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박찬수의 NL 현대사 (2) 세 "동지"의 엇갈린 운명/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5. 14. 13:18

정치정치일반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많이 한 노동자 형이 있어”

등록 :2016-05-13 18:44수정 :2016-05-13 20:08

[토요판]
박찬수의 NL 현대사 (2) 세 ‘동지’의 엇갈린 운명

1986년 국가안전기획부에 불법 구금돼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한 심진구씨는 2005년 2월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당시 수사관 등의 명단이 적힌 수사기록과 자신이 그린 고문 수사관들의 몽타주 그림들을 언론에 공개했다. 심씨는 특히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몽타주 주인공이 정형근 의원(당시 한나라당)이라고 주장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6년 국가안전기획부에 불법 구금돼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한 심진구씨는 2005년 2월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당시 수사관 등의 명단이 적힌 수사기록과 자신이 그린 고문 수사관들의 몽타주 그림들을 언론에 공개했다. 심씨는 특히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몽타주 주인공이 정형근 의원(당시 한나라당)이라고 주장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8년 4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5공화국 시절 고문피해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청하는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권력에 의해 왜곡되거나 가려진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발족한 기관이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심진구(1960년생)씨. 그는 198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 불법 구금돼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하고 혐의사실이 조작됐으니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안은 진실화해위 제3소위원회로 넘겨졌다. 2년여가 흐른 2010년 6월, 제3소위는 “안기부가 심진구씨를 영장 없이 연행해 불법 구금하고 강압적 조사를 가해 일부 범죄사실을 조작했다. 이는 형사소송법의 재심 사유에 해당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심진구씨는 이 결정을 근거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2012년 1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26년 전 사건의 무죄 선고를 받았다. 무죄 선고 직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심씨는 이렇게 답변했다. “김영환을 만난 것을 후회한다.” 심씨와 김영환씨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90년대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했던 자생적 전위당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의 두 주역 김영환씨와 하영옥씨는 모두 심씨와 얽혀 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세 사람은 한때 함께 노동운동을 꿈꾸던 가장 가까운 동지였다.

구로공단 고졸 노동자 심진구
“라디오로 ‘주체철학 강좌’ 청취”
대학생 김영환·하영옥과 토론 모임
안기부, 불법 구금과 구타·고문
반국가단체 건설 획책했다며 기소

김, ‘강철서신’에 심진구 글 게재
안기부는 ‘북한 배후설’ 증거 판단
주체사상 수용과정 엇갈린 주장
심, 고문 후유증 평생 시달리다
췌장암 말기 판정 40여일 뒤 숨져

구로공단 자취방에서 세미나

심진구씨가 김영환씨를 처음 만난 건 1984년 1월 무렵이다. 심씨는 진실화해위에 진실 규명을 요청하기 전인 2007년 7월 <오마이뉴스>에 보낸 글에서 김영환씨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1986년 봄 대학가에 배포된 ‘강철서신’에는 심진구씨가 쓴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란 글이 포함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6년 봄 대학가에 배포된 ‘강철서신’에는 심진구씨가 쓴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란 글이 포함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영환이. 우리가 처음 만난 1984년 1월20일경 서울 구로3동 이○○의 자취방이 생각나나. 나와 고교 동창(안성 안법고)인 이○○(서울대 80학번)은 내게 자네를 ‘서울대 공법학과 2학년(82학번) 김영환’이라고 소개했지. 학교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자네는 ‘(고전연구회) OB팀에서 활동한다’고 했지. 학내 사정에 과문한 내가 ‘무슨 맥주회사 야구팀이냐’고 묻자 자네는 ‘단재 신채호와 정약용 선생을 연구하는 학교 동아리 모임’이라고 설명해 주었다네.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의 단상은 이게 전부였네. 자네는 대학 2년 선배인 이○○과 나의 대화와 토론을 곁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었지. 그러다가 내가 고향에서 올라와 이○○ 자취방에서 자고 가는 날이 빈번해지자, 지적 호기심이 컸던 자네는 사상학습을 함께 하자고 졸랐지….”

심씨는 고졸 학력의 노동자였다. 1984년 무렵엔 군에서 제대하고 서울 구로공단에 일자리를 찾던 중이었다. 고교생 시절부터 철학과 역사책을 즐겨 읽어 대학생과 능히 토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식수준이 매우 높았다. 김영환씨와 대학 동기인 하영옥씨가 심씨를 만난 것도 김씨를 통해서였다. 하씨는 1991년 김영환씨와 함께 민혁당 건설을 주도했고 김씨가 전향한 뒤에도 민혁당 사수파로 분류돼 가장 오랫동안 옥살이를 했다. 하영옥씨는 “(1985년 무렵에) 영환이가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많이 한 노동자 형이 있다. 너도 꼭 만나봐야 한다’고 해서 심진구씨를 처음 만났다. 만나보니 나이가 우리보다 서너살 위인데, 대학은 안 나왔지만 사색과 연구 수준이 웬만한 대학생보다 높았다. 고교 때 마르크스주의 비판서들까지 찾아서 읽었다고 했다. 나와 영환이 모두 현장 투신(노동운동을 위해 공장에 취업하는 걸 그렇게 불렀다)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심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심진구씨와 김영환씨는 1985년 하반기엔 넉달 동안 구로공단 부근에서 자취를 함께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 방에서 심진구와 김영환, 하영옥 등 세 사람은 노동운동에 관한 세미나를 함께 했다. 현장 경험을 가진 심진구씨가 두 사람을 지도하는 구실을 했다. 그때 하씨는 방위 복무 중이었고, 김씨는 휴학한 뒤 공장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이런 행적이 나중에 심진구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의 핵심 혐의사실이 됐다. 검찰은 1986년 심씨를 구속기소하면서 “심씨가 김영환, 하영옥과 모의해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노동자동맹을 본딴 반국가단체 ‘지역노동자해방동맹’(지노맹) 건설을 획책했다”고 공소장에 적었다. 사실과 다른 과장된 내용이었다.

안기부가 1986년 12월 심진구씨를 주목해서 한달 가까이 불법 감금하며 심한 고문을 가한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었다. 그해 봄 대학가를 발칵 뒤집어놓은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씨 배후로 안기부는 처음에 심진구씨를 지목했다. 당시 안기부 수사관이었던 ㄱ씨는 이렇게 말했다. “학원가에 강철 시리즈라는 유인물이 배포되어 그 제작자를 잡으려고 안기부뿐 아니라 기무사, 경찰 등 모든 수사기관이 몇달 동안 추적했다. 김영환이 학원가에서 뜬 인물이 아니어서 제작자가 누구인지 몰라 체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안기부가 부산에서 김영환을 체포해서 서울로 왔는데, 김영환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관련자로 심진구가 나왔다. 처음엔 심진구가 김영환의 상부선쯤 되는 줄 알고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고문과 강압 수사로 조작·과장”

안기부는 대학생인 김영환씨가 강철서신을 썼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1984년 무렵부터 대학가에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은 레닌 원전들이 은밀하게 나돌면서 다양한 사회주의 혁명론이 제기됐지만, 북한은 여전히 금기의 벽이었다. 북한 공작원과 연계돼 있지 않다면 주체사상을 언급하고 박헌영을 ‘미제의 스파이’로 모는 팸플릿을 대학생이 쓸 수는 없으리라고 공안당국은 생각했다. 심진구씨는 공작원으로 의심받기에 충분했다. 고졸 학력의 노동자가 서울대 법대생들과 토론 모임을 했다는 점도 그렇고, 강철서신의 하나인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 필자가 심진구씨라는 점도 그런 의심을 부추겼다. 어떻게 고졸 출신 노동자가 운동권의 대표적 문건을 쓸 수 있을까. 조사 과정에서 심씨가 한때 북한 방송을 청취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학생운동권의 배후가 북한의 대남 공작망과 연계돼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잡았다고 안기부는 흥분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시달린 심진구씨는 그림을 그려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심씨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40여일이 지난 2014년 11월 숨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시달린 심진구씨는 그림을 그려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심씨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40여일이 지난 2014년 11월 숨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6년 봄 학원가에 배포된 강철서신 시리즈는 모두 6편이다. 이 중 5편의 필자는 ‘강철’로 되어 있는데, 유독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만 필자 이름이 ‘박무산’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나중에 김영환씨가 검거된 뒤에야 그 이유가 드러났다.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는 심진구씨가 쓴 팸플릿이었다. 둘이 같이 자취를 할 때 팸플릿 내용에 매혹된 김씨가 강철 시리즈에 삽입해 배포했던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심씨는 김씨에게 강하게 항의하며 자신의 글을 빼라고 요구했다. 김영환씨는 “1986년 7월쯤에 심진구씨와 하영옥씨가 강력히 항의해서 강철서신 시리즈에서 그 팸플릿을 뺐다. 내가 분명히 동의를 구했는데 심씨는 그걸 기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심씨로선 김영환씨 때문에 자신이 검거됐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심씨는 1986년 12월10일 안기부에 연행된 뒤 21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북한과 연계돼 있다는 증거는 나오질 않았다. 결국 심씨는 지역노동자동맹이란 반국가단체를 만들려고 했다는 혐의에다 북한 방송 녹취록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을 갖고 있었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기소됐다. 훗날 2008년 진실화해위 조사 과정에서 심진구, 김영환, 하영옥 세 사람은 모두 ‘혐의사실 대부분이 고문과 강압 수사에 의해 조작되거나 과장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심진구씨가 김영환씨에게 북한 주체사상을 설명했고 김씨가 북한 방송의 ‘김일성 대학강좌’를 접하는 동기를 제공했다는 증언이다. 심씨는 2008년 4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친구인 이○○과 김영환이 군 입대를 걱정하면서 내가 군대생활 한 것을 궁금해해서 자랑하듯이 군대생활 걱정할 거 없다고 했다. 전방엔 북한에서 전단지도 많이 날아오고 내용에 ‘자주’니 ‘잘산다’는 내용도 있다고 하니, 김영환이 관심 있어 해서 대화 과정에서 주체사상 이야기도 자연스레 나왔다.”

심씨는 경기도 안성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인 1980년 5월부터 1년여간 라디오로 ‘김일성 방송대학 주체철학 강좌’를 청취했다고 생전에 여러 차례 말했다. 1980년대 서울은 우리 정부의 전파방해가 심해서 단파라디오가 아니면 북한 방송을 듣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방에선 일반 라디오로도 비교적 쉽게 북한 대남방송을 접할 수 있었다. 심씨의 아내 이정미씨는 “남편이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좋아했는데 그걸 들으려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북한 방송이 잡혀서 듣게 됐다고 말했다. 김영환씨에게도 북한 방송을 들어보라고 권유했다는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하영옥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심진구씨는 흔히 하는 말로 공부의 내공이 깊어서 툭툭 던지는 말이 본질을 짚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에 대한 문제제기나 인식도 그런 식으로 얘기했는데, 영환이가 거기에 충격을 받고 김일성 대학강좌 방송을 듣게 됐다.”

하지만 김영환씨는 자신이 강철서신을 쓰고 북한 문제를 천착하는 데 심진구씨로부터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영환씨는 언론 인터뷰와 지난해 11월 출간한 자서전 <다시 강철로 살아>에서도 심진구씨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김씨는 2010년 심진구씨 재심 청구와 관련해 진실화해위 조사관의 진술 요청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심진구씨가 주체사상을 철학적으로 깊이 연구하거나 알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때 북한 방송을 몇번 들으면서 주체사상이란 말을 들었던 정도였다. (…) 심진구씨에게서 주체사상에 대해 듣긴 했지만, 내가 그걸 구체적으로 접하고 도움을 받은 건 정부기관(통일부)에서 나온 자료를 통해서였다.” 김영환씨는 “(심진구씨가 어려움을 당한 게) 나로부터 발단했으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1991년 무렵에 심진구씨를 만났을 때 그런 마음을 전했다”고 말했다. 사람의 기억이란 매우 주관적이어서 똑같은 일이라도 기억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심진구씨와 김영환씨의 서로에 대한 기억도 이와 비슷할 수 있다.

‘안기부 협조했다’ 꼬리표 붙어

안기부의 불법 구금과 고문 이후 심진구씨 삶은 망가졌다. 박영진 열사(1986년 노동3법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신흥정밀 노동자)와 함께 ‘구로독산지역 선진노동자회’를 이끌었던 그는 1987년 집행유예로 출소한 뒤엔 노동운동에 제대로 합류하질 못했다. 고문에 못 이겨 안기부 수사에 협조했다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병원을 다녔고 심한 불면증과 불안증세에 시달렸다. 아내 이정미씨는 “건강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쉽지 않고 본인이 뜻한 대로 살지 못하니 굉장히 괴로워했다. 불운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심씨는 그림에 소질을 지녔다. 그림을 그려서 생계를 유지한 적도 있다. 그는 2004년에 정형근 전 국회의원(1986년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등을 그림으로 그려 독직폭행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지만 기각됐다. 이정미씨는 “남편이 정형근씨 초상화를 그릴 때 거의 열흘 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 먹고 그림만 그렸다. 기억을 떠올리는 게 너무 괴로워서 음식을 넘길 수가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심진구씨는 2014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40여일 만이었다. 빈소엔 하영옥씨와 송경동 시인 등 그를 기억하는 소수의 사람들만 찾아왔다.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 박찬수 <한겨레> 논설위원. 1989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청와대 출입기자와 워싱턴 특파원,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지냈다. 저서로 청와대와 백악관의 권력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이 있다. 82학번으로 5공 시절 군에 강제징집됐다 돌아와보니 대학가가 온통 엔엘(NL) 열풍에 휩싸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사회부 신참기자 시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취재하며 무엇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의문을 가진 게 20여년이 지나 이 시리즈를 쓰는 계기가 됐다. 격주로 연재한다.

※‘박찬수의 NL 현대사’는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