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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지식, 2장 상식의 두 가지 얼굴

이윤진이카루스 2018. 11. 9. 12:48

2. 상식의 두 가지 얼굴: 상식적

실재론을 찬성하는 그리고 상식적

지식론을 반대하는 논증

 

1. 철학의 위한 변명

 

오늘날 여하한 형태로든 철학에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변명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혹시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별도로 하고, 대부분의 전문적인 철학자들은 실재와의 접촉을 잃어버린 듯하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다양한 방식들로 해석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요점은 마르크스주의를 바꾸는 것이다.’

나의 견해로, 철학의 가장 큰 추악함은 우리 주변 도처에서 자연의 세계가 게다가 자연의 세계만은 아니다a 멸망하는 반면 철학자들은 이 세계가 존재하는지의 문제에 관하여 때때로 영리하게 그리고 때때로 영리하지 못하게 계속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를 들어 있는 것존재하는 것사이의 차이점들이 있는지 없는지와 같은 언어적 수수께끼들에, 중세 스콜라철학에 흥미를 느낀다. (현대 예술에서처럼, 이 철학의 세계들에는 표준들이 없다.)

국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강력했고 실망한 젊은이들 특히 학생들 사이에서 다시 강력해지기 시작하고 있는 만연한 반()-지식적 태도가 이론 종류의 스콜라철학과 꼭 마찬가지로 나쁘고, 때때로 아주 탁월할지라도, 심지어 철학자들과 다른 지식인들의 가식적이고 허위인 장광설보다 가능하다면 다소 더 나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 태도는 조금만 더 나쁜데 이유인즉 지식인들의 배반으로 인하여 반()-지성주의가 거의 불가피한 반작용으로서 환기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젊은이들에게 빵 대신 돌을 먹인다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젊은이들은 빵집주인을 돌 던지는 사람으로 혼동할지라도 젊은이들은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이 상황 하에서는 철학자임에 대하여, 그리고 더욱 특히 세계의 실재성 주장인 실재론과 같이 틀림없이 사소한 것을 다시 서술하는 것에 (단지 지나가는 길에서라 할지라도, 내가 하려고 의도하는 바와 같이) 대하여 옹호할 필요가 있다. 나의 설명은 무엇인가?

나의 설명은 이렇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든 아니든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의 철학들이 있으며 우리의 철학들에는 매우 큰 가치가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들과 우리의 생활들에 미치는 우리 철학들의 충격은 흔히 파멸적이다. 이로 인하여 비판에 의하여 우리의 철학들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이 필요해진다. 이것이,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철학의 지속적인 존재에 대한 유일한 정당화이다.

 

2. 불안한 출발점: 상식과 비판

 

과학, 철학, 합리적 사고 모두가 틀림없이 상식에서 출발한다.

아마도 상식이 안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상식이라는 용어는, 그 용어가 모호하고 변하는 것을 흔히 합당하거나 참이고 흔히 합당하지 않거나 허위인 많은 사람들의 본능들이나 의견들 의미한다는 이유만으로, 매우 모호한 용어이다. 상식처럼 모호하고 불안한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출발점을 제공할 수 있는가? 나의 답변은: 우리는, 안전한 이론체계를 이 토대들위에 세우려고 의도하거나 시도하지 (가령,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나 로크[Locke], 버클리[Berkeley] 혹은 칸트가 그랬던 것과 같이)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출발할 수 있는 우리의 많은 상식적 전제들 중 어떤 전제도 지칭될 바와 같이, 우리의 상식적 배경지식 어느 때고 도전을 받아서 비판될 수 있다; 흔히 그런 전제는 성공적으로 비판되어 배척된다 (예를 들어, 지구는 평평하다는 이론). 그런 경우에, 상식은 교정에 의하여 수정되거나 몇몇 사람들에게는 더 짧거나 더 긴 시간 동안 다소 미친 것으로서 보일 이론에 의하여 초월되거나 대체된다. 그런 이론이 이해되기 위하여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면, 그 이론은 상식에 의하여 심지어 영원히 흡수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런 경우에 우리가 다음과 같은 이상(ideal)에 가능한 한 근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우리는 요구할 수 있다: 모든 과학, 모든 철학은 개화된 상식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호한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불안한 토대들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비판 이후에, 우리가 틀렸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실수들로부터,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깨달음으로부터, 우리는 배울 수 있다.

(부수적으로, 상식은 지식 이론에서 특히 허위적이었다는 것은 나는 나중에 밝히려고 시도하겠다. 이유인즉 상식 지식론이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봄에 의하여 혹은 더 일반적으로, 관찰에 의하여 우리가 세상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은 그릇된 이론이다.)

그리하여 나의 첫 번째 주장은, 우리의 출발점은 상식이라는 것 그리고 진보를 위하여 우리가 지닌 도구는 비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으로 인하여 즉각 난제가 생긴다. 우리가 이론을, 가령 T 을 비판하고 싶다면 그 이론이 상식적 특징을 지녔든 아니든 우리에게는 어떤 다른 이론 T 가 필요한데 그 다른 이론은 우리에게 T 을 비판하기 위하여 필요한 근거나 출발점이나 배경을 제공한다고 언급되었다. T 이 일관적이 아님을 우리가 밝힐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경우에만 (‘내재적 비판이라고 지칭되는 경우인데 그곳에서 T 이 허위임을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T 을 이용한다) 우리가 다르게 진행한다; 다시 말해서, T 으로부터 터무니없는 결론들이 귀결됨을 발힘에 의하여.

비판의 방법에 대한 이 비판은 부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비판이 주장하는 것은, 모든 비판은 내재적이거나 초월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초월적비판의 경우에는 우리가 T 의 진실성을 독단적으로 전제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비판적으로 진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a) 이유인즉 실제로 발생하는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hat it alleges is that all criticism must be either ‘immanent’ or ‘transcendent’, and that in the case of ‘transcendent’ criticism we do not proceed critically since we have to assume dogmatically the truth of T .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것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모든 비판은 내재적이거나 초월적이라는 것인데, ‘초월적비판의 경우에는 우리가 비판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독단적으로 T 의 참을 전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것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관적인 이론이라고 추측하는 T 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비판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우리가 느낀다면, T 가 의도되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들을 (그 결과들이 논리적으로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낳는다는 것을 우리가 밝히던지 T 과 충돌하고 T 보다 어떤 이점들을 지녔음을 우리가 밝히려고 노력하는 경쟁하는 이론 T 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밝힌다. 이것이 필요한 유일한 것이다: 우리가 경쟁하는 이론들을 지니자마자, 비판적이거나 합리적인 토론을 위한 많은 기회가 있다: 우리는 이론들의 결론들을 탐색하고 우리는 특히 그 결론들의 약점들을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오류일 결론들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종류의 비판적이거나 합리적인 토론은 때때로 이론들 중 한 이론의 명백한 패배를 낳을 것이다; 더욱 흔히 그런 토론은 두 가지 이론들 모두가 지닌 약점을 꺼내는 데 도움을 줄 따름이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어떤 추가적 이론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한다.

지식 이론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이론들이 성장하거나 진보할 것이라고 여기서 주장되는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이나 조사이다.

 

3. 다른 접근방식들과의 대비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매우 하찮게 보일 것이다. 그것에 개념을 부여하기 위하여, 나는 그것을 다른 접근방식들과 매우 간략하게 대비하겠다.

데카르트는 아마도, 최초로 모든 것이 우리의 출발점의 안전성에 의존한다고 말한 사람이다. 이 출발점을 실제로 안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그는 의심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절대적으로 의심될 수 없는 것만 수용하라.

그 다음에 그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출발했는데 심지어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의심하는 사람의 (의심하는 주체)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그 존재는 그가 보기에 의심될 수 없었다.

이제 데카르트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적이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내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회의적이 아니다. 그러나 나도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그리고 이로 인하여 내 자신과 두세 명의 친구들을 제외하고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분명히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들은 다소 중요하지만 내 자신의 존재는 세상이 또한 끝나지 않고도 끝날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동의할 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상식적 견해이고 실재론이라고 지칭될 것의 핵심적 원리이다. (실재론은 곧 더 완벽하게 토론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믿음이 데카르트의 이론체계를 닮은 어떤 것의 무게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출발-개념으로서 그 믿음은 너무 좁다. 또한 나는 부수적으로, 그 믿음이 데카르트가 (용서를 받을만하게) 믿었던 것처럼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휴 루틀리쥐(Hugh Routledge)의 탁월한 저서 에베레스트 1933(Everest 1933)에서 자기에게 적당한 것보다 더 높이 등반한 세르파들 중 한 명인 키파(Kipa)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 글을 읽는다: ‘불쌍한 노인 키파(Kipa)의 당황한 정신은 자기가 죽었다는 생각을 완강하게 여전히 고수했다.’ 나는 불쌍한 노인 키파(Kipa)의 생각이 상식이거나 심지어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지만, 그 생각으로 인하여 데카르트가 주장하고 있던 직접성과 의심불가능성이 의심스러워진다. 여하튼, 우리의 생각하는 자아의 존재를 신뢰하는 것은 훌륭하고 건전한 상식임을 내가 기꺼이 인정할지라도, 나는 확실함에 대하여 유사한 주장을 할 것을 제안하지 않는다. 내가 도전하고 싶은 것은 데카르트의 출발점이 지닌 진실성이 아니라 그가 그 출발점으로써 수행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그 출발점의 충분함과 부수적으로 그 출발점에서 주장되는 의심불가능성이다.a

로크(Locke), 버클리(Berkeley), 그리고 심지어 회의적인(Hume)과 많은 그들의 후계자들, 특히 러셀과 무어(Moore) 주관적 경험들은 특히 안전하여 안정된 출발점이나 토대로서 합당하다는 견해를 데카르트와 함께 공유했다; 그러나 그들은 주로 관찰의 특징을 지닌 경험들에 의존했다. 그리고 리드(Reid), 내가 그와 실재론 및 상식 고수를 공유하는데, 우리에게는 외부적이고 객관적인 실재에 대한 어떤 매우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며 안전한 지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과 반대로, 우리의 경험에는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인 것이 없다고 나는 제안한다: 우리에게는 시간에서 확대되어 심지어 잠자는 동안 및 완전히 무의식인 동안에도a 계속 존재하는 자아가 있음을 우리는 배워야 하고,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신체들에 대하여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것은 모든 암호풀기, 즉 해석이다. 우리는 암호풀기를 매우 잘 배워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매우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이 된다; 그러나 모스 부호를 배운 사람이나, 더 익숙한 사례를 들면, 책을 읽는 것을 배운 사람에게도 그렇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복잡한 암호풀기의 과정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겉으로 드러나는 직접성과 즉각성은, 피아노 연주나 자동차 운전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훈련의 결과이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지닌 암호풀기 재주들에는 유전적인 토대가 있다고 추측할 이유가 있다. 아무튼 우리는 때때로 암호풀기에서 특히 학습기간 동안에 정말로 오류들을 저지르지만 나중에 또한 특히 특이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렇다. -습득된 암호풀기 과정의 즉각성이나 직접성이 결점 없는 작동을 보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실제적 목적들을 위하여 지금까지 상황이 충분한 잘 작동한 듯이 보일지라도, 절대적인 확실성은 없다. 지식의 안전한 토대를 위한, 확실성을 위한 추구는 포기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지식의 문제를 나의 선배들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본다. 지식에 대한 주장들의 안정성과 정당화는 나의 문제가 아니다. 대신, 나의 문제는 지식의 성장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식의 성장이나 진보를 말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우리는 이룩할 수 있는가?

 

4. 실재론(Realism)

 

실재론(Realism)은 상식에 필수적이다. 상식, 즉 계몽된 상식은 현상과 실재를 구분한다. (이것은, ‘오늘 공기가 매우 맑아서 산들이 실재로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보인다와 같은 사례들에 의하여 예시될 것이다. 아니면 혹시, ‘그는 노력 없이 그 일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는 긴장이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라고 나에게 고백했다’.) 그러나 상식 또한, 현상들에도 (가령, 거울의 반사) 일종의 실재가 있음을 깨닫는다; 혹은 달리 표현하여, 표면 실재와 다시 말해서, 현상 깊이 실재가 있을 수 있음을. 게다가 많은 종류의 실재적 물체들이 있다. 매우 명백한 종류는, 음식물이나 (음식물은 실재에 대한 느낌의 토대를 만들어낸다고 나는 추측한다) 돌들과 나무들 그리고 인간들 같은 더 저항적인 대상들의 (objectum = 우리가 행동하는 길에 놓인 것) 종류이다.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even during sleep and total unconsciousnes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잠자고 있는 완전히 무의식적인 동안에도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식품들, 돌들(stones) 그리고 나무들 및 인간 육체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들을 우리가 주관적으로 해독하는 것과 같은 완전히 다른 많은 종류들의 실재가 있다. 음식물들과 돌들(stones)의 맛이나 무게는 또 다른 종류의 실재를 포함하고 나무들과 인간 육체들의 속성들도 그렇다. 이 많이 구분된 우주에서 다른 종류들에 대한 사례들은: 치통, 단어, 언어, 교통법규, 소설, 정부의 결정; 타당하거나 부당한 증거; 아마도 힘들(forces), 힘들의 장들(fields of forces), 경향들, 구조들; 그리고 규칙성들. (나의 논평들로 인하여 많은 종류들의 대상들이 서로 관련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완전히 개방된 상태로 남는다.)

 

5. 실재론을 위한 논증들

 

나의 주장은, 실재론이 증명될 수도 없고 반박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논리학과 유한 연산(finite arithmetic) 외부의 다른 어떤 것과 같은 실재론은 증명될 수 없다; 그러나 경험적 과학 이론들이 반박될 수 있는 반면, 실재론은 심지어 반박될 수 없다. (실재론은 반박불가능성을 많은 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이론들과, 특히 또한 관념론과 공유한다,) 그러나 실재론은 논증될 수 있고 그 논증들의 무게는 압도적으로 실재론을 지지한다.

상식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실재론의 편에 있다; 물론 심지어 데카르트 이전에도 사실상 헤라클리투스(Heraclitus) 이래 항상 우리의 평범한 세계가 혹시 단지 우리의 꿈인지 아닌지의 몇몇 의심스러운 암시들이 있다. 그러나 심지어 데카르트와 로크(Locke)도 실재론자들이었다. 실재론과 싸우는 철학 이론은 버클리(Berkeley), (Hume) 그리고 칸트 이전에는 진지하게 출발하지 않았다. 칸트는, 부언하여, 심지어 실재론에 대한 증명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타당한 증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실재론에 대한 타당한 증명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를 우리가 확신해야 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체의 가장 단순한 형태로, 관념론은 말한다: 세계는 (나의 현재 청중을 포함하는) 나의 꿈일 뿐이다. 이제 이 이론이 (여러분이 그 이론이 허위임을 알지라도) 반박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의 청중인 여러분이 여러분의 실재를 나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무슨 일을 나에게 말하기, 혹은 편지쓰기, 또는 혹시 나에게 발길질하기 할지라도 그 일은 도저히 반박의 힘을 띨 수는 없다; 이유인즉 나는, 여러분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중이라고 혹은 나는 편지를 받았다거나 발길질을 느꼈다고 나는 꿈을 꾸고 있다고 계속해서 말할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혹시, 이 답변들 모두가 다양한 정도들로 책략들을 면역으로 보호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그렇고, 이것은 관념론에 대항하는 강력한 논증이다. 그러나 다시, 그것이 스스로-면역으로 보호하는 이론이라는 것이 관념론을 반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관념론은 반박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실재론이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실재론이 증명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념론처럼 반박될 수도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겠다; 기술될 수 있는 어떤 사건도 그리고 상상될 수 있는 어떤 경험도 실재론에 대한 효과적인 반증으로서 생각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이 사안에는 매우 많은 사안들에서와 같이, 결정적인 논증이 없다. 그러나 실재론을 지지하는 논증들이 있다; 혹은 더 정확하게, 관념론을 반대하는.

(1) 아마도 가장 강력한 논증은 두 가지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a) 실재론은 상식의 일부이다, 그리고 (b) 실재론에 반대하여 주장되는 모든 논증들은 이 용어의 가장 비판적인 의미에서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상식의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부분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정신의 양동이 이론으로 지칭했던 상식적 지식론의 그릇된 부분에; 아래 12 13절 참조.

(2) 유감스럽게도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몇몇 사람들에게는 과학이 오늘날 다소 구식일지라도,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나 우리 시대에는 유진(Eugene) P. 위그너(Wigner)와 같이 실재론자들이 아닌 과학자들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재론에 대한 과학의 관련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논증들은 매우 명백하게 방금 (1) (b)에서 규정된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잠시 동안 원자물리학에 (양자역학) 관하여 잊자.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는 아니라할지라도 거의 모든 물리적, 화학적 혹은 생물학적 이론들은 그 이론들이 참이라면 실재론이 틀림없이 또한 참이라는 의미에서 실재론을 의미한다. 이것이, 우리가 몇몇 사람들이 과학적 실재론을 말하는 이유들 중 한 가지 이유이다. 그것은 매우 훌륭한 이유이다. 실재론의 (표면적) 시험가능성 결여 때문에, 내 자신은 실재론을 과학적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으로 우연히 선호하여 부른다a.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든, 과학에서 우리가 시도하는 것은 실재를 기술하여 (가능한 한)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탁월한 이유들이 있다. 추측성 이론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참이기를 (혹은 참에 가깝기를) 희망하지만,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이론이어서 개연적이라는 용어가 확률계산과 연상되지 않는 조건으로 개연적으로 지칭될 최고의 이론들일지라도 우리가 확실한 것으로서 혹은 심지어 개연적인 것으로서 (확률계산의 의미에서) 증명할 수 없는 이론들.

우리가 과학적 실재론을 말할 수 있는 밀접하게 관련되고 탁월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채택하는 절차는, 진리에 점진적으로 가깝게 오는 경향이 우리의 추측성 이론들에게 있다는 의미에서 성공을 낳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반[]-합리적인 태도들 때문에 그 절차가 붕괴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특정 사실들이나 실재의 모습들에 대하여 참인 기술들을 낳을 것이다.a

(3) 그러나 우리가 과학으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논증들을 중단할지라도 언어로부터 나오는 논증들은 남는다. 실재론에 대한 여하한 토론, 그리고 특히 실재론을 반대하는 모든 논증들은 틀림없이 어떤 언어로 정식화된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기술적(descriptive)이고 (그리고 논증적) 모호하지 않은 기술은 항상 실재론적이다: 인간의 언어는 중요한 것을 지닌다 실재적이거나 상상적일 사건들의 어떤 상태를. 그리하여 사건들의 상태가 상상적이라면, 기술은 허위일 따름이고 그 기술에 대한 부인은 타스키(Tarski)의 의미에서 실재에 대하여 참인 기술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관념론이나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을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관념론이나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이 적어도 무관하게 된다. 합리성, 언어, 기술, 논증 모두는 어떤 실재에 관한 것이고 그것들은 청중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 모든 것은 실재론을 전제한다. 물론 실재론을 찬성하는 이 논증은, 다른 논증보다 논리적으로 확정적이 아닌데 왜냐하면 내가 기술적 언어와 논증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내가 꿈을 꿀 따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론을 찬성하는 이 논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고 합리적이다. 그 논증은 이성 자체만큼 강력하다.

(4) 나에게 관념론은 터무니없이 보이는데 이유인즉 관념론이 다음과 같은 것을 또한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나의 정신이라는 것. 그러나 내가 그 아름다운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결국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 안에 있다는 언급은, 혹시 전적으로 어리석은 언급은 아닐지라도, 아름다움의 감상에 문제가 있음을 의미할 따름이다.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의 아름다움이 나의 눈 안에 있지 않다는 것과 또한 바흐의 예수 수난곡의 아름다움이 내 귀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반대로, 나의 눈과 귀를 열고 닫음에 의하여 나의 눈과 귀가 저기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흡수하기에 충분히 좋지 않다는 것을 나는 내 자신이 만족하게 증명할 수 있다. 게다가, 더 나은 평가자들인 나보다 그림들이나 음악의 아름다움을 더 잘 감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실재론을 부인하는 것은 과대망상증에 (가장 만연한 전문적 철학자들의 직업병) 해당한다.

(5) 다른 많은 중요하지만 확정적이 아닌 논증들 중에서 나는 한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그 논증은 이렇다. 실재론이 참이라면 더욱 특히, 과학적 실재론에 근접하는 것 그 실재론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명백하다. 이유는, 우리가 지닌 주관적 지식, 심지어 지각적 지식도 행동하려는 의향들로 구성되고 그리하여 일종의 실재에 대한 잠정적 적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껏해야 연구자들이고 아무튼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것. 오류를 막는 보증은 없다. 동시에 우리의 의견들과 이론들이 지닌 참과 허위성에 대한 전체 문제는, 실재가 없고 꿈들과 망상들만 있다면, 분명히 쓸모가 없다.

요컨대 나는 실재론을 유일하게 타당한 가설로서 어떤 타당한 가설도 제시된 적이 없는 추측으로서 수용할 것을 제안한다. 다른 논제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논제에 관해서도 독단적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실증주의와 관념론과 현상론과 현상학 및 기타 등등과 같은 실재론의 대안들을 선호하여 제시된 모든 인식론적 논증들을 그 논증들은 주로 주관주의적이다 알고 있고 내가 철학에서 주의들(isms)의 토론에 적대적이 아닐지라도 (내가 알기로) 내가 작성한 주의들(isms) 목록을 지지하여 제시된 모든 철학적 논증들을 나는 분명한 오류로서 간주한다. 그 논증들 대부분은 확실성을 추구하는 혹은 발전하기 위한 안전한 토대들을 잘못 추구하는 결과이다. 그리고 그 논증들 모두는 실수라는 용어의 최악의 의미에서 전형적인 철학자들의 실수들이다: 그 논증들은 모두, 진지한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상식적이지만 오류인 지식론의 파생물들이다. (상식은, 자체에게 적용될 때, 전형적으로 붕괴한다; 아래 12절 참조.)

내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로 간주하는 두 사람의 견해로써 이 절을 나는 끝내겠다: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윈스턴 처칠.

물체들을 다시 말해서, 물리학의 대상들을... 그 대상들과 관련되는 시간-공간적 구조들과 함께 우리가 수용함에서 여하한 형이상학적 위험도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아인슈타인은 서술한다.

이것은,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기인하는 판단력이 결여된 실재론 반박을 겨냥하는 탁월한 시도를 신중하고도 동정적으로 분석한 이후 아인슈타인의 견해였다.

윈스턴 처칠의 견해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매우 특징적이고, 관념론에서 실재론으로 반대편에 찬성하면 그 후 자체의 색깔들을 바꾸었을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의미한 상태로 남는 철학에 관한 매우 공평한 언급이다:

대학 교육이라는 커다란 이익을 받은 나의 사촌들 중 몇몇은, 우리가 그 존재를 생각할 때를 제외하고 어떤 것에도 존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논증들로써 나는 괴롭혔다...’고 처칠은 서술한다. 그는 계속해서 서술한다:

 

나는 항상, 남의 도움 없이 여러 해 전에 내가 고안한 다음 논증에 기대었다... [여기에] 우리가 지닌 신체적 감각들보다 조금도 더 낫지 않은 토대 위에 표면적으로 서있는 이 거대한

태양이 있다a.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가 지닌 신체적 감각들과 완전히 별개로 태양의 실재를 시험하는 방법이 있다... 천문학자들은... 특정한 낮에 흑점이 태양을 가로질러 통과할 것이라고 [수학 그리고] 순수이성에 의하여 예측한다. 당신은... 보라 그러면 당신의 시각은 즉각적으로 그들의 계산들이 증명됨을 너희들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군사용 지도-만들기에서 교차

방위법b으로 지칭되는 것을 취했다. 우리에게는 태양의 실재에 대한 독립적 증언이 있다. 나의 형이상학적 친구들이, 천문학자들이 토대로 삼아 자신들의 계산들을 수행한 자료들은 그들이 지닌 감각들이라는 증거를 통하여 원래 반드시 획득되었다고 나에게 말할 때, 나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자료들은 아마도, 아무튼 이론적으로, 어떤 단계에서도 인간의 감각들이 혼합되지 않고 천문학자들에게 떨어지는 빛에 의하여 시작되는 자동적인 계산-기계들에 의하여 획득될 것이다... 나는... 강조하여 다시 단언하는데... 태양은 실재적이고 또한 태양은 뜨겁다 사실상 지옥만큼 뜨겁고 형이상학자들이 그것을 의심한다면 그들은 거기에 가서 보아야 한다.

 

처칠의 논증, 특히 내가 이탤릭체로 표현한 중요한 구절들은 관념론적이고

주관론적인 논증들에 대한 타당한 비판으로서 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주관론적 인식론에 반대하는 철학적으로 가장 건전하고 가장 지성적인 논증으로서 내가 간주한다고 나는 혹시 부언할 것이다. 이 논증을 무시하지 않았던 어떤 철학자도 (내가 그 논증을 주시시켰던 나의 제자들 중 몇몇과 별도로)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논증은 매우 독창적이다; 1930년에 최초로 발간되어 그 논증은 자동 천문대들과 자동 계산 기계들의 가능성을 (뉴튼 이론에서 계획된) 이용하는 최초의 철학적a 논증들 중 한 논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증이 발간되고 40년이 지나서도 윈스턴 처칠은 인식론자로서 여전히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은 인식론에 관한 많은 문집들 중 어떤 문집에도 나타나지 않고 심지어 철학 백과사전(Encyclopedia of Philosophy)에도 또한 없다.

물론 처칠의 논증은, 주관론자들의 겉으로만 참인 논증들에 대한 탁월한 반박일 따름이다: 그는 실재론을 증명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관념론자는, 자신이나 우리가 계산 기계들과 모든 것들로써 논쟁을 꿈꾸고 있다고 항상 항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항변을, 자체가 지닌 보편적 적용가능성 때문에 어리석은 것으로서 간주한다. 아무튼 어떤 철학자가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논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주관론은 미래에 무시될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b

6. 진리에 관한 비평들

 

철학과 과학에서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틀림없이 진리탐구이다. 정당화는 목표가 아니다; 탁월함과 영리함과 같은 것은 피곤하다. 우리는 가장 시급한 문제들을 보거나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우리는 참인 이론들을 (혹은 참인 서술들이나 참인 명제들; 여기서 이것들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제안함에 의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혹은 아무튼 우리의 선배들의 이론들보다 진리에 조금 더 근접하는 이론들을 제안함에 의하여.

그러나 진리탐구는, 우리가 분명하고도 간단하게 말하여 불필요한 전문적인 세부사항들 및 복잡한 사상들을 피한다면, 가능할 따름이다. 나의 견해로,

 

a 역주: 원문에 표기된 philosophical은 이한구 번역본에 번역되지 않았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t any rate, unless some philosopher should produce some

entirely new argument, I suggest that subjectivism may in future be ignored인데 접속사 unless가 쓰이는 절에는 가정법 동사 should가 쓰일 수 없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오류인 문장이다.

단순성과 명료성을 겨냥한 것은 모든 지식인들의 도덕적 의무이다: 명료성의

결여는 최악이고 허세는 범죄이다. (발간물 폭주를 고려하면 축약 또한 중요하지만 시급성은 떨어지고 축약은 때때로 명료성과 양립 불가능하다.) 흔히 우리는 이 요건들에 부응할 수 없어서 우리는 사물들을 분명하고도 이해 가능하게 말하지 못하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가 철학자들로서 전적으로 충분히 능력이 있지 않음을 밝힐 따름이다a.

진리는 사실들과의 (혹은 실재와의) 대응이라는 상식론을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ki]에 의하여 옹호되어 개선된) 나는 수용한다; 혹은 더 정확하게, 이론은 그 이론이 사실들과 대응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참이라는 상식론을.

타스키(Tarski) 덕분에 지금쯤 거의 사소한 것들이 되어버린 전문적인 세부사항들에 조금만 더 들어가면: 진리와 허위는 본질적으로 어떤 언어 L 으로 (예를 들어, 독일어b) 된 서술들의, 다시 말해서 (모호하지 않게 정식화된) 이론들이나 명제들의 (혹은 유의미한 문장들’) 속성들이나 집합들로서 간주되는데 그 언어에 관하여 우리는 상위언어(Metalanguage)로도 지칭되는 또 다른 언어 L 으로 완전히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L 을 언급하는

L 의 표현들은 상위언어적(metalinguistic)’으로 불린다.

그리하여 달은 녹색 치즈로 만들어진다(Der Mond ist aus grünem Käse gemacht)라는 독일어 (L ) 표현의 영어** (L ) 명칭들 중 한 가지 명칭을 P가 축약하도록 하라. (영어 인용부호를 추가함에 의하여 이 독일어 표현은 독일어 표현의 영어 상위언어적 명칭이 소위 인용 명칭 되었음을 주목하라.) 그렇다면 동일 서술 P = “달은 녹색 치즈로 만들어진다(Der Mond ist aus grünem Käse gemacht)”’는 분명히 영어 상위언어적 서술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달은 녹색 치즈로 만들어진다(Der Mond ist aus grünem Käse gemacht)라는 독일어 서술은, 달은 녹색 치즈로 만들어진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사실들이나 사건들의 실제 상태에 대응한다.’

이제 P가 서술이라면 p는 서술 P에 의하여 기술된 사건들의 상태에 대한 영어 기술의 축약이라는 일반 규칙을 도입하라.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대상 언어에 대한 표현 P, p라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사실들에 대응하는 서술이다.’

영어로 우리는, ‘PL 으로 참이다’, 혹은 P는 독일어로 참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는 언어에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유인즉 P 이 어떤 언어 L 의 서술이고 P 가 어떤 언어 L 의 서술이라면 다음이 성립하기 (가령 L 에서) 때문이다: P P L 에서 L 로 번역할 것이라면 P P 는 틀림없이 모두 참이거나 아니면 모두 허위이다: 그것들은 틀림없이 동일한 진리 가치를 지닌다. 게다가 어떤 언어가 부정하는 기능을 지니기에 충분히 풍요롭다면, 그 언어는 모든 허위 서술에 대하여 참인 서술을 포함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개략적으로 말해서 부정하는 기능을 지닌 모든 언어에는 허위 서술들만큼 그렇게 많은참인 서술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타스키(Tarski)의 이론으로 인하여 더욱 특히, 서술 P여하한 사실과도 대응한다면 그 서술이 단지 어떤 사실에 대응할 것인지가 분명해진다: p라는 사실. 그리고 그 이론은 허위 서술들의 문제를 또한 해결한다; 이유인즉 허위 서술 P-사실과 같은 어떤 드문a 개체와 대응해서가 아니라 단지 여하한 사실과도 대응하지 않기에 허위이기 때문이다: 허위 서술 Pp라는 사건들의 허위 사실에 대하여 기술한다같은 관계에 있을지라도 실재적인 것에 대하여 사실과의 대응이라는 고유한 관계에 있지 않다. (허위 사실은 단지 실재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사건들의 허위 상태나 심지어 허위 사실과 같은 표현을 회피하는 데는 이점이 없다.)

그것을 분명히 하는 데는 타스키(Tarski)의 재능이 필요했을지라도, 사실에 대한 서술의 대응을 우리가 말하기를 원한다면 문제의 서술이 말하는 사실을 (혹은 주장되는 사실) 우리가 서술할 수 있고 게다가 문제의 서술에 관하여 또한 우리가 말할 (저 서술의 어떤 규약적이거나 기술적 명칭을 사용함에 의하여) 수 있는 상위언어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은 지금쯤 정말로 완벽하게 분명해졌다. 그리고 역순도 성립한다: 우리가 (a) 어떤 (대상) 언어로 된 서술들에 의하여, 즉 이 사실들을 서술하는 간단한 방법에 의하여 기술된 사실들에 대하여 그리고 또한 (b) (대상) 언어로 된 서술들에 (이 서술들의 명칭들을 사용함에 의하여)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그런 상위언어를 소유하자마자 우리가 이 상위언어로 사실들에 대한 서술들의 대응을 또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언어 L 으로 된 각 서술이 사실들에 대응하는 조건들을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서술할 수 있자마자, 순전히 언어적이지만 상식에 적합하게 다음을 정의(定義)할 수 있다: 서술은 사실들과 대응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참이다.

이것은, 타스키(Tarski)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객관론적 혹은 절대론적 진리의 개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거나 확신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의미에서 절대론적은 아니다. 이유인즉 그것이 우리에게 진리의 기준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타스키(Tarski), L 이 충분히 풍요롭다면 (예를 들어 그것이 산술을 포함한다면), 일반적인 진리의 기준이 존재할 리가 없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극도로 빈약한 인공 언어들에게만 진리의 기준이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타스키[Tarski]는 괴델[Gödel]에게서 혜택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진리의 개념은 절대론적이지만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주장은 이루질 수 없다: 우리는 진리 탐구자들이지만 진리 소유자들은 아니다.

 

7. 내용, 진리 내용 그리고 허위 내용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고 있을 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적어도 몇몇 경우들에서, 우리가 진리에 더 가깝게 왔다나 T T 보다 더 진리 같기 때문에 어떤 이론 T 은 어떤 새로운 이론, 가령 T 에 의하여 대체된다는 직관적 주장에 대하여 이유들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론 T 이 이론 T 보다 진리로부터 더 멀 것이어서 T 보다 T 가 진리에 대하여 더 나은 근사치라는 (혹은 단지 더 나은 이론) 개념은 나를 포함하는 많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직관적으로 사용되었다. 진리의 개념이 많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된 것과 (타스키[Tarski]의 의미론적 역설들의 분석으로부터 분명해진 바와 같이, 전적으로 일말의 진실이나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꼭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한 더 나은 접근이나 근사치라는 혹은 진리에 대한 가까움이나 더 큰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내가 지칭한 바와 같이) 개념도 그렇게 간주되었다.

이 의심들은 완화하기 위하여, 나는 두 가지 개념들을 결합함에 의하여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논리적 개념을 도입했는데 두 가지 개념들 모두가 원래 타스키(Tarski)에 의해서 도입되었다: (a) 진리의 개념, 그리고 (b) 서술이 지닌 (논리적) 내용; 다시 말해서, 그 서술에 의하여 논리적으로 수반되는 모든 서술들의 집합 (타스키[Tarski]가 통상적으로 지칭하는 바와 같이, ‘결론 집합’).

모든 서술에는 그 서술로부터 귀결되는 모든 저 서술들의 집합인 내용이나 결론 집합이 있다. (우리는 타스키[Tarski]에 따라서,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a 서술들의 결론 집합을 공집합으로 기술하여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 서술들에 0 내용이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내용은, 모든 그리고 오직 모든 자체의 참인 결론들로 구성되는 부분-내용을 포함한다.

주어진 서술로부터 귀결되는 (혹은 주어진 연역적 이론체계에 속하는) 그리고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 아닌 모든 참인 서술들의 집합은 그 서술의 진리 내용으로 지칭될 수 있다.

항진명제들(恒眞命題: tautologies)(논리적으로 참인 서술들의) 진리 내용은 0이다: 그 진리 내용은 항진명제들(恒眞命題: tautologies)로만 구성된다. 모든 허위 서술들을 포함하는 모든 다른 서술들에는 0이 아닌 진리 내용이 있다.

서술에 의하여 수반되는 허위 서술들의 집합은 정확하게 허위인 모든 저 서술들로 구성되는 그 서술의 부분집합 아마도 그 서술의 허위 내용으로 지칭될 것이다 (말하자면, 양해를 받아서a);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합에는 내용이나 타스키의(Tarskian) 결론 집합의 특징적인 속성들이 없다. 그 집합은 타스키의(Tarskian) 연역적 이론체계가 아닌데 왜냐하면 허위 서술로부터 참인 서술들을 연역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허위 서술과 참인 서술의 논리합[論理合: disjunction*], 참이고 허위 서술로부터 귀결되는 저 서술들 중 한 가지 서술이다.)

이 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나에게는,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의 토론에 대비하기 위하여 진리 내용과 허위 내용이라는 직관적 개념들을 다소 더 상세하게 설명할 의도가 있다; 이유인즉 서술이 지닌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자체의 진리 내용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자체의 허위 내용에 비례하여 감소하는 것으로서 설명될 것이기 때문이다.b 이것에서 나는 주로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의 개념들을, 특히 그의 진리 이론 및 그의 결론 집합들과 연역적 이론체계들 이론(두 가지 모두 여기 각주 18에서 언급되었다; 또한 더 상세한 논의에 대하여 이 저서의 9장 참조) 이용하겠다.

 

서술 α가 지닌 허위 내용을 (α로부터 귀결되는 허위 서술들의 집합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a) 그것은 내용이다 (혹은 타스키의[Tarskian] 결론 집합), (b) 그것은 α로부터 귀결되는 모든 허위 서술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c) 그것은 참인 서술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내용이라는 개념을 상대화할 필요만 있는데 그것은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by courtesy, as it wer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관례에 따라

사실상으로 번역되어 있다.

* 역주: 이 표현은 이한구 번역본에 선언으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for the verisimilitude of statement will be explained as increasing with its truth content and decreasing with its false conten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왜냐하면 어떤 진술의 박진은 그 진술의 진리 내용이 증가하고 허위 내용이 감소하는 것으로 설명될 것이기 때문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매우 자연스런 방식으로 이행될 수 있다.

서술 α의 내용이나 결론 집합을 A라는 명칭으로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X는 서술 x의 내용이다) 부르자. 타스키(Tarski)에 따라서 논리적으로 참인 서술의 내용을 L이라는 명칭으로 부르자. L은 모든 논리적으로 참인 서술들과 집합이며, 모든 내용들의 그리고 모든 서술들의 공통적 내용이다. L0 내용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내용이라는 개념을 상대화하여 우리는, 내용 Y주어진 서술 α의 상대적 내용을 말하여 우리는 이것을 기호 α,Y에 의하여 표시한다. 이것은, Y가 존재하여 α로부터 연역될 수 있지만 Y만으로부터는 연역될 수 없는 모든 서술들의 집합이다.

A가 서술 α의 내용이라면 상대화된 서술 방식으로 우리가 A = α,L을 지님을 우리는 즉각 안다; 다시 말해서, 서술 α의 절대적 내용인 A논리가 주어진 α의 상대적 내용과 동일하다 (= 0 내용).

추측 α의 상대적 내용에 대한 보다 흥미로운 경우는, B t 시간에서 우리가 지닌 배경지식α,B 이다; 다시 말해서, t 시간에서 토론 없이 전제되는 지식. 새로운 추측 α에서 흥미로운 것은, 우선 상대적 내용 α,B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B를 초월하는 α.B의 내용의 저 부분. 논리적으로 참인 서술의 내용이 0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α가 배경지식만을 포함하고 배경지식 넘어서는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면 B가 주어진 추측 α의 상대적 내용도 0이다: αB에 속하거나 동일한 것에 해당하는 것인a A B라면 α,B = 0이라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서술 x,Y의 상대적 내용은, Y가 존재하는 xY를 초월하는 정보이다.

이제 우리는 α의 허위 내용을 정의(定義)할 수 있는데, α진리 내용이 주어진 α의 내용으로서 A 에 의하여 우리는 그 허위 내용을 표시한다 (다시 말해서, AT의 교집합 A 로 그곳에서 T는 타스키의[Tarskian] 참인 서술들의 이론체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定義)할 수 있다:

 

A = α,A .

 

그렇게 정의(定義)A 는 우리의 요건들 즉, 적합성 조건들에 답한다: (a) A 는 상대적 내용일지라도 내용이다; 결국 논리적 진리가 주어진 (혹은 L이 논리적으로 참이라고 전제하기에) ‘절대적내용들 역시 상대적 내용들이다;

 

a 역주: ‘동일한 것에 해당하는 것인은 원문에 what amounts to the sam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 둘이 같은 것이 되면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표현 뒤에 부분집합 기호가 이어진다.

 

(b) A , α로부터 귀결되는 모든 허위 서술들을 포함하는데 왜냐하면 참인 서술들을 우리가 지닌 (상대적) 0으로서 생각하여 α로부터 귀결되는 것은

서술들의 연역적 체계이기 때문이다;* (c) A , 자체의 참인 서술들이 내용으로서가 아니라 자체의 (상대적) 0 내용으로서 생각된다는 의미에서 참인 서술을 포함하지않는다.

내용들을 때때로 논리적으로 비교될 수 있고 때때로 그렇지 못하다: 내용들은, 서술들이 수반 관계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순서가 매겨지는 이론체계들을 형성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포함 관계에 의하여 순서가 매겨지는 부분적으로 순서가 매겨진 이론체계들을 형성한다. AB절대적 내용들은, A B 혹은 B A라면 비교될 수 있다. 상대적 내용들로써, 비교가능성 조건들은 더욱 복잡하다.

X가 유한하게 공리화될 수 있는 내용이나 연역적 이론체계라면, 서술 x가 존재하여 Xx의 내용이다.

그리하여 Y가 유한하게 공리화될 수 있다면, 우리는

 

x,Y = x,y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경우에 우리는, x,Yy의 절대적 내용을 논리곱** x.y의 절대적 내용과 동일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것들과 같은 고찰들로 인하여,

 

(A B) B(C D) D

 

비교될 수 있다면 α,Bc,D가 비교 가능함이 밝혀지는데 그곳에서 는 타스키(Tarski)연역적 이론체계들의 합이다: 두 가지 모두가 공리화될 수 있다면, A B는 논리곱** α.b의 내용이다.

그리하여 비교가능성은 이 부분적으로 순서가 매겨진 이론체계들에서는

 

*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 A contains all the false statements which follows from α, since it is the deductive system of statements which follow from α, taking the true statements as our (relative) zero;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A α에서 따라 나오는 모든 거짓 진술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참인 진술들을 우리에 (상대적으로) 영인 것으로 간주할 때 α에서 따라 나오는 진술들의 연역체계이기 때문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conjuncti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연접으로 번역되어 있다.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적으로 순서가 매겨진 이론체계들이 원칙적으로다시 말해서, 모순 없이 순차적으로a 순서가 매겨질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확률의 형식적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공리화될 수 있는 이론체계들에게만 그 이론의 적용가능성을 주장하지만 그 적용가능성은 혹시 공리화될 수 없는 이론체계들에게까지 확대될지도 모른다; 아래 9장 또한 참조.)

우리는 p(x,Y)’ 혹은

p(X,Y)

 

서술하여 Y가 주어진 x의 확률로 읽고, 내가 다른 곳에서 (예를 들어,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새로운 부록들 *iv *v) 제시한 상대적 확률에 대한 형식적 공리 체계를 적용할 수 있다. 결과는, p(x,Y)01 사이의 숫자일 것이라는 것과 통상적으로 우리는 어느 숫자인지 모른다 아주 일반적으로 우리는,

 

p(α,B)p(c,D)원칙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보통

 

p(α,B) p(c,D) 혹은 p(α,B) p(c,D)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정보가 불충분할지라도, 적어도 이 관계들 중 한 가지 관계는 틀림없이 성립한다고b 우리는 주장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진리 내용들과 허위 내용들이 원칙적으로 확률계산의 도움을 받아서 비교 가능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장소들에 내가 밝힌 바와 같이, α의 내용 A는 논리적 확률 p(α) 혹은 p(A)가 작을수록 더 커질 것이다. 이유인즉 서술이 더 많은 정보를

지닐수록, 참인 (말하자면, 우연히) 논리적 확률은 더 작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용의 측정(그 측정은 주로 위상적으로[位相的으로: topologically], 다시 말해서, 순차적a 질서의 지표로서 사용될 수 있다)

 

ct(α),

 

다시 말해서, α(절대적) 내용을 도입할 수 있고 또한 상대적 측정들인

 

ct(α,b) ct(α,B)

 

다시 말해서, bB가 각각 주어진 α의 상대적 내용을b 도입할 수 있다. (B가 공리화될 수 있다면, 우리는 물론 ct(α,b) = ct(α,B)를 경험한다.) 측정들ct는 확률계산의 도움을 받아서 정의(定義)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정의(定義)

 

ct(α,B) = 1 p(α,B)

 

도움을 받아서. 이제 우리에게는 진리 내용 ct (α)와 허위 내용 ct (α) (의 측정들을) 정의(定義)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ct (α) = ct(A ),

 

그곳에서 A 는 다시 A와 모든 참인 서술들의 타스키적(Tarskian) 이론체계의 교집합이다; 그래서

 

ct (α) = ct(α,A )인데,

 

다시 말해서 허위 내용은 (의 측정은), α의 진리 내용 A 가 주어진 α의 상대적 내용(의 측정)이다; 혹은, 계속 달리 표현하여 (a) α로부터 귀결되고 (b) 참인 저 서술들을 α초월하는 정도.

 

a 역주: 원문의 linear가 이한구 번역본에는 선형적인으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conten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확률로 번역되어 있다.

 

8.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관한 언급들

 

이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이제 진리유사성(truthlikeness) ,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의하여 우리가 직관적으로 의미하는 것을 보다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다. 직관적으로 말해서, (a) 이론 T T 의 진리 내용들과 허위 내용들이 (혹은 그 내용들의 측정들) 비교 가능하고 (b) T 의 허위 내용이 아니라 진리 내용이 T 의 진리 내용보다 더 작거나 아니면 (c) T 의 진리 내용이 T 의 진리 내용보다 크지 않지만 T 의 허위 내용이 더 크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이론 T 에는 이론 T 보다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 적다. 요컨대, T 로부터 참인 서술들이 더 많이 귀결되지만 허위 서술들이 더 많이 귀결되지 않고 또는 적어도 동등하게 많은 참인 서술들이 귀결되지만 허위 서술들이 더 적게 귀결된다면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T 보다 T 가 진리에 더 가깝거나 진리에 더 유사하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단지 경쟁하는 이론들만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들처럼 그 이론들이 지닌 (측정되지 않은) 내용들에 관하여 직관적으로 비교될 수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비교될 수 없는 경쟁하는 이론들도 또한 있다.

뉴튼의 이론(N)과 아인슈타인의 이론(E)이 지닌 내용들에 대한 직관적 비교가능성은 다음과 같이 확립될 수 있다: (a) 뉴튼의 이론이 답변하는 모든 질문에 대하여, 뉴튼의 이론에는 적어도 동등하게 정확한 답변이 있다; 이로 인하여 N의 내용은 (내용 측정은), 타스키(Tarski)의 의미보다 다소 더 넓은 의미에서, E보다 더 적거나 E와 대등하게 된다; (b) 뉴튼 이론 N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반면, 아인슈타인의 이론 E(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이 아닌) 답변을 제시할 수 있는 의문들이 있다; 이로 인하여 N의 내용은 분명히 E의 내용보다 더 작아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두 가지 이론들이 지닌 내용들을 직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더 큰 내용이 있다. (이 직관이 내용 측정들인 ct(N)ct(E)에 의하여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질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잠재적으로 혹은 거의* 더 나은 이론이 된다; 이유인즉 심지어 실험하기 전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이라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는 더 큰 설명력이 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더 다양한 시험들을 수행하라고 우리에게 도전한다.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우리에게, 사실들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울 새로운 기회들은 제공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부과하는 도전이 없었더라면, 일식 동안 태양을 둘러싸는 별들 사이의 겉으로 보이는 거리나 백색왜성들에 의하여 방출되는 빛의 적색편이를 우리는 측정하지 (필요한 큰 정확도로써) 못했을 터이다.**

이것들은 (논리적으로) 더 강력한 이론들이 지닌, 심지어 그 이론이 시험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장점들 중 몇 가지 장점들이다; 다시 말해서 더 큰 내용이 있는 이론이 지닌. 그 장점들로 인하여 그 이론은 더 도전적인 이론인 잠재적으로 더 나은 이론이 된다.

그러나 더 큰 내용을 지닌 더 강력한 이론은, 그 이론이 지닌 허위 내용이 또한 더 크지 않다면, 또한 더 큰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을 지닌 이론일 것이다.

이 주장은 과학의 방법에 대담한 추측들의 그리고 시도된 반박들의 방법 대한 논리적 토대를 형성한다. 이론은 자체가 지닌 내용일 클수록 더 대담하다. 그 이론은 또한 더 위험하다: 그 이론이 허위일 것이 우선 더 개연적이다. 우리는 그 이론을 반박하려는 것인 그 이론의 약점들 찾으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그 이론을 반박하지 못한다면 혹은 우리가 발견하는 반박들이 동시에 또한 그 이론의 선행이론이었던 더 약한 이론에 대한 반박들이라면, 더 강력한 이론에는 더 약한 선행이론보다 더 큰 허위 내용이 없다고 그리하여 더 강력한 이론에는 더 큰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의 등급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추측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9.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과 진리 탐색

 

정사각형을 모든 서술들의 집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정사각형을 참인 서술들 (T)과 허위 서술들 (F)이라는 두 가지 동등한 부분-영역들로 나누라:

그림 1

 

이제 참인 서술들의 집합을 정사각형의 중앙에 둥글게 수집함에 의하여 이 배열들을 다소 바꾸라.

그림 2

 

과학의 과제는, 은유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게 유망하게 보이는 이론들이나 추측들을 제시하는 방법에 의하여 참인 서술들의 표적을 (T) 가능한 한 많이

적중시킴에 의하여 그리고 허위 지역을 (F) 가능한 한 적게 맞춤에 의하여 그 표적을 뒤덮는 것이다.a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 task of science is, metaphorically speaking, to cover by hits as much as possible of the target (T) of the true statements, by the method of proposing

우리가 참이 이론들을 추측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가 추측하는 이론들의 유일하게 중요한 속성은 아니다; 이유인즉 우리는 사소한 것들이나 항진명제들(恒眞命題: tautologies)에 특별히 흥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탁자들은 탁자들이다는 틀림없이 참이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들보다 더 참이다 지식적으로 흥미롭지 못하다: 그것은 과학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빌헬름 부쉬(Wihelm Busch)는 내가 인식론적 동요라고 불렀던 것을 예전에 만들어냈다:

2 X 24: 그것은 참이지만 Twice two equals four: ‘tis true

너무 공허하고 너무 진부하지. But too empty and too trite.

내가 찾는 것은 실마리 What I look for us a clue

그렇게 가볍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To some matters not so light.

 

다시 말해서, 우리는 진리를 찾기만 하고 있지 않고 우리는 흥미롭고 계몽적인 진리를, 흥미로운 문제들에게 해결책들을 제공하는 이론들을 찾는다. 조금이라고 가능하면, 우리는 심오한 이론들을 찾는다.*

우리는 우리의 표적 T 안에서 한 점을 맞추려고 노력만 하지고 있지 않으며 가능한 한 우리의 표적의 넓고 그리고 흥미로운 영역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2 X 2 = 4가 참일지라도 여기서 의도된 의미로는 진리에 대한 충분한 근사치가 아닌데, 단지 그것이 과학의 목표나 심지어 과학의 목표 중 중요한

 

한 부분을 수행하기에는 전달하는 진리가 너무 적기a 때문이다. 뉴튼 이론은, 허위일지라도 (그럴 것 같은 바와 같이), 자체가 포함하는 엄청난 숫자의 흥미롭고 정보성인 참인 결론들 때문에 훨씬 더 나은 진리에 대한 근사치이다: 그 이론이 지닌 진리 내용은 매우 크다.

참인 서술들이 무한히 있고, 그 서술에는 매우 다른 가치가 있다. 그 서술들을 평가하는 한 가지 방법은 논리적 방법이다: 우리는 그 서술들이 지닌 내용의 규모나 측정을 (허위 서술들이 아니라 참인 서술들의 경우에 그 서술들이 지닌 진리 내용과 일치하는) 산정한다.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서술에는 더 큰 정보성 혹은 논리적 내용이 있다; 그 서술은 더 나은 서술이다. 참인 서술의 내용이 클수록 그 서술은 우리의 표적 T에 대한 근접으로서 더 낫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한 (더 정확하게, 모든 참인 서술들의 집합에 대한). 이유인즉 우리는 오직 모든 탁자들은 탁자들임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리에 대한 근접이나 근사치를 말하고 싶어 하면, 우리의 의도는 전체 진리에 대한 근접이나 근사치이다; 다시 말해서, 참인 서술들의 전체집합인 집합 T.

이제 서술이 허위이면, 상황이 비슷하다. 모호하지 않은 모든 서술은 참이거나 허위이다 (그 서술이 참인지 허위인지를 우리가 모를지라도); 내가 여기서 고찰하는 논리에는 두 가지 진리값들만 있어서 세 번째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어떤 허위 서술은, 또 다른 허위 서술보다 진리에 더 가깝게 보일 것이다: 그 언급이 발설될 때 사실상 시각이 948분이라면, ‘지금 오후 945분이다지금 940분이다보다 더 진리에 가깝게 보인다.

그러나 이런 형태로, 직관적 인상은 오류다: 두 가지 서술들은 양립 불가능하고 그리하여 비교 불가능하다 (우리가 ct와 같은 측정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류인 직관에는 어떤 진리의 핵심이 있다: 우리가 두 가지 서술들을 간격서술(interval statement)로 대체한다면 (다음 문단 참조) 첫 번째 서술은 두 번째 서술보다 정말로 진리에 더 가깝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진행할 수 있다: 첫 번째 서술은 지금 시각이 오후 945분과 948사이이다에 의하여 그리고 두 번째 서술은 지금 시각이 940분과 948사이이다에 의하여 대체된다.a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연속적인 값들의 범위인 오류의 범위를 수용하는 서술에 의하여 각 서술을 대체한다. 이제 대체된 두 가지 서술들은 비교 가능하게 되고 (첫 번째 서술이 두 번째 서술을 수반하기 때문에), 첫 번째 서술은 두 번째 서술보다 정말로 진리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ct ct 와 같은 내용에 대한 일관적 측정 함수로 틀림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ct 와 같은 측정 함수를 지닌 이론체계에서 우리의 원래 서술들이 비교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론체계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서술들이 비교 가능하다), 진리 내용 측정 ct 는 그렇게 정의[定義]되어서 첫 번째 서술의 ct 는 두 번째 서술의 ct 와 정말로 적어도 크기가 같다 혹은 두 번째 서술의 ct 보다 크다; 이것은 우리의 원래 직관을 어느 정도까지 정당화한다.

대체된 서술들에 있는 사이라는 단어는 한계들 중 하나를 포함하거나 배제하기 위하여 해석될 수 있음을 주목하라. 우리가 상한(上限: upper bound)을 포함하도록 그 단어를 해석한다면 두 가지 서술 모두가 참이고 그리하여 ct = ct 는 두 가지 서술 모두에게 성립한다. 그 서술들은 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서술에는 더 큰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 있는데 왜냐하면 첫 번째 서술에는 두 번째 서술보다 더 큰 진리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상한(上限: upper bound)을 배제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이(between)’을 해석한다면 두 가지 서술 모두는 허위가 된다 (그 서술들이 혹시 거의 참으로 지칭될지라도); 그러나 그 서술들은 비교 가능한 상태로 남아서 (-측정 의미에서), 두 번째 서술보다는 첫 번째 서술에 더 큰 진리유사성(truthlikeness)이 있다고 우리는 여전히 주장할 수 있다 혹은 그렇게 나는 생각한다24a.

그리하여 이가(二價: two valued) 논리라는 개념을 (‘모호하지 않은 모든 서술은 참이거나 허위여서 세 번째 가능성은 없다’) 위반하지 않고 우리는 더 허위이거나 덜 허위b , 진리로부터 더 멀거나 진리에 더 가까운 허위 서술들을 우리는 때때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높거나 더 낮은 박진성(迫眞性: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 the first statement is replaced either by ‘It is now between 9.45

p.m. and 9.48 p.m.’ and the second ‘It is now between 9.40. and 9.48 p.m.’인데 either

불필요하게 들어있다.

24a (1978년에 추가됨.) 그러나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which are more or less fals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어느 정도 거짓으로 번역되어 있다.

 

 

verisimilitude)이라는 이 개념은 허위 서술들 및 참인 서술들 모두에게 적용 가능하다: 핵심적인 요점은, 전적으로 이가(二價: two valued) 논리의 한계 안에 놓여 있는 개념인 그 서술들이 지닌 진리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마치 우리는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는 개념을 높은 진리 내용

및 낮은 허위 내용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들 때문에 중요하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는

직관적 개념으로 연구하는 데 대하여 몇몇 논리학자들이 가졌던 의심들을a 완화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과학의 목표가 진리에 대한 더 나은 근사치라는 즉 더 큰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의미에서의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10. 목표들로서의 진리와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과학의 목표가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고 말하는 데는, 과학의 목표가 진리라는 아마도 더 단순한 정식화보다는 상당한 장점이 있다. 후자(後者), 모든 탁자들은 탁자들이다 혹은 1 + 1 = 2라는 의심받지 않는 진리를 서술함에 의하여 그 목표가 완벽하게 달성된다고 제안할 것이다. 분명히 이 두 가지 서술 모두는 참이다; 그리고 꼭 같이 분명히, 이 서술들 중 어느 서술도 여하한 종류의 과학적 서술로서 위상을 지닌다고 언급될 수 없다.

게다가 과학자들은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들과 같은 이론들을 겨냥한다; 그리고 이 이론이 지닌 진리에 관한 문제에 우리가 고도로 흥미를 지닐지라도, 그 이론들이 허위라고 믿을 이유가 우리에게 있어도 그 이론들은 자체의 흥미를 유지한다. 뉴튼은 자신의 이론이 실제로 최종적인 언급이라고 믿지 않았으며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자신이 1916년부터 1955년의 자신의 사망까지 탐구했던 통일장 이론 참인 이론에 대한 훌륭한 근사치 이상이라고 믿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진리 탐구라는 개념이 (a) 우리가 진리에 의하여 모든 참인 명제들의 집합을 의미한다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표적 집합이 T이다 (타스키[Tarski]의 참인 명제들의 집합) 조건으로만 그리고 (b) 허위 서술들이 너무 허위적이지 않아서 (너무 큰 허위 내용을 지니지 않는다) 큰 진리 내용을 포함한다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탐구에 허위 서술들을 근사치들로서 수용한 의도가 있다는 조건으로서 진리 탐구라는 개념이 만족스러움을 나타낸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misgiving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불만들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하여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탐구는 진리 탐구보다 더 명백하고 더 실재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다소 더 많은 것을 밝힐 의도가 있다. 우리가 진리에 실제로 도달했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경험과학들에서 우리는 충분히 훌륭한 논증들을 지닐 수 없는 반면 우리가 진리를 향하여 진보를 이룩했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우리가 강력하고 합리적으로 훌륭한 논증들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밝힐 의도가 나에게 있다a; 다시 말해서, 적어도 알려진 모든

합리적 논증들에 비추어 이론 T 가 자체의 선행이론인 T 보다 선호될 수 있다

는 것.

게다가, 우리는 과학의 방법과 과학의 역사 중 많은 역사를 진리에 근접하기 위한 합리적 절차로서 설명할 수 있다. (추가적이고 중요한 설명이, 귀납의 문제와 관련하여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의 도움을 받아서 이룩될 수 있다: 특히 아래 32절 참조.)

 

11. 진리와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의 개념들에 관한 언급들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의 적합성에 대한 나의 옹호는 때때로 지독하게 오해되었다. 이 오해들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이론들뿐만 아니라 이론들이 지닌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관점에서 이론들에 대한 비교들을 포함하여 이론들에 대한 모든 평가들 또한 추측성이라는 나의 견해를 염두에 두는 것이 권유될 수 있다.b

이 요점이 나의 과학 이론과 관련하여 극도로 중요한데 오해되었다는 것은 이상하다. 내가 자주 강조한 바와 같이, 이론들에 대한 모든 평가들은 그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위상에 대한 평가들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나는, 명료성 없이는 비판적 토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명료성이 지식적 가치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확성이나 정밀성이 본질적으로 지식적 가치들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 앞에 놓인 문제에 필요한 것보다 더 정확하거나 더 정밀하려고 우리가 노력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항상 경쟁하는 이론들 사이에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의 동사는 현재와 미래를 의미하고 이탤릭체로 강조된 부분이 있는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충분히 좋은 논증들을 가질 수 없었다 하더라도로 번역된 부분이 있고 강조된 부분이 표시되지 않았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n order to avoid these misunderstandings it is advisable to keep in mind my view that not only are all theories conjectural, but also all appraisals of theories, including comparison of theories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ir verisimilitud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런 오해들을 피하기 위해 모든 이론들은 추측적일 뿐만 아니라 이론들에 대한 모든 평가들이라는 내 견해를 유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서 구별하는 문제이다). 이 이유 때문에, 나는 정의들(定義: definitions)에 흥미가 없다고 나는 강조했다; 모든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은 정의(定義)되지 않은 용어들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용어를 원초적인 용어로서 아니면 정의(定義)된 용어로서 사용하는지는 통상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나는,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 다른 용어들로 (진리

내용, 허위 내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논리적 개연성a) 정의(定義)되거나 환원될 수 있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는가? 어떤 사람들은 나의 목표가 정확함이나 정밀함과 같은 것이라고 가정했다; 심지어 적용가능성: 이론들에 적용될 수 있어서

숫자적 용어들로 그 이론들이 지닌 박진성이(迫眞性: verisimilitude) (또는 적

어도 그 이론들이 지닌 진리 내용; 또는 혹시 그 이론들이 지닌 입증 등급)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숫자적 함수를 내가 발견하기를 희망했다고 가정했다.

사실상 나의 목표로부터 추가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 것은 없다.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의 등급들이나, 진리 내용이나 허위 내용의 측정이 (혹은 가령, 입증 등급이나 심지어 논리적 개연성b의 등급) 제한적인 특정 경우들에서를 (01같은) 제외하고 숫자적으로 언젠가 결정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측정 함수의 도입으로 인하여 모든 내용들이 원칙적으로 혹은 이론적으로 비교될 수 있게 될지라도, 실제 적용에서 비-숫자적이어서 말하자면c 논리적으로 더 강력하고 더 취약한 경쟁하는 이론들이라는 경우들과 같은 질적이거나 일반적인 논리적 토대들을 근거로 비교될 수 있는 저 드문 경우들에 우리는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나는 믿는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겨냥된 이론들. 실제적인 비교를 위하여, 우리는 이 경우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역설적으로, 개연성들b과 같은 측정 함수들로 인하여 이론들이 지닌 논증들이 원칙적으로 일반적으로 비교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은 논리적 개연성을b 통하여 정의(定義)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나의d 시도들의 요점은 무엇인가? 라고 사람들은 혹시 물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타스키(Tarski)가 진리와 관련하여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probabilit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가능성으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단어들의 원문은 probability probabilities인데 수학적 확률을 의미하는 이한구 번역본의 확률보다는 (논리적) ‘개연성으로 번역함이 옳을 것이다.

c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as it wer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사실상으로 번역되어 있다.

d 역주: 원문의 m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어 있다.

 

 

이룩한 것과 유사한 중요한 것을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과 관련하여 이룩하는 것이다 (낮의 정밀성의 수준에서): 의심스러워진, 그러나 나의 견해로 비판적 상식적 실재론을 위하여 그리고 여하한 과학의 비판적 이론을 위하여 많이 필요한 상식적 개념의 복원. 과학은 사실들에 대한 혹은 실재에 대한

대응이라는 의미에서 진리를 겨냥한다고 나는 말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또한 상대성 이론은, 뉴튼의 이론이 케플러의 이론보다 더 나은 근사치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뉴튼의 이론보다 더 나은 근사치라고 혹은 그렇다고 우리는 추측한다고 말하기를 (아인슈타인 및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원한다. 그리고 나는, 진리에 대한 근접성 혹은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이 논리적으로 잘못 이해되거나 무의미함을 두려워하지 않고도 이것들을 말할 수 있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서, 나의 목표는 과학의 목표들을 기술하기 위에 나에게 필요한 그리고 규제적 원칙으로서 (단지 무의식적이고 직관적일지라도) 모든 비판적인 과학적 토론들이 지닌 합리성의 기초를 이룬다고 내가 주장하는 상식적 개념의 복원이다.

내가 바라보는 바와 같이, 진리를 정의(定義)하는 방법을 타스키(Tarski)가 창안하여 이룬 주요 업적은 (유한 위수[finite order]를 지닌 형식화된 언어들과 관련하여) 진리 혹은 진리와의 대응이라는 개념의 복원인데 의심스러워졌던 개념이다.a 그 개념을 의심스럽지 않은 (-의미론적) 논리적 개념들을 통하여 정의(定義)하면서 그는 그 개념의 적합성을 확립했다. 이렇게 한 다음에b, 명시적인 정의(定義)가 이 경우에 주어질 수 없을지라도 무한 위수(infinite order)를 지닌 형식화된 언어들과 관련하여 공리들(axioms)을 통하여 실제로 대등한 진리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가능함을 그는 또한 밝혔다. 나의 견해로, 그리하여 우리가 이율배반들을 피하려고 조심함에 의하여 형식화되지 않은 평범하거나 상식적 언어들을 다소 인위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그는 그 언어들로 (무한 위수[infinite order]를 지닌) 정의(定義)되지 않은 진리 개념의 비판적 사용을 복원했다.c 나는 그런 언어를 비판적 상식의 언어로서 기술해야겠다: 나는,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s I see it, the main achievement of Tarski’s invention of a

method of defining truth (with respect to formalized languages of finite order) is the

rehabilitation of the notion of truth or correspondence to reality, a notion which had

become suspect인데 주절동사가 현재형인 is이기 때문에 구태여 had become의 형태로 대과거를

표현할 필요가 없고, 과거나 현재완료로 표현함이 옳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Having done this로 완료분사구문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런 작업을

했기 때문에로 번역되어 있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n my opinion, he thereby rehabilitated the critical use of the

undefined notion of truth in non-formalized ordinary or commonsense languages (which

are of infinite order), if only we make them slightly artificial by taking care to avoid the

antinomies.인데 종속절이 현재나 미래를 의미하는 조건문이고 주절이 과거형으로 쓰여서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문장이다.

1935년에 자연언어의 무비판적 사용이 이율배반들을 야기할지라도 형식화된 언어의 구축에서 자연언어의 사용이 불가피함을 타스키(Tarski)가 얼마나

힘주어a 강조했는지 기억한다. 그리하여 그 배를 타고서 떠 있으려고 노력하면

서 우리가 다시 만들어야 하는 배에 대한 노이라트(Neurath)의 은유에서 그에

의하여 기술된 바와 같이, 일상 언어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말하자면 일상 언어를 개혁해야 한다. 이것은 정말로 내가 보는 바와 같이, 비판적 상식이라는 상황이다.

 

12. 그릇된 상식적 지식론

 

상식은 항상 우리의 출발점이라고 나는 말했지만, 상식은 비판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기대되었던 것과 같이, 상식이 자체를 숙고하게 될 때 상식은 너무 좋지 않다. 사실상 상식적 지식이라는 상식적 이론은 철없는 혼동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은, 심지어 최신 철학적 지식론들이 세워진 토대를 제공했다.

상식적 이론은 단순하다. 여러분이나 내가 세상에 관하여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귀를 세워서 소음들을, 특히 다른 사람들이 내는 소음들을 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닌 다양한 감각들은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들이다 우리의 정신들 속을 들어오는 근원들이거나 기록들b.

나는 자주 이 이론을 정신의 양동이 이론이라고 불렀다 정신의 양동이 이론은 그림에 의하여 최고로 재현된다:

그림 3. 양동이

우리의 정신은, 원래 비어있거나 다소 비어있는 양동이이고 이 양동이 속으로 우리의 감각들을 통하여 (혹은 아마도 위로부터 채우기 위한 깔때기를 통하여) 재료들이 들어오고 축적되어 소화된다.

철학적 세계에서 이 이론은, 정신의 백지상태라는 더 위엄이 있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진다: 우리의 정신은, 감각들이 자기들의 정보들을 새기는 비어있는 점판암이다. 그러나 백지상태 이론의 주요 요점은 상식적 양동이 이론을 초월한다: 출생 시 정신의 완벽한 공허상태를 그 요점이 강조함을 나는 의미한다. 우리의 토론과 관련하여 이것은 단지 두 가지 이론들 사이의 격차라는 사소한 요점인데 이유인즉 우리의 양동이 속에서 몇 가지 선천적인 개념들영리한 아이들의 경우에는 아마도 더 많고, 저능아들의 경우에는 더 적은 지니고 태어났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양동이 이론의 중요한 주장은, 우리의 감각통로들 속으로의 경험의 진입을 통하여 우리가 정말로 습득하는 것을 전부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가장 많이 습득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지식은 우리의 감각들을 통하여 수용된 정보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서, 경험에 의하여 수용된.

이런 형태로, 이 완전히 그릇된 이론은 여전히 매우 많이 살아있다. 그 이론은 여전히 교육 이론들이나 정보 이론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 (양동이는 출생 시에 비어있지 않고 컴퓨터 프로그램이 장착되어 있다는 것이 지금은 때때로 인정될지라도).a

나의 주장은, 양동이 이론은 그 이론의 모든 해석본들에서 완전히 판단력이 결여되고 철저히 틀렸다는 것과 이런저런 형태로 된 그 이론의 무의식적 전제들이 조건반사라는 여전히 강력한 이론과 최고의 명성들을 누리는 다른 이론들을 제시하면서 특히 소위 행동주의자들에게 파멸적인 영향을 여전히 발휘한다는 것이다.

정신에 관한 양동이 이론에 관하여 그릇된 많은 것들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지식은 우리의 양동이 안에 있는 사물들인 사물-같은 기록들로 (개념들, 인상들, 감각자료들, 원소들, 원자적 경험들, 혹은 아마도 다소 더 낫게 분자적 경험들이나 형태들[Gestalten]과 같은) 구성된다고 생각된다.

(2) 지식은,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있다: 지식은, 우리에게 도달한 그리고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에는 plays a part라는 표현이 들어있는데 역할을 의미하는 명사 part

형용사의 수식을 받지 않으면 부정관사가 붙지 않는다. 그리고 출생 시의 양동이에 어떻게 컴퓨터

프로그램이 장착될 수 있는지 저자의 설명이 없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흡수한 정보로 구성된다.

(3) 즉각적이거나 직접적인 지식이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들어와서

여전히 소화되지 않은 순수하고 완벽한 정보의 요소들. 어떤 지식도 이것보다 더 기본적이고 확실할 수 없을 터이다.

요점 (3)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3a) 상식론에 따르면 모든 오류인 모든 허위 지식은 이 궁극적이거나 주어진정보의 요소들을 잘못 해석함에 의하여 혹은 그 요소들을 다른 요소들과 잘못 연결함에 의하여 이 요소들을 희석시키는 지식적 소화불량에서 유래한다; 오류의 근원들은, 순수하거나 주어진 정보의 요소들에 우리가 주관적으로 추가하는 것들인데a 반대로 그 순수하거나 주어진 정보의 요소들은 오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의 표준들이어서 그 요소들이 혹시 틀렸는지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전혀 쓸모가 없을 터이다.

(3b) 그리하여 지식은, 오류가 없는 한, 본질적으로 수동적으로 수용되는 지식이다; 반면 오류는, ‘주어진 것들을 방해함에 의하여 아니면 혹시 어떤 다른 처리오류에 의하여 우리에 의하여 항상 능동적으로 (반드시 의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저질러진다: 완벽한 두뇌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터이다.

(3c) 주어진 요소들의 순수한 수용을 초월하는 지식은 그리하여 주어진 즉, 기본적인 지식보다 항상 덜 확실한데 주어진 즉, 기본적인 지식이 정말로 확실성의 표준이다. 내가 어떤 것을 의심한다면, 나는 모든 편견들을 배제하고 나의 눈을 다시 뜨고 솔직한 눈으로 관찰하기만 해야 한다: 나는 오류의 근원들로부터 나의 정신을 정화해야 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b 다소 더 높은 수준의 지식에 대한 실제적인 욕구가 있다: 단순한 자료들이나 단순한 요소들을 초월하는 지식에 대한. 이유인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히, 현존하는 자료들을 임박한 요소들과 연결함에 의하여 기대들을 증명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 더 높은 지식은 주로, 개념들이나 요소들의 연상을 통하여 확립된다고 기대들이c 통상적으로 말할 것이다.

(5) 개념들이나 요소들은, 함께 발생한다면 연상된다; 그리고 매우 중요하게, 연상은 반복에 의하여 강화된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 표현은 our subjective admixtures인데 우리가라는 our가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인 we는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대명사 the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일반인으로 해석되어 있다. 무엇을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6)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기대들을 증명한다 (개념 α가 개념 b와 강력하게 연상된다면 α의 발생으로 인하여 b에 대한 높은 기대가 유발된다).

(7) 동일한 방식으로, 믿음들이 나타난다. 참된 믿음은 한결같은 연상에

대한 믿음이다. 그릇된 믿음은, 아마도 때때로 과거에 개념들이 함께 발생했을지라도 함께 한결같이 반복되지 않는 개념들 사이의 연상에 대한 믿음이다.

요약하면: 내가 상식적 지식 이론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로크(Locke), 버클리(Berkeley) 그리고 흄(Hume)의 경험론과 매우 가깝고 많은 현대 실증주의자들 및 경험론자들의 경험론으로부터 동떨어지지 않는다.

 

13. 상식적 지식론에 대한 비판

 

상식적 지식론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틀렸다. 그러나 아마도 핵심적인 실수는, 듀이(Dewey)확실성 추구라고 불렀던 것에 우리가 매진한다는 전제이다.

자료들이나 요소들, 감각자료들이나 감각인상들이나 즉각적 경험들을 모든 지식의 안전한 토대로서 선정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아니고, 이 자료들이나 요소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기대에 찬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것들이고 그 철학자들은 그 창작품들을 심리학자들에게 성공적으로 물려주었다a.

무엇이 사실들인가? 아이들로서b 우리는,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우리와 마주치는 혼란스러운 정보들을 이해하는 것을 배운다. 그 정보들을 세밀히 조사하기를, 그 정보들 대부분을 무시하기를 그리고 즉각적이든 아니면 성숙의 과정에 의하여 우리가 준비되어지고 있는 미래에 우리에게 생물학적 중요성을 지닌 정보들을 선정하기를 우리는 배운다.

우리에게 도달하는 정보들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기는 극도로 복잡하다. 그것은 타고난 의향들에 근거한다. 우리에게는 정보들을 일관적이고 부분적으로 규칙적이거나 순서가 매겨진 이론체계를 참고하는c 타고난 의향들이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실재를 참고하는c. 다시 말해서, 실재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지식은 성숙하는 타고난 의향들로 구성된다. (나의 견해로 이것은,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managed to bequeath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어떻게 해서든 전하려고

했다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As childre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아이들처럼으로 번역되어 있다.

c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refer to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귀속시키는으로 번역되어 있다.

 

부언하여, 실재론을 선호하는 강력한 독립적 논증으로서 사용되기에는 너무 정교한 구축물이다. 아무튼 우리는 시행과 착오 제거에 의하여 이해하기를 배우고, 이해된 정보가 마치 즉각적이거나 주어진양 그 정보를 경험하는 데 우리가 매우 능숙하고 빠르다할지라도 항상 몇 가지 실수들이 있어서 통상적으로 크게 복잡하고 상당히 효율적인 특별한 기제들(機制: mechanisms)에 의하여 수정된다.

그리하여 확실성이 부착된 주어진 것에 대한 즉, 참인 자료에 대한 전체 이야기는 상식의 한 부분일지라도 틀린 이론이다.

우리는 많은 것이a 마치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양, 그리고 마치 그 많은 것이 완벽하게 확실한 양 많은 것을 경험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이것은, 윈스턴 처칠이 교차방위법(crossbearings)’라고 지칭했을 것을 고려하여 많은 내장 검사 장치들을 지닌 우리의 정교한 해석 도구 덕분이다; 우리가 해석하면서 저지르는 매우 많은 실수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하여 정말로 우리가 즉각성을 경험하는 이 경우들에서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따름인 체계들. 그러나 이 잘-적응된 경험들이 신뢰성이나 진리에 대하여 주어진표준들과 여하한 의미에서도 동일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한다. 또한 사실상 이 경우들은 직접성의 혹은 확실성의 표준을 확립하지 않으며, 우리의 즉각적 지각들에서 우리가 결코 실수를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는다b: 성공은 생물학적 체계들로서 우리가 지닌 매우 탁월한 효율성에 기인할 따름이다. (-훈련된 사진사는 잘못된 노출들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받은 훈련 때문이지, 그의 사진들이 자료들이나 진리의 표준들로서 아니면 혹시 올바른 노출의 표준들로서 촬영될c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거의 우리 모두는 훌륭한 관찰자들이자 훌륭한 지각자들(perceivers)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적 이론들에 의하여 설명될 문제이고,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이거나 직관적인 지식이라는 독단론d 위한 토대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결국, 우리 모두는 정말로 때때로 실패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오류가능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e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i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위 문장의 이야기의 대명사로 해석되었다.

b 역주: 이 등위접속사로 연결된 문장의 원문은 or show that we can never err in our immediate perception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또한 우리는 우리의 직접적인 지각들에서 결코 실수를 하지 않음을 보여주지 못한다로 해석되어 있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take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간주되어로 해석되었다.

d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dogmatism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학설로 번역되고 강조표시도 없다.

e 역주: ‘그리고에서부터 역주 표시까지는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다.

 

14. 주관론적 지식론에 대한 비판

 

이 모든 것은 물론 관념론이나 주관론적 지식론을 반박하지a 않는다. 지각에 대한 심리학에 (혹은 생리학) 관하여 내가 말한 것 모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b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사용하지 않은 주관론적이고 관념론적인 이론에 반대하는 매우 훌륭한 논증이 있다. 그 논증은 이렇다.

대부분의 주관론자들은 버클리(Berkeley)와 함께, 자신들의 이론이 모든 실제적인 면들에서 실재론과 특히 과학들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과학들은 우리에게 진리의 표준들을 밝히지 않지만 예측들을 하는 완벽한 기구들일 따름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확실성에 대하여 더 높은 표준들이 있을 리가 없다 (하느님에 의하여 주어지는 계시들을 제외하고). 그러나 그 다음에, 생리학이 입장해서는c 우리가 지닌 자료들이 진리의 혹은 확실성의 표준들이라기보다는 오류 가능하다고 예측한다c. 그리하여 이런 형태의 주관적 도구주의가 참이라면 그것은 자체에 대한 반박을 낳는다. 그리하여 그것은 참일 리가 없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관념론을 반박했다고 우리는 꿈을 꾸고 있을 따름이라고 답변할 터인 관념론자를 반박하지 않는다.

나는 아마도 곁가지로, 아인슈타인에게 큰 인상을 남긴 논증인 판단력이 결여된 실재론에 반대하는 형식적으로 유사한 러셀의 논증이 수용될 수 없다고 언급할 것이다. 러셀의 논증은 이렇다: ‘관찰자는, 자신이 돌을 관찰하고 있는 것으로 자신에게 느껴질 때, 물리학이 [생리학] 믿어질 수 있다면 자신에 미치는 돌의 효과들을 실제로 관찰하고 있다. 그리하여 과학은 자체와 싸우고 있는 듯하다... 판단력이 결여된 실재론은 물리학을 낳고 물리학은, 참이라면, 판단력이 결여된 실재론이 허위임을 밝힌다. 그리하여 판단력이 결여된 실재론은, 참이라면, 허위이다; 그리하여 판단력이 결여된 실재론은 허위이다.’

러셀의 논증은 수용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이탤릭체로 표시한 구절이 틀렸기 때문이다. 관찰자가 돌로부터 자신에게 다다르는 신호들 중 몇 가지 신호들을 해석할지라도, 관찰자가 돌을 관찰할 때 그는 자신에 미치는 돌의 효과를 관찰하지 않는다 (가령, 부상을 입은 발가락을 고려함에 의하여 그가 혹시 그렇게 할지라도). 러셀의 논증은 다음과 동일한 수준에 있다: ‘독자가 자신에게 러셀의 저서를 읽고 있는 듯이 보일 때, 독자는 실제로 자신에게 미치는 러셀의 효과들을 관찰하고 있는 중이고 그리하여 러셀의 저서를 읽고 있지 않다.’ 사실은, 러셀의 저서를 읽은 것은 (, 이해하는 것) 러셀의 원문에 대한 관찰들에 부분적으로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석할 가치가 있는 문제가 없다; 우리 모두는,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몇 가지 종류들의 일들을 즉시 실행하는 복잡한 과정이라는 것을 안다.

그 과정에는 영리하게 이 행위들을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몇 가지 새로운 논증들이 제시될 때까지 나는 철없이 실재론을 수용하겠다고 나는 거듭 말한다.

 

15. 상식적 지식론의 다윈 이전의 특징

 

상식적 지식론은 모든 사실에서 극단적으로 틀렸다. 그 이론이 지닌 근본적인 오류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주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있는데 그 지식은 의향들(dispositions) 및 기대들(expectations)로 구성된다.

(2) 그러나 인간의 지식이라는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또한 있는데 그 지식은 비판적 토론에 제출되는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기대들로 구성된다.

(3) 상식이론은, (1) (2)의 차이점이 가장 광범위한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주관적 지식은 비판에 종속되지 않는다. 물론 주관적인 지식은 다양한 수단들에 의하여 예를 들어, 문제의 주관적 지식이나 의향을 지닌 사람을 제거함에 (죽임에) 의하여 변화될 수 있다. 주관적 의미의 지식은, 생명체의 돌연변이와 제거라는 다윈적 방법에 의하여 성장하거나 더 나은 적응들을 이룩한다. 이것과 반대로, 객관적 지식은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추측을 제거함에 (죽임) 의하여 바뀌고 성장할 수 있다: 그 지식을 지닌 자a 살아남을 수 있다 그가 자기-비판적인 사람이라면 심지어 자기 자신의 추측도 제거할 수 있다.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carrier’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전달자로 번역되어 있다.

차이점은,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이론들은 비판적으로 토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이 극도로 중요한 오류와 별도로, 상식이론은 다양한 장소들에서 틀렸다. 상식이론을, 본질적으로, 지식의 발생에 관한 이론이다: 양동이 이론은 우리의 지식 습득에 우리가 주로 수동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 관한 이론이고 그리하여 그 이론은 또한 내가 지식의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이론이다. 그러나 지식의 성장에 관한 이론으로서 상식이론은 철저하게 허위이다.

(5) 백지상태 이론은 다윈 이전 이론이다: 생물학에 대하여 어떤 느낌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우리가 지닌 성향들 대부분이 우리가 그 성향들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의미에서나 (예를 들어, 호흡하고, 삼키고 기타 등등의 성향들) 성숙 과정에서 성향들의 발전이 환경에 의하여 획득된다는 (예를 들어, 언어들 습득하려는 성향) 의미에서 타고난 것임이 틀림없이 분명하다.

(6) 그러나 우리가 백지상태 이론들에 대하여 잊고 양동이가 태어날 때 반쯤 차있다거나 양동이가 성숙 과정에 따라서 자체의 구조를 바꾼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이론은 여전히 크게 오해를 낳는다. 이것은 모든 주관적 지식이 성향적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주로 그 지식이 연상적 형태의 (혹은 조건반사 형태) 성향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입장은 분명하고도 본질적으로 표현하면: 연상이나 조건반사와 같은 것은 없다. 모든 반사행동들은 무조건적이다; ‘조건반사들로 추정되는 것들은, 부분적이거나 전체적으로 허위 출발들을 다시 말해서 시행 및 착오 과정에서의 실수들을 제거하는 수정행위들의a 결과들이다.

 

16. 진화적 인식론에 대한 개괄

 

내가 아는 한, ‘진화적 인식론이라는 용어는 나의 친구 도널드 T. 캠벨(Donald T. Campbell)에게서 기인한다. 그 개념은 다윈 이후의 것이고 19세기말까지 J. M. 볼드윈(Baldwin), C. 로이드 모건(Lloyd Morgan) 그리고 H. S. 제닝스(Jennings)과 같은 사상가들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물론 다윈뿐만 아니라 로이드 모건(Lloyd Morgan) 및 제닝스(Jennings)를 나의 첫 번째 저서를 서술하기 전 몇 년 동안에 매우 흥미롭게 읽었을지라도, 내 자신의 접근방식은 이 영향들 대부분과 다소 독립적이었다. 그러나 많은 다른 철학자들과 같이, 지식에 대한 두 가지 문제들의 구분을 나는 크게 강조했다a: 한편으로는 지식의 발생이나 역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에게 있는 진리, 타당성 그리고 정당화라는 문제들이다. (그리하여 나는, 예를 들어, 1934년의 프라하 회의에서b 강조했다: ‘과학적 이론들은 결코 정당화되거나 검증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럼에도 불구하고, 가설 A는 특정 상황 하에서 가설 B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나는 심지어 매우 일찍, 또 다른 이론에 대하여 한 이론을 선호하는 논리적 정당화(내가 가능하다고 믿는 유일한 종류의 정당화’) 배제하지 않고, 진리나 타당성이라는 문제들이 모든 유전적이고 역사적이고 심리학적 문제들로부터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c

그러나 이미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를 서술할 때 나는, 우리 인식론자들은 유전학자들에 대하여 우위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타당성이나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는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조사하는 연구들은, 유전적 및 역사적 그리고 심지어 심리학적 연구들에게도 가장 큰 중요성을 띨 수 있다. 그 연구들은, 지식의 역사에 대한 연구들이 과학적 발견에 관한 논리학자에게 많은 중요한 문제들을 부과할 수 있을지라도, 여하한 경우에도 문제의 후자(後者) 유형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

그리하여 인식론의 주요 개념들이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이라고 내가 주장할지라도, 나는 여기서 진화적 인식론을 말한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진화적 인식론에 대한 모든 사례들과 그 인식론이 지닌 문제들 중 많은 문제들이 지식의 발생을 연구함에 의하여 제시될 것이다.

이 태도는 정말로, 상식이론의 그리고 가령 데카르트와 로크(Locke)와 버클리(Berkeley)와 흄(Hume) 그리고 리드(Reid)의 고전적 인식론의 태도에 대하여 정확하게 반대가 된다: 이유인즉 데카르트와 버클리(Berkeley)에게 진리는 개념의 근원에 의하여 보증되는데 그 근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의하여 지도되기 때문이다. 무지는 죄악이라는 견해의 흔적들은 로크(Locke)와 버클리(berkeley)에게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흄(Hume)과 리드(Reid)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유인즉 이론들이 참임과 동시에 우리의 정신적 장치가 이론들의 난관 수준에 충분히 적응되어서 우리가 이론들을 참으로서 혹은 심지어 즉각적으로참인 것으로서 간주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반면, 그곳에서는 우리가 지닌 개념들이나 인상들이나 지각들을 진리라는 하느님의 봉인으로 끝내는 것이 그리고 신자(信者: believer)에게 최고의 안전성을 제공하는 것이 그 개념들이나 인상들이나 지각들이 지닌 직접성이나 즉각성이기 때문이다.a 그러나 우리는, 소위 믿음이 지닌 즉각성이나 직접성을 이유로 이론이 지닌 혹은 믿음이 지닌 진리를 주장하기에 결코 정당화되거자격을 갖추지않는다. 나의 견해로 이것은 앞뒤가 바뀐 것이다: 즉각성이나 직접성은, 이론이 참이고 또한 (이 이유 때문에 부분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유용하다는 생물학적 사실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즉각성이나 직접성이 진리를 확립한다거나 진리에 대한 기준이라고 논증하는 것은, 관념론의 근본적인 오류이다.

과학적 실재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의 행동들과 반응들이 우리의 환경에 잘못 적응된다면 우리가 생존하지 못할 터임은 상당히 명백하다.b 믿음이 기대 및 행동하려는 준비상태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우리가 지닌 더 많은 실제적 믿음들 중에서 많은 믿음들이 우리가 생존한다면 참이기 쉽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 믿음들은, 여하한 정도로도 신뢰될 수 있거나 참이거나 확실하지 않을지라도, 항상 훌륭한 출발점인 상식의 보다 독단적인 부분이 된다.

그러나 가장 성공적인 동물들 중 몇몇 동물들이 사라졌다는 것과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 보장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하여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터라도 우리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다. 과거의 생물학적 성공이 미래의 생물학적 성공을 결코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완전히 명백히 하기 위하여 나는 이 요점을 언급한다. 그리하여 생물학자에게는 이론들이 과거에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미래의 성공에 대하여 여하한 보증도 하지 않는다.

상황은 무엇인가? 과거에 반박된 이론은 그 이론에 대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유용한 상태로 유지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케플러의 법칙들을 많은 목적들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반증된 이론은 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물학적이거나 도구적 성공만을 찾지 않는다. 과학에서 우리는 진리를 탐구한다.

진화적 이론의 핵심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신들의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동물들은 사멸한다; 결과적으로 생존하는 (특정 순간까지) 동물들은 틀림없이 잘 적응된 것들이다. 이 공식은 항진명제적(恒眞命題的: tautological)이나 다름없는데 왜냐하면 당분간 잘 적응된이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그것이 살아남도록 만든 저 특징들을 지닌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다윈론의 상당한 부분이 경험적 이론의 특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자명한 이론이다.

다윈론에서 경험적인 것과 경험적이 아닌 것을 명백히 하자. 특정 구조를 지닌 환경의 존재는 경험적이다. 이 환경이 변하지만 긴 기간 동안 너무 빠르지 않게 그리고 너무 급진적이지 않게 변한다는 것은 경험적이다; 그것이 너무 급진적이라면 태양은 아마도 내일 폭발하여 신성(新星: nova)이 되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와 모든 적응행위는 끝장이 날 것이다. 요컨대 생명체와 환경에 대한 느린 (‘느린이 여기서 무엇을 의미하든) 적응이 가능한 세계에서 조건들의 존재를 설명하는 논리에는 여하한 것도 없다.

그러나 환경 변화들과 변하는 조건들에 민감한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고려하고, 생명체들이 지닌 속성들과 변하는 환경의 속성들 사이에는 미리 확립된 조화가 없다는 것을 전제하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생명체들이 돌연변이들을 만들어내고 그 돌연변이들 중 몇몇은 임박한 변화들에 대한 적응들이어서 돌연변이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조건으로만 생명체들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발견한다면, 우연히 살아있는 생명들은 그들의 환경에 잘 적응한다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적응 과정이 충분히 길게 지속된다면, 적응의 속도와 수완과 복잡성은 기적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떠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의 그리고 착오 제거의 방법은 이 모든 것을 야기하는데, 경험적 방법이 아니라 상황의 논리에 속하는 것으로 언급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다윈론에서의 논리적이거나 선험적 요소를 설명한다 (아마도 다소 너무 간략하게a).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및 논증적 언어의 발명이 엄청나게 생물학적으로 발전한 것은 이전보다 이제 더 정확하게 보일 수 있다: 이론들을 언어적으로 정식화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론들을 지닌 인류를 제거하지 않고도 이론들을 비판하여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업적이다. 두 번째 업적은 우리가 지닌 이론들을 향한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비판 태도의 발전이다. 이것으로써 과학의 방법이 시작된다. 아메바와 아인슈타인의 차이점은, 둘 모두가 시행과 오류 제거의 방법을 사용할지라도 아인슈타인은 오류에 의하여 흥미를 느끼는 반면 아메바는 오류 저지르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오류들을 발견하여 제거함에 의하여 배우려는 희망에서 자신의 오류들을 의식적으로 탐구했다. 과학의 방법은 비판적 방법이다.

그리하여 진화적 인식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진화와 인식론이 과학적 방법과 일치하는 한, 진화와 인식론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 진화적 인식론으로 인하여 우리는 논리적 토대들을 근거로 이것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7. 배경지식과 문제들

 

과학의 목표는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의 증가이다. 내가 논증한 바와 같이, 백지상태 이론은 터무니없다: 생명 진화의 그리고 생명체 발전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성향들과 기대들의 형태로 된 어떤 지식의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지식의 증가는 이전 지식의 수정에 그 지식을 변경하거나 그 지식을 대규모로 거부하는 것 놓여있다. 지식은 결코 무(: nothing)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항상 몇 가지 문제들인 몇 가지 난제들과 함께 어떤 배경지식으로부터 그 순간 당연히 여겨지는 지식 시작된다. 이것들은 통상적으로, 한편으로는 우리가 지닌 배경지식에 내재된 기대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관찰들이나 그 관찰들에 의하여 제안되는 몇 가지 가설들과 같은 몇 가지 새로운 발견들a 사이의 충돌로부터 발생한다.

 

18. 우리의 관찰들을 포함하여 모든 지식은 이론-함유이다

 

다양한 주관적인 형태들로 된 지식은 성향성이고 기대성이다. 지식은 생명체들이 지닌 성향들로서 구성되고, 이 성향들은 생명체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모습들이다. 한 가지 유형의 생명체는 오늘날 물에서만 살 수 있고 또 다른 유형의 생명체는 땅에서만 살 수 있다; 그 생명체들의 지금까지 생존했기 때문에, 그 생명체들의 지닌 바로 그 생태가 그 생명체들이 지닌 지식의 일부를 결정한다. 추산을 하는 것이 터무니없지 않다면, 생명체가 지닌 1,000 단위의 지식 중에서 999 단위가 계승되었거나 타고난 것이라고 그리고 한 단위는 이 타고난 지식에 대한 수정들로 구성될 따름이라고 나는 말할 터이다; 그리고 추가해서 나는, 이 수정들에게 필요한 유연성 또한 타고난 것이라고 제안한다.

이로부터 근본적인 정리가 귀결된다:

 

모든 학습인 모든 습득된 지식은 어떤 형태의 지식이나 성향의 수정으로 (아마도 거부) 구성되는데 그 지식이나 성향은 이전에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고난 성향들의 수정으로 (아마도 거부) 구성된다.b

 

이것으로부터 두 번째 정리가 즉각적으로 두 번째 정리가 추가될 수 있다:

 

모든 지식의 성장은, 더 가까이 진리에 접근하려는 희망에서 변경되는 현존하는 지식의 개선에 달려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성향들이 어떤 의미에서 변하지 않거나 서서히 변하는 환경적 조건들에 대한 적응들이기 때문에, ‘이론이라는 용어의 충분히 넓은 의미를 전제하여 그 성향들은 이론-함유로서 기술될 수 있다.a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 상황들 사이에서 관찰하여 결정을 내리려고 시도하는 전형적인 상황들의 규칙성들 집합과 관련되지 않은 관찰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장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대성 이론들이 유전적으로 융합되지 않는 감각기관은 없다. 고양이의 눈은, 준비되어 그 눈의 구조 속으로 장착된 기제들(機制: mechanisms)이 있는 몇 가지 전형적인 상황들에 대하여 두드러진 방식들로 반응한다: 이 기제들(機制: mechanisms), 그 상황들 사이에서 고양이의 눈이 구분해야 하는 생물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상황들과 대등하다. 그리하여 이 상황들 사이에서 구분하는 성향이 감각기관에 장착되고 그 성향과 함께 이 상황들 그리고 이 상황들만이 그 상황들의 구분을 위하여 눈이 사용될 수 있는 관련된 상황들이라는 이론이 장착된다.

우리의 모든 감각들이 이런 방식으로 이론-함유이라는 사실은, 양동이 이론의 근본적인 실패를 그리고 그 이론과 함께 우리의 지식을 우리의 관찰들까지 혹은 생명체의 입력(input)까지 추적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다른 이론들의 근본적인 실패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반대로, 관련된 입력(input)으로서 흡수될 (그리고 반응될) 수 있는 것과 무관한 것으로 무시되는 것은 생명체가 지닌 내재적 구조에 (‘프로그램’) 전적으로 의존한다.

 

19. 주관론적 인식론에 관한 회고

 

여기에서 도달된 관점으로부터, 주관론적 인식론에 전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서 보이는 것을 출발점으로서 선택하기를 제안하는 주관론적 인식론을 우리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배척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인관찰 경험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이 경험들은 일반적으로 완벽하게 훌륭하고 성공적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생존하지 못했을 터이다a); 그러나 그 경험들은 직접적이지도 즉각적이지도 않고 그 경험들은 절대적으로 신뢰 가능하지 않다.

우리가 관찰 경험들을 우리의 잠정적 출발점으로 상식처럼 진리나 확실성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지 않는 출발점b 만들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없는 듯이 보인다. 우리에게 비판적 경향이 있다면 어디에서 혹은 어떻게 우리가 출발하는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아마도 러셀이 판단력이 결여된 실재론으로 지칭할 것인) 출발하여 우리는 물리학과 생물학을 통과하여, 환경으로부터 우리에게 도달하는 신호들의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해석행위들일지라도 우리의 관찰들은 고도로 복잡하고 항상 신뢰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결과에c 다다른다. 그리하여 우리의 관찰들은 진리에 대한 표준이라는 의미에서 출발점으로 고양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 선입견이 없는 주관론적 인식론 즉, 백지상태 이론으로서 보인 것은 완전히 와해된다. 그 자리에 우리는, 인식 주체인 관찰자가 중요하지만 매우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하는 지식론을 세워야 한다.

 

20. 객관적 의미에서의 지식

 

상식적 지식론, 그리고 그 이론과 함께 적어도 볼차노(Bolzano)와 프레게(Frege)까지의 모든 혹은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한 가지 종류의 지식만 어떤 인식 주체가 소유한 지식 있다는 것을 당연시했다.

우리가 알게 될 것처럼 진짜이거나 순수하거나 순전히 주관적인 의식적 지식은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종류의 지식을 주관적 지식이라고 부르겠다.

주관적 지식론은 매우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 이론은 데카르트와 함께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otherwise we should not have survived인데 should have + 과거분사는 과거에 실행되지 않은 의무를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 가정법 과거의 표현으로 we would not have survived로 써야한다. 그리고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한구 번역본에서 이 표현은 상식처럼 출발점은 진리 내지 확실성에 대한 언질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로 독립적인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다.

c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the result that절이라는 동격명사절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항상 신뢰할 수 없는 결과로 번역되어 있다.

명시적이 된다: ‘아는 것은 활동이고 인식 주체를 전제한다. 아는 것은 주관적인 자아이다.

이제 나는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을 구분하고 싶다: 주관적 지식 (생명체적

지식으로 지칭되어야 틀림없이 나은데 왜냐하면 그 지식이 생명체들이 지닌

성향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객관적 지식 즉,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인데 그 지식은 우리의 이론들, 추측들, 상상들로 된 논리적 내용으로 (그리고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가 지닌 유전적 암호의 논리적 내용으로) 구성된다.

객관적 지식에 관한 보기들은, 학술지들과 저서들로 출판되어 도서관들에 보관된 이론들이다; 그런 이론들에 대한 토론들; 그런 이론들과 관련하여 지적된 난제들이나 문제들; 기타 등등.

우리는 물리적 세계를 세계 1’, 우리의 의식적 경험들의 세계를 세계 2’로 그리고 저서들과 장서들과 컴퓨터 기억들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의 논리적 내용들세계 3’으로 지칭할 수 있다.

이 세계 3에 관하여 나에게는 몇 가지 주장들이 있다:

 

(1) 그 문제들이 발견되기 이전에 그리고 그 문제들이 의식되기 이전에 그곳에 있던 세계 3 안에 있는 새로운 문제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문제들에 대응하는 어떤 것이 세계 2 안에서 나타나기 이전에. 사례: 우리는 소수들(prime numbers)을 발견하고, 소수들의 수열이 결론적으로 무한히 나타나는지의 유클리드가 지녔던 문제를 발견한다.

(2) 그리하여 우리는 세계 3자율적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세계 1에서 우리가 지리학적 발견들을 이룩할 수 있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이론적 발견들을 이룩할 수 있다.

(3) 주요 주장: 우리가 지닌 의식적인 주관적 지식은 (세계 2 지식) 세계 3, 다시 말해서, (적어도 거의 실제로a) 언어적으로 정식화된 이론들에 의존한다. 사례: 우리의 즉각적인b 자의식이나 우리의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 그 지식은 매우 중요한데 매우 크게 세계 3 이론들에 의존한다: 우리가 잠이 들거나 무의식이 되었을 때 우리의 몸과 그 몸의 지속되는 존재에 관하여 우리가 지닌 이론들에; 시간에 (시간의 선형성[線形性: linearity]) 대한 우리의 이론들에; 다양한 등급들의 명료성으로 된 과거의 경험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우리가 회복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이론에; 기타 등등. 이 이론들에게 잠이 든 후에는 깨어난다는 우리의 기대들이 연결된다.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식은 모든 이 (세계 3) 이론들에 의존한다는, 그리고 동물들은 느낌들과 감각들과 기억들과 그리하여 의식이 가능할지라도 인간 언어의 그리고 특히 인간적인 세계 3의 발전의 결과들 중 하나의 결과인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식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나는 제안한다.

 

21. 확실성 추구와 상식적 지식론의 주요 약점

 

상식적 지식론은 세계 3을 알지 못하고 그리하여 그 지식론은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의 존재를 무시한다. 이것이 그 이론에 있는 커다란 약점이지만 그 이론에 있는 가장 큰 약점은 아니다.

내가 상식적 지식론의 가장 큰 약점으로 간주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먼저 두 가지 서술들인 (a)(b)를 정식화하겠는데 그 서술들은 이 지식론의 특징이다.

(a) 지식은 특별한 종류의 믿음이거나 견해이다; 지식은 특별한 정신 상태이다.

(b) 한 가지 종류의 믿음이나 한 가지 정신 상태가 단순한믿음 이상에 해당되어야 해서 지식의 한 항목에 해당된다는 주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야 하기 위해서, 믿는 사람이 그 지식의 항목이 확실하게 참임을 확립할 충분한 이유들을 소유할 것을 우리는 요구한다.

이 두 가지 정식화들 가운데서, (a)는 쉽게 다시 정식화될 수 있어서 수용될 수 있는 생물학적 지식론의a 한 부분이 작은 부분 된다; 이유인즉b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주관적 지식은, 생명체가 때때로 믿음이나 견해나 정신 상태의 형태로 의식하게 될 일종의 성향이다.

이것은 완벽하게 수용될 수 있는 서술이어서, (a)가 말하고자 의도한 것을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biological theory of knowledg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생물학적

이론의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접속사 for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으로 번역되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할 따름이라고 주장될 것이다. 게다가, (a')은 객관적 지식을

완전히 중요시하는 지식론과 완벽하게a 양립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세계 3의 일부로서 지식을 완전히 중요시하는.

(b)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객관적 지식을 고려하자마자, 기껏해야 그 지식의 매우 작은 부분에만 확실한 진리에 관한 충분한 이유들과 같은 것이 주어질 수 있다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증명될 수 있는 지식으로서 기술될 수 있는 그리고 형식논리학으로 된 그리고 (유한) 산술로 된 명제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이라도) 것은 저 작은 부분이다 (조금이라도 있다면).b

다른 모든 것은 객관적 지식의 단연코 가장 중요한 부분, 그리고 물리학 및 생리학과 같은 자연과학들을 포함하는 부분 특징에서 본질적으로 추측성이거나 가설적이다; 확실하게 참임은커녕, 이 가설들이 참이라고 믿는 데는 충분한 이유들이 없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b), 우리가 객관적 지식을 포함하도록 상식적 지식론을 일반화하려고 그렇게 노력할 터이라면 증명 가능한 지식만 (그런 것이 있다면) 객관적 지식으로서 인정될 수 있을 터임을 밝힌다c. 우리가 과학적 지식으로서 기술할 광범위하고도d 중요한 이론들의 전체 분야는, 그 분야의 추측성 특징 때문에, 전혀 지식으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할 터이다. 이유인즉 상식적 지식론에 따라서, 지식은 정당화되는 믿음이기 그렇게 정당화되어서 확실하게 참인 믿음 때문이다. 그리고 추측성 지식이라는 광범위하고도d 중요한 분야에서 없는 것은 정확하게 이런 종류의 정당화이다.b

정말로 추측성 지식이라는 용어는, 그 문제가 그리하여 상식 이론의 측면에서 접근된다면, 용어들에서 모순이라고 주장될 것이다. 이유인즉 상식 이론은 자체가 지닌 주관론에서 매우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충분한 이유라는 개념은 원래 의심의 여지없이 객관론적 개념이다: 원래 요구되었던 것은 문제의 지식 항목을 증명하거나 밝히는 데 필요한 이유들이어서 (b)는 정말로 증명 가능한 지식이라는 객관론적 개념을 성향이나 믿음의 세계인 주관론적 세계 2로 확대하는 것으로서 판명된다. 결론적으로, 모든 합당한 일반화이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perfectl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두 가지 문장의 원문은 it ~ that 강조구문의 오류인 it ~ which로 쓰였다.

c 역주: 이 문장에서 주어는 (b)이고 동사는 indicate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 동사를 번역하지

않고 객관적인 지식으로 인정될 수 있다로 번역했다.

d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vas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 누락되었고 whole vast전적으로 매우

번역되고 전체 분야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뒤의 역주 d에는 광범위하고매우로 번역되어 있다.

거나 객관론적 해석인 (b')(a')와 유사한 노선들에서 틀림없이 객관적 지식을 증명 가능한 지식에 국한시킬 터이고 그리하여 틀림없이 추측성 지식을 포기할 터이다. 그러나 그것과 함께, (b')은 지식론의 가장 중요한 종류이자 핵심적 문제인 과학적 지식을 틀림없이 포기할 터이다.a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상식적 지식론의 가장 큰 약점을 드러낸다. 그 약점은 객관적 지식과 주관적 지식의 구분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객관적이고 증명 가능한 지식을 모든 지식에 대한 모형으로서 수용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단순한 견해단순한 믿음으로부터 참이어서 확실한 지식을 구분하는 데 우리가 완벽하게 충분한 이유들을 지니는 것은 실제로 여기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식적 지식론은 본질적으로 여전히 주관론적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그 지식론은 주관적으로 충분한 이유들과 같은 것을 인정함이라는 난관에 봉착한다; 다시 말해서, 주관적일지라도 분명하게 그리고 한결같이 참이고 그리하여 지식으로서 수용될 수 있는 개인적인 경험이나 믿음이나 견해 같은 것.

그 난관은 큰데 이유인즉 믿음들의 영역 내부에서 어떻게 우리가 구분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리나 충분한 이유를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합리적으로 방어될 수 없는 믿음의 힘에 의해서나 ([Hume]), 믿음의 신적(神的) 근원에 대한 표시로서 방어되는 믿음의 명료성과 차별성에 의하여 (데카르트에 의하여); 혹은 더 단도직입적으로, 믿음의 기원이나 믿음의 시작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지식의 근원들에 의하여. 이런 방식으로, 상식이론은 주어진’ (계시된?) 지식에 대한 어떤 기준의 수용으로 이어진다; 주어진 감각이나 감각자료로 이어진다; 혹은 즉각성이나 직접성이나 직관성의 느낌으로 이어진다. 무오류와 그리하여 내용의 순수함을 보증하는 것은 기원의 순수성이다.

그러나 이 기준들 모두는 허위이다. 생물학자는, 우리의 감각기관들이 통상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을 인정하여 심지어 다윈의 논증들에 의하여 그 감각기관들의 효율성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감각기관들이 항상 혹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과 그 감각기관들이 진리에 대한 기준으로서 의존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것이다. 감각기관들에 있는 직접성이나 즉각성은 표면적일 따름이다: 직접성이나 즉각성, 감각기관들이 이용하여 작동하는 기적적인 부드러움과 효율성의 또 다른 모습이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감각기관들은 체계 안에 장착된 많은 미묘한 통제 기제들(mechanisms)을 사용하여 고도로 간접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닌 지식의 전체 분야에는 절대적인 확실성과 같은 없다. 그러나 교설 (b)는 지식추구를 확실성 추구와 동일시한다. 이것은, 그 교설이 상식적 지식론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또 다른 까닭을 설명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객관적인 과학적 지식은 추측성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그 다음에 주관적 지식의 분야에서 그 지식과 유사한 지식을 찾는 것이다. 이 유사한 지식은 쉽게 발견될 수 있다. 주관적 지식은 고도로 복잡하고 미묘하지만 (건강한 생명체에서) 놀랍게 정확한a 적응 도구의 한 부분이라는 것과, 주관적 지식은 주로 객관적인 추측성 지식처럼 작동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시행 및 오류 제거의 방법에 의하여, 혹은 추측과 반박 그리고 자기-교정에 (‘자동교정’) 의하여 작동한다는 것.

상식은 이 도구의 한 부분으로 보이고 그리하여 상식의 위상은 다른 표면적으로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인 지식의 위상과 전혀 다르지는 않다. (여기서 토마스 리드[Thomas Reid], 직접성이나 즉각성으로부터 나오는 논증의 힘을 크게 과장했을지라도, 옳았다.)

 

22. 확실성에 관한 분석적 언급들

 

나는 단어들이나 개념들에 대한 정의들(定義: definitions)이나 언어적 분석에 전혀 흥미가 없다. 그러나 확실성이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가치가 없는 것이 매우 많이 언급되어서b 여기서는 명료성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 언급되어야 한다.

개괄적으로 실제적 목적들을 위하여 충분히 확실한을 의미하는 상식적 확실성 개념이 있다. 내가 매우 정확한 시계를 보고 그 시계가 나에게 8시임을 밝힐 때 나는 그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를 (시계가 멈추지 않았다는 표시)

 

a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accurat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정교한으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so much of so little value has been sai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자주 말했기 때문에라고 번역되어 있다.

들을 수 있고 그 다음에 나는 시간이 상당이 8시에 가깝다고 합당하게 확신하거나 모든 실제적 목적들을 위하여 확신한. 내가 책을 사고 책방주인으로부터 20페니의 거스름돈을 받을 때 나는 두 개의 동전이 위조된 것이 아님을 완전히 확신한. (이것에 대한 나의 이유들은 매우 복합적이다: 그 이유들은, 동전 만드는 사람들이 10페니 동전들을 만들 가치가 없게 만드는 통화팽창과 관련이 있다; 문제의 동전들이 옛 은화 위조가 이익을 낳던 옛날 좋은 시절의 골동품일 수 있을지라도.)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당신 손에 있는 동전이 10페니 동전임을 당신은 확신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그 동전을 다시 일견하그렇소라고 말할 터이다. 그러나 나의 판단에 많은 것이 걸려있다면a 나는 다음 은행에 들어가서 은행원에게 동전을 면밀히 보라고 요구하는 수고를 할 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생명이 그 동전에 달렸다면, 나는 심지어 영국은행의 출납국장에게 가서 진짜 동전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터이다.

이것에 의하여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믿음에 대한 확실성은 그 믿음의 강도(强度: intensity)의 문제라기보다는 상황의 문제라는 것: 그 믿음이 지닌 가능한 결과들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관련된 문제. 모든 것은, 믿음에 있는 진리나 허위성에 부착된 중요성에 의존한다.

믿음은 우리의 실제적인 일상생활과 연결된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믿음을 근거로 행동한다. (행동주의자는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믿음, 우리가 근거를 두고 행동하는 중요한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어떤 다소 낮은 등급의 확실성으로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믿음에 많은 것이 의존한다면, 믿음의 강도(强度: intensity)가 변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전체 생물학적 기능도 변한다.

도박에서 우리가 수용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하는 승률에 의하여 한 가지 명제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믿음의 등급을 우리가 측정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주관론적인 확률이론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다. 내가 도박을 즐긴다면, 그리고 판돈이 크지 않다면 나는 아마도 어떤 승률도 수용할 것이다. 판돈이 매우 크다면 나는 도박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나의 절친한 친구의 목숨이 걸려있어서 내가 도박을 피할 수 없다면 나는 내 자신에게 가장 사소한 명제도 재확인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내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내가 나의 손 각각에 다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전적으로 확신한; 그러나 나의 절친한 친구의 생명이 이 명제의 진실성에 달렸다면, 나는 아마도 내가 나의 손가락들 중 하나나 다른 하나를 기적적으로 잃지 않았다는 것을 이중으로확신하기 위하여 호주머니 밖으로 나의 손을 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의 결말은 무엇인가? 그 결말은, ‘절대적 확실성은 제한하는 개념이라는 것 그리고 경험되거나 주관적인 확실성, 믿음의 등급들에 그리고 증거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상황에도 승패가 걸린 것의 중요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알기에 사소하게 참인 명제를 지지하는 증거도 아마도, 승패가 걸린 것이 충분히 중요하다면, 근본적으로 수정될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확실성들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도 향상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확실성은 믿음의 척도가 아니다 단도직입적인 의미에서. 오히려 확실성은, 불안정한 상황에 상대적인 믿음의 척도이다; 이유인즉 내가 행동하고 있는 일반적인 상황의 시급성에는 많은 양상들이 있어서 내가 한 가지 양상으로부터 다른 양상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완벽한 확실성에는 최대한이나 극한이라는 특징이 없다. 훨씬 더 안전한 확실성이 항상 있을 수 있다.

세계 3에 있는 타당하고 간단한 증거들과 별도로, 객관적 확실성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세계 2 안에서의 확실성은 항상, 증거에 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동하고 있는 문제 상황의 심각성과 같은 많은 다른 것들에 (혹은 아마도 단지 근심걱정) 의존하는 근소한a 믿음의 힘인 근소한a 경험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행동거부가 본질적으로 행동에 해당하는 많은 상황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음이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항상 행동을 해야 하고 우리는 항상 불완전한 확실성을 토대로 (이유인즉 완벽한 확실성과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토대를 두고 행동하고 있는 증거는 가장 성급한 검토 이후에 수용된다; 그리고 훌륭한 과학의 특징인 경쟁하는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은,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완벽하게 만족하는 종류의 것을 멀리 초월한다 (통상적으로).

(과학은 본질적으로 비판적인 또한 일상생활보다 더 추측성이고 자체를 덜 확신하는데,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우리의 배경지식의 한 부분이었을 것을 문제의 수준으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리한 과학적 사상가가 우리의 논증들에서 착오들을 발견

 

a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a shade of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색조로 번역되어 있다.

하지 않을 단계에 우리가 언제가 도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a: 아무도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그리하여 아무도 배제하거나 포함시키려고 시도하지 못했을 가능성들.

객관적 지식의 관점에서, 그리하여 모든 이론들은 추측성으로 남는다. 실제 생활의 관점에서, 우리가 토대로 삼아 행동하고 확실한 것으로서 간주하는 데 길들여진 어떤 것보다 모든 이론들은 훨씬 더 잘 토론되고 비판되고 시험될 것이다.

모든 객관적인 지식은 객관적으로 추측성이라는 주장과, 우리가 그 지식 중 많은 지식을 실제적으로 확실한 것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외적으로 매우 자격을 갖춘b 의미에서 확실한 것으로서 또한 수용한다는 사실 사이에는 충돌이 없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부단히 우리의 생명을 맡기는 많은 이론들보다 (바닥은 함몰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우리는 독사에게 물리지 않을 것이다 같은) 훨씬 더 잘 시험된 것으로서.

이론들은 참이거나 허위이며 단순히 도구들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들은 물론 도구들이도 하다; 보고된 시험들을 포함하여 이론에 대하여 보고된 비판적 토론에 비추어 이론에 관하여 우리가 결정을 하고 싶을 때 개인적으로 나와 당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실천과학이나 응용과학을 위한. 우리가 이 시험들의 결과들에 관한 보고서들을 받아서 혹시 시험들의 한 가지 혹은 다른 한 가지 시험을 반복한다면, 우리는 이 보고서들과 결과들을 우리의 개인적인 주관적 신념들을 형성하는 데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인 믿음들을 우리가 믿는 확실성의 등급을 결정하는 데 이용할 것이다. (이것이, 이전의 원리[the principle of transference]가 작동하는 것이 설명될 수 있을 터인 한 가지 방식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지식을 우리의 개인적인 주관적 믿음 형성에 사용한다; 그리고 개인적인 주관적 믿음들이 어떤 의미에서 항상 비합리적으로서 기술될 수 있을지라도, 이 객관적인 지식의 사용으로 인하여 여기서 합리성에 대한 흄적인[Humean] 갈등이 필요하지 않음이 밝혀진다.)

 

23. 과학의 방법

 

과학이 나아가는 자기-수정 방법으로서 내가 간주하는 것을 나는 매우 자주 기술했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매우 간략하게 소개할 수 있다: 과학의 방법은 대담한 추측들과 그 추측들을 반증하는 독창적이고도 엄격한 시도들이다.

대담한 추측은 커다란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바, 그 이론에 의하여 대체될 이론보다 아무튼 더 커다란 내용을 지닌 이론이다.

우리의 추측들이 대담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과학의 목표와 진리 접근방식에 관하여 언급한 것으로부터 즉각적으로 귀결된다: 대담함, 즉 커다란 내용은 커다란 진리 내용과 연결된다; 이 이유 때문에, 허위 내용은 처음에 무시될 수 있다.

그러나 진리 내용에서의 증가는 본질적으로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서의 증가를 보증하기 충분하지 않다; 내용에서의 증가가 순전히 논리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진리 내용은 내용에서의 증가와 비례하여 증가하기 때문에, 과학적 논쟁에 그리고 특히 경험적 시험들에 남겨진 유일한 분야는, 허위 내용이 또한 증가했는가 혹은 증가하지 않았는가 이다. 그리하여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대한 우리의 경쟁적인 탐구는, 특히 경험적 관점에서, 허위 내용에 대한 경쟁적 비교로 변한다 (어떤 사람들이 역설로 간주하는 사실). (윈스턴 처칠이 과거에 표현한 바와 같이) 전쟁들은 승리는 게 아니라 항상 패배한다는 것이 과학에서도 또한 성립하는 것처럼 보인다.a (1974년에 추가됨: 지금은 위 주석 20b 비교하라.)

우리의 이론이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을c 우리는 결코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우리가 지닌 최고의 이론에서 허위 내용을 찾는 것이다. 우리의 이론을 반박하려고 노력함에 의하여 우리는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닌 모든 객관적 지식과 모든 독창성에 비추어 이론을 엄격하게 시험하려고 노력함에 의하여. 이론이 이 시험들 모두를 통과할지라도 그 이론이 허위일 것은 물론 항상 가능하다; 이것은 우리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탐구에 의해서 참작된다. 그러나 이론이 이 시험들 모두를 통과한다면 우리의 이론에는, 선행 이론보다 더 큰 진리 내용이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더 큰 허위 내용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할 충분한 이유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선행 이론이 반박된 분야들에서 우리가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seems as if it holds in science also that (as Winston Churchill once put it) wars are never won but always lost인데 as if 다음에는 가정법 동사를 써서 holdsheld로 표현되어야 한다. 문법적 오류인데 이 문장은 현재 사실을 반대로 상상하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as if로 표현하지 않고 직설법으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n.20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20절로 번역되어 있다.

c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is not los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사라지지 않았다 것을으로 번역되어 있다.

새로운 이론을 반박하는 데 실패한다면, 새로운 이론이 옛 이론보다 진리에 대한 더 나은 근사치라는 추측에 대한 객관적 이유들 중 한 가지 이유로서 우리는 이것을 주장할 수 있다.

 

24. 비판적 토론, 합리적 선호 그리고 우리의 선택들과 예측들에 대한

분석성의 문제

 

이런 방식으로 보여서, 과학적 이론들을 시험하기는 그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한 부분이다; 혹은 우리가 언급할 것과 같이, 그 시험하기는 그 이론들에 대한 합리적 토론의 한 부분인데 이유인즉 이런 맥락에서 비판적보다 합리적에 대한 더 훌륭한 동의어를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판적 토론은, 어떤 이론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충분한 이유를 결코 확립할 수 없다; 비판적 토론은 지식에 대한 우리의 주장을 결코 정당화할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운이 좋다면a, 다음 주장에 대하여 충분한 이유들을 확립할 수 있다:

이 이론은 현재 완벽한 비판적 토론과 엄격하고 독창적인 시험하기에 비추어 단연코 최고의 이론으로 (가장 강력한 이론, 가장 잘 시험된 이론) 보인다; 그래서 그 이론은 경쟁하는 이론들 가운데서 진리에 가장 근접한 이론으로 보인다.’

간단히 표현하면: 우리는 어떤 이론을 합리적으로 결코 정당화할 수 없지만 다시 말해서, 이론이 지닌 진리를 알고 있다는 주장 우리에게 운이 있다면a 우리는 경쟁하는 이론들의 집합에서 한 가지 이론에 대한 선호를 당분간 합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토론의 현재 상태와 관련하여. 그리고 우리의 정당화는, 이론이 참이라는 주장은 아닐지라도, 토론의 이 단계에서 그 이론이 지금까지 제시된 여하한 경쟁하는 이론보다 진리에 대한 더 훌륭한 근사치라는 모든 징표가 있다는 주장일 수 있다.

 

이제 두 가지 경쟁하는 가설들인 h h 를 고찰하자. d 에 의하여 시간 t에서의 이 가설들에 대한 토론 상태의, 물론 관련된 실험적 및 다른 관찰성 결과들을 포함하여, 어떤 기술을 약칭하자.

 

(1) c(h , d ) < c(h , d )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if we are lucky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각각 다행히도다행스럽게도로 번역되어 있다.

 

의하여, 토론 d 에 비춘 h 입증 등급h 의 입증 등급보다 열등하다는 서술을 표시하자. 그리고 주장 (1)이 어떤 종류인지 질문하자.

사실상 c(h , d )가 시간 t에 따라서 변한다는 것과 생각만큼 빠르게a 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면, (1)은 다소 불확실한 주장이다. 많은 경우들에서, (1)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은 단지 견해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적인상황들을 가정하자. 안정된 결과들을 그리고 특히 모든

증거성 요소들에 대한 동의를 낳은 길어진 토론을 가정하고, 어떤 상당한 기간 동안 t와 동시에 의견의 변화가 없다고 가정하자.

그런 상황 하에서, d 의 증거성 요소들이 물론 경험적인 반면, 서술 (1)

d 가 충분히 명시적이라면 논리적이거나 (여러분이 그 용어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분석적일 수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c(h , d )가 부정이라면 이것은 특히 분명한데 왜냐하면 증거가 h 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시간 t에서 토론으로 동의된 사항이, c(h , d )가 긍정인 반면, 증거는 h 을 반박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례: h 을 케플러의 이론이라고 그리고 h 를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라고 생각하라. 케플러의 이론은 시간 t에서 반박된 것으로서 동의될 것이고 (뉴튼의 섭동들[perturbations]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시간 t에서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된다고 동의될 것이다. d 가 충분히 명시적이어서 이 모든 것을 수반한다면,

 

(1) c(h , d ) < c(h , d )

 

어떤 특정되지 않은b 부정 숫자가 어떤 특정되지 않은b 긍정 숫자보다 더 작다는 것에 해당하고, 이것은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으로서 기술될 서술의 종류이다.

물론 다른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d ‘1910512일에 열린 토론의 상태와 같은 명칭일 따름이라면. 그러나 두 가지 알려진 규모들의 비교 결과가 분석적이었다고 우리가 말할 터와 꼭 마찬가지로, 두 가지 입증 등급들의 비교 결과가 충분히 잘 알려진다면 분석적일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비교 결과가 충분히 잘 알려진다는 조건으로만 그 결과가 합리적 선호의 근거라고 언급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1)이 성립한다는 조건으로만 h h 보다 합리적으로 선호될 수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a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as fast as though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즉시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문 unspecified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설명된 의미에서 h h 보다 합리적으로 선호될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더 살펴보자: 우리는, 우리의 이론적 예측들을 이용하는 실제적 결정들뿐만 아니라 그 예측들을 h 보다는 h 에 근거시킬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보기에 단독직입적이고 다소 가치가 없다a. 그러나 그것은 다음 이유들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1)이 분석적이라면, h 보다는 h 를 선호하는 결정 또한 분석적이고 그리하여 h 보다 h 의 선호로부터는 새로운 종합적 예측들이 나올 수 없다.

나는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다음이 내가 보기에 나의 입증 이론에 반대하여 새먼(Salmon)교수에 의하여 처음에 개진된 비판을 요약한다: 기술된 모든 단계들이 분석적이거나 그렇다면 종합적인 과학적 추측들이 있을 리가 없거나; 아니면 종합적인 과학적 예측들이 있다 그렇다면 몇 가지 단계들은 분석적일 리가 없고 틀림없이 진정으로 종합적이거나 확장적이고 그리하여 귀납적이다.

그 논증이, 나의 견해들에 대한 비판으로서 타당하지 않음을 나는 밝히려고 노력하겠다: h 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와 같이 종합적b이어서 모든 (항진명제가 아닌[non-tautological]) 추측들이 부등식 (1)로부터 보다는 h 로부터 도출된다. 이것은 충분히 그 비판에 답변한다. 왜 우리가 h 보다는 h 를 선호하는지의 문제는 d 에 대한 언급에 의하여 답변될 수 있는데 d 는 충분히 구체적이라면 또한 분석적이 아니다.

우리의 h 선택을 야기한 동기들로 인하여 h 의 종합적 특징이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동기들은 평범한 심리학적 동기들과 대조적으로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선호들이다. 이것이,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명제들이 그 선호들에서 역할을 하는 이유이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여러분은 그 동기들을 분석적으로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h 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이 분석적 동기들로 인하여 h 분석적은 말할 것도 없고c 결코 이 되지 않는다; 그 동기들은 기껏해야, h 가 시간 t에서 경쟁하는 가설들 중에서 가장 박진적(迫眞的: truthlike) 가설이라고 추측하는 데 대한 논리적으로 비결정적인 이유들이다.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은 rather trivial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오히려 일상적인으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한구 번역본의 분석적은 종합적의 오역이다.

c 역주: 원문 표현은 to say nothing of ‘analytic’인데 이힌구 번역본에는 분석적이기는 하나로 번역되어 있다.

 

25. 과학: 비판과 창조성을 통한 지식의 성장

 

나는 과학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들 중 한 가지 창조물을

본다. 그것은, 기술적이고 논증적인 언어의 출현에 혹은 글쓰기의 발명에 비교될 수 있는 단계이다. 그것은, 우리의 설명적 신화들(myths)이 의식적이고 일관적인 비판에 노출되는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신화들(myths)을 만들어내라고 도전을 받는 단계이다. (그것은, 돌연변이 가능성들의 유형들이 제거를 통한 진화의 대상이 되었을 때인 생명 시작의 초기 시대에서의 추측성 단계에 비교될 수 있다.)

비판보다 오래 전에 지식의 유전암호에 포함된 지식의 성장이 있었다. 언어로 인하여 설명적 신화들(myths)의 창조와 돌연변이가 가능했고, 이것은 문자언어에 의하여 더욱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폭력적인 생존투쟁에서 비폭력적인 합리적 비판에 의하여 오류 제거를 대체한 것은, 그리고 우리가 비개인적인 세계 3의 논증들에 의하여 살해와 (세계 1) 위협을 (세계 2) 대체하도록 한 것은 과학뿐a이다.

귀납에 관한 추후 생각

 

26. 인과와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문제

 

지금까지 심지어 귀납그 단어나 주장되는 현상 언급하지 않고도 나는 인식론에 대한 그리고 지식의 성장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과학에서 사용되는 방법들에 대한 개요를 제시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 귀납은 정신적 혼란 상태이고, 귀납의 문제는 부정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도직입적인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귀납은 인식론에서 혹은 과학의 방법 및 지식의 성장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서 (1934b) 나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칸트를 추종하여 우리가 귀납의 문제를 흄(Hume)의 문제로 지칭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구획설정의 문제를 칸트의 문제로 지칭할 것이다.’ 내가 알기에 이 글귀는, 귀납의 문제가 (Hume)의 문제로 지칭된 최초의 것이었다: 칸트 자신은, 내가 방금 인용된 글귀에서 말하는 듯이 보이는 것과 반대로 귀납의 문제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사건은 이랬다. 칸트는 원래 (Hume)의 문제라는 (‘Das Hume’sche Problem’) 명칭을 인과(causation)의 인식론적 위상이라는 문제를 위하여 도입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종합명제들이 선험적으로 타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체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그 명칭을 일반화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인과의 원리를 선험적으로 타당한 종합원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르게 나아갔다. 인과의 문제를 보는 흄(Hume) 자신의 방식을 나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서 간주했다. 그 방식은 주로 그가 말하는 옹호될 수 없는 경험론적 심리학에 정신의 양동이 이론에 대한 그의 해석본으로 그 해석본에 있는 주관론적이고 심리학주의적인 내용이, 객관적 지식론에 대한 공적으로서 내가 중요하다고 알던 것을 제시하지 않았던 근거했다. 그러나 이 희소한 주관론적 공적들 한 가운데로 빨려 들어가서, 객관적 지식론을 위하여 무한한 가치를 지닌 보석으로서 내가 간주한 한 가지 공적을 나는 발견했다: 귀납이 타당한 논증이나 추론에 대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터이라는 주장에 대한 간단하고 단도직입적이고 논리적인 반박.

귀납의 부당성에 대한 이 흄(Hume)의 논증은 동시에, 인과적 연계의 존재에 대한 그의 반증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그 논증의 위상으로서 그 논증이 매우 적절하지도 않고 타당하지도 않은 것을 나는 발견했다.a

그리하여 나에게는, 칸트가 (Hume)의 문제로 지칭한 것인 인과의 문제가 두 가지로 분리된다: 인과적 문제(내가 그 문제와 관련하여 칸트 및 흄[Hume] 모두에게 동의하지 않았던), (Hume)의 논리에 관한 한 그 문제에 관하여 흄(Hume)에게 내가 완전히 동의했던 귀납의 문제. (귀납의 문제에 대한 심리학적 면이 또한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는 물론 흄[Hume]에게 동의하지 않았다.)

나의 다음 단계는 칸트의 문제 상황을 더 세밀하게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그의 선험적 종합원리들 가운데서 인과의 원리가 (그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아니라 그가 그 원리를 사용한 방식이었음을 나는 발견했다a; 이유인즉 그는 그 원리를 귀납의 원리로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귀납은 무한회귀(無限回歸: an infinite regress)를 야기하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흄(Hume)은 밝혔다. 이제 칸트의 분석에 (그리고 선험적으로 타당한 종합원리들에 대한 나의 거부에) 비추어 나는 다음 정식화에 이르렀다: 귀납은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나 선험론을 야기하기 때문에 부당하다.

이것이, 나의 저서 탐구의 논리(L.d.F.)의 논증을 내가 시작한 공식이었다. 그리고 그 공식으로 인하여 나는 전체 논쟁의 논리적 핵심을 귀납의 문제 (Hume)의 문제로 이름을 붙여서 이 이름을 칸트에게 귀속시켰는데d 칸트는 인과의 (동시에 인과의 일반화) 문제를 (Hume)의 문제로 지칭했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개괄적으로나마 더 상세하게 토론해야 한다고 느낀다.

내가 제안하는 바, (Hume)은 상식적인 사람이다. 그의 저서 인성론(Treatise)에서 그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는 확신하는 상식적 실재론자이다. 실재와 관련하여 그를 회의적으로 만들어 급진적 형태의 관념론으로 중립적 일원론’ (마흐[Mach]와 러셀에 의하여 지칭되었던 바와 같이) 모는 것은 그의 반쪽이자 그의 상식적 지식론인 정신에 관한 그의 형태의 양동이 이론일 뿐이다.b (Hume), 아마도 로크와 버클리(Berkeley)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실재론적 상식으로써 시작하는 철학자의 모범이지만 자신의 상식적 지식론에 의하여 정상궤도를 벗어나 관념론적 철학이 되고 그 철학이 그의 정신을 절반을 쪼갤지라도 그는 그 철학이 합리적으로 불가피하다고 판단한다; 감각론적 경험론을 터무니없는 관념론으로 몰고 가는 것인 한 명의 철학자만이 수용할 수 있을 터인 것은 상식적 실재론과 상식적 지식론 사이에서의 정신분열증이다c; 그러나 흄(Hume)처럼 합리적이지는 않은 사람이다.

이 정신분열증은 유명한 다음 구절에서 흄(Hume)에 의하여 매우 분명하게 표현된다:

회의적 의심이 저 주제들에 대한 심오하고 강력한 숙고로부터 자연스럽게 [= 상식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그 의심에 반대해서든 맞추어서든 우리의 숙고들을 멀리 가져갈수록 그 의심은 항상 증가한다. 신중하지 못하고 주의 깊지

 

a, b, c 역주: 이 문장들에서도 it was/is ~ which의 강조구문이 쓰였는데 it was/is ~ that 강조구문의 오류다.

d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attributing this name to Kan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이 이름은

칸트가 명명한 것이지만으로 번역되어 있다.

못할 때만 우리에게 해결책이 제공될 수 있다a.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신중하지 못함과 주의 깊지 못함에 전적으로 의존한다a; 그리고 현재 순간에 독자의 의견이 무엇이든, 한 시간 후에 외부 및 내부 세계 모두가 있다고 독자가 설득될 것을 당연히 여긴다a;...’

그러나 흄(Hume), 자신의 지식론이 철학적으로 더 심오하고 더 참된 지식론임은 확립했다고 완전히 확신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방대한 구절들에서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오류 반대하여 그가 논증하는 인성론(Treatise)으로부터 다음을 나는 인용한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에게 신체의 외부 존재를 확신시키기 위하여 감각들 외에 다른 기능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추론될 것이다. 그러나 이 추론을 막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다음 세 가지 고찰들을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을 따름이다. 먼저, 합당하게 말하여b 우리가 우리의 사지와 다른 부분들을 생각할 때 감각들에 의하여 들어오는 것은 우리가 감지하는 우리의 신체가 아니라 특정 인상들(impressions)인데 그 인상들은 감각들에 의하여 들어온다; 그리하여 실재적이고 신체적인 존재를 이 인상들(impressions)에게 혹은 그 인상들의 대상들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우리가 현재 조사하는 것만큼 설명하기가 어려운 정신의 작용이다. 두 번째, 소리들과 맛들(tastes)과 냄새들은 일반적으로 정신에 의하여 지속되는 독립적 특징들로서 간주될지라도 확대에서는 어떤 존재도 없는 것으로 보이어서 결론적으로 신체에 외부적으로 위치한 것으로서 감각들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들에게 한 가지 위치를 귀속시키는 이유는 나중에 고찰될 것이다. 세 번째, 대부분의 합리적 철학자들에 의하여 인정되는 바와 같이 심지어 우리의 시각도 즉각적이고 특정 추론 및 경험 없이 우리에게 거리나 외부성(outness)(말하자면) 알려주지 않는다.

 

이것은 순수한 양동이 이론이다: 우리의 지식은, ‘감각들에 의하여 들어오는우리의 지각들이나 인상들(impressions)’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지식이 되자마자, 틀림없이 우리 내부에 있게 되어 거리나 외부성(externality)이 있을 리 없다.

(물론, 이 철학적 심오함은 모두 오류이다. 우리가 상식의 첫 번째 부분으로부터인 실재론으로부터 시작하자마다, 우리가 외부 세계의 신호들을 해독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감각기관들이 장착된 동물들임을 우리는 발견한다. 우리는 실제로 협력하는 우리의 전체 외부신체를 사용하여 놀라울 정도로 잘 이렇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흄(Hume)의 정신분열증과, 정신에 대한 양동이 이론에 의하여 그의 견해에서 펼쳐지는 압도적 역할을 간략하게 개괄했다. 이제 나는 이 배경에 반대하여 그의 인과성 이론을 설명하게 된다.

이 이론은 복잡하고 일관성과는 동떨어져서 나는 그 이론의 한 가지 측면만 강조하겠다.

(Hume)은 인과(causation)(a) 사건들 사이의 관계로서, (b) ‘필연적인 연관(NECESSARY CONNEXION)’으로서 ([Hume]이 표시한 대문자)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 필연적인 연관의 본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대상을 모든 측면들로 다시 회전시킬 때’ (그는 말한다) 나는 ‘... 인접성과 승계b를 제외하어 어떤 관계들도 발견하지 못한다;a 필연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감각적 근거가 없다: 그 개념은 근거 없다.

관찰 가능한, 그 개념에 가장 가까운 것은 규칙적인 승계(regular succession)b이다. 그러나 두 가지 사건들의 규칙적인 승계가b 필연적이라면, 그 승계는b 관찰되는 사례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관찰되지 않는 사례들 사이에서도 또한 틀림없이 발생할 터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귀납의 논리적 문제가 인과(causation)에 대한 흄(Hume)의 주관론적 토론인 필연성이라는 개념의 근원이나 근거에 대한 그의 양동이-이론적 탐구에 들어오는 방식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탐구를 전적으로 잘못 생각된 것으로서 간주한다; 그러나 나는, 귀납의 논리적 문제([Hume]은 그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다) 대한 그의 정식화와 처리를 거의 결점이 없는 보석으로서 간주한다. 나는 특징적인 글귀들 중 한 가지 글귀를 인용한다:

본질적으로 고찰되어 그 대상을 넘어 결론을 내리는 데 대한 한 가지 이유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대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대상들의 빈번하거나 부단한 접속을 관찰한 이후에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대상들을 넘어서는 어떤 대상에 관하여 추론을 도출할 이유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라는 두 가지 원칙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한 번 완벽하게 설득되게 하라;...’ (Hume)이 우리에게 설득시키고자 노력하는 이 두 가지 원칙들귀납의 문제에 대한 그의 부정적 해결책을 담고 있다. 그 원칙들은 (그리고 많은 유사한 글귀들) 더 이상 원인이나 결과를 혹은 필연적인 연관을 언급하지 않는다. 나의 판단으로 그 원칙들은 양동이의 심리학적 진흙에 파묻힌 논리적 보석들이다. 그리고 이 근본적이 발견에 관하여 흄(Hume)을 기리기 위하여, 나는 칸트의 용어인 (Hume)의 문제의 의미를 약간 바꾸어 그 의미를 인과의 문제라기보다는 귀납의 문제에 부여했다.

 

이런 의미에서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논리적 문제는, 아무리 많을지라도 관찰된 경우들로부터 관찰되지 않은 경우들을 추론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의 문제이다; 혹은 아무리 많을지라도 알려진’ (수용된) 서술들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수용되지 않은) 서술들을 추론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지. 이 문제에 대한 흄(Hume)의 답변은 분명히 부정이다; 그리고 그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추론이 연관의 필연성에 대해서라기보다는 단지 관찰되지 않은 연관의 개연성에 대해서라할지라도 그 답변을 부정으로 남는다. 개연성까지의 이 확대는 인성론(Treatise)에서 정식화된다: ‘사물들에 대한 이 설명에 따라서, 그 설명은 모든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개연성은 저 대상들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전제 위에 수립되는데 그 대상들은 우리가 경험을 했고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대상들이다; 그리하여 이 전제가 개연성으로부터 출현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a

개연론에 근거한b 귀납에 반대하는 논증은, 알려질 것과 같이, 순전히 형식적이다; 그리고 그 논증은, 내가 1959년에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에서 인용한 흄(Hume)초록(抄錄: Abstract)c 한 구절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필연성인 결론들에 대한 n을 우리가 추론하려고 노력하든 아니면 그 결론들의 개연성p만을 추론하려고 노력하든 흄(Hume)은 귀납적 추론의 타당성에 반대하는 그의 추론이 동일함을 밝힌다.d (문자 np는 흄[Hume]의 논증에서 서로 대체될 수 있는 변수들일 터이다.)

(Hume)이 완전히 해결했다고 (그의 해결책이 부정일지라도) 내가 주장하는 귀납에 대한 이 논리적 문제에 추가하여, 몇몇 사람들이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문제라고 부르는 귀납에 대한 또 다른 논리적 문제가 있다.a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이다: 귀납적 추론들이 (적어도 개연론에 근거한b 추론들) 타당하거나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밝혀질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내가 (Hume)의 문제로 지칭한 것에 대한 긍정적 해결책의 존재를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정신적 혼동이다; 그러나 흄(Hume)은 긍정적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c

 

궁극적으로 우리는 귀납에 대한 흄(Hume)심리학적 문제를 경험한다. 그 문제는 이렇게 표현될 것이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과 완벽하게 합리적인 사람들 또한 귀납의 타당성을 신뢰하는가? (Hume)의 답변은, 이 저서의 첫 번째 장에 대한 좌우명에서 러셀이 암시하는 답변이다: 연상(聯想: association)이라는d 심리학적 기제(機制: mechanism)로 인하여 흄(Hume)과 러셀은 관습과 습관에 의하여, 과거에 발생한 것은 미래에 발생할 것이라고 강제로 믿게 된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유용한 기제(機制: mechanism)이지만 아마도 우리는 그 기제(機制: mechanism)가 없다면 살 수 없을 터이다 그 기제(機制: mechanism)에는 여하한 합리적 근거도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비합리적인 동물일 뿐만 아니라, 실용적 지식을 포함하여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우리의 저 부분도 인간의 지식 전혀 합리적이 아니다.

그리하여 귀납의 논리적 문제에 대한 흄(Hume)의 부정적 해결책과 심리학적 문제에 대한 그의 긍정적 해결책 사이의 충돌로 인하여 경험론과 합리주의 모두가 파괴되었다.

 

27.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논리적 문제가 그의 인과 문제보다 더 깊은

이유

 

더 깊은 문제인 질문에 관하여 쉽게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을 터이다: (Hume)의 인과 문제, 혹은 내가 귀납에 대한 그의 문제라고 지칭한 것.

인과의 문제가 긍정적으로 해결된다면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계의 존재를 우리가 밝힐 수 있다면 귀납의 문제 또한 해결될 터이고 게다가 긍정적으로 해결될 터이라고 우리는 논증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마도, 인과의 문제가 더 깊은 문제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반대로 논증한다: 귀납의 문제는 부정적으로 해결된다: 우리는 규칙성에 대한 믿음에 있는 진실성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규칙성들을 추측들로서, 즉 가설들로서 부단히 이용한다; 그리고 특정 추측들을 그 추측들의 경쟁 추측들 중 몇 가지보다 선호하는 것에 대하여 때때로 우리에게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

아무튼, 한 가지 추측에 비추어 우리는 흄(Hume)이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심지어 필연적인 인과적 연관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또한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추측으로부터 우리가 예측들을 연역하는 것을 허용하는 어떤 추측된 규칙성들과 몇 가지 초기조건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조건들을 (추측된) 원인으로 그리고 예측된 사건을 (추측된) 결과로 지칭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논리적 필연성에 의하여 연결하는 추측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오랫동안 탐구된 (추측성) 필연적인 연관이다. (전체는, 내가 탐구의 논리[L.d.F.], 12절에서 지칭한 바와 같이, ‘인과적 설명으로 지칭될 수 있다.)

이것은, 인과성의 문제에 대한 흄(Hume)의 부정적 해결책을 통해서보다는 귀납의 문제에 대한 그의 부정적 해결책을 통하여 우리가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전자(前者) 문제의 배후에놓여있는 문제인 더 깊은문제로서 후자(後者) 문제를 우리는 기술할 수 있다.

 

28. 칸트의 개입: 객관적 지식

 

칸트는, 귀납의 문제에 대한 흄(Hume)의 부정적 해결책이 뉴튼 역학의 토대들에 있는 합리성을 파괴함을 깨달았다. 칸트는 교육을 받은 모든 자신의 동시대인들처럼, 뉴튼 이론의 진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Hume)의 분석으로 인하여 뉴튼 이론은 관습이나 습관으로 전혀 수용될 수 없는 입장 환원되었다.

(Hume), 귀납이 무한회귀(無限回歸: infinite regress)에 의하여 위협을 받는다는 것을 밝혔다. 칸트는, (Hume)이 자신의 경험론적 독단론을 사용하여 선험적으로 타당한 인과성의 원리가 (더 낫게: 귀납의 원리) 있을 가능성을 고찰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칸트가 유지했던 (내가 탐구의 원리[L.d..F.]1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리고 버트런드 러셀이 칸트 이후에 유지한 입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는 흄(Hume)의 비합리주의로부터 인간의 합리성을 구조하려고 노력했다.

칸트는 모든 문장들의 논리적 형태에 따라서 그 문장들을 분석적 문장들과 종합적 문장들로 분류했는데 분석적 문장들은 논리만의 도움을 받아서 참이나 허위로서 결정될 수 있는 문장들이다. 칸트는 나아가 그 문장들이 지닌 선험적 혹은 경험적 타당성에 따라서 그 문장들을 분류했다: 진리나 허위에 대한 그 문장들의 주장에 경험적 뒷받침이 필요하지 않은지 (선험적) 아니면 경험적 뒷받침이 필요한지에 (경험적) 따라서.

정의(定義: definition)에 의하여 모든 분석명제들은 선험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 표에 도달한다.

 

 

명제들의 분류

보기:

According to basis of claim to truth or falsity: 진리나 허위에 대한

주장의 근거에 따라서

a priori: 선험적, a posteriori: 경험적

according to logical form: 논리적 형태에 따라서

analytic: 분석적, synthetic: 종합적

(화살표는 ‘...이라면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분석적이라면 선험적.)

 

표는, 분석성이 선험적 특징을 암시하고 그리하여 경험적 특징은 종합성을 암시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다음 문제는 미결정 상태로 남는다: 선험적으로 타당할 수 있을 터인 종합명제들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칸트는 있다고 말하고 산술, 기하학, 인과성의 원리를 (그리고 뉴튼 물리학의 어떤 주요 부분) 종합적으로서 그리고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주장했다.

이로 인하여 칸트에게는 흄(Hume)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옹호될 수 있는 이론이었는가? 인과성 원리의 진리는 (예를 들어) 어떻게 선험적으로 확립될 수 있을 터인가?

여기서 칸트는 자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도입했다: 자체의 법칙들을 발명하여 감각적 수렁에 부과하여 자연의 질서를 창조한 것은 인간의 지성이었다.a

이것은 대담한 이론이었다. 그러나 뉴튼 역학이 선험적으로 타당하지 않고 훌륭한 가설임이 추측 이해되자마자 그 이론은 몰락했다.

 

상식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칸트의 개념 중 상당히 많은b 부분이 유지될 수 있을 터이다. 자연의 법칙들은 우리가 발명한 것, 선험적으로 타당하지는 않을지라도 유전적으로 선험적으로 동물이 만든 것이고 인간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그 법칙들은 자연에 부과하려고 노력한다. 매우 자주, 우리는 실패하고 우리의 그릇된 추측들로써 사멸한다.c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진리에 충분히 가깝게 다가와서 우리의 추측들을 사용하여 생존한다. 그리고 인간의 수준에서, 기술적(descriptive) 및 논증적 언어를 우리가 사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추측들을 체계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이것이 과학의 방법이다.

칸트가 지식론에서 주관론을 완벽하게 교체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 해결책을 향하여 칸트에 의하여 수행된 위대한 공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가장 위대한 단계는d, 과학적 이론들과 서술들과 명제들과 원리들에 대한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was ~ which의 강조구문을 쓰였는데 it was ~ that 강조구문의 오류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quite a bit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아주 조금이나마로 번역되어 있다.

c 역주: 이 문장은 이한구 번역본에서 누락되었다.

d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step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진보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논증들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토론이었는데 거기서 그의 선배들은 주로 감각들이나 인상들(impressions)이나 믿음들에 대하여 여전히 이야기했다.

 

29. (Hume)의 역설 해결: 합리성의 복원

 

내가 귀납의 문제를 (Hume)의 문제로 지칭한 구절을 서술한 이래, 그 용어사용법은 보편적으로 채택되었다. 나는 나보다 앞서 귀납의 문제를 (Hume)의 문제로 지칭했는지를 발견하려는 시도로 문헌을 뒤졌지만 허사였다. 내가 발견할 수 있었던 모든 사례들은, 다소 신중하게 나의 저서를 읽은 저술가들까지 (러셀이나 폰 브리크트[von Wright]같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물론 나는 더 초기의 어떤 저술가를 간과했을지도 모르고, 한 가지 문제에 대한 명칭을 도입하는 데 앞섰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을 있을 수 없을 터이다.a 전혀 다른 문제를 (Hume)의 문제로 지칭하는 것이 유행했다는b 것과, 이후 저술가들 몇몇이 나에게 귀납에 대한 흄(Hume)의 문제는 사실상 내가 그렇게 지칭한 문제와 다르다고 말하려고 했다는b 이유만으로 나는 그 문제를 언급한다.

분명히 아마도 이 명칭에 의하여 지칭될 다양한 문제들이 있고, 나는 두 가지 무리들을 언급하겠다:

무리 A: 어떻게 우리는 귀납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무리 B: 귀납은 조금이라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귀납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무리 B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라는 것이 즉각 알려질 것이다: 분명히 부정적인 답변을 제시함에 의하여 무리 B가 해결된다면 무리 A는 질문은 발생할 수 없다.

내가 이런 의미에서 무리 B 질문에 해결했다고 나는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귀납에 관한 흄(Hume)의 문제를 그 문제의 더 깊은 형태에서 해결했다고 나는 주장한다. 나의 주장이 무리 A를 부정적일지라도 완벽하게 내가 해결했다는 주장인 반면, 몇몇 철학자들이 무리 A만을 귀납에 관한 흄(Hume)의 문제로 지칭하여 귀납에 관한 흄(Hume)의 문제가 해결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나에게 잘못 귀속시켰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명시적으로 말한다.

귀납에 관한 흄(Hume)의 문제는 두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다:

(a) 단칭 증거로부터 규칙의 진리나 일반화나 적어도 일반화의 개연적 진리를 확실하게 혹은 적어도 개연적으로 확립했다는 주장의 타당성에 대한 정당화의 문제;

(b) 귀납이 반복과 연계된다는 (그리고 반복이 연상들의 강화와 연계된다는) 주장.

사람들은 물론 귀납을 사람들이 원한 어떤 것으로든 지칭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나의 비판과 지식 성장 이론을 나의 귀납론으로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명료성에 기여하는 바가 없고 혼란에 많이 기여할 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두 가지 요소들 중: 귀납이 타당한 추론인지라는 다시 말해서, 귀납이 귀납된 명제의 진리를 뒷받침하여 타당한 주장들을 만들어내는지 문제 (a)는 내가 보기에 흄(Hume)의 문제의 그리고 그의 부정적 (논리적) 답변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복과 연상의 요소인 (b)는 내가 보기에 흄(Hume)의 문제의 특징이어서 그로 인하여 그의 답변의 긍정적 (심리학적) 부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흄(Hume)(a)(b)에 의하여 제기된 질문들을 두 가지 본질적으로 다른 방식들로 답변했기 때문이다.

(a’) 귀납은 추론으로서 전혀 타당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과거에 관한 서술들로부터 (어떤 증거의 과거 반복들과 같은) 일반화로의 추론을 뒷받침할 터인 논리적 논증은 조금도 없다.

(b’) 귀납의 논리적 타당성 결여에도 불구하고, 귀납은 실제 생활에서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한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반복에 의존함에 의하여 살아간다. 반복에 의하여 강화되는 연상은 우리가 지닌 지성의 주요 기제(機制: mechanism)인데 그 기제機制: mechanism)에 의하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행동한다.

그리하여 여기에 역설이 있다. 심지어 우리가 지닌 지성도 합리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습관은 합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는데, 우리의 사고들과 우리의 행동들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힘이다.

이로 인하여 모든 시대의 가장 합리적인 사상가들 중 한 명의 사상가인 흄(Hume)은 합리주의를 포기하고 사람은 이성이 부여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맹목적인 습관의 산물로서 바라보게 되었다.

러셀에 따르면 흄(Hume)의 이 역설은 현대 인간의 정신분열증의 원인이다. 이것에서 러셀이 옳던 옳지 않던, 나는 내가 그 역설을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그 역설의 해결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그리하여 흄(Hume)에 의하여 무효인 것으로서 증명된 귀납의 원리에 반대로 추론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또한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귀납에 따라서 라기 보다는 이성에 따라서. 우리는 반복이나 습관에 근거하여 정말로 행동하지 않고, 우리에게 충분한 합리적 이유들이 있는 이론들이라고 우리가 본 우리의 이론들 중 가장 시험이 잘 된 이론들에 근거하여 행동한다; 물론 그 이론들이 참이라고 믿기 위한 충분한 이유들이 아니라, 진리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탐구의 관점에서 그 이론들이 최고로 이용 가능하다진리에 대한 최고의 근사치들인 경쟁하는 이론들 가운데서 최고 이론들 믿기 위한 충분한 이유들. (Hume)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우리가 이성에 따라서 행동하는가 혹은 아닌가? 그리고 나의 답변은: 우리는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합리적이라면 우리는 이성에 따라 행동한다.

이로써 흄(Hume)의 역설은 해결된다. 그는, 타당한 귀납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논리적 비판에서 옳았다. 그가 틀렸던 곳은, 우리가 습관을 토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그리고 습관은 반복만의 결과라는 그의 믿음에서인 그의 연상 심리학에서였다.

(Hume)의 역설에 대한 이 해결로 인하여 물론, 우리가 완벽하게 합리적인 생명체들이라고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 해결로 인하여 단지 언급되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 구성에서a 합리성과 실제적 행동 사이에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b 우리의 실제적 행동들에 대한 합리적 기준은 흔히 지식의 경계선들에서c 적용되는 기준에 멀리 뒤처진다고 부언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부분

 

a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constitution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원어와 함께 기질상으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of cours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더구나로 번역되어 있다.

c 역주: 이 표현의 원문은 the frontiers of knowledg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지식의 미개척 영역으로 번역되어 있다.

 

적으로 우리들 대부분이 지식의 경계선들에서c 무슨 일이 발생하는 지를 이해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대체된 이론들에 근거하여 행동한다. 그러나 이 언급들이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30. 귀납의 문제와 연결된 혼란들

 

(Hume) 자신은 귀납의 문제를, 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의 문제와 혼동했다; 그리고 칸트는 인과적 법칙의 선험적 타당성이라는 문제에서 형이상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중 한 가지 문제를 보았다. 그러나 흄(Hume)에게 귀납에 대한 순전히 논리적 문제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을 정식화한 명예가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내가 그에게 그 정식화로써 그를 기리는 최초의 사람이었음을 나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는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저 사례들은 우리가 경험한 저 사례들을 닮는다 [닮을 것 같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고 서술한다.

그 정식화는, (Hume)의 사고의 명료성을 그렇게 자주 혼란시키는 인과적 필연성의 문제로부터 더 분명하게 분리될 수 없을 터이다.a 그 정식화에는 또한, 과거에서 현재로의 추론이라는 혼란스러운 요소가 전혀 없다. 전제되는 유일한 것은 특정 사례들의 진리에 관한 경험적 증거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고, 이것으로 인하여 다른 사례들에서 유사한 경험들에 따라서b (과거에서든 아니면 미래에서든) 결론을 내리거나 추론할 자격이 우리에게 없다고 주장된다.

그리하여 이것이, 자체의 모든 순수성에서, 내가 귀납에 대한 흄(Hume)[논리적] 문제로 처음 지칭한 것이다.

(Hume)의 답변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아무리 조건들이 유사할지라도, 한 가지 경우에서 또 다른 경우로의 추론을 허용하는 논증이나 이유는 없다; 그리고 나는 이 점에서 그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반복이나 습관을 토대로 우리가 실제로 그런 추론을 한다고 흄(Hume)이 생각할 때 그가 틀렸다고 믿는다. 그가 말하는 심리학은 원시적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가 실제로 하는 것은, 결론으로 도약하는 (흔히 로렌츠[Lorentz]각인[imprint]’의 형태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매달리고 우리가 그 가설들을 수정할 수 없다면 우리가 사멸할지도 모르는 완전히 비결정적인 가설들로의 도약인데, 특히 인간적 수준에서 그 가설들이 서술의 형태로 체외적으로(體外的으로: extrasomatically) 정식화되어 비판에 부쳐진다면 그 가설들의 수정은 가능하다.

습관과 반복에 의하여 인상을 받는 비합리적 경향이 우리에 있다는 주장은, 우리가 사멸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수정해야 할 대담한 가설들을 시험하려는 충동이 우리에게 있다는 주장과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前者)는 전형적으로 라마르크의(Lamarckian) 훈육 과정을 기술한다; 후자(後者)는 다윈적 선택 절차를 기술한다. 후자(後者)는 자체 내부에 비합리적인 것이 없는 듯이 보이는 반면, 전자(前者)는 흄(Hume)이 말한 바와 같이 비합리적이다.

 

31. 귀납을 정당화하는 그릇된 문제로부터 무엇이 남는가?

 

오류인 무리 A 문제는 귀납을 정당화하는 문제 자연의 균일성에 의하여 인상을 받는 사람들에 의하여 제기된다: 태양은 매일 (24시간 중에 한 번 혹은 약 9만 맥박횟수들 중에 한 번) 뜬다는 사실에 의하여 인상을 받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동물들은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그리고 빵은 영양을 공급한다는 흄(Hume)의 유명한 보기에 의하여. 그러나 세 가지 보기들 모두는 그 보기들이 원래 의미되었던 형태에서 반박된다.

태양은 매일 뜬다에는 당신에 어디에 가든 태양은 매일 뜬다라고 말하려는 의도가 있다. 이것이 그 말의 원래 의미였다는 것은, 북극권을 가로질러서 얼어붙은 바다와 자정의 태양을 기술한 알려진 최초의 여행자였던 마르세유의 피티아스(Pytheas of Marseilles)가 여러 세기 동안 거짓말쟁이의 전형이 되었다는 그리고 여행자들의 이야기들이라는a 용어가 그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에 의하여 밝혀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죽는 모든 사람들의 불가피한 운명을, 생성되는 모든 것 그리고 특히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틀림없이 소멸한다는 사실로부터 (지금쯤 체외 시험관에서 닭의 심장을 50년 이상 동안 뛰게 했던) 생물학자들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더 이상 전혀 수용되지 않는 주장 도출했다. 그리고 빵이 영양을 공급한다는 흄(Hume)이 말하는 보기는, 통상적인 방식으로 구워진 빵이 맥각 중독 발생 때문에 실제로 프랑스의 한 마을을 전멸시켰을 때, 비극적으로 반박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인가? 그렇다. 태양이 내일 런던a 위로 떠오를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상식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은 사실일 뿐이다 (철학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그 사실을 막을 수백만의 가능성들이 있다. 그 사실을 신뢰하는 데 대하여 긍정적인 이유들을 우리에게 제공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흄 학파(Humeans)이건b 아니건, 태양이 계속 떠오를 것을 희망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이 희망은 필연적인 행동을 위하여, 삶을 위하여 필연적인 희망이다. 그러나 심지어 필연적인 희망도, 우리가 믿음을 갖게 할지라도, 객관적인 지식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자들에 의하여 귀납적 규칙들의 (그리고 신뢰가능성의) 표준 사례들로서 여전히 이용되는 저 규칙들은, 진리에 대한 상당히 충분한 근사치로 보일지라도, 허위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위 귀납의 신뢰불가능성을 밝히는 것일 따름이다. 반복에 의한 진정한 귀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귀납처럼 보이는 것은, 잘 시험되어 발 입증되고 이성과 상식에 합치되는 가설적 추론이다. 이유인즉 입증의 방법이 반박이 발생할 것 같은 곳에서 이론을 반박하려는 진지한 시도 있기 때문이다. 이 시도가 실패한다면, 그 이론은 합리적 근거들을 토대로 진리에 대한 훌륭한 근사치라고 아무튼 선행 이론보다 나은 이론 추측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전성과 같은 것을 얻을 수 없을까? 귀납에서, 반복이 무수히 많은 경우들에서 우리는 안전성을 얻을 수 없을까?

답변은 아니요 이다. (이것이 흄[Hume]이 말한 것이다.) 상식적 안전성을 우리는 쉽게 얻을 반복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엄격한 시험에 의하여 수 있다. 태양이 내일 런던a 위로 떠오를 것이라고, 혹은 빵이 당분간 계속해서 나에게 영양분을 공급할지라도 나는 곧 죽을 것이라고 나는 누구만큼이나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이론가로서, 다른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

 

a 역주: 이한구 번역본에는 서울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한구 번역본에는 흄적이든으로 번역되어 있다.

. 태양이 유럽 도처에서 매일 떠오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박테리아는 항상 죽는 것이 아니라 분열한다는 것 그리고 빵과 물과 공기 및 우리의 가장 평범하고 신뢰 가능한 환경들이 치명적인 독소들을 포함할 (그리고 곧 포함할 것이라고 우려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심지어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왜 우리는 우리의 이론-만들기에서 성공하는가? 답변: 우리는 지금까지 성공했고 내일 실패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틀림없이 성공할 것임을 증명하는 모든 논증은 너무 많은 것을 증명할 터이다.a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생명을 위한 조건들과 우리의 지식이라는 계획으로써 성공할 조건들이 현재 호의적으로 보이는 우주의 한 부분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인가를b 안다면 이 우주의 거의 다른 모든 곳에서 생명을 위한 그리고 지식을 위한 조건들이 고도로 비우호적이라는 것을 우리가 또한 안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우주론이 우주는 거의 도처에서 완전히 비어있고 비어있지 않은 곳에서는 거의 도처에서 날씨가 너무 뜨겁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c

그리고 마차들이 런던에서 많은 세기들 동안 목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있었어도 그 마차들은 사라져서 자동차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겉으로 보이는 자연의 균일성은 전혀d 신뢰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의 법칙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의 세계에서 변하지 않은 몇 가지 추상적인 연관사항들이 (이 연관사항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기껏해야 추측한다는 것을 우리가 수용한다면 전적으로 하찮은) 있어서 우리가 그 연관사항들을 지연의 법칙들로 부른다고 말하는 것에 위험스럽게 근접한다.

 

32. 역동적 회의론: (Hume)과의 대면

 

여기서 옹호되는 입장은, 현대에 적어도 종교개혁 이래 회의론으로 지칭되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유인즉 현대에 회의론은 지식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비관적인 이론으로서 기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제시된 견해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Every argument showing that we must be successful would prove

far too much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우리가 틀림없이 성공한 것임을 보여주는 모든 논증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증명할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anything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모든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c 역주: 우주의 도처가 너무 뜨겁다는 저자의 주장은 너무 온도가 낮다는 주장도 있어 타당하지

않다.

d 역주: 이 단어의 원문은 quite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누락되었다.

지식 성장의 그리하여 지식의 가능성을 희망차게 고수한다. 그 견해는 다만

상식이 지식에 본질적인 것으로서 전제한 확실성이라는 특성을 제거하고, 확실

성과 지식 모두가 상식적 이론이 전제한 것과 다름을 밝힌다. 우리는 제한이

없는 지식 성장의 가능성을 신뢰하는 사람을 회의론자로 기술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키케로(Cicero)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 같은 몇몇 고전적 회의론자들은 여기서 옹호되는 입장에서 동떨어지지 않았다. ‘회의론(Scepsis)비판적 탐구로서 잘 번역될 수 있을 (비록 그렇게 번역되지 않을지라도) 터이고, ‘역동적 회의론강력한a 비판적 탐구와 혹은 저 문제에 관하여 희망 자체에는 완벽하게 합리적인 토대가 없을지라도 심지어 희망찬 비판적 탐구와 동일시될 수 있을 터이다. 회의론은, 아무것도 알려질 수 없는 곳에서 알려는 소망과 틀림없이 관련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보기에 우리의 출발점으로 상식 더하기 비판적 논증 돌아가서 상식은 실재론아마도 과학적 실재론에서 너무 동떨어지지 않은 것 포함한다는 그리고 실재론에 반대하는 모든 알려진 논증들은 비판적으로 옹호될 수 없는 것으로 혹은 더 정확하게, 상식의 가장 취약한 부분의 옹호될 수 없는 심각한 오류들 판명된다는 결과를 우리 자신에게 회상시키는 것이 다소 중요하다: 지식에 관한 상식론의 옹호될 수 없는 심각한 오류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실재론을 포기할 여하한 이유도 없다.

그러나 나의 표현 희망찬 회의론이라는 상황에서, 특히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처한 상황과 비교될 때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Hume)은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1) 귀납은 (다시 말해서, 반복에 의한 귀납) 합리적으로 완벽하게 부당하다.

(2)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행동들에서 (그리하여 우리의 믿음에서) 완전히 혼란스럽지는 않은 어떤 실재의 존재에 정말로 의존한다.

(3) 우리의 의존 중 이 의존은, (1)을 고려하여, 돌이킬 수 없이 비합리적이다.

(4)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다.

나는 흄(Hume)의 주장 (1)(2)를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비합리성 주장인 주장 (3)을 거부한다. (2)(1)에 근거시키려고 내가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포기할 이유가 우리에게 없는 지금까지 비판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상식의 일부로서 실재론을 내가 주장하기 때문에 나는 주장 (3)을 거부할 수 있다. (Hume), 우리가 (2)알고 있을다시 말해서, (2)를 신뢰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만 (2)를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그릇된 지식에 관한 상식론 때문에; 그리고 그는, 그런 믿음이 사실상 귀납에 (그가 비합리적으로서 올바르게 배척한) 근거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충분한 이유가 있는 흄적인 지식이 존재할 뿐만 아니다; 객관적인 추측성 지식 (그리고 위 21절에서 토론된 그 지식과 유사한 주관적 지식) 또한 존재한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견해의 위상은, (Hume)이 안전한 것으로서 수용한 즉각적a 지각들이나 인상들(impressions)의 위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 위상은 추측성 지식이다; 그리고 그 위상은 시행과 오류-제거의 방법에 의하여 우리가 지닌 유기적 도구의 한 부분이 된다. 그리하여 (2)(1)에 근거시킬, 혹은 (2)를 자체에 반대하는 옹호될 수 있는 비판적 논증들의 결여 외의 긍정적인 뒷받침이 필요한 것으로 볼 여하한 이유도 없다.

요컨대 흄(Hume)이 그랬던 바와 같이 귀납에서 실재론으로 논증할 필요가 우리에게 없다; 실재론의 추측에서 비합리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그 추측에 반대하는 일반적인 논증들은, 그 논증들의 타당성을 흄(Hume)이 신뢰했는데 그의 그릇된 상식적 인식론의 한 부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게 흄(Hume)의 주장 (3)(4)를 배척한다.

(3)(4)에 관하여 추가 요점이 마련될 것이다. 우리는 희망에 차서 실재론을 신뢰하고, 이 희망참은 합리적이 아닌데 이유인즉 과학적 실재론에는 우리가 모든 생명체의 파멸을 예측하도록 만드는 적어도 몇 가지 논증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도 흄(Hume)의 주장 (3)(4)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우리가 살아있다면 희망하는 것이 비이성적이 아니고 그리고 행동과 결정들이 부단히 우리에게 강요되기 때문이다.

 

33. 우발적 사건들의 비개연성으로부터 나온 논증의 분석

 

(22절에서) 내가 개략적으로 지적한 바와 같이, ‘합리적 믿음의 척도로서의 주관적 개연성b은 내가 보기에, 지식론에 기여할 훌륭한 것이 없는 오류이다.

그러나 단어들에 의존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개연성이라는 단어가 확률계산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면 내가 여기서 훌륭한’ (혹은 최고의’) 추측으로 지칭한 것을 개연적인’ (혹은 알려진 추측들 중에서 가장 개연적인) 추측으로 지칭하는 것에 나는 물론 반대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나의 견해로 확률계산의 의미에서의 확률에는 가설의 훌륭함과 관련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설명된 바와 같이, 가설이 지닌 개연성만이 가설이 지닌 내용에 대한 그리하여 가설이 지닌 훌륭함의 한 양상에 대한 척도로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확률계산과 연결될 수 있는, 희미하게 타당할 듯한 핵심을 지닌 옛 논증이 있다.

우리에게 가설 H가 있다고 그리고 이 가설은 논리적으로 매우 비개연적이라고 전제하자; 다시 말해서, 그 가설에는 매우 커다란 내용이 있어서 지금까지 완전히 관계가 끊어진 몇 가지 분야들에서 주장들을 편다. (보기: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은 뉴튼의 행성 운동들뿐만 아니라, 수성 궤도에서의 작은 편차와 무거운 물체를 스쳐지나가는 광선의 통로에 대한 영향 그리고 무거운 중력장들에서 방출되는 스펙트럼선들의 적색편이를 또한 예측했다.) 이 모든 예측들이 성공적으로 시험된다면, 다음 논증이 직관적으로 온전하고 합당한 듯이 보인다.

(1) 이론이 참이 아니라면 이론이 완전히 비개연적인 이 예측들을 예언한다는 것은 우발적인 사건일 리가 없다. 이것으로부터 우발적인 사건들의 축적에서 기인하는 이 성공들에 대한 비개연성이 있는 만큼 이론이 지닌 진리에 대한 커다란 개연성이 있다고 논증된다.

이 논증 (1)이 이런 형태로 완벽하게 타당한 것으로서 수용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증에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나는 정말로 믿는다. 그 논증을 더 세밀하게 조사하자.

논증(1)이 타당하다고 전제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참인 이론의 확률1 빼기 우연적으로만 검증된 확률로서 계산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예측된 효과들이 논리적으로 매우 비개연적이라면 예를 들어, 그 효과들에 대한 수량이 매우 정확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예측되기 때문에 매우 작은 이 숫자들의 곱들(products)1에서 연역될 숫자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이 계산 방식에 의하여 우리는 훌륭한 추측으로서 1에 근접한 확률을 틀림없이 얻는다.

그 논증은 처음에 설득적으로 들리지만 분명히 부당하다. 뉴튼의 이론 (N)을 생각하라. 그 이론은 많은 정확한 예측들을 수행해서 문제의 논증에 따르면 뉴튼의 이론은 1에 근접한 확률을 얻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른 (E)는 훨씬 더 큰 확률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확률계산에 의하여 우리는 다음을 얻는다 (‘또는대신에 ‘v’를 서술하여):

 

p(N v E) = p(N) + p(E) p(NE);

 

그리고 이론들은 양립 불가능해서 p(NE) = 0이기 때문에 우리는

 

p(N v E) = p(N) + p(E) 2

 

얻는데 (다시 말해서, 2에 매우 가까운), 이것은 불합리하다.

문제에 대한 해답은, 논증 (1)이 겉으로만 참으로 보이는 추론이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다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 비개연적인 관찰된 결과에 대한 훌륭한 일치는 우연도 아니고 이론이 지닌 진리 때문도 아니며 다만 이론이 지닌 진리유사성(truthlikeness) 때문이다.

이 논증 (2)로 인하여, 양립 불가능한 많은 이론들이 오직 우연에 의해서 일치한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매우 비개연적일 터인 많은 정확한 요점들에서 그 이론들이 일치할 수 있는 이유가 설명될 터이다.

그리하여 논증 (1)은 다음과 같이 다소 더 올바르게 표현될 수 있다.

(1')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과 같은 것이 있어서 이론과 사실 사이에서의 우연히 매우 비개연적인 일치는, 이론에는 (상대적으로) 높은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 있다는 지표로서 해석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비개연적인 요점들에서의 더 나은 일치는 더 큰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의 표시로서 해석될 것이다.

이 논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귀납론으로 발전하는 것을 내가 싫어해야 할지라도, 이 논증에 반대하여 많은 것이 언급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입증 등급은 (이론이 통과한 시험들의 엄격성에 대한 척도와 같은 것인) 그 이론이 지닌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대한 척도로서만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전적으로 분명히 하고 싶다. 기껏해야, 이론에 대한 입증 등급은, 시간 t에서 나서 나타날 때,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의 지표일 (내가 최초로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때인 1960년 및 1963년에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예를 들어 추측과 논박[Conjectures and Refutations], 234쪽 이하 참조.) 따름이다. 이론이 엄격하게 시험된 등급에 대하여 나는 입증(corroboration)’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그 용어는 주로 비교의 목적들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EN보다 더 엄격하게 시험된다. 이론에 대한 입증 등급에는 항상 시간적 지표가 있다: 그 등급은 이론이 시간 t에서 충분히 시험된 것으로 보이는 등급이다. 이것은 이론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대한 척도가 아닐지라도, 이론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 시간 t에서 또 다른 이론과 비교되어 나타나는 등급의 표시로서 생각될 수 있다. 그리하여 입증 등급은, 두 가지 이론들이 당시 진리에 대한 근사치로서 보이는 것과 관련하여 토론의 특정 단계에서 그 이론들 사이에서의 선호에 대한 길잡이이다. 그러나 입증 등급은 제시된 이론들 중 한 가지 이론이 토론에 비추어 진리에 더 근접한 이론으로 보인다고 우리에게 알려줄 따름이다.

 

34. 요약: 상식에 대한 비판적 철학

 

비판적 철학에 대한 필요를 우리가 알자마자 출발점에 대한 문제가 떠오른다. 어디서 우리는 출발할까? 그 질문은 중요한 듯이 보이는데 이유인즉 초기 오류가 가장 심각한 결과들을 낳을 위험이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출발점에 관하여 대부분의 고전 철학자들과 현대 철학자들이 지지하는 견해들과a 내가 여기서 상식에 대한 냉정한 철학으로서 제안한 견해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나는 주요 차이점들을 도표 형태로 요약하려고 여기서 노력하겠다.

 

이전 철학자들 나의 비판적 견해

 

(1) 우리의 출발점 선택은 결정적으로 (1') 우리의 출발점 선택은 다른

중요하다: 우리는 바로 처음부터 오류에 모든 것처럼 비판되어 수정될 수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a 역주: 이 부분의 원문 표현은 the views held by most classical and contemporary philosophers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동시대의 매우 전통적인 철학자들의 견해들과로 번역되어 있다.

(2) 우리의 출발점은, 가능하면, 참이고 (2') 이와 같은 안전한 출발점을

확실해야 한다. 발견할 방법이 없다.

(3) 우리의 출발점은 자아의 개인적 (3') 우리의 출발점은 주관론이나

경험에서나 (주관론) 행태에 대한 객관론에서 발견될 수 없기

순수한 기술에서 (객관론) 발견될 수 때문에 주관론과 객관론 모두로써

있다. 출발하여 두 가지 모두를 비판

하는 것이 매우 좋을 것이다.

 

(4) 이런 종류의 주관론이나 이런 (4') 상식이 포함하는 견해들이

종류의 객관론을 수용함에서, 아무리 모호할지라도 상식으로

철학자들은 지식에 대한 상식론의 출발하지만 상식의 이름으로

한 가지 형태를 상식의 가장 주장될 모든 것에 대하여

가장 취약한 요점을 형성한다고 비판적이 되는 것이 권유될 수

언급될 이론 무비판적으로 있다.

수용했다.

 

(5) 주관론자들이 수용한 이론은, (5') 다소 비판적으로 숙고하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은 이론

지식은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관찰적 함유이고 (거의) 모든 지식은

이나 지각적 경험들에 관해서이다. 또한 특징에서 추측성이라고

(지각적 경험들의 확실성에 대한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강조에서 주관론자와 객관론자는

의견이 일치한다.)

 

(6) 우리가 지닌 분명하고 두드러진 (6') 모든 지식이 이론-함유이기에

감각들이나 감각 자료들처럼 지식이 지식은 모두 모래 위에 건설된다;

토대로 삼아 건설될 수 있는 몇 가지 그러나 비판적으로 더 깊이

분명한a 사실들이 있다: 직접적이거나 파헤침에 의하여 지식의 토대들은

즉각적인 경험들은 허위일 리가 없다. 개선될 수 있다; 그리고 주장되는

자료들을 당연시하지 않음에

의하여

(7) 이것이 지식에 대한 상식론의 (7') 지식에 대한 상식론이

명백한 결과이다. 실패하는 곳은 여기이다: 그것은

지식이 지닌 간접적이고 추측성인

특징을 간과한다. 심지어 우리가

지닌 감각기관들도 (그 기관들이

전달하는 것들에 대한 해석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한

생명체들에게서 단지 가끔이라

할지라도, 이론-함유여서 오류에

노출된다.

 

(8) 그러나 지식에 대한 상식론은 (8') 심지어 실재론과 실재론에

항상 실재론의 형태로서 시작하는데 있는 (생물학적) 지식론이 두 가지

항상 인식론적 관념론이나 조작주의라는 추측들임을 우리는 인정한다;

곤경으로 끝난다. 그리고 실재론이 관념론보다 훨씬

더 나은 추측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9) 상식은 실재론에서 시작하여 (9') 지식에 대한 상식론은 자기-

주관론으로 끝나서 스스로 반증된다. 모순적으로 반증된다; 그러나

(이것이 칸트의 견해의 한 부분이라고 이것은 세상에 대한 상식론에게

언급될 것이다.)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실재론에게.

 

상식론을 필수적인 전체로서 실재론 더하기 상식적 인식론 유지하려는 시도는 붕괴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출발점에 관하여 회의적이 되는 방식에 의하여 상식론은 적어도 두 부분들로 실재론과 인식론 나뉘고 후자(後者)는 배척되어 전자(前者)를 이용하는 객관적 이론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다.a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us, by the method of being sceptical about one’s starting-point, the commonsense theory is broken into at least two parts realism and epistemology and the latter can be rejected and replaced by an objective theory which utilizes the former인데 이한구 번역본에는 따라서 출발점에 관해 의심하는 방법에 의해 상식이론은 적어도 두 부분, 즉 실재론과 인식론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기각되고 후자는 전자를 활용하는 객관적인 이론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번역되어 있다.

 

 

객관적 지식 2. 상식의 두 가지 얼굴. 상식적 실재론을 찬성하는 그리고 상식적 지식론을 반대하는 논증.hwp

객관적 지식 2. 상식의 두 가지 얼굴. 상식적 실재론을 찬성하는 그리고 상식적 지식론을 반대하는 논증.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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