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tv 토론으로 왜곡된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김대중 / 이희호 평전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7. 21. 21:37

정치정치일반

“남편의 대통령 당선은 ‘티브이 토론’ 덕분이었죠”

등록 :2016-07-20 20:37수정 :2016-07-20 22:20

 

[이희호 평전] 제5부 광장의 시련 - 10회 15대 대통령 선거

1997년 11월3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에 이어 다음날 포항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태준이 자민련에 입당하면서 ‘디제이티(DJT) 연합’이 됐다. 사진은 그해 11월7일 김종필·김대중·박태준이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1월3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에 이어 다음날 포항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태준이 자민련에 입당하면서 ‘디제이티(DJT) 연합’이 됐다. 사진은 그해 11월7일 김종필·김대중·박태준이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8월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이회창이 두 아들의 병역면제와 관련된 의혹을 받아 지지율이 급락했다. 신한국당의 내부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8월13일 청와대에서 김영삼을 만난 이인제는 독자 출마 의사를 밝혔다. 9월13일 이인제는 신한국당을 탈당해 15대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9월18일 공표된 <조선일보>-한국갤럽의 대선 후보 지지율 조사는 김대중 29.9%, 이인제 21.7%, 이회창 18.8%, 조순 11.6%, 김종필 3.3%로 나타났다. “남편은 1997년 여름을 거치면서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뒤로 계속 선두를 지켰지요.” 김영삼은 9월30일 신한국당 총재 자리를 이회창에게 물려주었다.

이회창 지지도가 10%대까지 추락하자 신한국당에서는 ‘김대중 비자금’ 문제를 꺼내들었다. 10월7일 신한국당 사무총장 강삼재는 기자회견을 열어 김대중이 670억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고 주장했다. 강삼재는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원 외에 6억원을 더 받았다는 ‘20억+알파’ 설도 다시 꺼냈다. 10월9일에는 신한국당 대변인 이사철이 나서서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기업 10곳으로부터 134억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여당의 후보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자 그런 흑색선전으로 남편을 흠집 내려고 했어요.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후보는 노태우 대통령에게서 천문학적인 액수의 선거자금을 받아 썼는데, 그 당사자들이 남편을 터무니없이 공격하니 기가 막혔지요.”

1997년 11월9일 애초 김대중의 정계복귀에 반대했던 야당 의원들이 결성했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가 해산한 데 이어 13일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다. 사진은 그해 11월10일 통추 의원 환영 만찬에서 건배를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유인태 노무현 김대중 김정길 박석무 원혜영.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1월9일 애초 김대중의 정계복귀에 반대했던 야당 의원들이 결성했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가 해산한 데 이어 13일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다. 사진은 그해 11월10일 통추 의원 환영 만찬에서 건배를 나누는 모습. 왼쪽부터 유인태 노무현 김대중 김정길 박석무 원혜영.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은 “야당 정치인으로서 친지와 기업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부정하거나 문제 있는 돈은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김대중의 지지율이 변함없이 선두를 유지하자 신한국당은 10월14일 국정감사장에서 ‘김대중 비자금’ 문제를 다시 들고나왔다. 일가·친척·아태재단 관계자 40여명의 이름으로 10년 동안 342개 계좌에 378억원의 비자금을 분산해 관리해왔다는 것이었다. 신한국당은 김대중을 뇌물수수·조세포탈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10월21일 검찰총장 김태정은 김대중 비자금 의혹 사건을 15대 대통령선거 뒤로 미룬다고 발표했다. 일선 검사 90%가 비자금 수사 유보에 찬성했다. 훗날 김태정은 이렇게 말했다. “법조인의 양심으로 수사에 착수할 수 없었다. 근거가 있어야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어떻게 수사할 수 있겠는가?” 이회창은 검찰의 수사 유보가 김영삼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보고 10월2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당 명예총재인 김영삼의 탈당을 요구했다. 이회창의 탈당 요구에 청와대는 즉각 거부의사를 밝혔다. 다음날 강삼재는 사무총장직을 내놓고 “김대중 비자금 폭로는 이회창 총재 지시로 이루어졌다”고 또 다른 폭로를 한 뒤 지역구인 마산으로 내려갔다. “뒤에 남편은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비자금 수사를 요청했는데, 조작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지요. 비자금 계좌라고 떠든 것이 관계 기관을 통해 죽은 계좌를 모두 수집해 열거한 것이었어요.”

1997년 10월27일 밤 김대중은 김종필의 청구동 집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과 김종필은 후보단일화에 합의했다. ‘디제이피(DJP, 김대중+김종필) 연합’이었다. ‘김대중·김종필 연합’ 협상은 1996년 4·11 총선 이후 1년 6개월을 끌어온 일이었다. 양당이 최종 합의한 내용은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단일화하고 집권할 경우 실질적인 각료 임명 제청권과 해임 건의권을 갖는 실세 총리는 자민련에서 맡는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국민들이 내각제를 원하면 임기 안에 개헌할 수 있다는 자민련의 요구도 받아들였다.

“남편이 김종필 총재와 단일화 협상을 할 때 재야 민주화운동 출신 의원들이 반대를 많이 했어요. 당 밖에 있는 종교계 인사들 중에도 반대하는 분들이 있었고요. 나도 처음에는 김종필 총재와 손을 잡는 것이 달갑지 않았지요. 남편은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색깔론’을 극복하고 호남 고립을 깨려면 자민련과 손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결국 당내 재야 출신들이 남편의 뜻을 이해했지요. 독일에서도 색깔이 다른 정당끼리 연립정부를 세우잖아요. 남편은 공동정부를 운영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일본에서 나온 책에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고, 내일의 적이 다시 친구가 된다’고 쓰인 걸 읽은 적이 있는데, 정치란 게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997년 15대 대선에서 처음 도입된 텔레비전 합동 토론회 생중계는 71년 대선 이래 주류 언론에서 왜곡시킨 김대중의 진면목을 대중들에게 제대로 보여줌으로써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사진은 그해 12월1일 방송협회 산하 대통령선거방송토론위원회에서 주관한 첫번째 티브이 토론회에 출연한 이회창·김대중·이인제 후보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5대 대선에서 처음 도입된 텔레비전 합동 토론회 생중계는 71년 대선 이래 주류 언론에서 왜곡시킨 김대중의 진면목을 대중들에게 제대로 보여줌으로써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사진은 그해 12월1일 방송협회 산하 대통령선거방송토론위원회에서 주관한 첫번째 티브이 토론회에 출연한 이회창·김대중·이인제 후보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1월3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문 서명식을 열었다. 이튿날엔 포항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태준이 자민련에 입당했다. 박태준은 자민련 총재로 선출됐다. ‘디제이피 연합’은 ‘디제이티(DJT, 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으로 나아갔다. “박태준 의원과 남편은 그해 9월 도쿄에서 한일월드컵 예선전이 열렸을 때 만났어요.” 김대중과 박태준은 한국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에 2대1로 역전승을 거둔 뒤 다음날 아침식사를 함께했다. “그때 박태준 의원이 남편에게 사상이라든가 정책이라든가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았는데, 다 듣고 나서 남편을 돕겠다고 약속했어요. 남편도 박태준 의원의 식견이 뛰어나다고 보았고요. 그 전에 강원용 목사님이 박태준 의원을 만나서 남편이 대통령이 되도록 도와주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박태준 의원은 남편의 사상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강 목사님이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한번 만나 이야기해보라’는 말씀을 해주셨대요.”

1997년 여름 김대중 지지율 선두
10월 검찰 ‘비자금 수사 유보’ 발표
김종필 청구동집 ‘디제이피연합’ 성사
“처음엔 나도 달갑지 않았지만…”

11월13일 노무현 등 ‘통추’ 8명 합류
“자민련-통추 좌우 양날개 얻은 셈”

12월1일 대선 첫 티브이 합동토론회
“신문·방송 왜곡없는 남편 모습 그대로”
12월7일 2차 토론때 감기 걸려 ‘비상’
“건강이상설 우려 약 먹지 않고 버텨”

10월14일 이인제가 이끄는 국민신당이 대구에서 창당 준비대회를 열었다. 국민신당은 11월4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중앙당 창당대회를 열어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같은 날 신한국당 대구 필승대회에서 김윤환은 이인제의 배후로 김영삼을 지목하고 공격했다. 11월6일 신한국당 경북지역 필승결의대회에서 ‘국민’이라는 이름표를 단 마스코트가 ‘03’이라는 이름의 마스코트를 내리치는 행위극이 펼쳐졌다. 신한국당 민주계는 강력히 반발했다. 11월7일 신한국당 명예총재 김영삼은 “엄정한 대선 관리와 국정 수행에 전념하겠다”고 밝히고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그날 저녁 이회창과 조순이 만나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통합에 합의했다. 11월13일 이회창과 조순은 합당 서명식을 열고 “통합된 당의 대통령 후보는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로 하고, 조순 민주당 총재는 통합당의 총재직을 맡는다”고 밝혔다.

이회창과 조순의 합당 서명식이 열린 날 민주당 안의 비주류 모임인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소속 김원기·노무현·김정길·원혜영·유인태·박석무를 포함한 8명의 전직 의원들이 “정권교체가 이 시대 최대의 사명이고 최대의 개혁”이라고 밝히고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남편은 통추 소속 정치인들이 명분 있는 행동을 하는 신뢰할 만한 분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국민회의는 통추 대표 김원기를 상임고문으로, 김정길과 노무현을 부총재로 임명했다. “남편은 자민련과의 연합으로 오른쪽 날개를 얻었고, 통추 소속 정치인들의 입당으로 왼쪽 날개를 얻었지요.” 11월21일 민주당과 통합한 신한국당은 이름을 한나라당으로 바꾸었다. 국민회의는 “당명을 아무리 바꾸어도 신한국당이 저지른 실책과 실패는 가릴 수 없다”고 논평했다.

조순과 손을 잡은 뒤 이회창의 지지율이 처음으로 이인제를 제쳤다. 11월22일 한국갤럽 조사 결과는 김대중 33.4%, 이회창 28.9%, 이인제 20.5%였다. 15대 대통령선거의 가장 달라진 풍경은 텔레비전 후보 토론회였다. 선거법이 개정돼 대규모 군중집회가 사라지고 안방에서 대통령 후보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게 됐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텔레비전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텔레비전 토론을 계속 주장했는데, 여당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할 수 없었어요.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남편은 신문 기사나 방송 뉴스가 왜곡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었지요.”

김대중은 주부 대상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살아온 삶을 이야기했다. “텔레비전 아침 방송 <10시 임성훈입니다>에 출연했어요. 거기서 젊은 시절에 고생하던 이야기, 일찍 사별한 부인 이야기를 했어요. 강한 인상만 기억하고 있던 주부들이 남편의 인간적인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된 거지요. 1996년 여름에는 <문화방송>의 <일요일 일요일 밤에> 제작진이 일산 우리 집으로 찾아왔어요. 호수공원 산책하고 꽃구경 하고 맨손체조 하는 우리의 평소 생활을 보여주었는데, 국민들에게 남편의 다른 모습을 알려주는 계기가 됐지요.”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희호는 남편을 도와 선거운동을 했다. “여기저기 많이 다녔어요. 여성단체도 찾아가고 서울 지구당 47곳을 다 방문했고요. 시골에까지 내려가 연설도 했어요. ‘디제이피 연합’이 성사된 뒤에는 김종필 총리 부인 박영옥 여사와 함께 대구·부산에도 가고 육영수 여사 생가도 찾아갔지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1돌을 앞두고 한국 경제에 재앙이 떨어졌다. 1997년 11월21 밤 10시50분 신임 경제부총리 임창열이 국제통화기금(IMF)에 20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신청했다고 발표했다. 예고 없이 닥친 날벼락이었다. 앞서 10월28일 경제부총리 강경식은 국회 답변에서 금융가에 나도는 ‘금융대란설’을 두고 “한국 경제는 펀더멘털(토대)이 튼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답변했던 터였다. 한 달도 안 돼 한국은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국가부도사태가 날 처지로 떨어졌다.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은 유동성 위기였다. 동남아시아가 금융위기에 빠지자 한국에 돈을 넣었던 외국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대출 회수에 나섰다. 한국 경제는 삽시간에 대혼란에 빠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했다고 환호하던 한국은 1년 만에 국제통화기금의 ‘경제신탁통치’ 아래 들어갔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었다. 11월21일은 ‘국치일’로 기록됐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디제이피(DJP) 연합을 통해 색깔론을 불식하고 통합 전략을 구사했다. 사진은 그해 12월5일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해 박 전 대통령 아들 박지만씨 등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디제이피(DJP) 연합을 통해 색깔론을 불식하고 통합 전략을 구사했다. 사진은 그해 12월5일 김대중·이희호 부부가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해 박 전 대통령 아들 박지만씨 등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1월28일 국제통화기금 협상단이 한국에 도착해 12월3일 협상을 마무리했다. 국제통화기금 총재 미셸 캉드쉬는 “한국은 믿을 수 없으니 대통령 후보들이 모두 아이엠에프 협상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각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경제주권이 국제통화기금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은 굴욕이라고 느끼면서도 다른 후보들과 함께 각서에 서명을 해서 주었지요.” 국제통화기금이 차관을 제공하는 대가로 정부와 맺은 협약은 가혹했다.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50%로 높이고, 은행과 증권을 비롯한 금융시장을 개방하며, 무역 관련 보조금을 폐지하고, 수입선 다변화 제도를 앞당겨 없앤다는 납득할 수 없는 조건들을 달고 있었다. 한국의 불리한 처지를 이용해 미국과 일본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항을 끼워 넣은 것이었다. 힘을 앞세워 강요한 ‘불평등 협약’이었다. 김대중은 이날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한 각서에 서명한 뒤 따로 ‘대량실업과 연쇄도산 방지를 위해 추가협상을 해야 한다’는 공문을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튿날 유럽연합(EU) 대사 15명과 유럽 경제인 300여명이 참석한 특강에서 김대중은 “아이엠에프 관리체제를 조속히 극복하려면 관치경제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엠에프 재앙’이 닥친 상황에서도 한나라당과 안기부는 남북대치 국면을 이용했다. 12월5일 안기부는 월북한 오익제가 11월 말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다며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수사에 나섰다. 국민회의는 조작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 무렵 한나라당이 북한에 돈을 주고 판문점에서 총격 사건을 일으키게 하려는 공작을 꾸민 사실이 훗날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북풍’이 효과를 내지 못하자 한나라당은 김대중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당시 남편은 건강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도 별별 말을 다 만들어냈지요. 심지어는 내가 치매에 걸렸다는 말까지 퍼뜨렸어요. 소문을 내려고 ‘구전 홍보단’까지 조직했다고 해요. 한나라당이 유포한 ‘건강이상설’ 때문에 2차 텔레비전 토론 때 애를 먹기도 했지요. 전날 남편이 감기 기운이 있어서 코를 훌쩍거려요. 콧물을 막으려고 응급처치를 하면 머리가 몽롱해지는 문제가 있었어요. 나는 맑은 머리로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약을 먹지 않고 토론에 임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12월7일 열린 2차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김대중은 국제통화기금과 추가협상을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멕시코와 인도네시아에서도 없었던 무역개방 요구를 수용한 것이나 수입선 다변화까지 고치도록 한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따져야 합니다.” 김대중의 추가협상 주장은 막판에 선거 쟁점으로 떠올랐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신문과 한나라당은 김대중이 ‘재협상’을 주장해 국제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공격했다. <조선일보>는 일주일 전인 12월2일치 사설(‘아이엠에프 한파’)에서 아이엠에프의 요구 사항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정부 당국자와 아이엠에프 측의 추후 협상이 요구되는 대목”이라고 썼던 터였다. 그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경제정책은 그 나라의 특수사정과 현실을 바탕에 깔고 실시해야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도 했다. 김대중은 “원칙적으로 아이엠에프 합의 사항을 지지하지만 보완해야 할 문제는 다시 논의하겠다는 것”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다시 밝혔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아이엠에프 재협상 논란’으로 마지막까지 김대중을 물고 늘어졌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 이듬해 국제통화기금은 협약 이행 조건을 수정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