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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지식, 3장 인식 주체가 없는 인식론

이윤진이카루스 2018. 11. 23. 14:57

3. 인식 주체가 없는 인식론

 

내가 고백으로써 시작하는 것을 허용하시라. 비록 나는 매우 행복한 철학자일지라도, 강연으로 일생을 보낸 이후에 내가 강연에서 전달할 수 있는 것에 관하여 나는 환상들을 갖지 않는다. 이 이유 때문에 나는 이 강연에서도 여러분을 확신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다. 그 대신에 나는 여러분에게 도전하려는a, 그리고 가능하면 여러분에게 도발하려는 시도를 펼치겠다.

 

1. 인식론에 관한 세 가지 주장들 및 제3 세계

 

나의 강연을 플라톤적 세계의 이론이나 객관적 정신의 이론으로 지칭함에 의하여 플라톤이나 헤겔을 향한 나의 부정적 자세를 들은 사람들에게 나는 아마도 도전했다b.

이 강연의 주제는, 더 나은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3 세계라고 흔히 지칭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표현을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세계우주라는 단어들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다음 세 가지 세계들이나 우주들을 구분할 것임을 지적하겠다: 첫째, 물리적 대상들이나 물리적 상태들의 세계; 둘째, 의식의 상태들이나 정신적 상태들의 혹은 아마도 행동하려는 행태적 의향들의 세계; 그리고 셋째, 객관적 사유 내용의 특히 과학적 및 시적(詩的) 사유들과 예술 작품들의 세계.

그리하여 내가 3의 세계라고 지칭하는 것에는, 나의 이론이 몇 가지 결정적인 면들에서 플라톤의 이론 및 헤겔의 이론과 근본적으로 다를지라도, 인정되는 바와 같이 플라톤의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의 세계와 공통적인 것이 많고 그리하여 헤겔의 객관적 정신과도 공통적인 것이 많다. 내가 3의 세계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challeng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고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might have challeng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도전을 해보겠다로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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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825일에서 92일까지 열린 제3차 논리학, 방법론 그리고 과학철학 국제회의에서 1967825일에 행한 연설문; B. van Rootselaar(한글 발음표기 미상: 역자)J. F. Staal(한글 발음표기 미상: 역자) 편집, 암스테르담 1968, 이 회의의 회의록, 333-73쪽에 처음 발표됨.

 

라고 지칭하는 것에는, 그것이 볼차노(Bolzano)의 이론과도 다를지라도, 그의

본질적인 명제들의 그리고 본질적인 진리들의 우주 이론과도 여전히 공통적인

것이 많다. 내가 주장하는 제3 세계는 프레게(Frege)의 객관적 사유 내용들의 우주와 매우 밀접하게 닮는다.

우리가 혹시 우리의 세계들을 다양한 방식들로 열거하지 않거나 그 세계들을 전혀 열거하지 않을 것임은 나의 견해나 나의 논증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

는 아마도, 특히, 세 가지 세계들 이상을 구분할 것이다. ‘3 세계라는 나의 용어는 편리상의 문제일 따름이다.

객관적인 제3 세계를 옹호하면서 나는, 내가 믿음 철학자들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을 도발하고a 싶다: 데카르트, 로크, 버클리(Berkeley), (Hume), 칸트 혹은 러셀처럼 우리가 지닌 주관적 믿음들과 그 믿음들의 근거나 근원에 흥미를 갖는 사람들. 이 믿음 철학자들에 반대하여 나는, 우리의 문제는 더 낫고 더 대담한 이론들을 찾는 것임을 촉구한다; 그리고 믿음이 아니라 비판적 선호가 중요하다고.b

그러나 나는 바로 모두(冒頭)에서, 내가 실재론자임을 고백하고 싶다: 고지식한 실재론자과 약간 같게, 물리적 세계들 및 의식 상태들의 세계가 있다고 그리고 이 두 가지 세계들을 상호작용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리고 내가 더 충실하게 설명할 의미에서, 세 번째 세계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주장하는 세 번째 세계에 수용된 것들 가운데는, 더욱 특히, 이론 체계들이 있다; 그러나 똑 같이 중요한 수용된 것들은 문제들 문제 상황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비판적 논증들 토론의 상태 혹은 비판적 논증의 상태라고 지칭될 물리적 상태에 대한 혹은 의식의 상태와 유사함에서 것이라고 주장하겠다; 그리고 물론, 학술지들과 저서들과 장서들의 내용들.

객관적인 제3 세계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 문제들과 추측들과 이론들과 논증들과 학술지들과 저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통상적으로, 이 개체들 모두는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정신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provok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화나게 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gainst these belief philosophers I urge that our problem is to find better and bolder theories; and that critical preference counts, but not belief인데 주절동사가 urge이기 때문에 종속적 동사 is[should] be[should] count로 표현함이 옳다. [should] be[should] count로 쓸 경우에 한글 해석도 찾아야 하는 것임을중요해야 함을이 되고 문맥상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적 상태들에 대한 혹은 아마도 행태적 행동 의향들에 대한 기호적(symbolic)이거나 언어적 표현들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이 개체들은 의사소통의 수단이라고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유사한 정신적 상태들이나 행태적 행동 의향들을 자아내려는 기호적(symbolic)이거나 언어적 수단.

이것에 반대하여, 우리는 이 개체들 모두와 그 개체들의 내용을 두 번째 세계로 격하시킬 수 없다고 나는 자주 주장했다.

3 세계의 (다소) 독립적인 존재에 관한 나의 표준적 논증들 중 한 가지 논증을 나는 반복하고 싶다.

나는 두 가지 사유실험들을 고려한다:

실험 (1). 우리가 지닌 모든 기계들과 도구들이 파괴된다, 그리고 기계들과 도구들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지식을 포함하는 모든 우리의 주관적 지식과 그것들을 사용하는 방법도 파괴된다. 그러나 장서들과 그 장서들로부터 배우는 우리의 능력은 살아남았다. 분명히 많은 고통 이후에 우리의 세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실험 (2). 이전처럼, 기계들과 도구들이 파괴된다, 그리고 기계들과 도구들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지식을 포함하는 우리의 주관적 지식과 그것들을 사용하는 방법도 파괴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장서들 또한 파괴되어 저서들로부터 배우는 우리의 능력이 쓸모없게 된다.

여러분이 이 두 가지 실험들에 관하여 생각한다면, 3 세계의 실재성과 중요성과 자율성의 등급은 (2 및 제3 세계들에 미치는 제3 세계의 영향들뿐만 아니라) 아마도 여러분에게 다소 더 분명해질 것이다. 이유인즉 두 번째 경우에 수천 년 동안 우리 문명의 재출현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강연에서 세 가지 주요 주장들을 옹호하고 싶은데, 그 주장들 모두는 인식론과 관련된다. 인식론을 나는 과학적 지식에 관한 이론으로 생각한다 (나의 1959년 저서, 18-19쪽 참조).

나의 첫 번째 주장은 이렇다. 전통적 인식론은 주관적 의미에서의 나는 알고 있다나는 생각하고 있다라는 단어들의 평범한 용법의 의미에서 지식이나 사유를 연구했다. 이로 인하여 인식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불합리에 빠졌다고 나는 주장한다: 과학적 지식을 배우려고 의도하는 반면, 그들은 사실상 과학적 지식과 무관한 것을 배웠다. 이유인즉 과학적 지식나는 알고 있다는 단어들의 평범한 용법의 의미에서 지식이 아닐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다라는 의미에서의 지식은 내가 2 세계라고 지칭하는 것인 주체들의 세계에 속하는 반면, 과학적 지식은 객관적 이론들과 객관적 문제들과 객관적 논증들의 세계인 제3 세계에 속한다.

그리하여 나의 첫 번째 주장은, 로크와 버클리(Berkeley)와 흄(Hume)과 심지어 러셀의 전통적인 인식론은 그 단어의 상당히 엄격한 의미에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 인식론의 대부분이 또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이 주장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이것은, 현대 인식적 논리학이 과학적 지식 이론을 겨냥한다고 우리가 전제한다, 그 이론을 포함한다. 그러나 여하한 인식적 논리학자도 단지 자신은 과학적 지식 이론에 공헌하는 것을 겨냥하지 않음을 분명히 함에 의하여 나의 비판으로부터 쉽게 자신을 완전히 보호되게 만들 수 있다.

나의 첫 번째 주장에는, 지식의 혹은 사유의 두 가지 다른 의미들의 존재가 포함된다: (1) 정신이나 의식의 상태 혹은 행동이나 반응 의향으로 구성되는 주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이나 사유(2) 문제들과 이론들과 논증들과 같은 것들로 구성되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이나 사유. 이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은 알고 있다는 여하한 사람의 주장과 완전히 독립적이다; 그 지식은 여하한 사람이 지닌 믿음이나 동의 의향들과도 또한 독립적이다; 혹은 주장하려는 또는 행동하려는 의향과도.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은 인식자(knower)가 없는 지식이다: 그 지식은 인식하는 주체가 없는 지식이다.

객관적 의미에서의 사유(thought)에 관하여 프레게(Frege)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사유(thought)에 의하여 나는 사유하는 주관적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의 객관적 내용을 이해한다...’

사유의 두 가지 의미들과 그 의미들의 지닌 흥미로운 상호관계들은, 헤이팅(Heyting)으로부터의 (1962년 저서, 195) 다음과 같은 고도로 설득적인 인용구에 의하여 예시될 수 있는데 그는 브로우베르(Brouwer)가 자신의 연속체 이론을 창안한 행위에 관하여 언급한다:

순환 함수들이a 이전에 발명되었더라면, 그는 [브로우베르<Brouwer>] 내가 생각하기에 불행했었을 선택수열이라는 개념을 아마도 형성하지 않았을 터이다.’

이 인용구는 한편으로 브로우베르(Brouwer)의 몇 가지 주관적 사유 절차들을 언급하여 객관적인 문제 상황이 달랐더라면 그 절차들이 아마도 발생하지 않았을 터라고 (불행했을 터인) 말한다. 그리하여 헤이팅(Heyting)은 브로우베르(Brouwer)의 주관적 사유 절차들에게 미친 특정 가능한 영향들을 언급하며 그는 또한 이 주관적 사유 절차들의 가치들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이제 영향들이 영향들로서 주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순환 함수들에 대한 브로우베르(Brouwer)의 주관적 지식을 통해서만, 그가 자유로운 선택수열들을 창안하지 못하는 저 불행한 효과가 나타났었을 수 있을 터이다.a

다른 한편으로 헤이팅(Heyting)으로부터의 인용구는, 두 가지 사유들이나 이론들이 지닌 객관적 내용들 사이의 어떤 객관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헤이팅(Heyting)은 브로우베르(Brouwer)의 두뇌 과정들의 주관적 조건들이나 전기화학(electrochemistry)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 수학에서의 객관적 문제 상황과 이 객관적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결심한 브로우베르(Brouwer)의 주관적 사유 행위들에 미치는 그 상황이 지닌 가능한 영향들을 언급한다. 나는 이것을, 헤이팅(Heyting)의 언급은 브로우베르(Brouwer)의 창안인 객관적이거나 제3 세계 상황적 논리에 관한 것이라고 그리고 헤이팅(Heyting)의 언급은 제3-세계 상황이 제2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임을 암시한다고 말함에 의하여, 기술하고 싶다. 유사하게, 브로우베르(Brouwer)가 선택수열들을 고안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불행했을 터이라는 헤이팅(Heyting)의 제안은, 브로우베르(Brouwer)의 사유의 객관적 내용이 귀중하고 흥미로웠다고 말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그 내용이 제3 세계에서의 객관적인 문제 상황을 변화시켰다는 정도에서 귀중하고 흥미로웠다고.

문제를 단순하게 표현하여, ‘브로우베르(Brouwer)의 사유가 칸트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거나 심지어 브로우베르(Brouwer)가 칸트의 공간 이론을 배척했다고 내가 말한다면 나는 주관적인 의미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 사유의 작용들에 관하여 말한다: ‘영향이라는 단어는 사유 과정들이나 사유 작용들의 상황을 표시한다. 그러나 브로우베르(Brouwer)의 사유는 칸트의 사유와 크게 다르다고 내가 말한다면, 내가 주로 내용들에 관하여 말한다는 것은 상당히 분명하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브로우베르(Brouwer)의 사유는 러셀의 사유와 양립될 수 없다고 내가 말한다면, ‘양립될 수 없는과 같은 논리적 용어를 사용함에 의하여 내가 사유라는 단어를 단지 프레게(Frege)의 객관적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과 내가 이론들이 지닌 객관적 내용이나 논리적 내용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모호하지 않게 분명히 한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only Brouwer’s subjective acquaintance with recursive functions

could have had that unfortunate effect of preventing him from inventing free choice

sequenc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단지 귀납적 함수들에 관해 브라우베르만이 알고 있었다면 그가

선택수열들을 창안하지 못하게 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로 번역되어 있는데 역자로서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평범한 언어에는 불행하게도 제2 세계의 의미에서 그리고 제3 세계의 의미

에서 사유에 대한 별개의 용어들이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언어에는

나는 알고 있다지식이라는 상응하는 두 가지 의미들에 대한 별도의 용어들이 없다.

두 가지 의미들 모두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먼저 세 가지 주관적, 즉 제2-세계 보기들을 언급하겠다:

 

(1) ‘당신이 나를 도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나는 도발을 당하지 않겠다.’

(2) ‘페르마(Fermat)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되지 않았음을 나는 알고 있지만 어느 날 그 정리가 증명될 것임을 나는 믿는다.’

(3)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지식이라는 표제어로부터: 지식의식하거나 정보를 받은 상태이다.

다음으로 나는 세 가지 객관적인, 즉 제3-세계 보기들을 언급하겠다:

 

(1)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지식이라는 표제어로부터: 지식학문의 한 분야; 과학; 예술이다.

(2) 메타수학적 지식의 현재 상태를 고려하여, 페르마(Fermat)의 마지막 정리가 결정될 수 없을 것임이 가능한 듯하다.’a

(3) ‘이 주장은 독창적이고 중요한 지식에 대한 공헌이라고 나는 증언한다.’

 

이 매우 진부한 보기들에는b, 내가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을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기능만이 있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을 내가 인용한 것은 언어 분석에 대한 인정으로서나 언어 분석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달래려는 시도로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 인용은, ‘평범한 용법이 내가 말하는 제3 세계의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을 포함한다는 것을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aking account of the present state of metamathematical

knowledge, it seems possible that Fermat’s last theorem may be undecidable.‘인데 분사구문의

주어가 가주어 it이나 진주어 that절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오류인 문장이다. 그리고

메타수학적이라는 단어는 이한구 번역본에 수학적으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These very trite exampl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바로 이 세 가지

예들은으로 번역되어 있다.

 

 

증명하려는 시도에서 인용되지 않는다. 사실상 나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 지식의 객관적 용법들에 관한 보기들을 발견하고 놀랐다. (나는 몇 가지 적어

알고 있다에 대한 부분적으로 객관적인 용법들을 발견하고서 훨씬 더 놀랐다: ‘(사물, 장소, 사람)을 식별하는 것... 아는 것;... 이해하는 것’. 이 용법들이 부분적으로 객관적일 것임은, 속편으로부터 출현할 것이다.) 아무튼 내가 든 보기들에는 논증들로서의 의도가 없다. 그 보기들에는 다만 예시들로서의 의도만 있다.

나의 첫 번째 주장은 지금까지 논증된 것이 아니라 예시되었을 따름인데, 전통적인 인식론은 제2 세계에 대한 즉, 주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에 대한 집중함으로써 과학적 지식의 탐구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나의 두 번째 주장, 인식론과 관련되는 것은 과학적 문제들 및 문제 상황들에 대한, 과학적 추측들에 (내가 과학적 가설들이나 이론들에 대한 또 다는 단어로서만 생각하는) 대한, 과학적 토론들에 대한, 비판적 논증들에 대한 그리고 논증들에서 증거에 의하여 수행되는 역할에 대한 연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학술지들 및 서적들에 대한, 그리고 과학적 논증들에서 실험들과 그 실험들의 평가에 대한 연구; 혹은 개괄적으로 객관적 지식으로 구성되는 주로 자율적인 3 세계에 대한 연구는 인식론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

나의 두 번째 주장에서 기술된 것으로서의 인식론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추측들이 참이라고 혹은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주관적인 의미에서 그 추측들을 알고 있다거나 혹은 자신들이 그 추측들을 신뢰한다고 매우 빈번하게 주장하지 않음을 밝힌다.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지라도, 자신들의 연구 프로그램들을 개발함에서 그들은 성과가 있는 것과 성과가 없는 것 그리고 어떤 연구 방식이a 객관적 지식의 제3 세계에서 추가적 결과들을 약속하는지에 관한 추측들을 토대로 행동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자들은 임박한 객관적 지식의 제3 세계에서의 성장을 약속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추측을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주관적 믿음(이유인즉 우리는 행동의 주관적 토대를 그렇게 지칭할 것이기b 때문에) 토대로 행동한다.

내가 제안하는 바c, 이것은 나의 첫 번째 주장(주관론적d 인식론의 무관성에 관한) 나의 두 번째 주장(객관론적a 인식론의 유관성에 관한) 선호하는 논증을 제공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세 번째 주장이 있다. 그 주장은 이러하다. 3 세계를 연구하는 객관론적 인식론은 주관적 의식의 제2 세계를, 특히 과학자들의 주관적 사유 과정들을 크게 조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역순은 참이 아니다.

이것들이 내가 말하는 세 가지 주요 주장들이다.

 

나의 세 가지 주요 주장들에 추가하여, 나는 세 가지 뒷받침하는 주장들을 제시한다.

이 주장들 중 첫 번째 주장은, 3 세계는 거미줄에 비교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자연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뒷받침하는 주장은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거의 결정적인 주장), 우리가 비록 부단히 제3 세계를 근거로 활동하고 제3 세계에 의하여 행동에 영향을 받을지라도, 3 세계는 주로 자율적이라는 것이다: 3 세계는, 그 세계가 우리의 산물이라는 그리고 그 세계에는 우리에게 미치는 강력한 정보(feed-back)가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율적이다; 다시 말해서, 2 세계에 그리고 심지어 제1 세계에 수용된 것들로서 우리에게 미치는.

세 번째로 뒷받침하는 주장은, 객관적 지식이 성장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과 제3 세계 사이의 이 상호작용을 통해서라는 것과 지식의 성장과 생물학적 성장 사이에는 밀접한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식물들과 동물들의 진화.

 

2. 3 세계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

 

나의 강연의 현재 절에서 나는 일종의 생물학적이거나 진화적 논증에 의하여 자율적 세계의 존재를 옹호하려고 노력하겠다.

생물학자는 동물들의 행태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거미줄들이나 말벌들 혹은 개미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둥지들이나 너구리들이 만드는 굴들이나 수달들에 의하여 건설되는 둑들이나 숲속의 동물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통로들과 같은 동물들이 만들어내는 -활성 구조물들 중 몇 가지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objectivis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객관적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구조물들에 대한 연구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들의 두 가지 주요 범주들을 나는 구분하겠다. 첫 번째 범주는, 동물들에 의하여 사용되는 방법들과 혹은 이 구조물들을 구축할 때 동물들이 행동하는 방식들과 관련된 문제들로 구성된다. 이 첫 번째 범주는 그리하여 생산 행위들과 관련된 문제들로 구성된다; 동물의 행태적 의향들과; 그리고 동물과 생산물 사이의 관계들과. 문제들의 두 번째 범주는 구조물 자체들과 관련된다. 그 범주는 구조물에 사용되는 재료들의 화학과 관련된다; 그 재료들의 기하학적a 및 물리학적 속성들과; 특별한 환경적 조건들에 의존하는 그 재료들의 진화적 변화들과; 그리고 이 환경적 조건들에 대한 그 재료들의 의존이나 그 재료들의 적응들과.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은, 구조의 속성들로부터 동물들의 행태로의 정보(feedback) 관계이다. 문제들의 이 두 번째 범주를 다시 말해서, 구조들 자체들을 다루면서 구조들이 지닌 생물학적 기능들의 관점에서 우리는 또한 구조들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첫 번째 범주의 몇 가지 문제들은 우리가 두 번째 범주의 문제들을 토론할 때 인정되는 바와 같이 출현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둥지는 어떻게 구축되었는가?’ 그리고 그 둥지의 구조의 어떤 면들이 전형적이고 (그리하여 혹시 전통적이거나 전승되었고) 어떤 면들이 특별한 조건들에 적응된 변수들인가?’.

문제에 관한 나의 마지막 보기가 밝히는 바와 같이, 첫 번째 범주의 문제들은 다시 말해서, 구조의 생산과 관련된 문제들 때때로 두 번째 범주의 문제들에 의하여 제안될 것이다. 이것이 틀림없이 그러한데 왜냐하면 문제들의 두 가지 범주들 모두가, 자체가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사실인 그런 객관적인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조들 자체들의 존재는, 문제들의 두 가지 범주들 모두를 만들어낸다고 언급될 것이다. 문제들의 구조들 자체들과 연관된 문제들 두 번째 범주가 더 근본적이라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 범주가 첫 번째 범주로부터 전제하는 유일한 것은, 구조들이 어떤 방식으로 몇몇 동물들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다.b

이제 이 단순한 고찰들은 물론, 주택들이나 도구들과 같은 인간 활동의 산물들에 그리고 또한 예술 작품들에 또한 적용될 것이다. 우리에게 특히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geometrica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지리적으로 번역되고 원문이

geographical의 오류인지도 모른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ll that it presupposes from the first category is that bare fact

that the structures are somehow produced by some animal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첫째

범주를 필요조건으로 두 번째 범주가 상정하고 있는 모든 것은 여하튼 간에 어떤 동물들이 그 구조들을

산출했다는 분명한 사실뿐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중요하게, 그 고찰들은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것에 그리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적용된다.a

이 생물학적 고찰들과 나의 현재 강좌의 주제 사이의 연관성은 내가 말하는 세 가지 주요 주장들을 재정식화 함에 의하여 분명해질 수 있다. 나의 첫 번째 주장은, 철학에서의 현재 문제 상황에서 문제들의 두 가지 범주들을 한편으로는 생산 문제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서 생산된 구조들 자체들과 관련된 문제들 구분하는 데 대한 인식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함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다. 나의 두 번째 주장은, 본질적인 산물들과 관련된 문제들의 두 번째 범주는 거의 모든 면에서 생산의 문제들인 첫 번째 범주보다 더 중요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세 번째 주장은, 두 번째 범주의 문제들이 생산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처음 인상들과는 반대로, 생산 행태를 연구함에 의하여 우리가 산물들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보다 산물들 자체들을 연구함에 의하여 생산 행태에 관하여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 세 번째 주장은 반()-행동주의적 그리고 반()-심리학주의적 주장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나의 세 가지 주장들을 지식이라고 지칭될 것에 적용하여 그 주장들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것이다.

(1) 한편으로는 과학적 지식의 생성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 공헌들과 연관된 문제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이론들이나 과학적 논증들과 같은 다양한 산물들의 구조와 관련된 문제들을 구분하는 것을 우리는 부단히 의식해야 한다.

(2) 산물들에 대한 연구는, 심지어 생산과 생산 방식들을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생산에 대한 연구보다 크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3) 직접적인 행동주의적이거나 심리학적이거나 사회학적 접근방식에 의해서보다 이론들을 그리고 그 이론들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여 제시된 논증들을 연구함에 의하여 발견학습법과 방법론에 관하여 그리고 심지어 연구의 심리학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산물들에 대한 연구로부터 행태나 심리학에 관해 매우 많이 배울 것이다.

다음에서, 나는 산물들의 이론들과 논증들 측면으로부터의 접근방식을 객관적접근방식이나 3 세계접근방식으로 부르겠다. 그리고 과학적 지식에 대한 행동주의적이고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접근방식을 주관적접근방식이나 2 세계접근방식으로 나는 부르겠다. 주관적 접근방식의 매력은 주로, 그 접근방식이 인과적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유인즉 나는, 내가 우선권을 주장하는 객관적 구조들이 인간의 행태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인과적이기 때문에, 말하자면a 원인들이라기보다는 결과들로부터 시작하는 객관적 접근방식보다 주관적 접근방식은 더 과학적으로 보일 것이다.

객관적 구조들이 행태의 산물들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할지라도, 그 논증은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과학들에서, 평범한 접근방식은 결과들로부터 원인들로 이다. 결과가 문제를 설명될 문제인 피설명항(explicandum) 제기하고 과학자는 설명적 가설을 구축함에 의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객관적 산물을 강조하는 나의 세 가지 주요 주장들은 그리하여 목적론적도 아니고 비과학적도 아니다.

 

3. 3 세계의 객관성과 자율성

 

지식에 대하여 오류인 주관적 접근방식과 관련된 주요 이유들 중 한 가지 이유는, 저서는 독자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느낌이다: 저서가 이해된다는 조건으로만 저서는 실제로 저서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저서는 검은 점들을 지닌 종이일 따름이다.

이 견해는 여러 가지 면들에서 오류이다. 말벌의 집은 심지어 버려진 후에서 말벌의 집이다; 말벌의 집이 말벌들에 의하여 집으로서 다시 사용되지 않을지라도. 새의 둥지는, 거주되지 않을지라도 새의 둥지이다. 유사하게 저서는, 읽히지 않을지라도 (오늘날 쉽게 발생할 것처럼) 저서로 특정 유형의 산물 남는다.

게다가 저서 혹은 심지어 장서에는 누군가에 의하여 서술되었을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일련의 대수들(logarithms)의 책들은 컴퓨터에 의하여 생산되어 인쇄될 것이다. 그것은 대수들(logarithms)의 책들 중 최고의 연속물일 것이다 그것은 가령 소수점 이하 50자리까지 대수들(logarithms)을 포함할 것이다. 그것은 도서관으로 보내질 것이지만 그것은 이용하기에 너무 버거운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아무튼 누군가가 그것을 사용하기 전까지 여러 해가

 

a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as it wer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사실상으로 번역되어 있다.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저서 안에 있는 많은 숫자들은 (수학적 정리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살아있다 동안 쳐다보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숫자들 각각은 내가 객관적 지식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명칭으로 그것을 지칭하는 자격이 나에게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의 문제는 흥미롭지 못하다a.

이 대수들(logarithms)의 책들에 관한 보기는 부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보기는 부자연스럽지 않다. 거의 모든 저서가 이와 같다고 나는 말해야 한다: 저서는 참이든 허위이든, 유용하든 쓸모없든 객관적인 지식을 담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저서를 읽고 실제로 그 저서의 내용들을 이해하는지는 거의 우연적이다. 이해력을 사용하여 저서를 읽는 사람은 드믄 존재다. 그러나 그 사람이 더 흔하다면, 항상 많은 오해사항들과 해석오류들이 있을 터이다; 그리고 흰 종이 위에 있는 검은 점들을 서적으로 혹은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의 사례로 변화시키는 것은 실제적이고 다소 우연적으로 그런 오해사항들의 회피하지 못한다.b 더 정확하게, 그것은 더 추상적인 것이다. 사물을 서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해되는 서적의 가능성이나 잠재성이나 이해되거나 해석되는 또는 오해되거나 잘못 해석되는 서적의 의향적 특징이다.b 그리고 이 잠재성이나 의향은 실제화 되거나 실현되지 않고도 존재할 것이다.

이것을 보다 분명하게 알기 위하여, 인류가 멸절한 이후에 몇 가지 저서들이나 장서들이 몇몇 개화된 우리들의 후손들에 (이들이 개화된 지구의c 동물들이든, 아니면 외계에서 온 몇몇 방문객들이든 관계없이) 의하여 발견될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할 것이다. 이 저서들은 해독될 것이다. 그 저서들은 논증을 목적으로 이전 읽힌 적이 없는 저 대수표들일 것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생각하는 동물들에 의한 대수(logarithm)의 구성이나 대수(logarithm)가 실제로 읽히거나 이해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사물을 저서로 만드는 데 필수적이 아니라는 것과, 대수(logarithm)가 아마도 해독될 것임이 충분하다는 것이d 아주 분명해진다.

그리하여 객관적 지식의 제3 세계에 속하는 위하여 저서는 누군가에 의하

 

a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of no interes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두 문장에서는 it is ~ which의 강조구문이 쓰였는데 it is ~ that 강조구문의 오류이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terrestria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외계의로 번역되어 있다.

d 역주: ‘대수(logarithm)가 아마도 해독될 것임이 충분하다는 것이라는 부분은 이한구 번역본에서

누락되었다.

 

여 파악될 (혹은 해독되거나 이해되거나 알려질a)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적으로나 거의 것을 나는 정말로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본질적인 저서들의, 본질적인 이론들의, 본질적인 문제들의, 본질적인 문제 상황들이, 본질적인 논증들의, 기타 등등의 일종의 플라톤적 (혹은 볼차노적[Bolzanoesque]) 3 세계가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3 세계가 인간의 산물일지라도, 인간들에 의하여 생산된 적이 없거나 이해된 적이 없고 생산되지도 이해되지도 않을b 많은 본질적인 이론들과 본질적인 논증들과 본질적인 문제 상황들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런 문제 상황들의 제3 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은 극단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의심스러운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그 주장과 생물학적으로 유사한 것을 지적함에 의하여 옹호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주장에는 조류의 둥지들이라는 영역에서 그 주장과 완전히 같은 것이 있다. 몇 년 전 나는 나의 정원을 위하여 한 가지 선물을 새들을 위한 둥지-상자 받았다. 물론 그 상자는 새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산물이었다 우리의 대수표들이 인간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컴퓨터의 산물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러나 새의 세계라는 환경에서, 그 상자는 객관적 문제 상황의 그리고 객관적 기회의 한 부분이었다. 몇 년 동안 새들은 심지어 둥지-상자를 주목하지도 않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몇 년 후에, 그 둥지-상자를 푸른 박새들이 신중하게 조사했고 그 상자 안에서 심지어 둥지 짓기를 시작했지만 곧장 포기했다. 특별히 귀중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분명히 여기에는 장악될 수 있는c 기회가 있었다. 아무튼 여기에는 문제 상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또 일 년이 지나고 다른 새들에 의하여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 문제가 그렇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상자가 더 합당한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매우 합당한 상자가 사용되기도 전에 제거될지도 모른다. 상자의 합당성이라는 문제는 분명히 객관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상자가 사용되는 지는 부분적으로 우연적이다.d 모든 생태적 지위들에 대해서도 상황은

 

a 역주: 이 부분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에서 주절 동사의 원문은 and may never be produced or understoo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결코 산출되거나 이해될 수도 없는으로 번역되어 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graspabl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파악할 수 있는으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whether the box is ever used is partly accidenta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 상자가 사용된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은 분명 부분적으로 우연적이다.’로 번역되었다.

 

 

같다.a 생태적 지위들은 잠재성들이어서 객관적인 방식으로 그와 같이, 이 잠재성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에 의하여 실제화 될 것인지의 문제와 독립적으로 어느 정도 까지 연구될 것이다. 세균학자는b 특정 세균들이나 곰팡이들의 배양을 위하여 그런 생태적 지위를 어떻게 준비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생태적 지위는 자체의 목적을 위하여 완벽하게 합당할 것이다. 그 생태적 지위가 사용되어 거주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이론들과 저서들과 논증들로 구성되는 객관적인 제3 세계의 대부분은, 실제로 생산된 저서들과 논증들의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들로서 출현한다. 우리는 또한, 그 대부분이 인간 언어의 부산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언어 자체는, 새의 둥지처럼, 다른 목표들을 겨냥했던 행동들의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이다.

밀림에서 동물의 통로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어떤 동물이 물 마시는 장소에 가기 위하여 덤불을 뚫을 것이다. 다른 동물들은 동일한 길을 사용하는 것이 매우 용이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 길은 사용함에 의하여 넓어지고 개선될 것이다. 그 길은 계획되지 않는다 그 길은 쉽고 재빠른 움직임을 위한 필요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이것이 통로가 원래 만들어지는 아마도 심지어 인간들에 의해서도 방식이고 유용한 언어와 다른 제도들이 출현할 방식이고 그것들이 자체의 존재와 발전을 자체의 유용성에 귀속시킬 방식이다. 그것들은 계획되거나 의도되지도 않으며 그것들이 존재하기 이전에는 그것들에 대한 필요성도 아마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새로운 필요성이나 목표들의 새로운 집합을 만들어낼 것이다: 동물들이나 인간들의 목표-구조는 주어지는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정보 기제(情報 機制: feed-back mechanism)의 도움을 받아서, 이전 목표들로부터 그리고 겨냥되었거나 겨냥되지 않았던 결과들로부터 발전한다.

이런 방식으로, 가능성들이나 잠재성들의 전체 새로운 우주가 출현할 것이다: 대규모까지 자율적인 세계.

매우 명백한 보기는 정원이다. 정원은 매우 신중하게 계획되었을지라도, 통상적으로 정원은 부분적으로 예기치 않은 방식들로 조성될 것이다. 그러나 정원이 계획한 대로 조성될지라도 계획된 대상들 사이의 몇 가지 기대되지 않은 상호관계들이, 가능성들의 그리고 가능한 새로운 목표들의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의 전체적 세계를 야기할 것이다.

언어의, 추측들의, 이론들의 그리고 논증들의 세계는 간략하게, 객관적 지식의 우주 사람들이 창조한 우주들이지만 동시에 주로 자율적인 이 우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우주들 중의 하나이다.

 

자율성이라는a 개념은 나의 제3 세계 이론에 핵심적이다: 3 세계가 인간의 창조물인 인간의 산물일지라도, 그 세계는 반대로 다른 동물의 산물들에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자율성 영역을 창조한다.

셀 수 없이 많은 보기들이 있다.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보기들이고 아무튼 우리의 표준 보기들로서 기억되어야 하는 보기들은 자연수들의 이론에서 발견될 것이다.

크로네커(Kronecker)의 의견에는 반대하여, 자연수들의 수열은 인간의 구축물이라는 데 나는 브로우베르(Brouwer)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수열을 만들어낼지라도, 그 수열은 반대로 자체의 자율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홀수와 짝수의 구분은 우리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구분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의 의도되지 않고 불가피한 결과이다. 소수들(prime numbers)은 물론 유사하게 의도되지 않은 자율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경우에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많은 사실들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골드바흐(Goldbach)의 추측들과 같은 추측들이 있다. 그리고 이 추측들은, 우리가 창조한 대상들을 간접적으로 언급할지라도,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창조로부터 출현한 그리고 우리가 통제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문제들과 사실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그것들은 분명한 사실들이고, 그것들에 관한 진리는 흔히 발견하기 어렵다.

이것은, 내가 제3 세계가 우리에 의하여 창조될지라도 주로 자율적이라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을 예시한다.

그러나 자율성은 부분적일 따름이다: 새로운 문제들이 새로운 창조물들이나 구축물들을 순환 함수들이나 브로우베르(Brouwer)의 자유 선택 수열들 낳고 그리하여 제3 세계에 새로운 대상들을 추가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그런 단계는 의도되지 않은 새로운 사실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기대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들; 그리고 흔히 새로운 반박들 또한.

우리의 창조물로부터 나와서 우리 자신들에게 미치는 매우 중요한 정보(feed-back) 효과가 또한 있다; 3 세계로부터 제3세계에 미치는. 이유인즉 새롭게 출현하는 문제들로 인하여 우리가 새로운 창조들을 하도록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그 절차는 다소 과도하게 단순화된a 다음 도식에 의하여 기술될 수 있다 (아래, 6, 243쪽 또한 참조):

 

P TT EE P .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떤 문제 P 으로부터 출발하여 잠정적 해결책 즉, 잠정적 이론인 TT로 나아가는데 그 해결책이나 이론은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오류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해결책이나 이론은 오류-제거인 EE에 부쳐질 것이고 오류-제거는 비판적 토론이나 실험적 시험들로 구성될 것이다; 아무튼 새로운 문제들 P 가 우리 자신의 창조적 활동으로부터 출현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문제들은 일반적으로 우리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고, 아무리 우리에게 그렇게 할 의도가 없을지라도 우리가 모든 행동으로써 어쩔 수 없이 존재하게 만드는 새로운 관계들의 분야에서 자율적으로 출현한다.b

3 세계의 자율성과, 2 세계 및 심지어 제1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제3 세계의 정보(feed-back)는 지식의 성장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들 중의 하나다.

우리의 생물학적 고찰들을 추적하여, 그 고찰들이 다윈의 진화론에 대하여 일반적인 중요성을 띤다는 것은 알기 쉽다c: 그 고찰들은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하여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혹은 더 지성적인 언어사용법으로, 그 고찰들은 출현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a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somewhat oversimplifi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약간 단순화된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these new problems are not in general intentionally created

by us, they emerge autonomously from the field of new relationships which we cannot help

bringing into existence with every action, however little we intend to do so.인데 두 개의 절이 접속사 없이 연결되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Following up our biological considerations, it is easy to see that they are of general importance for the theory of Darwinian evolution.인데 분사구문 Following up our biological considerations의 주어가 가주어 it이 될 수 없으므로 분사구문을 절로 바꾸거나 주문장을 바꾸어야 한다.

 

 

4. 언어, 비판 그리고 제3 세계

 

우리 자신들에게 특히 우리의 두뇌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feed-back) 효과들을 미치는 인간 창조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 창조물은 인간 언어의 고등 기능들이다; 더욱 특히, 기술적 기능(descriptive function) 논증적 기능(argumentative function)이다.

인간 언어들은 두 가지 언어의 하등 기능들을 동물 언어들과 공유한다: (1) 자기-표현 및 (2) 신호. 언어의 자기-표현적 기능이나 징후적 기능(symptomatic function)은 명백하다: 모든 동물 언어는 어떤 생명체의 상태를 징후로 표현한다. 신호(signalling)나 배출(release) 기능도 똑같이 명백하다: 어떤 징후가 또 다른 생명체에게서 반응을 배출할 수 있다고 우리가 전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징후를 언어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모든 동물 언어들과 모든 언어적 현상들은 이 두 가지 하등 기능들을 공유한다. 그러나 인간 언어에는 많은 다른 기능들이 있다. 기묘하게도, 고등 기능들 중 가장 중요한 고등 기능들이 거의 모든 철학자들에 의하여 간과되었다. 이 기묘한 사실에 대한 설명은, 고등 기능들이 나타날 때 두 가지 하등 기능들이 항상 나타나 모든 언어적 현상을 하등 기능들을 통하여 표현이나 의사소통으로서 설명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 언어들이 지닌 두 가지 가장 중요한 고등 기능들은 (3) 기술적(descriptive) 기능과 (4) 논증적(argumentative) 기능이다.

인간 언어들이 지닌 기술적 기능으로써, 진리에 대한 규제적 개념이 출현하는데 다시 말해서 사실들에 들어맞는 기술에 대한 규제적 개념이 출현한다.

추가적인 규제적 혹은 평가적 개념들은 내용, 진리 내용 그리고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다.

인간 언어의 논증적 기능은 기술적 기능을 전제한다: 논증들은, 근본적으로, 기술들(descriptions)에 관한 것이다: 논증들은 진리에 대한 규제적 개념들의 관점에서 기술들(descriptions)을 비판한다; 내용에 대한; 그리고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대한.

이제 두 가지 요점들이 여기서 매우 중요하다:

(1) 체외(體外: exosomatic) 기술적 언어의 도구처럼 신체 외부에서 발달하는 언어 발달이 없으면 우리의 비판적 토론을 위한 대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기술적 언어의 (나아가, 문자언어의) 발달과 동시에 언어적 제3 세계는 출현할 수 있다; 그리고 합리적 비판에 관한 문제들과 기준들이 발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방식뿐이고 이 제3 세계에서만이다.

(2) 우리가 우리의 인간성인 우리의 이성을 귀속시키는 곳은 언어의 고등 기능들의 이 발달이다. 이유인즉 우리가 지닌 추론 능력들은 비판적 논증의 능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요점으로 인하여, 표현 및 의사소통에 초점을 맞추는 모든 인간 언어 이론들의 무효성이 밝혀진다. 우리 알게 될 것과 같이, 자신을 표현하는 의도가 있다고 흔히 언급되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자체의 구조에서 주로 언어가 지닌 두 가지 고등 기능들의 출현에 의존한다.

 

언어의 논증적 기능이 진화함에 따라서 비판이 추가적 성장의 주요 도구가 된다. (논리학은 비판의 도구로서 간주될 것이다; 나의 1963년 저서, 64쪽 참조.) 언어의 고등 기능들로 구성되는 자율적인 세계는 과학의 세계가 된다. 원시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 세계에도 원래 타당한 도식

 

P TT EE P

 

체계적인 합리적 비판을 거쳐 오류-제거를 통한 지식 성장의 도식이 된다. 그 도식은 합리적 토론으로써 진리와 내용을 탐구하는 도식이 된다. 그 도식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고양시키는 방식을 기술한다. 그 도식은 진화적 출현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선택과 합리적 비판에 의한 자기-초월에 대한 합리적 기술을 제공한다.

 

요컨대, ‘지식의 의미는 모든 단어들의 의미처럼 중요하지 않을지라도, 그 단어의 다양한 의미들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1) 특정 타고난 행동 의향들로 그리고 그 의향들이 지닌 습득된 수정사항들로 구성되는 주관적 지식.

(2) 객관적 지식; 예를 들어 추측성 이론들과 결정되지 않은 문제들과 문제 상황들 그리고 논증들로 구성되는 과학적 지식.

과학에서의 모든 작업은 객관적 지식의 성장을 향한 겨냥된 작업이다. 우리는, 석공들이 성당 공사를 하는 것처럼, 객관적 지식의 성장을 증대시키고 있는 작업자들이다.

우리의 작업은, 모든 인간의 작업처럼, 오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들을 저지르고, 우리가 미치지 못할 객관적인 기준들이 진리, 내용, 타당성에 대한 기준들과, 다른 기준들 있다.

언어, 문제들의 정식화, 새로운 문제 상황들의 출현, 경쟁하는 이론들, 논증을 통한 상호간의 비판: 이 모든 것들이 과학적 성장의 필수불가결한 수단들이다. 인간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들이나 차원들은 (동물 언어들이 소유하지 않은)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및 논증적(論證的: argumentative) 기능들이다. 이 기능들의 성장은, 이 기능들이 우리의 행동들이 낳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일지라도, 물론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비판적 논증과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이 가능해지는 것은 다만 그렇게 풍요롭게 되는 언어 안에서이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두뇌들, 우리의 전통들 (누군가가 아담이 시작한 곳에서 시작한다면 그는 아담이 가는 것보다 더 멀리 가지 못할 터이다), 우리의 행동 의향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믿음들), 그리고 우리의 행동들 미치는 제3 세계의 진화의 반향들이나 정보(feed-back) 효과들은 아무리 과대평가되어도 지나치지 않는다.a

이 모든 것과 반대로, 전통적 인식론은 제2 세계에 관심을 갖는다: 특정 종류의 믿음으로서의 지각에 근거한 믿음과 같은 정당화가 가능한 믿음 지식에 관심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이런 종류의 믿음 철학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비판하여 그 이론들을 죽인다는 결정적인 현상을b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심지어 설명하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허위 이론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과학자들은 자신들 대신에 자신들의 이론이 죽도록 노력한다.c 믿는 사람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자신들이 지닌 허위 믿음들 때문에 죽는다.

 

5. 역사 속의 언급들

 

5·1·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우리가 지닌 정보에 따르면a, 플라톤은 제3 세계를 발견한 사람이었다. 화이트헤드(Whitehead)가 언급했듯이,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로 구성된다.

나는 플라톤에 관하여 세 가지 간략한 언급들만 하겠는데 그 언급들 중 두 가지는 비판적이다.

(1) 플라톤은 제3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에 미치는 제3 세계의 영향인 정보(feed-back)의 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가 그가 말하는 제3 세계의 이데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b 것을 깨달았다; 또한 우리가 그 이데아들을 설명들로서 사용하는b 것을.

(2) 플라톤의 제3 세계는 신()의 세계이다(divine)이다; 그 세계는 변하지 않으며 물론 참이다. 그리하여 그가 말하는 제3 세계와 내가 말하는 제3세계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내가 말하는 제3 세계는 인공적이고 변한다. 그 세계는 참인 이론들뿐만 아니라 허위 이론들 또한 포함하며, 특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추측들과 논박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변증법적 논증의 위대한 거장인 플라톤은 변증법적 논증 안에서 제3 세계로 통하는 길만을 보았던 반면, 나는 논증들을 제3 세계에게 수용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로서 간주한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말할 것도 없고.

(3) 플라톤은,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의 제3 세계가 우리에게 궁극적인 설명들을 (다시 말해서, 본질들에 의한 설명; 나의 1963년 저서, 3c 참조)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와 별도로 다른 어떤 것이 아름답다면 그것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에 어떤 일부라는 이유 때문에만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설명은 모든 것에 적용된다.’ (플라톤, 파이돈[Phaedon], 100c.)

이것은 궁극적 설명 이론이다; 다시 말해서, 설명항(explicans)d 추가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For all we know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동사들의 시제는 현재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미래 시제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한구 번역본에는 ‘3으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단어는 단수명사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복수명사로 번역되었다.

 

설명을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는 설명. 그리고 이것은 본질들에 의한 설명

이론이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실체가 부여된 단어들에 의한.

결과적으로 플라톤은 제3 세계의 대상들을 비-물질적 물체들과 같은 혹은 별들이나 성좌들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의 정신들에 의하여 접촉될 것 같지는 않을지라도 응시되거나 직관될 상상했다. 이것이, 3 세계에 수용된 것들이 형상들이나 이데아들 이론들이나 논증들이나 문제들이라기보다는 사물들에 대한 개념들이나 사물들의 본질들이나 본성들이 된 이유이다.

이것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가장 지대한 결과들을 미쳤다. 플라톤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유명론자들(唯名論者: nomonalists)이거나 아니면 내가 본질주의자들(本質主義者: essentialists)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론들이 지닌 진리나 허위에게보다는 단어들의 (본질적인) 의미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

나는 흔히 문제를 도표의 형태로 제시한다a (다음 쪽 참조).

나의 주장은, 오른쪽과 비교되어 이 도표의 왼쪽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론들이다; 진리; 논증. 그렇게 많은 철학자들 및 과학자들이, 개념들과 개념 체계들은 (그리고 그 개념들과 개념 체계들 혹은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문제들) 중요성에서 이론들 및 이론 체계들과 (그리고 이론들과 이론 체계들이나 서술들의 진리에 대한 문제들)과 비교될 수 있다고 여전히 생각한다면 그들은 여전히 플라톤의 주요 오류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다. 이유인즉 개념들이란 부분적으로 이론들을 요약하는 수단인 부분적으로 이론들을 정식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개념들의 중요성은 주로 도구적이다; 그리고 개념들은 항상 다른 개념들에 의하여 갈음될 것이다.

 

 

관념들

다시 말해서

 

명칭들이나 용어들이나 개념들은 서술들이나 명제들이나 이론들은

 

유의미

 

단어들 주장들

 

정식화될 것이고

 

그것들의

 

의미는 진리는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을 추론들을a

 

통하여

 

정의되지 않은(undefined) 개념들의 의미로b 기초명제들의 진리로b

 

 

환원될 것이다

그것들의

 

의미를 진리를

 

이 수단들에 의하여 확립하려는 (환원하기보다는) 시도는

 

무한회귀(無限回歸: an infinite regress)를 야기한다

 

사유 내용들과 사유 대상들은 스토아철학 및 신-플라톤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플로티누스(Plotinus), 경험적 세계와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의 세계를 플라톤이 구분한 것을 보존했다c.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플로티누스(Plotinus)는 플라톤이 말하는 세계의 초월성을 신()의 의식 속에 위치시킴에 의하여 그 초월성을 파괴해버렸다.

플로티누스(Plotinus)는 제1 실체와 (하나임[Oneness]) 2 실체 (신적[神的] 지성)을 구분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사유 행위들을 그 행위들 자체의 내용들이나 대상들과 동일시하는 데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했다; 그리고 그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해 가능한 세계의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이 신적(神的) 지성이 지닌 의식의 내재적 상태들이라고 생각함에 의하여 이 견해를 부연(敷衍)했다.

 

5·2· 헤겔(Hegel)

헤겔은 일종의 플라톤주의자였고 (혹은 더 정확하게 신-플라톤주의자) 플라톤처럼 일종의 헤라클레투스주의자였다. 헤겔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들의 세계가 변하고 있는, 진화하고 있는 플라톤주의자였다. 플라톤의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은 객관적이어서 주관적 정신에서의 의식적인 개념들과 관계가 없었다; 플라톤의 형상들이나 이데아들은 신적(神的)이며 불변하며 천상의 세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하늘의) 거주했다. 대조적으로 헤겔의 관념들(Ideas), 플로티누스(Plotinus)의 이데아들처럼, 의식적인 현상들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어떤 종류의 정신이나 영혼인 어떤 종류의 의식에 거주하는 사유들(thoughts); 그리고 이 영혼과 함께 헤겔의 관념들(Ideas)은 변하거나 진화하고 있었다. 헤겔의 객관정신절대정신이 변화한다는 사실은, 그가 말하는 정신들(Spirits)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들의 세계보다 (혹은 볼차노[Bolzano]가 말한 본질적인 서술들의 세계) 내가 말하는 3 세계와 더 유사한 유일한 요점이다.

헤겔의 객관정신절대정신과 나의 3 세계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들은 이것들이다:

(1) 헤겔에 따르면, 객관정신과 (예술적 창조를 포함하는) 절대정신 (철학을 포함하는) 모두가 인간의 산물들로 구성될지라도 사람은 창조적이 아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우주의 신적(神的) 자의식인 실체화된 객관정신이다: ‘개인들은... 도구들이다’, 시대정신의a 도구들 그리고 개인들의 본질적인 일인 개인들의 작업은 개인들과 독립적으로 마련되어 지정된다. (헤겔, 1830년 저서, 문단b 551과 비교하라.) 그리하여 내가 제3 세계의 자율성 및 그 자율성의 정보(feed-back) 효과라고 지칭한 것은 헤겔과 동시에 전능하게 된다: 그것은, 그의 신학적 배경이 드러나는 그의 이론체계의 측면들 중 한 가지 측면일 따름이다. 이것에 반대하여, 인간과 인간의 작품 사이의 주고받기 관계인 개인적인 창조적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헤겔에게서, 이것은 위대한 사람은 시대정신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매개체와 같은 것이라는 교설로 타락한다.a

(2) 헤겔의 변증법과 나의 진화적 도식인

 

P TT EE P

 

사이의 어떤 표면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나의 도식은, 오류-제거를 통하여 그리고 진리 탐구라는 규제적 개념 하에서 의식적 비판을 통한 과학적 수준에서 작동한다.

비판은 물론 모순들의 탐색과 그 모순들의 제거에 놓여있다: 모순들의 제거 요구에 의하여 야기되는 난제는 새로운 문제 (P )이다. 그리하여 오류 제거로 인하여 우리 지식의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의 객관적 성장이 생겨난다. 그로 인하여 객관적인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의 성장이 생겨난다: 그로 인하여 (절대적) 진리에 대한 근사치가 가능해진다.

헤겔은, 다른 한편으로, 상대주의자였다. 그는 우리의 과제를, 모순들을 제거할 목적을 지닌 모순들의 탐색으로서 보지 않는데 이유인즉 모순들이 비-모순적인 이론체계들만큼 훌륭하다고 (혹은 비-모순적인 이론체계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순들은 정신이 자체를 추진하는 기제(機制: mechanism)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합리적인 비판은 인간의 창조성이 역할을 못하는 것처럼 헤겔의 헤겔적 자동기제(自動機制: automatism)에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3) 플라톤은 자신의 실체화된 이데아들을 어떤 신적(神的) 천상에 거주하도록 하는 반면, 헤겔은 자신이 말하는 정신을 인격화하여 어떤 신적(神的) 의식으로 만든다: 인간의 개념들이 어떤 인간의 의식에 거주하는 것처럼 관념들은 어떤 신적(神的) 의식에 거주한다. 그의 교설은, 도처에서, 정신은 의식적일 뿐만 아니라 자아라는 것이다. 이것과 반대로, 나의 제3 세계에는 인간의 의식과 어떤 유사성도 없다; 그리고 그 세계에 첫 번째로 수용된 것들이 인간 의식의 산물일지라도, 그 수용된 것들은 주관적 의미에서의 의식적 관념들이나 사유들과 전혀 다르다.

 

5·3· 볼차노(Bolzano)와 프레게(Frege)

볼차노(Bolzano)의 본질적인 서술들과 본질적인 진리들은 분명히 나의 제3 세계에 거주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나머지 것들에 대한 그것들 관계에 관하여 확신하지 못했다.

3 세계의 위상 및 자율성을 동물 산물들의 위상 및 자율성과 비교함에 의하여 그리고 볼차노(Bolzano)의 핵심적 문제가 인간 언어의 고등 기능들 안에서 어떻게 유래하는지를 지적함에 의하여 내가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어떤 면에서 볼차노(Bolzano)의 핵심적 문제이다.a

프레게(Frege)에 관하여, 주관적 사유 행위들이나 주관적 의미에서의 사유와 객관적 사유나 사유 내용을 그가 분명하게 구분한 것에는 의심의 여기가 없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문장의 종속절들과 간접화법에 대한 그의 관심으로 인하여 그는 현대 인식논리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제시할 예정인 (아래 7절 참조) 인식논리학에 대한 비판에 의하여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b 내가 알 수 있는 한, 그는 과학적 지식 이론의 의미에서의 인식론의 이 문맥들에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5·4· 경험론

경험론은 가령, 로크와 버클리(Berkeley)와 흄(Hume)자체의 역사적 입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경험론의 주요 문제는, 다만, 종교 () 무종교(irreligion)였다; 혹은 더 정확하게, 과학적 지식에 비교되는 것으로서의 기독교의 합리적 정당화나 정당화 가능성.

이로 인하여 왜 지식이 도처에서 일종의 믿음으로서 경험에 의하여, 특히 지각적 증거인, 우리가 지닌 감각들의 증거에 의하여 정당화되는 믿음 간주되는지가 설명된다.

로크, 버클리(Berkely), 그리고 흄(Hume)의 입장들이 과학과 종교의 관계와 관하여 크게 다를지라도 증거가 불충분한 모든 명제들을 그리고 특히 존재적 중요성을 지닌 명제들 우리는 배척해야 하고 우리가 충분한 증거를 지닌 저 명제들만 수용해야 한다고는 요구에서 ([Hume]이 때때로 느끼기를 도달 불가능한 이상[ideal]) 그들은 본질적으로 동의한다: 우리가 지닌 감각들의 증거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거나 검증될 수 있는 저 명제들만.

이 입장은 다양한 방식들로 분석될 수 있다. 다소 일반적인 분석은 다음의 방정식들이나 동치들(同値: equivalences)의 연쇄일 터인데 대부분이 영국 경험론자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버트런드 러셀로부터 나온 구절들에 의하여 뒷받침될 수 있다.

p는 감각경험에 의하여 검증되거나 증명된다 = 우리가 p를 믿을 충분한

이유나 정당성이 있다 = p가 참임을 우리는 믿거나 판단하거나 주장하거나 동의하거나 안다 = p는 참이다 = p.

증거나 증명 그리고 증명될 주장을 융합하는 이 입장에 관하여 한 가지 두드러진 것은, 그 입장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틀림없이 배중률(排中律: law of excluded middle)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이용 가능한 증거에 의하여 p나 비-p(not-p)가 완벽하게 뒷받침되거나 증명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것은 (사실상, 그것은 실제로 정상적인 상황일 터이다.)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브로우베르(Brouwer) 이전에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주목되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배중률(排中律: law of excluded middle)을 이처럼 배척하지 못하는 것은

버클리(Berkeley)에게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유인즉

 

존재하는 것 = 지각되는 것이라면

 

실재에 관한 서술의 진리는 지각 서술들에 의해서만 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클리(Berkeley), 데카르트와 매우 유사하게, 자신의 대화(Dialogues)에서 p를 신뢰할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p를 배척해야 한다고 제안한다a. 그러나 그런 이유들의 부재는 비-p(not-p)를 신뢰할 이유들의 부재와 양립 가능할 것이다.

 

6. 브로우베르(Brouwer)의 인식론에 대한 이해와 비판

 

현재의 절에서 나는 L. E. J. 브로우베르(Brouwer)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수학자로서의 브로우베르(Brouwer)를 내가 칭찬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이고 그를 비판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심지어 더 주제넘은 것일 터이다. 그러나 그의 인식론과 그의 직관주의적 수학 철학을 내가 비판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허용될 것이다. 내가 감히 그렇게 한다면, 아무리 작을지라도 브로우베르(Brouwer)의 개념들을 설명하여 더욱 발전시키는 데 대하여 기여를 하려는 희망에서이다.

그의 첫 강연에서 (1912) 브로우베르(Brouwer)는 칸트로부터 시작한다. 칸트의 기하학에 대한 직관주의적 철학은b 공간에 대한 순수한 직관이라는 그의 교설 -유클리드 기하학에 비추어 포기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하학을 산술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철학이 필요하지 않다고 브로우베르(Brouwer)는 말한다: 칸트의 산술 이론에 대하여 그리고 산술은 시간에 대한 순수한 직관에 근거한다는 그의 교설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견해를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다.

브로우베르(Brouwer)의 이 입장은 더 이상 뒷받침될 수 없다고 나는 느낀다; 이유인즉 칸트의 공간 이론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하여 파괴된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그의 시간 이론은 특수 상대성에 의하여 파괴된다고 우리가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칸트가, 단지 하나의 시간이 있다고 그리고 (절대적) 동시성이라는 직관적 개념은 시간에 대하여 결정적이라고 명시적으로c 말하기 때문이다.

브로우베르(Brouwer)가 당시 아인슈타인의 시간 상대화와 비-유클리드 기하학 사이의 유사점에 대하여 알았더라면 직관론적 수학에 관한 자신의 인식론적 및 철학적 개념들을 아마도 전개하지 않았을 터라고 아마도 논증될 헤이팅(Heyting)의 언급과 다소 유사한 방식들에서 것이다. 헤이팅(Heyting)의 말을 의역하면, 이것은 불행한 일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브로우베르(Brouwer)는 특수 상대성에 의하여 지나치게 인상을 받았을 것a 같지는 않다. 그는 아마도 칸트를 자신의 직관주의의 선배로서 인용하는 것을 포기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인 시간이라는 우리 자신의 친숙하고 즉각적인b 경험의 시간이라는 이론을 유지할 수 있었을 터이다. (브로우베르[Brouwer], 1949년 저서 참조.) 그리고 칸트의 이론은 상대성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지라도 이것은 상대성에 의하여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c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브로우베르(Brouwer)를 칸트주의자로서 취급할 필요가 없다.d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칸트로부터 너무 쉽게 분리할 수 없다. 이유인즉 브로우베르(Brouwer)의 직관이라는 개념과 그의 직관이라는 용어 사용은, 그 개념에 대한 칸트의 배경을 분석하지 않고는, 완벽하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직관은 지식의 근원이다; 그리고 순수한직관은 (‘공간과 시간에 대한 순수한 직관’) 지식의 확실한 근원이다: 직관으로부터 절대적 확실성이 유래한다. 이것은, 칸트로부터 이 인식론적 교설을 명백하게 채택하는 브로우베르(Brouwer)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e

그것은 역사가 있는 교설이다. 칸트는 그 교설을 플로티누스(Plotinus), 성 토마스(St. Thomas), 데카르트,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가져왔다. 원래 직관은 물론 지각을 의미했다: 직관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본다면 혹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응시한다면 우리가 알거나a 지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플로티누스(Plotinus)에서부터 계속해서, 한편으로는 직관과 다른 한편으로는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b 사유 사이에서 대비가 발달했다c. 직관은 신()이 전광석화처럼 한 번 힐끗 보고 영원히 모든 것을 아는 방식이다.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b 사유는 인간의 방식이다: 담론에서처럼, 우리는 단계적으로 논증하는데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

당시 칸트는, 우리가 지성적 직관의 능력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우리의 지성은 우리의 개념들 정말로 그 개념들이 우리의 감각들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각 직관) 질료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혹은 그 개념들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순수한 직관에서 구축되는 개념들이 아니라면 공허하거나 분석적으로 남는다는 교설을 (데카르트와 반대가 되는) 옹호했다.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선험적으로 종합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지성은 본질적으로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b이다; 그 지성은 논리에 의하여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공허하다 분석적이다.

칸트에 따르면, 감각 직관은 순수 직관을 전제한다: 우리의 감각들은 자체의 지각들을 공간과 시간의 틀로 배열하지 않고는 자체의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 그리하여 공간과 시간은 모든 감각-직관에 앞선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론은 기하학과 산술학 선험적으로 타당하다. 기하학과 산술학의 타당성의 근원은 순수 직관이라는 인간의 기능인데 이 분야에 엄격하게 국한되고 사유의 지성적 혹은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b 방식과 엄격하게 구별된다.

칸트는, 수학의 공리들이 순수 직관에 근거한다는 교설을 주장했다 (칸트, 1787년 저서, 760쪽 이하): 그 공리들은 아는 것d혹은 지각하는 것이라는 비-감각적 방식으로 참으로 알려지거나 지각될 수 있을 터이다. 게다가, 순수 직관은 기하학에서의 모든 증명의 모든 단계(그리고 일반적으로 수학에) 관련되었다: 증명을 따르기 위하여e 우리에게는 (그려진) 도형을 볼 필요가 있다. 보는 것, 도형이 매우 거친 방식으로 그려졌을지라도 도형이 아마도 흔히 확신을 줄 것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그리고 삼각형 그리기가 아마도 한 가지 그리기에서 가능한 변종들의 무한성을 모든 형태들과 규모들의 삼각형들 우리에게 표상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밝혀지는 바와 같이, 감각-직관이 아니라 순수 직관이다.

유사한 고찰들이, 칸트에 따르면 세는 것에 근거하는 산술에 관해서도 성립한다; 반대로 근본적으로 시간에 대한 순수 직관에 근거하는 과정인 산술.

이제 수학적 지식의 근원들에 대한 이 이론은 자체의 칸트식 형태로 심각한 난제로 고통을 겪는다. 칸트가 말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인정할지라도 우리는 당혹 속에 남겨진다. 이유인즉 유클리드의 기하학이 순수 직관을 이용하든 아니든 틀림없이 논리적 연역인 지성적 논증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수학이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 사유를 이용한다는 것은 부인하기가 불가능하다. 유클리드의 담론은 단계별로 명제들과 전체 서적들을 통하여 움직인다: 그 담론은 단 하나의 직관적a 전광석화 속에서 상상되지 않았다. 논증을 목적으로 예외 없이 모든 개별적 단계에서 순수 직관에 대한 필요성을 우리가 인정할지라도 (그리고 이 인정은 우리 현대인들이 수용하기가 어렵다) 유클리드의 추론들의 단계적이고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이고 논리적인 절차는 전혀 오해의 여지가 없고 또 그 논리적 절차는 매우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모방이 되어서 (스피노자, 뉴튼) 칸트가 그 절차를 무시할 수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b 사실상 칸트는 아마도 어떤 사람만큼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1) ‘초월논적c 감성론초월론적c 논리학에 선행하는 순수이성비판(Critique)의 구조 때문에 (2) 그의 직관적 사유와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 사유의 예리한 구분 (나는 옹호될 수 없이 예리한 구분이라고 나는 제안해야겠다d)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현재 상황에서, 여기 칸트가 기하학과 산술로부터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 사유를 제외한 것에는 결함만이 아니라 모순도 있다고 말하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다.

이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브로우베르(Brouwer)에 의하여 밝혀졌는데 그는 그 결함을 채워 넣었다. 나는, 브로우베르(Brouwer)한편으로는 수학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와 논리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언급하고 있다.

브로우베르(Brouwer), 수학 같은 것그것의 언어적 표현 및 의사소통을 예리하게 구분함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수학 자체를 언어-외적(言語-外的: extra-linguistic) 활동, 특히 시간에 대한 우리의 순수 직관에 근거한 정신적 구축활동으로 그는 보았다. 이 구축을 통하여 우리의 직관에서, 우리의 정신에서, 나중에 수학의 대상들의 구축 이후에 우리가 기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수학의 대상들을 우리는 창조한다. 그리하여 언어적 기술(記述: description)과 지체의 논리를 지닌 논변적(論辨的) 논증은, 본질적으로 수학적인 활동 다음에 온다: 그것들은 항상 수학의 대상이 증명과 같은 구축된 이후에 온다.

이것은, 우리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Critique)에서 발견한 문제를 해결한다. 첫눈에 보기에 칸트에게서 모순으로 보이는 것은, 한 가지 수준이 수학적 사유를 위하여 직관적이고 정신적이고 본질적이며 다른 한 가지 수준이 의사소통만을 위하여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이고 언어적이고 본질적인 두 가지 수준들을 우리가 예리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교설에 의하여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제거된다.b

모든 위대한 이론처럼, 브로우베르(Brouwer)의 이 이론도 자체가 지닌 풍요로움에c 의하여 자체의 가치를 보여준다. 이 이론은 수리철학에서 세 가지 커다란 문제들의 집합들을 단번에 해결했다:

(1) 수학적 확실성의 근원에 관한 인식론적 문제들; 수학적 증거의 본성; 그리고 수학적 증명의 본성. 이 문제들은 각각, 지식의 근원으로서의 직관이라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at this is not so was shown by Brouwer who filled the lacuna인데 관계대명사의 선행사가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계속적인 용법으로 써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hat at first sight appears to be a contradiction in Kant is removed, in a most ingenious way, by the doctrine that we must sharply distinguish between

two levels, one level intuitive and mental and essential for mathematical thought, the other

discursive and linguistic and essential for communication only.인데 밑금 그은 부분이 형용사구로서 앞의 명사 one levelthe other를 뒤에서 수식할 수 없다. 관계대명사절로 표현해야 하는 문법적 오류이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fertilit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독창성으로 번역되었다.

는 교설에 의하여 풀렸다; 우리가 구축한 수학적 대상들을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는 교설에 의하여; 그리고 수학적 증명은 순차적 구축이거나 구축물들에 대한 구축이라는 교설에 의하여.

(2) 수학적 대상들의 본성과 그 대상들의 존재 양식의 본성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들. 이 문제들은, 두 가지 측면들을 지닌 교설에 의하여 풀렸다: 한 가지 측면에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가 있었고 다른 측면에는 내가 2 세계로 지칭하는 것 속에 모든 수학적 대상들을 위치시킨 유심론(唯心論: mentalism)이 있었다. 수학적 대상들은 인간 정신의 구축물들이었고 인간 정신 속에서 구축물들로서만 존재했다. 그 대상들의 객관성은 대상들로서 그 대상들이 지닌 특징 그리고 그 대상들의 존재에 대한 객관성 마음대로 그 대상들의 구축을 반복하는 능력에 전적으로 원인이 있었다a.

그리하여 브로우베르(Brouwer)는 자신의 첫 강연에서, 직관주의자에게는 수학적 대상들이 인간 정신 속에 존재한다고 시사할 수 있었다; 형식주의자에게는 수학적 대상들이 이론상b존재하는 반면.

(3) 수학적 증명들에 관한 방법론적 문제들.

우리는 수학에 관심을 갖는 두 가지 주요 방식들을 아주 어리숙하게 구분할 것이다. 한 명의 수학자는 주로 정리(定理: theorem)수학적 명제들의 진리나 허위성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또 다른 수학자는 주로 증명들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런 저런 정리(定理: theorem)에 대한 증명들의 존재에 관한 문제들에, 그리고 증명들의 특징에. 첫 번째 증명이 중요하다면 (예를 들어 폴라[Polya]의 경우인 듯한), 그 증명은 통상적으로 수학적 사실들의 발견에 대한 관심과 그리하여 플라톤화하는 수학적 발견학습법과 연결된다. 두 번째 종류의 관심이 중요하다면, 증명들은 수학적 대상들에 관한 정리들(定理: theorems)을 확실히 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수학적 대상들 자체들이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브로우베르(Brouwer)의 경우였다: 증명들이었던 저 구축물들은 수학적 대상들을 창조하여 확립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증명들은 동시에 자체가 수학적 대상들이었다 아마도 심지어 가장 중요한 수학적 대상들. 그리하여 정리(定理: theorem)를 주장하는 것은 그 정리(定理: theorem)에 대한 증명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었고, 정리(定理: theorem)를 부인하는 것은 반박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 정리(定理: theorem)의 불합리성에 대한 증명을a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브로우베르(Brouwer)의 배중률 배척이, 그의 간접적 증명들의 배척이 그리고 존재는 문제의 수학적 대상을 실제로 구축함에 말하자면 가시적으로 만듦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는 요구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b

이로 인하여 또한 플라톤주의에 대한 브로우베르(Brouwer)의 배척이 이루어지는데, 그 배척에 의하여 수학적 대상들에는 내가 존재의 자율적양식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있다는 교설을 우리는 이해할 것이다: 수학적 대상들은, 우리에 의하여 구축되지 않고도 그리하여 존재한다고 증명되지 않고도 존재할 것이라는 교설.

 

지금까지 주로 브로우베르(Brouwer)의 인식론이 칸트의 수리철학에서 난제를 해결하는 시도로부터 유래한다고 추측함에 의하여 나는 그 인식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는, 이 절의 제목에서 내가 선언한 것으로 브로우베르(Brouwer)의 인식론에 대한 평가와 비판으로 나아간다.

현재 논문의 관점에서, 수학은 그리고 아마도 제3 세계를 나는 추가할 것이다 인간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것을 브로우베르(Brouwer)가 안 것은 그의 위대한 업적들 중 한 가지 업적이다.

이 개념은 매우 급진적으로 반()-플라톤적이어서 일종의 플라톤주의와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브로우베르(Brouwer)가 알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 가능하다. 나는, 수학의 (부분적) 그리고 위 3절에서 개괄된 것으로서의 제3 세계의 자율성이라는 교설을 의미한다.

브로우베르(Brouwer)의 다른 위대한 업적은, 철학적 관점에서, 그의 반()-형식주의였다.c 수학적 대상들은 우리가 그 대상들에 관하여 말할 수 있기 전에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그의 인식.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a proof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leads immediately to Brouwer’s rejection of the law of the excluded middle, to his rejection of indirect proofs, and to the demand that existence can be proved only by the actual construction the making visible as it were of the mathematical object in question인데 the demand that existence can be라는 표현의 demand라는 명사 때문에 the demand that existence be로 표현함이 옳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rouwer’s other great achievement, from a philosophical point of view, was his anti-formalism인데 otheranother의 오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번역도 다른이 아니라 또 다른이 된다.

그러나 현재의 절의 앞쪽에서 토론된 수리철학의 세 가지 주요 문제들의 집합들에 대한 브로우베르(Brouwer)의 해결책에 대한 비판으로 나는 선회하고 싶다.

(1') 인식론적 문제들: 일반적인 직관과 특수한 시간 이론.

나는 직관론이라는 명칭을 바꾸자고 제안하지 않는다. 그 명칭의 의심의 여지없이 유지될 것이기 때문에, 무오류성 지식 근원으로서의 직관이라는 그릇된 철학을 포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권위적인 지식의 근원들은 없어서 어떤 근원도 특히 신뢰를 받을 수 없다.직관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영감의 근원으로서 환영을 받는다; 특히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들을 제시한다면. 그러나 어떤 것도 안전하지 못하고 우리 모두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게다가 직관과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 사유에 대한 칸트의 예리한 구분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직관, 그것이 무엇이든, 주로 우리의 문화적 발전의 그리고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 사유에서의 우리의 노력들의 산물이다. 우리 모두에 의하여 공유되는 (아마도 유사한 지각적 기관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에 의해서 공유되지 않는) 순수 직관에 대한 한 가지 표준 유형이라는 칸트의 개념은 수용될 수 없다. 이유인즉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 사유에서 우리 자신들을 훈련시킨 이후에 우리의 직관적 이해는 이전의 직관적 이해와 전혀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 적용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호피(Hopi) 인디언들에 관한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의 보고서와 시간에 대하여 전혀 다른 그 인디언들의 직관이 설득력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올바르지 않다할지라도 (내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칸트나 브로우베르(Brouwer)가 고려한 적이 없는 가능성들을 이 보고서는 보여준다. 워프(Worf)가 옳다면,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이해는 우리가 시간적 관계들을 보는방식 우리의 언어에 그리고 그 언어에 포함된 이론들과 신화들에 부분적으로 의존할 터이다: 시간에 대한 우리 자신의 유럽적 직관은,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 사유에 대한 그 직관의 강조와 함께 우리 문명의 그리스 근원들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고 있을 터이다.

아무튼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우리의 변하는 이론들에 따라서 변할 것이다. 뉴튼, 칸트 그리고 라플라스(Laplace)의 직관들은 아인슈타인의 직관과 다르다; 그리고 입자물리학에서의 시간의 역할은, 연속체 물리학 특히 광학에서의 시간의 역할과 다르다. 입자물리학이 미래로부터 과거를 분리하는 시간의 점(punctum temporis)인 면도칼-같은 연장되지 않은 순간을 제안하고 그리하여 연장되지 않은 순간들 (그 순간들의 연속체) 및 그 상태가 그런 연장되지 않은 순간 동안 주어질 세계로 구성되는 시간 좌표를 제안하는 반면, 광학에서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그 격자들의 부분들이 상당한 공간 간격에 걸쳐서 협동하는 광학에 공간적으로 확장된 격자들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사건들의 부분들이 상당한 시간 간격에 걸쳐서 협동하는 시간적으로 연장된 사건들이 (주파수들을 지닌 파동들) 있다. 그리하여 광학 덕분에, 물리학에는 찰나의 세계 상태는 있을 리가 없다. 이 논증으로 인하여 우리의 직관에는 커다란 차이가 틀림없이 생기고 정말로 생긴다a: 심리학에 관하여 지각들이 참여하는 시간(the specious present)으로 지칭되었던 것은 허울만 그럴듯하지 않고 심리학에 국한되지도 않으며 진짜이고 이미 물리학에서 발생한다.

그리하여 무오류의 지식의 근원으로서의 직관이라는 일반적인 교설은 허구일 뿐만 아니라 더욱 특히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브로우베르(Brouwer)자신의 인정에 따라서, 공간에 대한 우리의 직관만큼 비판과 수정을 받아야 한다.

여기서 나의 주요점은 라카토스(Lakatos)의 수리철학 덕택이다. 그것은, 수학이 (그리고 자연과학들뿐만 아니라) 추측들에 대한 비판과 대담한 비형식적 증명들을 통하여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추측들과 증명들의 언어적 정식화와 그리하여 제3 세계에서의 그것들의 위상을 전제한다. 언어는 처음에 단지 언어 이전의 대상들에 기술들(記述: descriptions)을 의사소통하는 수단인데 그리하여 심지어 수학에서도 과학적 열정의b 필수적인 부분이 되는데 그 부분은 그 다음에 제3 세계의 부분이 된다. 그리고 언어에는 계층들이나 수준들이 있다 (그것들이 상위언어들의 계층구조로 정식화되는 아니든).

직관론적 인식론이 옳다면, 수학적 능력은 문제가 되지 않을 터이다. (칸트의 이론이 옳다면, 왜 우리가 아니면 더 정확하게 플라톤과 그 학파 유클리드를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는지는 이해 가능하지 않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문제인데 왜냐하면 심지어 고도로 유능한 직관론적 수학자들도 몇 가지 어려운 요점들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견 불일치에서 어느 편이 옳은지를 우리가 묻을 필요는 없다. 직관론적 구축이 비판을 받자마자 제기된 문제는 논증적 언어를 필수적인 방식으로 사용함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을 따름임을 지적하면 충분하다. 물론 필수적인 언어의 비판적 사용으로 인하여 직관론적 수학에 의하여 금지된 논증들을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밝혀질 바와 같이, 여기에 문제가 있다할지라도). 이 순간 나의 요점을 단지 이렇다: 제기된 직관론적인 수학적 구축의 수용가능성이 의문시될 수 있게 되자마자 그리고 물론 그것은 의문시될 수 있다 언어는, 원칙적으로 제거될 수 있을 터인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 이상이 된다: 언어는, 더 정확하게, 비판적 토론의 필수불가결한 매개체가 된다. 따라서 언어는 더 이상, 어느 주체가 구축을 수행하는지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인은 직관론적 구축만이 아니다;a 더 정확하게, 모든 과학의 객관성이 그러한 바와 같이 심지어 직관론적 수학의 객관성도 자체가 주장하는 논증들에 대한 비판 가능성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가 비판적 토론인 논증의 매개체로서 필수불가결하게 됨을 의미한다.

내가 브로우베르(Brouwer)의 주관론적 인식론과 그의 직관론적 수학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오류로 간주하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구축, 비판, ‘직관그리고 심지어 전통 사이에는 의견교환이 (give-and-take) 있는데 그것을 그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심지어 그의 잘못된 언어의 위상에 대한 견해에서도 브로우베르(Brouwer)는 부분적으로 옳았음을 기꺼이 인정하겠다. 수학을 포함하여 모든 과학의 객관성이 자체에 대한 비판 가능성과 그리하여 자체의 언어적 정식화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할지라도, 수학이 형식적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서 언어-외적(言語-外的: extra-linguistic) 수학적 대상들과 같은 그런 것들은 없다는 주장에 강력하게 반대하여 반응했다는 데서 브로우베르(Brouwer)는 옳았다; 다시 말해서, 사유들과 (혹은 나의 견해로 더 정확하게, 사유 내용들) 같은 것들은 없다는 주장에. 그가 주장했던 바와 같이, 수학적인 말은(talk) 이 대상들에 관해서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수학적 언어는 이 대상들에 부차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언어 없이 수학을 구축할 수 있을 터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단한 비판적 통제 없이는 구축이 있을 수 없고, 우리의 구축물들을 언어적 형태로 표현하여 그 구축물들을 제3 세계의 대상들로서 다루지 않고는 비판이 있을 수 없다. 3 세계가 언어적 형태들의 세계와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3 세계는 논증적 언어들과 함께 출현한다: 3 세계는 언어의 부산물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의 구축물들이 문제시, 체계화 그리고 공리화 되자마자 언어도 문제화가 되는 이유와 정식화가a 수학적 구축의 한 분야가 될 이유가 설명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마이힐(Myhill) 교수가 우리의 직관들이 우리의 정식화들을a 형성하는 반면 우리의 정식화들은a 우리의 직관들을 교정한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이다. 이 언급을 특별히 인용할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은, 브로우베르의(Brouwerian) 직관론적 증명과 관련하여 수행되어 이 언급은 정말로 브로우베르의(Brouwerian) 인식론에 대한 교정을 제공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2') 존재론적 문제들: 수학의 대상들의 존재가 부분적으로 언어의 덕택이라는 것을 때때로 브로우베르(Brouwer) 자신이 보았다b. 그리하여 그는 1924년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표시들이나 기호들의 [“Zeichen”] 무한수열에 혹은 기호들로 구성된 유한수열들의 무한수열에 수학은 근거한다 [“Der Mathematik liegt zugrunde”]...’c 이것은 언어의 우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읽힐 필요가 없다:d 물론 결정적인 용어는 수열이고 수열이라는 개념은 시간에 대한 직관에, 그리고 이 직관에 기초한 구축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표시들이나 기호들이 구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함을 브로우베르(Brouwer)가 의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자신의 견해는,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 사유가 (다시 말해서, 언어적 논증들로 구성된 수열들)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의식에 그리고 수열적 질서에 대한 우리의 직관의 발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브로우베르(Brouwer)의 구성주의(constructivism)와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주관론 및 유심론(唯心論: mentalism)과 정말로a 충돌한다. 이유인즉 수학의 대상들은 이제 객관적인 제3 세계의 시민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에 의하여 구축되었다할지라도 3 세계는 우리의 산물로서 시작한다 사유 내용들은 자체와 함께 자체가 유발하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들을 지닌다. 우리가 구축하는 자연수의 수열은 소수들(prime numbers)우리가 발견하는 만들어내고 이것들은 나중에 우리가 결코 꿈꾸지 않은 문제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수학적 발견이 가능해지는 방식이다. 게다가 우리가 발견하는 가장 중요한 수학적 대상들은 3 세계의 가장 풍요로운 시민들 문제들이고 새로운 종류들의 비판적 논증들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류의 수학적 존재가 출현한다: 문제들의 존재;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직관: 우리가 문제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그리고 우리가 문제들을 해결하기 이전에 문제들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직관. (연속체에 대한 브로우베르[Brouwer] 자신의 핵심적 문제를 생각하라.)

언어와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 사유가 더 즉각적인 직관적 구축들과 상호작용하는 (부수적으로, 직관적 구축이 실현하기로 예상되는 절대적인 증거성 확실성이라는 이상을 파괴하는 상호작용) 방식은 헤이팅(Heyting)에 의하여 매우 계몽적인 방식으로 기술되었다. 나는 자극뿐만 아니라 격려 또한 내가 받은 그의 글귀들 중 한 글귀의 시작 부분을 아마도 인용할 것이다: 수학에서 직관적으로 분명한 것은 직관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증거 등급들의 하향 규모를 구축하는 것이 심지어 가능하다. 최고의 등급은, 2 + 2 = 4와 같은 주장들의 등급이다. 1002 + 2 = 1004는 낮은 등급에 속한다; 우리는 이것을, 실제로 셈하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n + 2) + 2 = n + 4....에는 [이와 같은 서술들] 다음 함의라는 특징이 이미 있음을 밝히는 추론에 의하여 증명한다: “자연수 n이 구축된다면, (n + 2) + 2 = n + 4에 의하여 표현되는 구축을 우리는 실행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재의 상황에서, 헤이팅(Heyting)이 말하는 증거 등급들은 부차적인 관심사이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직관적 구축과 반드시 우리를 논변적(論辨的: discursive) 그리하여 논리적 추론에 포함시키는 언어적 정식화 사이의 불가피한 상호작용에 대한 그의 아름답게 단순하고 분명한 분석이다. 헤이팅(Heyting)이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 요점은 강조된다: ‘이 수준은 자유-변수 계산(free-variable calculus)에서 정식화된다.’

브로우베르(Brouwer)와 수학적 플라톤주의에 관하여 마지막 말이 언급될 것이다. 3 세계의 자율성은 부인될 수 없고 그로써 브로우베르(Brouwer)의 방정식 존재 = 구축(esse = construi)’은 포기되어야 한다; 적어도 문제들을 위하여.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직관론에 대한 논리라는 문제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직관론적 증명 기준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비판적인 합리적 토론을 통하여 주장과 그 주장을 위한 증거를 예리하게 구분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구분은, 증거나 증명과 증명될 주장의 융합으로부터 생기는 직관론적 논리에 의하여 파괴된다.

(3') 방법론적 문제들: 브로우베르(Brouwer)가 말하는 직관론적 수학의 원래 동기는 안전이었다: 증거에 대한 더 안전한 방법들의 탐구; 사실상, 무오류의 방법들의 탐구. 이제 여러분이 더 안전한 증거들을 원한다면, 여러분은 증명성 논증의 수용가능성에 대하여 더 엄격해야 한다: 여러분은 더 약한 전제들인 더 약한 수단들을 사용해야 한다. 브로우베르(Brouwer) 자신은, 고전적 논리학의 논리적 수단들보다 더 약한 논리적 수단들을 사용하는 데 국한했다. 더 약한 수단에 의하여 정리(定理: theorem)를 증명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과제이고 수학적 문제들의 중대한 근원들 중 한 가지 근원이다 (그리고 항상 그랬다). 그리하여 직관론적 방법론은 흥미롭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증명들에 대해만 성립한다고 제안한다. 비판을 위하여, 반박을 위하여 우리는 빈약한 논리를 원하지 않는다. 증명의 수단은a 약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는 반면, 비판의 수단은a 강력해야 한다. 비판에서 우리는 불가능성들 증명하는 것에 국한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비판에 관하여 무오류성을 주장하지b 않으며, 어떤 이론에 반()-직관적 결론들이 있음을 우리가 밝힐 수 있다면 우리는 흔히 만족한다. 비판의c 도구에서a 취약과 검약은 미덕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론이 강력한 비판을 견디어낼 수 있다는 것은 이론 안에서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직관론적 구축의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논쟁에서는 상위-논쟁(meta-debate) 완전히 고전적인 논리의 사용이 용인될 것임은 합당한 듯하다.)

 

7. 논리학, 확률론 그리고 물리과학에서의 주관론

 

5절에서 언급된 것, 특히 경험론에 관한 것을 고려하면 제3 세계에 대한 무시가 그리고 결과적으로 주관론적 인식론 현대의 사유에서 틀림없이 여전히 만연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브로우베르의(Brouwerian) 수학과 관련이 없는 곳에서도 다양한 전문분야들에서 발견되는 흔히 주관론적 경향들이 있다. 나는 여기서, 논리학과 확률론 및 물리과학에서의 몇 가지 그런 경향들을 언급하겠다.

 

7·1· 인식 논리학(Epistemic logic)

인식 논리학은 αp를 안다αp인 것을 안다그리고 αp를 믿는다’, 혹은 αp인 것을 믿는다와 같은 공식들을a 다룬다. 인식 논리학은 통상적으로 이것들을

 

Kαp혹은 Bαp

 

의하여 기호화 하는데 거기서 KB는 각각 알기와 믿기라는 관계들을 상징하고 α는 알거나 믿는 주체이고 p는 알려지거나 믿어지는 명제들이나 사태를 상징한다.

1절에서의 나의 첫 번째 주장은, 이것은 과학적 지식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유인즉 내가 S로 지칭할 과학자는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매우 간략한 목록을 제시하겠다:

S p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Sp에 대한 대안을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Sp에 대한 비판을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Sp에 대하여 실험적 시험을 제안한다.’

Sp를 공리화 하려고 노력한다.’

Sq로부터 p를 도출하려고 노력한다.’

Spq로부터 도출될 수 없음을 밝히려고 노력한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formula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형식들로 번역되었다.

Sp로부터 출현하는 새로운 문제 x를 제안한다.’

Sp로부터 출현하는 새로운 문제 x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안한다.’

S는 문제 x에 대한 자신의 최근 해결책을 비판한다.’

 

목록은 얼마간 더 길게 확장될 수 있을 터이다. 목록은, ‘Sp를 안다Sp를 믿는다나 심지어 Sp를 잘못 믿는다Sp를 의심한다로부터 특징에서 동떨어져 있다. 사실상, 우리가 비판하지 않고 의심할 것과 의심하지 않고 비판할 것은 매우 중요한 요점이다. (우리가 그렇게 할 것은 푸앵카레[Poincaré]과학과 가설[Science and Hypothesis]에서 보일 것인데 그 저서는 이 요점에서 러셀의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Our Knowledge of the External World]과 대비될 것이다.)

 

7·2· 확률론

확률계산의 분야에서보다 주관론적 인식론이 더 강력한 지지를 받는 곳은 없다. 이 계산은 불대수(Boolean algebra)(그리하여 명제들의 논리의) 일반화이다. 이 계산은 무지(無知: ignorance)의 계산이나 불확실한 주관적 지식의 계산으로서 주관적으로 의미로 여전히 널리 해석된다; 그러나 이것은, 명제들의 계산을 포함하여 불대수(Boolean algebra)확실한 지식의 주관적 의미에서의 확실한 지식 계산으로서 해석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것은, 베이즈이론가들(Bayesians)(확률계산의 주관적 해석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지금 자신들을 지칭하는 바와 같이)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결과이다.

확률계산에 대한 이 주관적 해석과 나는 33년 동안 싸웠다, 근본적으로 그 해석은, ‘나는 눈이(snow) 희다는 것을 안다라는 서술에게 눈은(snow) 희다라는 서술에게보다 더 큰 인식론적 위엄을 귀속시키는 동일한 인식론적 철학에서 유래한다.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증거에 비추어 눈은(snow) 희다라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내가 믿는다는 서술에 훨씬 더 큰 인식론적 위엄을 우리가 귀속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물론 확률서술들에게도 동일한 것인 실행될 수 있을 터이다.

 

7·3· 물리과학

1926년경 이래 주관적 접근방식은 과학에서 많은 진보를 이룩했다. 먼저 그 접근방식은 양자역학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양자역학에서 주관적 접근방식은 매우 강력해져서 그 접근방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침묵해야 하는 바보들로 간주되었다. 그 다음에 주관적 접근방식은 통계역학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역기서 질라드(Szilard)1929년에, 물리적 엔트로피의 증가에 의하여 주관적 정보에 대하여 우리가 대가를 치러야한다는 지금쯤에는 거의 보편적으로 수용된 견해를 제안했다; 그것은, 물리적 엔트로피는 지식의 결여이어서 주관적 개념이라는 그리고 지식이나 정보는 물리적 음 엔트로피(negentropy)와 대등하다는 증거로서 해석되었다. 이 발전사항은, 의사소통의 경로들에 대한 완벽하게 객관적인 이론으로 출발했지만 나중에 질라드(Szilard)의 주관론적 정보 개념과 연결된 정보 이론에서의 유사한a 발전사항과 말끔하게b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주관적 지식론은 과학에 광범위하게 진입했다. 원래 진입의 장소는c 확률의 주관적 이론이었다. 그러나 그 사악한 이론은 통계역학과 엔트로피 이론으로, 양자역학으로 그리고 정보 이론으로 퍼졌다.

물론 이 강연에서 이 모든 주관론적 이론들을 반박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내가 그 이론들과 수년 동안 싸웠다고 (가장 최근에는 나의 1967년 저서에서) 말하는 것 이상을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어떤 환상도 품지 않는다.d 조류가 바뀌기까지는 (붕게[Bunge] 1967년 저서에 의하여 예상된) 언젠가 조류가 정말로 바뀐다면 훨씬 더 많은e 세월이 걸릴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두 가지 최종적 요점들만 있다.

먼저, 객관론적 관점에서 인식론이나 발견의 논리는 무엇과 같은지와 그것이 어떻게 발견의 생물학을 조금 조명할 수 있는지를 밝히려고 나는 노력하겠다.

둘째로, 이 강연의 마지막 절에서 동일한 객관론적 관점에서 발견의 심리학이 무엇과 같은지를 지적하려고 노력하겠다.

 

8. 논리학과 발견의 생물학

 

객관론적 관점에서 인식론은 지식의 성장 이론이 된다. 인식론은 경쟁하는 추측성 이론들 중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다시 말해서, 구축되어 비판적으로 토론되어 평가를 받고 비판적으로 시험되는 이론이 된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paralle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병행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neatl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교묘하게로 번역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poin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요점으로 번역되었다.

d 역주: 이 문장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e 역주: ‘훨씬 더 많은의 원어는 many mor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수많은으로 번역되었다.

이제 나는, 경쟁하는 이론들에 관하여 그 이론들의 수용이라기보다는 그 이론들에 대한 평가나 그 이론들 중 한 가지 이론에 대한 선호를 말하는 것이 아마도 더 낫다고 생각한다. 단어들이 중요하다고 나는 제안하지 않는다.

모든 수용은 객관적이고 비개인적인 중요성을 띤다기보다는 잠정적이고 믿음처럼 지나가는 것이고 개인적인 것임이 기억된다면 수용의 사용으로 인하여 해로움이 유발되지 않는다.

경쟁하는 이론들에 대한 평가는 부분적으로 시험하기에 앞서고 (‘선험적으로 타당한을 의미하는 칸트적 의미의 용어에서가 아닐지라도 여러분이 원한다면 선험적인) 부분적으로 시험하기 이후이다 (다시 타당성을 의미하지 않는 경험적인). 또한 시험하기에 앞서는 것은 이론의 (경험적) 내용인데 그것은 이론이 지닌 (사실상의) 설명력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이론을 야기한 문제들 그리고, 그 문제들과 관련하여 이론들이 경쟁하는 이론들이 되는 저 문제들 해결하는 이론의 능력.

이전에 존재하는 문제들의 어떤 집합과 관련해서만 이론들은 (선험적으로) 평가될 수 있고 그 이론들이 지닌 가치들이 비교될 수 있다. 이론들이 지닌 소위 단순성 역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에서 이론들이 경쟁하는 문제들과 관련해서만 비교될 수 있다.

내용과 사실상의 설명력은, 이론들에 대한 선험적 평가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규제적 개념들이다. 내용과 사실상의 설명력은 이론들이 지닌 시험가능성의 등급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내용과 사실상의 설명력에 대한 경험적 평가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개념은 진리이거나, 우리에게 더 접근 가능한 비교 개념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진리에 대한 근접성’,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로 지칭한 것이다.a 내용이 없는 이론이 참일 수 있는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y]와 같이) 반면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은 진리 내용이라는 규제적 개념에 근거한다는 것이 중요하다;b 다시 말해서, 이론이 지닌 흥미롭고 중요한 참인 결과들의 수량이라는 개념에 근거한다는 것. 그리하여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y)는 참일지라도 0진리 내용43 0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을 지닌다. 항진명제(恒眞命題: tautology)에는 물론 확률 1이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내용과 시험가능성과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개연성에 의하여 측정될 수 있다.

이론에 대한 경험적 평가는, 이론이 엄격하고도 독창적인 시험들을 견디어낸 정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나 엄격한 시험들은 반대로 선험적 시험가능성이나 내용의 높은 등급을 전제한다. 그리하여 이론에 대한 경험적 평가는 주로 그 이론이 지닌 선험적 가치에 의존한다: 선험적으로 흥미롭지 않은 내용이 없는 이론들은 시험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들이 지닌 낮은 시험가능성의 등급으로 인하여, 그 이론들이 실제로 중요하고 흥미로운 시험들을 통과해야 할 선험적 가능성이 배제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고도로 시험 가능한 이론들은 자체에 대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지라도 흥미롭고 중요하다; 그 이론들의 실패로부터 우리는 크게 배울 수 있다. 그 이론들의 실패는 생산적일지도 모르는데, 이유인즉 그 실패로 인하여 더 나은 이론을 구축하는 방법이 실제로 제시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 평가에 대한 이 모든 강조는 아마도, 높은 경험적 가치들에 대한 이론들이 물론 항상 추측성이나 가설적이나 잠정적으로 남을지라도 고도의 진리 내용을 지닌 이론들을 얻는 데 대한 우리의 관심에 궁극적으로 기인하는 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을 터이다. 우리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지성적으로 흥미롭고 고도로 시험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체의 경쟁 이론들보다 엄격한 시험들을 더 잘 통과한 이론들이다; 그리하여 자체의 문제들 더 잘 해결하는 이론들; 그리고 자체가 지닌 추측성 특징이 자체에 대한 반박에 의하여 명백해진다면, 새롭고 기대되지 않고 생산적인 문제들을 낳는 이론들.a

그리하여 우리는, 과학은 문제들로 시작하여 그곳에서 과학이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경쟁하는 이론들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그 이론들이 지닌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대한 평가이다. 이것에는 엄격한 비판적 시험들이 요구되고 그리하여 고도의 시험가능성의 등급들을 전제하는데 그 등급들은 이론이 지닌 내용에 의존하고 그리하여 선험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경우들에서, 이론은 궁극적으로 붕괴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룩된 진전은, 원래 문제와 이론의 붕괴로부터 귀결되는 새로운 문제 사이의 지성적 격차에 의하여 평가된다.

이 순환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이용한 도식에 의하여 다시 기술될 수 있다:

 

P TT EE P ;

 

다시 말해서: 문제 P 잠정적 이론 평가적 오류 제거 P .

평가는 항상 비판적이고 평가의 목적은 오류의 발견과 제거이다. 지식의 성장은 혹은 학습의 과정 반복적이거나 축적성 과정이 아니라 오류-제거의 과정이다. 지식의 성장은 라마르크적(Lamarckian) 지시(instruction)라기보다는 다윈적(Darwinian) 선택이다.

이것은 객관적 관점에서 인식론에 대한 간략한 기술이다: 객관적 지식의 성장을 겨냥하는 방법이나 논리. 그러나 그 방법이 제3 세계의 성장을 기술할지라도, 그 방법은 생물학적 진화에 대한 기술로서 해석될 수 있다. 동물들 그리고 심지어 식물들도 문제-해결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경쟁적인 잠정적 해결책들과 오류 제거의 방법에 의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한다.

동물들과 식물들이 자신들의 구조와 행태를 통합시키는 잠정적 해결책들은 생물학적으로 이론들과 유사한 것들이다; 그리고 역순도 성립한다: 이론들은 체내(體內: endosomatic) 기관들이나 그 기관들의 작동 방식들에 해당한다 (벌집들과 같은 많은 체외[體外: exosomatic] 산물들, 특히 거미줄들과 같은 체외[體外: exosomatic] 산물들이 그러한 바와 같이). 이론들과 꼭 마찬가지로, 기관들과 그 기관들의 작동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잠정적 적응들이다. 그리고 이론들과 꼭 마찬가지로, 혹은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관들과 그 기관들의 작동들 및 또한 새로운 종류들의 행태가 자신들이 변화시키기에 도움을 줄 제1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새로운 잠정적 해결책은 이론, 기관[器官: an organ], 새로운 종류의 행태 새로운 가설적 생태 지위를 발견할 것이고 그리하여 가설적 지위를 실제적 지위로 변환할 것이다.) 새로운 행태나 기관들(器官: organs)은 또한 새로운 문제들을 출현을 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그것들은, 새로운 생물학적 가치들의 출현을 포함하여 진화의 추가적 과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감각 기관들에 대해서도 또한 성립한다. 감각 기관들은, 더욱 특히, 이론-같은 기대사항들을 통합한다. (eye)과 같은 감각 기관들은 특정 선택된 환경적 사건들에 감각 기관들이 기대하는저 사건들에 그리고 단지 저 사건들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론들(그리고 편견들)처럼 감각 기관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건들을 알지 못할 것이다: 감각 기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감각 기관들이 해석할 수 없는 (왜냐하면 감각 기관들이, 생명체가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특정 문제에 대응하지 않기 때문에) 사건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감각 지각들을 주어진 것으로서, 어떤 귀납의 과정에 의하여 우리의 이론들이 구축되어야 하는 자료들로서 생각하는 고전적 인식론은 다윈-이전으로서 기술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인식론은, 이른바 자료들이 사실상 적응적 반응들이고 그리하여 이론들과 편견들을 통합하며 이론들처럼 추측성 기대들이 함유된 해석들이라는 사실을 헤아리지 못한다; 순수한 지각, 순수한 자료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모든 언어들에는 이론들과 신화들이 함유되기 때문에 순수한 관찰적 언어가 있을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eyes)이 보이지 않거나 기대되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언어들은 그것을 기술할 수 없다 (우리의 언어들이 우리의 감각 기관들이 체외적으로[體外的으로: exosomatically] 뿐만 아니라 체내적으로[體內的으로: endosomatically]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성장할 수 있다할지라도).

이론들과 기대들은 바로 우리의 감각 기관들 안에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 고찰로 인하여, 귀납 인식론은 심지어 첫발을 떼기도 전에 붕괴함이 드러난다. 이론들을 (혹은 기대들 다시 말해서,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이론들의 생물학적 선행자들) 토대로 구축되지 않는 감각 자료들이나 지각들과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귀납 인식론은 감각 자료들이나 지각들로부터 출발하여 그것들을 토대로 우리의 이론을 구축할 수 없다. 그리하여 자료들은 이론의 토대들도 아니고 이론들에 대한 보증도 아니다: 자료들은 우리의 이론들이나 편견들중 어떤 것보다 더 안전하지 않지만 안전할지라도 우리의 이론들이나 편견들중 어떤 것보다 덜 안전하다 (논증을 위하여 감각 자료들이 존재하고 철학자들의 발명물들이 아니라고 전제하여a). 감각 기관들은 원초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이론들과 대등한 것을 통합하는데 그것들은 과학적 이론들보다 덜 폭넓게 시험된다. 게다가 자료들을 기술하는 데 이론-없는 언어는 없는데 왜냐하면 신화들은 (다시 말해서, 원시적 이론들) 언어와 함께 출현하기 때문이다. 문제들과 동시에 이론들에 해당하는 생명체들이 지닌 잠정적 해결책 없는 생명체들은 동물들이고 식물들이고 없다; 감각 자료들이 없는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이 높거나 그렇게 보일지라도 (적어도 식물들에서).

그리하여 생명은, 과학적 발견처럼, 옛 문제들로부터 새롭고 꿈도 꾸지 않은 문제들의 발견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 과정은 발명과 선택의 과정 본질적으로 출현에 관한 합리적 이론을 담고 있다. 새로운 수준으로 이어지는 출현의 단계들은 먼저, 옛 문제에 (P ) 대한 잠정적인 이론적 해결책에 (TT) 대한 오류-제거에 (EE) 의하여 생성되는 새로운 문제이다 (P ).

 

9. 발견, 인본주의 그리고 자기-초월

 

인본주의자에게는a 우리의 접근방식이 중요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 접근방식이 우리 자신들과 주체들 우리의 노력들의 대상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객관적 지식, 성장하는 제3 세계.

지식을 주관적 정신과 알려진 대상 사이의 관계로서 러셀에 의하여 믿음이나 판단으로 지칭되는 관계 해석하는 오래된 주관적 접근방식은, 내가 객관적 지식으로서 간주하는 저것들을 단지 정신적 상태들의 발언들이나 표현들로서 (혹은 상응하는 행태로서) 간주했다. 이 접근방식은 인식론적 표현주의(epistemological expressionism)로서 기술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 접근방식이 예술의 표현주의적 이론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작품은 자신의 내적 상태의 표현으로서 간주된다: 인과적 관계가 전적으로 강조되고, 그리고 회화나 음악의 세계와 같은 객관적 지식의 세계는 사람들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인정되지만 과대평가된 사실이 강조된다.

이 견해는 매우 다른 견해에 의하여 갈음될 수 있다. 객관적 지식의 (혹은 더 일반적으로 객관적 정신의) 세계인 제3 세계가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은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가 큰 규모까지 자율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그 세계가 자체의 문제들을, 특히 성장의 방식들과 연계된 문제들을 생성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들 중 누구에게나 미치는, 심지어

 

philosophers’ inventions로 분사구문으로 쓰였는데 분사구문의 주어가 자료들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분사구문이 아니라 절로 표현해야 한다.

a 역주: 이 표현의 원어는 For a humanis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인본주의자로서로 번역되었다.

 

창조적 사상가들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사람들에게 미치는 그 세계의 충격은

그 세계에 우리들 중 누군가 미칠 수 있는 충격을 크게 초월한다는 것.

그러나 상황을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을 잘못된 일일 터이다. 내가 가장 중요한 요점으로서 간주하는 것은, 3 세계의 순전한 자율성과 익명성이나 우리가 항상 거의 모든 것을 우리의 선배들이나 그 선배들이 창조한 전통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인정되는 바와 같이 매우 중요한 요점이 아니다:a 그리하여 우리가 제3 세계에 특히 우리의 합리성을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관적 정신과 비판적이고 자기-비판적인 사유방식들의 실천 및 상응하는 의향들 빚지고 있다는 인정되는 바와 같이 매우 중요한 요점. 내가 제안하는 바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작품 사이의 관계이고 이 관계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표현주의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자신의 재능과 재주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스스로 표현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결과는, 작가의 정신적 혹은 생리적b 상태에 따라 좋거나 나쁘다.

이것에 반대하여, 우리 자신들과 우리 작품 사이의 의견교환에(give-and-take) 모든 것이 달렸다고 나는 제안한다; 우리가 제3 세계에 기여하는 산물에, 그리고 의식적인 자기-비판에 의하여 확대될 수 있는 부단한 정보에 (feed-back) 달렸다고. 생명, 진화 그리고 정신적 성장에 관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은, 우리의 행동들과 우리가 그 행동들에 의하여 부단히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재능들과 우리의 재주들을 초월하는 우리의 행동들의 결과들 사이의 이 상호작용인 바로 이 의견교환의 (give-and-take) 방법이다.

이 자기-초월은, 모든 생명과 모든 진화 그리고 특히 인간 진화의 가장 두드러지고 중요한 사실이다.

이 자기-초월은 자체의 인간 이전의 단계들에서는 덜 명백하고, 그리하여 정말로 자기-표현과 같은 것으로서 오해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수준에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hat I regard as the most important point is not the sheer autonomy and anonymity of the third world, or the admittedly very important point that we always owe almost everything to our predecessors and to the tradition which they creat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내가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간주하고 있는 것은 제3세계의 단순한 자율성과 익명성도 아니다. 우리가 항상 거의 모든 것을 우리 선행자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한 전통 덕택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로 번역되었는데 우리가 항상 거의 모든 것을 우리 선행자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한 전통 덕택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번역문은 아래 두 번째 문장과 연결되면 서로 상치되는 문장임이 드러난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physiological인에 이한구 번역본에는 심리학적으로 번역되었다.

자기-초월은 실제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조망될 수 있다.a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일어나는 상황과 같이 우리의 이론들에게도 동일한 상황일 발생할 것이다: 우리의 어린이들은 주로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독립적이 되는 경향을 띤다. 그리고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일어날 상황과 같이, 우리의 이론들에게도 동일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래 이론들에게 전달한 것보다 더 큰 수량의 지식을 이론들로부터 얻을 것이다.

배움의, 주관적 지식의 성장의 과정은 항상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 과정은 상상적 비판이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을 초월하는 환경들을 생각하려고 노력함에 의하여 우리의 국지적(local)이고 일시적인(temporal) 환경을 우리가 초월하는 방식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혹은 습관으로서 보일 것의 (혹은 철학자들이 기술할 것) 보편성이나 구조적 필연성을 비판함에 의하여; 새로운 상황들을 다시 말해서, 비판적 상황들인 시험 상황들 발견하고, 구축하고, 창안하려고 노력함에 의하여; 그리고 우리의 편견들과 습관적 전제들을 발견하고 탐색하여 도전하려고 노력함에 의하여.

이것이, 우리의 자력으로 우리의 무지라는 곤경으로부터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고양시키는 방법이다; 우리가 밧줄을 공중에 던진 다음에 아무리 불안할지라도 그 밧줄이 작은 가지 걸린다면 그 밧줄에 몰려들어 올라가는 방법.

우리의 노력들을 동물이나 아메바의 노력들과 차별화하는 것은, 우리의 밧줄이 비판적 토론으로 구성된 제3 세계에 걸릴 것이라는 것뿐이다. 언어의, 객관적 지식의 세계. 이로 인하여 우리가 경쟁하는 이론들 중 몇 가지 이론을 버리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운이 좋다면, 아메바가 자신의 이론,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습관들 때문에 사멸하는 반면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이론들 (그리고 그 이론들 대부분은 오류이다) 중 몇 가지 이론들로부터 살아남는 데 성공할 것이다b.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문제-해결과 발견이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생각된 가능성들 시험하기를 통한 새로운 사실들의, 새로운 가능성들의 발견. 인간의 수준에서, 이 시험하기는 이 제3 세계의 이론들 안에 우리의 제1 세계와 혹시 우리의 제2 세계를 점점 더 성공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들에 의하여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on the human level, self-transcendence can be overlooked

only by a real effor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러나 인간의 수준에서 자기-초월은 어떤 역작에

의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we may succeed in surviving some of our mistaken theori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우리는 잘못된 이론들 중 몇 개를 살아남게 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거의 전적으로 제3 세계 안에서 수행된다; 우리의 문제들과 유관한 진리에 더 충실하고, 더 완벽하고, 더 흥미롭고, 논리적으로 더 강력하고 더 관련성이 있는 진리 더 근접하려고 노력함에 의하여.a

2 세계로 지칭될 것은 정신의 세계 인간의 수준에서, 점점 더 제1 세계와 제3 세계의 연결고리가 된다: 1 세계에서의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제3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제2 세계 이해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3세계를 (‘객관적 심경이나 정신’) 이해하지 않고는 인간의 정신이나 인간의 자아를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이유이다; 그리고 제3 세계를 제2 세계의 표현으로서만, 혹은 제2 세계를 제3 세계의 반영으로서만 해석하기가 불가능한 이유.

학습 이론가들에 의하여 불충분하게 구분된 학습하다라는 동사에는 세 가지 의미들이 있다: ‘발견하다’; ‘모방하다’; ‘습관적으로 만들다’. 세 가지 의미들 모두는 발견이라는 형태들로서 간주될 것이며, 세 가지 의미들 모두는 (지나치게 중요하지는 않고 통상적으로 많이 과대평가된) 우연이라는 요소를 포함하는 시행착오 방식들로써 작용한다. ‘습관적으로 만들다는 최소한의 발견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추가 발견을 위하여 불필요한 것을 제거한다; 그리고 그 의미에 있는 표면적으로 반복적인 특징은 오해를 낳는다.

이 모든 다양한 지식의 학습이나 습득이나 생산 방식들에서 그 방식은 라마르크적(Lamarckian)이라기보다는 다윈적(Darwinain)이다; 그 방식은 반복에 의한 지시(instruction)이라기보다는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는, 라마르크론[Lamarckism]이 다윈론[Darwinism]에 대한 일종의 근사치라는, 그리하여 선택의 산물들은 흔히 반복을 통한 지시[instruction]라는 라마르크적[Lamarckian] 적응인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b: 다윈론은 라마르크론을 모의 실험한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은 양날의 칼이다: 우리를 선택하여 변화시키는 것은 환경만이 아니다 주로 새로운 생태적 지위를 발견함에 의하여 환경을 선택하여 변화시키는 것 또한 우리이다. 인간의 수준에서, 전체적으로 새로운 객관적인 세계와의 객관적인 새로운 잠정적인 목표들과 가치들을 포함하는 객관적인 잠정적 지식의 세계인 제3 세계 협력에 의하여 우리는 이렇게 한다. 우리는 그 세계 안에서

a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by trying out to get nearer to the truth to a fuller, a more

complete, a more interesting, logically stronger and more relevant truth to truth relevant

to our problems.인데 밑금 그은 to truth는 불필요하게 쓰인 듯하다. 그리고 relevant to our problems라는 형용사구는 명사를 뒤에서 수식할 수 없기 때문에 관계대명사절로 표현함이 옳다.

b역주: ‘간과해서는 안 된다라는 부분의 원어 표현은 should not overlook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훑어보지는 않을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우리의 정신 상태를 표현함에 의하여 이 세계를 주조하거나 지시하지않는다; 또한 그 세계가 우리에게 지시하지도 않는다. 우리들 자신들과 제3 세계 모두가 상호간의 갈등과 선택을 통하여 성장한다. 이것은 효소와 유전자의 수준에서 성립하는 듯이 보인다: 유전암호는, 지시나 명령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선택이나 거부에 의하여 작용하는 것으로 추측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이론들의 표현적이고 비판적인 언어까지 모든 수준들에서 계속해서 참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보다 완벽하게 설명하면, 생명 체계들은 자체의 내부 상황과 (특히 자체의 유전적 구성) 자체의 외부 상황에 (환경) 의하여 제한되거나 국한된 특정 영역이나 범위 안에서 자유로운다시 말해서, 결정되지 않은 잠정적 행태의 객관적인 산물들이나 결과들로서 보일 것이다. 그 다음에 성공이라기보다는 실패가a 자연선택에 의하여 성공적인 반응 방식의 상대적b 고착을 낳는다. 유전암호가 동일한 방식에 의하여 단백질들의 합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언급될 것이다: 직접적인 자극이나 지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특정 잠재적인 화학적 합성들의 예방이나 제거에 의하여. 이로 인하여 선택을 통한 유전암호의 발명이 이해 가능하게 될 터이다. 그 발명은 겉으로 보이는 자체의 지침들을 오류-제거의 결과인 금지들로 변환시킬 터이다; 그리고 이론처럼, 유전암호는 선택의 결과일 터일 뿐만 아니라 유전암호는 또한 선택이나 금지나 예방에 의하여 작용할 터이다. 이것은 물론 추측이지만 나는 매혹적인 추측이라고 제안한다.

 

 

 

 

 

 

 

 

 

 

 

a 역주: 이 명사의 원어는 ill-succes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서투른 성공으로 번역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번역은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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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ty), 1956.

비트겐슈타인, L.,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

 

 

참고문헌 주석 (1978)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그의 작품을 나는 나의 지성적 자서전의 주석 89에서 간략히 토론했다; P. A. 쉴프[Shilpp] (편집) 칼 포퍼의 철학[The Philosophy of Karl Popper], 1974; 그리고 끝나지 않은 탐색[Unended Quest], 폰타나/콜린스[Fontana/Collins], 1976년 참조) 공헌을 강조하기 위하여, 주관적 의미에서의 사유와 객관적 의미에서의 사유의 구분 역사에 관하여 이 장()과 다음 장()에서 행한 언급들을 나는 간략하게 확대하고 싶다.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1873년에 태어났고 프레게(Frege)보다 약 25년 아래인데 프레게(Frege)1848년에 태어났다. 곰페르츠(Gomperz)(자신의 1908년 저서에서) 객관적 의미에서의 사유와 주관적 의미에서의 사유를 분명하게 구분했다. 곰페르츠(Gomperz)는 이것에서 후설(Husserl)논리 탐구(Logische Untersuchungen) 1900-1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후설(Husserl)은 반대로 볼차노(Bolzano)와 프레게(Frege)(특히 후설[Husserl]의 심리학주의에 (1891) 대한 프레게[Frege]의 검토에 (1894) 의하여) 의하여 강력하게 영향을 받았다; 아래 162, 4장의 주석 12 참조): 그리하여 하인리히 곰페르츠(Heinrich Gomperz)의 저서는 (1908) 의심의 여지없이 프레게(Frege)에 의하여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곰페르츠(Gomperz)는 이것을 알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후설(Husserl)이 자신에게 미친 프레게(Frege)의 영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162쪽의 주석 12를 쓸 때 나는 그만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인식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이 참고문헌으로부터 나타날지라도 곰페르츠(Gomperz)의 저서가 (1908) 프레게(Frege)사유(Der Gedanke)보다 (1918) 10년 앞서서 발간되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프레게(Frege)(1918년에) ‘3 영역(Das dritte Reich)로 지칭했던 그리고 내가 지금 3 세계로 지칭하는 개념의 이전 역사에서 곰페르츠(Gomperz)에 의하여 수행된 역할이, 내가 이 장()을 서술할 때 내가 깨달은 것보다 크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곰페르츠[Gomperz]가 종국에는 심리학주의적 이론에 의존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의 끝나지 않은 탐색[Unended Quest], 주석 89 및 원문 참조). 전체 역사는 신중하게 재검토될 가치가 있을 터이다: 프레게(Frege)가 곰페르츠(Gomperz)의 저서를 알고 있었음을 가능성이 없지 않은데 그 저서는 예나(Jena)에서 발간되었고 그곳에서 프레게(Frege)는 연구하고 있었다. 곰페르츠의 저서가 (1908) 의미의 의미(The Meaning of Meaning), 루틀리쥐 & 키건 폴(Routledge & Kegan Paul), 1923, 1972년에서 C. K. 오그든(Ogden)I. A. 리처즈

(Richards)에 의하여 토론되었다는 것은 다소 흥미롭다; 274-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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