 연금이었는데, 그때 연금은 78일이나 계속됐어요. 우리는 집을 ‘동교동 교도소’라고 불렀지요. 남편은 매일 아침 정장을 입고 지하 서재로 출근했어요.” 4월11일 김영삼이 김대중을 만나러 동교동을 찾아왔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악수했다.

신민당을 탈당한 의원들은 4월13일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를 열고 김영삼을 총재로 추대했다. 이날 전두환은 특별담화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국론을 분열시키는 개헌 논의를 중지할 것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4·13 호헌 조처’였다. 내각제 개헌을 하려다 틀어지자 ‘개헌 불가’라는 강경 태도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전두환의 호헌 조처는 민주화 요구의 거센 물결을 막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대학교수들이 시국성명을 발표하고 종교인들은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문인들이 성명을 발표하고 농성을 벌였다.

1987년 5월1일 통일민주당 창당대회에서 김영삼 총재가 연설을 하고 있다. 사면·복권이 되지 않아 고문으로 추대된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여서 참석을 못해 빈 의자로 남아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5월1일 통일민주당 창당대회에서 김영삼 총재가 연설을 하고 있다. 사면·복권이 되지 않아 고문으로 추대된 김대중은 가택연금 상태여서 참석을 못해 빈 의자로 남아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4월18일 미국 하원의원 스티븐 솔라즈가 동교동 집을 방문했다. 김대중은 솔라즈에게 “미국이 참으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면 좀더 강력하고 공개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며 “그렇게 하면 한국 국민들이 용기를 얻을 것이고 우리는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솔라즈 의원이 우리 집에 온 날 그 많던 경찰들이 모두 사라졌어요. 전투경찰도 안 보이고 진입로를 틀어막았던 경찰버스도 철수하고요. ‘독재정권은 미국 의회를 무서워한다’더니 사실인 것 같았어요. 솔라즈 의원이 돌아가자 다시 경찰이 집을 에워쌌지요.” 미국으로 돌아간 솔라즈는 김대중 사면·복권 촉구 결의안을 내고 하원의원 101명의 서명을 받아 국무장관 조지 슐츠에게 김대중이 사면·복권되도록 노력하라고 압박했다.

통일민주당은 전두환 정권의 방해를 뚫고 창당 작업을 계속했다. 4월 중순에는 신민당 비주류세력 일부가 깡패들을 동원해 지구당 20여곳에서 당원들을 폭행하고 난동을 부렸다. 이른바 ‘용팔이 사건’이었다. 사건의 배후에 안기부가 있었다. 5월1일 통일민주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예정대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됐다. 김대중은 복권이 되지 않아 정당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부총재로는 상도동계 박용만·김동영·최형우, 동교동계 이중재·노승환·이용희·양순직이 선출됐다.

통일민주당 창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의 전열이 재정비됐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날 통일민주당은 전두환의 4·13 호헌 조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창당대회가 열리던 날에 우리 집 주변에 전투경찰이 가장 많이 배치됐어요. 1500명이 신촌로터리에서부터 동교동 로터리까지 포위했지요. 김영삼 총재가 창당대회를 마치고 당원들과 함께 우리 집으로 오려고 시도했는데 전투경찰에 막혀 결국 되돌아갔지요.” 당원 800여명은 신촌로터리 일대에서 “김대중 선생 불법감금 즉각 해제하라!” “독재 타도!”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