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공자의 무지 자각과 불교에서 모든 존재는 이어져 있는 하나라는 이념 / 이남곡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8. 12. 21:06

사설.칼럼칼럼

[이남곡, 좌도우기] 인문운동은 합작의 최전선

등록 :2016-08-11 18:09수정 :2016-08-11 20:07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이 사실 그 자체와는 별개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공공(空空)의 의미다. 단정하지 않고,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찾아 나설 때, 자신의 소중한 지식과 경험은 물론 상대의 그것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남곡
인문운동가

요즘 연정, 협치, 합작 등의 말들을 자주 접한다.

그 필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 정치 현실의 절박함을 반영하는 것이다. 연정을 제도적으로 가능케 하는 개헌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의원내각제가 된다고 해서 연정이 시대적 과제를 푸는 해법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실력이 안 되면 오히려 그 단점만 드러나, 정국이 더 불안정해질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개헌 못지않게 인문운동이 최전선(最前線)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종교 내지 사상이라면 유학과 불교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두 기둥이 ‘인문적 토대’를 형성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내가 평소 인문운동의 도구로 가장 많이 인용하는 두 문장을 소개하려 한다.

하나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공자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다. 반대하는 쪽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이른바 공자의 후계자들과 권력에 의해서도 수없이 왜곡 변질되어 왔다.

공자는 단정(斷定)하는 것과 자기와 다른 생각을 공격하는 것을 가장 경계한 사람이다. 단정적 사고야말로 합작을 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장애로 된다.

공자의 말이다.

“내가 아는 것이 있겠는가? 아는 것이 없다(無知也).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물어오더라도 주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텅 비어 있는 데서(空空) 출발하여, 그 양 끝을 두들겨 끝까지 밝혀 보겠다(叩其兩端而竭焉).”(논어 제9편)

그 출발이 무지(無知)의 자각이다. 지금은 중학생만 되어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통과한 것이라는 것을 과학 시간에 공부한다.

그러나 그것은 화석화된 지식에 불과하다. 자기가 사실을 알고 있고, 자기의 판단이 틀림없다는 과학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단정에 바탕을 두고 대부분이 살고 있다. 특히 자신의 판단이나 가치관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나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심하다.

무지의 자각을 자기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허물어지는 것으로 오해한다.

자기의 지식·경험·가치관·신념을 비우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이 사실 그 자체와는 별개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공공(空空)의 의미다. 그러면 추진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능력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근본 착각이다. 자신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기 생각에 지배되는 것이다.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공산당이 ‘무오류’를 주장할 때, 가장 ‘반과학적’으로 된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었다. 단정하지 않고, 모두의 지혜를 모아서,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찾아 나설 때, 자신의 소중한 지식과 경험은 물론 상대의 그것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인문적 바탕이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것이다.

두 번째는 불가(佛家)의 말이다. 청원유신 선사의 이야기인데, 우리에게는 성철 스님을 통해 익숙해진 말이다.

“노승이 30년 전, 산을 보니 산이고, 물을 보니 물이었다.(분절 I) 나중에 하나의 깨침이 있음에 이르러서는 산을 보니 산이 아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무분절) 지금에 이르러 여전히 산을 보니 다만 산이고 물을 보니 다만 물이다.(분절Ⅱ)”

무분절의 깨침, 즉 표현은 다양할지 몰라도 ‘모든 존재는 이어져 있는 하나(一體)’라는 것은 이미 현대 과학의 상식으로 되고 있다.

다만 이것 역시 지식 관념에 머물러, 실제적으로는 아직 대부분 분절Ⅰ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투쟁하고 있다. ‘너는 너, 나는 나’일 뿐이다.

진정한 합작은 무분절을 통과한 분절Ⅱ의 의식이 모든 면에서 구체적 사회운영의 원리로 작동할 때 가능한 것이다. 노동운동도 자본운동도, 보수도 진보도, 패권주의도 민족주의도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분노와 증오 대신 사랑과 양보가 모든 운동의 주된 동력이 될 것이다.

지금 사고대로라면 더욱 악화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분배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최소한 이 두 가지 인문적 토대를 진정한 ‘인류 진화’의 표지(標識)로 보고 있다.

눈앞에 다가온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부응하는 민주주의와 분배를 선두에서 실현함으로써, 세계 인류에 기여하는 후발 선진국 대한민국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