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의 변명
본 원서는 이한구· 정연교· 이창환을 역자로 하여 2013년 철학과 현실사에 의하여 번역 및 출판되었다 (이하 이한구 번역본). 그 역서를 읽은 역자는 (이하 역자) 그 역서에 이해가 되지 않는 많은 구절들을 발견하여 원서를 통하여 내용을 확인하고자 국외에서 원 저서를 구입하여 역서의 내용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역자의 변명은, 원 저자 칼 포퍼경의 주장대로 문제1 ⟶ 잠정적 이론 ⟶ 오류제거 ⟶ 문제2라는 과정을 통하여 과학적 발전이 이룩되고 또한 문제는 끊임없이 출현하는 것이어서 모든 문제해결이 점정적일 따름이며 문제에 대한 잠정적 이론(잠정적 해결책)의 수량이 무한할 수도 있다면 원서의 타당한 번역이라는 문제1을 두고 가능한 한 많은 역자들이 원서를 번역하는 일 또한 과학적 발전에 대한 한 가지 기여라고 역자는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94년에 사망한 칼 포퍼경의 저서가 20여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원서의 언어인 독일어나 영어 외의 언어로 번역되는 경우에 독점적인 저작권법이 주장될 수 있는지는 논쟁의 소지가 있다고 역자는 생각한다. 더구나 위의 역자 세 분 중에서는 독점적인 번역권 없이 칼 포퍼경의 저서를 번역하여 한국 내에서 출판한 분이 있음에야!
칼 포퍼경의 저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그의 저서들이 지닌 가치는 정말로 무한하다고 역자는 판단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은 많은 서책들이 판매되지 않아서 번역자들의 번역 노고가 금전적으로 보상을 받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칼 포퍼경의 저서들은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내용이 이해되어 토론되고 인용되기 어려워서 소수의 연구자들과 독서가들을 제외하면 많이 읽히지 않는 저서들이라고 역자는 상상한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석학들 중 한 분인 칼 포퍼경의 저서가 그런 대접을 받는 현실이 역자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원서에서 언급된 원서의 쪽수는 번역에서 원서대로 실어서 번역 과정에서 변할 수 있고 번역이 끝난 다음에 역자는 수정할 예정이며, 역자의 번역은 위에 지적한 세 분의 역서를 참고하였지만 역자의 번역에도 오류가 많을 것임을 역자는 고백한다. 그러므로 독자들의 진지한 비판이 있다면 역자의 오류가 바로잡힐 것이라고 역자는 기대한다.
2018년 9월 역자
칼 R. 포퍼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옥스퍼드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에게 헌정함
서문
인간의 지식이라는 현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의 우주에서 가장 큰 기적이다. 그것은, 금방 해결될 문제가 아니어서 나는 결코 현재의 저서가 그 문제의 해결에 심지어 작은 기여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3세기 동안 예비단계들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토론을 다시 시작하는 데 내가 도움을 주었기를 나는 희망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뿐만 아니라 토마스 리드(Thomas Reid)도 포함하는 데카르트, 홉스, 로크, 그리고 그들의 학파이래, 인간의 지식에 관한 이론은 주로 주관론적이었다: 지식은 특별히 안전한 종류의 인간 믿음으로서 그리고 과학적 지식은 특별히 안전한 종류의 인간 지식으로서 간주되었다.
이 저서의 논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전통과 ㅡ 이 상식적 지식론의 전통 ㅡ 결별한다. 내가 주장하는 바, 본질적으로 자기비판적인 상식을 나는 크게 찬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상식적 실재론에 있는 본질적인 진실을 끝까지 기꺼이 지지하는 반면, 상식적 지식론을 주관주의적인 심각한 오류로 간주한다. 이 심각한 오류가 서양 철학을 지배했다. 나는 그 오류를 근절하여 본질적으로 추측성 지식이라는 객관적 이론으로 그 오류를 갈음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대담한 주장일 것이지만 나는 그것에 대하여 미안하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가 특정 중복사항들에 대하여 사과해야한다고 느낀다: 이전에 출간되었든 아니든 나는 다양한 장(章)들은 심지어 그 장(章)들이 부분적으로 중복되고 있을 때도 매우 거의 그 장(章)들이 서술되었던 상태로 남겨두었다. 이것은 또한, 내가 존 에클스(John Eccles)경의 저서 실재 직면하기(Facing Reality)에서의 제안에 따라 2장에서와 같이 내가 지금은 ‘세계 1’, ‘세계 2’ 그리고 ‘세계 3’이라고 말하기를 선호할지라도, 여기 3장과 4장에서 ‘제1 세계’, ‘제2 세계’ 그리고 ‘제3 세계’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칼 R. 포퍼
버킹엄셔(Buckinghamshire), 펜(Penn)
1971년 7월 24일
감사의 말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 아르네(Arne) F. 피터센(Petersen), 제레미 셔머(Jeremy Shearmur) 그리고 누구보다도 나의 아내에게 그들의 참을성 있고 줄기찬 노력에 대하여 나는 깊이 감사한다.
1971년 칼 R. 포퍼
이 수정본에 수록된 개선사항들 중 대부분은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제레미 셔머(Jeremy Shearmur)에 의해서도 제안되었는데 그는, 너필드 재단의 (Nuffield Foundation) 후원으로 나의 연구 조교이다; 그리고 존 왓킨스(John Watkins)에 의해서도 제안되었다.
10쪽의 마지막 문단 (b)의 개선은 앤서니 플루(Anthony Flew)가 지적하여 비판한 덕분이고, 331쪽의 첫째 새로운 문단에서의 모호성을 지적한 사람은 I. 그래턴 기네스(Grattan-Guinness)였다. 관련된 수정사항들은 1975년의 4쇄에서 이행되었다.
아돌프 그륀바움(Adolf Grünbaum)은 몇 가지 상세한 비판들로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 내가 그의 비판 모두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그 비판들 중 몇 가지 비판들로 인하여 나는 두 가지를 수정했으며 (49쪽 및 53쪽에서) 부록 2에서 비평을 했다.
나는 여기서 또한, 저서가 출판된 이래, 비판을 위하여 1쪽의 나의 요구에 응답한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할 것이다.
부록 2인 추가 논평들은 (1978년) 새롭게 추가되었다.
칼. R. 포퍼
1978년
목차
1. 추측성 지식: 귀납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 1
1. 귀납의 상식적 문제 (3). 2.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두 가지 문제 (3). 3. 흄
(Hume)이 얻은 결과들에 대한 중요한 결론들 (4). 4. 귀납의 문제에 접근하는 나의 방식
(6). 5. 귀납의 논리적 문제: 재서술과 해결책 (7). 6. 논리적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에
관한 언급들 (8). 7. 이론들에 대한 선호와 진리 탐색 (13). 8. 입증: 비개연성의 장점들
(17). 9. 실용적 선호 (21). 10. 흄(Hume)의 심리학적 귀납 문제에 대한 나의 재서술의
배경 (23). 11. 심리학적 귀납 문제의 재서술 (26). 12. 전통적인 귀납의 문제와, 귀납의
모든 원리들 및 규칙들의 부당성 (27). 13. 귀납의 문제들 초월과 구획설정 (29).
2. 상식의 두 가지 얼굴: 상식적 실재론을 찬성하는 그리고 상식적
지식론을 반대하는 논증 32
1. 철학의 위한 변명 (32). 2. 불안한 출발점: 상식과 비판 (33). 3. 다른
접근방식들과의 대비 (33). 4. 실재론 (37). 5. 실재론을 위한 논증들 (38). 6.
진리에 관한 비평들 (44). 7. 내용, 진리 내용 그리고 허위 내용 (47). 8.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관한 언급들 (52). 9.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과 진리 탐색 (54).
10. 목표들로서의 진리와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57). 11. 진리와 박진성
(迫眞性: verisimilitude)의 개념들에 관한 언급들 (58). 12. 그릇된 상식적 지식론 (60). 13. 상식적 지식론에 대한 비판 (63). 14. 주관론적 지식론에 대한 비판 (64). 15. 상식적 지식론의 다윈 이전의 특징 (65). 16. 진화적 인식론에 대한 개괄 (67). 17. 배경지식과 문제들 (71). 18. 우리의 관찰들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은 이론-함유이다 (71). 19. 주관론적 인식론에 관한 회고 (72). 20.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 (73). 21. 확실성
추구와 상식적 지식론의 주요 약점 (74). 22. 확실성에 관한 분석적 언급들 (78). 23.
과학의 방법 (81). 24. 비판적 토론, 합리적 선호 그리고 우리의 선택들과 예측들에 대한
분석성의 문제 (82). 25. 과학: 비판과 창조성을 통한 지식의 성장 (84). 귀납에 관한
추후 생각 (85). 26. 인과와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문제 (90). 27.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논리적 문제가 그의 인과 문제보다 더 깊은 이유 (90). 28. 칸트의 개입:
객관적 지식 (91). 29. 흄(Hume)의 역설 해결: 합리성의 복원 (93). 30. 귀납의 문제와
연결된 혼란들 (95). 31. 귀납을 정당화하는 그릇된 문제로부터 무엇이 남는가? (97).
32. 역동적 회의론: 흄(Hume)과의 대면 (99). 33. 우발적 사건들의 비개연성으로부터
나온 논증의 분석 (101). 34. 요약: 상식에 대한 비판적 철학 (103).
3. 인식 주체가 없는 인식론 106
1. 인식론에 관한 세 가지 주장들 및 제3 세계 (106). 2. 제3 세계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 (112). 3. 제3 세계의 객관성과 자율성 (112). 4. 언어, 비판 그리고 제3 세계
(119). 5. 역사 속의 언급들 (122). 6. 브로우베르(Brouwer)의 인식론에 대한 이해와 비판
(128). 7. 논리학, 확률론 그리고 물리 과학에서의 주관론 (140). 8. 논리학과 발견의
생물학 (142). 9. 발견, 인본주의 그리고 자기-초월 (146). 발췌 참고문헌 (150).
4. 객관적 정신 이론에 관하여 153
1. 다원론과 세 가지 세계들의 원리 (153). 2. 세 가지 세계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들
(155). 3. 제3 세계의 객관성 (156). 4. 인공적 산물로서의 제3 세계 (158). 5. 이해하기의
문제 (162). 6. 사고의 심리학적 과정들과 제3 세계 대상들 (163). 7. 이해하기와
문제-해결 (166). 8. 매우 하찮은 사례 (168). 9. 객관적인 역사적 이해하기의 사례 (170).
10. 문제들이 지닌 가치 (180). 인문학에서의 이해하기 (“해석학”) (183). 주관적
재연이라는 콜링우드(Collingwood)의 방식과의 비교 (186).
5. 과학의 목표 191
발췌 참고문헌 (204). 참고문헌에 대한 주석 (204).
6. 구름과 시계에 관하여 206
합리성과 인간의 자유라는 문제에 대한 접근.
7. 진화와 지식의 나무 256
1. 문제들과 지식 성장에 관한 몇 가지 언급들 (257). 2. 생물학에서 그리고 특히
진화론에서의 방법들에 관한 언급들 (265). 3. 추측: ‘유전적 이원론’ (272). 부록.
희망찬 행태적 괴물 (281).
8. 논리학, 물리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실재론적 견해 285
1. 실재론과 다원론: 환원 대(對) 출현 (289). 2. 역사에서의 다원론과 출현 (296).
3. 물리학에서의 실재론과 주관론 (301). 논리학에서의 실재론 (304).
9. 타스키(Tarski)의 진리론에 관한 철학적 비평들 319
부록. 타스키(Tarski) 의 진리 정의(定義: definition)에 관한 주석 (335).
부록 1. 양동이와 탐조등: 두 가지 지식론들 341
부록 2. 보충 언급들 (1978년) 363
인명색인 377
주제색인 381
1. 추측성 지식: 귀납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
19세기를 통한 비이성의 성장과 20세기를 통과한 것은
흄(Hume)의 경험론 파괴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버트런드 러셀
물론,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주요 철학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다: 귀납의 문제. (나는 틀림없이 1927년이나 그 무렵에 해결책에 도달했다.) 이 해결책은 극도로 유용했고 그 해결책으로 인하여 나는 상당한 숫자의 다른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귀납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주장을 지지할 철학자들은 극소수일 터이다. 이 문제에 관한 나의 견해를 연구하는 ㅡ 혹은 심지어 비판하는 ㅡ 수고를 한, 또는 그 문제에 관하여 내가 어떤 연구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한 철학자는 극소수다. 그 많은 저서들 중 대부분이 나의 개념들의 몇 가지 매우 간접적인 반향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는 징표들을 드러낼 지라도, 나의 연구 중 어떤 연구도 언급하지 않는 많은 저서들이 그 주제에 관하여 아주 최근에 출판되었다; 그리고 나의 개념들을 주목하는 저 저술들은 통상적으로 내가 믿은 적이 없는 견해들을 나에게 귀속시키거나, 분명한 오해들이나 오독들을 근거로 혹은 부당한 논증들로써 나를 비판한다. 이 장(章)은, 나의 견해들을 새롭게, 그리고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완전한 답변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시도이다.
귀납의 문제에 관한 나의 첫 번째 두 가지 발간물들은 1933년의 인식(Erkenntnis)에서의 나의 글이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나의 문제를 정식화해서 나의 해결책을 개괄적으로 제시했고, 그리고 1934년의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이다 (L.d.F.). 그 글과 또한 저서가 매우 압축되었다. 나의 독자들이 내가 제시한 몇 가지 역사적 암시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 문제에 대한 나의 고유한 재정식화(reformulation)가 결정적이었던 이유를 발견하기를 나는 다소 낙관적으로 기대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능하게 된 것은, 내가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를 재정식화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귀납의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라는 표현에 의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어떤 정식화를 (내가 ‘Tr’로 지칭할) 의미한다:
Tr 미래가 (주로) 과거와 같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정당화는 무엇인가? 아니면 혹시 귀납적 추론들에 대한 정당화는 무엇인가?
이와 같은 정식화들은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잘못 표현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정식화는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ㅡ ‘같은(like)’이라는 단어가 공허하여 무해할 정도로 신축적인 의미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내가 한 사람으로서 오류로서 간주할 전제. 두 번째 정식화는, 귀납적 추론들과 귀납적 추론들을 도출하는 데 대한 규칙들이 있다고 전제하는데 이 전제는 다시 무비판적으로 실행되어서는 안 되는 전제이고 내가 또한 오류로서 간주하는 전제이다. 그리하여 두 가지 정식화들 모두는 무비판적일 따름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유사한 언급들이 많은 다른 정식화들에 대해서도 성립할 터이다. 그리하여 나의 주요 과제는, 내가 귀납에 대한 전통적인 철학적 문제라고 지칭한 것 배후에 놓여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문제를 한 번 더 정식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지금쯤 전통적이 되었을 정식화들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그 정식화들은,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비판과 지식에 대한 상식론에 미친 그 비판의 충격으로부터 출현한다.
처음에 상식적 관점, 그 다음에 흄(Hume)의 견해를 제시한 후에 전통적 정식화들에 대한 더 상세한 토론과 그 다음에 그 문제에 대한 나의 재정식화들과 해결책들로 나는 복귀하겠다.
1. 귀납의 상식적 문제
상식적 지식론은 (내가 ‘정신의 양동이 이론’으로도 이름을 붙인) ‘감각들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들지 않은 것은 우리의 지성에 없다’라는 주장의 형태로 매우 유명한 이론이다. (나는 이 견해가 처음에 파메니데스[Parmenides]에 의하여 정식화되었음을 ㅡ 풍자적 기분으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이 지닌 실수를 저지르는 감각들을 통해서 실수를 저지르는 지성이 그곳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지닌 실수를 저지르는 지성에서 아무 것도 없다 ㅡ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말로 기대들이 있고 우리는 강력하게 특정 규칙성들을 (자연법칙들, 이론들) 신뢰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귀납의 상식적 문제가 (내가 ‘Cs’로 지칭할) 생긴다:
Cs 이 기대들과 믿음들은 어떻게 출현할 수 있는가?*
상식적 답변은 이렇다: 과거에 이루어진 반복된 관찰들을 통하여. 과거에도 태양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내일 태양이 뜰 것이라고 믿는다.
상식적 견해로는, 규칙성들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자체의 기원에 책임이 있는 저 반복되는 관찰들에 의하여 정당화된다는 것이 당연시될 (문제들이 제기되지 않고) 따름이다. (기원 겸 정당화는 ㅡ 두 가지 모두가 반복에 기인한다 ㅡ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 이래 철학자들이 ‘epαgōgē’ 즉 ‘귀납’이라고 부른 것이다.)
2.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두 가지 문제들
흄(Hume)은 인간의 지식의 위상에 흥미를 가졌으며 혹은, 아마도 그가 말했을 터인 바와 같이, 우리의 믿음들 중 어떤 믿음이 ㅡ 그리고 그 믿음들 중 어느 믿음이 ㅡ 충분한 이유들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지의 문제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두 가지 문제들을 제기했다: 논리적 문제와 (H
흄(Hume)의 논리적 문제는:
H
H
흄(Hume)은 또한, H
흄(Hume) 심리학적 문제는:
H
H
3. 흄(Hume)이 얻은 결과들에 대한 중요한 결론들
이 결과들에 의하여 흄(Hume) 자신은 ㅡ 역사상 가장 합리적의 정신들 중 한 정신 ㅡ 회의론자가 되었고 동시에 신봉자가 되었다: 비합리주의적 인식론을 믿는 신봉자. 반복에는, 그 반복이 우리의 인식적 생활이나 우리의 ‘이해’을 지배할지라도, 논증으로서 여하한 힘도 없다는 그가 얻은 결과로 인하여 그는 논증이나 이성은 우리의 이해에서 단지 사소한 역할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가 지닌 ‘지식’은 믿음의 본성뿐만 아니라 합리적으로 방어될 수 없는 믿음을 지니고 ㅡ 비합리적인 신념을 지니고 ㅡ 있는 것으로서 정체가 드러난다.
그런 비합리적 결론이 귀납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으로부터는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 다음 절에서 그리고 10절에서 11절까지에서 명백해질 것을 나는 희망한다.
흄(Hume)이 내린 결론은 러셀에 의하여 1946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철학의 문제들[Problems of Philosophy]의 발간 34년 후인데 그 저서는 흄[Hume]을 언급하지 않고 귀납의 문제에 관하여 아름답도록 분명한 서술을 담고 있다)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의 흄(Hume)에 관한 장(章)에서 훨씬 더 단호하게 그리고 절박하게 서술되었다*. 러셀은 흄(Hume)이 귀납법을 취급하는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흄(Hume)의 철학은... 18-세기 합리성의 파산을 상징한다’ 그리고, ‘전적으로 혹은 주로 경험적인 철학 내부에서 흄(Hume)에 대한 어떤 답변이 있는지를 발견하는 일이 그리하여 중요하다. 만약 없다면, 온전한 정신과 정신 이상 사이에는 지성적인 차이점이 없다. 그가 삶은 계란이라고 믿는 미치광이는 그가 소수에 속한다는 근거만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러셀은 계속해서, 귀납이 (혹은 귀납의 원리) 배척된다면, ‘특수한 관찰사항들로부터 일반적인 과학적 법칙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는 오류이어서 흄(Hume)의 회의론은 경험론자에게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러셀은, H
그리고 (c) 과학적 절차들 사이의 충돌을 강조한다.
귀납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이 수용된다면 이 모든 충돌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4절 및 10절에서 12절까지에서의 나의 토론들이 밝힐 것을 나는 희망한다: 나의 비-귀납론과 합리성이나 경험론이나 과학의 절차들 사이에는 충돌이 없다.
4. 귀납의 문제에 접근하는 나의 방식
(1) 흄(Hume)의 해결책에 함축된 논리적 문제와 심리학적 문제의 구분을 나는 최고의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서 간주한다. 그러나 내가 ‘논리학’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에 대한 흄(Hume)의 견해가 만족스럽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매우 분명하게도 타당한 추론의 과정들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들을 ‘합리적인’ 정신적 과정들로서 간주한다.
대조적으로, 나의 주요 접근방식들 중 한 가지 접근방식은 논리적 문제들의 문제시될 때마다 모든 주관적이거나 심리학적인 용어들, 특히 ‘믿음’ 기타 등등을 객관적인 용어들로 변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을 말하는 대신에, 가령 나는 ‘서술’이나 ‘설명적 이론’을 말한다; 그리고 ‘인상(impression)’ 대신에, 나는 ‘관찰 서술’이나 ‘시험 서술’을 말한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정당화’ 대신에 나는 ‘이론이 참이라는 주장에 대한 정당화’ 그리고 기타 등등을 말한다.
상황을 객관적이거나 논리적이거나 ‘정식의’ 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 절차는 H
(2) 논리적 문제 H
(3) 내가 말하는 전이의 원리(principle of transference)가 흄(Hume)의 비합리주의의 제거를 보증함은 분명할 것이다: 전이의 원리(principle of transference)를 어기지 않고 H
(4) H
(5) 내가 얻은 주요 결과들 중 한 가지 결과는, 논리학으로 반복에 의한 귀납과 같은 것은 없다는 데서 흄(Hume)이 옳기 때문에 전이의 원리(principle of transference)에 의하여 심리학에서 (혹은 과학적 방법에서, 혹은 과학의 역사에서)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반복에 의한 귀납이라는 개념은 틀림없이 오류에 ㅡ 일종의 착시 ㅡ 기인한다. 요약하여: 반복에 의한 귀납과 같은 것은 없다.
5. 귀납의 논리적 문제: 재서술과 해결책
방금 언급된 것에 (앞의 4절의 요점 (2)) 따라서, 나는 흄(Hume)의 H
이것을 목적으로, 나는 흄(Hume)의 ‘우리에게 경험이 있는 사례들’이라는 표현을 ‘시험 서술들’에 ㅡ 다시 말해서, 관찰 가능한 사건들을 기술하는 단칭명제들 (‘관찰서술들’, 혹은 ‘기초서술들’) ㅡ 의하여 대체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경험이 없는 사례들’을 ‘설명적 전칭 이론들’에 의하여 대체한다.
나는 흄(Hume)의 귀납에 대한 논리적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L
*역주: 이 문장에서 원문의 표현인 the history of science는 이한구 번역본에 ‘과거의 역사’로
오역되었다.
**역주: 이 문장에서 원문의 our understanding은 이한구 번역본에 ‘나의 이해’로 번역되어 있다.
그 문제에 대한 나의 답변은 흄(Hume)의 답변과 동일하다: 아니다, 그 주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여하한 숫자의 참인 시험 서술들에 의해서도, 설명적 전칭 이론이 참이라는 주장을 정당화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두 번째 논리적 문제인 L
L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답변은 긍정이다: 그렇다, 시험 서술들의 진실성을 전제하면 때때로 우리는 설명적 전칭 이론이 거짓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귀납의 문제가 출현하는 문제 상황을 우리가 숙고한다면 이 답변은 매우 중요해진다. 설명에 관한 어떤 문제의 ㅡ 예를 들어 과학적 문제 ㅡ 해결책들로서 경쟁하는 몇 가지 설명적 이론들과 우리가 대면하는 상황을 나는 염두에 둔다; 그리고 또한 그 이론들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혹은 적어도 선택하기를 희망한다는 사실과 대면하는.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귀납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가 (훌륭한) 과학적 이론과 미친 사람의 (나쁜) 강박상태 사이에서 결정할 수 없을 터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흄(Hume)도 역시 경쟁하는 이론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서술한다] 한 사람이... 명제들을... 은은 납보다 더 잘 녹는다 혹은 수은은 금보다 더 무겁다... 개진하는데 나는 그 명제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 상황은 ㅡ 몇 가지 이론들 중에서 선택하는 문제 상황 ㅡ 귀납의 문제에 대한 세 번째 재정식화를 제안한다:
L
L
6. 논리적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에 관한 비평들**
(1) 나의 재정식화들에 따라서, 논리적인 귀납의 문제의 핵심적 쟁점은, 몇 가지 ‘주어진’ 시험 서술들과 관련된 보편법칙의 타당성이다 (진실성 혹은 허위성). ‘우리는 어떻게 시험 서술들이 지닌 진실성이나 허위성을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말해서, 관찰 가능한 사건들에 대한 단칭 기술들이 지닌 진실성이나 허위성을 우리는 어떻게 결정하는가? 라는 질문을 나는 제기하지 않는다. 후자(後者) 질문은 귀납의 문제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제안하는데 왜냐하면 흄(Hume)의 질문이 우리가 경험된 ‘사례들’로부터 경험되지 않은 ‘사례들’로 추론하는 데서 정당화되는 지이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앞선 흄(Hume)이나 그 주제에 관한 저술가 누구도 여기서 다음과 같은 더 발전된 질문들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경험된 사례들’을 당연시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사례들은 실제로 이론들에 앞서는가? 이 더 발전된 질문들이 내가 나의 귀납의 문제의 대한 해결책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서 도달한 문제들 중 몇 가지 문제들일지라도, 그 질문들은 원래 문제를 넘어선다. (귀납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 중일 때 철학자들이 찾고 있던 종류의 것을 우리가 고려하면 이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단칭명제들로부터 보편법칙들을 도출하는 것을 허용하는 ‘귀납의 원리’가 발견될 수 있을 터이고 진리에 대한 그 원리의 주장이 옹호된다면, 귀납의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서 간주될 터이다.***)
(2) L
(3) L
이 견해는 지금쯤 상당히 대중화되었지만,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 견해는 예를 들어, 길버트 라일(Gilbert Ryle)교수에 의한 1937년의 그렇지 않다면 탁월한 기고문에서 명시적으로 논쟁되었다*. 라일(Ryle)은, ‘과학의 모든 전칭명제들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36쪽); 그리고 그는 ‘가설’이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내가 항상 사용했던 그리고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미로 사용한다: ‘참이라고 추측될 따름인 명제...’로서 (전게서). 그는 나의 주장과 같은 주장에 반대해서 주장한다: ‘우리는 법칙 명제에 대하여 흔히 확신하고 확신함에서 보장을 받는다’ (38쪽). 그리고 그는, 몇 가지 전칭명제들을 ‘확립된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가설들”이 아니라 “법칙들”로 지칭된다.’
라일(Ryle)의 견해들 중 이 견해는 정말로, 내가 탐구의 논리(L.d.F.)를 저술할 때 거의 ‘확립된’ 기준이었고 지금도 전혀 죽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때문에 나는 먼저 그 견해에 반대했다: 뉴튼의 이론처럼 잘 ‘확립된’ 이론이 없었고 그런 이론이 어느 때고 나타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아인슈타인 이론의 위상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 그 이론은 틀림없이 우리가 뉴튼의 이론을 ‘단지’ 가설이나 추측으로서 바라보라고 가르쳤다.
두 번째 그런 경우는 1931년에 일어난 유리(Urey)의 중수소(Deuterium)와 중수(heavy water)의 발견이었다. 당시, 물과 수소와 산소는 화학에 제일 잘 알려진 물질들이었고 수소와 산소의 원자량들은 모든 화학적 측정의 바로 그 기준들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모든 화학자가 적어도 1910년의 소디(Soddy)의 동위원소 추측 이전에 그리고 사실상 그 후 오랫동안 완벽하게 확신했을 터인 진리에 관한 이론이 있었다. 그러나 유리(Urey)에 의하여 반증이 발견된 (그리하여 보어[Bohr]의 이론이 입증된*) 것은 여기였다.
이로 인하여 나는 다른 ‘확립된 법칙들’을 그리고 특히 귀납론자들의 세 가지 기준 사례들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하게 되었다:
(a) 태양은 24시간 (혹은 개략적으로 9만 번의 맥박) 동안에 한번 뜨고 질
것이다,
(b) 모든 사람은 죽는다,
(c) 빵은 영양을 공급한다.
세 가지 경우들 모두에서 이 확립된 법칙들은 그 법칙들이 원래 의미되었던 의미에서 실제로 반증된 것을 나는 발견했다.
(a) 첫 번째 경우는, 마르세유의 피티아스(Pytheas of Marseilles)가 ‘얼어붙은 바다와 자정의 태양’을 발견했을 때 반증되었다. (a)에는 ‘당신이 어디를 가든 태양은 24시간 동안 한 번 뜨고 질 것이다’를 의미할 의도가 있다는 사실은, 그의 보고가 부딪쳤던 완벽한 불신에 의하여 그리고 그의 보고가 모든 여행가들이 하던 이야기들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가 되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밝혀진다.
(b) 두 번째 경우는 ㅡ 혹은 더 정확하게, 그 경우가 근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ㅡ 역시 반증되었다. ‘죽는(mortal)’이라는 술어는 그리스어로부터의 잘못된 번역이다: thnētos는 단순히 ‘죽는’이라기보다는 ‘죽게 되어 있는’ 혹은 ‘죽기 쉬운’을 의미하고, (b)는 그 길이가 생명체의 본질의 한 부분일지라도 우연적인 상황들에 따라서 다소 변할 기간 이후에 생성된 모든 생명체는 죽게 되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세포분열에 의한 증식이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박테리아들은 죽게 되어 있지 않다는 발견에 의하여 그리고 나중에 살아 있는 물질은 모든 형태들이 충분히 급격한 수단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수 있게 보일지라도 일반적으로 부패하여 죽게 되어 있지 않다는 깨달음에 의하여 반증되었다. (예를 들어 암세포들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
(c) 세 번째 경우는 ㅡ 흄(Hume)이 가장 선호하는 것 ㅡ 그다지 오래 전이 아니고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파멸적인 경우로 발생한 바와 같이, 일상적으로 빵을 먹은 사람들이 맥각중독(麥角中毒: ergotism)으로 사망했을 때 반증되었다. 물론 (c)는 원래, 오래-확립된 관행에 따라서 심어지고 수확된 밀이나 옥수수로부터 합당하게 준비된 가루로부터 합당하게 구워진 빵은 사람들에게 독을 주기보다는 영양을 공급할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독에 의하여 죽었다.
그리하여 H
나는,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699쪽에서의 인용구를 그렇게 잘 예시하는 것을 이전에 본 적이 없는데 그 인용구를 나는 현재의 토론을 위한 좌우명으로서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납’이 ㅡ H
이 이야기에 관하여 누가 도덕화하기를 원할 터라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터이다: 특히 논리학을 부수적으로 언급하는 문제들에서 비판적인 이성은 열정보다 낫다. 그러나 약간의 열정이 없으면 아무 것도 이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나는 전적으로 인정하겠다.
(4) L
(5) L
(6) 귀납의 문제에 관한 나의 첫 번째 논문에서 내가 강조한 바와 같이 매우 중요하게도, L
(7) 유사하게, 나의 해결책과 과학의 방법들 사이에는 충돌이 없다; 반대로, 나의 해결책에 의하여 우리는 비판적 방법론의 기본적 사실들에 다다른다.
(8) 나의 해결책이 심리학적 귀납의 문제를 많이 설명할 뿐만 아니라 (아래 11절 참조), 귀납의 문제에 대한 전통적 정식화들과 이 정식화들이 지닌 취약점에 대한 이유를 또한 해명하기도 한다***.
(9) 나의 정식화들 및 L
연역적 논리학의 범위에 속한다. 내가 밝히는 것은, 흄(Hume)의 문제를 일반화하면서 우리가 그 문제에 L
7. 이론들에 대한 선호와 진리 탐색
L
이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을 것이다. 행동하는 실용적인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이론가의 ㅡ 진리 탐구자, 그리고 특히 참인 설명적 이론들 탐구자 ㅡ 관점을 구별하겠다; 다시 말해서, 이론적 선호와 실용적 선호를 나는 구별하겠다. 이 절과 다음 절에서 나는 이론적 선호와 진리 추구에만 관심을 갖겠다. 실용적 선호와 ‘신뢰가능성’의 문제는 다음 절에서 한 번만 토론될 것이다.
이론가는 본질적으로 진리에, 그리고 특히 참인 이론들을 발견하는 데 흥미를 갖는다고 나는 전제하겠다. 그러나 그가, 과학적 이론은 참이라는 주장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ㅡ 다시 말해서, 시험 서술들에 의하여 ㅡ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우리는 항상 기껏해야 다른 추측들보다 몇 가지 추측들을 잠정적으로 선호하는 문제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할 때 그는 참인 이론들을 찾는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다음 질문들을 고려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선호의 원칙들을 채택해야 하는가? 몇몇 이론들은 다른 이론들보다 ‘더 나은가’?
이 질문들로 인하여 다음 고찰들이 생겨난다.
(1) 선호에 관한 문제는, 주로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오직 몇 가지 경쟁하는 이론들과 관련해서 출현할 것임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문제들에 대하여 해결책들로서 제시된 이론들. (아래 요점 (8) 또한 참조.)
(2) 진리에 흥미를 갖는 이론가는 허위성에도 또한 흥미를 가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서술이 허위라는 발견은 그 서술의 부정이 참이라는 발견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론에 대한 반증은 항상 이론적으로 흥미로울 것이다. 그러나 설명적 이론에 대한 부정은 반대로 설명적 이론이 아니다 (또한 그 부정은 자체가 도출되는 시험 서술이 지닌 ‘경험적 특징’을 통상적으로 지니지도 않는다). 그 부정이 흥미로울지라도, 그 부정은 참인 설명적 이론들을 발견하려는 이론가의 흥미를 만족시키지는 않는다.
(3) 이론가가 이 흥미를 추구한다면, 이론적으로 흥미로운 정보를 주는 것과 별도로 이론이 붕괴하는 곳을 발견함으로 인하여 새로운 설명적 이론에 관한 중요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새로운 이론은 자체가 반증한 선행 이론이 성공했던 곳에서 성공해야할 뿐만 아니라 자체의 선행 이론이 실패한 곳에서도 성공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행 이론이 반증된 곳에서. 새로운 이론이 두 가지 모두에서 성공한다면, 그 이론은 여하튼 옛 이론보다 더 성공적이고 그리하여 ‘더 나을’ 것이다.
(4) 게다가, 이 새로운 이론이 시간 t에서 한 가지 새로운 시험에 의하여 반증되지 않는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그 이론은 여하튼 시간 t에서 반증된 이론보다 아직 또 다른 의미에서 ‘더 나을’ 것이다.* 이유인즉 그 이론은 반증된 이론이 설명했던 모든 것을 설명할 것일 뿐만 아니라 더 많게는 그 이론은 또한 아마도 참으로서 간주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시간 t에서 그 이론은 허위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가는 그런 새로운 이론을 귀중하게 여길 것인데 그 이론의 성공과 그 이론이 아마도 참인 이론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그 이론이 혹시 허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이론은 추가 시험들의 대상으로서 흥미롭다; 다시 말해서, 성공한다면 한 가지 이론에 대한 새로운 부정을 확립할 뿐만 아니라 그 부정으로써 다음 이론에 대한 한 가지 새로운 이론적 문제를 확립하는 새로운 시도된 반증들의 대상으로서.
우리는 요점 (1)에서 (5)까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론가는 몇 가지 이유들 때문에 반증되지 않은 이론들에 흥미를 가질 것인데 특히 그 이론들 중 몇 가지 이론들이 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증되지 않은 이론이 반증된 이론의 성공들과 실패들을 설명한다면 이론가는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Moreover, assuming that this new theory is not refuted at the time t by a new test, it will, at any rate at the time t, be ‘better’ in yet another sense than the refuted theory인데 assuming으로 시작되는 분사구문의 주어가 a new theory를 의미하는 it이 될 수 없으므로 분사구문으로 쓸 수 없고 독립된 주어를 갖는 종속절로 표현해야 한다.
반증된 이론보다 반증되지 않은 이론을 선호할 것이다.
(6) 그러나 새로운 이론도, 모든 반증되지 않은 이론들처럼, 허위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론가는 몇 가지 반증되지 않을 경쟁하는 이론들의 집합 가운데서 허위인 이론을 탐지하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는 허위인 이론을 ‘잡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주어진 반증되지 않은 이론과 관련하여 그 이론이 허위라면 그 이론이 실패한 것 같은 경우들이나 상황들을 생각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론가는 엄중한 시험들과 결정적인 시험 환경들을 구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은 오류로 판정하는 법칙의 구축에 해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마도 매우 낮은 수준의 보편성을 띠어서 시험될 이론의 성공들을 설명할 수 없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실험을 시사할 법칙: 자체의 결과에 따라서 시험될 이론이나 오류로 판정하는 이론을 반증할 실험,
(7) 이 제거의 방식에 의하여, 우리는 참인 이론을 우연히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 방식은 비록 그 이론이 참이라할지라도 그 이론의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 이유인즉 아마도 참인 이론들의 숫자가 어느 때도 그리고 여하한 숫자의 결정적인 시험들 이후에도 무한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것은 흄[Hume]이 얻은 부정적 결과를 서술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실제로 제시된 이론들은 물론 숫자로 유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론들 모두를 우리가 반증하여 새로운 이론을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다.
다른 한편으로, 실제로 제시된 이론들 가운데는 시간 t에 반증되지 않은 한 가지 이상의 이론이 있어서 우리는 이것들 중 어느 것을 우리가 선호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 t에서 다수의 이론들이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경쟁한다면, 이론가는 그 이론들 사이에서 어떻게 결정적인 실험들이 고안될 수 있는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경쟁하는 이론들 중 몇 가지 이론들을 오류로 판정해서 제거할 수 있을 터인 실험들.
(8) 기술된 절차로 인하여, 그 이론 각각이 다른 이론들과 공유하지 않는 몇 가지 문제들에 추가적으로 해결책들을 제시할지라도, 몇 가지 이론들이 적어도 몇 가지 공통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경쟁하고’ 있는 몇 가지 이론들이 생길 것이다. 이유인즉 새로운 이론에게 그 새로운 이론이 자체의 선행 이론이 해결한 저 문제들과 동시에 선행 이론이 해결하지 못한 저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우리가 요구할지라도, 두 가지 이상의 경쟁하는 새로운 이론들이 제시되어 그 이론들 각각이 이 요구들을 충족시키고 추가하여 다른 이론들이 해결하지 않는 몇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이 물론 항상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9) 여하한 시간 t에서, 이론가는 경쟁하는 이론들 중에서 가장 잘 시험될 수 있는 이론을 새로운 시험들에 부치기 위하여 그 이론을 발견하는 데 특별히 흥미를 가질 것이다. 이것이 동시에 가장 큰 정보내용 및 가장 큰 설명적 능력과 같은 것임을 나는 밝혔다. 그 이론은 새로운 시험들에 부쳐질 큰 가치를 지닌 이론일, 축약해서 시간 t에서 경쟁하는 이론들 중 ‘최고의 이론’일 것이다. 그 이론이 자체에 대한 시험들에서 살아남는다면, 그 이론의 선행 이론들 모두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고찰된 모든 이론들 중에서 그 이론은 또한 최고로 시험된 이론일 것이다.
(10) ‘최고의’ 이론에 관하여 방금 언급된 것에서, 훌륭한 이론은 임시방편적이 아니라는 것이 전제된다. 임시방편적임이라는 개념과 아마도 ‘대담함(boldness)’로 지칭될 그 개념의 반대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임시방편적 설명들은,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없는 설명들이다; 다시 말해서, 설명될 결과와 독립적으로. 그 설명들은 요구만 하면 얻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이론적으로 흥미롭지 못하다*. 나는 다양한 장소들에서 시험들의 독립성 등급들이라는 문제를 토론했다; 그 문제는 흥미롭고 단순성과 깊이라는 문제들과 연관된다. 그 후 나는, 그 문제를 우리가 해결에 몰두하고 있는 설명의 문제와 그리고 토론 중인 문제 상황들과 관련시키거나 상대화시킬 필요를 강조하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이 모든 개념들이 경쟁하는 이론들이 지닌 ‘훌륭함’의 등급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론이 지닌 대담함의 등급은 선행 이론들에 대한 자체의 관계에 또한 의존한다.
흥미로운 요점은, 내가 생각하기에, 대담성이나 비-임시방편적인의 등급들에 대하여 내가 객관적인 기준을 제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이론은 비록 옛 이론이 설명한 것을 설명해야할지라도, 옛 이론을 수정하여 실제로 옛 이론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새 이론은 옛 이론을 담고 있지만 단지 근사치로서일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뉴튼의 이론이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이론을 부정한다는 것을 ㅡ 뉴튼의 이론이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이론들을 포함한다는 사실 때문에, 뉴튼의 이론이 두 가지 이론들을 설명할지라도 ㅡ 지적했다; 그리고 유사하게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튼의 이론을 부정하는데 동일하게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튼의 이론을 설명하며 근사치로서 포함한다.
(11) 기술된 방법은 비판적 방법으로 지칭될 것이다. 그 방법은, 시행과 오류들 제거의, 이론들을 제시해서 우리가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엄중한 시험들에 부치는 방법이다. 몇 가지 제한적인 전제들 때문에 한정된 숫자의 경쟁하는 이론들만 가능한 것으로서 간주된다면, 이 방법으로 인하여 우리는 참인 이론의 경쟁 이론들을 제거함에 의하여 그 참인 이론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정상적으로 ㅡ 다시 말해서, 가능한 이론들의 숫자가 무한정인 모든 경우들에서 ㅡ 이 방법은 이론들 중 어느 이론이 참인지를 발견할 수 없다; 또한 다른 방법도 그렇다. 그 방법은 비결정적일지라도 적용 가능한 상태로 남는다.
(12) 허위 이론들에 대한 반증을 통한 문제들을 풍요롭게 함과 (3)에서 정식화된 요건들로 인하여, 모든 새로운 이론의 선행 이론에는 ㅡ 새로운 이론의 관점에서 ㅡ 이 새로운 이론을 향한 근사치의 특징이 있을 것임이 확인된다. 물론 오류로 판정된 모든 이론에 대하여 우리가 ‘더 나은’ 후속 이론이나 더 나은 근사치를 ㅡ 이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후속 이론이나 근사치 ㅡ 발견할 것이라고 보장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더 나은 이론들을 향하여 진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13) 여기서 두 가지 추가 요점들이 첨부될 것이다. 한 가지 요점은, 지금까지 언급된 것은 말하자면 순전히 연역적인 논리에 ㅡ그 내부에서 L
나머지 한 가지 요점은, 이 규칙들이 합리적인 토론이라는 일반적 목표에 종속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라는 점인데 그 목표는 진리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8. 입증(Corroboration): 비개연성의 장점들
(1) 나의 선호 이론은 ‘더 개연적인 가설’에 대한 선호와 관계가 없다. 반대로, 이론에 대한 시험가능성은 자체가 지닌 정보 내용에 비례하여 그리하여 자체가 지닌 비개연성에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비례하여 증가하고 감소한다는 것을 나는 밝혔다. 그리하여 ‘더 나은’ 혹은 ‘선호될 수 있는’ 가설이란 흔히 더 비개연적인 가설일 것이다. (그러나 존[John] G. 하사니[Harsanyi]가 말하는 바와 같이 내가 ‘과학적 가설들의 선택에 대하여 비개연성 기준’을 제안한 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이다; 나에게는 일반적 ‘기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논리적으로 ‘더 낫거’나 더 비개연적인 가설을 선호할 수 없는 일이 매우 자주 발생하는데 왜냐하면 누군가가 그 가설을 실험적으로 반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물론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비정상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었지만 나의 주요 논증들은 매우 단순하여 (내용 = 비개연성) 최근에는 그 논증들이 심지어 카르납(Carnap)처럼 귀납론을 그리고 귀납의 확률론적 이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용되었다.
(2) 나는 원래 입증(corroboration)이나 ‘입증의 등급(degree of corroboration)’이라는 개념을, 모든 확률론적 선호 이론은 (그리하여 모든 확률론적 귀납 이론) 터무니없다는 것을 밝힐 목적으로써 도입하였다.
이론이 지닌 입증 등급에 의하여 나는, 이론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상태를 (특정 시간 t에서) 평가하는 축약된 보고서를 의미하는데 그 이론이 자체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등급과 관련해서이다; 이론이 지닌 시험가능성의 등급; 이론이 통과한 시험들의 엄격성; 그리고 이론이 이 시험들을 견디어낸 등급. 입증(corroboration)은 (혹은 입증의 등급[degree of corroboration]) 그리하여 과거의 실적을 평가하는 보고서이다. 선호처럼, 입증은 본질적으로 비교적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시간 t까지 시험하기를 포함하는 비판적 토론에 비추어, 이론 A가 경쟁하는 이론 B보다 더 높은 (혹은 더 낮은) 입증 등급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과거의 실적에 대한 보고서일 따름이기 때문에, 다른 이론들에 대한 몇 가지 이론들의 선호를 야기할 상황과 그 보고서는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보고서는 미래의 실적에 관하여 혹은 이론의 ‘신뢰가능성’에 관하여 여하한 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어떤 사람이 어떤 매우 특별한 경우들에서 입증 등급에 대한 나의 혹은 다른 사람의 공식들에게 숫자적 해석이 주어질 수 있음을 밝히는 데 성공한다면,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을 터이다*.)
내가 입증의 등급에 대한 정의들(定義들: definitions)로서 제시한 공식들의 주요 목적은, 많은 경우들에서, 더 비개연적인 (확률 계산의 의미에서 더 비개연적인) 가설이 선호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그리고 어떤 경우들에서 이것이 성립하고 어떤 경우들에서 이것이 성립하지 않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선호가능성은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확률일 수가 없음을 밝힐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선호될 수 있는 이론을 더 ‘개연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단어들에 의하여 오해하지 않는다면 단어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약하면: 두 가지 경쟁하는 이론들은 A와 B에 대하여, 시간 t에서의 비판적 토론의 상태 및 그 토론에서 이용될 수 있는 경험적 증거에 (시험 서술들) 비추어 이론 B보다 이론 A가 선호될 수 있다거나 더 잘 입증된다고 우리는 때때로 말할 수 있다.
분명히 시간 t에서의 입증 등급은 (시간 t에서의 선호가능성에 관한 서술인) 미래에 관해서는 ㅡ 예를 들어, t보다 나중 시간에서의 입증 등급에 관해서는 ㅡ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 입증 등급은, 경쟁하는 이론들에 대한 논리적 및 경험적 선호가능성에 관한 시간 t에서의 토론 상태에 관한 보고서일 따름이다.
(3)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다음 글귀가, 내가 입증을 이론의 미래 실적에 대한 지표로서 사용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ㅡ 아니면 더 정확하게, 잘못 해석되었기 ㅡ 때문에 나는 이것을 강조해야 한다*: ‘가설이 지닌 “확률”을 토론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 가설이 어떤 시험들을, 어떤 시련들을 견디어냈는지 평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험들을 견디어냄에 의하여 가설이 자체가 지닌 생존 적합성을 얼마만큼 증명할 수 있었는지를 평가하려고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가설이 얼마만큼 “입증”되었는지를 평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체의 생존 적합성을 증명하다’라는 표현이 내가 여기서 미래의 생존 적합성을, 미래의 시험들을 견디는 적합성을 말할 의도였음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를 오해하도록 만들었다면 나는 미안하지만, 다윈적 은유를 혼합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과거에 살아남았던 종(種)이 그리하여 미래에 살아남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어떤 기간 t 동안 살아남기에 실패한 적이 있는 모든 종들(種들)은 저 시간 t까지 생존했다. 다윈적 생존이 어떤 정도로든 지금까지 생존한 모든 종(種)이 계속해서 생존할 것이라는 기대를 포함한다고 시사함은 터무니없을 터이다. (우리 자신의 종[種]의 생존 기대가 매우 높다고 누가 말할 터인가?)
(4) 이론 T에 속하거나 그 이론으로부터 논리적으로 귀결되지만 이론 T보다 논리적으로 훨씬 더 취약한 서술 s의 입증 등급에 관하여 여기서 한 가지 요점을 추가하는 것이 아마도 유용할 것이다.
그런 서술 s에는 이론 T보다 적은 정보성 내용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s 그리고 s로부터 귀결되는 모든 서술들의 연역적 이론체계 S가 T보다 덜 시험될 수 있어서 덜 입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T가 잘 시험되었다면, s가 T의 한 부분으로서나 T와 관련해서 자체가 단독으로 도달할 수 있는 높은 입증 등급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터일지라도, T의 높은 입증 등급이 T에 의하여 함유되는 모든 서술들과 그리하여 s 및 S에게 적용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이 규칙은, 입증의 등급이 진리와 관련한 선호를 서술하는 수단이라는 단순한 고찰에 의하여 뒷받침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T를 진리에 대한 자체의 주장과 관련하여 선호한다면, 우리는 T와 동시에 T의 모든 결론들을 선호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T가 참이라면 T의 모든 결론들이 개별적으로 덜 잘 시험될 수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결론들이 틀림없이 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뉴튼 이론에 대한 입증으로써 그리고 자전하는 행성으로서의 지구에 대한 기술로써 ‘로마에서 24시간마다 태양이 한번 떠오른다’라는 서술 s의 입증 등급은 크게 증가했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유인즉 독자적으로 s는 매우 잘 시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튼의 이론 그리고 지구 자전 이론은 잘 시험될 수 있다. 그래서 이것들이 참이라면, s 또한 참일 것이다.
잘-시험된 이론 T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서술 s에는, 그 서술이 T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는 한, T의 입증 등급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s가 T로부터가 아니라 두 가지 이론들인 가령 T
(5) 나의 접근방식과, 내가 오래전에 ‘귀납론적’이라는 꼬리표를 도입한 접근방식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귀납주의자가 ‘긍정적 사례들’을 강조하고** 그 사례들로부터 귀납주의자는 ‘비-증명성 추론들’을 도출하고 그 사례들이 이 추론들의 결론들이 지닌 ‘신뢰가능성’을 보증할 것이라고 귀납주의자가 희망하는 반면 나는 부정적 사례들이나 반증 사례들, 반박들 그리고 시도된 반박들을 ㅡ 요컨대, 비판 ㅡ 강조하는 것이다. 나의 견해로, 우리의 과학적 지식에서 아마도 ‘긍정적’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특정 이론들이 시간의 특정 순간에 경험적 시험들을 포함한 시도된 반박들로 구성되는 우리의 비판적 토론에 비추어 다른 이론들보다 선호되는 한에서만 긍정적이다. 그리하여 심지어 ‘긍정적’으로 지칭될 것도 부정적 방법들에 관해서만 그러하다.
이 부정적 접근방식은 많은 요점들을, 예를 들어 법칙의 ‘긍정적 사례’나 ‘뒷받침하는 사례’인 것을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데서 부딪히는 난제들을 설명한다.
9. 실용적 선호
지금까지 나는 이론가의 선호가 ㅡ 이론가에게 그 선호가 있다면* ㅡ ‘더 나은’, 다시 말해서, 더 시험될 수 있는 이론에 대한 그리고 더 잘 시험되는 이론에 대한 것일 이유를 토론했다. 물론 이론가에게는 여하한 선호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론가는 문제들 H
그리하여 순수한 이론가에게는 자신에게 개방된 한 가지 이상의 행동 방식이 있다; 그리고 불가피한 불확실성과 모든 우리의 노력들이 미완성에서 이론가의 낙담을 그의 호기심이 능가한다는 조건으로만 그는 시행 및 오류제거라는 방법과 같은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실제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으로서의 그에게 상황은 다르다**. 이유인즉 심지어 행동하지 않음도 일종의 행동이기에 실제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몇 가지 다소 확정된 대안들 사이에서 항상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행동은 몇 가지 기대들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관한 몇 가지 이론들. 행동하는 사람은 어느 이론을 선택할까? 합리적 선택과 같은 것이 있는가?
이로 인하여 우리는 실용적인 귀납의 문제에 다다른다:
Pr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if he has any로 any는 이론가의 선호를 대신하는 대명사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론’으로 번역되어 있다.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different with him qua man of practical action으로 It은 여기서 일반적인 상황을 의미하는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것은 실천적 행동인으로서 그에게는 힘든 일이다’로 번역되었다.
Pr
Pr
Pr
다시 말해서, ‘절대적 의존’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최고로-시험된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알려진 그 단어의 가장 명백한 의미에서 ‘합리적’일 것이다: 최고로-시험된 이론은, 우리의 비판적 토론에 비추어 지금까지 최고인 것으로 보이는 이론이고, 나는 잘-수행된 비판적 토론보다 더 ‘합리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
물론 최고로-시험된 이론을 행동의 토대로서 선택하는 데서 의존한다는 단어의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그 이론에 ‘의존한다.’ 그리하여 그 이론은, 이 용어의 어떤 의미에서 이용 가능한 가장 신뢰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심지어 기술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 이론이 ‘신뢰될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이론은, 심지어 실제적 행동에서 적어도 우리의 기대들에 뭔가 잘못될 것이라는 가능성을 우리가 예견하는 것이 항상 현명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신뢰될 수’ 있지 않다.
그러나 L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From a rational point of view, we should not ‘rely’ on any theory,
for no theory has been shown to be true, or can be shown to be tru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합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어떤 이론에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이론도 참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로 해석되어 있다.
될 일이 완전히 가능하다. 이것은 오늘날 틀림없이 어떤 사람에게도 명백하다;
그러나 나는 히로시마 이전에 그렇게 말했다: 국지적, 부분적, 혹은 총체적 대참사에 대한 무한히 많은 가능성들이 있다.
그러나 실용적 관점에서 이 가능성들의 대부분은 분명히 고민할 가치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가능성들에 관하여 우리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들은 행동의 영역을 넘어선다. (물론 나는, 우리들 대부분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생각할지라도, 우리들 대부분이 신의 행위에 관해서보다 핵전쟁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만 인간 행동의 영역을 넘어서는 저 대참사들에 핵전쟁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물리 및 생물 이론들이 참이라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을 터이라도, 성립할 터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심지어 그 이론들 중 최고의 이론도 의심할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물론, 대참사의 무한한 가능성들에다 추가적 무한성들이 덧붙여진다.
흄(Hume)과 내 자신의 부정적 답변을 그렇게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종류의 고찰이다. 이유인즉 우리의 지식 이론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증명하지 않도록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이유를 우리가 이제 매우 명백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어떤 지식 이론도 사물들을 설명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에서 우리가 성공적인 이유를 설명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공했다고 ㅡ 우리의 물리 이론이 참이라고 ㅡ 우리가 전제할지라도, 우리의 우주론으로부터 우리는 이 성공이 얼마나 무한히 비개연적인지를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우리의 이론들은 이 세계가 거의 완벽하게 비어있다고 그리고 빈 공간은 혼란스러운 광선으로 채워져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비어있지 않은 거의 모든 장소들은 혼란스러운 먼지에 의하여 아니면 가스들에 의하여 아니면 매우 뜨거운 별들에 의하여 ㅡ 이 모든 것들은 국지적으로 물리적 지식을 얻은 방법의 적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듯이 보이는 상태들에 놓여있다 ㅡ 점령되어 있다.
요컨대, 가능하고 실제적인 세계들인 많은 세계들이 있는데 그 안에서 지식에 대한 그리고 규칙성들에 대한 탐구는 실패할 터이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과학들로부터 실제로 알고 있는 바로서의 세계에서, 생명체와 지식의 탐구가 출현할 ㅡ 그리고 성공할* ㅡ 수 있을 터인 조건들의 발생은 거의 무한하게 비개연적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런 조건들이 어느 때고 나타난다면 우주론적으로 말해서 매우 짧은 시간 이후에 그 조건들은 다시 사라지기 마련일 터이다.
10. 흄(Hume)의 심리학적 귀납 문제에 대한 나의 재서술의 배경
역사적으로, 논리적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에 앞서서 흄(Hume)의 심리학적 귀납의 문제에 대한 나의 새로운** 해결책을 나는 발견했다: 내가 최초로 귀납은 ㅡ 반복에 의한 믿음의 형성 ㅡ 허위 개념이라는 것을 주목한 것은 여기서 이었다. 내가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규칙성에 대한 욕구를 ㅡ 동물들과 아이들과 어른들이 탐구하도록 만드는 욕구 ㅡ 주목한 것은 처음에는 동물들과 아이들에게서 이었지만 나중에는 어른들에게서도 이었다; 심지어 규칙성이 없는 곳에서도 때때로 그들이 규칙성들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욕구; 그들이 자기들의 기대들에 독단적으로 매달리도록 만드는 욕구; 그리고 특정 전제된 규칙성들이 붕괴하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그들을 절망으로 그리고 광기 직전까지 몰아갈 욕구. 우리의 지성은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에 부과한다고 칸트가 말했을 때,*** 그는 ㅡ 우리의 지성은 시도를 하면서 얼마나 자주 실패하는지를 그가 주목하지 못했다는 것을 제외하고 ㅡ 옳았다: 우리가 부과하려고 시도하는 규칙성들은 심리학적으로 선험적이지만 칸트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그 규칙성들이 선험적으로 타당하다고 우리가 전제할 최소한의 이유도 없다. 우리의 환경에 그런 규칙성들을 부과하려고 시도하려는 욕구는 분명히 선천적이고
*역주: 이 부분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어 있다.
**역주: ‘새로운’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어 있다.
***역주: 이 절의 원문은 When Kant said that our intellect imposes its laws upon natur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칸트가 우리의 지성은 자연의 법칙을 부과한다고 말했을 때’로 번역되어 있다.
충동들이나 본능들에 근거한다. 우리의 기대들에 부합하는 세계를 요구하는 일반적인 욕구가 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특수한 욕구들, 예를 들어 규칙적인 사회적 반응에 대한 욕구나 기술적 (혹은 다른) 서술들에 대한 규칙들을 지닌 언어의 배움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이로 인하여 나는 먼저, 기대들이 반복 없이 혹은 반복에 앞서서 발생할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나중에 반복이 유사성을 전제하고 유사성은 관점을 ㅡ 이론이나 기대 ㅡ 전제하기 때문에 기대들은 다른 경우들에는 발생할 수 없음을 밝히는 논리적 분석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나는, 논리적 이유들 때문에 믿음들의 형성에 관한 흄(Hume)의 귀납적 이론이 도저히 참일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이로 인하여 나는, 논리적 고찰들이 심리학적 고찰들로 이전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나는 나아가, 완전히 일반적으로 논리에서 성립하는 것은 심리학에서도 또한 성립한다는 ㅡ 그것이 합당하게 이전 된다면 ㅡ 자기 발견 학습적 추측에 도달했다. (이 자기 발견 학습적 원리는, 내가 지금 ‘이전의 원리’로 지칭하는 것이다.) 내가 심리학을 버리고 발견의 논리로 선회한 것은 주로 이 결과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과 완전히 별개로, 심리학은 생물학적 학문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특히 지식 습득에 대한 어떤 심리학적 이론도 그렇게 간주되어야 한다고 나는 느꼈다.
이제 우리가 L
이로 인하여 나는 다음 정식화에 도달했다: 아인슈타인과 아메바 사이의 주요 차이점은 (제닝스[Jennings]에 의하여 기술된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은 의식적으로 오류 제거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들을 죽이려고 노력한다: 이 이유 때문에 모호하게라기보다는 예리하게 자신이 정식화하려고 노력하는 자신의 이론들에 그는 의식적으로 비판적이다. 그러나 아메바는 자신의 기대들이나 가설들과 대면하여 비판적일 리가 없다. 아메바는 자체의 가설을 대면할 수 없기 때문에 비판적일 리가 없다: 그 가설들은 아메바의 한 부분이다. (객관적인 지식만이 비판될 수 있다: 주관적인 지식은 객관적이 될 때만 비판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주관적인 지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말할 때 객관적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지식을 서술하거나 그 지식을 인쇄할 때 훨씬 더 그렇게 된다.)
시행과 오류-제거라는 방법이 주로 타고난 본능들에 근거한다는 것을 분명하다. 그리고 이 본능들 중 몇 가지 본능들은 몇몇 철학자들에 의하여 ‘믿음’으로 지칭되는 저 모호한 현상과 연관된다는 분명하다.
내가 믿음 철학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자존심을 가지곤 했다: 나는 주로 개념들에, 이론들에 흥미를 지니고 있어서 누군가가 개념들이나 이론들을 ‘신뢰하는’지 아닌지는 비교적 중요하지 않음을 나는 발견한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철학자들의 흥미는, 내가 ‘귀납론’이라고 지칭하는 저 그릇된 철학으로부터 귀결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철학자들은 지식에 관한 이론가들이며 주관적 경험들로부터 시작하여 객관적 지식과 주관적 지식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지식이 한 가지 종(種)인 속(屬: genus)로서의 믿음을 (특수한 차이점을 제공하는 명징성과 특색이나, 혹은 활기[vivacity]나 ‘충분한 이유’와 같은 ‘정당화’나 혹시 ‘진리의 기준’**) 신뢰하게 된다.
이것이, E. M. 포스터(Forster)처럼, 내가 믿음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믿음에 관하여 경계하는*** 데 대한 다른 이유들과 더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기대들’이라고 지칭될 몇 가지 심리학적 상태들이 있다는 것과, 막 산책에 데려가질 개(dog)의 활기찬 기대들로부터 한 어린 학생이 자신이 충분히 오래 살기만 한다면 어느 날 자신은 노인이 될 것임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믿지 않는 어린 학생이 지닌 거의 존재하지 않는 기대까지 기대들의 등급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단어가 철학자들에 의하여 이런 의미로 심리학적 상태들을 기술하는 데 이용되는지는 의심스럽다. 철학자들은 순간적인 상태들이 아니라, 우리들이 지닌 기대들의 한계를 구성하는 저 셀 수 없이 많은 무의식적 기대들을 포함하여 ‘고정된(settled)’ 믿음들로 지칭될 것을 의미하는 데 그 단어를 더 흔히 사용하는 듯이 보인다. 이것들로부터 정식화된 가설들까지와 그리하여 또한 ‘나는 ...임을 믿는다’라는 형태의 서술들까지는 거리가 멀다.
이제 거의 모든 그런 정식화된 서술들은 비판적으로 고찰될 수 있다; 그리고 비판적 고찰로부터 귀결되는 심리학적 상태들은 내가 보기에 정말로 무의식적 기대들과 매우 다르다. 그리하여 심지어 ‘고정된(settled)’ 믿음도 정식화될 때 그리고 다시 정식화된 후에 변한다. 그 믿음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결과가 ‘수용’이라면 그 결과는, 우리의 의심들과 양심들을 억누르려고 하는 저 광신적 수용으로부터 순간적으로 통지를 받으면 다시 고찰하여 수정할 준비가 된 그리고 심지어 반론들을 능동적으로 찾는 것과 연관된 잠정적 수용까지 분포한다.*
다양한 ‘믿음들’의 사이의 그런 구분들이 내 자신의 객관적 지식론에 대하여 흥미롭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구분들은, 심리학적 귀납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ㅡ 나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ㅡ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흥미롭다.
11. 심리학적 귀납의 문제의 재서술
방금 설명된 이유들 때문에, 심리학적 귀납의 문제를 내 자신의 (객관론적) 지식론의 일부로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전의 원리(the principle of transference)는 다음 문제들과 답변들을 시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Ps
나는 여기서 답변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니요. 흄(Hume)이 설명하려고 했던 확실성의 느낌은 ㅡ 강력한 믿음 ㅡ 실용적인 믿음이었다고 나는 제안한다; 대안들 사이에서의 행동 및 선택과 밀접하게, 혹은 규칙성들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욕구 및 기대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 그러나 우리가 증거를 그리고 증거로 인하여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을 숙고할 위치에 있다고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f the result of its critical consideration is ‘acceptance’, it can range from that fanatical acceptance which attempts to suppress one’s doubts and scruples to that tentative acceptance which is ready for reconsideration and revision at a moment’s notice, and which may even be linked with an active search for refutat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만약 이런 비판적 고찰의 결과가 수용된다면 그것은 광적인 수용으로부터 잠정적인 수용에까지 미치고, 그리고 논박의 현실적인 추구와도 연결될 수 있다’로 번역되어 있다.
우리가 전제한다면, 태양은 결국 내일 런던 위에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ㅡ 예를 들어 태양이 다음 30분 안에 폭발하여 내일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ㅡ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가능성을 ‘심각하게’ ㅡ 다시 말해서, 실용적으로 ㅡ 고려하지는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 가능성이 어떤 가능한 행위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가능성에 관하여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지닌 실용적인 믿음들을 고려하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들은 정말로 매우 강력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것이다:
Ps
나의 답변은: 아니다. 반복 이론은 아무튼 옹호될 수 없다. 이 믿음들은 부분적으로 타고난 것이고, 부분적으로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법으로부터 귀결되는 타고난 믿음들이 수정된 것들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완벽하게 ‘합리적’인데 왜냐하면 그 방법이, 그 합리성이 토론된 저 선호의 방법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더욱 특히, 과학의 결과들에 대한 실용적 믿음은 비합리적이 아닌데 왜냐하면 비판적 토론이라는 방법보다 더 ‘합리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고 그 방법은 과학의 방법이다. 그리고 과학의 방법이 낳는 결과들 중 어떤 결과를 확실한 것으로서 수용하는 것이 비이성적일 터라할지라도, 실제적 행동에 관해서는 ‘더 나은’ 것이 없다: 혹시 더 합리적이라고 언급될 대안적 방법은 없다.
12. 전통적인 귀납의 문제와, 귀납의 모든 원리들 및 규칙들의 부당성*
이제 나는 내가 전통적인 철학적 귀납의 문제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돌아간다.
내가 이 명칭으로 지칭하는 것은, 도전이 생각되어야 하는 만큼 전적으로 진지하게 생각되지 않고 흄(Hume)에 의하여 도전을 받는 반복에 의한 귀납에 대한 상식적 관점을 보는 결과라고 나는 제안한다. 심지어 흄(Hume)도, 결국, 귀납주의자로 남았다; 그리하여 흄(Hume)에 의하여 도전을 받는 모든 귀납주의자가 흄(Hume)의 도전이 귀납론에 대한 한 가지 도전이라는 것을 안다고
*역주: 이 제목의 원문은 The Traditional Problem of Induction and the Invalidity of all Principles or Rules of Inducti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귀납의 전통적인 문제와 모든 원칙들이나 귀납규칙의 부당성’으로 번역되어 있다.
기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문제의 근본적인 도식은 다양한 방식들로 서술될 것인데 예를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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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내가 간략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떻게 종합명제들은 선험적으로 타당할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문제가 Tr
나의 관점으로, 이 모든 문제들은 좋지 않게 정식화된다. (그리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유사한 상황에서 존재했던 것과 같을 것이다’라는 토머스 리드[Thomas Reid]의 귀납 원리에 함축된 것과 같은 확률론적 해석본들도 또한 그러하다.) 그 해석본들의 저자들은 흄(Hume)의 논리적인 비판을 충분히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저자들은, 반복에 의한 귀납 없이도 우리가 성공할 수 있고 틀림없이 성공한다는 그리고 귀납 없이 성공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는 실제로 귀납 없이 성공한다는 가능성을 결코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이론에 대한 모든 반론들은, 나의 이론이 전통적인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in spite of Hum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흄의 도전에도 불구하고’로 번역되어 있다.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 what sort of general beliefs would suffice, if true, to justify the judgement that the sun will rise tomorrow...?’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어떤 종류의 일반적인 신념이 태양은 내일 떠오를 것이라는 판단을 정당화해 주는가?”로 번역되어 있다.
귀납의 문제를 해결했는지의 ㅡ 다시 말해서, 내가 귀납적 추론을 정당화했는지 ㅡ 질문으로써 나의 이론에 접근하는 듯이 내게 보인다.
물론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이것으로부터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내가 흄(Hume)이 지녔던 귀납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추론한다. 귀납 원리의 전통적인 정식화들이 배척되어야 한다는 것은, 많은 이유들 가운데서 특히 9절에서 서술된 이유 때문이다. 이유인즉 그 정식화들 모두는, 우리의 지식 탐구가 성공적이었다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지식 탐구가 성공적인 이유를 틀림없이 설명할 수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지어 우리의 지식 탐구가 지금까지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그래서 우리는 우주에 대하여 지금 중요한 것을 알고 있다는 전제를 (내가 공유하는) 근거로도, 이 성공은 기적적으로 비개연적이고 그리하여 설명될 수 없게 된다; 이유인즉 비개연적인 사건의 끝없는 연속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설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원소들 만들기부터 생명체들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들에 관한 거의 믿을 수 없는 진화적 역사를 조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알려지자마자, 확률의 도움을 받음으로 인해서 H
귀납의 원리라는 개념은, 참이라면 규칙성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에 관하여 충분한 이유들을 제공할 터인 서술의 원리이다 ㅡ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혹은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혹은 개연적인 것으로서, 아니면 혹시 추측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간주될. ‘의존(reliance)’에 의하여, Pr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The best we can do, I suppos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은’으로 번역되어 있다.
**역주: 이 부분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어 있다.
있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사실상 과학은, 그런 상황은 우주 어느 곳에서도 발생하기 힘들며 어떤 곳에서 (가령 지구상에서) 발생할지라도 그 상황은 우주론적 관점에서 짧을 기간들 동안에 발생하기 쉽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분명히 이 비판은, 반복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을 정당화할 터인 여하한 원리뿐만 아니라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법에 근거하거나 어떤 다른 상상 가능한 방법에 근거하여 Pr
13. 귀납의 문제들 초월과 구획설정**
귀납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은, 적어도 내 자신이 만족하며 구획설정의 (경험과학과 사이비과학, 특히 형이상학 사이의 구획설정) 문제를 내가 해결한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나에게 떠올랐다.
단지 귀납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 나는 구획설정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중요한 것으로서 간주했는데, 이유인즉 나는 그 문제가 과학적 정의(定義: definition)를 제공할 따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학과 사이비과학을 향한 나의 태도를 설명하는 데 그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고 내가 알았을지라도, 그것은 내가 보기에 중요성이 의심스러웠다 (아마도 정의들[定義들: definitions]을 향한 나의 부정적 태도 때문에).
포기되어야 할 것은, 이론이 참이라는 주장에 대한 정당화라는 의미에서의 정당화에 대한 추구라고 나는 알았다. 모든 이론들은 가설들이다; 모든 이론들은 전복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진리 탐구를 포기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과 나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이론들에 대한 우리의 비판적 토론들은, 참인 (그리고 강력한) 설명적 이론을 찾는다는 생각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hereas today’s science tells us that only under very special and improbable conditions can situations arise in which regularities, or instances of regularities, can be observ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오늘날 과학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즉, 매우 특수하고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조건 아래서도 규칙성들이나 규칙성의 사례들이 관찰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역주: 이 제목의 원문은 Beyond the Problem of Induction and Demarcati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귀납과 구획의 문제를 넘어’로 번역되어 있다. 구획이나 구획설정을 의미하는 demarcation은 포퍼경이 과학과 형이상학을 구분하려고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기에 초월의 대상이 아니다.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a considerable tim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중요한 시점에’로 번역되어 있다.
진리라는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의 선호들을 정말로 정당화한다: 진리는 규제적 개념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허위를 제거함에 의하여 우리는 진리를 목적으로 시험한다. 우리의 추측들에 대하여 우리가 정당화를 ㅡ 혹은 충분한 이유들을 ㅡ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진리를 추측하지 않았을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가설들 중 몇 가지 가설들은 참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지식은 가설적이라는 깨달음으로 인하여, ‘모든 진리에 대하여 이유가 주어질 수 있다’는 (라이프니츠[Leibniz]) 형태로 혹은 두 사람 모두 우리가 ‘믿는 것을 위한 [충분한] 이유를 보지 못한다’면 불신에 대한 충분한 이유라고 제안하는 버클리(Berkeley)와 흄(Hume)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더 강력한 형태로 ‘충분한 이유’가 배척된다.*
내가 귀납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획설정 문제에 대한 그 문제의 밀접한 관계를 깨닫자마자, 흥미로운 새로운 문제들과 새로운 해결책들이 빠르게 연속적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나는 곧, 구획설정의 문제와 나의 해결책이, 위에 서술된 바와 같이, 다소 형식적이고 비실재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경험적 반증들은 항상 회피될 수 있을 터이다. 비판에 대항하여 여하한 이론을 ‘면역으로 보호하는’ 것은 항상 가능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용어들인 ‘규약주의적[conventionalist] 술수’와 ‘규약주의적 왜곡’을 대체해야 할 이 탁월한 표현은 한스 알베르트[Hans Albert]에게서 기인한다.)
그리하여 나는 방법론적 규칙들이라는 그리고 비판적 접근의 근본적 중요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끌렸다; 다시 말해서, 반증에 반대하여 우리의 이론들을 면역으로 보호하는 방책을 피한 접근이라는 개념.
동시에 나는 반대 개념도 또한 깨달았다: 독단적 태도의 가치: 어떤 사람은 비판에 반대하여 이론을 옹호해야 했거나, 이론은 너무 쉽게 그리고 이론이 과학의 성장에 기여를 할 수 있기 전에 굴복할 터이다.
다음 단계는 ‘경험적 토대’인 시험 서술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적용이었다: 나는 모든 관찰들, 그리고 모든 관찰서술들이 지닌 추측성 및 이론적 특징을 강조했다.
이로 인하여 나는, 모든 언어들은 이론이 함유되어 있다는 견해에 다다랐다; 이것은 물론 경험론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의미했다. 그로 인하여 나는 또한 비판적 태도를 합리적 태도의 특징으로서 간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나는 언어의 논증적 (혹은 비판적) 기능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비판하는 지식의 수단으로서의 연역적 논리라는 개념에, 그리고 결론에서부터 전제들에게 허위성을 다시 전송하는 것을 (전제들로부터 결론으로의 진리 전송이라는 귀결) 강조함에 나는 이르렀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더 나아가 나는, 단지 정식화된 이론만이 (믿어지는 이론과 대조적으로) 객관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비판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이 정식화나 객관성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나의 ‘제3 세계’라는 (존 에클스[John Eccles]경이 선호하여 지칭하는 바, ‘세계 3’) 이론에 도달했다.
이것들은, 새로운 접근이 낳은 많은 문제들 중 몇 가지 문제일 따름이다. 양자 이론에서의 확률이론 그리고 나의 선호 이론과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 사이의 연관을 포함하여, 확률이론과 연관된 많은 문제들과 같은 더 전문적인 특징을 지닌 다른 문제들이 있다.
객관적 지식 진화론적 접근 1장 추측성 지식 귀납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결책.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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