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쓰이 세키노가발굴한 평양 석암동 벽돌무덤의 전실 입구 사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것으로 무늬가 새겨진 한나라식 벽돌들이 보인다.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⑥ 평양 석암동 벽돌무덤의 수수께끼
벽돌 중국식 알고도 `고구려로 단정
임진왜란만 관심…발굴하다 신의주로
“압록강변서 임진년 생각” 딴소리
7년뒤 총독부 낙랑군 중점…반전
⑥ 평양 석암동 벽돌무덤의 수수께끼
벽돌 중국식 알고도 `고구려로 단정
임진왜란만 관심…발굴하다 신의주로
“압록강변서 임진년 생각” 딴소리
7년뒤 총독부 낙랑군 중점…반전
야쓰이와 세키노는 1909년 10월 평양 석암동을 답사하다 처음 발견한 한나라식 벽돌무덤이 낙랑고분일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이는 오늘날도 한국 강단·재야학계에서 쟁점으로 남아 있다. 두 사람이 첫 발굴 조사의 대상으로 평양 부근의 대동강변 고분을 점찍었을 때 이 지역이 고구려 옛 터전이라는 것을 의식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놓고 고구려 사적 조사라고 공표하지는 않았다. 19세기 후반부터 조선 실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한사군에 대한 문헌 연구가 일본에서 태동하고 있었고 고구려계 고분이 이미 도굴되는 상황이어서 깊은 생각 없이 보물찾기 하듯 발굴에 착수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해 보인다. 실제로 남아 있는 기록들을 봐도 낙랑무덤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시 조사의 가장 구체적인 기록인 야쓰이의 촬영일지, 엽서 등의 비망록이나 세키노가 나중에 펴낸 보고자료집 <낙랑군시대의 유적> 등을 봐도 사전에 한사군이나 낙랑군을 구체적으로 의식하고 작업을 벌였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는다.
야쓰이는 일본역사지리학회에 보낸 1909년 10월14일치 엽서에서 대동강 남쪽에 무수히 조성된 고분을 발굴조사하면서 문양 벽돌을 찾아내 고대 중국 왕조 계통인 한식(漢式), 육조식(六朝式)으로 평가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야쓰이가 교토제국대학 대학원 시절 고대 중국의 문양벽돌 등의 자료를 이미 검토했기에 가능한 기술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유물들을 낙랑군의 고분이라고 언급하지 않았고, 평양 조사 뒤 경성으로 돌아가 일본 거류민들한테 벌인 역사 강연(한홍엽이란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에서는 무덤이 고구려의 것이라고 단정하듯 발표해버린다. 이런 견해는 세키노도 마찬가지여서 발굴 이듬해 학계에 조사 내용을 보고하면서 고구려의 무덤이라고 분명히 밝히게 된다. 훗날 조선총독부가 한일병합을 거쳐 1916년 ‘조선고적조사 5개년 계획’을 처음 수립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사업으로 추진한 것이 낙랑군 한사군 관련 조사였음을 고려하면, 1909년 조사로부터 불과 7년여 만에 거대한 반전이 일어난 셈이다. 그렇다면, 그사이 대체 어떤 곡절을 거쳐 평양 석암동 고분은 고구려 무덤에서 낙랑군의 무덤으로 뒤바뀌게 된 것일까.
평양 조사 뒤 벌인 경주 석침총 발굴과 관련 기록에서 드러난 것처럼 야쓰이의 애초 관심사는 진구왕후의 한반도 남부 삼한 정벌설과 임나일본부의 역사고고학적 고증에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고대 일본의 후예들이 16세기 조선으로 쳐들어간 침략전쟁인 ‘분로쿠의 역’(임진왜란)의 역사적 현장과 유물들을 조사하는 것도 중요했다. 이는 그가 10월14일 여섯 기 이상의 고분의 굴착을 시도한 끝에 두 기의 석암동 벽돌무덤을 찾아내는 성과를 올렸는데도, 현장에 계속 있지 않고 평양의 임진왜란 사적인 보통문 답사와 촬영에 관심을 보였으며, 17일 인부들을 남겨놓고 세키노와 함께 신의주 북행길에 올랐다는 엽서 기록을 남긴 데서도 드러난다. 신의주로 서둘러 떠난 것은 촉박한 조사일정 탓도 있지만, 의주의 통군정 등 임진왜란의 전적지 답사를 다분히 의식했던 데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엽서 다섯 번째 글에서 “대동강면의 고분은 어느 정도 조사를 진행시켰지만 충분하게 종결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신의주에 도착했다”며 “의주의 압록강변에 있는 옛 전쟁 사적지인 통군정에서 임진년의 옛날을 생각한다”고 감회에 젖은 듯한 모습을 내비치고 있다.
석암동 무덤의 전실과 천장부에서 나온 한나라풍의 벽돌들과 거울, 토기들을 보면서 왜 고구려 옛땅에서 전형적인 중국 유물이 나오는지 의아해했지만, 곧장 한사군 낙랑군과 연결시켜 생각할 정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정황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야쓰이는 10월말까지 신안주, 묘향산 보현사 등을 유람하며 임진왜란과 관련된 비문 등의 유적과 사료 찾기에 열심이었다. 그는 엽서에 이렇게 적었다. ‘김부식 소찬의 ‘묘향산보현사지기’를 새긴 큰 비석을 위시해 비표(碑表: 비석의 앞면)가 적지 않고, 개중에는 분로쿠의 역과 관련된 자료도 다소 눈에 띄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의 화상 및 그것에 관한 칙서도 있다.’
이처럼 서북지방 고적을 유유자적 답사하던 그는 11월1일 평양으로 황급히 돌아오게 된다. 통감부 철도청 평양출장소에 의뢰해놓았던 석암동 고분 발굴이 계속 좋은 결과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이 잇따라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평양 석암동 벽돌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발굴 뒤 도쿄대로 옮겨져 지금까지 상당수가 공개되지 않은채 소장돼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