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우리 사회는 인간의 품격이나 수치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 / 김준형 한동대 교수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7. 20:58

[정동칼럼]‘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 사이의 절벽 같은 낙차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입력 : 2016.10.06 21:06:03 수정 : 2016.10.06 21:10:43

[정동칼럼]‘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 사이의 절벽 같은 낙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돼왔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급격히 힘을 잃으면서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선진국은 여전히 규칙에 기초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회복을 주장하지만 핵심의 두 축인 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시장 확대를 통해 유사 이래 최고의 번영을 구가해왔지만 공짜는 없었다. 번영의 과실은 고르게 분배되지 않고 불평등을 낳았으며, 이는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붕괴를 초래했다. 세계화에 특화된 기업과 자본은 기회와 이익의 확장으로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는 임금삭감과 자산 하락으로 고통이 깊어졌다.

민주주의도 정당성을 잃어갔다.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중동의 봄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듯 보였지만, 오히려 중심부가 휘청거리고 있다. 브렉시트나 트럼프 현상은 매우 강력한 전조현상이다. 세계적으로 군비경쟁을 부르짖는 극우적 민족주의와 안보 장사꾼들이 활개 치고 있다. 패권의 추억은 강경한 대외정책을, 국제협력에 대한 피로감은 고립주의를, 개방과 이민에 대한 반감은 인종주의를 부추긴다. 1920년대 말 대공황에 비견되는 글로벌 장기침체로 ‘뉴노멀’(New Normal) 시대가 오고 있으며, 이는 불확실성, 불안정성, 복합성을 함께 증대시킨다. 대결과 약탈은 경제관계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세대, 성별, 인종 사이로 확산된다.

한국은 불평등에 대한 기층민중의 분노가 극우포퓰리즘의 먹잇감이 된 지 오래다. 서구와 달리 극우 준동이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미 수십년간 기득권의 지배로 인해 국민들은 좌절과 면역을 함께 안고 살아왔기 때문에 생긴 슬픈 착시다. 여기에 우리의 진짜 위험, 진짜 불행이 있다. 한국의 기득권 지배연합은 마치 압력밥솥의 폭발을 막기 위해 조금씩 증기를 배출하듯이 안보포퓰리즘, 가짜복지론, 가짜통일론으로 김 빼기를 해왔다. 헬조선과 흙수저론은 찻잔 속의 미풍 정도로 취급하는 오만에 싸여있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품격이나 수치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정치인은 본분을 잊고 지식인은 지성을 버렸다. 범죄를 저지른 연예인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힘으로 부끄럼 없이 재등장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말을 방송을 통해서도 거리낌 없이 던지는 한탕주의가 만연한다. 비상식과 비정상의 반복을 통해 도리어 면죄부를 얻는 사악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국가를 개인 사업처럼 대했던 이명박과, 국가를 개인 친분관계로 격하시키는 박근혜 정부의 민주주의 훼손도 트럼프처럼 반복에 의한 일상화로, 비정상이 정상처럼 보이게 만든다. 대한민국은 마치 침몰하는 배와 같고,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빨대를 꽂는 사람들만 부지기수다.

소수의 상위계층에게 기가 막힌 돈의 맛(?)을 안기면서 우리 사회의 많은 가치들을 소멸시켜버렸던 개발독재의 암흑의 터널에서 빛을 봤던 시간은 10년간뿐이었다. 다시 개발시대를 모방한 5년을 살았고, 지금은 독재시대를 모방한 5년을 견디고 있다. 다음은 무엇일까? 어디일까? 기득권자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권력본능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시대정신 따위는 필요치 않고, 정당성 여부는 상관도 없고, 결국 주도권 확보 여부와 언론 노출빈도를 증가시키는 정치공학만으로 얼마든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공안 통치에 의한 위협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여당대표의 기획단식이나 대통령의 선동적 대북 언사 등도 이런 정치공학의 일부라는 사실이 소름 끼친다.

민주주의의 뿌리인 아테네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참주’의 지배를 받으며 민주주의 해체 위기까지 몰렸었다. 참주는 정치적으로 미숙한 민중의 지지자가 권력을 획득해 독재를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다른 폴리스의 참주나 용병의 힘까지 이용했고,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접었으며, 비판을 용인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있어야 할 것’과 ‘있는 것’ 사이의 절벽 같은 낙차 사이에서 좌절만 하고 있을 것인가?

정권교체의 막중한 임무를 지닌 야권은 헤매고 있다. 정의로운 신의 간섭이라고 할 정도로 유권자의 절묘한 선택이었던 4월의 총선 결과는 도리어 근거 없는 자신감을 심어주어 독이 되고 있으며, 이는 야권분열에도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어이없는 예측까지 나오게 한다. 지난 총선보다 훨씬 더 정권교체의 열망을 불러일으켰던 87년 민주화도 학살의 주범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을 망각한 모양이다. 역사에 죄를 저지르고, 희망의 영구적 소멸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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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308&artid=201610062106035#csidx915e3dd354402be86234d1380e03c8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