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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이 동쪽으로 ‘온’ 까닭은? / 홍완석 한국외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10. 07:00

사설.칼럼칼럼

[기고] 푸틴이 동쪽으로 ‘온’ 까닭은? / 홍완석

등록 :2016-09-08 18:22수정 :2016-09-08 20:25

 

홍완석
한국외대 교수·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장

요즘 러시아의 소위 ‘핫플레이스’는 단연 극동이다.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푸틴 정부가 국가발전 대전략 차원에서 낙후된 극동지역의 조속한 개발을 야심차게, 흔들림 없이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중앙부처로 ‘극동개발부’를 이례적으로 신설한 것이나 2013년 약 381조원의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하는 ‘극동·바이칼지역 경제사회개발 프로그램 2025’를 채택한 것은 극동개발을 향한 푸틴의 강한 의지를 반영한다.

극동 개발의 전초기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이고 플랫폼은 동방경제포럼(EEF)이다. 지난 2~3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2차 EEF는 해외투자 유치와 주변국과의 경제 협력 활성화를 위해 푸틴이 대통령령으로 2015년에 창설한 연례 국제포럼이다. 작년 1차 포럼에서부터 신개념의 공세적 투자유치 정책을 제시해 국제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일종의 경제특구로서 12개의 ‘선도개발구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일원 15개 항구를 ‘자유항’으로 지정하는 가운데 외국인 투자자에게 토지 이용, 인허가 절차, 각종 세제 등에서 지금까지와는 수준이 다른 파격적인 특혜 제공 조처를 발표한 것이다.

푸틴 정부의 극동 ‘띄우기’는 경제개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러시아는 최근 극동의 보스토치니에 바이코누르를 대신하는 우주기지를 새로 건설해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분관을 개관했다. 얼마 전(7월30일~8월10일)에는 한국을 포함해 11개국 아시아 예술가들이 참여한 제1회 마린스키 국제 극동 페스티벌을 개최해 문화예술 진흥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일련의 현상은 러시아가 성장의 내적 동력을 극동에서 찾고 21세기 국가발전의 중심축을 우랄 너머로 이동해 나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태지역은 이미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57%, 교역량의 48%를 차지하는 지구촌 최대 경제권으로 부상했다. 극동과 인접한 한국, 중국,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생산성이 높은 경제대국이고, 당장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자본, 첨단 제조기술, 시장을 구비하고 있다. 특히 유럽이 전략적으로 러시아산 석유 및 가스 수입의존도를 줄여나가는 상황에서 동북아는 에너지 수출의 새로운 출구다. 에너지 자원이 러시아 수출의 70%, 재정수입의 50% 이상인 점을 고려할 때, 유럽 중심 경제구조를 점차 아시아 시장 중심으로 전환시켜야 할 환경에 놓인 것이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서구의 제재로 악화된 경제와 외교의 활로를 동쪽에서 뚫어보겠다는 심산도 갖고 있다. 또한 러시아 동북지역의 중국인 불법이주 증가와 극동경제의 중국 종속 심화를 타개하기 위해서도 극동 개발을 통한 인구유입과 경제 및 안보 주권 강화가 절실하다. 이밖에 무궁무진한 에너지 및 전략자원의 신규개발,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동서 지역 간 경제력 격차 해소, 국토의 균형발전, 새로이 열린 북극 항로 등도 극동 개발을 추동하는 주요 요인들이다.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는 유럽을 따라잡기 위해 서구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 강력한 의지의 상징으로 유럽과 가장 가까운 영토의 서쪽 끝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서구의 선진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소위 “유럽을 향한 창”으로 활용했다. 러시아의 번영과 미래 발전 방향을 아태지역에서 찾고자 하는 푸틴의 신동방정책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1세기 푸틴은 극동 개발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세력으로서 공고한 ‘닻’을 내리고 영토의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를 강대국 러시아의 재건에 필요한 물적 기초를 수혈받는 “아시아를 향한 창”으로 만들고자 한다. 푸틴이 동쪽을 자주 찾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