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쓰이 조사단이 1909년 평양 석암리 고분 발굴 당시 출토한 한나라시대 거울인 연호문경. 태양모양의 원호 무늬가 특징이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이다.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⑦ 석암동 무덤 출토품 논란 1
석암동 고분서 한나라식 유물 쏟아져
야쓰이, 한나라 거울 지칭 눈길
낙랑군 유적 연관성은 생각 못해
경성 복귀 뒤에도 고구려 계통 발표
⑦ 석암동 무덤 출토품 논란 1
석암동 고분서 한나라식 유물 쏟아져
야쓰이, 한나라 거울 지칭 눈길
낙랑군 유적 연관성은 생각 못해
경성 복귀 뒤에도 고구려 계통 발표
한반도 서북지역을 돌다가 1909년 10월31일 오후 급거 평양으로 되돌아온 야쓰이와 세키노 일행 앞에는 상당한 성과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석암리 벽돌무덤에서 쏟아진 중국 한나라 계통의 유물들이었다. 그들이 10월 중순 평양을 떠난 뒤 대신 발굴작업을 벌인 이마이즈미 통감부 기사가 조선인들을 동원해 파낸 것들이었다. 세키노 조사단은 답사지마다 통신 체계를 갖춘 헌병들을 대동하면서 신속하게 평양의 발굴 정보를 전보나 우편물로 받아볼 수 있었다. 11월1일 평양의 야쓰이는 일본역사지리학회에 보낸 엽서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어제 철로로 신안주를 떠나 당지(當地: 평양)에 도착하였다. 다시 온 이유는 일전 통감부 철도청 평양출장소에 의뢰해 놓았던 고분 발굴이 계속해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는 보고를 접수했기 때문이다. 어제 오후 당지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손대었던 대동강면 상오리 능동 고분에서 출토된 한경(漢鏡: 한나라 거울), 직도(直刀: 쇠칼), 화분발(花盆鉢: 화분 모양 토기), 고전(古錢: 옛 중국 동전) 등을 조사하고 오늘 오전 중 이마이즈미 기사의 안내로 고분 내부를 조사하였다. 오후에 한성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 기록을 통해 야쓰이 일행은 대동강 건너 평양 모처로 옮겨진 출토 유물들을 관찰했음을 알게된다. 야쓰이가 출토된 거울을 한나라 시대의 거울인 한경이라고 지칭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이 거울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다른 발굴품들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다. 오늘날 학계에서 연호문경(連弧文鏡)이라고 부르는 한나라 시대의 거울이다. 가운데 볼록 솟은 거울걸이 꼭지인 뉴좌의 바깥으로 8개의 반원 모양 호가 인접해 돌아가면서 마치 태양과 비슷한 이미지가 바깥쪽의 명문띠와 함께 펼쳐지는 세공품이다. 전한과 후한 시대를 통틀어 중원 대륙의 한나라 무덤 등에서 두루 나오는 전형적인 기준 유물인데, 한반도, 일본에서도 간간이 출토된다. 거울은 일왕가에서 칼, 옥과 함께 3보로 여기는 보물이라 세키노, 야쓰이는 거울 자체를 주목했을 것으로 보인다.
화분 모양 토기는 세키노·야쓰이 조사단이 처음 발견한 것으로 한반도 서북지역에서만 나오는 토기다. 학계에서는 다리가 달려 있으면 후한 시대로, 다리가 없으면 전한 시대로 구분하는데, 야쓰이가 확인한 것은 후한대 다리가 달린 토기로, 석암동 무덤의 연대를 기원후 2세기로 후대에 추정하는 근거가 됐다. 또 고전은 전한·후한 시대 널리 쓰인 옛 동전인 오수전(五銖錢)으로, 역시 한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야쓰이의 서술은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석암동 고분 출토품 사진들의 촬영 시점과 조사 흐름을 온전하게 알려준다. 화분형토기란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점도 주목된다. 지금까지 이 용어는 북한 학자들이 창안해 쓴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야쓰이가 처음 썼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는 유물들의 관찰 경위를 적어놓았을 뿐 오늘날의 쟁점인 낙랑군과의 연관성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당시 일본에서는 고대 중국 기와나 벽돌전에 대해서는 초보적인 연구가 시작됐지만, 옛 공예품인 거울의 계통과 전파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연구성과가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석암동 고분 발굴로부터 불과 3~4년 뒤 불게 될 낙랑 유적 열풍은 처음부터 기획된 구상이 아니었다는 게 더욱 명확해지는 셈이다.
야쓰이 일행은 석암동 고분발굴 작업을 마무리하고 11월1일 오후 경성으로 돌아온다. 이들은 그뒤 십여일간 강화도와 서울 근교 왕릉 등을 답사하지만, 평양 발굴품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지, 야쓰이는 그달 14, 15일 촬영일지에 평양 대동강면 상오리 고분물과 옛 거울을 조사하고 촬영했다는 기록을 적어놓았다. 이는 당시 석암동 고분의 유물들이 이미 반출돼 서울로 옮겨졌음을 뜻한다. 뒤이어 11월23일 세키노, 야쓰이와 조수 구리야마는 경성 종로 광통관에서 대한제국 탁지부 주최로 일본 거류민들을 상대로 조사 성과에 대한 강연을 한다. 그 강연은 평양 일대 석암동 고분의 성격이 고구려 계통일 것이라는 그들의 해석을 처음 공표하는 자리가 된다. 석암동 고분의 첫 출토품들은 야쓰이가 일본에 돌아가면서 함께 가져가 도쿄대 공학부 연구실에 보관했다. 이 유물들은 그 뒤에도 살아남아 지금은 도쿄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아직도 전모가 온전히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경성에 돌아온 야쓰이는 11월10일 뜻밖에도 도쿄 제국대학 졸업 동기인 소장 역사학자 이마니시 류를 만나게 된다. 스승 하기노 교수와 동행한 이마니시는 야쓰이 일행과 반대로 한반도 남쪽에서 조선 풍속 답사를 하면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