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오디세이] “정의란 무엇인가” 샌델은 묻고 플라톤은 탐구한다 | |
정의에 대한 이데아와 그림자
플라톤은 정의를 탐구한 최초의 철학자다. ‘국가’에서 변증법적인 대화를 통해 정의의 참모습을 보라 한다. 하나 마이클 샌델은 도덕적 딜레마로 몰고가서는 딱 멈춰버린다. 창의적인 답 역시 없다.
2010년 서점가에 특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잘 안 팔린다는 인문학 책이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 주인공이다. 책의 내용도 화제였지만, 정의라는 주제에 대한 관심 자체가 큰 이슈였다. 왜 사람들은 이 책에, 정의라는 주제에 열광하는가? 부정의가 판을 치는 현실에 좌절하고 정의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없는 정의를 이 책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라는 농담이 있다. 붕어빵에서 진짜 붕어가 씹히기를 기대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의 독자는 이 책에서 정의를 발견하길 진짜로 원한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정의’가 없다? 언뜻 이상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샌델이 하버드 대학에서 행한 강의를 담은 이 책은 학생들에게 정의를 보여주기보다는, 정의에 관련된 문제를 곰곰이 사유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독자들이 이 책에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길 기대했던 것은 어쩌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한국어판 제목이 일으키는 착시 현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의도가 없다. 샌델은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도덕적 딜레마를 던진 후에, 학생들의 반응에 따라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정의를 다루려는 순간에 딱 멈춘다. 그리고 자기 일은 여기까지라는 듯, 학생들로 하여금 정의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몇 가지 제안은 하지만, 창의적인 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이 책은 정의의 문제로 학생들을 이끄는 강의록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원서의 제목(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은 교수인 샌델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목대로라면,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정의란 무엇인가?”(What is Justice?)가 아니라, 까다로운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 속에서 “해야만 할 옳은 일은 무엇인가?”(What’s the Right Thing to Do)이다. 두 질문 사이의 차이는 플라톤의 <국가>를 생각하게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철저하게 <국가>를 외면하는데도 말이다. <국가>에서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를 집으로 초대했다. 안부를 물으며 시작된 대화는 마침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른다. 여러 가지 대답들이 나왔다. “남에게 빚을 진 것을 갚는 것이 정의로운 것입니다.”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로운 일입니다.” “친구들은 잘되도록 해주고, 적들은 잘못되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정의입니다.”소피스테스였던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더 강한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모든 대화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던지는 연속적인 질문들 앞에서 맥을 못 추고 쩔쩔매다, 자기 의견을 포기했다. 소크라테스의 논쟁술은 위력적이다. 그의 연속되는 질문에 하나씩 대답하다 보면, 상대방이 처음에 내놓은 주장은 어느새 모순된 결론에 이른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며, 이렇게 제안한다. 특정 상황 속에서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는 구체적인 행동이나 판단에 집착하지 마라! 그런 것들을 정의롭게 해주는 ‘정의’의 참모습(Idea)을 찾아라! 결국 “해야 할 정의로운 것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리지 말고, 그것들을 정의롭게 만드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라는 말이다. 만약 구체적인 상황들을 조사하고 그곳에서 정의로운 것처럼 보이는 판단이나 행동을 사례별로 모은다면, 과연 정의의 참모습을 알 수 있을까?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는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든다. 인간은 동굴 안에 갇혀 사는 죄수와 같다. 우리는 뒤를 돌아볼 수 없다. 그 뒤에는 사물과 불이 있는데, 그 사물의 그림자만이 우리 눈앞에 있는 벽면에 비친다. 우리는 사물을 볼 수 없고, 벽면 위의 그림자만 볼 수 있다. 이 비유에 따르면,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모든 도덕적인 상황과 사건은 동굴 벽을 떠도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동굴에 갇혀 꽁꽁 묶인 채로 뒤를 돌아다볼 수 없고 오로지 앞만 보는 죄수들의 눈에 비친 벽면의 그림자, 그것은 진상도 진리도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뒤에서 움직이는 실물의 한갓 그림자며, 허상일 뿐이다. 더 나아가 그 동굴 밖의 태양 아래 빛나는 진리와 진상의 허깨비에 불과하다. 동굴 속에서 우리는 그림자만 볼 뿐, 그림자의 주인을 볼 수가 없다. 죄수들을 묶고 있는 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오는 철학자들만이 그것을 볼 수 있다. 벽을 보면서 아무리 고민해도 뒤를 향한 조망이 없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런 소크라테스를 샌델은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책의 초반부에서 “벽에 비친 그림자에 영향을 받지 않는 철학은 단지 메마른 이상향을 그릴 뿐이다”라고 일갈하고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완전히 배제한다. 서양 철학사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던진 최초의 책이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대신 샌델은 아주 까다로운 도덕적 딜레마 상황 속에 독자들을 빠뜨려 놓고, 그 가운데서 어떤 일이 ‘해야만 할 정의로운 일’인지를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물건이 부족한 위기 상황이다. 당신이 가게 주인이라면, 값을 올려 부를 것인가, 아니면 제값을 받을 것인가?” “당신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 기관사라면, 정상 철로 위에 있는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비상철로 위에 있는 한 사람 쪽으로 전차를 돌릴 것인가, 아니면 그냥 달려서 다섯 명을 죽게 놔둘 것인가?” “표류하는 구명보트에서, 어차피 죽을 사람을 희생시켜 세 사람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모두 죽더라도 그냥 버틸 것인가?” 동굴의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샌델은 벽면의 그림자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킨 셈이다. 그리고 어떤 행동이 옳은가, 정의에 가까운가를 선택하고 이유를 대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국가>에서 소크라테스가 사용하는 방법론과 비슷하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사례들과 그에 관련된 정의의 규정들을 하나하나 논박해나간 후, 대화자들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그는 구체적 상황들을 다루던 대화자들의 시선을 그 상황들에 영향을 미치는 원칙들 쪽으로, 즉 구체적인 ‘현상’들로부터 현상들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참모습(이데아)’ 쪽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오가게 하며 그들의 관계를 생각하게 만든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대화자가 취하고 있는 변증법적인 대화법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방법이며 철학하기라고 선언한다.
한 가지 더. 샌델은 “해야 할 정의로운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원초적인 질문을 생략했다. 플라톤의 <국가>가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 “왜 우리는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이 질문이 없다면 정의에 관한 모든 논의가 자칫 공허하고 위험해질 수 있다. 여러분은 정의롭게 살길 원하는가? 정의롭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나 자신이 정의롭게 살고 싶은 마음과 결단이 없다면, ‘정의’와 ‘정의로운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뭐하겠는가? 김헌/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
'기사 및 퍼온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종환의 나의 삶 나의 시] 삶도 문학도 ‘부드러운 직선’ 같기를 꿈꿨습 (0) | 2011.03.12 |
---|---|
'밀리언셀러' 저자된 장하준 교수 (0) | 2011.03.07 |
[고전 오디세이] 그리스 셋방살이 벗어나는 로마 문학의 팡파르 (0) | 2011.01.29 |
주역의 원리 (0) | 2011.01.29 |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 1, 2 (0) | 2011.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