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김윤후의 몽골항전, ‘자유의 힘’은 위대했다 / 곽병찬의 향원익청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5. 25. 22:00

사설.칼럼칼럼

김윤후의 몽골항전, ‘자유의 힘’은 위대했다

등록 :2016-05-24 19:33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



김윤후는 노비문서를 쌓아두었다. “힘을 다하여 싸워 이긴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관작을 줄 것이다.” 문서에 불을 질렀다. 그동안 전투에서 노획한 소와 말을 직위와 공에 따라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튿날 기마병을 앞세운 노군이 바람처럼 내달려 적진 속을 헤집었다.

김윤후는 종적 없이 사라졌다. 몸만 사라진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지워졌다. 가진 자들이 쓰는 역사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자유의 거대한 힘을 깨달은 지도자와 해방된 노비와 천민이 이뤄낸 위대한 승리였으니, 그들에게는 달가운 역사가 아니었다.

1253년 12월, 몽골군이 충주산성을 에워싼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한겨울 칼바람은 몽골군 기세만큼이나 서슬이 시퍼렇다. 충주산성이 무너지면 경상도가 유린당할 것이다.

몽골군 앞에는 고려인들이 화살받이로 세워져 있었다. 양근성(양평) 방호별감 윤춘, 천룡산성(보련산성) 방호별감 조방언, 황려현령 정신단 등, 몽골군에 싸우지도 않고 투항한 지방관들이 넘긴 백성들이었다. 그 뒤로는 역시 배반한 중앙 고위관리 홍복원 이현이 고려인들을 내몰고 있었다. 몽골군은 고려인의 골육상잔을 즐기고….

방호별감 김윤후는 치를 떨었다. 그러나 어쩌랴. 성을 내줄 순 없었다. 충주민이 도륙당하는 것은 물론 경상도가 유린당한다. 문제는 식량과 식수였다. 모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양반, 향리들 사이에선 동요가 일었다. 배반자들의 감언이설이 이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노비와 천민들만이 전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싸우다 죽으나, 살아서 노예로 사나 다를 게 없었다. 싸우다 죽으면 자식들이나마 자유민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

…2차 몽골 침입(1232년) 때 처인성 전투가 떠올랐다. 2차 원정군 사령관 살리타는 고려 무신정권과 왕실이 도피한 강화도를 봉쇄한 뒤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남진했다. 서울과 수원을 차례로 함락시킨 살리타는 용인에 이르자, 굳이 삼남대로를 벗어나 동쪽으로 30리나 떨어진 처인성으로 향했다. 처인성(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은 수주(수원과 화성 일대)에 속한 천민 거주지였다. 성 안엔 조세 창고가 있어 일부 군인과 승병 그리고 인근 향, 소, 부곡민들이 남아 세곡을 지키고 있었다. 진위현 백현원의 승려였던 김윤후는 스승의 지시로 처인성에 합류했다.

몽골군은 멀리 들판에 진을 쳤다. 기마병 20~30명이 성 쪽으로 다가왔다. 둘레가 고작 425m에 넓이 2만㎡도 안 되는 작은 성이었으니, 적들은 방심하고 있었다. 김윤후는 노군(노비들로 이루어진 군인)을 이끌고 길목에 매복했다. 곧 몽골 척후대가 다가왔고, 그들을 향해 화살이 일제히 날았다. 앞장선 지휘관부터 차례로 쓰러졌다. 지휘관은 다름 아닌 살리타였다. 그의 목이 처인성 문루에 걸렸다. 지휘관 없이는 전투를 하지 않는 몽골군은 허둥지둥 퇴각했다. 몽골의 2차 침입은 김윤후의 화살 한 발로 종결된 셈이었다.

조정은 처인부곡을 처인현으로 승격시켰다. 공을 세운 관노와 부곡민은 면천을 시켰다. 김윤후는 상장군이 하사됐지만 고사했다. “한창 싸울 때에 나는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어찌 감히 과분한 상을 받겠습니까?”(<고려사>) 관노와 부곡민에게 공을 돌렸다. 대신 하급 무관인 섭랑장을 수용해 곧 충주산성 방호별감에 임명됐다….

12월 중순이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미루는 건 앉아서 죽자는 것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몽골의 1차 침입 때 충주를 지킨 건 노군잡류별초, 곧 노비와 천민이었다. 양반과 관리는 줄행랑이나 쳤다. 이번에도 산성을 지킬 건 노군이었다. ‘관노부터 해방시키자.’ 문제는 그들의 불신을 어떻게 해소하느냐였다.

…살리타를 대장으로 한 몽골군은 1231년 8월(1차 침입) 압록강을 건넜다. 주력은 12월 초 개경을 포위하고, 별동대는 경기도 광주, 충청도 청주를 거쳐 충주성을 공격했다. 충주부사 우종주는 방위군을 양반들의 양반별초, 관노와 천민의 노군잡류별초로 편제했다. 몽골군이 밀려오자 부사, 판관 등 지휘부와 양반별초는 도망쳤다. 노군잡류별초만이 남아 노군도령 지광수와 승려 우본의 지휘 아래 성을 지켰다.

몽골군이 퇴각하자 도망자들이 돌아왔다. 관청과 집 안에서 은제품이 사라진 것을 노군의 소행으로 몰아 지휘부를 죽이려 했다. 관노들은 분노했다. 배은망덕한 호족과 관리들을 주살했다. 1232년 정월의 일이었다. 조정은 무력으로 난을 진압하려다, 현지 사정을 알고는 지광수와 우본에게 상을 내려 회유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관리나 호족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노군을 노예로 부리려 했다. 노비들이 다시 일어났다. 이번엔 무신정권이 군대를 보내 난을 진압하고 우본 등을 처형했다. 관노와 천민들에겐 그 기억이 남아 있었다. 저 불신을 어찌할 것인가. 약속 이상의 행동이 필요했다.

김윤후는 관노의 부적(노비문서)을 모두 가져오도록 해 그들 앞에 쌓아두었다. “만일 힘을 다하여 싸워 이긴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관작을 줄 것이다.” 그리고 문서에 불을 질렀다. 그동안 전투에서 노획한 소와 말을 직위와 공에 따라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튿날 성문이 열렸다. 기마병을 앞세운 노군이 바람처럼 내달려 적진 속을 헤집었다. 뜻하지 않은 공격에 몽골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결국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70여일 만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몽골군은 고려에서 철수했다.

그 후 몽골은 해마다 고려를 침입했다. 그때마다 분풀이라도 하듯 충주성을 공격했다. 충주민들은 그때마다 필사적으로 성을 지켰다. 1254년 7월 다시 침입(6차)했을 때 대장 차랄타이가 이끄는 주력군은 9월 충주산성을 공격했지만 충주민의 저항에 막혀 우회해 경상도로 진출했다. 일부 병력은 충주 서쪽의 다인철소를 공격했다. 병장기를 만드는 천민 마을인 이곳에서 병장기와 함께 철공 장인들을 끌고 가려는 것이었다. 이에 맞서 철소의 천민들은 유학산성에서 항전했고, 몽골군은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공을 기려 조정은 다인철소를 천민부락인 ‘소’에서 현(익안현, 지금의 이류면)으로 승격시켰다.

1255년 10월엔 경상도를 유린하고, 포로와 가축을 끌고 북으로 돌아가던 몽골군을 충주의 별초군이 대원령(하늘재)에서 기습, 1천여명을 사살했다. 몽골군은 이듬해 4월 다시 충주성을 공격했다. 이번에는 읍성을 함락했지만, 성민은 월악산성으로 피난한 뒤였다. 몽골군은 월악산성까지 추격,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했다. 1258년 침입(9차) 때 충주민들은 경상도를 약탈하고 돌아가던 몽골군을 박달재에서 박살냈다. 박달재 전투는 개경 이남에서 몽골군이 벌인 마지막 전투였다. 자유민이 된 백성은 그렇게 제 땅과 형제를 지켰다.

반면 무신정권은 1차 침입 이후, 몽골군이 해전에 약한 것을 알고 강화도로 피신했다. 2차 침입부터 1258년 9차 침입 때까지 몽골은 고려에 개경 환도와 왕의 몽골 황제 배알(친조)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환도를 거부했다. 환도는 무신정권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니, 국토가 유린되고 백성이 도륙되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이에 대해 몽골군은 더 가혹한 살육으로 압박했다. 1254년 6차 침입 때의 참상을 <고려사>는 이렇게 전한다. “몽골군에 사로잡힌 남녀가 무려 20만6800여명이요, 살육된 자도 헤아릴 수 없었으며, 지나가는 주군마다 잿더미가 되었으니, 난이 있은 이래 이때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사람들의 해골은 들에 널리고….”

1259년 초 무신정권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실력자 김준이 암살당하고, 뒤를 이은 임연도 피살되고, 임유부도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무신정권은 끝났다. 정변 후 100년 만이었다. 고려는 1259년 3월 개경으로 환도했고, 몽골과의 전쟁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즈음 김윤후는 종적 없이 사라졌다. 몸만 사라진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지워졌다. 대몽골 항쟁 28년 속에서 최대의 승첩지였던 처인성이나 충주산성도 잊혔다. 그 위치는 아직도 정확하게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용인시 남사면 아궁리의 그 토성이 처인성인지, 월악산성 혹은 대림산성이 ‘충주산성’인지…. 가진 자들이 쓰는 역사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자유의 거대한 힘을 깨달은 지도자와 해방된 노비와 천민이 이뤄낸 위대한 승리였으니, 그들에게는 달가운 역사가 아니었다.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몽골 침입 때 국가가 모든 노비와 천민을 해방하고 면천시켰다면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의 가정처럼 허망한 것은 없다. 이 사실을 잘 알지만 향토사학자 김현길 선생은 아쉬움을 지우지 못한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