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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오디세이] 그리스 셋방살이 벗어나는 로마 문학의 팡파르

이윤진이카루스 2011. 1. 29. 11:48

[고전 오디세이] 그리스 셋방살이 벗어나는 로마 문학의 팡파르
로마제국의 탄생을 노래한 ‘아이네이스’. 그리스 문학의 번역에서 시작
했지만 창조적 경쟁의 바탕에서 이뤄진 이 작품은 로마를 세계 지배자
로 그린다. 그리스 문학 여신 무사에 세들어 산 지 700년 만의 일이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메일보내기
» 로마가 건국한 해인 기원전 753년부터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던 기원전 28년까지의 로마 역사를 그림으로 새긴 아이네아스의 방패이다. 이 그림은 1763년에 출판된 <아이네이스> 영어 번역 텍스트 263쪽에 삽입된 것이다.
24 그리스와 로마 문학 여신 무사와 카메나

 

그리스 문학을 담당하는 여신은 무사이고, 로마 문학을 관장하는 여신은 카메나다. 노래를 뜻하는 라틴어 카르멘(Carmen)이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카메나! 듣기에 그럴싸해 보이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음은 그리스 무사의 집에 세 들어 살던 로마의 카메나가 자기 집을 마련해 이사 가던 날의 이야기다.

세 들어 살던 시절의 초창기 모습이다. 한마디로, 로마 문학은 그리스 문학의 번역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라틴어 최초의 문학 작품은 해방 노예인 안드로니쿠스가 라틴어로 번역한 <오디세이아>(기원전 272년 작품)다. 물론, 그리스 고전이 번역을 통해서 로마에 소개되기 이전에도, <12표법>(Tabula duodecim), <축제의 노래>(Fasti)와 <연대기>(Annales)와 같은 텍스트들이 있었다. 번역이 시작된 것은 로마의 전통적인 텍스트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로마의 문법 교사들은 그리스 작품의 번역을 시도하였다.

첫 작품이 <오디세이아>다. 이 번역은 학교 교실에서는 오랫동안 읽혔다. 적어도 호라티우스 시대까지 교재로 사용되었다(서한 2권 1. 134행 이하). 안드로니쿠스의 <오디세이아>(기원전 272년 작품)가 모방 차원에서 진행된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미 이 번역에서부터 소위 ‘경쟁’ 전통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번역은 단순 옮김이 아니라, 이 옮김 자체가 당시 로마의 상류층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친헬레니즘(philhellenism)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이 번역은, 그러니까, 당시 로마의 문화가 그리스의 문화에 흡수될 수 있다는 우려와 걱정에서 시도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다. 마케도니아는 아테네는 물론 세계를 제패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문화적으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의 문화에 동화되었고 종국에는 자신의 고유한 언어마저 상실했다. 자신의 문학과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서도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리스어를 차용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마케도니아의 정체성 상실이었다. 이런 정체성의 위기 문제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100년 전까지는 한문을 사용했고, 50년 전까지는 일본어를, 지금은 영어를 모국어보다 더 중시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오디세이아>의 번역자 안드로니쿠스도 이런 문제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디세이아> 서문에서 확인된다.

 

한 남자를 나에게, 카메나 여신이여, 노래해주소서,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던 이를.
Virum mihi, Camena, insece versutum (Frag. Od. 1.)

∪ - ∪ - || ∪ - ∪ || - ∪ ∪ - - x

 

안드로니쿠스가 그리스의 무사가 아닌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노래를 관장하는 카메나에게 노래를 간청하고 있고, <오디세이아>의 번역에 그리스의 육각음보가 아닌 이탈리아 전통의 사투르니아 운율을 사용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투르니아 음율은 나이비우스(Naevius, 기원전 285/60년~190년)가 포에니 전쟁에 대한 서사시를 지을 때에 사용했던 리듬이다. 이와 관련해 나이비우스는 로마인들이 라틴어로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이유로 “카메나 여신이 자신을 위해 애도할 것”이라는 비문을 자신의 묘비에 새기고자 했다. 이를 고려할 때에 안드로니쿠스의 <오디세이아> 번역은 단순 옮김은 아니다. 로마 문학이 소위 그리스 문학을 수용할 때부터 작동했던 창조적 경쟁의 한 사례인 셈이다.

그런데 안드로니쿠스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 이가 있었다. 바로 엔니우스다. 그는 전통적인 사투르니아 운율 대신에 그리스의 육각음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그가 노래한 내용은 가장 로마적이었다. 그는 또한 로마인이 트로이인의의 혈통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연대기>를 저술한다. 요컨대, 카이사르가 아이네아스의 후손이라는 점을 통해서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카이사르 집안의 시조 할머니인 일리아(Ilia)의 아버지가 아이네아스이고, 일리아의 아들이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의 할아버지인데, 이런 이야기를 처음 한 사람이 바로 엔니우스다. 이런 의미에서 엔니우스도 카메나를 숭배하는 로마 문학의 전통을 존중했던 이다. 물론 안드로니쿠스와는 다른 노선을 취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로마 문학은 그 시작부터, 그러니까 무사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시절부터 그리스 문학에 대한 경쟁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창조적 경쟁의 전통 위에서 탄생한 작품이 로마가 내세우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다. 주지하다시피, <아이네이스>는 로마 제국의 탄생을 노래하는 서사시다. 이 작품을 통해서 베르길리우스는 로마를 세계의 통치자이자 우주사의 집행자로 상징화시킨다. 예컨대, <아이네이스> 제8권에 그려지고 있는 아이네아스의 방패에 따르면, 로마가 곧 세계다. 시작은 자연적 힘에 불과했지만 그 힘은 로물루스로, 로물루스는 왕국 로마로, 왕국 로마는 공화국 로마로, 공화국 로마는 제국 로마로, 제국 로마는 천상과 지상과 지하세계, 곧 우주의 주인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네아스 방패 그림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구체적으로 그림의 바깥 원은 지하 세계와 천상 세계를 상징한다. 이를 통해서 방패 안의 세계는 천상-지하 세계의 입체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입체 공간 안에 지상의 현재 세계가 표현된다.

하지만 지하 세계에서 지상의 현재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제의 장치로 오케아노스가 새겨져 있다. 그 안으로 동방과 서방의 세계 전체가 들어가 있다. 이 세계는 다시 동방, 서방, 남방, 북방으로 범주화되어 있고, 그 중심에는 로마가 위치하고 있다. 로마는 더이상 서방의 중심지가 아닌 셈이다. 서양의 근대 제국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제국의 모델 역할을 했던 로마 제국은 이렇게 탄생했다.

 

맞은편에는 세 번의 개선 행진을 하며 로마에 입성하는 카이사르가,

그는 이탈리아를 보우하는 신들에게 바치는 불멸의 서원을 하는데,

전 로마에 삼백의 거대한 신전을 봉헌하겠노라고 서약하도다.

거리는 환호와 박수와 축제로 들끓어 올랐고,

모든 신전에는 어머니로 구성된 합창단과 제단이 마련되었고,

제단 앞에서는 황소들이 제물로 희생되어 대지를 덮었도다.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빛을 발하는 아폴로 신전의 하얀 입구에

자리를 하고서 인민들이 바치는 제물들을 살펴 가며 하늘로 치솟은

기둥에 봉헌하였도다. 패배한 족속의 백성들이 긴 행렬을 지어 들어왔는데,

그들의 다양한 말들만큼이나, 그들의 의복과 무구도 각양각색이었도다.

이 자리에는 유목민 노마데스 족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복장의 아프리카 인을

이 자리에는 렐레게스 족, 카라스 족, 활의 명수 겔로누스 족을 불의 신은 섬세하게

다듬는구나. 이미 에우프라테스 강이 잔잔한 물결과 함께 흘러가고 있고 저 대지의

끝에 거주하는 모리누스 족과 두 개의 갈라진 하구를 향해 흘러가는 레누스 강과

야생의 길들여지지 않은 다하이 족과 다리를 못마땅해하는 아락세스 강이 파여졌도다.

(<아이네이스> 제8권 714-729행)

» 안재원
로마가 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에 세 번의 개선식과 300의 신전을 전 로마에 세우겠노라는 서원으로 상징된다. 로마인에게 3이라는 숫자는 시간적으로 영원함을 상징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실제로 300의 신전을 다 짓지는 못했고, 82개의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공간적으로 승리의 환호와 축제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는 로마 거리와 이 거리를 따라 끌려오는, 로마인이 보기에 야만인들인, 패배한 이민족들, 오늘날 아프리카의 베두이족, 아시아의 스키타이의 한 부족인 겔로누스족(오늘날 우크라이나), 소아시아의 카라스족, 서유럽 끝에서 끌려오는 오늘날 벨기에 거주했던 모리누스족의 표현을 통해서, 서방을 가르고 있는 라인강과 동방의 세계를 부드럽게 적시고 있는 에우프라테스강과 남방의 나일강과 북방의 저 길들여지지 않은 야만의 아락세스강(오늘날의 아르메니아 지역의 강으로 카스피 해로 흘러 들어간다)으로 지상의 동-서-남-북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로마를 위치시키고 있다. 나름 장엄하고 나름 정치적으로는 체계적이며 위엄과 권위가 넘치는 순간이라 하겠다. 하지만 속내를 보면 별 시답지 않은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무사의 집에서 세 들어 산 지 700여년 만에 처음으로 로마의 카메나가 자기 집을 사서 이사 가는 날에 벌어진 한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