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내 詩로부터의 도망 / 신경림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6. 18. 08:32

문화문화일반

내 詩로부터의 도망

등록 :2016-06-17 22:37수정 :2016-06-17 22:38

신경림, 나의 시를 말하다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시도 신명이 나지 않으면 못 쓴다. 시를 쓰는 일이 신바람이 나고 무언가 큰일을 하고 있다는 성취감이 없어서는, 적어도 내 경우, 제대로 된 시를 쓴 일이 없다. 실제로 나는 내가 쓰는 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는 이렇게 시를 써도 되는 것인가 회의에 사로잡히면서 시를 쓰는 일이 시들하고 싫어진 일이 몇 번 있다.

먼저, ‘갈대’ 등 처음 시를 발표하고서다. 휴전이 되고 3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니 나라가 아직 전쟁의 상처를 그냥 안고 있을 때였다. 곳곳에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고 허물어진 벽에는 총탄 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다. 거리는 거지와 상이군인과 전쟁고아로 넘쳐났고, 서울역은 먹고살기 위해 상경하는 농촌 젊은이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서울역이나 종로삼가 일대가 이렇게 무작정 상경한 농촌 처녀들을 유혹해서 거대한 창녀촌을 형성하고 있던 시절이다. 한동안은 시 쓰는 일에 들떠 있던 내게 차츰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러한데 이런 세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름다움만을 좇는 시를 쓰는 일이 과연 맞는가 회의가 들기 시작한 것이다. 회의하기 시작하니 시 쓰는 일이 시들하고 재미없었고, 신명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는 시를 쓸 수가 없었고, 십년을 방황하게 된다.

방황 끝에 확인한 것은 내게는 시 쓰는 일 이외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십년의 방황이 헛되지 않아 나는 앞으로 내 시는 오늘의 내 삶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사는 사람들의 감정과 정서에서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얻었다. 그렇게 해서 엮은 시집 <농무>가 당시의 반역사적 군사독재체제에 저항적인 정서를 띠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한때 내 시는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는 것으로 족하다고까지 생각했었다. 체제에 저항하는 시도 여러 편 썼고 통일이니 민족 문제를 주제로 하는 시도 주저하지 않고 썼다. 쓰고 싶어 쓴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주위의 요구와 권유에 의해서 쓰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렇게 쓰인 내 시에서는 더러 내 목소리가 아닌 남의 목소리가 들리고 내 모습이 아닌 남의 모습이 보였다. 때로는 가성도 들리고 허풍스러운 몸짓도 보였다. 시에서는 무엇이고 남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만큼 이런 시가 몹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세상에서 좋은 소리는 내가 다 앞장서서 골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면서, 내 시가 남의 시처럼 낯설고 싫어졌다. 나는 시를 쓰는 일이 다시 시들하고 신명이 나지 않았다.

그때 찾아낸 출구가 민요다. 그 이전에도 나는 민요를 제법 좋아해서 일부러 들으러도 다니고, 몇 편의 민요조의 시도 썼던 터다. 내 시에 민요적인 정서와 표현을 본격적으로 차용하여 가장 우리 시다운 우리 시를 써보자는 내 의도는 여러 선후배들에게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민요모임도 만들고 민요 채집도 하면서 열심히 민요시를 썼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쓰인 내 민요시는 한 번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시를 쓰고 났을 때의 자유스럽고 홀가분한 느낌 같은 것을 맛볼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 역시 민요는 전 시대의 노래요, 정서로서 내 시를 지나치게 “우리 것”에 가두는 낡은 옷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이 옷을 벗어버리는 데는 십년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이 십년이 내게는 시 쓰는 일에 가장 신명을 내지 못한 세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터널을 지나오면서 시란 무엇에 구애받아서는 안 되고, 무엇을 위해서 혹은 누구를 위해 쓰는 것도 아니라는 뻔한 사실, 이데올로기에 종속하거나 목적을 가질 때 재미없는 시, 쓰는 사람한테도 읽는 사람한테도 가장 신명나지 않는 시가 된다는 다 아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은 수확이었다. 비로소 시 쓰는 일이 정말로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
신경림 시인
생각해 보면 내가 시를 쓰는 일은 늘 내 시로부터 도망치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그 도망은 완벽한 것은 되지 못했다. 내가 뿌리박고 사는 땅, 나와 함께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부터까지 도망칠 수가 없었으니까.

신경림

*1936년생. 1955년 문화예술 ‘낮달’로 등단했다. 시집 <농무> <새재> <낙타> <가난한 사랑 노래>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